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33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허균의 고향 강릉
경포대를 지나 강릉시 사천면 사천리의 교산자락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아웃사이더 중 한 사람인 허균이 태어났다. 교산은 아스라하게 펼쳐진 사천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같은 야산이다. 오대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모양이라고 해서 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고향을 지극히 사랑했던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지었다.
교산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며 정치가로, 경상감사 허엽과 강릉 김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균의 가문은 대대로 대문벌이었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의 아버지와 두 형도 모두 뛰어난 수재로, 동인의 중진이었다. 또한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고 조정의 요직에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도 많은 활약을 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허균 생가 가는 길허균은 강릉시 사천면 사천리의 교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교산은 아스라하게 펼쳐진 사천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같은 야산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주기파(主氣派)에 속하는 학자였다. 동서인이 대립할 때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허균의 5남매 중 위로 남인의 영수가 된 우성전의 처인 누이와 큰형 허성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작은형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은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남매간의 우애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은 허균은 유성룡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게 된다. 허균이 글을 배우는 동안 그의 뛰어난 재주를 접한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무엇이든지 한 번 들으면 기억했고, 당시(唐詩) 수백 수(首)를 며칠 만에 줄줄 외워버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허균을 일컬어 신동이나 천재라고 하기보다는 ‘귀신의 정(精)’이라 하였고, ‘도깨비의 화신’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허균 생가강릉시 초당동에 조선 중기 문장가인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생가로 알려진 집터가 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이익은 『성호사설』 중 「허균기성(許筠記性)」에서 허균의 재주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뭇 기러기가 날아갈 때 그 수를 세어보기 위해 혹은 셋이 하나, 셋이 둘, 혹은 다섯이 하나, 다섯이 둘로 세어, 셋이 몇이고 다섯이 몇임을 세어보면 전체의 수를 알 수가 있는데, 만약 하나하나씩 세어가면, 혹은 앞에 가고 뒤에 가서 번쩍하면 도로 미혹하게 되니, 이른바 주를 헤아린다[수주(數柱)]는 뜻이 역시 이러한 것인지라, 비로소 대체를 총괄하는 자는 그 뜻이 밝고, 세무(細務)를 애쓰는 자는 그 일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력이 슬기로운 사람으로 근세의 허균을 최고라 하니, 그는 눈에 한 번 거치기만 하면 문득 알아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험하기 위해 붓을 한 줌 가득 쥐고 들어서 그 붓끝을 보인 다음 붓을 감추고 얼마인가를 물었더니, 균이 눈으로 짐작하고 마음으로 추정하여 곧 벽을 향해 먹으로 표시하기를, 붓대 끝과 같이 하고 다시 하나하나를 헤아려서 능히 알아냈다.
이처럼 총명했던 허균의 사상과 학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이달이다. 이달은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당시(唐詩)를 연구하여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당시에 통달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하지만 가난한 데다 적자가 아닌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출셋길이 막혔음을 알고 나서 술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다.
허균이 일생에 걸쳐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스승 이달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달이 그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한 「화학(畵鶴)」이라는 시가 전한다.
외로운 학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밤이 차가워 다리를 하나 들고 있다
서녘 바람도 대숲도 괴로운데
몸에 가득 가을 이슬이 젖었다
불합리한 사회구조 때문에 스승이 재능과 큰 포부를 펼칠 수 없음을 가슴 아파했던 허균은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며 그들의 운명에 연민을 갖게 된다.
허균의 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명되자마자 파직되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공주목사를 거친 뒤 서른아홉의 나이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그는 동헌 뒷방을 깨끗이 치운 후 불상을 모셔두고 불경을 읽었다. 조정의 언관들이 가만둘 리 만무하였다. 허균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두 달 만에 봉불(奉佛)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황해도도사 시절에는 기생들을 관아에 끌어들였다고 해서 파직되었고, 수안군수로 재직할 당시에는 부처를 받들고 토호를 함부로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내 성품이 더럽고 거칠어서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이야기가 남을 칭찬하는 데 미치면 입이 머뭇거려지고, 발이 권세 있는 집의 대문에 이르면 걸음이 갑자기 얼어붙고, 높은 사람에게 절을 하려면 몸이 기둥처럼 뻣뻣해진다. 이런 떨떠름한 모습으로 높은 사람들을 뵈니 보는 이들이 금방 나를 미워해서 내 무례를 나무라려고 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저 강호에나 살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허균은 우여곡절 끝에 모반자로 능지처참 가산몰수 형을 선고받은 채 51세에 처형되었다. 허균은 그가 살았던 삶이 순탄하지 않았던 탓에 살아 있을 당시도 그러했듯이 죽은 뒤에도 여러 가지 평가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사상가 동주(東州) 이민구는 “재주가 펄펄 날리고 총명하기가 누구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동주집』)라고 했고, 순암(順庵) 안정복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다”(『동사강목』)라고 했으며, 명나라의 문장가 이정기는 “그의 글은 물굽이가 부드럽게 흐르는 모양과 같고, 변화와 아취가 훤하게 스며 있어서 감주의 만 가지 경치와 같고, 그의 시는 심오하고 미묘하며 화려하여 화천(華泉)의 정취가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명륜록(明倫錄)』의 저자 정광내는 “허균은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 그가 일생에 저지른 일은 모든 악을 망라한 것이요, 인륜의 도덕을 어지럽혔으며 행실을 더럽혔다. 이는 사람의 짓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까지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