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hatthā-roha-puttat thera=""></hatthā-roha-puttat>
그 옛날, 내 마음은 욕망을 따르고
즐기는 대로 따라 떠돌았으나
지금 나는 그것을 제어했나니
갈구리로 미친 코끼리 제어하듯 하네
어제 올린 장로게경을 읽고 붓다께서는 그리고 아라한들은 이 몸의 고통은 어떻게 해소하셨는지
해소하셨다면 어떤 방법이셨는지 ...왜 그에 대한 글은 내 눈에는 안띄는지 궁금해하며
이런저런 짧은 지식을 엮어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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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욕망을 따르고 ,
욕망은 몸을 따르며,
몸은 질서를 따르고,
질서는 화학작용에 의존한다.
화학작용과 에너지는 서로를 견인하며,
그 둘은 열역학 법칙에 지배된다.
궁극적으로 열역학 법칙은 생명체의 탄생을 가능케 하나
열역학 2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해간다.
우주에서의 생명체 또한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감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이 생명의 필연적 방향성이다.
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방향성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고통은 생명 현상이 지속되는 한 내재된 조건이며,
마음으로써의 욕망을 제어한다 해도
몸은 여전히 무질서와 쇠퇴를 향해 나아간다.
무질서를 향해 가는 몸의 쇠퇴를 늦출수는 있을 지언정
늦추려는 과정 또한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한다.
에너지의 소모.... 고통이다.
그러므로, 한 번 태어난 이상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코끼리를 갈구리로 제어할 수는 있어도
코끼리의 본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욕망을 제어해도 삶 자체의 고통을 제어할 수는 없다.
수행과 단련으로 마음의 일어남을 제어할 수 있지만
그 근원적 성질의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고통은 몸을 받은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고통이 버겁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알지만 그럼에도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매일매일을 빠지지 않고 뛰쳐나가 조깅을 한다.
다가올 고통을 회피하려 뛴다. 뛰고 또 뛴다. 숨을 헐떡이며 뛴다.
숨을 헐떡이며....
결국 그 숨을 헐떡이며 뛰고 있음 또한 ...
고통이다!
첫댓글 눈꽃님~ 존경합니다!
저는 아침에 버스 놓칠까봐 5분 정도는 뛸 수 있는데 그 이상은 못 뛰어요.. 정말 성님이라 할만 합니다.. 성님! ㅎㅎ
그러고보니 화엄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은 눈꽃님이 제일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고통은 누가 느낄까요?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생성되고 소멸되지만 그때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뇌세포같은 신경세포도 직접고통은 느끼지 못합니다.
감각신경으로 신호가 전달된 느낌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건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작용을 뇌가 고통이라고 해석하는게 아닐까요..
매운 맛은 원래 고통을 느끼는 건데 맛있다고 먹기도 하고 커피도 처음엔 쓰다고 느끼지만 맛있다고 바뀌듯이 고통도 뇌가 만들어낸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즐거움보다 고통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통도 만들어진거죠. 즐거움만 추구하다가는 죽기 쉽지만 고통을 느끼면 위험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고통은 즐거움보다 우리에게 더 이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계유심님은 늘 교훈적이고 학구적이고 많이 배웁니다..^^
눈꽃댁은 아직 한참 젊은가 봅니다..
아마 꼬부랑 할미가 되보면 또 그럭저럭 꼬부랑 할미로 잘 살아갈 듯도 싶은데 아니 꼬부랑 안 살고 그댄 자살할까? 참 걱정시럽다..뭔진 모르겠으나 뭔가 단디 꽂힌 듯..
고성제는 고성제가 아니라 그 이름이 고성제가 아닐까? 고란 그런 것이다지 꼭 고냔 말이시..뭐.. 지 자유다..실컷 하루 24 시간 실컷 고를 끌어 않고 살만하면 그것도 괜찮지 싶다..누가 말리 헐~~
글구 뭐가 질서고 무질서냐?
봐 써? 혹 생은 질서고 죽음은 무질서여?
금시초문일세..
버스 탈 때는 줄서
레이디 퍼스터는 질서
큰댁 작은댁도 질서
우히히~
다시 읽어보니 가슴 한켠이 쨍 아리네
우몽 댓글을 다시 보니 무례에 분노가 치미네 ..늦었지만 무례를 가여히 여기오서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