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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익단신 원문보기 글쓴이: 守護韓國
필자는 최근 새벽 2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잘살고 못사는게 문제가 아니고
죽느냐?,사느냐? 生死 문제가 걸려서 그런가?
필자는 6.25를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휴전 이후에 태어 났다.
6.25의 참상은 들어서, 그리고 사진으로 봐서 참혹하다는것을 알고 있다.
필자도 그럴진데 필자보다도 더 젊은 사람은
더 그것이 환상 속에서의 일 일수 있을것이다.
자유 월남의 패망이후 몇백 ,몇천명의 학자, 지식인, 공무원 이 처형 당했다는 것을
수기로, 사진으로 본 적이 있지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 '임병훈'님이 발굴해낸 "57년 전 지금 흥남부두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에게 피부로 우리의 위기를 가르쳐 주고 있는것 같다.
좌파가 득세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이 공산화 패망되면
우리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위기가 코앞에 있으니 편한 잠이 올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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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 전 지금 흥남부두에서 있었던 일들
『앗! 배가 한 척도 없다. 항구가 텅 비었다!』
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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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前夜
-부모·형제를 버리고 38명의 反共동지들을 뗏목에 싣고 마지막으로 敵地를 탈출하다
임 병 훈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내 고향 함흥
반룡산 기슭에 치마대, 구천막, 성천강이 흐르고 넓은 함흥평야가 있는, 그 옛날 李태조가 청운의 꿈을 키우던 곳, 여기가 내 고향 함흥이다. 서쪽에는 성천강, 동쪽에는 호련천, 제방둑을 건너가면 버드나무 고목이 있고, 여름에는 송어와 잉어가 올라오고 가을에는 연어가 올라오고 맑은 물이 흐르는 백사장이 수km나 되고, 드넓은 함흥평야가 펼쳐진 곳이, 꿈에도 못 잊을 내 고향 함흥이다. 부지런한 조상님 덕으로 청소년期를 구김 없이 보냈다.
1945년 8월15일, 일제치하에서 보국대로 끌려가 비행장에서 일하다 나는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이 들어오고 김일성(김성주)이 독재자 스탈린 대원수를 외치면서 들어왔다. 노동당, 인민군, 내무서가 생겼다. 청년들은 민청에 불려나가 사상교육을 매일 받았다. 스탈린 대원수님이 조국을 해방시켜 주고 김일성 장군이 독립운동을 하여 조국이 해방되었다고 매일 선전하였다. 같은 선전을 매일 왜 하느냐고 물으니 안일하고 편하면 사상적으로 나태해지니 그렇게 들볶는다는 것이었다.
대의원 선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한의 명칭이다.
1948년 8월25일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와 같다. 민청에서 불순분자가 있을지 모르니 선거투표장 경비를 서라고 한다. 검은 통, 흰 통이 있는데 黨(당)에서 내세운 후보를 찬성하면 흰 통 반대하면 검은 통에 표를 넣으라 한다. 후보는 단일후보였다.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른다.
선거는 시작되었다. 黨에서 시키는 대로 환자가 있으면 업어다 투표를 하게 했다. 물론 100% 다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였다. 투표는 오후에 일찍 끝났다. 처음 하는 선거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黨에서 나온 선전원들이 동무들 수고하였다며 카바이드 소주를 내어놓고 같이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黨이 무엇이고 후보는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무슨 대표를 뽑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말하였다. 선전원 동무, 왜 입후보자가 한 사람 뿐이냐고. 함흥에는 그 사람 말고 더 나은 사람 없느냐고 하니, 선전원이 이 동무 무슨 말 하는가 黨에서 시키면 시킨 대로 하면 되지 하고 나무란다.
옆에 있던 친구가 여럿이 나와 제일 우수한 사람을 뽑자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했다. 선전원은 이 동무들 진짜 반동이라고 한다. 반동이란 말에 화가 나서 나는 그의 뺨을 한 대 쳤다. 그러자 진짜 반동이라고 또 한다. 다시 친구가 뺨을 한 대 더 쳤다. 술좌석은 파하고 서먹서먹하게 되어 헤어졌다.
혹독한 고문
집으로 오는데 트럭이 한 대 우리 앞에 섰다. 군인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다발총을 들이대면서 꼼짝 말라고 소리질렀다. 손을 들라고 하여 손을 드니 앞좌석에서 장교가 나와서 반동분자 새끼들 하며 수갑을 채웠다. 차에 올려져 스페어 타이어 위에 앉히더니 수갑을 다시 채우는데 서로 손을 뒤로 하고 십자로 걸쳐서 채웠다. 어리둥절하였다.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뺨 한 대씩 둘이서 두 대 친 것, 그것이 이렇게 큰 죄인가.
이윽고 차는 함흥 내무서로 왔다. 주소, 성명, 연령 간단한 사항만 적고 2층으로 보내졌다. 정치보위부다. 그날은 어두워서 그랬는지 마루방에 그냥 밀어 넣었다. 다행히 수갑을 풀어주어, 둘은 마루 한복판에 있는 가마니 한 장에 머리를 얹고 잤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가을밤이 추워서 꼬부리고 잔 모양이다. 등이 뜨끔하다. 등을 걷어찬 모양이다. 이 새끼들 일어나 한다.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그날부터 30일간, 그 지긋지긋한 고문을 받았다. 누가 시켰으며 누가 주동자냐고… 엎어놓고 물푸레나무 도끼자루로 때린다. 퍽,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고문을 당하니 죽을 것 같았다. 고문을 하는 자도 지루한 모양이었다. 친구와 나를 세워놓고 교대로 뺨을 후려치란다. 조금만 살짝 쳐도 이 새끼 이렇게 하란 말이다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얼굴이 홱 돌아갔다. 몽둥이에 맞아 엉덩이는 터지고 발길에 채여 옆구리는 쑤시고 볼은 부어서 불독처럼 되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이, 운이 좋으면 두 덩이다. 속은 단무지 아니면 소금이었다. 낮에는 절대로 눕지 못한다. 앉아 있다가 움직이면 제일 고통이었다. 불러서 일어나면 터진 엉덩이에 달라붙은 옷이 떨어지면서 살도 떨어져 피가 허벅지를 따라 흘렀다. 참 표현하기 어렵다. 독방에 넣었다 합쳤다 하면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물을 조금 달라고 하니 오라고 한다. 따라 가니 어느 방으로 갔다. 인민군 중좌(중령)가 앉아 있다. 커다란 주전자에 큰 대접이 책상 위에 있다. 앉으라고 하여 앉으니 대접에 물을 따르면서 바른 대로 말하면 너만은 빼주겠다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려 하면서 물 대접이 날아왔다. 물 대접은 머리에 맞고 물은 머리에 뒤집어썼다. 지독한 놈 이 새끼 안되겠어 도로 쳐 넣어 하고 소리지른다. 도로 끌려가면서 머리와 얼굴에서 흐르는 물을 혀끝으로 핥아 적시니 그 맛을 이 세상 어느 음료수와 비하랴.
어느 날 건넌방이 요란하다. 어떤 청년이 붙잡혀 왔다. 낯이 익다. 우등생이었고 초등학교 한 해 후배다. 취조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으니 이남으로 가다가 붙잡힌 모양이었다. 그 사람도 맞는다. 내가 맞을 때는 만성이 되어 몰랐는데 그 사람의 윽, 탁, 아이구, 신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지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은 3일 있다가 어디론가 갔다.
해방이 되어 민주주의, 공산주의, 정치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붙잡혀 왔으니 기가 막힌다. 말 한 마디, 따귀 한 대 그것이 나의 죄 전부다. 나와 같이 들어간 친구의 兄이 市黨(시당) 간부였다. 그런데도 자기 동생에 대해 일체의 해명과 면회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공산당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빨리 죽었으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친구의 兄이 면회 왔다. 지옥에서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더 취조를 해보아도 단순행동으로 본 모양이다. 그날 아침에 취조를 하던 보위부 중좌가 나와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말로 金동지가 면회 온다고 말했다. 아침에 그 兄이 왔다. 보위부 중좌와 다른 장교가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한다. 그 兄이 눈 지시로 나가라고 하니 네 하고 나간다. 그 兄은 이놈들 때가 어느 땐데 함부로 노느냐고 나지막하게 야단친다. 그 형은 우리가 정치는 모르고 아무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가서 국가에 이바지 많이 하라고 소리친다.
이윽고 경찰서 잡범 대기실로 내려왔다. 몰골이 험해졌는지 모두들 쳐다본다. 무슨 죄로 들어갔느냐고 묻는다. 대답을 못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친구 형의 당부다. 시말서, 자서서 또 무엇, 세 가지를 써오라고 한다. 내무서 앞 대서소에서 써다 주었다. 말 한 마디, 따귀 한 대… 5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여도 몸서리쳐진다. 그때 후유증으로 앉으면 꼭 기대앉는다. 허리도 구부러졌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이 자유의사를 말한 것이 왜 죄인가. 黨에서 후보를 세우면 그대로 밀 것이지 왜 선거는 하는가. 여러 사람이 競選(경선)하여 우수한 사람을 뽑자는 것이 왜 반동인가. 이것이 민주주의 공화국인가. 차라리 조선노동당공화국이라 하는 것이 더 솔직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존경은 있어도 개인숭배는 없다. 더구나 代를 이어 충성이라. 왕국이나 제국이 아니면 상상도 못한다. 밥 한 끼도 누구 덕으로 먹는다고들 하니 金日成은 王도 아니라 아예 神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도 장관도 잘못하면 국민에게 욕을 먹는다. 國政(국정)을 잘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퇴출당한다. 국민의 심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한스럽다. 왜 20세기 마지막 분단국이 내 조국인가. 내 동포, 내 부모, 내 형제… 따지고 보면 한 핏줄인데 형, 아우 하면서 서로 도우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잘사는 쪽이 못사는 쪽을 도와주려고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쌀을 싣고 갔는데 잘사는 쪽 표식(국기)을 달고 왔다고 입항을 거부하니 이거 어디 한 핏줄로 보겠는가. 또 표식을 떼면서까지 쌀을 준 것은 지금 생각하여도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모르겠다. 국민의 세금이다. 못사는 쪽이 잘사는 쪽에 대고 수 틀리면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공갈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끝까지 지킬 것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21세기 부모들에게 고한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대로 배운다는 것을. 당신이 부모한테 한 대로 자식이 당신에게 한다는 것을. 나는 소년기(초등학교) 시절 말썽꾸러기, 즉 문제아였다. 보통 2~3일에 한 번 싸우지 않으면 사고를 저질렀다. 별명이 「개모데」다. 싸우면 상대가 코피가 터지고 눈퉁이가 부었다. 아이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서로 치고 받다가 상대가 더 맞은 거다. 아이 어머니는 「개모데」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작대기로 나를 팬다. 보다 못한 우리 할머니는 그만하라고 하시면서 아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우리 자식 키우는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살자고 한다. 자네 자식이 앞으로 남을 때리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사내자식 키우는 사람은 도둑놈 못 나무라고 계집 키우는 사람은 잡년 못 나무란다 하시면서 우리 이웃끼리 서로들 도우면서 살자 한다.
아이 어머니는 예 하고 아이를 데리고 간다. 할머니는 갑자기 내 발등을 꽉 밟는다. 나는 아 하면서 할머니 왜 발을 밟느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아프니 하고 묻는다. 네 하고 답하니, 보아라 내가 네 발을 밟으니 아픈데 네게 맞은 아이는 얼마나 아프겠느냐고,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로 잘못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 사나이는 힘으로 살지 말고 의리로 살라고 하시며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여 주셨다.
한고조와 한신, 유현덕과 관우 장비 이태조와 퉁지란… 항상 나와 너 위치를 바꿔놓고 보라고 하셨다. 옳은 일에는 앞장서고 의로운 일이 아니면 하지 말라고… 一口二言(일구이언)은 二父之子(이부지자)니 약속과 맡은 일은 끝까지 지켜라. 세상은 더불어 산다. 독불장군은 없다. 할머님과 어머님의 영향이 컸다.
日帝(일제) 때는 못사는 사람과 거지가 많았다. 거지가 오면 드시고 갈 것인가 가지고 가겠냐고 물으신다. 먹는다고 하면 마루에 앉으라고 하시고 소반에다 차려준다. 비록 밥 한 그릇, 김치 시래기국이 전부지만, 빈부 차이는 있을망정 사람은 같다, 주는 사람의 예의와 행동에 따라 받는 사람은 왕의 진수성찬보다 낫다고 느낀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불교를 믿는 할머님과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세상은 더불어 산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하는 대로 아들 딸이 할 것이니까 조상 없는 후손은 없다.
명심하라, 위정자들이여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신차리기 바란다. 민주주의 나라에선 지도자가 바뀐다. 서로간에 나이야 많든 적든 피차 선후배다. 그러면 겨레와 국민을 위하여 희망찬 미래를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위정자다. 서로 비방하고 헐뜯지 마라. 겨레와 국민에게 하나도 좋을 것이 없다. 미래는 와도 과거는 오지 않는다. 지나간 세월은 역사에 묻어라. 수백년 내려온 당파싸움, 20세기와 함께 과거사에 묻어라.
위정자여 명심하라. 후세 역사는 말할 것이니 늦지 않았다. 다가올 미래를 올바르게 넘기자. 양심과 도덕적 자유, 영원한 자유민주주의를 민족의 이름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자. 법이 만인에게 평등한 나라, 법을 백성이 준수하는 나라를 만들라.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후손에게 떳떳한 양심과 이름을 남겨야 한다.
겨레여, 겨레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지 말자. 희망찬 21세기, 역사는 말할 것이다.
왜 6·25 전쟁은 일어났는가
列强(열강)의 꼭두각시 노름에 내 식구 내 겨레가 박살났다. 6·25가 터졌다. 국방군이 쳐들어와서 용감한 인민군이 반격하여 쳐내려간다고 아침 방송에서 들려온다. 봄부터 탱크와 야포가 계속 南으로 나아갔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큰 탱크와 야포를 보았다. 예감대로 전쟁은 터졌다. 마음이 착잡하다. 통일은 못 되고 동족끼리 죽고 죽여야 하니 마음이 아프다.
국방군이 그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강력한 미국,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큰소리는 어디로 갔나. 3일 만에 서울이 떨어지고 「용감한 인민군」은 승승장구 南으로 진격한다. 라디오 방송과 뉴스 벽보는 美 제국주의 앞잡이 李承晩 도당을 바다에 처넣는다고 한다. 민청 회의는 매일 열린다.
7월에 들어서 인민군 모집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원입대다. 나도 지원하였다. 그날 지원자는 5명이었다. 다음날 인민위원회로 오라고 하여 가니 나만 퇴짜다. 과거 8·25 선거 때 일로 나의 사상이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그 일이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라고. 그후 민청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서 지냈다.
첫 폭격이 시작되었다. 함흥 남쪽 연포 비행장이다. 다음은 철교, 공공시설이다.
B29 비행기는 매일 날아온다. 전선은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이승만 도당을 조금만 밀면 바다에 처넣는다고 빨리 군대로 나오라고 인민위원회와 군사동원부에서 재촉한다. 전쟁이 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그 즈음 나는 친구 한군과 같이 지냈다. 우리는 의논하였다. 너도 둘째아들이고 나도 같으니 우리 인민군대로 가자. 부모님의 시달림을 면하게 하자. 나와 한군은 인민위원회로 갔다. 黨 간부와 인민위원장이 반갑게 맞는다. 어디 갔었느냐고. 폭격을 피해 피난 갔었다고 하였다. 인민군에서 빨리 오란다.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퇴짜고 이제는 환영인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그네들이 밉다.
원산에는 인민군 해군 하사관을 모집한다고 포스터가 붙어 있다. 우리는 해군에 가자고 약속하였다. 우리는 물을 좋아하고 수영도 잘한다. 민물에서 서너 시간 헤엄칠 정도니까. 인솔자와 같이 함흥시청에 도착하니 어디서 왔는지 인산인해다. 대부분 시골청년들이다. 시청에 들어가자 인솔자는 갔다. 시청뒷 마당과 1,2층은 청년들로 꽉 찼다. 합격 심사장은 2층 강당이다.
아침 9시에 갔는데 오후 2시에야 우리 차례다. 장교가 묻는다. 아픈 데 있느냐고 몸에 부자유한 데 있느냐고. 우리는 아주 건강하다고 말했다. 열렬한 동무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군관에게 물었다. 군관(장교)동무,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도 체질과 취미에 맞게 하면 더 잘할 거라고. 무엇이냐고 군관이 묻는다. 우리는 해군에 가고파서 지원서를 냈다고 하였다. 그러냐고 하더니 뒤에 있는 높은 군관에게 상의하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불합격이 되면 다시 오라고 하면서 손을 벌리라고 한다. 왼손을 벌리니 둥근 도장을 손바닥에 찍어주면서 나가다 정문 접수처에서 공민증을 찾아가라고 한다. 뒷마당 수도 있는 데로 가서 한 손으로 땀을 씻고 나오니 그 많은 사람들 중 나오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다.
시내에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참 걷다보니 내무서원이 부른다. 어디서 오느냐고. 인민군에 지원하고 온다고 손바닥을 보이니 가라고 한다. 친척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어두워진 다음 집에 돌아왔다. 인민위원회와 동네에서는 한 군과 내가 인민군에 간 줄로 알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캄캄할 때 강과 습지를 지나 야산으로 올라갔다. 함흥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어두워질 때까지 거기서 지내기로 했다.
폭격 구경
날이 밝으면서 공습 사이렌이 들려온다. 조금 지나 비행기 폭음 소리와 함께 B29가 날아온다. 이제는 비행기의 기수와 움직임만 보아도 어디로 공격하고 폭격하는지 훤히 안다. 오늘은 심상치 않다. 비행기 편대가 너무 많다. 목표는 함흥이다. 우리는 빤히 쳐다본다. 비행기 앞배가 열리면서 시커먼 덩어리가 주르르 떨어진다. 고사포와 로켓포 알이 하늘에서 터진다. 목표는 함흥연대 본부다. 제1편대는 앞쪽, 제2편대는 뒤쪽, 다음 편대는 앞쪽. 이런 식으로 두 번 도니 함흥연대는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비행기는 가고 얼마가 지나서 시야가 트인다. 함흥연대가 보인다. 건물은 하나도 없고 굴뚝만 보인다. 어저께 저기에 끌려갔다면 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어저께 그 많은 청년들은 어찌 되었을까 몸서리친다. 그들은 무슨 죄가 있길래 이 전쟁의 제물이 되었는가. 나도 언젠가는 저 꼴이 되겠지.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제물이 되겠지, 나와 한군은 인민군에 가든지 모든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밤에 집에 오니 서로 얼굴을 보면서 무사하였구나 안도의 숨을 쉰다. 동네 여동생들이 삐라를 주워왔다. 낙동강이 터졌다. 벽보에 새겨진 화살표와 반대다. 화살표가 위로 향하고 있다.
나와 한군은 땅굴을 파고 숨었다. 이 전쟁을 피하고 보자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군이 아버지 생신이라 집에 갔다가 인민 위원장과 군사동원부 장교에게 붙잡혔다. 큰일이다. 이제는 이 피신처도 옮겨야 한다. 어디로 갈까 막막하다. 오후 좀 지나 한군이 왔다. 전신이 흙투성이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따돌리고 도망치는데 장교가 권총을 쏘니 탄알이 귀밑을 스쳐가더라고 한다. 논바닥을 세 시간 기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는 인민군에도 못가고 붙잡히면 죽는다. 진퇴양난이다. 다행인 것은 공습이 더 심해져 공습하는 동안에는 기관원들이 꼼짝 안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우리는 자유다. 비행기 機首(기수)와 움직임을 보면 어디를 공격하는지 안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연락이 되어 반공투쟁을 하기로 하고 동지들을 모았다. 시내 가까운 곳에만 수십명이 되었다. 수시로 연락하면서 동지들을 모았다. 참으로 많았다. 인천 상륙, 서울 탈환, 38선 돌파. 모든 것은 삐라와 남한 방송으로 알았다. 戰勢(전세)는 우리에게 유리하다. 국군이 원산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동지들이 모여서 함흥과 흥남을 전쟁에서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공산당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러려면 다량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인민군에게서 뺏은 다발총 몇 정과 장총 몇 정이 전부다. 나는 인민군 대검을 잘라서 만든 단검을 지니고 다녔다. 붙잡히면 자살용이다.
흥남工大가 있는 골짜기에 인민군 중화기 중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거기 사는 동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밀한 계획과 토의 끝에 습격하기로 하였다.
결사대 6명이다. 다른 데서 2명, 우리가 4명이다. 인민군들은 저녁 6시에 식사를 한다고 한다. 거기 사는 동지가 식사 때 소주 1말을 가지고 가서 인민군 동무들 수고한다고 하면서 한 잔씩 따라주고 나오면 우리가 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重機·輕機·다발총·수류탄…
나와 친구 김동지는 약속 장소에서 다른 동지들과 합쳤다. 자동차로 영대교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차는 더 못 간다고 한다.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10리는 될 것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서 농로와 밭이랑 사이로 갔다. 목적지 맞은편 능선에 도착한 때는 5시경이었다.
그때 골칫거리가 생겼다. 유엔군 함재기 4대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었다.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敵도 경계를 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가고 답답하다. 나와 김동지의 임무는 기관총 陣地의 보초를 제거하고 기관총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동지들은 식사하는 집 앞에 매복하고 있다가 술을 가지고 간 동지가 나오면 즉시 공격하기로 되어 있다.
이윽고 비행기는 갔다.
우리는 급히 산을 내려와 각자 행동을 개시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나와 김동지는 임무를 쉽게 처리하였다. 잠시 후 신호가 들린다. 총공격이다. 총쏘며 소리지른다. 인민군은 저항도 못하고 도망친다. 우리의 목적이 무기탈취니 도망가는 인민군은 내버려두라고 한다.
전투는 간단히 끝났다. 우리는 국군특수부대와 후속부대가 온다고 주민들은 3일만 참으라고 일러놓았다. 牛車 2대를 가져와 무기를 실었다. 수냉식 중기관총(막심) 6정, 원반식 경기관총 4정, 다발총, 장총, 수류탄, 탄통, 탄알… 두 수레가 꽉 찼다.
인민군 포로 한 명이 있었다. 직책을 물으니 중기관총 부사수라고 한다, 우리는 그제사 重機(중기)는 혼자 못 다룬다는 것을 알았다. 시험사격을 하여 보니 멋지게 나간다.
비가 내린다. 출발을 서둘렀다. 重機 1정과 탄통 몇 개를 牛車 맨 위에 실었다. 만약을 위해서다. 비를 맞으니 추웠다. 나는 인민군 바지를 주워 입었다. 새 것이다. 새로 무장도 하였다. 다발총, 예비탄창. 70발 총알 1통, 수류탄 2발, 단도 1개.
이윽고 출발이다. 비는 계속 내린다. 일행은 7명이 되었다. 인민군 포로 그 사람이 없으면 重機를 다루기 힘들다.
한참을 오니 흥남工大 앞이다. 목총에 철창을 꽂은 것을 든 경비원들이 인민군 동무들 수고합네다 한다. 우리도 동무들 수고하세요 하고 그냥 지나간다.
이윽고 함흥~흥남 간 대로에 왔다. 의논하였다. 적이 눈치채지 않는 한 공격하지 말라고. 나와 김, 윤동지 셋은 100m 정도 앞서 갔다(척후병).
얼마 가지 않아서 함흥 쪽에서 차가 1대 더 온다. 우리는 모르는 척 그냥 가기로 했다. 차는 지나갔다.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가 도로 돌아서 오는 것이었다. 한 번에 돌지 못해 라이트 불빛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이리로 돌아온다. 대장은 급히 중기를 내려놓고 馬夫는 길옆 집 뒤로 피신시키고 중기사격 준비를 하게 하고 우리는 길 옆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기가 쏘면 같이 쏘라고 한다.
그새 금방 자동차는 오고 있었다. 차에서는 우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기는 牛車에 가려 있고 우리는 길 옆바닥에 엎드렸다.
중기가 불을 뿜었다. 일제사격이었다. 거리는 60~70m다. 자동차는 뚝 멈추었다. 敵도 응사를 하여 왔다. 움직이는 물체가 어른거리더니 이내 반응이 없다.
순간이었다. 5분도 안되었다. 사격중지. 가 보라고 하여 엎드려서 가니 운전사는 핸들에 엎드리고 옆 장교는 권총을 뽑아 쥐고 차 문을 열고 쓰러져 있었다. 차 위에도 여러 명이 쓰러져 있었다. 대충 무기만 거두고 그곳을 떴다. 과연 중기의 힘이 크다 생각이 들었다.
드르륵 하면 그만인데…
나는 처음으로 총을 많이 쏘았다. 귀는 멍하고 화약 냄새는 코를 찌른다. 비는 소리없이 내리고 앞은 칠흑 같았다. 누구냐 하는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이미 우리는 인민군과 서로 총을 맞대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인민군 중위와 곰배정자다. 김동지가 동무들 어디 가는데 하고 물었다. 함흥지구 경무부(헌병)에 흥남철수를 지원하러 간다고 한다. 김동지가 얼른, 동무들 거짓말이지 도망병이지 하고 물으며 우리는 함흥지구 보위부(특무대)에서 이미 철수를 지시하고 온다고 하니, 음성이 작아지면서 아니라고 한다.
그 틈에 나는 뒤로 돌아가 총으로 장교의 등을 쿡 찔렀다. 김동지가 곰배정자에게 총구를 들이대면서 손들어 하니 도망병이 아니라면서 손을 든다. 총을 빼앗았다. 장교는 수류탄 2개뿐이다. 몸수색을 하니 푸른 남한돈이 한 뭉치가 나온다. 또 뒤지니 미끈하고 물신물신한 것이 나온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총상에 쓰는 붕대라고 한다(압박붕대). 인민군에도 이런 것이 있느냐고 물으니 미군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럼 이것은 우리 것이라고 말하니 깜짝 놀라면서 우리도 강제로 끌려 나왔으니 살려달라고 애원이다. 드르륵 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말이 통한다. 의사가 통한다. 저들도 부모형제가 있겠지. 당신들 철길을 넘어가면 동네가 있다, 평복으로 갈아입고 국군이 들어오면 고향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금방 죽을지 몰라도, 무장해제된 동족을 죽일 수는 없었다. 대장에게 보고하고 또 전진하였다. 오른쪽은 윤동지, 왼쪽은 김동지, 나는 행길 복판을 걸었다.
한참 가니 함흥농업학교 입구에 왔다. 왼쪽에 집이 몇 채 있고 오른쪽은 독채가 있다.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앞에서 불꽃이 확 튄다. 본능적으로 엎드려 바른쪽으로 굴러 길 옆 도랑에 몸을 숨겼다. 윤동지가 괜찮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총소리 나는 델 보니 바로 집 뒷길에서 쏜다. 나와 윤동지는 살금살금 집 뒤로 갔다. 그새 대장동지도 사격준비를 마쳤다. 敵은 노출되었으니 승리는 우리 것이다. 중기는 불을 뿜고 우리도 쐈다. 적은 금방 조용하다. 사격을 멈추고 가서 보니 적들은 원반型 경기관총을 쏜 것이다. 적들은 죽었다. 총격은 단 1분도 안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 못하다니.
왼쪽에 있던 김동지가 부른다. 가서 보니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한다. 만져보니 팔 전체가 피투성이다. 오른팔이다. 캄캄한 밤이라 종잡을 수 없었다. 어깨를 움직이라고 하니 어깨는 움직인다. 어깨와 팔꿈치 중간을 관통한 것이다. 뼈는 부서진 채 튕겨 나오고 살가죽만 붙어 있다. 나는 인민군 장교에게서 뺏은 붕대를 꺼냈다. 단도를 꺼내어 어깨 밑에 대고 붕대를 감았다. 단도를 비틀어 옷에 질렀다. 지혈은 된 것 같았다. 동지들과 의논하여 김동지는 내가 데리고 가기로 했다. 부상자를 데리고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동지들과 헤어졌다.
나는 김동지의 왼쪽 어깨를 부축하고 걸었다. 중무장한 나로서는 제방 너머 강가까지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어 나는 길가 집 문을 두드렸다. 사람은 있는데 대답이 없다. 안 나오면 쏜다고 하니 마지 못해 나온다. 절대로 해치지 않을 테니 김동지를 강가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재차 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가까지 약 500m다. 그 사람이 데려다 주었다. 고맙다고 하면서 보냈다. 나는 쉬어가자고 말하였다.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 멀리 영대교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인민군들이 마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지들은 급히 중기를 내려서 다리 앞 돌기둥에 설치하고 양쪽에 매복하였다.
마차는 왔다. 정지 하고 소리쳤다. 인민군들은 대답 대신 다발총을 쏘아온다. 水冷式(수냉식) 중기관총이 응사하였다. 전투란 선제공격에 치명타를 못 입히면 치명타를 당하게 마련이다. 캄캄한 밤에 표적이 노출되었으니 적은 섬멸되었다(후에 동지들에게서 들음).
함흥 해방
한편 나는 김동지에게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라고 하면서 목이 마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피를 많이 흘려서 물을 먹으면 탈진하여 죽으니 어찌하겠는가. 먹지 않는다고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다짐받고 강을 건넜다. 수심은 배꼽 정도다. 거리는 약 200m. 무사히 건넜다. 나는 김동지를 외딴 집에 맡기고 동네에 와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의사를 찾아가, 총에 맞은 환자가 있는데 지혈을 하려면 어찌 하면 되느냐고 하니 한의사는 묵은 참기름을 바르라고 한다.
김동지 형에게 일러주고 집에 가서 찬밥을 한그릇 먹었다. 조금 살 것 같다. 동지들과의 약속 장소에 갔다. 모두 무사하다. 동지들과 의논하였다. 내일 함흥을 공격하려면 시내 정세와 상황파악을 해야 한다. 정찰을 보내기로 했다. 1조에 2명씩 3개조다. 1조는 성천강 제방을 따라 만세교까지, 2조는 시내 중심부까지. 제일 위험하다. 3조는 보고리를 지나 후지능 다리까지.
함흥과 흥남은 밤하늘이 벌갰다. 주요공공건물에 그네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정찰대는 무사히 돌아왔다. 특별한 상황은 없고 녹색 누비옷을 입은 인민군들이 설친다고 한다.
적들은 계속 불을 지른다. 더 이상의 파괴를 막아야 한다.
새벽에 3개 조로 공격하기로 했다. 무기가 왔다고 하니 반공 청년들이 모였다. 나는 물었다. 총을 쏘아보았는가. 한 사람도 없다. 제방 위 참호에서 사격 연습을 시켰다. 따꿍총은 반동이 세다. 총을 쏘면 뒤로 자빠진다. 오합지졸이다.
그때 흥남 쪽에서 차량 수십 대가 영대교를 건너온다. 사정거리 밖이다. 그 불빛을 보고 사격연습을 하라고 했다.
선두차에서 기관총을 쏘는 불빛이 보인다. 그때 제방 너머로 포탄이 떨어진다. 큰일이다. 얼른 사격중지 시키고 아래 동네로 피신했다. 우리가 국군 특공대라고 한 것이 적을 서둘러 후퇴하게 하였다.
새벽에 공격이 개시됐다. 채대장이 1조, 나는 2조다. 3조는 딴사람. 공격이 성공하면 12시에 공회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 개조 인원은 10여명이다. 2조에는 한군이 끼었다. 별 저항 없이 불타는 시내를 지나 시청 앞까지 왔다. 불탄다. 본관 전체가 탄다. 깃봉에 태극기를 달아야 하는데 올라갈 수가 없다.
한군이 자기가 단다고 한다. 한군은 낙숫물 파이프를 타고 올라간다. 날은 이미 밝은 아침이다. 옥상에 거의 갔는데 어디서 총알이 날아온다. 한군의 머리 위 콘크리트 벽에 박힌다. 따꿍 따꿍 2발이다. 나는 급히 반대편 건물에다 다발총을 난사했다. 그틈에 한군은 옥상으로 뛰어넘었다. 한군은 머리에 매었던 태극기를 달았다. 태극기가 휘날린다. 감개무량하다. 아 이제야 통일이 되는구나. 자유 민주주의 통일이 되는구나. 우리 민족 전체의 염원 통일.
다른 조에서 함흥 내무서에 갔다. 혹시 구속된 사람이 있는가 수색을 했다. 아무도 없었다. 유치장 하나하나 뒤지니 마지막 유치장에 사람이 있다. 당신 누구냐고 물으니 잡혀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상하다. 다 데려갔는데 왜 당신만 있는가 하니 모른다고 한다. 수상하게 생각되어 유치장을 뒤지니 창틀에서 총이 나왔다. 총구가 크다. 취조를 하였다. 신호용 권총이며 오늘밤에 쏘면 인민군 특수부대가 온다고 한다. 큰일이다. 국군이 빨리 오지 않으면 함흥은 쑥밭이 된다.
다행히 인민군도 오지 않았다. 신호탄을 쏘지 않아서인 모양이다. 대장 동지는 국군이 있는 데로 연락원을 보냈다. 국군은 영흥까지 왔다고 한다.
다음날 국군의 수색대가 왔다. 상황설명을 하였다. 무전을 치니 국군이 들어온다. 반룡산에서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18연대 백골부대다. 연대장은 한신. 국군부대는 속속 들어왔다. 아- 나는 함흥과 흥남을 지켰구나. 내고향을 지켰구나. 국군이 들어오고 3일 만에 야전병원이 들어왔다. 김동지를 데리고 갔다. 군의관이 묻는다. 어쩌다 다쳤느냐고. 인민군과 싸우다 총을 맞았다고 했다. 군의관이 살펴보고 자르라고 한다.
나는 앞길이 구만리인데 병신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군의관은 총 맞은 지 5일이 넘었으니 팔은 거덜거덜하고 살은 검푸르고 여름이면 벌써 썩었을 것이라고 했다. 군의관에게 매달렸다. 군의관은 현재의 야전병원 시설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암담하다. 결정을 못 내리겠다. 친구가 병신이 되는구나. 통일이 되는데 평화가 오는데 불구자가 어찌 살까. 친구 부모님에게도 말 못하였다.
그때 박동지가 와서 김명학 박사가 진료소를 냈다고 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데리고 갔다. 2층집이다. 간호원 두 명과 김박사가 있었다. 놀란다. 사복에다 권총과 다발총으로 무장한 청년들이 들이닥쳐 환자를 보라고 하니. 김박사는 이리저리 보더니 팔을 자르라고 한다. 박동지가 권총을 뽑으면서 이것도 못 고치는 게 무슨 놈의 박사냐고 소리지른다. 간호원이 놀라서 악 하고 소리지른다. 박동지가 시끄럽다 하면서 걷어찼다.
김박사는 얼굴이 백짓장이다. 박동지는 당신은 친일파에다 공산주의자에 지금은 기회주의자라고 소리지른다. 나는 자를 것이면 야전 병원에서 벌써 잘랐다고 말하였다. 그래도 당신을 믿고 왔는데 하니 김박사는 말한다. 내가 치료를 하려고 해도 약과 치료기기가 없다. 여기 있는 것은 탈지면과 소독약뿐이라고 했다. 그러면 약과 치료기기를 갖다주면 고칠 수 있는가 하니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한다. 약과 기기는 함흥에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큰 약방에는 있다고 한다. 잘 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없으면 야전병원에 사정하려고 하였다.
박동지는 현물세 창고에서 쌀을 한 차 싣고 시장에다 팔았다. 시내 큰 약방을 다니면서 약을 팔라고 하니 없다고 거절이다. 박동지는 대원들을 시켜 약선반을 엎어서 USA라고 써 있는 약은 모조리 가져오라고 시킨다. 약방은 박살난다. 그제사 주인이 자기가 구하여 준다고 한다. 뭉칫돈을 갖다 놓았는데도 강제가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난리중이라서 그런지 모두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함흥경찰서 경비소대장
약속시간에 가니 주문한 물건이 다 되었다. 물론 돈을 주었다. 김박사는 신변보호를 요구한다. 모두들 당신들 말처럼 친일파니 공산당이니 하면서 괴롭힌다고 한다. 우리는 보초를 세워주었다. 동지들이 경찰을 조직하니 오라고 한다. 나는 김동지와 다른 부상자를 위하여 가지 않았다. 다음날 빨리 오라고 하여 가보니 내 직책이 경비소대장이다. 신분증을 준다. 함흥경찰서 경비소대장 아무개. 반쪽은 영어로 썼는데 나는 못 읽는다. 美 10군단 높은 장교가 사인한 모양이다. 두꺼운 도화지에 프린트한 것이다. 반을 접으면 담배갑 만하다.
미군도 들어오고 흥남부두에서 함흥역 광장으로 군수물자가 계속 들어온다. 밤에 미군 헌병 지프차가 왔다. 운전은 미군이 하고 국군 헌병이 옆에 탔다. 순찰을 가잔다. 추운 겨울에 화로도 없다.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다. 미군과 국군은 파카털 코트를 입었고 우리는 핫바지에 점퍼 차림이다. 내가 탔다. 카빈 M1 한 정을 들고 뒷좌석으로 갔다. 차는 시내를 돌아 함흥역으로 갔다. 화로가 없으니 되게 춥다.
역광장에 왔을 때 따꿍 따꿍 하고 총소리가 났다. 차는 급히 서고 미군과 국군은 차 옆에 엎드린다. 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미군이 소리친다. 국군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가. 빨리 내려서 엎드리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전하라고 했다. 나에게 오는 총알은 총소리를 내가 못듣는다고. 내가 들은 총소리의 총알은 이미 딴 데로 간다고. 국군이 무어라고 하니 미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목을 쥐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편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국군이 당신 목이 둘이냐고 한단다. 나는 담배를 빨면서 웃었다.
다음날 미군 지프가 또 왔다. 운전은 미군이 하고 옆에는 민간인이다. 통역이란다. 美 10군단 사령부에 갔다. 노무자를 써야 하는데 성분을 모르겠다고 한다. 난들 어찌 아느냐고 하니 그래도 당신이 제일 믿을 만하다 하여 단신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는, 피는 붉으나 몸 전체가 붉은 것은 아니다,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하고는, 함흥시 전체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과거를 묻지 말고 써라, 그 사람들의 사상은 내가 책임진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미군장교의 계급은 모른다. 전쟁이 끝나면 통일이 되고 지난 과거는 과거로 묻어라. 통일이다. 사령부를 나왔다. 내무서로 오니 만세교 검문소장으로 가란다. 개마고원과 서울로 가는 요소다. 미군 2명 국군 2명 경찰 4명. 미군은 나보고 한조상 하고 부른다.
어느 날 국군 헌병이 보자고 한다. 당신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 친구가 의용군에 끌려갔다 포로가 되었는데 그냥 두면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고 한다. 성분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책임진다고 한다. 그 사람들을 썼다.
나는 시간 나는 대로 김동지의 문병을 갔다. 김동지에게는 어떠냐고 하고 김박사의 눈치와 동정만 본다. 선생님 부탁합니다 하고 온다.
나는 치안대나 자치대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서로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김동지를 김박사에게 맡긴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도 문병을 간다. 김박사가 반가이 맞는다. 내가 살았소 하면서 내일 깁스를 한다고 한다. 검푸르게 썩던 김동지의 팔. 야전병원에 있었으면 잘랐을 팔. 나는 기뻤다. 다음날 깁스를 하고 김박사는 말한다. 젊었으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될 것이며 오른손잡이이니 힘도 다친 오른손이 세다고. 검푸르게 변해 썩어가던 팔. 주사 몇 대와 약간의 수술로 부서진 뼛조각을 주물러 맞춰서 깁스한 것이다. 과연 의학박사 김명학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다, 같이 죽자
12월 초 중공군이 개입했다고 들었다. 유엔군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고 한다. B29 폭격기는 더 많이 北으로 날아간다. 한 번에 100대가 넘을 때도 있다. 장진호의 패전 소식이 들린다. 포격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린다. 나는 兄을 만났다. 兄은 국군 모 부처에 있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 兄은 소속부대에서 다 데리고 간다고 했다. 잘되었다고 하고 나는 경찰대와 같이 행동하겠으니 살면 以南에서 만나자고 했다.
검문소로 갔다. 대원을 불러 당신들은 어찌 하겠는가 하니 헌병과 같이 가겠다고 한다. 미군도 자기네와 같이 가겠다고 한다. 나는 부하대원이 있는 경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署(서)로 가서 全 대원을 집합시켜 내일 흥남으로 가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내년 3월 봄에는 다시 올 것이라고 하니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두 줄로 행군하여 영대교에 갔다. 미군과 국군 헌병이 검문한다. 국군 헌병은 통과하라고 하는데 미군 헌병이 안된다고 한다. 왜 안되느냐고 하니 유엔군 사령관 즉 맥아더의 명령이란다. 민간인은 통과 못한다고 한다. 나는 경찰인데 왜 못가는가 하고 신분증을 보이니 미군은 전부 보잔다. 증명을 가진 사람은 나 혼자다. 미군은 나만 가란다. 갈 수가 없다. 나 혼자 살겠다고 갈 수 없다. 증명을 가진 사람은 간부 몇 명뿐이다.
국군 헌병이 말한다. 군용차만 타면 통과한다고. 우리가 지킨 다리 우리가 싸워서 지킨 도로를 왜 우리는 못가는가 마음이 착잡하다. 다시 경찰서에 왔다. 간부들이 국군에 교섭하여 저녁에 군트럭이 온다고 한다. 군인이 와서 무장해제를 시킨다. 민간인은 배를 탈 때 무기를 소지 못한다고 한다. 절대로 다 데려다 줄 테니 염려 말라고 하여 믿었다. 저녁에 군트럭이 왔다. 김동지 형제와 대원 가족이 탔다. 일본産 트럭이라 얼마 못 탔다. 다시 온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검문소에 갔다. 미군과 국군 헌병이 반가워한다. 나는 상황이 이러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미군 헌병이 「한조상」 하고 자기네와 가자고 한다. 미군이 손짓한다. 「차이나」가 지척에 왔다고. 저 멀리 오로리 북쪽에서 흰 연기가 펑펑 치솟는 것이 보인다. 함포탄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경찰서에 왔다. 이게 웬일인가.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 어찌 된 일인가 하니 소방대원들이라고 한다. 내 친구 몇 명이 있다.
그 북새통에 간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없다. 그때 형님이 동생과 함께 왔다. 나는 놀랐다. 지금쯤 부모님과 배에 있을 형님인데 어찌 된 일이냐고 하니 형이 부모님과 가니 모두 가버리고 없다고 한다. 피가 치솟는다. 분노에 몸이 떨린다. 믿었던 국군까지 우리를 속이다니, 오지 않는 군트럭, 형을 속인 국군. 나는 형과 동생을 데리고 검문소에 가면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대원과 소방서원들을 버리고 가면 나도 우리를 버리고 간 그 사람들과 다를 게 무언가.
좋다. 죽자. 모두 같이 죽자. 나는 연포로 해서 흥남으로 가자고 했다. 소방서 물탱크차에 매달릴 수 있는 대로 태우고 만세교 검문소로 갔다. 미군과 국군 헌병이 놀랐다.
나는 사정 이야기를 했다. 미군이 여기서부터는 전방이니 당신은 도로 오지만 딴 사람은 다시 못 온다고 한다. 알았다고 한 차 더 가야 한다고 말했다. 차는 만세교를 건너 한참 오니 미군이 세운다. 신분증을 보이니 가란다. 논바닥에 호를 파고 미군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신분증의 내용을 모른다. 연포에 내려놓고 다시 가서 마저 태우고 왔다. 연포에서 용흥 가는 다리, 운자교로 갔다. 미군이 정지시킨다. 신분증을 보이니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사람도 보잔다. 없다고 하니 나만 가란다. 여기는 국군 헌병이 없다. 내가 대장이고 내 대원이라고 손짓 발짓 다 하여도 소용이 없다. 할 수 없이 연포에 돌아왔다.
60여 명이다. 겨울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운다. 바닷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이제는 오도가도 못한다. 할머님이 사나이는 정의로 싸우고 의리로 죽는다고 하였는데 내 이게 무언가. 나는 모두 모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갈 데도 없고 오란 데도 없다. 이제부터는 무슨 짓을 하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은 가라고 했다. 우선 살고 봐야 한다고… 훗날 다시 만나도 이념을 묻지 말고 서로 한 핏줄로 포옹하자고 한 사람 두 사람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 갔다. 어둠이 올 때 남은 사람을 세어보니 40명이다.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한다. 나는 차에 타라고 하고 몽생이라는 바닷가로 갔다. 연포 비행장의 외곽이다. 바닷가에 빈 집이 있어 우선 들어갔다. 소방서차에 쌀이 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온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한 끼 먹었다.
국군은 떠나가고…
누가 찾아왔다고 한다. 나가 보니 국군이다. 소대장이 보잔다. 갔다. 자기들은 공군헌병이라고 한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연포비행장 외곽경비를 하는데 인원지원을 부탁한다. 우리는 무기가 없다고 했다. 따꿍총이 있다고 한다. 나는 대원을 데리고 갔다. 경비 배치는 그 사람들이 했다. 나는 밤에는 2시간 교대를 시키자고 했다. 시간이 너무 짧지 않느냐고 한다. 길면 춥고 졸려 제대로 못 선다고 했다. 맞다고 한다. 자기는 분대장이고 한 사람은 상사인데 소대장이라고 한다. 분대장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6·25부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이야기했다. 분대장은 당신 참 고생이 많다고 했다.
다음날 바닷가에 갔다. 목선 한 척이 있었다. 돛을 두 개 세운 풍선이라 꽤 크다. 누구 배냐고 하니 공군 헌병 배라고 한다. 몇 사람이나 탈 수 있느냐고 물으니 사람만 타면 100명 이상 탈 수 있다고 한다. 저런 배 한 척만 있어도 좋겠다. 저녁에 대원을 교대시키고 바닷가 백사장에 섰다. 흥남 항구는 화도섬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오고가는 배 한 척 없는 바다 먼 남쪽만 바라본다.
경비를 선 지 9일 되던 날 밤 분대장이 보자고 한다. 혼자였다. 표정이 침울하다. 왜 그러냐고 하니 당신만 알라고 하면서 우리는 오늘 밤 간다고 한다. 당신네도 데리고 가자고 하였더니 소대장이 안된다고 하니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산다면서 미안하다고 손을 잡는다. 그러면서 당신 의리는 좋은데 상벌도 살아서 받아야지 죽은 다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한다.
나는 고맙다고 하면서 당신 대원의 수류탄을 모아달라고 하였다. 붙잡히기 전에 자결하려고 그런다고. 분대장이 수류탄을 가져왔다. 우리 대원들의 따꿍총도 간수하라고 하면서 자기 총도 주고 싶지만 총은 군인의 생명이라고 한다. 고맙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사람 50년이 다 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배는 소리 없이 떴다. 나는 全대원을 모았다. 총도 전부 가져왔다. 따꿍총 20여 정, 실탄 800여 발, 수류탄 20여 발. 조금의 무장은 됐다. 나는 말했다. 이제 주위에 우리 편은 하나도 없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맡기고 이제 우리는 절대로 나약한 마음을 먹지 말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나도 모르게 내가 대장이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먹을 것이 없다. 차에 싣고 온 쌀이 바닥이 났다.
아침이 되어 섬 쪽을 보니 배가 있다. 옆에 있는 노젓는 배를 저어 건너갔다. 한 사람이라도 태워 보내려고. 실망이다. 공군 헌병 배였으니. 저 배는 어제 저녁에 떴는데 왜 여기 있을까. 몽생이 바로 건넌데. 나는 대원의 半인 20명을 하도섬으로 보냈다. 40명이 얼굴을 쳐다보는 것보다 낫겠지.
바닷가에는 배 타러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以南으로 가려고. 그 사람들도 배고프기는 똑같다. 청년 두 명이 찾아왔다. 대장님 소 잡을까요 한다. 당신 소냐고 하니 아니라고 한다. 남의 소를 잡으면 되는가 하니 주인이 없는 소라고 한다. 以南으로 가려고 짐을 싣고 왔다가 버리고 간 牛車의 소였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아군기의 폭격
청년들이 매일 쇠고기를 가져오니 가마솥에 쇠고기가 그득하다. 3일을 고기만 먹으니 냄새도 싫다. 빈 집에서 조를 가져왔다. 밥을 하여 먹으니 큰일이 났다. 조 껍데기가 목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다시는 못 먹었다. 누가 와서 일러준다. 어느 집에 쌀이 수십 가마 있다고 한다. 반가웠다. 全대원의 주머니를 터니 8천몇백원이다. 노젓는 배로 섬에 건너갔다. 대원 한 명이 장총을 들고 같이 갔다.
주인을 찾으니 한 40대가 나온다. 방 안을 보니 쌀이 수십 가마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한 가마니만 팔라고 하니 안된다고 한다. 돈가치만큼만 팔라고 하여도 안된다고 한다. 대원들이 밥을 먹은 지 수일이 지났다. 별별 이야기를 다하고 사정했다. 난리에 같이 먹고살자고. 그래도 거절이다. 약 한 시간 빌고 사정하였다. 분노가 치민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다. 자제를 잃었다.
대원의 장총을 낚아채 그냥 당겼다. 총알은 그 사람의 귀밑을 지나 천장을 뚫고 나갔다. 그는 펄썩 주저앉는다. 나는 너같은 놈은 죽어야 해 하면서 재차 장탄을 하고 쏘려는데 아래 방문이 열리면서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할머니가 달려나온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다 들은 모양이다. 쌀을 다 가져가도 아들만 살려달라고 한다. 순간 부모님이 생각났다. 내 부모도 저렇게 키웠을 텐데.
총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 왔다. 너, 너, 장정 세 사람을 불러 세 가마니를 노젓는 배 있는 데로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당신 중공군과 인민군이 와서도 당신 쌀이 될 거냐고 하며 8천 몇백원을 던져주고 세 가마니를 가져가며 남은 계산은 통일이 되어서 하자고 말했다.
뗏목 있는 데로 오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주머니와 젊은 여자가 있다. 머리에 감은 붕대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 젊은 여자는 사정한다. 자기 어머니인데 연포에서 포격을 맞아 머리가 터져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以南에 가야 한다고. 이남에 무엇을 타고 가는가 하니 중공군이 연포에 왔다고 한다. 그러니 섬에 건너다 달라고 한다. 사공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다 탈 수 있는가. 안된다고 한다. 배가 작은데다 파도가 세어서. 여자는 애원한다. 나는 사공에게 이 모녀부터 건너다 주라고 했다. 건너가는 배를 보면서 저 여자는 나보다 효녀구나 하며 가슴이 찡하다. 부모님 동생은 어찌 되었는가. 함흥 쪽을 쳐다봤다. 뿌연 하늘만 보인다. 노젓는 배가 왔다. 섬에 건너가 오랜만에 밥을 배불리 먹었다.
오후에 분대장이 찾아왔다. 대원 몇 명을 부탁한다. 나와 윤동지가 갔다. 바닷가에서 굴껍데기를 마대에 넣어서 화도섬 능선 위로 가져갔다. 공군표식을 한다고 했다. 우리 둘, 다른 사람 둘이 네 푸대를 가지고 갔다. K자를 쓰고 F자는 반도 못썼다. 다시 가지러 오는데 제트기 한 대가 머리 위를 돈다. 유심히 보니 흥남 쪽에서 우리를 향해 내리박는다. 나는 유동지를 낚아채면서 저것 봐라 소리친다. 둘은 옆에 있는 한데 뒷간, 말뚝을 네 개 박고 거적을 치고 큰 돌 두 개 지붕도 문도 없는 뒷간에 머리를 쑤셔박았다. 뒷머리는 깍지 낀 손으로 잡고 귀는 양팔로 막고 배는 조금 떼고 엎드렸다. 쾅, 드르륵. 등 위로 돌멩이와 흙모래가 떨어진다. 우리는 즉시 돌아 하늘을 본다.
이번엔 우리가 아니다. 비행기 고도와 위치만 보아도 안다. 든너머 마을이다. 쉿, 펑 드르륵. 마을에서 연기가 오른다. 비행기는 가고 일어나 살펴보니 폭탄은 50m 전방에 떨어졌고 기관총알은 우리의 양옆을 지나가 할퀸 자국이 총총하다. 같이 일하던 두 사람이 바닷가 바위 있는 데로 뛰어갔길래 가보았다. 직격탄을 맞았다. 처참하다. 안전하게 피한다고 바위 틈으로 갔는데. 나는 문득 생각이 든다. 농업학교 입구에서 기관총알이 내 바지 양옆을 뚫고 오늘도 내 옆을 지나갔다. 총알이 사람을 피하지 사람이 총알을 못 피한다더니 인명은 在天인가. 나도 언젠가 죽겠지.
급히 집에 와보니 형이 없다. 낮에 공군 소대장에게 보냈는데 단 몇 명이라도 좋으니 태워달라고 내가 부탁드린다고 형님을 보냈다. 급히 나와 가는데 형님이 온다. 어찌 되었느냐고 하니 소대장과 이야기하는데 1차 공습이 있었다고 한다. 소대장은 급히 대원을 시켜 마당에 나가 태극기를 휘두르라고 했다. 대원이 국기를 휘두르는데 2차 폭격이 시작됐다. 폭탄은 터지고 기총 탄알이 대원의 목을 쳤다. 순식간이다.
소대장은 죽은 대원을 매장하기로 하고 들고 가자고 하니 대원들이 주춤하더라고 한다. 목이 떨어진데다 피 범벅이니 형이 들어 메고 둔덕에 묻었다고 한다. 형이 오려고 하는데 소대장이 당신은 자기네와 같이 가자고 한다. 형은 그래서 늦었다고 한다. 나는 잘 되었다고 하면서 형보고 다시 가라고 했다. 나는 대장이라 동지들과 生死를 같이 할 터이니 동생을 데리고 가라고 내가 부탁한다고. 형이 갔다오더니 소대장이 승낙했다고 한다. 기쁘다. 몇 사람 더 부탁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아쉽다. 공군은 서둘러 뜬다. 어두운 밤에 배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부모님을 버리고 또 형제와 생이별이다. 以南에서 못 만나면 내가 여기서 죽은 줄 알라고 하면서 헤어졌다. 마음은 후련하다. 여기 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중공군 체포
아침에 웬 사람이 찾아와서 말한다. 뭍에 올려 있는 저 배도 쓸 수 있다고. 배는 새 배며 선주가 빼앗길까 봐 미리 끌어올려 놓은 거라고 한다. 밀어놓고 배밥(나무 판자 틈 사이를 메우는 것)만 치면 된다고 한다. 희망이 보인다. 자기도 이남으로 가려고 하니 협조하겠다고 한다. 선주에게 가서 따리(방향타)를 가져오라고 했다. 선주가 없다고 한다. 군인들이 가져갔다고. 선주는 아버지 연배라 도로 왔다. 난감하다. 배를 띄워도 따리가 없으면 못 간다.
그 사람이 말한다. 당신 미련하다고. 자동차에 스페어 타이어가 있듯이 배를 만들면 반드시 여벌이 있다고 한다. 아차 동감이다. 그런데 방도가 없다. 동지들과 상의하려고 몽생으로 갔다. 상황을 이야기하니 모두 기뻐한다. 강제로 뺏자고 한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별 방도가 없다. 저녁을 먹고 다시 의논하여도 별 수가 없다. 그때 밖이 술렁인다. 무어냐고 하니 중공군이 온다고 한다. 나는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고 몇 명인가 물으니 그 부인이 한 사람만 보았다고 한다.
全대원에게 말했다. 이제 죽을 때가 왔으니 각오하라고. 중공군은 해변을 따라 온다고 했다. 내가 대원 한 명을 데리고 20m 전방 해변가 첫집 처마밑에 매복하였다가 놈을 생포할 것이니 총을 가진 대원은 울타리 안에 매복하였다가 총소리가 나면 움직이는 물체는 무조건 쏘라고. 적과 아군을 가리지 말고. 달밤이지만 구별을 못한다고 한다. 단 총소리가 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고 했다. 대원에게 총을 주면서 장탄을 하라고 하고 나도 장탄을 했다. 수류탄 두 발을 허리 밑에 꽂았다. 바닷가 집 처마 밑에 들어가 벽에 바짝 붙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불과 몇 m다. 희미하게 물체가 보인다. 집 앞에 와서 떡 멈춰서고 두리번거린다. 숨막힌다. 바로 옆 벽에 우리가 섰는데. 다시 움직인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튕겨지듯 나아가 총을 들이댔다. 손들어. 중공군은 뒤돌아 보더니 손을 든다, 몸수색을 하니 곤봉 같은 것이 네 개가 있다.
중공군이 방망이와 몽둥이를 들고 인해전술로 오는구나 생각하고 두 개는 바다에 버렸다. 잡았다 하고 소리쳤다. 시골집 부엌 등불 밑에서 보니 곤봉 같은 것은 수류탄이다. 포로를 부엌 기둥에 묶어 놓았다. 중국말을 아는 조대원의 통역으로 심문했다. 중공군은 이미 연포 비행장을 점령하고 자기는 통신 연락중이라고 한다.
적은 이미 코앞에 왔다. 삶의 희망은 사라지고 죽음이 가까워온다. 정규군 1개 소대가 와도 전멸이다. 그의 고향은 단동이고 봉천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통신병이 되었다고 한다. 소지품은 양 어깨에 멘 버선자루 같은 것 두 개인데 하나는 통옥수수 삶은 거, 또 하나는 콩 삶아서 볶은 것이다. 왜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가 하니 도와주려고 왔지 침범은 안하였다고 한다.
철저한 교화다. 쇠고기국 냄새 탓인지 배가 고프다고 한다. 밥을 주라고 했다. 커다란 그릇에 쇠고기 국과 밥을 주니 금방 다 먹는다. 다시 주니 또 다 먹는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생각하니 너나 나나 세월을 잘못 타고난 것이 죄다. 내가 죽을 때는 너도 죽을 것이니 꼭꼭 먹어 놓으라고 하고 아침에 섬으로 왔다. 간밤에 알게 된 일로 인해 희망은 없고 답답하여 섬 꼭대기에 올라가 함흥 쪽을 바라보았다. 폭격과 함포 사격 탓인지 여전히 뿌연 연기만 깔려 있다.
죄 없는 부모님 동생 친척들은 어찌 되었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냐. 적이 죽이러 오기만 기다리는 신세. 나를 따르는 37명의 생명. 아 괴롭다. 우리를 버리고 간 그네들이 미웠다. 함흥과 흥남을 해방시킬 때 싸운 사람이 몇 사람인가. 함흥과 흥남 시민의 생명과 재산은 누가 지켰는가. 한국전쟁사 중 평양 원산 전투는 있어도 함흥 흥남 전투는 없다. 함흥 흥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부대 입성, 누구누구 환영, 대한민국 만세, 보무도 당당히 입성하던 국군과 후퇴할 때의 국군. 영대교에서 본 군트럭 위의 젊은 남녀. 미군 트럭 위의 십자가를 목에 건 사람. 공군배를 타고 간 그 얼굴. 그 사람들도 자유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싸웠을까. 아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누구의 잘못인가. 나 혼자면 죽기 쉬울 텐데.
배를 띄우니…
내려오니 먼저 찾아왔던 그 사람이 기다린다. 말하기를 船主의 사위가, 저놈들이 총 몇 자루 가지고 으스대는데 총만 뺏으면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화가 나서 즉시 대원 5명을 데리고 갔다. 사위놈 끌어내어 대원을 시켜 몽둥이로 팼다. 죄 없는 사람을 팬다고 노인이 펄펄 뛴다. 나는 노인에게 나도 당신 같은 부모가 있어 이제까지는 존중하였지만 이젠 다르다고 하며 사위가 한 말과 당신이 따리를 숨겨둔 것도 안다고 하였다. 노인은 당황했다.
나는 모두 죽이겠다고 하면서 총알이 아까우니 일렬종대로 세우라고 소리쳤다. 대원들이 가족을 끌어내니 안노인이 매달려 사정했다. 따리를 주면 살려주겠느냐고. 그렇다고 하니 재삼 다짐한다. 대장부가 一口二言(일구이언)은 안한다고 했다. 헛간 짚더미 속에 있다고 했다. 대원들이 뒤져서 꺼내어 왔다. 나는 즉시 대원과 어부 몇 사람을 모아 배를 바다에 밀어 넣었다. 배 밥을 치라고 했다. 새 배여서 별로 손질할 것이 없었다.
희망이 생겼다. 용기가 난다. 삶의 서광이 비친다. 몽생으로 연락하여 유동지와 김동지를 불렀다. 상황을 이야기하고 선원이 문제라고 했다. 이남으로 갈 사람은 다 갔다. 누가 누군지 모르니 강제로 끌고 올 수도 없다. 대책이 안 선다. 저녁에 선주가 와서 자기도 이남으로 가겠다고 한다. 선장은 누구, 선원은 누구누구라고 일러준다. 좋다고 했다. 이제는 인원이 문제다. 돛대 두 개 세운 목선이다. 최고 승선인원이 50여 명이란다. 우리가 38명, 선원 8명의 가족, 선주 가족 계산하니 70여명이다. 20여 명이 넘친다. 나는 죽어도 같이 죽자고 한 대원들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간다고 마음먹었다.
배를 띄워 놓으니 별별 사람이 다 온다. 대장님 대장님 하고… 안타깝다. 자유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배가 작아 태울 수가 없다. 금, 돈을 가지고 와서 사정이다. 돌려보내면서도 가슴아프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파서 그러는데.
다음날 일어나니 건너편에 배가 있다. 우리 배보다 크다. 사람을 보내어 같이 가자고 하니 사람도 많고 짐도 많아서 안된다고 한다. 나는 대원 한 명에게 총을 주어서 노젓는 배를 타고 건너갔다. 배에 오르니 우리 배보다 크다. 책임자를 찾았다. 대답이 없다. 재차 불러도 대답이 없다. 나는 대원의 총을 넘겨 쥐면서 배 위에 있는 물건을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했다. 대원이 물건을 밀어 넣는다. 그제사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챙긴다. 안 치우면 다 처 넣으라고 했다.
웬 총 쥔 청년이 와서 당신 무엇이냐고 했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태워야지 물건이 무엇이냐고 소리쳤다. 당신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나는 배 위에 섰고 그 사람은 배 밑에 모래사장에 있다. 나는 총을 옆구리에 낀 채로 쐈다. 총알은 그 사람 옆구리를 스쳐 땅에 박힌다. 再장탄하고 쏘려고 하니 그 사람이 총을 버리고 두 손을 번쩍 든다. 나는 대원에게 총을 가져오게 하고 책임자를 다시 찾으니 안 나온다. 하는 수 없어 우리 사공과 대원을 시켜 그 배의 따리를 뽑아 가지고 건너왔다.
포로의 애원
저녁에 그 배 책임자가 왔다. 인사를 나누었다. 자기들도 ○○치안대와 자치대라고 한다. 아까는 잘못되었으니 몇 명을 태워줄 터이니 따리를 달라고 한다. 나는 3일 먹을 식량과 물 외는 짐짝은 한 개도 못 싣는다고 하면서 여유가 있으면 사람을 태우라고 하였다. 우리가 38명이라고 하니 다는 안된다고 했다. 나는 싫으면 가라고 했다. 따리는 우리 배에 싣고 가다가 우리 것이 망가지면 쓴다고 했다.
계속 사정한다. 흥정하였다. 결국 20명으로 타협됐다. 그 배 책임자에게 당신 금을 받고 돈을 받을 여유가 있으면 사람을 태우라고 말했다. 다음날 떠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유동지와 김동지를 불러서 이제부터 저 배는 동지들이 책임을 진다 말하고 수류탄 반 총 반을 주면서 대원 18명을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단 이남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당부했다.
문제가 있다. 중공군 포로다. 자기를 놓아 달라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너를 놓아주면 적이 하나 더 생기니 데리고 못 가면 죽일 수밖에. 하지만 저항능력도 없는 저 사람이 무슨 죄인가. 나는 유동지와 김동지에게 데리고 가되 이남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이남에 가서 신분보장도 되니 살생을 피하자고 했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선장과 그 사람을 불렀다. 20명이 갔으니 여유는 있는가 하니 10여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당신들이 돈을 받든 금을 받든 알아서 하라. 단 남자를 태워라. 붙잡히면 먼저 죽을 테니.
아침에 모두 승선하였다. 아, 자유의 땅이 보인다. 선장이 자기는 원산까지만 가보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다음이 문제라고 한다. 염려 말라고 했다. 선장이 바다배는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당신이 어떻게 가느냐고 했다. 나는 말했다. 오른쪽에 육지가 보이면 남으로 가는데, 왼쪽에 보이면 북으로 가니 그때는 모두 죽는다. 이 수류탄 10여 발이 한꺼번에 터질 것이다. 선장은 나의 대담한 위협에 놀랐는지 의지에 눌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
배는 떴다. 저쪽 배도 알아서 오겠지 하고. 겨울 바다는 바람도 세고 파도도 높아 멀미도 난다. 얼마간 갔을 것이다. 선주가 와서 도로 돌아가잔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 아들이 (초등학생) 독자인데 멀미를 해서 죽을 거 같으니 돌아가서 파도가 자면 오자고 한다. 선원들도 그러자고 한다. 되돌아갔다. 저쪽 배는 이미 가고 없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마음이 착잡하다. 그래도 믿는 것은 항구에 있는 군함이다. 함포사격을 계속하니 밤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이 되었다. 이상하게 조용하다. 섬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엇- 배가 한 척도 없다. 밤에는 불야성 같았던 항구가 텅 비어 있다. 바다를 내다보니 군함들이 먼 바다에 한 줄로 떠 있다. 마지막 철수다. 급히 내려왔다. 대원들을 깨웠다.
타향살이 50년
우리에게 배가 있다고 말한 사람도 왔다. 이제 군함도 다 갔다. 이젠 강권을 써야겠다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말한다. 당신 속았다고. 겨울 바람은 계속 부는데 파도가 언제 잠잠하겠느냐고. 2인 1조가 되어 뱃사공을 데려오라고 했다. 만약 불응하면 본보기로 쏴죽이라고 했다. 나는 수류탄 두 개와 장총을 들고 배에 갔다. 그 사람도 왔다. 사공들이 오는 대로 출발 준비를 시켰다. 준비는 끝났다. 선주는 오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람 여럿이 탔다. 그 사람들은 선장이 금품을 받고 태운 것이다.
출발이다. 배는 파도에 밀려 쏜살같이 나아간다. 만리 풍선에 천리 기선이라더니 잘도 간다. 내 고향이 멀어진다. 화도섬도 멀어진다. 저 하늘 아래 수평선 너머 내 고향이 사라져 보이지 않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감정에 젖어 두 줄기 눈물만 흘러내린다.
50여 시간 만에 배는 주문진에 닿았다. 국군 장교가 와서 당신 ○○○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수고하였다고 하면서 무기는 하고 묻는다. 주문진 앞바다에 버렸으니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이 말한다. 당신 부하들이 중공군 포로를 넘겨주고 포항으로 갔으니 내일 아침에 가라고 하면서 막국수를 사주어서 먹었다. 맥이 탁 풀린다. 이젠 살았구나. 자유의 땅 이남으로 왔구나. 담배 생각이 난다.
무일푼이다. 추워서 입고 온 인민군 누비옷이 배에 있었다. 봉초 한 봉을 받고 어부와 바꿨다. 오랜만에 피운 탓인지 어지럽다. 감회에 젖어든다. 나의 책임과 의리로 40명의 대원과 민간인 여러 명이 자유를 찾았다. 부모형제를 버리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하였을까. 50년이 다 된 지금에도 해답을 찾지 못하겠다. 꿈많은 젊은 시절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 그날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안개 속에 묻혀 있지만 통일의 서광은 언제 비칠까. 민족의 염원 통일은 평생의 소망. 통일은 왜 못 이루나. 통일은 꿈일까. 꿈일까. 한 많은 지난 세월 타향살이 50년이 되었지만 흘러간 세월은 돌이킬 수 없고 두고 온 부모형제는 어찌 되었는지 무정한 세월만 흘러간다.
이 기록은 6·25부터 나의 기록 및 동지들의 기록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특히 국군 입성 후 철수까지의 내용은 자세한 것을 생략하고 요점만 기록한 것이다. 여기 참여한 모든 동지들의 동의가 없어 實名(실명)을 쓰지 못한다.
두고온 내 고향 함흥
1.
성천강 강변의 능수버들 올봄도 푸르르겠지
내 자란 고향 가고파도 못 가는 내 고향
어릴 때 내 친구 형제들이 그 곳에 있겠지
언덕 너머 지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내 고향
떠오르니 그 옛날 그 모습 언제 보려나
아 기억만 남아서 눈에 어리네
아 추억만 남아서 꿈에 보이네
아 타향살이 신세 언제 면하려나
2.
성천강 백사장 고운 모래 지금도 옛날 같은지
내 자란 고향 보고파도 못보는 내 고향
낳아서 키워준 부모님이 그곳에 계시네
파도 너머 수평선 너머 사라져버린 내고향
떠오르니 그 시절 그 추억 어찌 잊으리
아 그 모습 그리워 눈에 어리네
나 그 시절 그리워 꿈에 보이네
아 망향의 꿈 한이 맺혀 못 잊으리
아버님 어머님 석 달만 기다려 주시오. 봄이 오면 다시 북진하여 고향에 가리라. 그 석 달이 3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 50년이 되건만 가지 못하여 보지 못하는 내 고향, 그리워서 보고 싶은 내 부모형제 친구들은 어이 되었는지 20대 청춘이 백발이 다 된 지금도 두고온 고향을 어찌 잊으리.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그래도 봄은 또다시 오건만 한 번 떠난 내 고향은 왜 다시 못 가나. 왜 왜 못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