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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엡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14 / [인사]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 언제나 주께 충성을 다하는 에베소의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영적 축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한없는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일을 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히 보시기에 한 점 흠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그분의 사랑 속에 싸여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 대신 죽게 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이 계획을 실천하셨습니다. 6)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7)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아들의 피를 흘리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갖게 하는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9) 그리스도를 보내신 심오한 뜻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오래 전에 정하신 그 계획은 10)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1) 이처럼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습니다. 12)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세우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성업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구원을 얻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오시기로 약속된 분입니다. 14) 우리 속에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실제로 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쳐 주신 성령의 인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셨음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에베소서는 기독교의 거대한 주제와 교리를 다룹니다. 1장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성부의 계획, 성자의 실행, 성령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사(1-2) “은혜와 평강이...있을지어다”는 전형적인 인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평강을 누리는 조건입니다. 어떤 소수의 사본에는 에베소를 빈칸으로 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서신이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회람용으로 여러 교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부의 역할(3-6) 여기서 바울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기 다른 역할과 협력을 마치 오케스트라의 화음처럼 조화롭게 엮어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이 복의 특성과 위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세상의 물질적인 복보다 더 높고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귀족의 상속자가 되는 것보다 낫습니다.”(Spurgeon) 이 복은 창세 전 성부의 선택에서 기인합니다. 창세 전의 선택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 그 이유가 변덕스럽지 않으며, 우리의 자격과 상관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뿐만 아니라 거룩을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4)란 구절은 창세 전의 선택이 우리의 거룩에 대한 책임을 축소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자의 역할(7-12)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apolutrosis)은 몸값을 받고 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피’는 예수의 전부를 나타내며, 죄인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주신 것은 그의 풍성한 은혜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당한 이유로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그리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성령의 역할(13-14)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협조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계획에 사람이 협조하도록 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곧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성령의 ‘인치심’의 의미는 소유권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 곧 구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적용: 주를 믿는 순간 당신은 헛되지 않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을 확인해 보세요.
신약에서 인치심을 받다(sealed)의 단어는 헬라어로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지키기 위해 또는 봉인된 물건을 보호 및 보존하기 위해 “개인적인 표식의 도장을 찍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믿음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죄와 불의를 떠나 그와 더불어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살도록 해야겠습니다(딤후 2:21).
< 설 교 >
성령의 보증의 은혜
엡 1:13-14 / 박덕기 목사
우리 기독교회의 신관은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관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영원 전에 성삼위 하나님의 도모가 있었는데, 곧 성부께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 구속하시기로 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성자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구원을 완성하도록 의논하신 것을 말합니다. 엡 1:1-6은 이 같은 성부의 선택에 대해서, 7-12은 성자의 구속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인 13-14은 성령께서 성자의 구속의 효력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시켜 주시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먼저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또한 구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딤후 3:15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살전 1:5의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동일하게 전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말씀을 능력과 큰 확신으로 신자들에게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진술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유럽에 처음 전하여졌는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곧 지금의 그리스 남단에 있는 빌립보 성의 강변에 모여 있는 여인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때 일단의 여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지만, 성령께서는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럽 최초의 신자가 생기게 되고,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 중에서 가장 모범된 빌립보 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은 진리에 대하여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만으로는 그 닫힌 마음을 열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말씀에 대하여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나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고전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또한 롬 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전도자들이 비방을 받으면서 전철 안이며, 길이며,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복음을 증거 합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이 진리임을 깨닫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로 알고, 깨닫고, 믿는 사람보다는 조롱하고, 비방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알고, 깨닫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역시 처음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믿었습니까? 복음을 듣자마자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짐으로, 가슴이 뭉클하고 감격스럽던가요?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고, 복음의 진수를 들어도 썩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구제 불능의 인간인가 하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자신은 전혀 소망이 없는 존재이고,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 콧물을 쏟습니다. 그렇다고 사회 도덕적으로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회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지은 어떤 죄인보다도, 자신이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짐으로써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절로 결심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경험들이 있으십니까? 이것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눈을 뜨는 것은 결코 인간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눈을 뜨게 해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복음 진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하나님은 성삼위 가운데서도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는 보혜사십니다. 우리를 일일이 지도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시고, 깨우치시기 위해, 곁에 계시는 선생님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단지 ‘너희는 성령으로 인침’ 받았다고 만 말하지 않고, 특별하게 ‘약속의 성령’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너희는 그 거룩한 그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고 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여기 ‘그 거룩한 그 약속’ 이란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 무수합니다. 이사야서에는 성령이 부어질 날을 가리키는 말씀이 많습니다. 특별히 40장에서 66장까지의 부분에서 그러합니다. 에스겔서에는 36장과 37장에서 성령에 대한 약속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약속은 요엘서에 예언된 말씀일 것입니다. 곧 요엘 2:28에 말씀하기를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들이 바로 ‘약속의 성령’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성령을 받은 결과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주님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많이 하셨는데, 곧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약속의 성령’이란 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구약의 이사야, 에스겔, 요엘 등의 선지자가, 신약의 세례 요한이, 그리고 주님 자신이 약속하신 ‘그 성령’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인침’이라는 말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인침’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용례를 살펴보면, 주로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침’은 권위를 상징하고 진품임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집이나 토지를 사고 팔 경우, 두 사람이 사이에 계약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만일 그 문서에 도장이 찍혀있지 않는 것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가짜인 것입니다. 이처럼 도장은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침은 ‘소유권’의 표시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흔히 동물들의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들의 몸에 인을 쳐서, 그것들이 자기에게 속한 것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재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성경 찬송가-교회용) 이처럼 도장을 찍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 도장을 사용한 사람의 소유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도장은 안전보장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우편물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안전하게 배달되기를 바란다면 도장으로 표시했습니다. 만일 그 도장을 찍은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면 누군가 그 편지를 뜯어 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 같은 분명한 예가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로마 당국자들과 유대인들은 무덤 문에 돌을 굴려 막고, 거기에 황제의 인을 쳐서 봉하였습니다. 혹시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까 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침’이란 말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위나 진정성, 소유권, 그리고 안전보장입니다. 이 세 가지 의미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인침’에 대한 중요한 용법이 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인 쳤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주님은 하나님에 의하여 진정한 아들임을 보증 받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권위를 주시고, 자신의 주장이 참인 것을 인 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부께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 치신 사실은 복음서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곧 주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고, 변화 산에서 변화하신 후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과연 메시아이신지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 너희는 가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그러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보증해 주는 ‘인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인침’이란 말의 일반적인 용례와, 성경에서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쓰여 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일반적인 경우에서나 성경에서 그 용례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경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성부의 선언이 있었고, 그 소리가 주님의 일과 말씀을 통하여 확증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께 무어라고 하든지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마귀가 주님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 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침’이란 말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주님의 경우와 전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과거 구약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이 할례라는 인침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증표를 삼았었다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신약의 선민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침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구속받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증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확증된 성도로 하여금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하시며,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좀더 나아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것을 확증하는 증표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늘나라의 기업을 확실하게 상속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가장 명백한 증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또 성령의 ‘보증’이란 말이 나오는데, 성령의 인침과 보증은 불가분리적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보증’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계약금조로 주어지는 보증금을 나타낼 때 쓰여 집니다. 어떤 사람이 땅이나 집을 산다고 합시다. 그럴 때 보통 땅값이나 집값을 처음부터 전액 다 지불하지 않고, 얼마 후에 나머지 모든 금액을 완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산 사람은 판 사람에게 나머지 금액을 완불하겠다는 계약금조로 얼마를 줍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보증’이란 단어는 ‘아라본’인데, 이 단어 역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계약금 또는 보증금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라본’은 어떤 것을 매매하였을 때 나머지 잔금을 반드시 완불하겠다는 보증으로서 미리 지불하는 매매 대금의 일부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후 1:21에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고, 고후 5:5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아라본’ 즉 ‘보증’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주실 나머지의 모든 구원의 축복에 대한 보증금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은 우리가 언젠가 틀림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이 충만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보증인 것입니다. ‘보증’이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보증, 말로 형용할 수없는 하늘나라의 복락에 대한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시작하여, 이제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해야 합니까? 고전 19-20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고, 롬 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중 ‘삶과 죽음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뇨?’는 질문이 있는데, 그 답은 “육과 영을 가진 내가, 삶에서나 죽음에서나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것과, 나는 그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며, 사탄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받았으며, 따라서 나의 하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내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성령으로 하나님은 나에게 영생을 확증하시며, 마음으로부터 즐거이 그를 위하여 살도록 만드신다는 사실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하나님의 ‘인침’과 ‘보증’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인’ 곧 도장이나 ‘보증’은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그래서 불확실합니다. 그 예로 우리는 무슨 재벌 그룹이 파산하면 그 재벌이 운영하는 투자금융회사에 맡긴 돈의 인출이 어렵게 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침’과 ‘보증’이야말로 절대 완전하고, 절대 완벽해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갖가지 은총은 물론이고, 말로 다할 수없는 잔금과 같은 하늘의 영광을 반드시 얻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이 구속의 공로를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우리 개인의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받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에 절대로 안전하게 보장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또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티끌과 같은 나, 죄인 괴수와도 같은 나를 위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 성령 하나님의 인치시고 보증해주신 은혜에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고, 천국의 기업에 대한 보증금조로 성령을 받은 성도 여러분 모두가 잔금과 같은 하늘나라의 영생 복락을 다 받아 누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 이종철 목사
성령의 확증
모든 계약서나 결재 문서에는 서명이 필요합니다. 임대차 계약서는 도장을 찍음으로써 완료됩니다. 어떤 사업을 할 때 결재 사인이 나기까지 힘이 들지만 최종 사인이 나면 권위와 합법성을 가지고 그 일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여권에 비자(어원: 배서하다, 보증하다)나 출입국 도장이 찍히면 그 기간 동안에는 해당 국가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도장의 힘이요 권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도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최종 결재 사인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결재 사인이고,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이 성령의 결재 사인을 보여주면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이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는 구약의 전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성서가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새롭게 등장한 신흥종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믿는 자들도 믿지 않는 자들도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서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자녀 되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역시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입니다. 이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의하면 이때까지는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으로 개종을 하고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고넬료는 그런 개종한 이방인도 아니요 할례도 받지 않는 그야말로 순수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를 처음 만나자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10:28)라며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44-47) 율법도 지키지 않은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들을 받으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가 보고하면서 동일한 말을 합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그러자 전체 교회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고 인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매우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율법을 버리고 이방인 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데 이 영이 이방인들에게 임했다는 것은 그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을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성령의 임재를 보면서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율법을 초월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을 통한 확신을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2)
성령 체험
그러면 그들은 이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단지 말씀이 그러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았다, 불의 혀처럼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복음을 전할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나 은사나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느낄 수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이성이나 믿음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확신을 갖는 것은 이런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이 성령의 체험이 필요한가? 물론 초대교회는 예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한 형태로 하나님이 역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고전12:3). 그러나 교회사 곳곳에서는 성령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그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열정과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들을 감당했습니다.
성령체험을 과거의 일로만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체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인치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이나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확신입니다. 사랑은 은근하게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느 날 체험한 강한 사랑의 확신이 우리를 평생 동안 충성된 증인으로 만듭니다. 교회사에서 성령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신했던 몇 몇 인물들의 사례를 들고 싶습니다.(아래 인용문들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에베소서 강해』 1권에서 인용함)
청교도 존 프라벨의 체험입니다. “그는 길을 가면서 생각이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결국 그의 생각들은 도도한 홍수같이 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늘 기쁨과 하늘에 있는 그의 기업에 대한 충만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 그 밖의 세상은 마치 없는 듯하였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체험입니다. “1737년 나는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속으로 나들이를 하였다.. 그때 나는 특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그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전하고 꿀같이 단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자애로운 겸손 등이 아주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 시간 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그만 눈물이 홍수같이 흘렀고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내 영혼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워지고 소멸되는 것을 느꼈고, 나는 마치 그것들이 먼지에 불과한 것처럼 느꼈다. 오직 내 영혼은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져 있으며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를 신뢰하며 그를 의지하고 살며 그를 섬기고 따르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을 느꼈다.”
위대한 전도자 무디의 체험입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여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그날이 왔다. 뉴욕시 월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오! 그날을 나는 무어라고 묘사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어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정도로 거룩한 체험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자신을 보여주셨다고 하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의 체험이 어찌나 강하였든지 나는 하나님의 손을 멈추라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체험입니다. “바로 그런 일이 있는 직후에 나는 나를 그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음하는 영이 내게서 제거되었다... 내 친구들은 내가 그렇게 발랄하고 그처럼 생동감 있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나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 체험을 합니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뢰함을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와 ‘내 것’을 다 도말하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였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이런 종교적 경험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생리적, 안전, 사랑과 소속감, 존경, 자아실현)를 분석하면서 심리적으로 최고의 단계를 ‘절정 경험’이라 불렀습니다. 절정 경험은 깊은 몰입과 황홀감을 수반하는 개인의 인생에서 최고로 고양된 만족과 환희의 체험입니다. 그 결과 “심리적인 병이 제거되고, 자신을 보다 건강한 양식으로 보고, 타인을 보는 견해와 타인과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세계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며, 창의성, 표현력과 자발성이 표출되고, 궁극적으로 인생을 넓고 값진 것으로 보게 된다.”고 그 체험이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19세기의 미국의 사상가이자 의학자요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종교인이건 일반인이건 신비 체험을 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분석한 책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책에서 종교체험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 경험이란 반드시 궁극적이고 성스러운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둘째, 종교적 경험의 의미는 그 경험을 갖기 이전의 상태와는 달리 완전한 삶의 변화를 보여준다. 궁극적인 실재 앞에서 인간은 좀 더 겸손하고 엄숙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갖는다. 그 전에는 만끽하지 못하였던 행복감, 감사하는 마음, 기쁨, 환희, 순종하는 마음, 희생하려는 마음으로 그 경험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의 인격이 풍성하게 채워진다... 셋째, 종교적 경험의 특징은 예술이 제공해주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의 심미적 삶을 갖도록 해준다. 하찮은 풀 한 포기나 나뭇잎을 통해서도 삼라만상의 신비스러움과 조화를 갖도록 해준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경험의 특징은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에는 깨닫지 못하였던 본연의 마음을 깨닫게 되어서 일상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해왔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의 모습들을 수정하게 해준다.”
체험이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줍니다. 체험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과거의 사건으로 만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현재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기업의 보증
성령으로 인쳤다 말은 또한 소유주를 나타냅니다. 자기 소유의 짐승에는 낙인을 찍어서 구별합니다. 자기 그림이나 자기 글씨에는 낙관을 찍어서 표시합니다.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쳤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 짐승들이 섞여 있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알고 구분해냅니다. 보면 대번에 알 수 있고, 표시가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도 그 소유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수십 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직장을 다니다 보면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존재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8)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유치원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다 똑같은 유치원 복을 입혀 놓고 키도 고만고만해서 잘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눈은 제 딸만 찾았고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 소유이고 내 사랑하는 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볼 때 우리가 그런 존재들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14만 4천 명이 나오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계14:1) 우리에게 하나님의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멀리 하늘나라에서 보시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또한 성령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고 설명합니다. 기업이란 말은 유업 또는 상속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막대한 유산이 상속으로 주어질 예정입니다. 막대한 상속이 주어지기 전에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보증은 지불금 전체를 주기 전에 미리 일부를 주는 약조금을 말합니다. 미리 약조금을 줌으로써 법적인 권리를 보장하면서 미리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은 하늘나라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미래만 바라보며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미리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이 바로 약조금으로, 그 보증금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처음 익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첫 열매를 맛봄으로써 우리는 곧 다가올 수확의 때를 기다립니다. 바울은 여기서 몸의 속량, 곧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미래의 먼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장차 하늘에서 주어질 평화, 기쁨, 사랑, 능력, 승리, 풍요, 영광을 바로 이 땅에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장차 막대한 유산을 받을 자는 현실은 가난하지만 그 가난이 그들을 좌절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그 행복을 누립니다. 그 권세를 행사합니다. 상속이 약속된 자를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여유와 용서는 우리가 장차 가지게 될 풍요로움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 안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와 권세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성자의 구속의 은혜
엡 1:7-12 / 박덕기 목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땅위의 복도 좋다고 하면 하늘의 복은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선택해주심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같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고 싶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구원을 어떻게 이루셨는가에 관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도모 혹은 의논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곧 성부는 그것을 계획하셨고, 성자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시고,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기로 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3-6절 부분을 중심으로 ‘성부의 선택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렸고, 오늘은 7-12절을 중심해서 ‘성자의 구속의 은혜’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먼저 7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는데, 이 한 구절만으로도 기독교 복음과 신앙의 진수를 요약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들이 거룩하게 되어서 흠도 없고, 책망할 것도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의 오점도 없는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그 같은 축복을 받게 된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밝혀줍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지위를 얻는데 가장 큰 장애는 죄의 장벽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낸 것은 우리들의 죄악입니다. 사 59:1-2에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구원을 얻기 전에, 우리들의 죄악에 대하여 어떤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해를 누릴 수 있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악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의 중심과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진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7절에서 우리는 ‘구속’이라는 매우 중요한 단어를 대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구속’이라는 용어가 구약이나 신약에서 어떤 의미로 쓰여 졌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속전을 주고 구출하여 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는데, 그가 구속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값을 지불해 주어야만 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구속’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말의 용법을 확증하여 주셨는데, 즉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곧 ‘속전’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류는 모두 죄의 노예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여기에 구원교리의 진수와 핵심이 있습니다. 롬 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고, 엡 2:13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했으며, 히 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고, 벧전 1:18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으며, 요일 1:7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으며, 계 1:5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들은 모두 장차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죄는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서의 죄는 제사장이 동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러한 다음에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언제나 인간대신 동물이 죽임을 당함으로, 죄를 범한 사람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구약의 동물 제사들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예고요 그림자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친히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만일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는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어서도 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스스로 모순 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더 이상 의로우신 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죄는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것이라서, 어떤 것도 그것을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의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 징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죄 사함은 얼마나 철저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법을 어긴 범법자로 하여금,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들을 단번에 도말하여 버리셨는데, 이는 마치 채주가 빚 문서를 다 찢어버리며 없애버린 것처럼 우리 죄를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우리들의 죄악을 보시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니”라고 했고, 렘 31:34에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들은 이 놀라운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이미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모르는 신자는, 참으로 불쌍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들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엡 2:4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했고, 엡 2:7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했으며, 엡 3:8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전 핍박자였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었고, 기독교회에 커다란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용서를 받았고, 그러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사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바람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았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사도 바울로 하여금 전도자가 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대륙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눈물로 간구하며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고, 그것이 그를 지탱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로다’라는 말을 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보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 중에 어떤 것이라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깨달은 사람치고 놀라지 아니하고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을 가장 예민하게 점검할 수 있는 시금석 중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하여 얼마나 감격하는지 그 정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결코 다함이 없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에 그 많은 성도들이 이 샘에서 다 마셨지만, 그 은혜의 샘은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수 천만 수 십 억의 사람들이 그 은혜의 샘에서 마셨지만, 그 샘은 여전히 줄어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때에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다만 “너희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교 개혁 이전에 뿐만 아니라, 오늘 날도 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려 들고, 또 무언가 어떤 공로로 보상을 받아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돈 없이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에베소서의 기록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상의 깊이나 범위에 있어서 너무도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 구절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적 목적을 알려주는 진술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개인적 구원보다 크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것입니다. 여기 ‘통일되게’란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다시 통일되게’라는 뜻입니다. 이 ‘다시’라는 말 ‘재통일’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재통일하려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상태는 지극히 선한 것이었으며,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한 평화와 조화와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완전한 조화와 질서를 거역하는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마귀가 반역을 자행하였고 타락한 것입니다. 그 때 천사들 중 많은 수가 마귀를 따라 타락하였습니다. 타락한 천사, 곧 마귀 사탄이 내려와서 사람을 유혹하였고, 그래서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싸움과 다툼, 시기와 질투, 전쟁과 살인 같은 죄악들이 저질러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타락할 때 땅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세상에는 고통과 질병, 죽음과 저주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평화와 조화와 질서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원래의 조화롭고 아름다운 상태는 참으로 비참한 상태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비밀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다시 재통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사 하나님과 화해하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을 없이하고, 사람과 사람들끼리 화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조화와 질서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시 회복되고 재통일 될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그립고 사모되어지는 세계입니까? 모든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재통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같은 하나님의 후사일 뿐 아니라,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하고, 주님의 영광을 함께 길이 누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바로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 할 것입니다.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싸우고, 권세 때문에, 애정 때문에, 인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미워하고 죽이고 합니다. 이 모든 죄악들이 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러한 일들만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축복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기업’의 그 영광스럽고 찬란함, 그 부요함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들이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매우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더 이상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 위엣 것을 생각하는 다른 모든 성도들이,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된 사람들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싸움이나 분쟁이나 중간에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도록, 서로 서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습니까? 그의 피로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의 피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노예에서 구속하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복 있는 사람은 곧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천지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편 32:1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주시는데 그 사죄의 철저함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것은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과를 멀리 치워버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눈에도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리고 덮어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를 아예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으로 간주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아십니까? 체험하여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송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 바쳐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장엄하고 웅대한 계획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천사들,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통일 정도만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없는 곳, 싸움과 전쟁이 없는 곳, 고통과 질병과 저주가 없는 곳, 한숨과 눈물이 없고, 가난이 없는 곳, 완벽한 조화와 절대적인 질서와 평화가 충만한 곳, 희락과 평강이 넘치는 세계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인고로, 우리에게 반드시 그러한 날이 오게 하실 것이고, 그러한 복락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될 소중한 형제들인데, 이 땅위에서 사는 동안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서로 사랑하며 살다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저 좋은 낙원에 다 이르게 되시기를, 우리를 마귀와 죄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형벌에서 구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보혈의 능력
엡 1:7-10 / 피종진 목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능력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이를테면 말씀을 통해서 또는 찬송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또 그 능력 안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능력 중에 가장 귀한 능력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능력을 친히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어떠한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7절) 아무리 황금만능시대라고 하지만 그리고 이 땅에 독재와 권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의 죄는 절대로 어떤 인간의 권력이나 무력이나 지력이나 체력이나 금력에 의해서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대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해줍니다. 요한1서 1:7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원문에 보면 '용서한다, 석방시켜준다, 탕감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죽을 죄를 범한 사람도 삼일절이나 광복절에 대통령 권한으로 특사가 내려지면 그분은 10년 징역을 받았든지, 종신형을 받았든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할지라도 용서받아서 자유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 모든 죄를 탕감 받았습니다. 빚이 있는 사람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어서 하인 노릇, 노예생활을 하고, 죄인같이 그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사는데 그 빚을 다 없는 것으로 탕감해주는 싸인만 하면 그 분은 그 때부터는 그 빚 때문에 조금도 고통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이 죄 짐 때문에 수고하고 고통을 당하며, 슬픈 비극이 오고, 내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며 천국에 이를 수 없게 되는데, 예수님의 그 보혈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시는 능력이 되어주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5에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죄가 남의 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죄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18, 19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186장)라는 가사가 있지요. 하나님 앞에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고 그 피로 씻음 받게 되는 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고 복된 자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입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7절상)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사유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는 죄인으로서 심판을 받고 형벌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여기에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인데,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고, 천국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선물의 종류가 많이 있지만 영생에 관한 선물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찬송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은혜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라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은총을 입게 하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사도행전 13:43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객지에 있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많이 있지요. '항상 건강 조심해라. 음식 조심하고 길 조심하라. 때를 거르지 말고 밥을 먹으라. 좋은 친구 사귀라.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라. 차 조심해라' 등등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주님의 은혜가 나의 피난처요, 영원히 누릴 안식처입니다. 주의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물을 떠난 고기와 같습니다.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땅에서 뽑힌 나무 뿌리와 같습니다. 은혜 안에서 거하며, 일평생 '주여, 나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은혜를 벗어나서 나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날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인색하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풍성하게, 부요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릇만 되면 언제든지 채워주시고, 입만 벌리면 언제나 채워주시고,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만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4:16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풍성하게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능력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였는데,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게 했습니다. 자유를 누리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죄에 대한 징계, 저주, 심판을 받게 되지만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 할지라도 참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물질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적어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만이 참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3에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구속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저주가 없습니다. 잠언 26:2에 보면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저주도 참새의 떠도는 것과 같이, 제비의 날아가는 것과 같이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구속의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의 찬송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게 하셨습니다.
넷째,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능력입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왜 귀합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음부의 권세와 사망의 형벌을 면케 하여주셨고, 영생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사망의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이 사실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영원토록 누리는 영광만이 있습니다. 천국은 저주도 없고 눈물도, 죽음도, 이별도 없는 곳입니다.
D. L 무디는 임종 때에 울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서 '왜 이렇게들 울고 있느냐? 저 천국이 보이지 않느냐? 천국이 저렇게 좋은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일찍 못간 것이 후회되는데, 나 무디는 천국으로 이사가는 것이다. 내일 무디가 죽었다고 신문에 나거든 믿지 말아라. 죽은 것이 아니라 나는 천국으로 이사가는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지옥에 들어가지 못하게 지옥문을 막아버리고 천국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 구속의 은혜를 일평생 우리는 찬송해야 됩니다. 숨쉬는 순간마다 찬송해야 합니다. 눈을 뜨는 순간마다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에 그 은혜를 항상 우리가 누리면서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 속에 이 구원의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절)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둘이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골로새서 1:20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화평을 이루고 통일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도 정치나 이데올로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 속에서 하나가 되고, 그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죄악에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입게 하시며, 율법의 저주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 비밀이 열리다
에베소서 1:7-12 / 이규헌 목사
우리는 항상 첫 번째로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나를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면 나에게 있는 문제도 풀립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광대한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매우 중요합니다. 출애굽 직전, 애굽의 장자들이 죽어갔지만 히브리인의 가정에는 그 재앙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모든 것을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온 저주의 고리를 끊어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수님이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저주가 끝이 났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우리 삶에 더 이상의 저주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난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결핍에서 벗어나 부요함을 얻었습니다. 죄로 인한 저주는 수치와 부끄러움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치는 끝이 나고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태에서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소망이 없던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고 악독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은혜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모조리 쓸어버렸던 그 무서운 죄의 원흉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반전의 드라마가 연출됩니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면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서의 가장 귀중한 영적 경험은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은혜의 법칙입니다. 은혜를 받는 자들이 은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힘의 원리 또 율법의 논리입니다. 따지고 정죄하고 처벌합니다.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칭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봐주신 것이지,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들고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비난과 정죄의 화살이 오고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은혜의 렌즈를 통해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은혜받은 자들은 은혜를 베풀며 살아갑니다. 내가 깨끗하게 산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경력이 쌓였다는 말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난다면 은혜의 감격이 식었다는 증거입니다. 상식적이지 않고 원칙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거슬리나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받쳐주고 있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가 눈을 뜨고 발견한 하늘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8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하늘의 비밀은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지혜와 총명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과거는 미련함과 우둔함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둔함, 미련함, 영적 무지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의 뜻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성을 가진 사람이 자연계 안에서는 총명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영적인 세계로 넘어가면 무지의 상태가 됩니다. 오늘날은 지성 사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성을 자랑한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영적인 비밀에 대해서 무지를 드러냅니다. 스스로 얼마나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계층에 속했습니다. 그 나라의 리더였고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영적인 비밀은 성령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분 짓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릅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영의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영의 눈이 뜨여지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지성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나타납니다.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요즘은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을 학문화해서 반격합니다. 전도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고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의미 없어 보여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뿐이지 우리가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면 의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전혀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믿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이란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다 이해하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은 다릅니다. 깨달아지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밀려오기 때문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에베소서에는 ‘비밀’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여기에서 비밀이란 알려진 비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비밀이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 안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드러난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은 하늘의 비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큐나 어떤 학식의 정도와 관계없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갈수록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최근 챗GPT로 인해 AI 시대가 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축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간이 가진 지식의 한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평생을 탐색하고 답을 찾고자 애를 썼습니다. “17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7-18)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 자체는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해하지 못할까요? 영혼이 어두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내면세계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려는 강한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전혀 눈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종교 생활로만 만족하고 있을 뿐이지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 없이, 이성의 힘만으로는 신앙생활에 진입이 안 됩니다. 지성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육안으로 보는 것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일반적인 지혜가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이 지각과 지혜의 영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눈이 열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바깥 세계에 있을 때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면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시고자 하는 일이 보이기 시작하면 신앙생활이 행복해집니다. 일상에서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축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성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실패일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는 사람은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힘이 생깁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을 잃고, 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계획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을 빼야 합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에 순복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이 얼마나 큰가를 알면 불평보다 감사가 넘칩니다.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이 복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넘칠 때 하늘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연합하게 하고 화목하게 하십니다. 죄가 시작되면서 세상에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깨어진 것입니다. 피조계 안에 부조화와 무질서가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모든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땅과 하늘이 불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광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주신 사명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계획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하실 일은 굉장히 우주적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대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 창조 시부터 예수의 재림까지 예수를 믿는 모든 백성과 족속과 방언을 다 포함합니다. 천군 천사와 모든 피조물을 다 통일시키는 날이 올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만물이 고통하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홍수, 태풍, 지진, 기근, 각종 질병, 전염병, 전쟁, 내전 등으로 대량살육극이 벌어지는 일들은 저주 아래에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물론 피조 세계 전체에 신음이 깊어졌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피조물의 탄식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이 다 주께로 돌아올 때까지 그것이 유보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이 시작되었고 인간의 구원을 통해 다시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입니다. 개인의 구원이 가정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가정의 구원이 민족의 구원으로 이어지고, 민족 구원이 열방의 구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피조 세계 전체를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시키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 구원의 뜻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만의 구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민사상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바울은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면서 유대인만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모든 만민을 불러 모으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요, 에클레시아입니다. 주님은 한 교회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또 한 교파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주인이시고 온 세상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 반역하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일치를 볼 수가 없고 분쟁과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재난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악은 기승을 부리며 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인간의 삶을 파괴적으로 몰아갑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종말론적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역사의 끝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성경적 역사관은 비록 그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그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관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에 의하여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완성될 왕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모든 피조물이 회복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아들들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들의 회복이 먼저 일어난 후에 다른 피조물들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찾아올 완전한 조화를 소망하게 됩니다. 지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산통을 치르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질 약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복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을 백성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32:9),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의 계획에 따라 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물의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장래의 상속이 주어졌습니다. 그 상속은 하나님의 손으로 완전히 회복된 나라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는 다 끝나고 사라집니다. 악도 소멸하고 마귀도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마지막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그날을 기대하고 인내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보혈
엡 1:7-10 / 최성규 목사
성경은 피 흘림의 역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세상이 물로 심판 받을 때, 구원받은 노아가족은 방주에서 나와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막으셨고 아브라함은 숫양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했고,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피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거룩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개인을 위한 피가 흘렀습니다. 아라랏 산에서는 노아 가족을 위한 피가 흘렀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는 믿음의 가문을 위한 피가 흘렀습니다. 시내 산에서는 한 민족을 위한 피가 흘렀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는 온 인류를 위해 피가 흘렀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습니다(히 9:22).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혈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구원받은 성도들마저도 세상 일과 세상 유혹에 빠져서 예수 보혈을 잊고 삽니다. 2010년 사순절을 맞아, 예수 보혈을 기억합시다. 보혈의 은혜를 회복합시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신앙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사순절이 됩시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
성경말씀 중의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하지 않고 다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버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세상의 사랑은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를 만들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하든’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한다고 해서 더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실수를 다 아심에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추한 모습을 다 아심에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약함을 아심에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인간은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십자가 바로 아래서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덮으십니다. 더 이상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히 10:17,18). 이 사랑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믿읍시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 이보다 더 위대한 신분은 없습니다. 혹시 환경이 어려워진다고 해도 기죽지 맙시다. 고난이 닥친다 해도 비굴해지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롬 8:37).
둘째, 구원
예수 보혈은 구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은혜임과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야 할 정도로 인간의 현실이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현실은 멸망과 죽음입니다(빌 3:19 계 3:1). 인간의 현실은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는 차와 같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르게 달린다고 좋아합니다. 더 빨리 달리자고 재촉합니다. 길 끝에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달립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차에서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보혈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릴 수 없습니다. 예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고 가르칩니다. 예수 보혈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부패함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실패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우리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구원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 보혈이 절실합니다. 현대인은 죄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보혈 찬송을 많이 부르고 예수 보혈을 자랑하고 선포합시다. 예수 보혈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힘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입니다. 세상을 바꿀 힘입니다. 예수 보혈이 흐르는 곳에 자유함이 넘칩니다.
셋째, 능력
예수 보혈은 능력입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질병을 건강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예수 보혈의 능력을 모르는 성도는 없습니다. 문제는 악한 마귀와 세상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와 세상은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학력이 짧으니, 너는 부족해.” “외모가 안 되니, 넌 낙오자야.” “물질이 없으니, 너는 안 돼.” “사는 동네가 그러니, 네 자녀는 실패할거야.”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듣고 스스로를 무능하게 여깁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도전도 해보지 않은 채 포기합니다.
진짜 능력은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보혈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보혈의 능력으로 삽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보혈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습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습니다. 보혈로 구원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이 질병을 낫게 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인류를 살리신 분, 예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예수 보혈로 이겼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7-9)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 보혈의 능력을 믿고 현실에 정면 대결합시다. 세상이 말하는 능력은 가짜 능력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은 가짜 행복입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 있든 예수 보혈을 선포합시다. 예수 보혈이 능력입니다. 예수 보혈이 행복입니다.
예수 보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입니다. 능력입니다. 예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지금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 보혈이 흘러넘치게 합시다. 우리의 일터를, 인천광역시를, 대한민국을, 저 북한 땅을 예수 보혈로 인칩시다.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잊었던 보혈의 능력을 사순절 기간을 맞아 회복합시다. 예수 보혈의 은혜를 회복하면 악이 물러가고, 선이 바로 섭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된 나라가 됩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엡 1:7-14 / 김광일 목사
18세기 독일에 진젠도르프(Nikolas Ludwig Zinzendorf) 백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토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갔습니다. 이 그림 저 그림을 보다가 한 그림에 눈이 멈춰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림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쓰여 있습니다. 양손에는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는 창에 찔린 채 피가 흘러내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의 허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피가 실제로 흘러내림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진젠도르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나는 예수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충격적 사건이 진젠도르프 백작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진젠도르프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졌습니다.
많은 토지를 떼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침 그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해 진젠도르프의 영지 가까이 피신을 왔을 때 그들에게 많은 땅을 내어주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곳에 헤른포트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경건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진젠도르프의 눈에 보였던 예수의 붉은 피가 십자가에 흐르고 있음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예수의 붉은 피를 보아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려나?’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십자가 밑에서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있던 로마병사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본서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택의 축복을 언급하면서 선택의 유일한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동등한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의 보배로운 피로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다고 말합니다.
다같이 ‘보혈을 지나’를 찬양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바울은 선택의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보혈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에 부합하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속량을 받았느니라
요한 웨슬리(John Wesley) 목사가 어느 날 밤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그의 주머니를 뒤졌지만 돈이 없습니다. “야! 돈이나 가지고 다니라”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웨슬리가 강도에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이것도 가져가시오”강도는 혹시 숨겨놓은 돈이라도 주는 가해서 돌아섰습니다. 그때 웨슬리 목사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압니까? 비록 도둑질을 하고 다녀도 예수의 보혈을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대답합니다. “아니, 뭐라도 얻을 줄 알았더니만 보혈?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3년 후 웨슬리 목사가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인사를 하는데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3년 전에 목사님을 해치려고 했던 강도입니다. 그날 저에게 하신 보혈의 이야기를 듣고 내내 마음속에 ‘보혈, 보혈’ 이라는 음성이 들려서 할 수 없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목사님 덕분입니다.” 그때 웨슬리 목사는 회심한 강도를 보고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속량’의 원어는 ‘텐 아폴뤼트로신’인데 노예들이 자유를 얻거나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는 속전의 의미입니다. 즉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속량의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마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뿌렸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희생 제사는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제물된 짐승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제물에게 죄를 전가하였습니다. 짐승은 백성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값이 지불 되었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피값에 의한 속량이며 구속입니다. 구속받았음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업이 되었느니라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의 단편 가운데 ‘사람에게 땅은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도시에 살던 파홈은 시골의 땅을 사기 원했습니다. 그는 “자기 원하는 만큼의 땅이 있으면 누구도 부럽지 않고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촌장에게 땅을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촌장은 하루 동안 가지고 싶은 만큼의 땅을 걸어 다닌 후 표시하여 해가 질 때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표시한 땅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파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쉬지 않고 다녔습니다. 옆을 지나다 보니 연못도 탐이 났습니다. 풀밭도 탐이 났습니다. 작은 숲도 탐이 났습니다. 어느 하나 가지고 싶지 않은 땅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간신히 출발점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파홈에게 남은 것은 자기가 묻힐 만한 크기의 땅이었습니다. 악마가 파홈이 차지한 땅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땅이 기업이 되면 욕망이 생깁니다. 욕망이 기업이 되면 망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 늘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기업이 되었으니’의 원어 ‘에클레로데멘’은 ‘제비를 뽑아 지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어떤 기업을 받는다는 의미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하시고 남기신 자이기에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업을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된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하나님의 기업은 하나님자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고 하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업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가진 다른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방패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 상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택하시고 소유하셔서 기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보호하며 돌보시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동태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구절은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찬송이 되었느니라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 목사가 중한 병에 들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문안을 가도 방문을 사절합니다. 병문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유명한 법률가 잉거솔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성도들과 도시의 유력인사들이 말하기를 “잉거솔도 면회를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브룩스 목사가 잉거솔의 방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잉거솔은 우쭐해졌습니다. “내가 유명인사가 되니까 브룩스 목사가 방문을 허락하고 만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잉거솔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저 같은 사람을 만나주시니 영광입니다. 기회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인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브룩스 목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만나겠지만, 왠지 당신과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기에 세상에서 한번 보고 가야 한다면서, 그를 깨우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구원받았기에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구원을 기쁨으로 누리며 찬송하게 하신 까닭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문 12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사단의 종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은혜를 베푸신 예수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며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영국에 파워코스트 백작 부인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큰 부자로써 거대하고 화려한 성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백작 부인에게도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부인, 얼마나 힘드세요?” 그러자 죽음을 앞에 둔 백작 부인은 두려운 기색이 없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학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도 죽음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예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흰 눈같이 깨끗이 씻어 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없습니다. 그 말씀이 내 영혼에 그렇게 감미로운 말씀이요 힘이며, 위안의 말씀이 되는 줄 이 순간까지 몰랐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나의 죄를 씻어주시며, 그것보다 더 귀한 은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까? 그것을 깨달으셨다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높은 학문이 알려주지 않는 엄청난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를 씻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생명을 잃게 되는 상황 앞에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생이 끝나면 더 영원하고 더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M. Luther)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참깨를 틀에 넣고 짜면 고소한 기름이 나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짜면 달콤한 포도즙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옵니다. 십자가는 피흘림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피흘리심이 성경의 중심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서 구속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로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량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엡 1:7 / 강성찬 목사
어느 날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같이 도말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읽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던 어떤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엄마, 하나님이 나의 죄를 도말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이 그 죄를 어떻게 하시려는 거예요?난 하나님이 그 죄를 어떻게 도말하고 어떻게 치우시는지 모르겠어요. 도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예요?' 어머니는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어제 석판에다가 글씨를 쓰지 않았었니?' '예'라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그것을 나에게 가지고 오렴' 그 소년은 석판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그 소년이 볼 수 있게끔 석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네가 썼던 글씨가 어디 있니?' '아 그거요, 지워 버렸는데요 ' '어쨌든 그 글씨가 어디 있니? '왜 그러세요, 업마 난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 글씨가 정말 여기에 씌여져 있었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치울 수 있었니?' '모르겠어요 엄마, 내가 아는 것은요 글씨가 거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 뿐이예요.' '그거야, 하나님께서 네 허물을 도말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뜻하신 것이 바로 그거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분열과 다툼, 미움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온갖 과학 문명과 철학적, 사회적 이론으로써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낙원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여 왔지만 그 성과는 과학이 최고로 발달했다고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극히 미미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전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고요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과학이, 철학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하려다 실패한 새 사회, 새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소망을 이미 이천 년 전에 십자가로써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매우 간결하고도 확고하게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 곧 십자가로써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는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는 인류에게 걸려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였던 것입니다.
속량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는 바울 서신에서 총164회,에베소서에서만도 약30여 회 사용된 표현으로서 바울 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관계됩니다. 즉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우리 성도의 구원 역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안(엔 크리스토)은 택함 받은 성도가 대속 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의 상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지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속량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이로서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비밀에 붙여졌던 것으로(골 1:26)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온 인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구속의 계획과 성취를 만천하에 공개하셨습니다(요 14:7).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만천하에 공개된 구속의 사실이 인간의 세속적인 지혜에 의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1).
가장 고차원적이고 보다 이성적인 지혜와 지성, 육체의 훈련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들이 오늘날도 십자가 안에 계시된 구원의 지혜를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되고 준비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단순히 로마인들이 중죄인을 다스리던 형틀로만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량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사도 바울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은혜를 표현하고자 할 때 변함 없이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풍성함’(플루토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풍성함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하여 구원하시되,인색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차고 넘치는 그 은혜로 죄인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사실 무죄한 자신의 독생자를 원수 된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행위 자체가 그 은혜의 풍성함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은혜로써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는 동인이 되어 인류를 향한 구속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풍성’이라는 표현이 아니면 결코 예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무한한 은혜를 이제 막 표현하기 시작한 데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이 은혜에 대한 표현 방식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기업의 영광의 풍성’(엡1:18),‘능력의 지극히 크심’(엡1:19),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엡2:4),‘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그리고 그 표현은 좀 더 극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이렇게 표현합니다.‘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엡3:18)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재보려고 나름대로 시도해 보았던 사도 바울의 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일을 도와줍니다. 인간은 무한히 깊을 것으로 추산되는 태평양의 깊이도 수치로 환산해 내었고,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도 수치로 환산해 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약과입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조차 수치로 환산한 것이 인간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을 수치로 환산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까? 세상 모든 것은 다 환산해 내어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만은 환산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났지만 얼마 안 되어 바닥이 났습니다. 그는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 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로아버지의 집은 재산이 거덜 났습니까.? 심각한 부의 손상이 왔습니까? 집안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이때 탕자가 홀로 앉아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눅15:17). 그렇습니다. 탕자는 자기 아버지가 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형이 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품꾼들이 양식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버지는 아예 계산하거나 인간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부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거기에서 초점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은혜에 맞추어져있습니다.
인간적인 수치와 계산으로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이나 고갈이 와야 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고갈되기 전에 일찌감치 창고의 문을 걸어 잠가야 합니다. 아니면 제한적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퍼내도 고갈은 커녕 미동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고 또 주고,퍼주고 또 퍼주어도 결코 다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중에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죄인 중의 괴수인 사도 바울에게 퍼주셨습니다. 어거스틴에게 퍼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퍼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은 매우 풍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도말하셨으며(사 43:25; 44:22), 전체적으로는 전 인류, 전세대의 죄를 다 도말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인한 자도 용서받고(눅 23:43), 간음죄를 범한 여인도 용서받으며(요 4:10), 동족의 고혈을 팔아 축재한 죄인 세리도 용서받으며(눅 19:10), 심지어 예수를 핍박한 자도 회개하고 용서를 얻었습니다(행 9:18).
죄 사함의 풍성함은 제한이 없음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요 3:16). 주님의 은혜는 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창세로부터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풍성하게 누려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입니다. 누구나 주님께 나아가면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고 삶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합시다
엡 1:6 / 강성찬 목사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쳤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신교를 박해했다합니다. 특히 신교의 대표자였던 세오졸프를 ‘칙령 거역죄’라는 죄목으로 파리 탑 위의 감옥에 가뒀다고 합니다. 그해 부활절에 루이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에 나서려고 했다합니다.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을 큰소리로 불렀다합니다.“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159장)라는 곡이었다 합니다. 이때 ‘왕의 왕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가사가 루이14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합니다.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부 하나님의 구속 예정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 및 각 성도에 대한 성령의 구속 효과 적용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찬양하는데 신약 교회 설립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구속 예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밝히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예정에 대해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형태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의 한 부분(베라카)에서 취하는 형식으로 유대인의 전통 랍비 교육을 철저히 받은 바울은 이(베라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을 찬양하던 구약(베라카)의 형식에서 벗어나 찬송의 대상인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고백함으로 찬양하는 주체를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시키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로 확대 시키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도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엡 1:3)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특별히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또한 ‘찬송하리로다’라는 일면 감탄적이고도 일면 명령적인 뉘앙스를 지닌 표현을 사용함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찬양하게 하려는 데에 있음을 보여 주며(3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진술로 마무리 되며 성부 하나님의 구속 예정에 집중됩니다.(6절)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3절)라고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귀담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달라진 복의 개념입니다. 이 복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하든지,아니면 ‘신령한 복’이라고 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의 표현만 사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 두 가지 표현을 굳이 함께 사용한 것은 그만큼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복에 대해 분명히 알기를 바랐음을 반영하는 강조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땅에 속한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문제는 겉의 문제가 아니고 안의 문제입니다. 즉 육적인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요, 심령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우리가 겉만, 육적인 면만, 보이는 면만 추구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골은 깊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눅12:17~18)“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세상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물질만능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돈)가 많은 것이 최고의 복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재벌들에게 가서 “당신은 참으로 행복합니까?”라고 물어 보십시오. 고개를 흔들 것입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니까, 더 근심이 많아지고 인색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더 나가서는 돈이 가정의 행복을 망치는 독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헤티 그린이라는 노파는 미국 역사상 구두쇠 가운데 구두쇠로 알려집니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1억불 이상의 재산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의 침대 밑이나 농짝 밑에 수많은 돈을 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200억의 돈들을 자기 집에 구석구석에 숨겨놓고 죽었습니다. 은행에도 예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오토 밀’ 죽을 먹었습니다. 추운 겨울날도 가스 값을 아끼기 위하여 차가운 죽을 먹었고, 냉방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아들이 다리를 다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므로 아들이 다리를 절단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들을 업고 그 어머니가 무료진료소만 찾아다니다가 너무나 시간이 지체 되어서 시간을 놓친 것입니다. 추운데 그 외아들 하나가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얼마든지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재산과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구두쇠인지 매일 아침마다 차디찬 오토 밀로 연명을 했고, 자기 아들이 병원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리를 자르게 되었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돈 독이 올라도 이처럼 오를 수가 있습니까? 이는 그 엄청난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불행을 안겨 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 문제를 해결하고 복스러운 삶을 살려면 심령의 복, 생명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외적인 것으로 재물의 복, 자손의 복, 출세 성공 등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마5:1-I2의 산상 보훈을 통해서 8복을 말씀하심으로 내적인 복이요 신령한 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무엇보다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으라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유일하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기에 인간만이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고 신령한 은혜와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창2: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마4: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것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손에 쥐고 있더라도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것이 오면 손에 쥔 것에 연연 하지 아니하고 손에 쥔 것을 놓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에 쥔 것을 놓고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격할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입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예수를 통해 오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바라보고,그것을 기뻐하며,그것을 소망하고,그것으로 인해 감격하는 것이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엡 1:4-5)다고 합니다.
창세전이란 말은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이란 말입니다. 구원 받을 자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강림과 성령 강림 이후에야 비로소 세워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물론 가시적 지상 교회는 성령 강립 이후에 세워졌지만,그리스도를 영접한 유대인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신약 교회조차도 그 기원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구속 예정에 근거합니다. 즉 교회의 뿌리는 창세 전부터 경륜해 오신 삼위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음을 말씀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인간 구원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은 우연이나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전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속의 방법을 계획하셨고 준비하셨으며,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고 때가 되매 이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사도바울이 매우 즐겨 사용하는 신학적 표현으로서 그의 서신 서에 무려160회 이상 나타나며,본서에도 36회 이상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락이,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락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성도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젠돌프라는 백작이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갔을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네 야망은 또 무엇인가?”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 야망은 다만 한 분,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했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죽음의 불안 앞에서도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 찬송하여야 할 즐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계셨던 분이니까 영원한 존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이요, 때가 될 때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불러내어 그리스도인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 엄청나고 큰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관계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온전하게 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흠이 없는 자녀로 세워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온통 허물투성이지만 사랑 안에서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안에서’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홈이 없이 거룩한 단계까지 이르게 하시려는 것인데 어디까지나 그것을 사랑으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가르치시고 사랑으로 이해하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참으시고,사랑으로 깨우치시고,사랑으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라는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무흠하고 거룩하게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될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은 사랑 부족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명이 무겁습니까? 어렵습니까? 괴롭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랑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기쁘게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시고,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 일이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하십니다. 어렵지 않게 하십니다. 비결이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무엇이 불가능합니까? 무엇이 어렵습니까?
무엇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샤랑을 가리켜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롬13:10). 그러므로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회복하시고 감사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구별되고 육신에서 구별되고 정욕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이유는 단순히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와 구별 없이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거룩’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흠이 없게’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거룩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단순히 다른 사람이볼 때 거룩하고 자신이 평가해서 홈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의 평가 기준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거룩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흠이 없고,하나님 보실 때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행하는 의의 기준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아줄까에 따라 의를 행했습니다(마6:1).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택하시고 부르심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 앞에서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도 바울 개인의 주장이나 의견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무었을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아시겠습니까? 성도가 이르러야 할 거룩과 의는 결코 사람에게 보이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 만족하시고,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 흡족하신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거룩이 들어와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거룩이 빠지면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나와 가정을 지키는 길은 거룩입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일방적으로 우리를 예정하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예정과 양자 삼음의 매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그 기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정하사’라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행위로 비계획적이거나 무작위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에 의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현재에서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모든 일들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들들이 되게(에이스 휘오데시안)는 ‘입양자로’‘우리를 입양자로 예정하셨으니’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엄밀히 말해 예정과 양자 삼음은 모두 창세전에 된 일이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양자 삼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정은 양자 삼음의 전 단계입니다.
로마법에 양자가 되면 적자와 똑같은 모든 권리를 다 행사하며 재물을 상속할 수 있고 아버지의 영광을 다 차지합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양자를 들일 수 있었고,입양된 자녀에게도 친자녀와 동일한 법적 권한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입양한 양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으며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이런 관습을 잘 알고 있었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녀로 삼으신 사실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의 온갖 신령한 복을 다 누릴 수 있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할 수 있고,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받으며 살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행복된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음으로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에서 하늘 기업을 상속받는 복을 받았으니 어찌 날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스펄전 목사는 “우리는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을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음식을 살 수 있으나 입맛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으나 가정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사치를 살 수 있으나 아름다움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십자가를 살 수 있으나 생명은 살 수 없고, 우리는 돈으로 교회당을 살 수 있으나 천국은 살 수 없다.”하였다 합니다.
비록 땅에서는 부유하게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령한 복 천국의 복이 우리에게 있는 줄 믿으시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싶어 하는 요지입니다. 그것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껑충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아들됨’이란 그런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릅니다. 말로는 다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르고,무감각하고,간과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서신을 누구에게 보내고 있습니까? 복음에 관해 영판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에베소 및 인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아직도 이것을 모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안다고 장담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좀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가지고 았는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그 신적인 영광을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물랐습니다. 그들이 이에 대해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행3:17;고전2:8). 그렇게 임의로 대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들었습니다. 친히 보았습니다. 그냥 무심결에 스치듯 본 것이 아닙니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친히 만져보았습니다(요일1:1).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었고,감격에 겨워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고난과 역경이 찾아들었지만 그들에게는 가슴 뛰는 감동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감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왜 하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눈을 떠서 우리 주님만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정확히 바라보시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교회 80주년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되 선택하시고 자녀 삼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낮은 자존감 치유
에베소서 1:4-6 / 김필곤 목사
오늘은 치유 시리즈 설교 7번째로 “낮은 자존감 치유”입니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줄인 말로 자신을 존중하는 감정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 자신에게 존중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어떤 상황과 처지를 만나도 자기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자존심과 혼돈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존심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나의 가치가 다른 사람 앞에서 손상을 입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불쾌하며 화가 난 마음입니다. 둘 다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존심은 평가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남입니다. 상대의 평가를 통해 자기만족을 꾀하는 마음입니다. 늘 남을 의식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남의 평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굳게 지키는 마음입니다. 자존심은 있는 그대로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근거 없는 자존감은 자만감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업을 시작했는데 코로나19로 사업이 어려워지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불평등한 정부 규제 때문에 우리 망했어, 챙피해 죽겠네,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등과 같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만나는 것이지, 내가 시기를 잘 못 선택했지, 나만 어렵나 이런 때는 다 어렵지, 나는 일어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존감"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행복도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자기 존중은 정신건강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자존감이 아주 낮으면 스스로 '나는 세상에 무가치한 존재야.' '나는 능력이 없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누구도 나를 환영하지 않아'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외모나 상태에 대하여 늘 불만족합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여 스스로를 자해하며, 심한 경우 자살합니다. 잠재력과 꿈을 마비시켜 버리고, 대인관계를 원만히 갖지 못합니다. 누가 웃으며 인사를 해도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누가 열심히 설명해 주면 내가 고졸이라 우습게 보고 그런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통해 인정욕구를 채워 보려하는 것이 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집착하거나 소유하고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서운하게 하고 대접을 해 주지 않으면 "내가 누구지 몰라?"라고 타인에게 분노하고 적으로 삼고 위해를 가하려고 합니다. 남에게 조금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합니다. 인정해 주지 않으면 하던 일도 하지 않고 어깃장을 놓습니다. <마음 탐구>의 저자 그래이 콜린스(Gary R. Collins)은 가족치료의 영역 가운데 80%가 "자존감의 치유"의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자존감의 문제는 인간의 모든 문제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말, 그리고 그의 태도와 행동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이 자존감이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합니다. 남은 기준으로 하는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자존감인데 그것은 잘 못하면 자만감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존감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할 때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존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낮은 자존감을 어떻게 치유받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낮은 자존감을 치유받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한 창조물이라는 가치감을 가져야 합니다./ 존재하는 지금의 나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첫째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바로 밑에서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자존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동물을 섬기고, 식물을 섬기고, 물질을 섬기는 자존감이 바닥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 후 모든 인간은 원죄 가운데 태어나 자존감이 바닥난 죄인 의식을 가진 원초적 심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면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고 외적인 자신의 외모, 재산, 학력, 가족, 직장 등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불만족하며 그것으로 행복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외모를 성형하고,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돈으로 포장하고, 학력으로 위장하고, 좋은 직장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면 자존감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가치가 높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으로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싣오. 외모를 고치면 자존감이 높아져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까?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눈을 고쳐보면 입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무리 고쳐보아도 자신보다 더 잘 생긴 사람이 있기 때문에 평생 외모에 대하여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10억을 벌면 만족해하고 행복해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10억이 있으면 100억이 있는 사람이 보이입니다. 100억 있는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00억이 있으면 1천억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공부 잘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가보니까 날고 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는데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외적인 것으로 자신의 레벨을 올리려고 한다면 끝없이 행복과 만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외적인 가치로 자신의 가치감을 만들면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내부에서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남의 시선에 맞게 외부적인 레벨을 올려 보아도 더 높은 레벨은 존재하여 결국 만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허영과 사치로 포장하여 과시욕과 우월의식으로 살지만, 내부적으로는 결핍과 공허, 열등의식, 죄의식적 사고, 자학적 성격, 연극성 장애, 우울, 사회 불안증, 의처증 의부증같은 심리 질환,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자기 인식을 고쳐야 근본적으로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평생 살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가치감을 높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의 가치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택했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이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작품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작품의 가치는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모나리자>라고 합니다. 미술전문가들은 무려 그 가치가 40조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은 실제 2180억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카소가 그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렸다면 100만원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진품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찍어낸 그림은 10만원도 가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사진을 내려받아 출력해 보십시오. 10원도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도, 유전자 정보는 나르는 그릇도, 물질의 덩어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천지를 만들기 전에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첼렘)과 모양 (데무트)을 따라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두팔 두발 머리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하님의 속성은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만 있는 전지성, 전능성, 무소부재성 등과 같은 속성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있는 속성입니다. 이성, 감정, 의지, 영성, 자유의지, 사랑, 의, 지식, 관계성, 통치권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인간은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동물은 없는 이런 속성을 가지고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선택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참 지식, 의, 거룩함이라고 가르치며(엡 4:23-24; 골 3:10),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합니(골 1:15)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롬 8:29; 고전 15:49; 골 3:9-10).
그래서 왜 우리를 택하였습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입니다. 더럽고 추해 마땅히 책망받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가치 없는 존재를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택하신 것입니다. 죄악가운데 탐욕, 모순, 부조리 가운데 사는 사람, 이중인격자인 사람, 공허하고 만족함 없는 사람, 시기하고 분노, 질투하기 좋아하고 쉽게 노하고 쉽게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기 위하여 택하였습니다.
택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깊으신 뜻"입니다.
우리의 학력, 외모, 가정 배경, 직장, 재물, 능력, 재능, 성품, 경력 등을 보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있는 그대로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편 16:3)”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값으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못 생겼다고,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세상에서 유일하며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낮은 자존감으로 평생 불만족하고 불행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받기 위해 천지를 만드시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많이 불렀던 복음 찬송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있어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2. 낮은 자존감을 치유받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낮은 자족감을 가진 사람의 특징 두 번째는 매사 자신감이 없습니다. “나는 공부도 못하고, 돈도 못벌고, 능력도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안 좋아서, 흙수저로 태어나, 나이가 들어서, 가방끈이 짧아, 못생겨서, 못 배워서 등 갖가지 이유를 들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소평가는 비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킬 때 사탄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그렇게 비교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어진 것으로 살아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늘 비교하게 해 놓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도 안 되고, 나는 무능력하고, 나는 아무리 해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까봐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사고의 왜곡이 생겨 있습니다. 사고 왜곡은 이분법적인 사고(흑백논리), 부정적 사건을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의 본보기처럼 생각하는 과잉 일반화, 한 가지 잘못된 일에만 집착하는 판단력의 색안경, 긍정적 측면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긍정측면의 부정, 지레짐작하는 성급한 결론, 과잉확대(큰 재앙으로의 간주) 혹은 과잉축소, 감정적 판단 등과 같은 부정적 사고가 자신의 인식 구족의 기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고의 왜곡으로 인한 부정적인 사고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신은 3류 대학을 나왔으니 3류 인생이 되고, 자신은 흙수저로 태어났으니 흙수저 인생이 되며, 자신은 장애자로 태어났으니 장애 인생이 될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은 어릴 때 부모를 통해 생깁니다. 특히 가장 친밀한 어머니를 통해 생깁니다. 어머니를 반사 자기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에 의해 마음의 핵심이 생기는데 수유를 하면서 그만 물어라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면 아이는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는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조금 자라면 어머니가 다른 아이와 다른 형제와 비교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결핍된 자아, 보잘 것 없고 부족한 자아상이 무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어 버립니다. 무의식 속에 “나는 무능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해도 안돼” 등과 같은 자기 능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겨 버린 것입니다. 심리상담가인 토니 험프리스 <8살 이전의 자존감이 평생 행복을 결정한다>라는 책에서 우리 자존감의 몸통은 8살 이전에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자존감이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되는데 어릴 때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중요한 타인들의 영향, 기질과 성격적인 영향, 사회 환경적 영향에 의해 만들어 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에서 부모가 어떻게 아이를 대하고 키우느냐에 따라 거의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성공 경험을 많이 하게 하여야 합니다. 성공 경험을 많이 하면 자존감 지수가 높아집니다. 남과 비교하며 너무나 높은 기준을 놓고 못했다고 책망만하지 말고 낮은 기준을 잡고 한 단계 한 단계 성공하면 그것을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면 공부도 운동도 예술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성공경험을 방해하는 가장 큰 부모의 양육태도 2가지는 첫째가 비교의식입니다. 90점을 맞아도 이웃집 아이가 100점을 맞았다고 만족하지 못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는 할 수 없는 아이라고 자존감이 낮아져 버립니다. 두 번째가 과도한 간섭입니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부모들이 다 해주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요즈음은 대학원 시험보고 취업 면접하는데 까지 부모들이 따라간다고 합니다. 이런 자녀들이 자존감이 높겠습니까? 의존증만 높아집니다. 홀로 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해도 누가 조금만 자존심 상한 말을 하면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냅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5-10% 정도가 되는데 당연히 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즐겁게 생활을 하고 성공적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좌절도 쉽게 이겨내고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자기 효능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신념을 자기 효능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여기고 과업을 지나치게 낮게 보는 자만심과는 다른 말입니다. 지금의 자신의 능력이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 자신감의 근거가 자신의 학력이나 재력, 외모, 가정 배경이 아닙니다. 이런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에 근거를 둔 사람들은 그것이 살아지면 자존감도 완전히 추락해 버립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이 되게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면 당한 자존감을 갔습니다. 통수권자의 생각과 행동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비록 비서실장이지만 통수권자의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 가장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사울 왕이고 가장 자존감이 높으신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울 왕은 인물도 잘생겼고, 효심도 있었으며 능력도 있었습니다. 자존심은 대단했습니다. 다윗이 여인들에게 인정받자 다윗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자존감이 바닥이 나서 결국 전쟁에 지고 자존심 때문에 자살하고 맙니다. 자존심으로 살다 자존심으로 망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존감이 높았습니다. 적국에 가서 미친짓하고 침을 흘리는 것을 비겁한 행동으로 볼 수 있기도 하지만 자존감이 강한 다윗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하면 한 나라의 장군인데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약속을 믿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존심을 다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돈도 없고 자식도 없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그를 외면하고, 나이도 늙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빌립보서 4장 12-13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얼마나 자신감이 충만합니까? 얼마나 자존감이 넘칩니까? 사도 바울은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환난과 죽음의 세력과 대항해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자존심에 사로잡혔다면 바구니 타고 성밖으로 탈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3-37). 이 자신감이 우리의 자신감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기는 악기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악기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인 누구라는 “자기 중심성”으로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 누구라는 “하나님 중심성”으로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를 둔 자신감이 건강한 자존감을 만드는 자신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우리가 능력없다고 두려워하며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우리를 도와주면 능력이 생깁니다. 무식한 베드로를 사용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약점이 강점으로 되는 것입니다. 무능력으로 고난받은 기간이 결국 낭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고난의 기간은 훈련의 기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훈련을 25년 동안이나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새 성품 새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약점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오른 손 장애인 에훗도 하나님이 능력 주어 사용했습니다. 드보라는 당시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사명을 주시고 함께하여 자신감을 주어 한 시대 사용하였습니다. 삼갈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겁쟁이 기드온도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였지만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 성군으로 일어섰습니다. 사람들은 실패했다고, 자신이 능력이 없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기능이 없다고, 실력이 없다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둔하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래 너 가문 별 볼일 없어, 그래 너 능력 없어 그것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너를 쓰는 것은 그렇게 때문에 쓰는 거야 능력 있는 내가 있지 않느냐? 능력 있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통하여 나의 일을 할 거야" 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근거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가야 합니다. 대머리입니까? 키가 작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력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삼류라고 말합니까? 못생겼습니까? 차가 작습니까? 늙었습니까? 학벌이 내 놓을 것 없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3. 낮은 자존감을 치유받으려면 자신이 평생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이 낮는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소속감이 낮은 것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가를 통해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 질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존감은 자신이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자존감은 소속감에 따라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너는 다리 밑에서 주서 온 아들이야”라는 말을 듣고 살면 자존감이 낮아 집니다. 자신의 전부인 가정에 대한 소속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은 어릴 때 부모에게 거부되고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완전주의적 양육방식을 통해 방치하고 거절하고 학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나는 환영받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무의식 깊은 곳에 기억이 됩니다. 그러면 거부된 자아상이 아이의 견고한 틀이 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부모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자존감이 낮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가 집에 있는데 어머니가 이웃집 친구 어머니와 대화하면서 "우리 아들 우리 집을 일으킬 기둥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아들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일등 국가에 소속된 사람들은 비교적 자존감이 높습니다. 무엇인가 잘못했다고 왕따를 당하고 버림을 받으면 자존감은 땅에 떨어집니다. 아무데에서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자존감을 낮아집니다. “김집사님은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으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화장실에거 누구가 “김집사님은 우리 교회에 왜 나오는가 모르겠어”라는 말을 들으면 자존감을 곤두박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받아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 찾아가 소속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안 받아주면 자신을 받아주는 마담을 남자들이 찾아갑니다.
그래서 영유아기 때 부모와 애착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이들의 자존감은 떨어집니다. 똑똑한 엄마보다 따뜻한 엄마, 사랑스런 엄마가 중요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소속감을 가지게 되면 자존감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분비 호르몬인 옥시토신(oxytocin)이 분비되어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원하며, 용납하며, 돌보아주며, 즐기며,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면 자존감은 쑥쑥 올라가게 됩니다. 아이를 인정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고 칭찬해 주면 자존감은 높아집니다. 임신할 때부터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고 어머니가 생각하며 아이를 양육한다면 아이는 소속감을 가지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소속감은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런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소속감에 따른 자존감은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입니다. 은퇴하면 그 소속감은 남의 것이 됩니다. 어떤 가족에 속하고, 어떤 기관에 속하고, 어떤 기업에 속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 속하여 갖는 자존감이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감을 높이려면 소속감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고 사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는 각종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를 계속 강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신령한 복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때가 찬 경륜을 이루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통일 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천국 가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영광이 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택함부터 천국에 이르도록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소속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1-39)”
가난이 실패가, 외모가, 진학이 결혼이, 이혼이, 집안 배경이, 실연이, 가정 폭력이, 실직이, 사별이, 질병이, 고난이, 코로나가, 무식함이, 따돌림이, 사고가, 더위가,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라고 약속해 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속이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마음에 안들면 쉽게 차버립니다. 이익이 없으면 쉽게 얼굴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도 버리지 않고 사랑하여 끝까지 함께 하여 바로 앞에 자존감을 높여주고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살인하고 도망가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간 모세를 찾아가 자존감을 회복시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고 부하를 죽이고 자존감도 자존심도 다 내려 놓은 다윗을 찾아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존감을 다시 회복시켜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성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인하고 배신하고 자존감이 낮아진 베드로도 사랑하여 다시 자존감을 높여주여 초대교회 지도자로 삼아 사람낚는 어부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발광하는 자존심으로 살아갔던 바울을 받아들여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 최고의 사람으로 만들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로 사용하였습니다. 간음하다 잡혀 자존감이 바닦난 여인을 용서해 주심으로 자존감을 높여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자존감이 없는 세리 사기꾼 마태, 남과 비교하며 자존심을 앞세웠던 기회주의자, 포악한 성격의 요한에게 자존감을 불어 넣어주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자존심도 자존감도 바닦이 난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 마리아, 다섯 남편을 둔 수가성 여인도 찾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을 높여주고 평생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비겁하게 밤에 찾아와 진리를 가르쳐달라던 부자 관원 니고데모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 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게 해 주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금방까지 함께 욕하던 우편강도의 청을 거절치 않으며 포용해 그리스도 안에 소속감을 갖고 마지막 짧은 남은 시간이지만 자존감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술주정뱅이, 깡패였던 죤번연도, 선교사의 머리통을 깨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깡패 김익두도, 17명이나 죽인 살인마 김대두도, 100여명을 죽인 마녀같은 김현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자이든 가난하건, 건강하던 병자이든, 간음자이건, 살인자이건, 무식하던 유식하던, 사기꾼이든 깡패이든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나오면 우리를 버리지도 않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우리를 향해 우리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31:6)"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 시킨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것 전혀 없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남이 기준이 되는 자존심이 아닙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자존감을 넘어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을 초월하는 진정한 자존감은 행복한 인생과 만족한 삶을 사는데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을 치유받으려면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한 창조물이라는 가치감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어떤 상황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평생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찬양예배
엡 1:3-14 / 박기완 목사
대망의 2005년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복이 특별히 임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복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고, 사람들에 의해서 변하기도 하며... 시대를 타고 경기를 타고 시절을 타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환경과 여건에 상관이 없고, 다른 것에 의하여 변하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예수를 믿는 자마다 그 분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분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은 원수 마귀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막강한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절이 어찌할 수 없고 경기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강력한 능력인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복을 받는다기 보다는 복이 나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그 복을 받기 위해서... 내가 그 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고전분투하며 땀을 흘려 노력한다기 보다는... 그 복이 나에게 임하여 사방으로 나를 둘러쳤으며, 복이 나를 덮쳐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항거할 수도 없고 꼼짝없이.... 강력한 복이 나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는 복은 그래서 은혜요, 그래서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도 바로 그런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5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복에 대하여 기록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그 복은 창세 전에 택하신 복... 이미 과거에 이루어 놓으신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세 전부터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은 그 분의 마음속에 우리와 그리스도를 두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구속사건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를 선택하시고 이미 자녀 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역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선택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시간이 있기 전에 이미 선택하셨고... 이는 시간도 침범할 수 없는 놀라운 구속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에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시간에 와서 포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기반은 너무도 든든한 것입니다. 원수 마귀도 어찌할 수 없으며... 어떠한 역경이 와도 환란이 와도... 영원에서 선택한 성도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침범할 수 없는 영원에서부터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복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것이 복입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복을 받기 위하여 신년운세를 보고, 사주팔자를 알아보고, 점을 쳐보고 그럽니다만,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이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른데서 복받아 볼려고 기웃거리거나 점을 치거나 운세를 보는 한심한 인생이 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사모하면... 저절로 복이 임하고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을 받아 보려고 복이라는 글자를 한자로 써서 여러 군데에 붙여 놓습니다.
복조리를 걸어 놓고 복을 기원합니다. 우상단지를 가져다 놓습니다. 부적을 붙여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복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기만하는 것이 되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집안 구석에 있으면 다 걷어서 치우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34장에 보면, 요시야 왕이 잘 한 일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는 8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8살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어린 나이인데도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야 아는게 아니에요. 철들자 망령이라고.... 나이가 많아도 철이 안 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요시야 왕은 8살인데도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왕위에 오르자 마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시작하고... 그리고 모든 우상들을 부숴 버렸습니다.
역대하 34:3-7절의 말씀입니다.
"(3)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太陽像)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5)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6)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7)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우상 타파에 돌입해서... 모든 우상들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가루로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의 무덤에 부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고 정결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복을 더하시며... 요시야 왕이 31년 동안 재임하는 동안 평안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외에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 있다면 이런 우상을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오늘 말씀을 주목해서 보세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다는 거예요.
구원이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나를 택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창세 전에 주신 복인 것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단어가 자주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꼭 붙어 있는 가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4-5절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도 이루어 놓으신 창세 전의 복... 선택의 복을 힘입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나아가기만 하면 금년에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되고, 반드시 넘치는 복을 받으며, 기어이... 어쩔 수 없이 복 받는 인생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또다시 놀라운 축복의 말씀 앞에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합심으로... 힘을 합하여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4-6절의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고, 7-12절의 말씀은 성자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 그리소 13-14절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성부 하나님 - 선택하심
성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자녀로 삼아 주신 일입니다.
즉, 우리를 창조 이전부터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65:4절에서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할렐루야!... 주님 앞에 선택받아 이렇게 오늘 주의 전에 거하게 된 것이 복이라는 거예요.
2. 성자 예수님 - 구속하심
그리고 7-12절의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그 비밀도 알려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뜻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구원의 경륜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므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 천국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2절 말씀에...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게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성령 하나님 - 인치심
그러면 성령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13-14절 말씀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을 성령님은 인쳐주신다는 거예요.
"그래! 너는 구원받았다!" 라고 인쳐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보증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밖에 없도록... 확실한 믿음으로 보증하시므로... 확신케 하시는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합심하여... 성삼위께서 함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고, 성령님은 이 엄연한 사실을 더 확실하게 인쳐주시고 보증해 주셧다는 것입니다.
4.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왜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어여삐 여기시며... 창세 이전부터 택하여 자녀로 삼아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에 물과 피를 다 쏟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까?...
왜 성령님께서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인쳐주시고 보증해 주십니까?...
14절 말씀에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 함께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본분인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로 우리를 택하시고 만드시고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최대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배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관망하거나 구경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이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신년 초에는 반드시 예배를 강조하는데... 그만큼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년 초에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복된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상고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말씀을 살피다 보면 역시 그것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복 받는 첫 번째 비결이 예배에 달렸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 예배에 있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비밀이 바로 예배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매년마다 신년이 되면 예배에 대한 말씀을 증거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귀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되어 복 받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금년에 천배나 되는 복을 받으려면 예배를 귀중히 여기시고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예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전체를 알 수 있어요.
신앙경륜의 근본이 예배인데...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정성이 결여된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섬기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모르십니까?... 다 아시죠....
그런 곳에..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아요. 그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면 뭐하러 만납니까?... 뭐하러 그 모임에 가고 뭐하러 그들을 만납니까?...
나를 우습게 여기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앞에 가지도 않을 뿐아니라... 그런 기색만 보여도 상대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작은 거 같지만 큰 겁니다. 사람도 다 자존심이 있거든요.
부부싸움을 해도 큰 거 가지고 싸우는게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작은 겁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걸 가지고 싸워요.
원인이 뭐고 문제가 뭔지는 상관이 없어요.. 나를 무시했다는 거죠.... 나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예요... 나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니까... 그 서운한 마음이 몇 달이 걸리고 몇 년이 걸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정성이 결여된 그런 예배를 받으십니까?...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4:23절 말씀을 보세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실까요?... 교제하시려고... 복 주시려고... 은혜 부어 주시려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찾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되는 24절 말씀에 그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자가 되면 특별히 기도를 안해도 돼요... 특별히 성경공부 안해도 돼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공부 하는 겁니다. 초점이 예배에 있어요.
말씀이 나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심방 받는다고 예배에 소홀히 하지 마세요. 음식 대접한다고 예배에 빠지면서까지 준비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배가 주가 되어야지 음식이 주가 되면 안돼요.
집이 정리가 안됐으면 교회에 와서라도 심방을 받고 예배를 드려야지 예배 자체를 거부하고 심방을 어렵게 생각하면 안돼요...
어찌하든지 할 수만 있으면 기회가 닿는 데로 예배를 드려야....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거든요...
이사야 43:21절 말씀에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이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이 창조도 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도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까?...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도는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장소에 상관없이...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 여건에 상관없이...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고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에 최우선으로 삼으면... 금년에 반드시 복에 복을 더하시고... 요셉이 당대에 백배나 되는 복을 받고... 신명기 1:1--11절에서 천배나 되는 복을 선포하신 것처럼... 천배나 되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고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시고 일깨워 주십니다.
설교는 왜 합니까?... 찬송케 하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찬송만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설명하자면... 찬양이 설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설교가 찬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주님이 언제 오실런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되고, 더 주의 일에 힘써야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종말의 때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어요...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년 몇 월 몇 일에 온다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안다면 아무도 교회에 오지 않을거예요.
다 각자 자기 좋은 데로 자기 맘대로 실컷 살다가... "임박한 때에 와서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이야 가겠지..." 그런 맘을 가지고 제 멋대로 살 겁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날짜를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계시록의 80% 이상이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 기록한 내용이거든요.
정리해 보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첫째는 땅에 있는 것을 본 환상입니다. 장래의 현상이죠...
그리고 둘째는 하늘에 있는 것을 환상으로 보고 기록한 내용이거든요.
땅에 있는 환상은 장차 망하게 될 세상을 기록해 놓았어요. 그리고 장차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대한 환상은 먼저 하늘나라의 외형적인 모습이 살짝 보이죠.
생명수... 생명나무, 생명 과일이 사시사철 열립니다. 이걸 먹으면 병도 없고 영생하게 되는 것이죠.
또한 금은보화로 길을 만들었고, 열 두 가지 보석으로 지은 맨션이 있어요.
그 호화롭기가 사람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대략적으로 기록했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내적으로 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눈물을 흘릴 일만 있어요.
이래서 울고 저래서 울고... 왠지 공허하고, 왠지 쓸쓸하고... 주변에 사람들은 많은데도 왜 그렇게 외로운지... 왜 또 그렇게 서럽고 슬픈지 말이죠.
괴로워서 울고, 아퍼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분통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남이 알아주지 못하여 울고, 이해해 주지 못하여 울고... 헤어져서 울고, 배반을 당하여 울고... 없어서 울고 부족해서 울고...
세상에는 온통 울어야 될 일만 있거든요...
그래서 천국에 가게 되면 주님이 제일 먼저 해 주시는 일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신다 그랬어요. 할렐루야!
그곳에는 다시는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 뭐가 있느냐?... 그곳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만 있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찬송하는 일, 성가대 사명 감당하는 일... 반주하는 일... 이 사명의 귀중함을 알아야 돼요...
천국에서는 그걸 제일 으뜸으로 알아줍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5장 7장 19장...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들이 여러번 기록되고 있어요.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만물이 찬송을 합니다. 천사들이 찬송을 하고, 이십 사 장로들이 찬송을 하고...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들이 찬송을 하고, 구원받는 백성들이 찬송을 하고... 천국에서는 전부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설교가 없어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데 무슨 설교가 있겠어요. 그때는 목사가 해야할 일이 없죠.
그런데 성가대는 해야할 일이 계속됩니다. 그곳에는 누구나 다 찬양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여전히 설교가 있어야 되고 설교가 중요하죠.
왜 그렇습니까?... 온전한 찬양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설교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예배를 돕고 설교를 돕는 보조 수단이 아니에요.
성가대만이 그런게 아니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찬양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찬송의 가사와 곡에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가 임하고 감격하면 더 은혜 속에 찬송하게 되고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걸 받으시기 위해서 임하십니다. 그걸 받으시기 위해서 강림하세요.
오늘 예배도 주님이 오셔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며, 우리 모두에게는 넘치는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금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예배하는 일에 성공하므로... 모든 삶의 분야에서 승리하고 넘치는 복을 받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엡 1:3-7 / 이종철 목사
1. 찬송하리로다(3,6)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는 3절부터 14절까지는 한편의 찬송시입니다. 이 찬송시는 마침표가 없이 하나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한 번 터지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단번에 14절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찬송하는 인생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4절에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요리문답 제1조에서는 “사람의 제일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찬송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찬송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찬송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 하루가 찬송으로 시작하고 하루의 마침이 찬송으로 마치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찬송으로 마치길 바랍니다. 찬송만 살아 있으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만 살아 있으면 어려움이 닥쳐도 괜찮습니다.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연인 얼굴만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찬송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만 생각해도 찬송이 우러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469장) 그냥 걸어가다가도, 일하다가도 찬송이 우러나옵니다. 가슴이 밋밋하고 건조하고, 찬송 부를 마음이 없다면 벌써 문제가 붙은 것입니다.
이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냐, 살아 있는 교회냐를 측정하는 방법도 단순합니다. 찬송을 들어보면 압니다. 늘어지고 맥없이 찬양을 부른다면 그 교회는 죽어 있는 교회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느리게) 이러면 죽은 찬양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빠르게) 찬양은 이렇게 불러야 합니다. 걸어가는 뒷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씩씩하고 힘차게 걷는 사람은 할 일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찬양을 잘못하는 편입니다. 특히 박자를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열정적으로 부릅니다. 느려지는 찬양은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 영적인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이 늘어지는 찬양을 부르면 어디 싸움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이 죽어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기력하다는 증거입니다.
느린 군가 보았습니까? 서정적인 군가 보았습니까? 저는 가끔 큰 교회의 찬양집회에 갑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찬양을 부릅니다. 박자나 리듬이 현란해서 저는 잘 따라가질 못합니다. 가끔 옛날 찬양이 나오면 좀 따라 부를 수 있는 정도지요. 그런데 요즘 ‘경배와찬양’ 류의 찬양을 보니까 문제가 찬양의 전투성과 영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회의 찬양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에 군가처럼 빠르고 씩씩해야 합니다. 그런데 찬양들이 너무 감상적입니다. 또한 영성이 없습니다. 찬양의 기교나 테크닉은 현란해져 감정은 건드리는데 우리 속 깊은 곳의 영혼의 샘은 건드리질 못합니다.
찬송은 축복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기도가 막힐 때 찬송을 부르면 답답했던 영혼이 시원해집니다. 옛날 신앙의 어머니들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습니까? 남편은 무관심하고 폭력적이고, 집안일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교회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나면 얼굴이 밝아집니다. 새 힘이 납니다. 이게 찬송의 힘입니다. 저는 기도가 안 되면 찬송을 부릅니다. 한 30분 정도 찬송을 하고 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예배 때 은혜 받는 비결을 말씀드릴까요? 찬양을 순서에 맞추어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열정적으로 해 보십시오. 그러면 은혜 받습니다. 어느 음악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낙담한 합창단원을 본 적이 없다” 찬양을 많이 하면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집에서 가족예배를 드리는데 가장 신날 때가 찬양을 부를 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힘차게 찬양을 부르고 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힘이 솟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항상 찬양이 살아 있는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2.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3,5,7)
찬양을 하긴 하는데 찬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합니다. 새해 인사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입니다. 복조리도 걸어 놓기도 하고, 입춘에는 ‘입춘대길’이라고 대문에다 써 붙여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복을 너무 좋아해서 전도할 때도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하며 전도합니다.
대체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이라고 할 때 복은 물질의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등 현실적인 복들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신령한 복’이라고 할 때 과연 이런 복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해서 병 걸리지 않고 장수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믿었다고 해서 환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또 악인이 부자로 오래 사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주변에서 봅니까?
그런데 사실 예수 믿으면 이런 복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술 담배 안 하지요. 주일 잘 지키지요. 기도하고 말씀 들으면 정신 건강에 좋지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스트레스가 해결되지요, 또 사람이 봉사를 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남을 섬기고 배려할 때 신기한 것은 우리 몸에서 면역항체가 분비된다는 의학적 보고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살게 됩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하면 평균수명이 7년이 더 늘어난다고 까지 합니다.
또 신앙의 3대는 대부분 잘 삽니다. 주변에서 한 번 보세요. 가난한 사람 거의 없습니다.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목사입니다.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고, 프린스톤 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문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해 본 결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이었습니다.
대단한 가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가문을 축복하십니다. 저도 여러분 한 가정 한 가정을 놓고 기도할 때 다른 기도 보다 이런 물질적인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업을 불같이 일으켜 달라거나, 시온의 대로가 열리게 해달라거나, 가족이 평안하고 건강하게 해달라는 기도들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은 그 복이 아닙니다. 신령한 복, 곧 영적인 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죄 사함 받은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삶입니다. 이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만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게 복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으로 채워야 복이라고 말하는데 성서는 그것은 다 부질없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물질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집을 사도 감사하고 기쁜 것은 잠깐입니다. 곧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고 다른 부족한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30평이든 50평이든 100평이든 인간은 잠간 행복할 뿐이지 더 이상의 만족은 없습니다. 이런 물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입니다. 복의 개념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는 하늘을 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무언가 물질적인 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는 복의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아직도 물질 때문에 우리 신앙이 쓰러지고, 또 물질 복 주면 ‘할렐루야’하는 신앙이라면 아직도 어린 단계의 신앙입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합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을 하는데 물질을 보고 결혼하는 사람과 사랑을 보고 결혼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산, 학벌 등이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과 오랜 사귐을 한 연후에는 그 사람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사람’만 원합니다.
그 분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분만 원하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항상 그 ‘무엇’만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오늘 아침, 또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그 게 복입니다. 다른 데서 복을 찾지 마세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지로서 체험했느냐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복입니다.
죄사함의 복은 또 어떻습니까? 인간은 죄를 짓고는 살 수 없습니다. 양심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그 피 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죄의 고통은 죄를 지어 본 자만이 잘 압니다. 다윗은 시편 32편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노래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라고 고백할 정도로 죄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기억력이 없다는 것이 복인 것 같습니다. 과거를 다 기억하고 살면 괴로워서 못삽니다. 잊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 때에 천국과 지옥을 하나님께서 굳이 판결하실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 인생의 지나온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앞에 떳떳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전부 제 발로 지옥 가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죄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를 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사함의 복입니다. 7절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허물 많고 더러운 사람들인데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맞아주셨습니다. 이제 신부의 허물은 신랑의 허물입니다. 신부의 문제는 이제 신랑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와 예수님이 연합을 이루어 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복입니다.
다시 한 번 진정 신령하고 영원한 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복이라 하지만, 믿는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 사함을 받아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복입니다.
3.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4)
그런데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내가 예수 믿기로 결단할 때가 아니요, 이성이 생긴 연후도 아니요, 모태에서도 아니요, 창세 전에 결정된 일입니다. 이는 이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철두철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은혜의 풍성함”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의 산물이라면 불안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결단이며 의지이기에 결코 무너짐이 없습니다.
예정론은 인간을 혼란 가운데 몰아넣는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찬송이 넘치게 만듭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사회에서 소수입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은 이 힘없고 연약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교리입니다. 우주의 기초를 만들기 전에, 그것이 수만 년 전이든 수억 년 전이든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여러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건과 인연의 실타래 끝에 여러분을 이 날 이 때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렇게 예수 믿게 하여 영광스런 존재로 만드셨다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가 아니요, 영원히 기억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유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예레미야가 자기 의지로 선택하기 전에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자기 하는 일과 자기 인생에 대한 강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일에 대해서 이런 강한 프라이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일을 시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런 예정은 우리로 든든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은 운명이나 무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한 번 고백하며 시작하십시오. “오늘 하루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실까? 나에게 어떤 만남을 갖게 하실까?” 어려움을 당할 때는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또 무슨 일을 하실려나?”
예정은 그래서 우리로 겸손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각본의 한 역할을 맡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은사도 내 물질도, 내 시간도 다 내 계획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깐 맡기셨고 이제 그분이 주라 명하시니 돌려드립니다.” 자기 것 아까와 하며 “제 것입니다. 제가 절망 공들여 수고한 것의 일부입니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입니다”는 단어가 입에 붙어야 합니다.
예정은 또한 우리로 선택받은 자의 의무를 다하게 만듭니다. 4절과 5절을 다시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과 예정이라는 단어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란 단어를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서 함부로 살 수는 없지요. 거룩하기를 힘쓰고, 세상에 흠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만약 우리가 함부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정됐으니까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도공이 그 오랜 세월을 구상하고 작품을 빚어 가시는데, 스스로 그 작품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품된 여러분 세상에 나아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엡 1:3-7 / 문기태 목사
Master of Influence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영향을 끼친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상입니다. 전 미국 강연가 협회가 유명한 대중연설가로 인정해서 주는 상인데 최고의 동기부여가, 또 자기개발과 성공학의 대가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상을 받은 사람중에 지그 지글러라는 이가 있는데 75세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책입니다. 그는 책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감사뿐이었다. 감사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는 그러한 일생이었다." 지글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은 혼자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늘 지켜주셨다'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이웃들에게 감사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내게 고마운 분들이다. 감사외에 다른 말이 없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인생이 성공합니다. 남보다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인생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은 감사입니다. 그런데 감사는 은혜를 깨닫는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 감사와 함께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예수안에는 온갖 보화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하나님이 우리로 자녀삼으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7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라고 우리에게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예수안에서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며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안에는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1. 예수안에는 신령한 복이 가득합니다.(3)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는 바울사도가 전도하다가 잡힌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채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1장 3절의 이 편지의 서두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지금 극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미하자고 강조합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신과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어마어마한 영적인 축복들 때문입니다.
우리 위해 준비된 영적인 축복들은 무엇들일까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그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은혜로 자녀가 되어 양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존재인가를 아시고도 우리가 마침내 거룩하고 흠이없는 자녀로 그앞에 설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그의 자녀 삼기로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영적인 복을 뜻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산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속하여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에는 온갖 영적인 복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주일날 교회는 오지만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설교를 비판만 일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전임교수로 옮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목사님께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회 여름 수련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거듭 거절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모교 교수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3박4일 수련회 가는 시간조차 낼 수 없는 거니? 네가 하나님이라면 네 기도를 들어주고 싶을까?' 순간 얄팍한 계산의식이 발동하여 수련회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수련회 준비 기간에 귀찮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사님께서 성경공부 팀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목사님,저는 대학 입학 이후 성경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리더를 합니까. 못하겠습니다." 목사님의 요청은 간곡하고 집요했습니다. 결국 "성경 내용 중에 이해하는 부분만 가르치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겠다"고 타협한 뒤 팀장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공부 마지막 시간에 각 팀장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경험을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은혜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난감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내일 모레 간증시간 전까지 은혜를 주십쇼. 은혜를 안 주시면 저야 그만이지만 하나님은 덕 될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은혜거리는 생기지 않았다.
팀장 교육을 마치기 하루 전 새벽기도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는데 분명하고 확실한 음성을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지금까지 내가 너를 지켜준 게 다 은혜가 아니더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무런 은혜가 없다니…." 천둥 같기도 하고,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목소리 뒤로 인생의 중요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땐 참 다행이었지,운이 좋았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였구나, 은혜였어. 하나님은 정말 나를 처음부터 사랑하셨구나. 나는 이미 하나님의 '터치'를 받은 사람이었구나.' 주르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그렇게 오랜 시간 울었습니다.
그 뒤로 삶은 180도 변했습니다. 나는 하루종일 법서(法書)를 봐도 지루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법서가 눈에 안 들어오고 대신 성경은 읽어도 읽어도 그렇게 달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13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던 권오성교수의 간증입니다.
여러분, 예수안에 깊이 들어가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축복을 맛보며 큰 은혜를 깨닫고 심령이 새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안에는 평강이 가득합니다.(7)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평강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삶의 환경은 더없이 편해졌지만, 이에 반비례하여 스트레스는 날마다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사단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권세아래 눌려 범죄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안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점점 빼앗겨 평안을 잃어버린채 염려와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 무엇이 우리를 변화시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삶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받고 변화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예수님앞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의 마음을 적시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7절에는 속량 곧 죄사함이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속량이란 말은 본래 '값을 치르고 다시 산다'와 '다시 사서 자유를 준다'는 이중적인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었고 당시 정복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한 노예를 두고 흥정을 벌려 비싼 값을 치르고 그를 산 다음 그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이제 너는 자유인이다.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실제로 로마의 주인들 가운데 자비로운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특별히 신뢰하던 신복 중 하나인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제2차 대전을 치를 때, 독일 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독일의 모든 공장을 100% 가동시키는데 천재적인 지혜를 발휘했던 공학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 24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슈페르도 있었습니다. 다른 전범들은 모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슈페르만이 자신의 죄를 법정에서 인정하여 20년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형을 살고 나오자마자 여러 권을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권의 책을 쓴 직후, 미국 ABC 방송 기자가 그와 함께 인터뷰를 한 일이 있습니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슈페르 씨, 당신이 초창기에 쓴 책을 보면, 나의 죄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던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슈페르가 아주 슬픈 기색을 띠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죄값을 치르느라고 20년 형무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을 다 치르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범한 죄는 절대 용서 받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2차 대전 때, 희생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오고 나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범죄를 철저하게 책임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참회의 길을 찾고 있었지만, 죄책감에서 자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 힘으로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무섭고 잔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인터뷰를 끝내고 몇 일 지나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죄를 범한 후 양심에 남아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죄 문제를 내 스스로 처리하고 그것이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자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나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이웃에게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내 죄 문제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우리에게 죄에서의 자유 곧 죄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누리며 사는 복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예수안에 사십니까? 예수안에서 그의 피로 여러분의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함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와 함께 두려움도 염려와 근심도 다 맡겨버리고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 세 번째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우찌무라 간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은혜가 넘치면 감사가 풍성해지고 행복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지면 짜증과 불행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살려면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행복하려면 가족들 모두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어디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안에 은혜가 넘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안에 들어와야 은혜받습니다. 예수 주변에서만 맴돌지 말고 예수안에 깊이 들어와야 은혜가 넘칩니다.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안으로 깊이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깊은 기도를 통하여 날마다 더욱 예수님께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말씀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안으로 깊숙히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여러분의 마음에 항상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신령한 복
엡 1:3-6 / 강성찬 목사
오늘날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는 양력 1월1일을 설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3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 축하행사를 성대하게 벌였습니다. 농사가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당시에 사람들은 씨앗을 뿌리는 계절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달력이 생기기 전부터 있어 왔던 설날이 이처럼 따뜻한 봄에서 지금처럼 추운 1월로 옮겨진 것은 약 2 천 년 전인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 시대에도 처음에는 봄의 시작인 3월 25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다 BC 46년 줄리어스 시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1년 365일제를 그의 율리우스력에 포함시키면서 1월1일이 새해의 첫날이 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아랍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음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정 혹은 민속의 날로 불려오던 음력정월 초하룻날과 양력 1월 1일을 말하는 신정이 함께 사용되어 오다가 1989년부터 구정을 설날로 하여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지키며 설날이라고 합니다.
한 해의 시작인 설날을 원단, 세수, 신일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일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달라는 기원과 이때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경거망동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설 명절의 신바람은 대보름달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첫 해, 첫 보름, 새해에 비로소 만월을 맞는 날 그것이 곧 보름입니다. 그 충만, 그 원만, 그리고 광명…,으로 눈에 보이는 천체가운데 그토록 완벽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 달과 함께 한 해가 밝아와 겨울의 긴긴 어둠은 가시고 새 빛이 움트는 것입니다.
설은 한겨울 엄동설한 중 저만큼 불기운이 어려 있는 때, 가물이 얼음이 풀리고 논에서 얼음 살이 빠져 새 봄이란 말이 어울릴 때입니다.
울긋불긋한 한복저고리와 색동저고리, 곱게 땋은 머리에 두른 댕기로 옷차림은 더욱 빛이 나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께 새 해의 첫 인사로 세배를 했습니다. 이는 장유의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의 기풍으로 어른들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인사로 서로 덕담을 나누며 복을 빌었습니다.
설날의 세시풍습에 복조리 걸기라 하여 전초에 대나무로 만든 조리를 붉은 실로 메어 벽에 걸어놓는 습속인데 조리는 쌀을 이는 그릇인데 복조리라는 복을 인다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설날은 명절다운 각종행사와 놀이가 치러지고 웃어른에게 세배하며 서로 축복을 빌어주는 대단히 의미 있는 날 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삶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한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애기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냅니다. 무슨 돈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남편은 당신의 핼쑥한 모습이 안쓰럽다며 내일 몰래 혼자 고기 뷔페에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오라고 주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펴서 쥐어 주는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가엔 물기가 고였습니다. '못 먹고 산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노인정에 다니시는 시아버지께서 며칠째 맘이 편찮으신 모양입니다. 아내는 앞치마에서 그 만원을 꺼내어 노인정에 가시는 시아버지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제대로 용돈 한번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작지만 이 돈으로 신세진 친구 분들과 약주 나누세요.' 시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을 힘겹게 끌어 나가는 며느리가 보기 안쓰럽습니다. 시아버지는 그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노인정에 가서 실컷 자랑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습니다. 다음해 설날,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세배를 받습니다. 주먹만 한 것이 이제는 훌쩍 자라서 내년엔 학교에 간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절을 받으신 할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놓은 그 만원을 손녀에게 세뱃 돈으로 줍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세뱃돈을 받은 아이는 부엌에서 손님상을 차리는 엄마를 불러냅니다. '엄마, 책가방 얼마야?' 엄마는 딸의 속을 알겠다는 듯 빙긋 웃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만원을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엄마한테 맡길래. 내년에 나 예쁜 책가방 사줘.' 요즘 남편이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안 하던 잠꼬대까지 합니다. 아침에 싸주는 도시락 반찬이 매일 신 김치뿐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내는 조용히 일어나 남편의 속주머니에 낮에 딸 지연이가 맡긴 만 원을 넣어 둡니다. '여보, 내일 좋은 것 사서 드세요.' 라는 쪽지와 함께.......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복을 말할 때 흔히 오복을 말합니다.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이러한 복은 세상적인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은 배금주의를 신봉하게 하였으며 많은 물질을 얻는데 모든 정신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도들도 물질을 모으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신앙의 크기와 물질적 축복의 비례적 관계를 당연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질적 축복과 더불어 팽배해 있는 것은 육체의 축복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물질도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의 육체의 건강만을 위해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영적 건강을 위해 더욱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신령한 복'을 말씀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입니다. 성도들이 누려야 할 참된 축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속한 복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언젠가 한 여성이 많은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이 참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일까,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잎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정원사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정원사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고, 써레질과 경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뿐이란다. 너는 내가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정원사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주님이 내 인생에 허락한 시련들로 인해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옵나니,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옵소서!”
모든 소원과 꿈과 희망이 좌절될지라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를 쳐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하늘 정원사-21세기 예화)
하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는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통해 퍼졌습니다. ‘부시는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소문으로 애꿎은 피해를 본 브로콜리 재배 농장주들은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거친 항의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대통령에게 선사하기로 했습니다. “대통령님. 이것은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입니다. 단백질이 많고 철분이 다량 함유돼 있으며… 몸에 상당히 이롭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셔서 이것을 즐겨 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선물 사건은 언론을 통해 보도돼 엄청난 홍보 효과를 거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줄 믿습니다.
1876년 여름 미네소타주의 농사가 메뚜기로 인해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다음해인 1877년 봄, 농부들은 메뚜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저들은 올해에도 메뚜기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으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자 미네소타의 주지사 존 S. 필즈베리는 그해 4월 26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공포했습니다. 주지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미네소타 주민들에게 이 같은 재해를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4월 26일, 모든 관공서, 학교,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주 전체가 엄숙하고도 거룩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그날은 4월이라 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기온이 한여름 날씨처럼 치솟았습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수십 억 마리의 메뚜기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 나와 땅에 기어 다녔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더운 날씨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알에 있던 모든 애벌레가 깨어 땅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이제 애벌레가 농작물을 망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나흘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어제까지 한여름처럼 무더웠던 날씨가 갑자기 급강하하여 그날 밤 온 땅에 찬 서리가 내렸습니다. 마치 불에 태우거나 독약을 뿌린 것처럼 기어 다니던 애벌레들이 모두 얼어 죽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농부들은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신 좋은 실례로 아직도 미네소타 주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하늘의 복을 주시며 현실의 복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섬기게 합니다.
(엡 1:8,9)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도시의 중심가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최 집사가 새해를 맞아 결단하고 30여년 동안 열어왔던 식당에 ‘주일은 쉽니다’란 표지를 내걸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긴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엔 종업원 10명을 교회에 등록시켰습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그날 근무하는 것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종업원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는 말 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주일을 잘 지키라는 설교를 듣고 두 가지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첫째는,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믿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일날 문을 닫으면 안 믿는 사람이 장사가 잘 되니 이 또한 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인해 제 삶이 달라졌어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원 할 때 심령의 평안을 주시고 삶에도 복된 은총으로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집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도 가까운 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내 나라에서 찾아야 하고 내 가정에서 찾아야 하고 내 생활에서, 내 직장에서, 내 친구에게서,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욱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길이십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 나그네가 홀로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걱정에 휩싸였습니다.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거나 마실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죽을 형편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그때 나그네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이 발자국을 나침반 삼아 부지런히 걷자” 나그네는 발자국을 따라 열심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마을과 오아시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섬뜩한 생각이 들어 발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삶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문득 인생의 밤을 만나면 섬뜩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그분은 인생의 참된 나침반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게 자기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있는 생명을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내와 희망과 환희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게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주셨습니다. 그는 나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어 나로 하여금 부하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는 나의 식물이요, 의복이며 가옥입니다. 그는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자랑이입니다. 그는 또 나의 지식이며 나의 ‘새벽 별’이며 나의 노래의 제목이며 예술의 이상입니다. 그는 또 나의 자각의 근저이므로 나의 철학과 윤리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스코틀랜드의 어느 신자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돌보아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할 때는 으레 '면제'라는 빨간 글씨를 써 두었습니다. 이 일은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서 장부는 온통 빨간 글씨로 뒤범벅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유언 집행자들은 '면제'된 빚을 거두어들인다면 고인의 유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자 다시 법정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때 판사는 '면제'라는 장부를 보고 '이 돈의 액수를 받아내도록 집행할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면죄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주셨습니다.
선택된 복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선택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성 프란시스코의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한번은 브라더 마세오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용모가 뛰어나지도 아니하고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모든 이들이 당신 보기를 바라며, 당신에게서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요? 어째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때에 프란시스가 대답하기를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시는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시고자 뜻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시는데 가장 거룩한 눈으로 죄인 중에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인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를 택하신 것이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또한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과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기 원하셔서 그렇게도 미천한 나를 택하셨던 것이오.” (21세기 예화-신령한 근심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복 주심을 바로 깨닫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도록 하셨습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가 그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 헌신적인 간호사로서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하는 선택, 즉 나의 생애를 방향 짓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나의 이름을 불러 개인적으로 맡겨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자각하는 데서 더욱 구체적이며 가치 있게 발전됩니다.
선택하시고 써 주시는 은혜와 복을 주심을 감사하며 충성 다합시다.
설날 복을 빌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복을 빌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잔치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 선택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금번 성회를 통하여 이 복을 받아 누리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택하심과 자녀됨의 복
엡 1:3-6 / 이정익 목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조용히 섭리하십니다. 늘 공급하시고 보완하시고 치유하시고 사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주지 못해서 안달하십니다. 주신 것들이 대표적으로 몇 가지 있습니다.
에덴을 주심
자식에게 주려고 집을 잘 짓는 아버지처럼 에덴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으면 에덴이라고 했겠습니까. 에덴이라는 말은 파라다이스 즉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곳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특별한 배려이고 특대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은 금과 은과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오해입니다. 천국까지 금은보석으로 꾸며졌다면 천국이 이 세상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돈 좀 있는 사람은 온 집안을 금은보석으로 얼마든지 꾸며놓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천국입니까.
계시록을 보면 천국은 각종 금은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요한이 환상을 통해서 보니까 천국이 마치 찬란한 금은보석으로 꾸며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그렇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파라다이스를 지키지 못해서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키지 못하면 잃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줄때는 먼저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심
하나님은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주셔도 그 아들을 제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온통 인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제물 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낼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고 흉내 내고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는 이 세상에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복을 주심
하나님이 너무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어떤 분들은 기독교에서 복을 말하면 잘못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가 기복종교화 되고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복을 구하고 복을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우려입니다. 기독교는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라는 말은 약속의 책이라는 말이고 복음이라는 말은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고 예수를 알고 구원받는 것이 복입니다. 복중에도 이런 복이 없습니다. 왜 복을 말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창세기 12:2)고 했고 또 성경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신명기 28:6) 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모두 신령한 영적인 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세상에서 말하는 것에 스스로 움츠리고 자신 없어 할 필요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 “달라는 기도 좀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말도 참 잘못된 말입니다. 여러분, 달라는 기도 빼고 기도 해 보십시오. 기도가 성립됩니까. 어쩌다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간구하고 안 되면 부르짖으라”(마태복음 7:7)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염치없어 말고 마음껏 요청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염치없어야 하고 뻔뻔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뻔뻔하고 염치없고 당당합니까. 그러니까 자녀입니다. 이웃집 아이들이 그렇게 당당하고 뻔뻔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해 하고 염치없어 하는 것이 교만이고 자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너무 값싼 복을 구하고 너무 이생적인 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물론 이생적인 복도 주셨지만 더 중요한 아주 근본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근본적인 복을 말씀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복의 내용이 4절에 나와 있는데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복”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의 복”입니다. 복중에서 이 두 가지 복이 가장 근본적이고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주석자 아미테이지 로빈슨(Armitage Robinson)은 바울 서신중 백미“라고 했고 윌리엄 바클레이 (William Barclay)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글 중 가장 성스러운 글” 이라고 말하고 “서신서들 중에서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내용들은 신령한 은혜를 다루고 있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인 자녀 됨과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서양의 한 신학자가 한국교회를 돌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한국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만 구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말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너무 이생적이고 현재적인 복을 구하고 가장 근본적인 신령한 복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인 복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이고 자녀로 택함 받은 것이 복인데 그 점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복에 대해서 문제가 된다면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그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이생적인 복을 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지적할 때 우리는 수긍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더 소중하고 근본적인 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
먼저 깨달음의 복을
이 깨달음의 복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복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마땅히 주어질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잠을, 건강을, 식욕을 복인 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것을 모르면 잃고 난 후에 알게 됩니다. 단잠을, 식욕을, 건강을 잠시중단 당해 보아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복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달음의 복을 먼저 주십니다.
감당함의 복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주어져도 감당하지 못하면 그것도 복이 아니고 재앙입니다. 지식의 복을 받았는데 그 지식이 그만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지식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지식은 복이 아니고 재앙이고 저주입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어느 날 큰돈을 벌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복입니까. 그 사람이 그 많은 돈을 관리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타락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갑자기 어느 날 복권을 탄 사람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통계를 보면 하나같이 복권을 탄 사람 99%가 타락했다고 합니다. 가난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성품도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돈이 많아지고 복권이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면 그 부자가 노동의 맛을 알 것이고 질서의 삶을 살 것입니까. 감당함의 복,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날 갑자기, 많이, 높이, 크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만족함의 복
만족함은 양이나 부피에 있지 않습니다. 양과 부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만족함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면 귀한 것이 주어져도 만족함도 모르고 귀함도 모르고 복인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만족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뒤따릅니다. 좋은 것을 받아 누리는 것, 그것이 주어짐에 만족해하는 것, 그 마음이 진정한 복입니다. 복을 아는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놓치지도 않습니다.
복을 전달하는 복
복을 받는 것도 누리는 것도 주어진 복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것도 중요한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을 나누고 전하는 복입니다. 창세기 14장19절을 보면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빕니다. “천지의 주재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야곱이 요셉의 인도로 애급에 가서 바로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창세기 47:10) 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복을 기원하는 사람“이 된 것 때문입니다. 목사에게는 축도권이 주어졌습니다. 축도는 복을 선포하는 권능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축도할 때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마치고 사제들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하면 성도들이 일제히 “사제에게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멘” 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가 복을 선포하고 기원하고 축도한다는 것이 내게는 여간 복이고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나누고 전하고 베풀고 선언하고 축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의 집에 가거든 먼저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빈복이 상대방이 받지 않으면 그 복이 네게로 돌아 올 것“(마태복음 10:13)이라고 했습니다. 복을 선포하십시오, 복을 나누십시오, 그 삶이 복을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성품회복의 복
이마도 이 복이 가장 큰 복일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장 먼저 주어지는 복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성품을 되찾는 일입니다. 얼마나 큰 복입니까. 내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면 그 성령이 내 안에서 변화를 일으켜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어받아 점점 성숙해 가는 내 모습, 얼마나 큰 은혜이고 복입니까. 신앙인은 그렇게 해서 성숙해져가고 익어가고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복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감사함의 삶은 참 중요한 자질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갈 때 이 불평하는 마음이 참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너무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뒤에서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들은 모두 뒤에 모여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서로 잘 뭉칩니다. 뭉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이렇게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시간이 많습니다. 사람이 할 일 없으면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쁜 사람은 불평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또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참 특수한 달란트이고 은사입니다. 불평을 잘 하는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런 불평 자는 4중고를 겪게 됩니다. 하나는 불평할 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얻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또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은 고사하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후회도 찾아옵니다. 살아가는데 후회는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지옥의 분위기는 후회의 장소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걸걸”하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합니다. 할걸, 말걸, 끊을걸, 포기할걸, 봉사할걸, 순종할걸 등. 이 소리는 고통의 소리요 후회의 소리입니다. 또 하나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안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뿐이 아니고 사람들도 가까이 안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마음에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임했던 은혜도 다 까먹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자격 유무를 따지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고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렇게 복을 주시는 이유
그 이유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에베소서 1:6)입니다. 왜 찬송하게 하시는가 하면 더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하고 영광되고 자랑거리가 되면 부모는 흥분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면 다 주십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고 사회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면 스승도 흥분합니다. 가는 곳 마다 제자 자랑과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도 흥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흥분하시는 모습이 탕자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아들자랑을 하였는데 그 아들이 집을 나가고 병들어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도 모르고 방탕하고 재산 탕진한 것을 생각도 안하고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버선발로 뛰어 나가 맞아들이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며 흥분하는 그 탕자의 아버지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이고 마음입니다. “내게 영광 돌려라, 내게 바치라, 주일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주시려고, 더 은혜 베푸시려고, 더 가까이 오시려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장 큰 복
엡 1:3-6 / 이정익 목사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교회에 처음 오시면 모든 것이 생소합니다. 그렇지만 곧 안정될 것이고 잘 왔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내가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복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복을 받고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복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눈에 보이는 복을 말씀합니다. 자손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자손과 넓은 땅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대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말씀합니다. 성결함의 복, 죄 사함의 복, 구원받음의 복,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을 말씀합니다. 이 두 복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더 소중한 복을 말씀합니다. 그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언제 택하셨는가 하면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 우리를 예정하사 ..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중의 복입니다. 이 복을 성경은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복”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소중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겨 버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를 몰랐을 때는 무지하기 때문에 편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도 했고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깊이 알고 보니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일생을 그 예수를 전파하는데 오로지 투신했습니다. 모르면 편견과 오해와 그릇된 판단이 만들어 집니다. 역사를 보면 편견의 역사가 많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원군 시대 때에 1만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참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순전히 예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6,25때, 일제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도 무지함 때문입니다.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편견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지함 때문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큰 실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우매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때로 무지가 가장 큰 죄일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이 알게 되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도 그 도를 지키고 수난을 감수하면서도 그 진리를 수호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 인생 가운데 가장 큰 은혜를 말하라고 하면 저는 주저 없이 내가 예수를 만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알게 된 사건은 내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전도를 받고 천국과 영생과 심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아찔했습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친구인 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천국이 정말 있는가, 있고 말고, 지옥도 분명 있고, 그렇지, 심판은 아주 무서운 영원한 심판이겠구먼, 그렇지.” 그때 이 친구가 목사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 나쁜 사람아, 그렇다면 나를 전도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네만 천국가고 나는 지옥에 가란 말인가”하고 따져 물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게 되면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뜨인 눈으로 보게 됩니다. 느끼게 됩니다.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나는 저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나의 값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고백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 예수를 증거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느 날 노년의 아퀴나스는 성전의 십자가 상 아래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형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잘도 글을 썼구나,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그 말에 아퀴나스는 “나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를 길이 알고 보니까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고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인 것입니다.
“택함 받음의 복”
예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음에는 그 예수로부터 택하심을 받는 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복입니다. “택함 받음”은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선택됨”을 뜻합니다. 이 택함 받음의 반대개념은 “버림받음”입니다. “탈락함”입니다. 이것이 또 가장 슬픈 일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직장에서 버림받는 일도 불행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이웃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한 복”입니다. 저는 제 인생 전체 중에 무엇인가 당첨되고 심지를 뽑아 뽑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중요한 행운을 한번 뽑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뽑힌 일입니다. 이 일만 생각하면 참으로 감동입니다. 영광입니다. 대박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모두 그렇게 뽑힌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복된 사람들인가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톨레돗”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톨레돗“이라는 용어는 ”계보“ 또는 ”족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주인공이 죽으면 그 뒤에 계보 즉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특징은 먼저 택함 받지 못한 비택자가 나타나고 다음에 택함 받은 택자가 나타납니다. 이 형식을 톨레돗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죽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그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보면 먼저 비택자인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오고 그 뒤에 택자인 이삭의 족보가 나옵니다. 또 이삭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족보가 나타나는데 먼저 비택자인 에서의 족보가 나오고 그 뒤에 택자인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같은 형식을 “톨레돗”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비택자도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선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십니다. 이 복은 일반적인 복입니다. 이 일반적인 복은 누구에게나 다 주어집니다. 그래서 비택자인 이스마엘도 에서도 복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택자들 보다 눈에 보이는 복을 더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양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물질적인 복이 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에서 물질과 영광과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기복종교화 된다고 우려들을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자꾸만 저해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복을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으로만 지나치게 강조되면 안 됩니다. 물질의 복은 불교인도, 무속인도, 사기꾼도 다 받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많은 물질의 풍성한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내용들과 경우들만을 진정한 복이라고 강조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이해를 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부름 받아 택함을 받은 자됨의 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것도 깊은 의미를 알고 보면 누군가의 손을 통해서 인도를 받아 이곳에 나와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우연 같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통해서 나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부르셨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은혜는 참으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택함 받음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많은 위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 요셉은 모두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혈통에서 마침내 예수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과 섭리가 흐릅니다. 그 복이 물질의 복이나 이생의 복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은 당대에 나타나는 복이 아닙니다. 아주 먼 후대에 까지 주어지는 “언약의 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학자 에드워드 요나단목사는 근근이 그리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슐츠라는 사람은 대대로 술집을 경영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풍부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5대손을 조사했더니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요나단 목사의 5대손은 모두 896명이었습니다. 그 자손 중에 선교사가 116명, 교수가 86명, 총장이 3명, 문필가가 75명, 상하의원이 4명, 사업가가 7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술집을 경영하여 풍부하게 살았던 슐츠의 5대손은 모두 1,062명이었는데 그 중에 전과자가 96명,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5명, 극빈자가 286명, 무학자가 460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돈을 많이 벌어 당장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은 것이 복입니까. 오늘 물질이 많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령 씨는 신앙생활 시작한 것이 얼마 안 되는 분인데도 사탄도 물질적인 복을 줄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업을 돌보시지 않고 물질적인 복을 안준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삶은 먼 내일을 내다보고 훗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복을 알게 되고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알면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게 되고 자손을 위해서 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시간이 있어서 봉사 좀 한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한다고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신앙의 삶 이면에는 이 같은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로 진정한 신앙인은 고난이나 죽음의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제 때에, 6,25때에 순교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순교하는 자리에서도 이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 처음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이 같은 복을 알기를 원합니다. 복은 보이는 복이 있고 보이지 않는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보이는 현상 위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과 당장의 삶과 땅만 생각하고 현실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 위를 보지 못합니다. 저 위로부터 주어지는 숨겨져 있는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저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위대한 복은 모두 저 위로부터 주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택함 받음의 복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할 일“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먹고 살아가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이 나의 가치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들은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피 흘리고 순교하는 것만 영광 돌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크고 위대한 일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중심 있는 삶을 살아가고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백적인 삶을 살면 됩니다.
이를테면 식당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식사를 앞에 놓고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도 잘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주일날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향하여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그 자세는 만인 앞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자세이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직장에서 소신 있게 자신의 신앙의 삶을 고백하고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오늘 직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어서 무소신 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살아가다가 어려운 갈림길을 만났을 때 신앙적 소신을 따르면 상당한 손해를 볼 경우 그 때에 과감하게 손해 볼지라도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삶도 고백적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그 삶이 중심 있는 신앙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찬양할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의 기쁨이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예수를 믿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을 받으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주안에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이웃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내 민족이 복을 받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만을 위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택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 복입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이미 나를 아시고 택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감격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언어로, 직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고 삶의 이유이고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 삶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삶이고 존귀함을 얻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는 삶이 됩니다.
하늘에 속한 복
엡 1:3-6 / 류영모 목사
1. 하늘에서
페루 어느 평원엔 무려 60km에 걸쳐 이리저리 얽힌 마른 개울같은 선들이 있다고 합니다. 폴 코속(Paul Kosok)이란 분이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이 지역을 연구하다가 뻗쳐진 선들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사막의 선들은 70여개에 달하는 동식물 그림이었다는 겁니다. 어떤 그림은 15km에 걸쳐 그려져 있었고 새 한 마리가 300m의 폭에 그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들이 너무나 신비하여 행여 외계인들이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Mavia Reichen 저 "사막의 신비" 중에서)
에베소서라는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니 가장 신비하고 존귀한 존재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가장 신비한 공동체가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심장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 교회의 신비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출렁이는 바다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다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고기들과 해산물들이 있습니다. 바다 밑엔 금은 보석 석유 등 탄광 자원들이 묻혀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직 교회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실대고 보혈의 능력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무한한 영적자원이 묻혀 있습니다.
「성도의 존귀 그리고 교회의 영광」이란 주제로 에베소서를 기록한 저자는 에베소서 1:3이하 본문 첫 문장을 기록하는데 자그만치 3절부터 14절 열 두절을 쉼표 마침표도 없이 한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202개에 달합니다. 우리말 성경엔 여러 문장으로 나뉘어져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은 한 문장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가운데 가장 긴 문장입니다. 그 내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 인치신 성령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
할렐루야 성령님 찬양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역사상 가장 긴 문장에 담긴 보화는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복의 창고를 여는 열쇠 -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은행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분이 급히 송금할 일이 있어 시골 은행에 들렀다가 목격한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은행 여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창구 여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매, 비밀번호 뭐라요?" 그러자 할머니는 아주 아주 가는 목소리로 "비.둘.기"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황당해 하며 여직원이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할매요, 비밀번호 말 안하면 돈 못 찾는다 아잉교... 비밀번호 말 하이소!" 그러자 살짝 입을 가리신 할머니는 한 번 더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인내에 한계를 보인 여직원은 "할매요, 바쁜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와 이라능교? 퍼뜩 비밀번호 대이소!"라고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그제야 할머니가 비밀번호를 말하는데 온 은행 직원들은 배꼽을 잡고 웃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비밀번호는 바로 "9999"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복을 여는 비밀번호는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헬라어로는 "유로겐토스" "하나님 복 받으십시요" "송축합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 찬송이란 악기를 연주하고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찬송이지요. 찬송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마음으로, 몸으로, 입술로, 노래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신 목적이 바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사야43:21)
매미는 단 2주일 - 보름을 노래하기 위해 7년 내지 17년을 거름더미 땅속에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보름동안 노래하는 것이 좋아 맴맴맴맴 세상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뇌성마비 천재시인 송명희씨는 "하나님 찬양합니다" 한 마디를 하기위해 두 팔을 비틀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두 발을 버티고, 배가 꿈틀거려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송명희처럼, 매미와 같은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찬양입니다.
그리스신화에 "음악의 신 - 오르페우스"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큰 바다를 여러 달 항해하는 선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요정의 노래였습니다. 그 요정의 노래 소리만 들리면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로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배에 오르페우스 신을 모시고 항해한 이후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정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오르페우스 신이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에 취한 선원들에게는 요정의 노래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음악의 힘입니다.
II. 영적인 복
현대인들이 왜 이토록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왜 그토록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얼굴로 사는 것일까요? 하늘 보화창고를 여는 비밀번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배가 채워지지 않아 허할땐 밥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허하고 마음이 공허할 땐 어떻게 그 허전함을 채워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술과 담배 혹은 쾌락과 정욕에 자신을 던져봅니다. 중독이 되도록 인터넷을 뒤지고 인기인에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음의 상처가 많을수록, 사랑의 결핍이 심할수록 마음의 구멍이 더 크다고 합니다. 허전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되고 잘못된 집착증이 심하다는 겁니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 웅덩이가 클수록 상처를 쉽게 받고 쉽게 허전해하고 땅의 것들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가슴에 뚫린 구멍과 상처는 땅의 것들로 매울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그 구멍은 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가 있고 메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복, 영적인 복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복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절 이하에서 14절까지 숨쉴 겨를도 없이 폭포처럼 그 복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폭포가 얼마나 강렬했든지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을 원망할 틈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할 공간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볼 눈이 없습니다. 상처타령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제자들을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찬송과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
우리 말로는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만 영어로는 Spiritual Blessing 영적인 복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과 대조되는 말은 "땅에 있는 육적인 복"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고 몸이 건강해지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구멍과 허전함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진다 하여도 순간적이요 일시적입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헬라의 제우스신이 준다고 생각했던 물질적 번영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테네 여신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적인 복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을 주신다"고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복음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10개월이 이 땅에 살아가게 될 70년 80년 우리의 삶을 좌우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이가 상처를 받으면 이 땅에 살아갈 동안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10달이 100년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죽을 수도 있고 70년 80년 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짤막한 이 땅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게 됩니다.
D.L. 무디가 62세때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평균 나이가 58세쯤 되니까 꽤 많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Old 무디가 어떻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실은 무디를 칭찬하는 기사였지만 "Old 늙었다"는 말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났어요. 주일날 무디가 설교하러 단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신문 보셨죠. 나를 보고 늙었다고 썼습니다. 여러분 제가 늙었습니까?" 그랬더니 교인들이 가만히 있어요 진짜 늙었거든요. "내가 이제 겨우 62세인데 곧 죽을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100살을 살 거예요." 교인들이 다 고개를 푹 숙였어요. '노망이 들었나.' "아니요 나는 천년을 살 거요. 만년을 살 거예요. 나는 10만년을 살 거예요. 10만년에 10만년을 살아 나는 영원히 영생하며 살 것입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아멘!"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야 될 장구한 영생의 세월이라는 것은 이 땅에 살아가게 될 50년 70년 80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땅에 80년 세월이라는 것은 한 순간 점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준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에 남는 장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종말에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영적인 복이라고 할때 여기 "모든"은 영어 All이 아니라 "Every"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적인 세계를 남김없이 하나 하나 전부 누리라는 축복입니다.
III.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첫 번째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1:4-6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선택이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 만민 구원이냐 선택된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느냐? 신학자들 사이에서 끝없이 논쟁하고 갈등하고 고민해 왔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모든 교파 모든 사람들을 만족하게 할만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택교리가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성경의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인가? 이것 때문에 교파가 나뉘어졌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선택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 안되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15:16)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고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내가 하나님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을 택하고 내가 하나님을 골라 잡은 것 아니더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100번도 더 말씀하셨어요. "내가 선택했다. 은혜로 선택했다. 내가 너희를 불렀다. 너희는 내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손바닥에 새겼다. 내가 너를 택했다. 은혜로 택했다. 자격이 있어서 택한 것 아니다. 무조건 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교리가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자기가 구원받는데 자기도 한몫 끼어들고 싶은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99%까지는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도 1%는 한 것 아닌가? 내가 이만큼 진실하니까 이만큼 예쁜 구석이 있으니까 이만큼 순종하니까 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만큼 똑똑하니까 이만큼 착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 아닌가? 자기의 공로를 0.1%라도 끼워넣고 싶어합니다. 그것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이걸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선택의 교리를 계속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이 악하다는 겁니다.
선택의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복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근거가 내게 있다면 그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땐 구원받은 것 같다가 내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있기에 그 구원은 왔다갔다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변덕스런 분이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를 기분 나쁘시다고 지옥으로 쫓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나를 자녀로 삼으셨으면 내 조건 여하에 따라 변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택교리가 주는 영적인 복입니다.
선택교리를 숙명론으로 오해하여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우리의 순종을 통해 천국으로 부르십니다. 복음전파를 통해 선택한 자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복음전파를 통해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가 나누어집니다.
오늘 본문 선택의 교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혼란케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잘 압니다. 먼저 세상 만물이 창조되고 마지막날 마지막에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어찌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인간이 있었고 내가 그분의 계획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의 연장선상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되어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그 말이 이해가 안된데요. "아들이 몇이세요?" 그랬더니 아들이 넷이래요. "그러면 자녀 넷을 사랑하는데 권사님께서는 맡아들에게 ¼사랑, 둘째 아들에게 ¼사랑, 셋째 딸에게 ¼사랑, 막내 아들에게 ¼사랑, ¼씩 나눠서 사랑하세요?" 그게 아니지. 한 아들 하나 하나를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쏟아서 맏아들을 사랑하고, 둘째 아들 사랑하고, 셋째를 사랑하고, 넷째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알아 듣겠데요.
한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나를 천만분의 1로 나누어서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세요. 이 존귀함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내가 창세전에 선택받았고, 내가 지난 주일은 성도가 되었고 오늘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마 어마한 것인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작은 일에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IV.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택하신 자들에게 따르는 또 다른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결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거룩하지도 않고 흠도 많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아찔 아찔 할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자리에서도 미움과 더러운 생각이 지나갑니다. 심지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분노와 상처가 꿈틀거립니다. 입을 열면 험담과 부정적인 말을 뱉습니다. 이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흠이 없는" 이 말이 헬라어로 아모무스(amomous)라고 되어 있는데 신약성경에 8번쯤 사용된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예물에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흠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존재가 거룩해졌고 흠이 덮여졌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흠이 없다"는 "아모무스"의 "모무스"(momous)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조롱과 비난의 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덮어버리면 비난의 신 모무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의 완전한 능력, 완전한 거룩을 말합니다. 이게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밝히시는 주의 보혈
성자 예수 그 귀한 피 찬송하고 찬송하세
주님 앞을 멀리 떠나 길을 잃고 헤맬 때에
나의 뒤를 따라오사 친히 구원 하셨도다
흰눈보다 더 흰눈보다 더 주의 흘리신 보혈로 희게 씻게 주옵소서
V. 아들이 되게 하심
정죄의 신 "모무스"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흠을 덮어 주신 궁극적 목적이 5절에 나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 -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양자됨"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유대 개념엔 양자됨이 없습니다. 성경은 로마의 양자 개념을 빌려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테크논(Tekuon)이라고 하고 양자가 되어 권리상 자녀가 되었을 땐 휘오스(huious)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양자개념의 "휘오스" 합성어를 사용합니다.(휘오데시안 - 양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겐 하나님의 자녀(테크논)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당시 로마사회에서 어떤 귀족이나 부자에게 자식이 없으면 때로 노예 중에서 아들을 삼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뉴스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노예에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로마 황제 중에도 노예가 입양되어 황제가 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런 인물입니다.
아마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노예출신 유명인이 머릿속에 지나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가 된 것은 천지창조보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과거의 모든 신분, 과거의 관계, 실수와 죄악,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엄청난 복이 부자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진급되는 일이 이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이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하늘에 속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영적인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영원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1962년 당시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불을 들여 만들고 무려 8번이나 재개봉을 했던 영화가 있습니다. 125,477명이 출연, 제작기간 10년이 걸려 만든 영화 벤허입니다. 아카데미 11개 부문을 수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벤허는 허(Hur)씨의 외아들이란 뜻입니다. 허씨 가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살던 부호가문이었습니다. 어느날 로마의 신임 총독이 부임하게 되고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총독을 수행하던 멧살라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벤허의 옛친구였습니다. 바로 그 멧살라가 벤허의 어머니, 누이, 연인을 감옥에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벤허를 노예로 팔아 벤허는 갤리선의 노를 젖는 중노동을 합니다. 노예가 된 벤허는 갤리선(노예를 이용한 군용선)의 사령관 아리우스의 눈에 띄게 되고 이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을 때 벤허는 사령관을 구하는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령관은 벤허를 양자로 삼고 끼고 있던 반지를 벤허에게 끼어주지요. 그때부터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의 귀족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게 양자라는 로마의 제도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우리를 피로 덮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양자 삼아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와 자원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사탄의 노예선에 붙들려 사탄의 노를 저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신분, 죄와 실수, 허물과 과거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에베소서는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신령한 복
엡 1:3-6 / 성흥모 목사
여름휴가 때 읽으려고 요즈음 잘 나가는 책들을 구했습니다. 시골 한가한 곳에 내려가서 책이나 읽으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도 좋은 내용이어서 사자마자 읽은 책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책을 읽는지? 성경만 보시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데, 특별히 경제 분야와, 리더십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쓴 “나는 걷는다.”라는 책 1-3권을 샀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부 신문기자요, 사회 경제면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은퇴하고,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西岸)까지 3000Km의 실크로드를 걸어서 여행하기로 하고, 무려 4년에 걸쳐 자신의 꿈을 실현하였습니다.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서양과 동양을 이어주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요, 중국의 시안(西岸)이라는 곳도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단 1Km도 빼놓지 않고 온전히 걸어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자신을 비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걷는다”라는 책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기대가 됩니다. 다 읽은 후에 한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느리게 사는 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임스 킹이라는 분이 지은 “중국이 뒤흔드는 세계”라는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제임스 킹이라는 사람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10년, 로이터통신 아시아 특파원으로 10년을 일한 사람으로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하였고, 중국과 일본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최고 CEO 이나모리 가즈오의 성공철학이 담겨 있는 ‘카르마 경영’이란 책도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CEO가 휴가 때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선정했습니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경영자의 사람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입니다. 현재 교세라그룹의 명예회장인 이나모리 가즈오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이며,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톰 켈리와 조너던 리트맨이 지은 ‘유쾌한 이노베이션’,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 소설가 윌리엄 폴 영의 장편소설 ‘오두막’이라는 소설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도 있습니다. 신문기자 출신의 한상복이란 사람이 쓴 ‘재미’라는 책입니다. “재미가 있다면 우리의 내일은 더욱 설렐 것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사의 이사가 사표를 내는 팀장에게 책망하면서 말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하냐? 전에는 제품의 품질이나 서비스가 기업의 핵심가치였지만, 이제는 이야기라고 말이야. 지금은 이야기를 파는 시대라고 했잖아. 재미와 감동이 있는 이야기 말이야. 요즘 기업들이 괜히 심심해서 재미니 스토리니 하는 것 같아? 다들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재미가 없는 건 무능력이냐, 아니 가장 심한 모욕이라구.” 이사의 책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이제는 한 차원 도약해야 한다는 거야. 방향이 그게 아닌데 전력질주하면 뭘해?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데이모스의 법칙이라는 것 들어봤어?”라고 합니다.
돈 버는 일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파는 시대, 재미와 감동이 있는 이야기, 재미가 없는 건 무능력이라는 말도 심각한 문제제기입니다.
데이모스의 법칙이라는 말을 저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데이모스(Deimos)는 ‘걱정의 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입니다. 별의 별 신들이 다 있습니다. 데이모스란 신은 걱정의 신이랍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5만-6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5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살다보니, 오만인상을 쓰는 것입니다. 그 5만 가지 생각 중에서 90%는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 벌레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 일 중에 90%는 불필요한 걱정에서 비롯된 활동이라고 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인생은 즐기며 살아야지, 걱정에 매여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데이모스의 법칙은 90%의 불필요한 걱정, 쓸데없는 걱정, 그 많은 쓸데없는 걱정의 90% 이상은 어제 했던 걱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90%의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만, 우리는 90%의 불필요한 걱정은 버리고 10%의 창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만 잘 살려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에배소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6절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에서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도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원문 성경을 보면 “찬송하라 그 하나님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우리의 전심을 다하여 찬송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어떻게 찬송하느냐 하면 전심으로 찬송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몸과 마음과 영혼을 기울여 전심으로 찬송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기독교는 전인적 변화를 창조한다.”라는 그의 글에서 시인 워즈워드의 시를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워즈워드의 시의 제목도 모르지만, 이러한 시였습니다. “나는 느꼈네./ 숭고한 생각의 기쁨으로/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를" 라고 했습니다. 저는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를“ 이 말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 여러분을 흔들어 놓은 존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숭고한 생각의 기쁨으로 나를 흔들어 놓은 그 분을 기뻐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흔들어 놓는 존재,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무엇으로 빚고 계십니다. 흔들어놓고 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으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으로,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빚어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나온 것입니다. 저의 시간, 물질 건강 정욕 모두 다 바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려고 창의적인 생각을 모으고 최후의 결전에 임하려고 합니다.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당회원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내외분이 경북 문경에 가서 문경 새재에 가서 식사도 하고, 철로자전거를 타고, 석탄박물관도 관람하고, 도자기전시관에 들러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만든 그릇을 가마에 구워 보내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물레에 앉아 관장님이 제 손을 잡아주어 작은 사발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진흙 덩어리를 물레에 올려놓고 흙을 빚어 사발을 만들었습니다. 둥근 사발이 나왔는데 관장님이 한쪽을 누르고, 한쪽을 휘어놓아 하트모양으로 변형시켜주었습니다. 나중에 받고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발을 받아서, 제 책상에 놓아두고 소품을 넣어두는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집사람이 만든 그릇은 접시였는데, 조금은 투박하지만, 아주 튼튼하고 유용한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 단순한 흙덩어리에 불과한데, 우리를 물레에 올려놓으시더니, 당신의 창조의 솜씨를 발휘하시면서 소중한 사람으로 빚어주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벗으로, 그리고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성도로 빚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담고,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전심을 다하여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전심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마음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요, 전인격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같은 시찰회의 주님의 교회의 임시당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섬겼던 부목사님으로부터 참으로 충격적인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양장로님이라는 분이 개척멤버이신데, 교회의 재정부장으로 섬겼습니다. 그 장로님의 회사에 다니는 직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장로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왔으나, 회사의 사장이 나오라고 하니, 교회에 나와 앉았다가 돌아갑니다. 장로님이 운영하는 회사 직원이요, 회사에서 신임이 두터운 사람인지라, 그는 주일 헌금을 모아주면 그 헌금을 받아가지고 은행에 입금시킬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불신자입니다. 할 수 없어 나와 앉아 있지만, 찬송을 부르지도 않았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그냥 눈만 감고 잠을 잤습니다. 설교 시간은 정말 자는 시간입니다. 이러기를 몇 년이나 반복하는데, 하루를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는데, 그에게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왜 교회 와서 잠만 자고 있느냐. 정신 차려라.” 하시면서 따귀를 때리시는데, 설교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아...”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났는데, 얼굴에 손으로 때린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고씨인데, 그는 후에 잘 믿는 집사님이 되었고, 지금은 모세골교회에 출석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3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3)”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님과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에배소서 1장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주경학자는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사역의 통로가 되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에배소서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엡2:5-6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예수를 선물로 허락하여 주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켜 주셨고, 함께 하늘에 앉혀주시고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복”은 어떤 복입니까?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이신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 하늘에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적인 복, 신령한 복입니다. 이 세상의 육적인 복이 아니라, 천상적이고,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들이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영적인 선물입니다.
누가 구원받은 사람이요, 성령 받은 사람입니까? 오늘과 같은 시대에 주일이 되면,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고, 예배드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사모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사람이요, 성령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신 분이라고 단언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교회에 나오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이신 교회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모이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찬양하는 이것이 교회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자녀로 택하시고 예정해주셨습니다.
4-5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시는데, 창세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신 예정입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역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 전에”라는 말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생각, 계획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결함이나 오점이 없는 깨끗한 상태에 두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활을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그 사랑 때문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면서 바르게 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6절에서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도 새번역으로 읽으면 그 말씀하는 내용을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엡 1:6)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영광스러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항상 받는 사람은 과분한 은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얼룩져 있고, 죄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데,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생각해보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무지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였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전세버스를 타고 대전 유성을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전세버스에서 한 방송국의 특집을 재방송하는데, MBC에서 광복60년주년 기념 음악회로 나훈아의 아리수라는 프로였습니다. 수천명의 관객과 호흡하면서 정말 짜임새 있고, 훌륭한 음악회였습니다. 나훈아라는 가수가 나와서 1시간 반 정도를 노래하면서 진행하는데, 정말 대단한 국민가수였습니다. 노래 하나를 부르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지요, 온 몸이 땀으로 젖어 흐를 정도로 열창하는데, 정말 잘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진행요원들이 얼마나 잘 준비하였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어디 하나 책잡을 것이 없도록 진행하는데, 우리의 예배도 그렇게 잘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유행가를 부르는데도 그렇게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데,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주님을 찬송합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흔들어놓고 계십니다. 세상에 나를 위하여 죽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나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겠다고 나설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나를 대신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자녀로 택하시고 예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다. 하나님을 높여드립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말씀대로 살아가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고 보람이 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부활찬양
엡 1:3-6 / 김상수 목사
1.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많은 책과 글, 정보들이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어떤 꾸밈이나 거짓없는 진심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가끔 장례가 나면 화장장과 납골당에 까지 동행할 때가 있다. 납골당에 가면 유골함과 영정사진들 앞에 유족들이 갖다 놓은 꽃이나 편지, 사진들이 있다. 일부러 그 내용들을 읽어 보곤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사진이나 편지, 쪽지의 내용들을 읽어보면 그 속에 거짓 없는 사랑과 소망의 마음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분당 어느 납골당에서 여러 글들을 살펴보는 중에 어느 여고생의 명예졸업장이 눈에 띠었다. 여고를 졸업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준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구구절절한 말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런가하면 81년생 청년의 사진, 유치원생 어린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의 간절한 글귀(“사랑하는 00야, 넌 천국에서도 가장 예쁠거야”), 존경하는 아버님 사랑합니다... 등등
그런데 이런 문구들 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믿는 성도들의 영정 앞에 있는 문구들이다. 믿는 성도들 앞에 있는 글들을 보면 사랑한다는 표현과 함께 꼭 들어가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에 대한 말이나 성구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부활의 소망 가운데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런 부활의 소망과 성경말씀들을 읽으면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성도로서 우리의 남은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목적이 뭔가? 가장 대표적으로 영혼구원 사역을 비롯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들을 말해준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목적들 가운데서 이 시간에 나누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다.
2.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한 가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6절). 그리고 계속해서 동일한 말씀을 반복한다(12,14절)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3-14)”
하나님은 자녀들을 통하여 찬송받기 원하신다. 우리들이 잘아는 이사야 43장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나깨나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을 찬송하면,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요, 주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다.
3. 특별이 부활절 오후예배 이 시간에도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의 찬양이 어떤 찬양이 되어야 하는가? 성령님이 자유롭게 운행하시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시간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는 함께하는 우리 모두가 성령이 자유롭게 운행하시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메며”라는 찬송이 있다(84장)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때에 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이 가사를 보면 자신은 지금 이 시대에 살지만 2,000여전 갈릴리에서 소경을 고치시는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간 감격의 현장에서 찬송을 쓴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찬송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동일하게 찬양을 부르면서, 들으면서 십자가 장면에서는 십자가의 모습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현장에 들어가자. 부활장면을 찬양을 때는 부활의 그 현장에 우리도 함께 있자.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부활의 능력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능력이 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표정도 감격에 찬다. 영안을 열어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 속에 내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하면 성도들은 자연히 은혜받게 되어있다. 설령 조금 실수해도 그것이 하나도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 찬양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자유롭게 운행하시면서 성도들을 만지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성가대의 찬양, 가사, 몸짓, 표정 하나하나를 통해서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찬란한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이 부활의 찬양은 성가대의 칸타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찬양이다. 내가 몸으로 성가대의 자리에 서있지는 않지만, 마음과 믿음으로는 함께 성가대의 찬양 속에 서있는 것이다. 이렇게 찬양할 때 찬양의 능력을 경험한다. 그 찬양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한다. 그 찬양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을 흘려보낸다.
4.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주님만 바라보며, 찬양 속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자. 그래서 성령이 마음껏 우리 모두를 만지시고, 하나님께는 한 없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자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엡 1:3-6 / 김형준 목사
오늘 우리 삶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희망과 참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목적과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거짓된 것을 진실로 믿으며 자기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 기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40일이라는 기간은 성경에서 중요한 영적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40일간의 시간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시간은 결코 다른 것에 의해서 양보될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될 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첫째,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생존하는 단계이고, 다음은 성공의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추구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무엇이 가장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찿아 나가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본문 말씀 3절에 나오는 신령한 복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복인지, 행복인지, 가치있는 인생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의 상징인, 로마의 시민권, 고귀한 지식과 학문의 상징인 가말리엘 선생님의 제자, 그리고 많은 재산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위하여 거룩한 열망을 따라 살게 됩니다.
사람은 가치 없는 일보다는 더욱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누리는 것보다 오랫동안 나아가서 영원한 것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그가 속한 삶의 현장은 모든 환경이 이방문화로 둘러싸여있습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 부딪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삶을 위해서는 하루에 세 번씩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는 영적인 습관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을 늘 기억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목적을 이루는 40일의 기간은 우리에게 바로 나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알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거룩한 습관을 갖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는 삶의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됩니다.
6절 말씀은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같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될 때에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그것을 얻을 수 있고 공급받을 수 있는 신앙의 태도를 갖게 되고,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주님의 기업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단하게 됩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는 통로를 절대로 막는 일을 하지 않고, 막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40일간의 목적이 이끄는 삶의 훈련은 지속적인 축복을 받는 삶의 태도를 만들고 이루어지도록 하기위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훈련입니다. 소그룹을 통해서 함께 모이고 만나는 습관과 태도를 만들게 됩니다. 이미 지났다고 포기하지마시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교회와 가정과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귀중한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고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의 인생은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찬미의 공동체
엡 1:3-6 / 이동원 목사
저는 에베소서를 여는 서론 부분을 읽고 있으면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서두를 듣는 것 같은 감상에 빠집니다. 잘 아시는대로 악성 베토벤은 남달리 고통스런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만성 성병환자에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폐결핵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부모로한 극도로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17세에 어머니를 잃고 22살에는 아버지를 잃고 28살 때부터는 음악도에게는 치명적인 청각장애를 앓기 시작합니다. 32세에 그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인생의 고뇌에 빠져 집 근처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인생의 문을 녹크하는 운명의 문소리를 듣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런 거친 인생의 운명을 차라리 사랑하고 노래하며 살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다다다~다--/솔솔솔~미-- 이 짧은음 세 개와 긴음 하나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교향곡 제 5번 ‘운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는 바울사도가 전도하다가 잡힌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채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는 1장 3절의 이 편지의 서두를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그는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겠다고 말할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냐고요? 그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지상의 고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찬미를 강조할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어마어마한 영적인 축복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축복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이유가 바로 이런“--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1장에 6절과 12절,14절에서 반복됩니다. 아니 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발견한 사람들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트로이라는 영화가 한국에 상륙하여 상영되고 있습니다만 1800년대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라는 소년이 7살 때 아버지가 성탄절 선물로 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에서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의 나이 41세에 본격적으로 고고학자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그의 나이 51세되던 해 1871년 드디어 고대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할 뿐 아니라 유적 발굴의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보화들을 발견하고 세기의 부자가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꿈꾸던 보화들을 눈으로 확인하던 순간 그는 얼마나 탄성을 발하며 감격해 했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한 독일의 기자가 그가 부자가 된 것을 축하했을 때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제나 부자였습니다. 내가 트로이에 대한 꿈과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이미 부자였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보화와 비교할수 없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에 대한 비전과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찬미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공동체가 찬미하며 살아야 할 우리 위해 준비된 영적인 축복들은 무엇들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축복들을 삼위 하나님이 베푸시는 순으로 소개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은 ‘선택’(election)과 ‘양자 삼으심’(adoption)이란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그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정하셔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래 그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존재인가를 아시고도 우리가 마침내 거룩하고 흠이없는 자녀로 그앞에 설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그의 자녀 삼기로 창세 이전부터 선택하시고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신문에 미혼모 자녀들에 대한 국내 입양문제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미국에서 만났던 한국 아이들을 셋이나 입양했던 분의 기억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 지구촌 교회에서 목회할 때 두세번 한국 자녀들 입양 가정들을 저희 교회에 초청하여 잔치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마침 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분이 워싱톤 지역의 한국자녀 입양단체의 회장으로 미국 교회 목회자이셨습니다. 이 분은 자기자녀가 셋이나 되는 데도 한국 아이를 셋이나 입양한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이 세 아이들이 조금씩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일부러 그런 아이들을 환영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보통 입양할 때 한국 사람들은 건강하고 잘 생긴 아이들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들 죄인되었던 자들을 그렇게 자기 자녀로 입양하지 않으셨냐고 저에게 오히려 반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자기 아내의 헌신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일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이 조건없는 선택과 양자됨의 은혜를 상기시키시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6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2. 성자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구속(redemption)과 계시(revelation)라는 두 교리적인 단어들로 요약할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보십시오.“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구속이란 말은 본래 ‘값을 치르고 다시 산다’와 ‘다시 사서 자유를 준다’는 이중적인 뜻을 지닙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시절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었고 당시 정복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고가로 거래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한 노예를 두고 흥정을 벌려 비싼 값을 치르고 그를 산 다음 그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이제 당신은 자유인이요 부디 행복하게 사십시오”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실제로 로마의 주인들 가운데 자비로운 주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는 일이 드물지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실상 하나님 보시기에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신 그분은 친히 그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그는 우리에게 죄에서의 자유 곧 죄사함을 선언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는 이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사는 자가 되게 하는 축복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8-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여러분은 누구에게 비밀을 알리십니까? 정말 친한 자가 아니면 안되지요? 제 비밀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 아내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밀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친한 친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요한15: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배워 알고 하늘의 뜻을 깨달아 아는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닙니까? 아니 이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찌 찬양 안할 수 있겠습니까?
3. 성령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인치심(sealing)과 보증(earnest)이라는 두 교리적 단어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그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치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소유권(ownership)을 뜻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너는 내것이라”(이사야43:1)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의 보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당신의 보배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여겨 주시고 그렇게 돌보아 주신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기업에 성령으로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서 기업이란 성도들이 장차 올 세상과 이 땅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망라한 개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안에 오신 성령이 장차 우리가 누릴 모든 축복의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계약하면 먼저 보증금을 지불합니다. 이 보증금은 앞으로도 확실히 내겠다는 보증이요 이미 내기 시작한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확증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24장) 아브람의 종이 주인 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가서 리브가를 만나자 마자 금은 패물을 꺼내어 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삭이 리브가에 줄것의 전부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장차 누릴 축복의 보증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곤고하다고 느끼십니까? 너무 황폐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 주십시오.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하고 마침내 거부가 된 그의 인생이 항상 부요하고 희망에 차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사 아버지의 가난과 실패로 그는 중학교로 그의 정식 공부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식료품 가게 점원, 외항선원등으로 전전하며 트로이를 말할때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트로이에 미친 그는 50이 되도록 사랑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뼈속까지 스미는 외로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외에 7개국의 외국어에 정통할 만큼 외국어와 고고학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40이 다 되어 이제 막 잘되기 시작한 사업을 접고 본격적인 고고학 답사에 나서자 그는 또다시 미친 사람이란 사회적 낙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버티게 만든 것은 두가지 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는 한권의 책에서 탄생한 트로이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릴적 부모에게 배운 기도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꿈꾸며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그의 한 걸음 앞의 그 다음 다음 스텝을 인도하셨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신화를 현실로 바꾸는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는 찬양 받기에 합당한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도 이런 인생을 살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한권의 책-성경을 통해 하늘에 속한 축복의 부요함과 그 비전을 바라볼수 있다면 그리고 비전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앞에 기도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실로 노래할만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비전의 공동체 그 비전을 나누는 찬미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에베소서 1:1-14까지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정리해 보십시오.
2.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에베소서 1:12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4. 목장 교회가 찬미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