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공부하는 데 있어서 그 혼융스러운 개념과 서술 때문에 많은 분들이 어려워 합니다.
나중에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요.
예를 들어, 불교의 시작과 종지를 모두 마음(心)에 담고 있기에 심외무불 같은 말도 생겨나고
어지럽습니다. 마음을 광폭적 의미 뿐만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을 뭉턱그려 서술하는데 골고루 사용하여
'마음'의 맥락적 의미가 늘 혼란스럽습니다.
힌두교는 상대적으로 논리정연해 보이는데, 모든 게 치밀하게 연결되어 어디를 가도 핵심으로 돌아옵니다.
핵으로서 진아, 핵의 반경으로 의식, 의식의 작용으로 마음을 분별해 놓아 대충 구분이 가능합니다.
특히 마음은 에고, 자아, 자의식의 뉘앙스로 타파해야 할 대상 또는 방해물로서 정의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마음은 불성, 의식, 마음, 자아를 포괄하여 말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요.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불교는 마음이 마음을 깨달고 생각이 생각을 깨달고 하는 말들이 태연하게
나옵니다. 힌두교에서는 이게 용인이 잘되지 않거나 그런 모호한 표현을 잘써지 않습니다.
또 번역상의 문제인데요. 불교의 제일 원리인 '무자성의 원리'에서 나오는 자성과 대승경전에서
심도 깊게 다루는 '자성'이 한자로서 같은 단어 입니다. 불교의 기초 핵심 원리인 자성은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성질'이라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의 자성은 불성으로서 정반대의 뜻이 담겨 있는
본질이란 뜻으로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의미상 정반대로 반대말입니다.
불교의 오리지날한 자성은 "본무자성"으로, 세계와 나, 사물의 존재성, 실존성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한마디로 '없다'는 것이지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지금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중국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불교의 주관적 관념론을 샹카 요가 학파에서도 맹렬히 비판하였는데
중국인과 같은 발상입니다. 이는 예쁜 여자가 내 눈 앞에 보이는데도 인식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보인다 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예쁜 처자의 존재성까지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과잉적이란
그런데 자성이 나중에 "일체자성"으로 젼변됩니다. 개도 풀도 나도 모두 불성 내지 다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갑자기 비본질론에서 본질론으로 급회전 하지요. 그래서 종국에는
진제와 속제의 차이도 없고, 부처와 중생의 차별도 없고, 정토와 예토의 구분도 없이 다 같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힌두교의 범아일여와 논리상, 내용상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성, 불성은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같습니다.
특히 중국인은 현실, 현재, 실용성을 철저히 숭상하는 문화이기에, 어찌 이 세상을 벗어나 저 세상이리오
라는 정신에 부합했지요. 물론 여기에 퀀텀 도약과도 같은 차원의 형질 변경이 있고, 불교도 세상의
여타 종교와 같은 대열에 참여했다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이 모든 게 고타마 붓다의 언설에 反하는 작용 또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고타마는 세상과 현실이란 환상과 같은 것이다라는 역류관인데 갑자기 순류관으로 바뀌어 버렸거든요.
또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의 사람에게 지혜의 식별이 일어나 나름 소화 시키며 받아들이는데
이게 대중에게 건너가 버리면 일반인에게 '여가 저고, 저가 여다, 노세 노세 함 놀아 보세. 화무는 십일홍이다'
몸과 정신은 밑바닥인데, 숭배하는 말은 하늘 끝의 아뇩다락샴막삼보리심이 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거두절미, 맥락을 도외시 하고 진제와 속제, 정토와 예토, 부처와 중생이 동일하다는 말은 최상승설이면서도
동시에 무리하게 연결시켜 불가분 관계로 만들어 놓아 사람에 따라 독처럼 작용하기도 합니다.
첫댓글 사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배후나 이면에 두 줄기 흐름의 대립이 있는데. 본질론과 현상론이지요. 모든 일신교 종교들, 힌두교, 유교, 도교(반 정도), 우리나라 전래 종교는 본질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대부분 인류가 본질론을 선택했지요. 그러나 불교만이 쿨하게 현상론을 주장했고, 그 주장의 바탕에 무자성과 공입니다. 변화, 관계, 상대성, 과정을 중시했지요. 그래서 불교의 특이성은 모두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중, 후반에서 불교는 갑작스레 본질론으로 회전합니다. 그 결과적으로 위에서 말한 자성 개념처럼 뒤범벅이 되어 있지요.
그리고 불교는 중국으로 건너가 버렸는데, 중국인은 실제로 불교의 유식과 유심론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과 '나'가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란 불교의 말을 도저히 소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성을 불성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중국인에게 진제와 속제, 정토와 예토, 부처와 중생은 전부 이 삶의 현실, 현재에 가져다 놓은 것은 중국인의 DNA에 아로 새겨진 본능 때문일 것입니다. 불교를 완전히 재해석하여 중국화 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고타마 붓다를 너무 숭상하여 그분의 말을 축어적으로 과잉 충성하고 있다고 비판하여, 언어에 대한 집착, 개념에 대한 숭상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고, 초기 불교는 뜻과 의미가 고타마 붓다가 말한 바와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있는 대승은 이미 정도를 벗어나 외도로 가고 있다고 당연히 보겠지요. 사실상 관점의 대립이 치열하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인도의 역사를 통털어 볼 때 크리슈나나 라마와 같은 존재는 인간 보다는 신적 존재에 보다 가깝습니다. 역사적 인간으로서 싯다르타 고타마가 인도 전체에서 인간으로서(그래서 사람이 가는 길, 인도인지)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고타마가 전체 힌두교에서 드리운 영향과 그림자는 엄청 났을 것인데요.....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힌두교가 다시 불교에 영향을 막대하게 주었고, 공간적 무대가 무대인 만큼, 불교도 서서히 힌두교의 중압감에 당할 수가 없어 서서히 힌두화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힌두화된 불교가 꼭 나쁜 것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종교는 알게 모르게 타 종교의 영향
을 받기 마련이지요...이 차원에서 불교의 순수성,일관성을 쿨하게 유지하려면 그 자신만을 본다면 불가능하고 타 종교와의 관계성을 파악해야 정확한 정체성이 나올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사성제, 팔정도 같은 것은 이미 힌두교, 여타 종교에 이름만 다르지 모두 다 있는 하나의 보편성 측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만 고유하게 있다는 것들 대부분은 힌두교에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공통으로 다 있었던 것입니다.
힌두교를 속깊이 알면 알수록 깜짝 놀라는 부분은 그게 기독교의 신학과 똑같다는 점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같습니다. 마하라지 문파의 선대 조사들 글을 21세기에 읽으면 그게 목사님 설교처럼 들린다는.....최근에 2대 마하라지 글을 읽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아는 3대 마하라지가 더 능변이기는 하지만. 마하라지도 계보학이더군요.
도서관에서 요가 책 2 권을 빌려 읽었는데 상당히 불교 사상 비판적이더군요. 요가는 당연히 색파 이기에, 공파적 불교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죠. 남회근도 색파적 인물인데 공과의 균형을 모색했지만 기조는 몸과 정서, 신체와 생리적 변화가 없다면 말짱 황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요. 그래서 요가적 인물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