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설중매와 숫눈길
정종배(시인, 교사)
만해萬海 한용韓龍雲(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이순신 사공 삼아 / 을지문덕 마부 삼아 / 파사검婆娑劍 높이 들고 / 남선북마南船北馬하여 볼까 / 아마도 님 찾는 길은 / 그뿐인가 하노라 –한용운의 시조, 「무제無題」
망우리공원 답사할 때 개인이나 어떤 단체도 종교 이념 계층 직업 남녀노소 시간 등을 떠나 꼭 함께 경배를 드리는 분은 만해 한용운이다. 만해 유택은 정 동향이며 동東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 중 인仁에 해당한다. 인은 사단四端 중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다른 사람을 가엾이 여겨 누구나 받아들이는 어진 마음씨이다. 그래서인지 만해 유택 안에서 명상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어 간다는 유명 지리학자도 있다. 새해 해돋이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다. 무궁화 꽃이 더욱 아름답고 가장 어울리는 유택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인물 중 전봉준 안중근 안창호 김구 등을 교과서에서 만난다. 사상가 시인 선사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위인으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분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아닌가 싶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은 쉽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더욱 더 어려웠다. 그로 인해 많은 지사들이 고초를 당했다. 만해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드러내놓고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지사이며 혁명가였다.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로 활동했다. 최남선의 「독립선언서」가 부족하다고 공약삼장을 추가하였다. 일제 재판관은 선언서 내용보다 공약삼장의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를 더 문제 삼았다.
선사이자 실천적 종교가로서 만해는 원효대사에서 겹치는 속俗과 성聖, 거사居士와 대사大師의 두 모습을 원융무애圓融無碍 한 인물 한용운 스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만해는 불교유신론에서 인구 1억 명은 되어야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할 수 있다며 승려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인으로서 만해는 문학사 불멸의 시집 『님의 침묵』 외 수백 편의 시(시조, 한시, 선시 포함)와 소설 산문 논설 시론을 발표하여 제국주의 정치에 길들어 가는 우리 민족을 깨우친 죽비였다.
사상가로서 만해를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고 평하며 "조선의 청년들은 만해를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벽초 홍명희는 종교인으로서 “칠천 승려를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은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만해는 특히 1920~30년대 농민 노동자에 많은 관심과 그들의 사회운동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만해는 제도와 인습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만해만큼 자유롭게 산 독립지사도 드물 것이다. 식민지 질서를 거부하고, 불교 관습에도 해탈했다. 실제 생활이나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게 살았다. 자유혼의 큰 산이었다. 변절자나 소인배들이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빛나는 별이었다.
시인 조지훈은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 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를 저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고 만해를 그리는 데 부족함이 없이 표현하였다.
만해는 호적이 없는 일생이다. 성북동에 북향으로 심우장을 짓고 재혼하여 딸을 얻었다. 소설을 쓰며 가정을 꾸렸고 단재의 비를 세웠으며 일송 김동삼 선생 5일장을 지냈다.
시인 구상은 시인의 인격적 존재로서 만해 한용운을 으뜸으로 쳤다. 가령 오늘의 어떤 시인이 만해 한용운보다도 찬란한 언어와 능란한 솜씨로 훨씬 애국적인 시를 만들어냈다 해도 그의 실제 행동이 비어 있을 때 과연 그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먹혀들어갈 것인가 하면 이는 천만의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시에서는 언령言靈이라고 해서 말이 생명을 지니기에는 그 말을 지탱하는 내면적 진실 즉 그 말이 지니는 등가량等價量의 윤리적인 의지와 그 체험을 필요로 한다. - 시인 구상의 수필〈예술인의 자세〉중에서
불교를 통한 변증법적 통섭에 이른 만해와 가톨릭을 통해 그런 경지를 향해 정진했던 구상은 그 지향과 업적은 다르나 구도적 자세,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인격체로 구현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필자가 대학 1학년 시 창작실기 첫 시간에 시인 구상을 만났다. 시인 구상의 첫 인사가 나는 장인이 아니고 사제다. 특히 문학가는 기어綺語의 죄를 범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며 예술인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비단 같은 말, 즉 번드레하게 꾸며낸 말이란 뜻인데 이렇듯 교묘하게 꾸며서 겉과 속이 다른, 즉 실재가 없는 말, 진실이 없는 말을 잘 해서 이 죄를 가장 많이 범하는 게 누군가 하면 하면 바로 종교가들이나 문학가들이다. 이런 기어의 죄로 한시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혀가 만 발이나 빠지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 말씀에 겁 없이 덤빈 문청의 어깨 힘과 거품이 싹 가셨다. 비록 또랑시인으로 지금까지 근근이 스승의 뒤를 따르며 이 가르침이 늘 옆에서 알람으로 벗어날 성 싶으면 곧은길을 가라 일러주고 있다.
시인 구상의 시선에 드는 예술가다운 품격을 지닌 인물에 대한 애정은 사뭇 깊다. 만해 한용운, 대향 이중섭, 공초 오상순, 김광균,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에 대한 추억담에는 외경심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 망우리공원에 만해와 대향 두 분이 계시니 큰 스승의 뒤를 조금이나마 좇고 있어 더욱 조심스럽다.
올해도 만해 한용운 유택 위 소나무 한 그루와 새해 해돋이를 맞았다. 내 자신과 약속했다. 특별히 망우리공원 이야기를 『작은책』에 연재하는데 술술 잘 풀어낼 수 있게 노력하며, 울림 있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새해 성묘를 겸해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싸묵싸묵 걸으며 묘비 앞면보다 뒷면 내용을 오래 읽어내며 내 삶을 성찰했다. 양평 이천 여주 포천 가평 철원 우시장과 서울 우시장(마장동)을 오가며 하룻밤 쉬어가는 소가 숲을 이뤘다는 우림시장 우림순대국 특 한 그릇을 점심시간 한참 지나 뜨겁게 비웠다. 그 동안 제자들로부터 카톡이 몇 번 울렸다. 서른 살 전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패기의 젊은이들이 망우리공원 답사가 벌써 10년 넘었다며 세월을 되새겼다. 특히 지난 1월 6일 결혼한 녀석은 2006년 고2 1학기 중 망우리공원 답사 세 번 하고 난 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현재 늦은 나이로 하버드대학 한 학기를 마쳤다.
만해 사상의 핵심인 자유 평등 민족 인권 진보 민중사상이야말로 어려운 시대일수록 생생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만해의 문학과 사상이 인류의 근원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휴머니즘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민족의 특수한 상황을 깊이 있게 인식한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망우리공원 님을 찾아간다. 언제나 변함없이 반겨준다. 누구와 동행해도 가리지 않는다. 사색의 길 생각만 해도 애잔하여 흥겨운 시간이다. 사색의 길을 오르내리며 참배하여 삶의 님을 만난다. 님 하면 만해 한용운 님이다. 님 때문에 사색의 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걷는다. 팔만대장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우리 말 시와 시집으로 옮겨놓았다. 초등학생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님이다. 석좌교수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님이다. 노교수가 젊은 혈기로 만해 산을 10여년 오르다 너무나 큰 산이라 포기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정상에 오르려 생애를 걸고 싶다고 토로한다. 만해의 설중매와 숫눈길 생애가 님이다. 님을 좇는 이가 또 다른 님을 낳고 헤아릴 수 없는 님을 빚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