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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20일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1차 총폐업
2000년 6월 20일 오후 연세대 노천극장
에서 서울, 경기지역 전공의협의회
주최로 전공의 8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총사직투쟁 선포식이 열리고 있다.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는 의사
들의 집단폐업 첫 날인 2000년 6월 20
일 전국 대부분의 병-의원들이 문을 닫는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병원 3곳을 전전하던 70대
노인이 숨지는 등 의료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전국 대부분의 동네의원이 문을 닫
은 가운데 문을 연 종합병원에는 환자들
이 평일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한산한 모습을 보였으며, 대신 보건소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의과대학 교수들도 23일 사표를 제출하
고 응급실에서 철수하자 일부 병원에서
는 분노가 한계에 달한 환자 가족들이
의사를 폭행하는 등 공황상태를 보이기
도 했다.
그러나 의사협회가 24일 김대중 대통령
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7월 약사법
을 재개정하기로 했다는 합의사항을
수용하고,25일 폐업철회 여부를 묻는
찬반투표를 벌인 결과 철회 의견이 51.9
%를 넘자 의사들은 26일부터 진료에
복귀했다.
▶2005년 고이즈미 총리 방한,
노무현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20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최근 활동이 종료된 1기 공동역사연구위원회에 이어 2기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그 산하에 교과서연구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교과서연구위의 연구결과를 양국의 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하기로 했다. 또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이를 위한 한·미·일 3국의 외교적 공조원칙도 재확인했다.
한·일 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공식회담 결과 발표, 만찬 순으로 진행됐다. 정상회담에서는 길게 논의를 했지만, 양국 간 중요 현안인 독도,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 등에 있어 한발짝도 진전이 없었다. 서로 할말을 했다고 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설명했다. “때로 불편했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상회담 직후 결과 발표에서 “솔직하게 대화하고 일부 공감대가 있었으나 합의에 이른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2기 공동역사연구위 출범 등 일부 합의에 대해 “낮은 수준의 합의”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와 관련, 고이즈미 총리가 “앞으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데 대해 “총리께서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나와 우리 국민에게는 역시 과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지도급 인사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도 각별히 유의할 것을 요구했다.
두 정상은 다음 정상회담을 올해 안에 일본에서 갖기로 합의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21일 오전 출국했다.
▶2005년 이화여대에서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개막
▶2005년 정부 중앙청사 게시판에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명단 공개
▶2002년 방글라데시 대통령하야.
▶2002년 중국 중남부 폭우
550명 사망.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
13개 언론사에 242억원 과징금 부과
공정거래위원회가 1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해 모두 24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같은 과징금 규모는 공정위가 2000년 7개 재벌그룹에 부과한 전체 과징금 규모(173억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001년 6월 21일 10개 중앙 일간지와 3개 방송사를 상대로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한 결과 총 510억원의 부당지원 사실이 밝혀져 242억원(신문사 203억원, 방송사 39억원)의 과징금을 물렸다고 발표했다.
언론사별로는 조선일보 33억9000만원, 동아일보 62억원, 문화일보 29억원 등 그동안 비판적 논조를 유지해온 신문들이 과징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부과받았다. 그러나 한겨레신문(1500만원), 대한매일신보(1억4000만원), 세계일보(3600만원)는 상대적으로 과징금 액수가 미미했다. 방송국도 신문사에 비해 과징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방송사 가운데는 SBS가 1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MBC와 KBS에는 각각 13억원과 11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그러나 공정위가 지금까지 30대그룹과 거대 공기업을 빼고 부당내부거래를 직권 조사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조사방식도 유례없이 강도가 높았으며, 과징규모도 상식을 뛰어넘는 편파적인 금액이 부과됐다는 점에서 공정위 조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다. 더구나 신문산업의 특수성과 각 언론사의 소명자료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 언론사로부터 편파적인 조사라는 반발을 샀다.
▶1999년 조진호, 한국인으로
두번째 메이저리그에서 승리
조진호는 1999년 6월 20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동안 홈런2개 포함, 5피안타 4실점했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첫 승리를 땄다. 삼진6개에 볼넷은 1개. 1998년 7월5일 빅리그에 첫 등판했던 조진호는 메이저리그 6번째 등판에서 첫승을 신고했다. 방어율은 4.50이 됐다.
조진호는 최고구속이 146Km에 불과했지만 절묘한 제구력으로 서부지구 1위팀 레인저스 강타선을 요리했다. 레드삭스는 7대4로 이겼다.
1998년 12월 귀국 후 부친의 사망소식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던 조진호는 “18일이 아버님 제사였는데 호텔에서 절을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아버님께 첫 승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1999년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북에 억류
1999년 6월 20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에 대해 북한 환경감시원을 상대로 남한 `귀순 공작`을 했다며 그녀를 북한에 억류, 장전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감금, 조사했다. 북한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북측 여자 환경감시원과 10여분간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다 북한 귀순자에 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억류됐던 민영미씨(가운데)가
중앙병원에서 퇴원해 남편 송준기씨와
함께 집으로 귀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측 환경감시원은 대화가 끝난 직후 민영미씨에게 관광증 제시와 벌금을 요구했으며, 민영미씨는 관광증을 건네주고 2회에 걸쳐 총 1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북측은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민영미씨를 연행, 장전항 출입국관리소 옆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강제 구금했다.
그후 5일 만에 북한이 현대측에 민영미씨를 인도했고, 다음날 새벽 속초항에 도착,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렸다. 그일이 있은후 한동안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었다가 8월 5일 다시 재개됐다.
▶1995년 중요무형문화재 발탈
예능보유자 이동안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의 예능보유자 이동안씨가 1995년 6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씨는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나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스스로 춤을 추어온 타고난 춤꾼이었다.
화성재인청 도대방의 아들로 태어나 광대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열두살 때 남사당에 입단했으나 곧 광무대로 옮겨가 당대의 명인 김인호 선생으로부터 ‘신칼대신무’ ‘진쇠춤’ ‘태평무’ 등을 전수 받았다. 발에 탈을 쓰고 하는 놀이인 ‘발탈’은 박춘재, 줄타기는 김관보 선생으로부터 각각 배웠다. 18세 때 송만갑, 정정렬 등 명창들을 모시고 다니며 그들의 무대에서 줄타기로 인기를 모은 그는 21세 때 부민관에서 열린 ‘한성준 무용발표회’ 때 처음으로 ‘태평무’를 선보였다.
당대 최고의 고수 한성준씨와의 인연으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 무용선생으로 들어간 그는 신무용의 개척자인 최승희에게도 ‘장고춤’ ‘태평무’ ‘진쇠무’ ‘입춤’ 등을 잠시 전수했으며, 최씨의 제자인 김백봉, 정승의, 문일지 등에게도 춤을 가르쳤다. 발탈은 현재 박정임, 조영숙 등 두명의 이수자가 뒤를 잇고 있으나. 제자층이 두껍지 못해 전수가 어려운 실정이다.
▶1994년 KT(구 한국통신), 아시아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 ‘코넷’ 시작
▶1994년 금융기관 개인연금 상품 시판
▶1991년 한국-루마니아,
상사중재협정 체결
▶1991년 광역의회의원선거 실시
▶1990년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대통령 내한
▶1981년 이란 혁명검찰,
바니 사드르 대통령 체포령
▶1980년 남북총리회담 대비한
판문점 자유의 집 별관 준공
▶1979년 정신이상 사설도서실 주인,
공부하러온 대학생 살해
▶1974년 태백선 전철 개통(제천-고한)
▶1973년 중앙선 전철 개통
▶1970년 국회의원 겸직 파동 발생
▶1969년 김영삼 의원 초산병 피습사건
▶1969년 문경선(진남-문경) 개통
▶1968년 100m `魔의 10초벽` 돌파
100m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 온 `마의 10초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1968년 6월 20일이 세계 육상사를 다시 쓰게 한 그날이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에서 그린, 하인즈, 스미스(왼쪽부터)가 남자 100m 결승전에서 골인하고 있다.
1912년에 세계기록 공인이 시작되고 1960년에 독일의 아민 해리가 10초F를 끊은 이래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초 벽이 같은 날 그것도 세 사람에 의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수동시계로 9초9. 준결승전 1·2조에 출전한 하인즈·스미스·찰리가 주인공이었다. 기록이 믿기지 않아 트랙 길이를 재조사했으나 오히려 10㎝가 더 길었다. 지미 하인즈는 4개월 뒤 열린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를 또 기록해 명실공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20여년 동안 깨지지 않던 9초9 벽이 88서울올림픽에서 9초79를 기록한 벤 존슨에 의해 깨지는 듯했으나 곧 약물중독임이 밝혀져 기록이 취소됐다. 이후 9초9 벽은 1991년 칼 루이스(9초86)가, 9초8 벽은 1999년 모리스 그린(9초79)이 깨뜨렸다. 현재 세계최고기록은 2008년 9초7의 벽을 깬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2009년 8월 16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9초6의 벽을 깨며 세운 9초58이다.
▶1968년 정부, 폭력배들을
국토건설에 투입
▶1964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소련 방문
▶1963년 미국-소련 직통통신선 개설
협정에 조인
미국과 소련 양국이 1963년 6월 20일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의 직통전신가설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이날 조인식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찰스 스텔과 소련을 대표하는 세이몬 차라프킨이 각각 서명했다.
이 협정은 국제긴장을 완화하기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우연과 오산으로 인하여 생길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미리 막도록 중대한 국제적 위기에 사용됐다.
직통전화의 연결방법은 특별 텔레타이프 선을 헬싱키 스톡홀름 런던을 경유하도록 가설하는 것이었다.
이후 8월 30일 공식문서의 교환 대신에 미국이 시험적인 표준신호를 보내고 소련으로부터 같은 신호를 받음으로써 직통전화가 개설됐다. 이때부터 전화는 긴급 사태시 양국 정상들간의 메시지 교환을 위해 사용됐다. 개설된 직통전화는 국방성에 있는 기계장치들로부터 크레믈린궁에 있는 흐루시초프 서기장 사무실 근처의 통신실에 이르는 텔레타이프 통신선으로 구성됐다. 미국은 영문으로 전문을 보냈고 소련은 러시아어로 전문을 보냈다. 각 전문은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암호화됐다.
1963년 6월 20일 미국-소련 간 직통전화가 개설됐다.
▶1962년 제2한강교 기공
▶1962년 주민등록법 시행
▶1961년 케네디-이케다 회담
미국서 개최
▶1960년 말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캄보디아 시아누크
국가원수 취임
▶1955년 IMF와 IBRD 가입에 대한
국회 비준
▶1952년 부산에서
국제구락부사건 발생
▶1947년 서재필,
한미특별의정관에 취임
▶1946년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 발족
▶1935년 남경에서 민족주의단체
대표회의
▶1931년 후버 美대통령
`모라토리움` 선언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1933)후버가 1931년 6월 20일 오후 6시 성명을 발표, 세계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미국에 진 채무와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전시배상 지불을 7월 1일부터 1년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한
제31대 미국 대통령 후버.
이것이 바로 ‘후버 모라토리움’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전쟁ㆍ천재(天災)ㆍ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여 채무상환 기간이 도래했음에도 외채가 많아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 채무상환 기간의 일시적인 연기를 채무국이 요청하는 것, 즉 지급유예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된 독일은 당시 배상금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의 채무를 연차적으로 분할지급을 하거나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정치의 불안이 가중되고 외국단기자본의 인상ㆍ유출이 격화되어 독일은행이 차례로 도산하게 되자 경제가 마비됐다.
이에 후버가 전시채무 동결을 제안하는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하자 배상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과 불황에 빠진 연합국 각국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후버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쟁부채 배상안의 제안자인 오웬 영은 채권국의 현명한 처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논평했고 당초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선뜻 응하지 않던 프랑스도 결국 이에 동조했다.
▶1929년 소학교. 보통학교
규정개정공포
▶1927년 미국-영국-일본 3국
해군군축회의
▶1925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사망
▶1924년 언론 집회 압박 탄핵
민중대회 개최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창립.
회장에 조만식 선출
▶1911년 숙박 및 주거규칙 공포
▶1911년 삼림법 공포
▶1904년 일본, 만주군 총사령부 설치
▶ 1879년 프랑스, 국민대표의회 조직
▶ 1870년 프랑스 작가 쥘 콩쿠르(콩쿠르형제중 동생) 사망
▶ 1861년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 출생 - 필수영양소 비타민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
▶ 1837년 빅토리아 영국 여왕 즉위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 하노버 왕가 켄트 공작의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6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고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 당시 대영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시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제품이었다. 또 전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 또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 것도 빅토리아시대였다.
기나긴 64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1901년 1월 22일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했던 남편 알버트 공작의 뒤를 따라 눈을 감았다.
▶ 1819년 미국 증기선 사바사르호, 첫 대서양 횡단
▶ 1819년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출생
▶ 1789년 프랑스 삼부회 평민 의원과 자유주의적 귀족의원들이 모인 테니스코트의 서약
▶ 1646년 조선 명장 임경업 사망
▶1419년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위에서 내려다 본 소마도, 장도, 대마도
(전남 완도군 금일읍)전경.(항공촬영)
오랫동안 지리·정서적으로 일본보다 한국에 가까웠던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돼 우리 연안을 본격적으로 유린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 때의 격변기였다. 두 번이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화책을 써 봤지만 약탈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1년)에 이종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대마도 정벌군을 편성한다.
1419년 6월,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이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했다. 병선 227척에 병력이 1만7300명이나 된 대규모 해외원정군이었다. 6월 20일 대마도 아소만에 상륙한 정벌군이 대마도주의 항복을 권했으나 반응이 없자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129척의 선박을 소각·포획하고 가옥도 1940여채나 불태웠다. 왜구도 104명이나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삼았다. 이 정벌로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수십년간 지속돼온 국가의 근심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https://youtu.be/cCi89-V0PE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