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교황청 베드로 성당을 지키는 경비병을 보고 - 스위스 근위대
스위스 근위대의 현재 위치
교황 근위병은 현재 135명이다.
현재 교황청의 근위대이며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오래된 군대이다.
바티칸에서 만큼은 정식 명칭이 스위스 용병대에서 '교황 근위대'(Pontificia Cohors Helvetica)로 명명된다.
로마 교황을 경호하기 위한 경찰 조직. 과거에는 용병으로 구성된 군 조직이었으나,
스위스사법부가 19세기(1848년)부터 연방헌법으로써 용병업을 헌법에 어긋난다고 해석을 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이름은 그대로 두고 이탈리아 법으로써 치안 경찰로 분류하였다.
현대 스위스 근위대는 파견경찰 신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바티칸 내에서는 바티칸 헌병대와 함께 군대식으로 운용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모리용 투구와 플레이트 갑옷, 냉병기들을 보면
15~16세기 군인 복장을 코스프레한 리인액터나 국가유산청이 사용자인 경복궁 수문장과 같은
노동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열 등의 의례에서만 저렇게 입는 것이지
이들은 교종을 경호하는 노동에 걸맞게 현대 군사학으로써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정예 군인들이다.
실제 경호 임무도 당연히 수행하며, 사격 훈련이나 경호원 전술 및 호신술 교육을 받고 있다.
물론 각종 개인화기 역시 구비하고 있으며, 매년 사격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의장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헌병대나 수색대, 기동대 등의
건강이 좋은 병과 인원 위주로 차출해 시간제 의장대 역할을 맡기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즉, 옷만 화려하다고 착각할 수 있어도 실상은 다른 영국이나 덴마크 등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근위대처럼 최정예 특수부대에 가까운 셈이다.
자격요건
근위병이 되려면 자격요건이 제법 까다롭다.
먼저 결혼하지 않은 스위스 남자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스위스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나이는 19~30세 사이이며 고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물론
키가 174cm 이상, 신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자여야 한다.
새 근위병을 뽑으면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기념일인 매년 5월 6일 교황에게 충성 서약식을 갖고
현장에 배치한다. 서약식을 할 때 언어는 근위대 신병이 살던 스위스 지역의 언어에 따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중에서 고를 수 있다.
평소에 근무할 때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하는 현대 스위스 근위병의 지원 조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교회법에 따라,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 교도여야 하고,
스위스 국적자여야 한다.
사병 지원자는 미혼이어야 하며, 결혼은 양성 과정을 마친 뒤 가능하다.
전과가 없고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이상이어야 하며 운동능력이 뛰어나고
스위스군의 육군 혹은 공군의 기초군사교육을 수료한 자여야 한다.
만 19세 이상 30세 미만의 성인이며 신장은 174cm 이상이어야 한다.
과거엔 유럽계 스위스인만 지원받았으나, 2000년 이후로는 비유럽계 스위스인 역시 받고 있다.
2003년에는 인도계 스위스인 다니 바흐만이 최초의 비유럽계로서 스위스 근위대에 입대했고,
2020년에는 필리핀계 스위스인 빈센트 뤼티가 입대했다.
바티칸 근위대에 입대했음을 선서하는 스위스 근위대원.
손가락 3개를 들어올리는 손짓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바티칸 근위대 입단 선서식(il Giuramento)
나는 교황 성하와 장차 그분을 합법적으로 계승할 후임자들을 정직하고 명예롭게 섬길 것이며,
이를 위해서 온몸을 바쳐 나 자신을 바칠 것이며,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나는 이와 같은 맹세를 사도좌 공석 기간 중에는 거룩한 추기경단의 추기경들에게 엄숙하게 맹세한다.
더 나아가, 나는 지휘관을 비롯한 선임들에게 존경과 충성과 순종을 맹세한다.
아울러 자신의 직분에 걸맞은 품위 유지에 수반되는 모든 요구사항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
나 (이름)은/는 방금 낭독된 모든 사항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우하실 것이며, 그분의 성인들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수뇌부
소령 | 대위 1 | 대위 2 |
| | |
로렌초 메르가 | 키릴 두루츠 | 아드리안 암보르드 |
역사
예로부터 스위스 용병은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평범한 용병들과는 달리 어느 나라로 파견되든 한 번 고용된 이상 계약이 끝나는 순간까지
무조건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으로 신용이 드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서로 전쟁 시기가 올 때마다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곤 했는데
이 스위스 용병단이 서로 적대관계로 만난 적도 있고
심지어 아들과 아버지가 적대관계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약을 지켜야 하는 스위스 용병대의 특성 때문에
결국 이들은 전장에서 마주치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걸 감수하는 것이 용병의 임무였기에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충성심이 높은 이유는 스위스의 경제와 자신의 가족의 생활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스위스는 농사짓거나 목축을 하기에는 너무 땅이 거칠었기에
경제의 대부분이 용병 고용에서 나왔는데 고용주에게 신뢰를 잃을 경우
더 이상 용병업을 하기 힘들어지게 되고, 그럼 그들의 가족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용병 요청을 처음부터 주정부 차원에서 거절한다면 모를까,
일단 고용이 결정되면 계약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충성을 다했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의 경우 교황 식스토 4세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맺어
스위스 근위병 영입의 길을 열었다가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어 3년 뒤인 1506년 1월 22일 첫 근위병 150명이 로마에 도착했다.
이날은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율리오 2세는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이후 교황청 근위대는 우여곡절의 역사를 겪었다.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소위 사코 디 로마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교황령은 수많은 동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원군은 오지 않거나,
오다 깨지거나, 도망쳤고, 스위스 근위대 500명과
오합지졸 시민군 4500여명만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면서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5월 6일, 성벽이 뚫리고 근위대는 189명만 남았지만
이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신성 로마 제국 용병대에 맞서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워
근위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한 것이다. 이에 감복한 교황청은 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어
교황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도록 못을 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첫댓글 교황청 구경하며
경비병들의 옷차림에
근엄 보다는 알록달록함에
한참 바라보았지요
그러셨군요
그 사람들이 아주 정예병들이라네요
스위스 용병들이 대단합니다
용맹스럽고 의리있는 군대네요
교황청에서 붙박이로 고용할 정도로...
그 것도 500년씩이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