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고문 입력 2022.05.07 03:20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백서 발간 기념 국정과제위원회 초청 오찬에 앞서 조대엽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백서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은 현재의 정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안개 정국(政局)’이란 1980년대 유령(幽靈)이 스멀스멀 다시 피어나고 있다. 대선 전에도 이 정권이 선거에 패배하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긴 했다. 다들 그런 이야기를 지나친 강박증(强迫症)이라며 귓전으로 흘리며 물리쳤다. 이제와 보니 ‘그럴 리가…’ 하던 사람만 순진한 사람이 돼버렸다. 1987년 헌법 체제가 들어선 이후 최초로 퇴임 대통령과 그의 정당이 선거 결과에 사실상 불복(不服)하며 조직적 저항을 벌이고 있다. 되돌아보면 수상쩍은 발자국이 여럿 찍혔다. 대통령은 선거가 끝난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역대 가장 적은 표차(票差)로 당락이 결정됐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순진한 측은 이번에도 ‘그래서 통합과 포용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뒷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통합과 포용’이란 단어를 들먹이는 것은 면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게 복선(伏線)이었던 모양이다. ‘근소한 표차’라는 말은 선거 결과의 법적 효력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선거 결과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새겨보라고 주문할 때 끌어다 쓰는 표현이다. ‘표차’와 ‘법적 효력’을 연결시키면 세상의 모든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미국 대선 경우만 해도 1960년 케네디-닉슨의 표차는 11만표였고 2000년 부시-고어, 2016년 트럼프-힐러리 대결에선 오히려 패자인 고어와 힐러리가 직접 투표에서 각각 53만표·290만표를 앞섰다. 그래도 미국식 선거 제도에 승복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언론에 직접 브리핑하겠다.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다’ 했지만 언론을 가장 기피했던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150번 언론 앞에 섰던 데 비해 문 대통령은 10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대통령이 대선 이후 부쩍 얼굴을 자주 나타냈다. 마음에 드는 TV앵커를 불러 몇 시간씩 녹화(錄畫)를 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국민 평가와 역사의 평가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짐승도 마지막 울음은 선(善)하다고 한다. 중소기업 과장도 후임자에게 유익한 교훈을 남겨주고 싶어 한다. 기운을 북돋는 덕담 한마디라도 건네려고 한다. 자신의 업적을 낮춰야 훗날 평가가 올라가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대선 후 대통령의 언행(言行)은 이런 상식을 모조리 뒤집었다. 대통령은 후임자를 향해 ‘위험하다’ ‘걱정된다’ ' 마땅치 않다’ ‘잘 알지도 못하고 한다’는 표현을 예사로 날렸다. 역대 대통령 어느 누구도 이런 뒷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얼굴은 화장해도 뒤태는 꾸밀 수 없다. 이게 화장하지 않은 대통령 본래 얼굴인 듯하다. 대통령은 정권의 업적을 자랑하는 자료를 모으는 국정백서(白書) 편찬위원들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훗날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실제는 그 말대로 됐다(평가가 높아졌다)’고 했다.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평가도 그런 전례(前例)를 쫓을 것으로 기대한다면 접는 게 낫다. 노 대통령은 ‘우리 정권은 실패했다’고 했던 대통령이다. 자기 입으로 풍선을 불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자신과 부하들을 지키기 위한 바리케이드 설치 작업에 몰두했다. 대통령과 민주당은 위장 탈당·국회 본회의 시간 당기기·국무회의 미루기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사술(詐術)을 동원해 ‘문재인 법원’이 돼버린 대법원까지 ‘위헌 가능성이 크다’했던 검수완박법을 의결·선포했다. 감옥행(行)이 내다보이던 군부 출신 대통령들이 자존심 때문에 차마 손대지 못했던 일이다. 이 정권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대통령 집무실을 내줘도 여의도에서 저항은 계속된다. 정부군은 저항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劣勢)다. 시가전(市街戰) 양상으로 진행되는 인사청문회는 예고편(豫告篇)이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2024년 4월 총선까지 이런 상태가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은 선거는 끝나도 선거 운동은 끝나지 않는 나라가 돼버렸다. 여의도에 당선인 편이 늘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국민 가운데서 편을 늘려야 한다. 당선인의 인사(人事) 방식과 내용이 마뜩지 않아도 당선된 것만으로도 첫 공(功)은 세운 거라며 입을 닫고 있는 국민들 말이다. 겸손해져야 한다. 국민에게 더 겸손하게 비치는 쪽이 최종 승자(勝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