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저지리 2482번지
소개되었던 주민들이 원래 자기 마을로 돌아와 살도록 하는 것을 ‘복귀’라고 했는데 복귀 시기는 마을마다 차이가 크다. 1949년 1월에 복귀 명령을 한 곳(제주시 봉개동)이 있는가 하면 바로 이웃 마을인데도 1953년에야 복귀한 마을(제주시 회천동)도 있다.
완전히 불태워 버렸던 마을로 돌아가서 살려고 하니 집이 없기 때문에 특정 장소에 임시움막을 지어 집단생활을 하면서 정상적인 집을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은 움막을 ‘함바집’이라고 불렀다.
함바집 ; 일본 사람들이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등지에서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도록 임시로 지은 건물을 함바라고 불렀다. 함바는 본래 일본어 한바(飯場 はんば)에서 온 말인데 한자어 그대로 하자면 밥을 먹는 장소인 셈이다. 4·3 당시에는 임시가건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자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1954년 제주도와 정부는 4・3 마을 재건 계획을 세웠다. 정부기록인 1955년 4・3사건피해상황조사서에는 당시 난민은 2074세대, 그리고 4・3 난민이 아니고 육지에서 전쟁을 피해 피난왔으나 돌아갈 곳 없는 세대 898세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중산간마을로 복귀를 희망하는 사람을 위해 난민정착귀농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 난민의 복귀를 위한 건축자재, 구호미, 농기구 등을 국고에서 지원했다. 마을 재건 계획은 1955~1959년 시행됐는데, 제주신보(1959.01.28.)에는 조사된 난민세대보다 많은 1만세대가 입주한 것으로 보도돼 있다. 이 신문에는 목표 1만세대 중 65%에 해당하는 6410세대가 입주를 완료했다고 써 있다. 당시 세대당 원조자재는 목재 750피트, 시멘트 7포, 못 20폰드이며, 그 외에 농우(農牛), 농기구들이 포함돼있다고 했다. 첫 입주식은 1954년 1월 조수리 주지동(불그못)에서 있었다.(제주신보 1954.01.31. 보도, 제주일보 2005.05.06.)
그 후에 5・16 쿠데타 이후 다시 한 번 4・3 난민 복귀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쿠데타로 집권한 명분과 정통성이 없는 정부가 4.3의 상흔을 달래는 정책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으며 사업명은 ‘4・3 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이었다. 1963년 제주도 간행물에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와 더불어 혁명정부가 보여준 2대 영단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혁명정부로서는 대단한 사업이었고 복귀를 희망한 4365세대 18,000명을 대상으로 1962~1963년간의 2개년 계획으로 정부지원이 실시되었다.
1962년 1차 사업 시에는 호당 25,000환, 1963년 2차 사업 시에는 호당 40,000환이 지원됐는데 제주신보 1963년 당시 기사에 의하면 그에 추가하여 농사자금 1호당 10,000환 3호당 소 한 마리, 그리고 땅을 개간한 사람은 땅을 개간자 명의로 등기해주고 1호당 10,000환씩 무상 지원하여 원주지 복귀를 지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5년 도민 1인당 소득이 30,658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위 신문은 ‘4・3 상흔 비로소 씻겨’라는 제목으로 명이동에서 복귀주택 입주식이 있었음을 보도한 것이다. 12세대에 43명이 입주하였다고 한다. 4・3 이재민들이 10여년이 지난 이 때까지도 정상적인 주택을 갖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명이동 복귀주택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새 집으로 바뀌었고 1동만 남아 있는데 위 신문에서 보도한 그 집은 아니다. 제주 전통 가옥의 모습과는 평면구조가 다르게 지어졌으며, 마루로 출입하는 문이나 창문이 알루미늄 샤시로 바뀌었다. 사람이 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작성 2026.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