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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2)
엡 1: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 설 교 >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엡 1:3-6 / 김상수 목사
제가 가끔 다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할 때면 성도님들이 어느 정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꼭 확인해 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 들이 있습니다.
“오늘밤 죽는다면 천당 갈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목사님! 이렇게 믿어서 제가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저도 이 문제 때문에 젊었을 때 고민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더러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그 이유는 우리민족은 오랜 전통 속에 불교적인 사상이 많이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공을 쌓아야지 극락 간다고 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 내가 잘 믿어야 천국가지 하는 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거저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절대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자기 혼자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불속에서 꺼내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업이 다 망했는데 혼자는 헤어 나올 수 없지만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을 가리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창가에서 몸이 매여 있는 우리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몸이 한번 매이면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몸값을 지불하고 건져주어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구원시켜준 사람을 볼 때에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으며, 마귀의 종노릇 하다가 세상의 죄악에 빠져서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그분이 벌을 받게 하시고,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구원의 길입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1941년 미국의 뉴저지 주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거기는 숲이 굉장히 우거진 곳인데 불이 나서 연방군인들이 투입되었습니다. 80명의 군인들이 불속에 갇혀서 이제 운명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공중에서 비행 중이던 비행기 조종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쪽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저기 피할 수 있는 통로가 있으니 비행기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오라고 쪽지를 써서 내려 보내 주었습니다. 그들은 쪽지에 써진 대로 해서 구원받은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불속에 갇힌 군사들에게는 조종사의 쪽지가 바로 구원의 메세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 길을 가리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사도행전4: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길 예수님을 믿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으며, 요한복음3: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복음의 메세지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왜 믿어야 됩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가 죽어야 할 죄 때문에 대신 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형벌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서4장 25절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 죄의 수렁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를 지고 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심을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며 예수님을 붙들기만 하면 우리가 건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셔서 아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만물이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했으며, 아들이 이 만물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이 아들의 친구가 우리 집에 오면 무조건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좋아서 무조건 내 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게 됩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하나님이 자기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들 안에 있기만 하면 다 사랑을 받고 용서 받으며 축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봅시다. 여러분이 지금 기차를 탔습니다. 평양 가는 기차를 탔는데 여러분이 아무리 착한 일을 했어도 목적지는 평양이어서 그곳에 가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탔다고 합시다. 그러면 가만있어도 미국에 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구 안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합니다. 거듭나는 역사와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으며, 깨닫게 되는 역사와 변화되는 역사, 또 신분이 바뀌게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교회 전도사님의 어머니는 복수무당으로 무당 위에 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른은 평생을 마귀가 이거해라 하면 하고, 가지 말라고 하면 못가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그렇게 마귀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서 부쳐와 같이 무섭게 생겼었습니다. 그 분의 딸이 30대 초반에 혼자되어서 어린 아이 세 명을 키우며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딸의 얼굴은 훤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딸이 보고 싶어서 딸집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 믿는 딸 집에 가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해서 물 한잔 마시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이런 생활을 거의 2-3년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도하고 딸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어머니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평생 귀신을 섬겼는데 이렇게 마음에 기쁨이 없고 답답한데 저 딸은 혼자 살면서도 저렇게 훤하며 자유롭고 기쁜데 나도 차라리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딸을 찾아오셔서 “야야 나도 너처럼 예수 믿으면 안되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딸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래서 가서 예배드리고 딸집에 오셔서 살게 되었는데 이 마귀가 일주일을 잠을 자지 못하게 했습니다. “너 나 안 섬기면 죽인다”고 하면 할머니 대답은 “죽어도 나는 너 안 섬긴다”고 했습니다.
일주일을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괴롭혀서 교회 성도들이 일주일 동안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할머니를 기절시켜놓고 이 마귀가 나갔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고 나서 맑은 정신이 되었고 마귀는 깨끗이 나갔습니다.
그 다음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셔서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시는데 눈물을 죽 흘리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그 부처와 같던 인상이 변하여 너무나 인자한 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영접하는 그 길만이 내가 구원받는 길입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것과 같이 플러그와 소켓이 연결이 되어야 전기가 통하지 플러그를 옆에 두었다고 해서 전기가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오셨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진짜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구주로 섬기며 그분을 붙드실 때에 내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줄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5:11-12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속에 있는 자는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이 그 속에 없는 자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은혜는 거저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저 우리를 이렇게 구원시켜 주셨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감사와 찬미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은 내가 착한 일을 해서 심판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심판을 받은 자이며,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구원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되는데 본문 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벌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면 그분 대신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잘못된 길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그 아들의 얼굴을 보시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꼭 기다릴 것은 용서 받기 전에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 교회 오는 날이 기다려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회개를 해도 별나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틀 밤낮을 울면서 회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회개의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군목이 간증을 하시는데 그분이 교육사령부에 있을 때에 사령관이 신앙생활을 잘 하실 분인데 안하고 있어서 예수 믿자고 전도를 했는데 어느 주일날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오늘 주일에 교회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주일 아침마다 맨 앞자리에 사령관이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군목이 세례문답을 합니다. “장군님! 왜 예수 믿으려고 하십니까?” 장군의 대답은 “목사님! 저는 죄인입니다. 죄가 너무 많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되겠는데 다른 방법이 없고 예수님만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 같아서 제가 예수님을 찾 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고 나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루는 “목사님! 이 교회 안에 필요한 비품을 제가 모두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령관을 보고 “장군님! 그렇게 헌물하시는 것도 좋지만 다음 주일부터 현관에서 사병들이 들어오면 안내를 좀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그 다음 주일부터 30분전에 교회에 오셔서 별이 달린 군복을 입고 교회 문 앞에서 안내를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고 나면 기쁨이 있고, 내가 죄인인줄 깨달았기 때문에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고 겸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절 “영접하는 자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으며, 본문 5절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형수가 갑자기 사면을 받고 아들까지 되었으니 이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 감격이 있습니까? 이 감격이 있는 분은 믿음이 성숙한 분이며, 이 감격이 없는 분은 아직 믿음이 어린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것을 받았는데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다니는 5살의 어린이에게 아파트 문서를 갖다 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을 접어서 딱지를 칩니다. 하지만 시집가는 딸에게 그것을 주면 너무나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신분의 변화가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으며, 불신자들이 나를 해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그들이 해를 받게 하십니다. 또한 하늘나라에 가면 영원한 상급과 유업이 되도록 유산을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면 이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이 축복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된다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낳아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낳아주셔서 호적에 올려주어야 영원히 그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속 썩여도 아들을 그 호적에서 지우는 법이 없습니다. 속 썩이는 아들 뿐입니다.
이왕이면 속 썩이는 아들이 되지 말고 여러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이것을 모르는 분들은 ‘예수 잘못 믿으면 내가 구원 받겠나?’ 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예수 믿고 영접함은 한번 구원받음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어야합니다. 이것을 믿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증거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한번 자녀가 되면 영원히 자녀인 것입니다.
임종만 목사님에게는 무장이라는 이름의 조카가 있는데 이 조카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께서 최씨 집으로 재가를 하셨습니다. 무장이가 군대 갈때쯤 되어서 영장이 나왔는데 임무장이 아니고 최무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깜짝놀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임씨인데 내가 왜 최씨가 되었나 해서 삼촌을 찾아왔습니다. “삼촌 제가 임씨인데 이렇게 최씨가 되었으니 내 성 좀 찾아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적을 새로 바꾸어서 임무장으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사람도 철이 들면 반드시 자기 아버지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호적에 올라가면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럼 여러분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개 여러분의 가정에서 생각지 않을 때에 세상을 먼저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니면 아내가, 아니면 자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가 천국갔을까?’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말씀을 붙들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분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일이 있어도 안 죽습니다. 또 죽을 병이 걸렸다가도 살려주시기도 합니다.
인천 중앙감리교회에 가면 성경을 많이 수집해서 전시를 해두었는데 그중에 구관희 집사라고 하는 분이 쓴 성경이 거기 있는데 그 성경을 쓰게된 배경이 있습니다.
구관희 집사님이 병원에 가서 위암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이 생각하기를 ‘어차피 죽을 목숨,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에게 무엇을 유업으로 남겨둘까?’ 생각하다가 성경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병이 나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가 340장 “구주 예수 의지함은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은혜가 있기 때문에 한 교회를 20년이 넘도록 섬길며 변함없는 모습으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지금까지 서 있게 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만세전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입니다. 본문 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세전에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택했기 때문에 어쩌다 온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전도를 받았을 때에 마음 문이 열렸고, 예수 안 믿고는 안되도록 하셔서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병이 걸려서, 또는 사업이 망해서 예수 믿게 하시고, 어떤 분은 자녀들을 먼저 불러 가시고 예수 믿게 만드시고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만세전에 예정하셔서 자식이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택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제가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는데 그 당시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6주 훈련을 마치고 배낭을 메고 전방과 후방으로 각각 배치가 되는데 전방으로 갈지 아니면 후방으로 갈지 그 순간이 참으로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사과에서 나와 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데리고 갔습니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중앙정보부에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권력층의 자녀들은 그렇게 갔습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몰랐습니다.
저는 바로 그 후에 병참학교에 와서 그 부대의 본부요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또 세 사람을 뽑았습니다. 거기서도 전방과 후방으로 가는데 저에게는 카드를 주지 않아서 제 옆에 있던 친구들이 “왜 이병은 카드를 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김상수 이병은 본부요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신났는지 모릅니다. 보세요. 선택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것가지고도 그렇게 좋았는데 우리는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보호받고 복 받으며 하늘나라에는 영원한 기업이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이 축복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 전부터 계약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너무너무 확실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너무너무 완전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고, 보답하고, 헌신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들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우리가 잘 하면 상이 많고 못하면 매 맞을 일이 있는 것이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이 구원의 약속 아래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나의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계획되었고, 창세전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고, 예수님이 나대신 죽었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면 나는 구원받고, 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인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엡 1:3-6 / 박기완 목사
오늘은 저희 산본성광교회에서 '총력전도♡초청잔치'를 열게 된 복된 날입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들도 계시고, 전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그동안 신앙생활을 쉬고 계셨던 분들도 계시고... 또 처음으로 오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의 자리가 되고,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 복된 자리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재미있는 우스갯소리 중에 '평등 시리즈’라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게 뭐냐하면 나이에 따라 평등하게 된다는 것인데... 먼저,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고 그럽니다.
옛날에 공부했던 것이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처음에 컴퓨터가 나왔을 때... 젊은 사람들은 금새 배우는데 40이 넘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힘이 들고 어렵게 배우는 걸 봅니다.
정보화 시대가 되고 인터넷 시대가 되니까... 전문직이 아닌 이상 컴퓨터를 알아도 잘 모릅니다. 똑같이 설명을 듣고 배워도 잘 습득이 안됩니다. 그래서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몽땅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그럽니다.
그리고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답니다. 정말 맞는 거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쁜 사람도 있고, 좀 덜 예쁜 사람도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50이 넘으니까 똑같아 집니다.
외국사람들이 보기에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들 감자같이 생겼다고 그럽니다. 아무리 봐도 다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50이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봐도 정말 똑같습니다. 괜히 비싼 돈주고 두들기고 맛사지 해봐야 별거 없습니다. 다 같습니다.
그 다음에 60이 되면 '성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주책이 없다 이겁니다.
그리고 70이 되면 '건강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 만큼 그 만큼... 늙어 가는 것입니다. 다 평등해요....
또 80이 되면 '재물의 평등'이 온다는 겁니다. 돈이 있으면 뭐해요, 어차피 먹지도 못하는 데 말이죠... 집이 좋으면 뭘하고 못하면 뭘해요...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90이 넘으면 '생사의 평등'입니다.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모 일간지에서 앙케트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다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90%의 부부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 밑에 이렇게 썼습니다. "골이 비었나?”어떤 사람은 "내가 돌았나?" 그렇게 썼답니다.
유머란에 보니까 똑같은 얘기가 있더라구요....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있는 사람과 다시 결혼하겠습니까?" 그랬더니 모두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안살거라고 대답을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주로.... 성격이 안맞아서, 보기가 싫어서, 취미가 달라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는데.... 그런데 유일하게...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들면서 자기는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그 할머니를 바라봅니다. 그 할머니에게 다시 묻습니다.
"할머니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가 좋아서... 뭐가 맘에 들어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이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바꾸어봐야 그 놈이 그 놈이야요!" 그러더랍니다.
사흘을 살다보면 다 같다는 것이죠. 다 똑같아요... 그래서 평등하다는 겁니다.
'평등 시리즈'를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냥 재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이 뭡니까?... 앞을 내다봐야 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내가 그대로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언젠가는 나도 40이 넘어 50이 되고, 50이 넘어 60, 70, 80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지금은 건강을 자랑하고, 지금은 얼굴을 자랑하고, 지금은 재산과 권력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모두가 다 평등하게 되고....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고, 그것이 있으나 없으나.... 뭐 그렇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자신의 미래를 아십니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유학을 다녀오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도 대단하고 정말 장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뛰어넘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 우리가 훗날에 가야 될 나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호세아 4: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랬습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그랬습니다(잠1:7). 근본을 잃어버린 지식은 그 종말이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하나님만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파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서 하나님을 알자!" 그랬습니다(호6:3).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요...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빌3:8).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요한복음 17:3절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4:7절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요일2:3∼4).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어집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다녀봐도 믿어지지 않고... 믿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데도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막힌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죠... 그렇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연구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사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모순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조물주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말을 하고 걸어다닙니다. 그러나 그 로봇이 자기를 만든 주인을 알 수 있습니까?... 한가지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로봇에게 데이터를 입력하고 정보를 넣은 만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나타내 주셔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마음을 열어 믿어지도록 하는 믿음을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요, '은혜'라 그럽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17절에 보면, 지혜와 계시의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제자들을 향하여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16:17).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믿어지고...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도... 어떤 이유로... 또 어떻게 해서... 누구를 통해서 오셨든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고,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복된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우연히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계십니다.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성서학자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은 본래 철학자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니 생각이 많고 무엇이든지 확실히 증명이 되어야만 믿는 사람이죠....
한번은 집 앞에서 엿장수가 지나가는데 엿판 위에 왠 두꺼운 책이 놓여있습니다. 학자니까 책에 관심이 많아 이리저리 살피다가... 엿장수에게 이 책을 팔라고 해서 그걸 사 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책이 성경책인데... 집에 와서 성경책 제일 첫 장을 읽는데 뭐라고 써 있는가 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런 말씀이 나와있거든요....
이 분은 이 말씀에 그냥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문제가 여기에 있구나!" 그러면서 성경책을 그냥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신 분이요,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게 된 문제 등등... 그가 평소에 의문을 갖았던 모든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서 해결 받고... 결국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분은 본래 철학을 공부한 학자요 교수입니다. 이성적으로 논리 정연하고 이해가 되어야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성경말씀을 읽고 그것이 믿어지고 이해가 되고 깨닫게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믿음을 주신 줄 믿습니다.
'성령'이 누구시냐 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14:17, 26).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도....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본래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된 것은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인간에게 사망이 찾아 왔습니다(롬6:23).
그래서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롬3:23), 그 죄의 값으로 죽음이 찾아왔으며(롬6:23), 죽음 이후에는 심판을 받아(히9:27)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해 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계21:8).
과연 누가 이 사망에서 구원해 낼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착하게 살면 천국엘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무 종교나 믿으면서... 선한 행위와 공로를 쌓으면 구원을 이루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그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그 놈이 그 놈입니다... 다 죄가 있고 완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롬3:10).
이사야 64:6절에도 보면, 다 부정하다고 그랬습니다. 더럽다는 것입니다. 의를 행한다고 하지만 그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월등히 낫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의... 인간의 노력... 인간의 선행은... 모두 부질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선행이나 노력으로... 또 어떤 공적을 쌓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들이 더 유리하겠지요...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은 더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8∼9절 말씀에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죄 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시므로.. 과연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우리의 구원의 주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예수 믿는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구원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4:4∼5절에도 보면,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을 안해도... 경건치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일을 안해도" 라는 말은 우리의 선행이나 어떤 행위, 공로를 쌓지 않아도... 그런 말입니다. 또 "경건치 않은 사람일지라도...." 란 말은 나쁜 사람, 못된 사람, 죄를 지은 사람, 경건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런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저는... 오늘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 1:3∼6절의 말씀에 담긴 비밀을 전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났기에 살았고 또 지금 살았기에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한 사람도 스스로 생각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우리는 부모님에 의해서 이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조차도.... 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셨습니다.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 나왔고, 딸을 원했는데 아들이 나왔습니다. 잘생긴 아이, 똑똑하고 총명한 아이를 기대했는데 못생기고 좀 바보스럽게 태어났습니다.
"왜 나를 낳으셨느냐?"고 원망한다면... 우리 부모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낳고 싶어서 낳았느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지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기이하신 섭리와 능력을 묵상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감탄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시편 139:13∼14절에서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그랬습니다.
'오묘한 육체'라는 책에서 폴 브랜드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놀래야 하는 사실은 나 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한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며 신비 중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고 감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모님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고 나 자신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습니다. 나를 낳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이가 없습니다.
오직 나를 창세 전부터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으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다니... 내가 사랑을 받기 위하여 태어났다니... 나를 사랑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들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이 공허하고 외롭다고 말합니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며, 사랑이 없어 애태웁니다. 사랑을 받기 원하나 사랑을 주는 이가 없고 환경이나 여건에 밀려 속고 속이는 연속입니다.
이 사람인가 싶었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저 사람인가 싶었는데 그도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에 속은 사람들.... "사랑한다!" 그래서 결혼했지만 지내고 보니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들...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얘기하지만... 정작 사랑이 없어 문제입니다.
개인 개인의 가슴마다 사랑이 메말라 갑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집을 들어가도 모두 그런 사람들이니 가정에도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통... 가정이나 사회나... 사랑이 없어서 나타나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사랑을 받으려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나를 아셨고...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랬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말은 모든 인간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들을 말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아들로 삼아 주셨다 그랬습니다. 왜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해 주시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3절에도 나와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복을 주시려고....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온통 거기에 '나'라는 존재를 넣어야 합니다. 모든 말씀이 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랑 덩어리예요, 사랑의 근본... 사랑의 본체...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그 자녀에 대해서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해주려고 낳습니다. 그 자식을 낳아놓고... 일 시키려고, 뭘 받으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를 낳을 때는 사랑하니까... 또 사랑을 주려고 낳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사 사장님께 사랑을 받아도 대단한 일이고, 대통령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어도 대단한 일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음을 열고... 영접하면 됩니다. "저도 믿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축복의 사실들이 바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지구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에게 특별히 선택받은... 사랑을 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입니다.
영국의 시인 카알라일(Carlyle)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환경을 만드는 건축가다" 그랬습니다.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느냐,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영광스러운 쪽으로 변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정말 선택받은 사람,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축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고...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요, 자자손손...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가정, 축복받는 가정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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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사랑해 주십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영원한 지옥에서 살아야 될 명망받은 인생들인데...
왠 은혜요, 왠 사랑입니까?...
어떠한 행함이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믿는 자 마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의 은총을 힘입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며... 사랑을 한몸에 받는 선택받은 사람으로 붙들어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 이 놀라운 은혜... 결코 놓치지 않게 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랑
엡 1:3-6 / 이중표 목사
혹시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났기에 살았고 또 지금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한번도 스스로 생각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또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서 이때, 이 나라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우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면 우리 부모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다윗은 자신을 지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능력을 묵상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폴 브랜드라는 사람은 "우리가 놀랠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탄생한 사실이다."라고 「오묘한 육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탄생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신비 중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감탄 부호 하나로 인간 탄생의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고 감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모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고 나 자신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습니다. 나를 낳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아무도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너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나를 창세전부터 이 때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창조하신 분의 뜻을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스스로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이가 없고 외로이 살고 있는데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단 말인가 내가 어려서는 조실부모 해서 부모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이집 저집 전전하면서 미움받고 살았고 또 결혼해서 남편이라고 만났는데 사랑의 '사'자도 모르고..." 지금까지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사랑받기 위해서 학교에 간 일이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직장에 간 일이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결혼했다고 말하지만 사랑받는 사람 별로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누구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우리 주님만이 그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
하나님은 창세 전에 나를 아셨고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려고 양자를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양자를 삼았느냐'라는 대답이 3절에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3절)
복 주시려고 양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녀 없는 부모들은 양자를 삼습니다. 양자를 삼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그 자식에게 주려고 양자 삼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그 재산을 누가 가져가겠습니까 친척에게 주기는 아깝고, 형제에게 주기도 그렇고, 조카에게 주기도 그렇고 그래서 양자를 삼는 것입니다. 전혀 이름도, 얼굴도 몰랐으나 그를 택해서 양자로 삼아 그에게 복을 줍니다. 또 사랑해주려고 양자 삼는 것입니다. 양자 삼아 일 시키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은 하늘의 복을 주고, 사랑하기 위해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라고 태어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전부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왜 부모님을 이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나를 사랑해서 낳아주라고, 왜 이 종을 세우셨습니까?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종을 수 없는 연단을 통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 이 종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믿으십시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자녀 삼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그 자녀에 대해서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해주려고 낳습니다. 그 자식을 낳아놓고 일 시키려고, 뭘 받으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낳을 때는 사랑하려고 낳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낳게 할 때 일 시키려고 낳게 했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겠습니까 만약에 나를 고생만 하라고 태어나게 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정적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믿음이라면 나를 사랑하려고 태어나게 했다고 믿어야 그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자기 생에 대하여 한없는 기쁨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좋으신 분으로 고백하겠습니까
미국 오페라계에 유명한 힐리니 헐버튼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 가수가 어느날 2층 창밖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자기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가 놀다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웃 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과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시장님과 골프치러 갔어" 하니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신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라고 하더랍니다. 이 얘기를 듣던 헐버튼이 창가에 서서 커튼을 잡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가 안다고 고백해 준 아들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사랑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받게 하기 위해 태어나게 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여기에 신비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신 계획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현재도, 미래도 우리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의 사랑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가 언제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속에 있을 때 신성한 자존심이 생기며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맛이 나고 긍지를 가지며 인생의 모든 장애를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될 때부터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한 나를 내가 싫어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번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날을 소중히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므로 나도 나를 받아주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은 내가 선하고 착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출생과, 신분과, 용모와, 성격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또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부자집의 아들로, 그리고 잘 생긴 인자한 부모에게서, 시골에 태어나지 않고 서울 한복판에서, 귀부인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보살핌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별세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 '그 모습 그대로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일 백번 또 태어나도 이대로 태어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많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도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얼굴이 똑같은 쌍둥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습니다. 약간은 다릅니다. 그런데 얼굴이 독특하게 생겨서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금방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하시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고, 부모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상처받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한탄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을 용서하며 현재 그대로 자기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대학에 유명한 레오 버스카라는 교수가 있는데 그 분은 이런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런데 이 강좌가 대 히트를 쳤습니다. 현대인의 모든 문제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좋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신을 싫어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생동안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면 자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도록 살아야 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까 나도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교육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성장해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은 후에도 여유가 있고, 정서가 건전하고 사랑하며 사는 성품이 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서상 결함이 있습니다. 또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수성가 하느라고 고생해서 돈 번 사람은 그 돈 남 못주지 못합니다. 그냥 가지고 있다 죽지 쓰지도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비판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받지 못한 사람과 결혼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과 부자집에서 자란 사람이 만나면 갈등이 평생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됩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예수 십자가의 사랑으로 넘치게 받으면 극복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것을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것으로 고백하며 살게 될 때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서 그 부모에게까지도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런 사랑 위에 자신을 건축하십시오.
사랑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됩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온유해야 됩니다. 성질이 거칠고 사나우면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온유한 사람이 사랑받습니다. 가정에서도 온유한 사람이 사랑받습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섬기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면 사랑을 못받습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이해심이 넓어야 됩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받는 자가 되지 말고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합니다.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받으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직장에서, 가정에서 자기현장 어디든지 사랑받는 존재로 만드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내 이웃을 서로 사랑하면서 사랑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
엡 1:3-6 / 지용수 목사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역대상을 읽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제가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역대상의 역사가 창세기, 민수기, 신명기의 역사하고 어찌 그리 똑같은지, 시대와 저자가 다른데도 그 족보와 그 사람들의 이름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누군가가 꾸며낸 책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저자가 다 다르고 그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가 다 다른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슬을 꿴 것처럼 통일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정말 신비로운 책, 놀라운 책입니다. 이 지구촌의 모든 책을 쌓아 놓아도 이 책 한 권을 당할 수가 없는 정말 값진 책, 사람을 살리는 책,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 우주를 통치하는 책입니다.
제가 역대상을 읽고 나서 에베소서를 읽었는데, 에베소서를 읽으면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끝 장인 6장까지 다 읽고 나서도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감격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강해 설교를 뒤로 미루고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준비하여 이 시간에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그 감격, 그 은혜를 여러분도 함께 받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시큰둥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망하는 자들은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제가 목욕을 하려고 하니 아내가 비누 하나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비누는 신비로워서 때를 밀지 않아도 된대요. 그냥 사용하기만 하면 때가 다 분해된대요.”
그런데 아무리 문질러도 비누에서 거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답답해서 비누를 얼굴에 직접 대고 막 문질렀습니다. 수십 번도 더 문질렀는데 거품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샤워 타월에 막 문질러도 거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신비한 비누인가?’
느낌이 이상했지만 그 비누로 머리도 감았습니다. 몸을 다 씻고 나와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정말 이상한 비누던데? 거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던데요.”
“비닐 껍질을 벗기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열여덟 장 읽고, 찬송을 열 장 올려 드린 다음, 샤워를 하려고 보니 그 비누에 정말 비닐 껍질이 붙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는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지 손톱이 아니고는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비닐 껍질을 벗겨내고 문지르니, 세상에! 거품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 아주 개운하게 씻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비누라도 포장이 되어 있으면, 껍질을 벗기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이 좋은 복음이 가리워져 있으면 아무리 들어도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망하는 자에게는 가리웠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계시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이 쏙쏙 들어온다면 그보다 더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서 복음이 가리운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쏙쏙 들어오는 축복, ‘맞아, 맞아!’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5월 5일에 양곡 가족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실내 체육관이 적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다 메워 주신 여러분이 참 고마웠습니다. 할 일도 많고 모처럼 가족끼리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교회 일에 협력해서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분들도 감사하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자리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기도해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저는 그 날 감격했습니다. 마치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조그맣던 우리 교회가 이제는 공설 운동장의 실내 체육관을 채울 정도의 교회가 된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때가 되면 서울 올림픽 스타디움도 채울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날 저는 몇 번이나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양곡 가족들에게 숨은 재주가 어찌 그리 많습니까? 선수들이 입장할 때의 그 행렬은 진짜 올림픽 선수들이 입장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특별히 장구 치고 북 치고, 풍악을 울리면서 입장한 교구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잘 하는지 정신 없이 보았더니 막 흥이 났습니다. 저도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었지만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꾹 참았습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다워야 합니다. 한 국회의원이 개혁한다며 정장인 아닌 캐주얼 복을 입고 선서를 했다가 욕을 얻어먹었는데,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이번 양곡 가족올림픽을 보면서 해마다 의미를 더 부여하여 더 좋은 잔치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 조금이라도 더 흥겨운 잔치가 되도록 경품을 걸었더니, 자동차가 누구에게로 가느냐가 최고의 관심사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추첨할 때 참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한 번으로 자동차 한 대가 누구에게로 가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니 말입니다. 제가 기도하고 한 장을 뽑았는데 그 번호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분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분이 자리만 지켰다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어떤 일로 자리를 비웠다가 그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고 돌아다녔던 도마는 그 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는 평안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믿을 수 없어.“하며 의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어.”
“나는 믿을 수 없어. 내 손가락으로 주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확인하고 내 손을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나는 믿을 수 없어.”
그 후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의 못 자국을 확인하고, 네 손으로 내 옆구리를 확인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그때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심 많은 도마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 되도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으니 도마보다 더 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언제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주일 낮에나 주일 밤에나 삼일에나 모든 시간에 자리를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가족올림픽 때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아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분이 계셔서 다시 추첨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타게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충성해 오신 집사님입니다. 그분이 택함을 받아 자동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그 집사님이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교회를 위해 한 일도 없고 부족하기만 한데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자동차는 집사님께서 교회에 충성한 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또 집사님 댁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자동차를 몰 때마다 ‘아,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찌 나를 택하셔서 이 자동차를 내게 주셨을까?’하며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 교회에 오실 때도 기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주시는 것은 자동차 한 대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이성으로는, 우리 인간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믿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창세 전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택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의심할까 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14절을 보면, 믿을 수밖에 없도록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면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아시고 택하셨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If you can?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믿는 자도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중요한 인물 몇 분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한국이 굉장한 위기에 있었는데 노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잘 하셔서 한국이 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노 대통령은 나라를 살리신 똑똑한 분이라고 격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은 한국을 너무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촛불 시위를 주관했는지, 누가 촛불 시위를 하도록 부추겼는지, 어떤 의도로 촛불 시위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고를 당한 여학생들만 생각하고 그냥 덩달아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부추겨서 그런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서운 이야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탈북자들의 코를 철사로 꿰고 팔도 역시 뚫어 철사로 엮어 가지고 끌고 가서 처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촛불 시위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권을 짓밟는 북한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서 실수로 사고를 일으킨 미군에게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미국인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성조기를 불태우기까지 하는 그 주동자들을 한국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정보망을 갖고 있는 미국은 우리가 모르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상황뿐 아니라 세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무서운 나라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정보망도 이렇게 대단합니다. 그러니 천군 천사를 거느리시고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동시에 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면 참새 한 마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러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매년 우리 한국의 미혼 여성들이 낳아서 버린 아기들과 결혼한 부인들이 낳아서 버린 아기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육만 명입니다.
짐승도 자기 새끼는 버리지 않는데,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독수리가 뜨면 닭은 재빨리 숨습니다. 하지만 병아리를 품고 있는 암탉은 절대로 피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웁니다. 누가 병아리를 해치려 하면 목숨을 걸고 대들면서 싸웁니다. 어느 수수밭에 불이 났는데, 거기에 암탉 한 마리가 타 죽어 있었답니다. 한 사람이 그 암탉을 발로 탁 치니 그 안에서 병아리들이 우르르 나오더랍니다. 미물인 닭도 불에 타 죽어가면까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데, 사람이 어찌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나라의 모든 여성들이 마음을 깨우쳐서 책임감을 갖고 책임 질 아이를 잉태하고, 잉태했으면 낳아서 책임지고 잘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수출하는 나라로 세계에 이름이 나는 나라가 되지 않아야 됩니다. 상품은 수출해야 되지만, 아이는 수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입양되어 가는 아이들이 일 년에 이만 명 정도가 된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아이들은 그 부모의 아들딸이 되어서 대학에도 다니고 잘 교육받아 훌륭하게 되는데, 나쁜 부모를 만나는 아이들은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유린당하고 고생하게 됩니다.
제가 대학원 공부를 할 때, 모 대학의 게스트 하우스에 자주 묵었습니다. 그 곳에는 주로 학교 손님들과 외국인들, 그리고 교수님들이 계셨는데, 하루는 죽으라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큰 소리로 우는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울음소리가 나는 옆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더니 외국인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아이가 왜 이렇게 웁니까?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습니까?”
그분들은 독일인 부부로서 고등학교 교사들인데, 아이가 없어 우리나라 고아원의 한 아이를 입양했답니다. 다음 날 독일로 데리고 갈 예정인데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울기만 한다며, 왜 우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면서 아주 당황해 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한국말을 듣고는 아이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왜 우니?”
“쉬하고 싶어. 쉬하고 싶어.”
세상에! 그래서 제가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더니 아이가 쉬하고 나오면서 “휴우!”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제가 그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당신들 옆방에 묵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밤에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함께 자고 내일 아침에 데려다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니 그분들이 “Thank you. Thank you."를 연발했습니다. 아이 때문에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제가 아이를 데리고 제 방으로 갔습니다. 말이 통해서 그런지 아이가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서로 말이 통하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이에게 배가 고프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배가 고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게로 데리고 가서 그때는 아주 비싸서 제 딸에게도 사주지 않던 바나나와 우유와 빵을 사서 먹였습니다. 그 아이는 아빠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엄마는 있는데 자기를 찾으러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다며 엄마 이야기가 나오니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엄마 이름도 몰랐습니다. 얼굴도 다르고 말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그 아이를 위해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여기에 있는 것보다 거기에 가면 더 좋아. 그분들은 착하고 훌륭한 분들이라서 너를 잘 길러 주실 거야. 그리고 지금은 네가 독일 말을 못하지만 그곳에 가면 금방 배우게 되고,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너 예수님을 믿니?”
그 아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너와 함께 가셔서 너를 도와 주신단다. 네 일생 예수님께서 도와 주실 거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도해라. 그러면 잘 될 거야. 너는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받아서, 선택을 받아서 가는 거야.”
기도해 주고 나서 잠을 재웠더니 아이가 아주 잘 잤습니다. 자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아이를 버릴 수 있나?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다음 날 조반을 마치고 아이를 데려다 주었더니, 그 아빠 엄마가 매우 고마워했습니다. 독일로 출발할 때 그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서 제게 손을 막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내 놓고 ‘하나님 아버지, 저 아이를 붙잡아 주세요. 저 아이가 잘 자라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좋은 부모를 만났으니 복 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고아나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강물이 흘러가듯 인생의 물결 따라 흘러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학교에 가면 나도 학교에 가고, 다른 사람들이 결혼하면 나도 결혼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니 나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집을 사니 나도 집을 사고, 다른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니 나도 낳고 기르다 보면 어느 날 죽음의 폭포에 이르러 그곳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걷잡을 수 없는 폭포에 이르러 떨어져 죽듯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폭포에서 ‘아!’하며 떨어져 망하게 됩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끝나면 좋은데, 또 흘러 지옥으로 들어가 멸망당하는 고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것은 그 날의 사건이 아니라 창세 전의 사건입니다. 할렐루야!
미국 한 도시의 목사님이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 가게에 가면 방황하는 영혼이 있을 것이니 어서 가서 전도해라.’하는 감동이 자꾸만 왔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사건이 있습니다. 선지자 아나니아가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고 있을 것이니 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라.’하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직가로 가서 성령께서 명하신 집에 가 보니 정말 사울이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서 만났던 주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다시 보게 하신다.”라고 하는 순간에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미국의 목사님도 성령께서 자꾸만 감동을 주시는 것 같아 그 가게에 가 보았더니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을 붙잡고 복음을 전하니 처음에는 거절하던 청년이 나중에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귀가한 청년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제 저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니,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얘야, 네 영혼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삼일 전부터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오늘부터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러나 그 청년이 구원받은 것은 삼일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창세 전의 사건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품에서부터 예수님을 믿고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사건이 아닙니다. 창세 전의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어 여러분을 섬기는 것도 창세 전의 하나님 사건입니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진리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고, 성경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이 십 년 전에 예수님을 믿어 집사님이 되셨습니까? 십 년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창세 전의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삼 대째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삼 대째 사건이 아닙니다. 창세 전의 사건입니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지….’
이것을 생각하고 살면 이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되고 하나님께서 점찍으신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이까짓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내 맘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속에
주가 항상 계서 아 기쁘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려워도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능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만 입이 있어도, 우리의 입이 만 개라 해도, 우리의 입이 십만 개라 해도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감사하지 못하고 다 찬송하지 못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다 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한 제비족 청년이 한 여자를 점찍어 놓았다가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유혹을 했습니다. 자기를 대학생이라고 소개하고 ‘누님, 누님’하며 따라다녔습니다. 남편은 아주 퉁명스러운데, 청년은 사근사근하고 “누님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은 처음 봅니다.”하며 자꾸 치켜세워 주니 그 여자가 그만 유혹에 넘어가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출장을 간 날, 그 청년을 집에 끌어들였습니다. 남편이 출장을 가다가 서류 봉투를 집에 놓아둔 것을 알고 가지러 왔더니 세상에! 집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던 여자가 나중에는 이혼하자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사람은 실수할 수 있으니 용서해 주겠다며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청년을 좋아한다고, 이제 남편과는 지겨워서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제비족 청년은 자기 친구에게 “아이고, 그동안 학생 노릇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오피스 하나 받았고 몇 천만 원 받았으니 이제 끝내야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대학생 청년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남의 부인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지 말고 ‘나를 망하게 하는 마귀가 아닌가?’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악한 인간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점찍어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할렐루야!
마귀가 점찍은 가룟 유다는 창자가 터져 죽었습니다. 마귀가 점찍으면 그 사람은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26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땅의 복도 귀합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빵과 꿀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꿀을 먹을 때마다 윙윙 날아다니는 그 작은 벌이 어떻게 꿀을 만드는지, 생각할수록 신비로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오곡백과를 먹고 마시는 것, 물고기를 즐기는 것,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즐기고 달걀을 즐기는 것, 하모니카를 불 듯이 먹는 수박 등 우리가 누리는 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북한의 아이들은 라면 맛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도 배가 고파 웁니다. 엄마들이 못 먹어 젖이 나오지 않으니 아기도 울고 엄마도 웁니다. 우유가 있습니까? 두유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세계에서도 우리만큼 잘 먹고 마시는 나라가 몇 나라 없습니다. 이만큼 먹고사는 것에 감사해야지,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면 나라가 망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회사원들이 열심히 일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나라가 평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나라도 채워주지 못합니다. 국민들이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니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치를 하겠다던 대통령이 얼마나 힘들어하십니까?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 드리고, 이만큼 사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셀리나스에서 천 이백만 불짜리 집을 보았습니다. 천 이백만 불이면 백 오십억 원입니다. ‘와! 이런 집도 다 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땅에 있는 집도 이렇게 좋은데, 땅의 복도 이렇게 큰데, 하늘의 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시골 사촌오빠의 집에서 살던 에스더가 궁궐에 가서 으리으리한 집들과 으리으리한 가구들, 으리으리한 사람들, 으리으리한 음식들, 으리으리한 옷들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보다 더 놀라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그 놀라운 천국이 우리 집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아도 손님은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하인은 피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손님도 아니고 하인도 아닙니다.
멕시코의 청년 몇 십 명이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자동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다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수십 명 중 일곱 명이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질식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밀입국하고 있습니다. 밀입국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도 먹고살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 그 귀한 곳에 가서 손님이 아니라 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로 그 좋은 것을 먹고 누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사람이 죽으면 우리가 슬퍼하지만, 죽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이 세상입니까?
오래 전, 우리 장로님들과 함께 러시아 우리 교회들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옐친 대통령 때였는데, 그 당시 러시아 경제가 아주 어려워 러시아 비행기에는 먹을 것도 없고 손 닦을 화장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들에게 비행기 안에서든지 어디에서든지 굶을 각오를 단단히 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포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송으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니, 무슨 잘못이 있나? 내 가방에서 폭발물이 나왔나?’
제 이름을 부르는 곳으로 갔더니, 저희가 가지고 있는 값이 제일 싼 이코노믹 비행기 표를 일등석 비행기 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세상에!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하지만, 있을 때도 있습니다. 비행기의 일등석과 이등석, 그리고 삼등석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일등석은 침대보다 더 좋은 의자에 잠옷도 나오고 고급 음식도 나오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등석은 너무 비싸서 아무나 탈 수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돈을 주고 일등석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팀이 일등석을 예약해 놓고 오지 않았는지, 우리 일행 모두의 표를 일등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귀하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나 봅니다. 러시아 비행기를 타면 굶을 줄 알았는데 텅 비어 있는 일등석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러시아의 고급 음식이 나왔습니다. 저는 러시아 음식이 그렇게 좋은 줄을 몰랐습니다. 이름도 기가 막힌 음식들이 계속 나와서 배를 두드려 가며 먹었습니다. 제가 장로님들을 쳐다보니 장로님들 얼굴이 그저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정말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대접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내린 후로 그런 대접은 다시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는 하늘의 축복은 몇 시간이 아닙니다. 며칠이 아닙니다. 영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늘의 신령한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면 정말 깜짝 놀랄 것입니다.
뱃속의 아기는 이 세상에 나오기 싫어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낳으려고 힘을 쓰는데 아기는 이 세상에 나오면 죽을 줄 알고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와서 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품에 안고 귀여워해 주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는 것이 무서워서 조금 더 오래 살려고 애쓰지만, 죽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할렐루야!
오늘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본문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높이 승진하느냐,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거룩한가? 얼마나 흠이 없는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사람이잖아요.”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be holy, because I am holy.)』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데살로니가 4장 3절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천사도 아니고 동물도 아닙니다. 파스칼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는데, 갈대도 아닙니다.
사람은 천사의 성품과 동물의 성질을 함께 지녔습니다. 위대함과 비열함이, 영광스러움과 비참함이 함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에게 존경받는 거룩한 사람이라도 그 위대함의 그늘에는 이기심, 음탕함, 비열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부끄러운 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처럼 막 사는 사람에게도 고결함과 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인격을 팔고 웃음을 팔며 부끄럽게 사는 여인들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를 돕습니다.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어머니의 암을 수술시켜 드리고 오빠의 대학 등록금을 대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직 폭력배들이 사람을 막 죽이는 것 같아도 그들에게도 의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을 돌로 치려 했지만, 돌로 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도 간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들켰고 자기는 들키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남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남을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나에게도 죄성(sinful mind, sinful desire)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죄성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은 위대함은 자꾸 키워 나가고 죄성은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속에 죄가 있구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Christ died for our sins)』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데 또 죄를 지으려 하니 괴로워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I die every day).”하며 자기 죄를 죽이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의 과거의 죄는 끝나 의인이 되었고 이제는 새 피조물이 되었는데, 이것은 나를 위해 살라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라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옛날 것은 지나갔으니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옛날의 욕심이 있으니 그것을 날마다 죽이고 새 사람의 성품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품어주시고 귀하게 써주십니다.
제가 이번에 모세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모세의 삶이 얼마나 거룩한지…. 모세의 모습을 보며 저를 보니 저는 너무 너무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종이고 나도 하나님의 종인데, 나는 왜 거룩하지 못할까? 모세는 저렇게 거룩한데 나는 왜 모세만큼 거룩하지 못할까?’
요셉도 참으로 거룩했습니다. 요셉 영화도 보았는데, 그 영화를 보면,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에게 “요셉, 요셉.”하며 자꾸 추파를 던지고 요셉의 몸에 자기 팔을 얹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뛰어나갑니다. 그렇게 잘 생긴 미인이 유혹해도 자기 거룩을 끝까지 지킵니다. 그러자 부인이 보디발 장군에게 “요셉은 나쁜 놈입니다. 나를 겁탈하려 했으니 죽여버리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디발 장군은 요셉을 죽이지 않습니다. 요셉을 믿었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집어넣은 다음에는 요셉을 옥사장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요셉을 도와 줍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니 보디발 장군이 기뻐합니다. 또 요셉은 자기가 총리가 되었을 때 보디발 장군을 보호해 줍니다.
요셉이 거룩하니 남의 집에서도 빛이 나고 감옥에 가도 빛이 난 것입니다.
거룩하면 하나님께서 큰 인물로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니 복을 크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쓰시고 큰 복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우리 땅에 미사일이 오지 못합니다. 원자탄이 터지지 못합니다.
우리 양곡교회만 의로워도 우리 땅이 복을 받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아, 교인은 역시 다르구나.’하며 감동을 받아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길로 가는 것은 쉽니다. 내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만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제 마음에도, 여러분 마음에도 있는 육신의 소욕은 우리를 나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특별히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딸로 삼으시려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택함 받은 우리는 내일 모레 그 신령한 복을 다 누리게 되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가 거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이 엄청납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오늘의 요셉, 오늘의 모세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거룩한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신령한 복을 아는 기쁨
엡 1:3-5 /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여러분 기뿌시죠? 예배당에 오셔서 기쁘실 겁니다. 옆에 사람 한번 쳐다보면서 인사합시다.
"기쁘시죠?"
속상한 사람도 몇 분 있는 것 같습니다. 깨달으면 은혜가 있고 깨달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은퇴하신 고수님이 재산을 거의 다를 학교에 기증을 했어요. 그래서 가진것도 별로 없고 그러신데도 그렇게 기뻐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여쭤 봤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습니까? 노후에 많이 힘드실텐데 말이에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내가 그전에 망원동에 살았는데 그 망원동에 홍수가 나가지고 갑자기 밤에 비가 드리 닥쳤는데 잠자다 말고 뛰쳐 나왔는데 겨우 목숨만 건졌다"
고 하시더라구요. 부부가 목숨만 건지고 '아 이제 살았구나'하고 뒤를 돌아 보니까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물에 젖여 못쓰게 되니까 속상해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랍니다. 안그렇겠어요? 힘들고 어렵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어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느냐?'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는 은혜를 주시는데 이런 말씀이더래요.
'너 주님 오시는 날 준비 잘하라고'
'주님이 오시는 날은 도적같이 온다고 그랬고 그날과 아무도 모른다고 그랬는데 정말 그날에 내가 주님앞에 "너 뭐하다 왔냐?"라고 물으시면 내가 할 얘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갔다와서 교수는 잘했는데 그게 하나님에 일을 하는 전부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보다도 더 한 것을 원하시는 것 같더구요. 그래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그날을 잘 준비하겠습니다. ' 고백을 하고 그때부터 그순간 결심을 했대요. 하루하루를 잘 살기로요. 하루하루 감사해야지. 그러다 보니까 은퇴하시게 됐고 은퇴하는 날 기쁜 마음으로 자기 재산을 학교에다 기증을 했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어요.
"교수님! 비싸게 배우셨네요. 비싸게 배우셨어요. "
지금은 가진것 없이 가난해도 기쁨이 크세요. 너무나 즐겁고 건강하게 잘 사시는 모습이 오히려 부러울 정도에요. '나도 그래야지' 그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기쁨도 크거든요? 그런데 깨닫지 못하면 기쁨이 없어요. 교회에 다니는 것도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일을 해도 짐 처럼만 느껴진단 말이에요.
어떤 분이 찾아오셔서
"목사님 저는 예배를 참석해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도 나지 않고 구원의 확신도 없는것 같아요. ."
그래서 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 그렇군요. 그러면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한가지만 기도하세요. 한가지만 집중에서 기도하세요. "
그러면서 그 기도제목이 뭐냐하면
"-하나님 저 자신을 좀 보여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고 자기 자신을 보면 다시 오세요"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집에 가서 목사님의 가르침대로 한 가지만 집중해서 기도를 했는데 나를 보여주세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하는지 진솔하게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신이 위선적인지 남들이 보는 나와 , 실제의 내 모습이 차이가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추하고 불결한 모습이 깨달아 지기 시작하고 자기의 죄악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죄악의 짐을 잔뜩지고 절망의 모습으로 목사님을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죄 많은 사람인지를 몰랐습니다. 죽고싶습니다." 목사님이 그랬데요
"죽을 필요까진 없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십자가를 보여달라-고 기도해보세요. "
이분이 집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기도제목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 할 때에 자기의 죄를 보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도덕적인 결단이나 노력가지고는 안된다 죽으려고 했는데 십자가를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보혈에 피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은혜가 되는거에요. 깨달으니까 신앙생활이 즐겁고 신앙생활이 즐겁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깨닫는 복으로 구원의 기쁨이 풍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 그 의미를 깨닫고 기뻐하는 기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3절로 14절까지 보는 동안에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시작을 하더니 "그의 은혜에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니라 그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그냥 한마디 해놓고 찬송! 그냥 한마디 해놓고 찬송! 제가 이 성경을 보면서 이 에베소서를 기록한 사도바울이 얼마나 기뻤으면 막 가슴에 끓어오르는 이 기쁨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어가지고 이 말씀을 쓰셨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나님이 그 기쁨을 저한테 줬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라고 3절에 말씀하셨어요.
"찬송하리로다~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신령한 복의 의미를 깨닫고 기뻐하는 거에요. 그기쁨은 세가지 인데요.
첫째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기쁨, 둘째는 하나가되는 기쁨, 셋째는 상속받는 기쁨입니다.
첫째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신령한 복은 첫 번째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기쁨입니다. 따라하실까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기쁨이다." 그 신령한 복의 첫 번째에요.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죄를 짓게 하는 마귀를 이기는 기쁨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마귀를 이기는 기쁨이에요. 마귀를 이기는 것.... `마귀를 이기는 기쁨이 있어요.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어리가 되게 하라"
그랬어요. 성령이 예수님을 이끌려 가지고 광야로 가셨는데 그 광야에서 무엇을 했냐?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를 이겼단 말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의 시작은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마귀를 이기는데서 시작이 되는 거에요. 우리 신앙인의 시작도 마귀를 이기는데서 시작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마귀를 물리치셨어요.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경배함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7절에 보면은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순간 마귀를 대적하는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물리치신 것 처럼 우리도 물리치는 권세를 얻었어요. 어떻게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임금의 권세가 있으면 아들도 임금의 권세가 있는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한번 보실래요? 4절부터 6절까지 있는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보세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게 하신거에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할 수 있어요? 거룩하고 흠이 있는 것은 마귀를 물리치면 되요. 마귀를 물리치면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는 마귀를 물리치는 영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당에 오실 때에 혹시 가지 못 할 사정이 생기지 않았어요? 가끔 그럴때가 있잖아요. 그때는 마귀가 역사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때 일수록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예배당에 오시면 기쁨이 있습니다. 안오시면 어때요? 찝-찝하죠? 왜 그런지 알아요? 마귀가 음침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마귀에게 지는 사람이 기쁠 수가 없어요. 마귀를 이기는 사람만 기쁜겁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할 때에 이거 마귀의 역사가 아닌가? 분별을 하셔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복하셔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야 물러나라"하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럼 피하는 거에요. 힘이 있게 예배당에 오는 거죠. 하나님께 충성하는 거죠. 할렐루야!!!
막 속상한일이 있어도 대부분이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그래요. 문제가 많은 곳은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할렐루야!! 마귀를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래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되게 하시는 기쁨입니다.
따라하실까요? "하나되는 기쁨"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싸우잖아요. 부부간이든, 부모와 자식 간이든, 어떨 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끼리도 다툼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합니까? 제가 재미난 얘기를 하나 해드릴께요. 웃을 준비를 하시라는 거에요. 제가 재미난 얘기를 해도 잘 안 웃으시더라구요.
미국의 한 대학 식당의 주방장이 한국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 주방장이 학생들에게 멸시를 당했답니다. 이유는 단하나 요리는 잘하는데 백인이 아닌 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멸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인종차별의 문제에 대해서 학생들 사이에 그러면 안된다. 인종차별은 죄다. 그래서 학생들의
토론 끝에 반성을 하고 학생들이 학교 식당으로 주방장을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과를 했답니다. 학생회장을 비롯해서 수십명의 학생들이
"주방장님! 그동안 당신을 유색인종이라고 이유도 없이 모욕을 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랬더니 사과의 말을 들은 주방장은 겸손하게 모자를 벗으면서 답을 했다고합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 그럼 저도 더 이상 스프에 머리비듬을 털지 않겠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렇습니다. 학생들의 차별에 주방장도 복수를 한단 말이에요. 심는대로 거두죠!
요즘 우리들은 차별하는 일에 너무나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하나 될 수 있는 방법!! 우리는 본래부터 모습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천차만별 다 다르잖아요. 형제끼리도 다르고 부부도 다르고 쌍둥이도 같이 않다니까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둘로 나뉘어 진거에요. 한쪽은 싸우자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는 타협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싸우자는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자는 거죠. 타협하자는 사람은 로마가 얼마나 큰 나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대항해서 싸우냐 그냥 여기서 로마사람 되면서 잘 살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말하자면 한쪽은 애국자이고 한쪽은 매국노 아니겠어요? 사실 이 두 사이는 같은 동족이고 같은 피를 가졌는데도 어때요? 원수지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이런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칼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로마의 앞 자비 노릇을 세리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돼서 하나가 됐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됐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루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
고 하셨어요. 무슨 말이에요? 용서를 하는 겁니다. 나뉘어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비결은 단 하나가 있어요. 그건 바로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하는 거에요. 용서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만났어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어요? 겸손했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안에서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용서하는 거에요. 어떻게 이 세상의 일들이 내 맘대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과거를 묻지 말란 말이에요. 성경을 한번 보실까요?7절에
보면 죄사함에 관한 얘기가 나오구요. 10절을 보면 통일 된다는 말이 나와요.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그러니까 통일되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죄사함을 풍성하게 받은거에요. 죄사함이 뭡니까?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하나되는 방법은 지식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무력으로 되는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하는 것은 그래서 과거를 묻지 않는 겁니다. 그냥 있는 그래도 받아 드리는 겁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시 한편을 찾았는데요. 인터넷에서 찾은 시는 저자가 누군지 잘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자를 누구인지 모르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못 생기고 모양 없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를 지으신 분이 그렇게 만드신 것일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화 잘 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신경이 예민하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늘상 늦는다고 수군거리지 마세요.
일이 많아 바쁘고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설사 한가했더라도 나무라지 마세요
시계를 보지 않다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많다고 욕하지 마세요
매번 다른 사람 생각을 미쳐 못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배울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못 배웠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인색하고 없다고 미워하지 마세요.
경제에 시달릴 때를 염려하여 절제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노래를 못하고 음성이 나쁘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게으르고 더럽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신경상태가 늘어져서 감각이 예민하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눈치 없고 염치없다고 시비하지 마세요.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우리 이해하기로 해요.
내가 나를 싸매고 가리고 변호하듯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기로 해요
그러면 기쁨이 생겨요
마음에 늘 평안이 있어요
세상사는 것이 재미있어져요
오나가나 즐겁고 감사하기만 해요
왜! 왜! 왜냐고 따지지 마세요
불행해 져요
미움이 생겨요
친구가 없어요
세상이 캄캄하고 싫어지게 되요.
세상만사는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세상만사는 모두 그럴 수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는 습관은 행복을 만드는 신호랍니다.
용서는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는 겁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가 병듭니다. 신경성 질환자들 가운데 70-80%의 공통점가운데 남을 비판하길 좋아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용서하는 사람은 한 7년정도는 더 산다고 하더라구요. 평안하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눈에 보기 나쁜것도 하나님이 보기에 좋게 만드십니다.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것도 하나님은 나쁜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다 하는 것 아닙니다. 다 하는 척 하지 말라는 거에요. 로마서 8장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세 번째는 상속받는 기쁨입니다.
따라 합시다. "상속받는 기쁨" 오늘 성경에는 "기업"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 이게 상속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부의 축적" 된 거라고 나와 있습니다. 많은 것이 지금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상속받는 기쁨을 위해서 성령이 보증했다고 나왔어요. 한번 성경을 보겠어요. 11절부터 14절까지 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을 갔는데 성령 받으니까, 성령의 인증을 받으니까 권능 받아서 증인이 되구요, 일을 하고 주를 위해 충성을 하고 사명감당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왜?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왜 인치시는 지 아세요? 일꾼되라는 거에요. 일꾼이 돼서 하나님의 준비된 상속받을 그것을 받으라는 거에요. 하늘나라가서 받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땅에 여러분 살면서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기쁨이 있어요. 오늘 안줘도 내일 기다라고 내일 안주시면, 당대에 안주시면 다음대라도 주시거든요? 기쁨이 있는거에요.
어느 부잣집 아들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부자니까 이 아들이 일을 안하는 겁니다. 빈둥빈둥 노는 겁니다. 아버지는 걱정이죠. 하루는 이 아버지가 병들어서 죽게 됐어요. 그래서 유언을 이렇게 얘기했어요.
"네가 금 한입을 가져오면 이 재산을 다 네게 상속하겠다. 안 가져오면 안 주겠다." 고 그랬데요.
그랬더니 엄마가
"내 아들아 내가 금 한입줄께!!"
그래가지고 금 한입을 엄마한테 받아가지고 아버지한테 가져갔어요.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이 있다가 펄펄 끓는 난로 속에 휙하고 집어 던져 넣었어요. 다 녹아버렸죠. 또 다음에 금 한입을 엄마한테 받아가지고 아버지한테 또 가져갔어요. 이번에도 또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이 있다가 난로 속에 휙하고 던져넣었어요. 또 아들하고 엄마하고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아니구나 싶어가지고 생각을 한 후에 아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난후에 금 한입을 아버지에게 가져갔어요.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이 있다가 펄펄 끓는 난로 속에 휙 집어 던져 넣었어요. 그런데요. 아들의 태도가 달라졌어요. 지난번에는 엄마한테 받은거니까 금이 녹아도 미안한 마음 이 하나도 안생기는데 아이고 이거는요 내가 땀 흘러 희생해서 벌은 돈인데 들어갔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어떻게 거기다 던져요?"
하더니 뜨거운 난로 속에 손을 넣어가지고서는 금이 녹기 전에 꺼냈어요. 이 모습을 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하는 말이
"이제는 네가 내 재산을 상속받을 준비가 됐다"
그리고선 상속을 해졌다는 거에요.
제가 뭘 얘기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 하나님의 백성이 됐으니 하나님의 복은 저절로 내게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주를 위해서 땀을 흘리시길 바랍니다.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그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복을 받는 겁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복을 받는 다는 것 없어요. 있는 것 까지도 빼앗아 갑니다. 상속받은 기쁨이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왜? 성령이 임하시니까. 성령에 충성하게 하시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제가는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때가 되면 주시는 겁니다.
어느 집사님이 위암에 걸렸습니다. 다 죽게 됐습니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죽는다고 생각을 하니까 얼마나 답답해요. 근데 더 답답한 것은 내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면 나한테 뭐라고 하실까?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 아픈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뭐가 있을 까 해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성경을 쓰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성경은 읽는 것보다 성경을 쓰는게 은혜가 되요. 천천히 쓰니까 많은걸 생각하게 되고 말씀이 막 새로워 지면서 더 은혜스러워요. 여러분도 쓰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컴퓨터에서도 많이 쓰잖아요. 친구들끼리 모임에도 여전도회나 남선교회에서 하루에 30분씩만이라도 쓰는거에요. 그래서 한사람이 올려놓고 또 다른사람이 올려놓고 그러면은 성경안에 서로 만나는 거거든요? 이야기 거리가 되잖아요. 남선교회, 여전교회 좋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어요. 어쨌든지 성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통증이 와요. 그래도 성경을 쓰는 거에요. 이것을 옆에서 보는 자녀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여러분 그 자녀들의 마음에 안타까움도 있고 뿌듯함도 있을 꺼에요. 몸이 아픈 분들은 신경이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요.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여기 가보자 저기 가보자. 왜? 생명에 대한 애착이 생기니까요. 어떨때 보면 목사님이나 조용히 다니시는 성도분들이나 아픔과 고통에는 참 많이 들 힘들게 하는게 있더라구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분이 아픔속에서도 성경을 쓰셨어요. 마지막까지 하나님 잘 믿다 죽었다는 하는 그 모습도 보이고 이 성경을 다 쓰기 전에 죽을꺼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성경을 다 쓸때까지 안 죽은 거에요. 성경 다 쓰고 난 다음에 보니까 몸이 이상해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암세포가 싹없어졌다는 거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래가지고 다 쓴 성경을 목사님한테 갔다줬더니 이 목사님의 교회는 인천에 중앙감리교회인데 성경 박물관이 있어요. 세계에 좋은 성경책, 희귀본이 한 만여권 있는데 그 곳에 이 성경책을 전시를 했어요. 그 집사님의 성명이 구관혜집사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쓰다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너 뭐하다가 왔냐? 그러면 최후순간까지 하나님 의지하다가 여기 왔노라고 그 말씀 그것 드리고 싶어서 그 썼던 그분이 기적을 경험한 겁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누구에게 주를 위해 충성하느냐? 성령이 우리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다 일하게 되 있습니다. 땀을 흘려 주를 위해 일하고 그럴때 하나님께서 상속받는 기쁨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상속받는 기쁨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령한 복을 아는 기쁨은 세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녀로 마귀를 물리쳐서 거룩하고 흠없는 생활을 하는 기쁨, 죄사함으로 용서함으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기쁨, 성령의 권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상속받는 기쁨 말입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80되신 가정을 심방했는데요. 권사님이 너무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더라구요. 정말 우리가 살다 보면 험악한 세월을 지나는 거 맞는데 제가 힘들고 어려운 얘기를 다 할 수 는 없지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권사님!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사나 죽으나 기도하는 거죠. 나는 하루의 첫 시간은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큰일 작은일, 좋은일 나쁜일, 다 있는데 무덤에 갈때나 털어버리는 거지요. 그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디서 문제를 해결하십니까? 기도로, 기도로 위로받고 기도로 신령한 기쁨을 누리시는 거에요."
그러시면서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일 좋아하는 복음 성가가 있어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살아요. '그걸 너무나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러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살아요.'이게 뭐에요? 기도한다는 거에요. 하나님께 맡긴다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기쁨이 있는 거에요.
내일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뜻대로 못해요험한 이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내미사 내손 잡아 주소서
내일일은 난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붙드사 평탄한길 주옵소서
좁은이길 진리의길 주님가신 그옛길
힘이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음성을 항상들려 주소서
내마음은 정했어요 변치않게 하소서
내일일은 난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소명 이루소서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속하니 참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맘에 항상계셔
천국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삼위일체 하나님
엡 1:3-14 / 김경년 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성경에는 ‘삼위 일체’라는 말이 없지만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소개하는 말씀은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인정한 것은 주후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니케아 회의는 세계적인 종교회의였는데 그날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한 부활절 날짜 등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후 주후 451년에 소아시아의 칼케돈에서 소집한 ‘칼케돈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공식 추인되어서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분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시는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우리’ 라고 하는 ‘복수의 개념’ 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증거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8:19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부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3-4절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기서 성부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하셨는데 즉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5절 말씀에서는 “우리를 예정하셨다”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 가운데 선택하신 분입니다.
여기서 예정과 선택은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정은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이라면 선택은 그 구원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구원의 예정자 가운데 나를 구체적으로 선택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동기)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 가운데 선택하신 동기(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사랑 외에 다른 어떤 동기도 없습니다.
(시기)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 가운데 선택하신 ‘시기’(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4절에 “창세전”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철저한 준비를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우연히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매우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준비하셔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도 자세히 보면 매우 계획적이고 철저한 준비를 알 수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돌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돌아가는 속도가 엄청난 데 어지럽지 않는 것은 너무나 신기합니다.
또한 태양과 지구의 평균거리는 약 1억 5천만 킬로미터인데, 만약 지구가 태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모두 얼서 죽고, 너무 가까우면 타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하나님은 적당하게 두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치 쇠붙이를 용광로에 넣었는데 우연하게 냉장고가 만들어지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만들어 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코 우연하게 만들어 진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하게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예정과 준비 가운데서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선택을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성자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피’라는 말은 ‘생명’을 말합니다. 즉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7-24절)에 보면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네 가지 형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의 형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과 투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은 노동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람은 육체의 죽음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람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데 즉 영적인 죽음의 형벌입니다.
이와같은 형벌이 아담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형벌에서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형벌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 생명을 바쳐서 죄의 형벌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자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제주도에 유명한 이기풍선교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감명적인 글이 있습니다. “주일은 반드시 지켜라”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라” “주의 종을 하나님 다음으로 생각해라”
등등의 내용이 있고, 그 가운데 “매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5분이상 주님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이 주님을 잊고 삽니다. 어떤 분은 일주일 동안 예수님을 잊고 삽니다. 그러지 말고 5분 이상은 주님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즉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곧 구원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령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말씀을 들을 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이 들려 집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인’을 쳐주셨습니다. 즉 도장을 찍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법적인 표시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도장을 찍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성령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결코 나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성자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인쳐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인쳐주신 목적도 하나입니다.
본문 6절과 12절과 14절 말씀에서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인쳐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21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인쳐주신 목적을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요리문답 1번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이 끝이 나도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끝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결단) 다같이 찬송가 405장 4절을 부르겠습니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예수님 짜리
엡 1:3-14 / 박기완 목사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잘되게 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과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기독교는 철저히 신본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서도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 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보람을 느끼게 되는 때는...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볼펜은 누군가에 의해서 써 질때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동차는 누군가에 의해서 운전되어 굴러갈 때 존재의 가치가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때 존재의 가치가 있고, 그럴 때 우리에게는 가장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95년 6월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그 중에 '정윤민'이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그야말로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을 찬송하며 살다간 사람이었습니다.
열 한 살에 망막 뒤에 핏줄이 생기는 '코트씨 병'으로 실명하게 되어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윤민 자매는 자신이 장애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며 가치있고 보람있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학문을 통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정상인들도 가기 힘든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하였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버틀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마음은 공허했습니다. 학문을 통해서 성공을 한다해도 참 만족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고민하고 갈등하던 가운데... 한 자매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윤민 자매는 육신의 눈이 먼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사 학위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와 맹아학교에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실력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힘겨워서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만으로도 너무 만족하고 행복했기에 이제 더욱 시간을 아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고 섬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4년... 삼풍사고로 숨지기까지 그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윤민 자매는 관계성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였고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밤을 세워가며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윤민 자매에게 가면 자기를 방어하는 벽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 가슴 속 깊이 있는 문제를 내어놓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은 다 접어두고 오로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지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오는 힘이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윤민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혀 자기가 처한 환경을 초월하고 글자 그대로 "찬송하리로다!"를 외치며 살아갔던 그리스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진젠 도르프' 백작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오직 한 가지 야망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랬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고백하기를 "나는 오직 한 가지 목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이 나의 목표이다!"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써는 하나도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빌3:4-9).
육체적으로는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집안 배경이 좋고... 아버지 잘 만나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완전한 자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라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빌립보서 3:8-9절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이 뭡니까? 똥이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지나고 보니 똥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똥이라고 한 그것을 오늘 우리는 그 똥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저마다의 값어치가 있죠.
100원주고 사면 그 물건은 100원짜리이고, 만원 주고 사면 만원 짜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짜리냐?
예수님을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 짜리' 라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걸 발견한 거예요.
내가 시시한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 짜리...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맞바꾼 엄청난 값어치의 존재라는 거예요.
이런 엄청난 복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도 모른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요?...
비행기 표에 기내식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도 모르고 굶는 사람... 에버랜드에 자유이용권이 있으면서도 남이 타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이나 같습니다.
가지고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 풍성함이 있는데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다는거 아십니까?...
바울이 지금 그걸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짜리 입니다.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엄청난 존재입니다. 굉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맞바꾼 존재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짜리'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복 보따리를 받은 존재입니다.
그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데, 이미 이런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 전부가 담긴 복 보따리 채 우리에게 안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유이용권을 가지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 해야 할 것은 그 복 보따리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온갖 좋은 복들을 맛보고 경험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짜리 인생이 되었기에 예수님 짜리다운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소유했으면서도 아직도 세상에 속한 복을 찾아다니는 인생은 아닙니까?
하늘 아버지의 왕자요 공주가 되었는데도 그 엄청난 신분과 복을 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 짜리 다운... 그런 인생이 되고, 그런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복을 가꾸고 지키는 교회
엡 1:3-14 / 이일기 목사
사람들은 누구나가 복을 좋아합니다만 그러나 사람마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복은 제각기 다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부귀 영화와 장수 재물 등을 소중한 복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특별히 복 중의 복으로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은 물질의 풍요함을 누리기 위해서 라고 볼 수 있는데 심지어 돈벼락을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하는데 특히 새해를 맞이한 요즈음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덕담을 하는 인사를 나누는데 가장 제 격인 것 같습니다.
어떤 집은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란 글을 써 붙이고는 복이 굴러 들어오길 기다리는 집도 있고 또 조금 있으면 사람들은 대문에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을 써 붙이기고 할 것인데 믿고 안 믿고간에 사람들은 복 받기를 좋아하지요.
예, 이왕이면 복을 많이 받고 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그 개념에 있어서 다분히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말합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복은 주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 하셨는데 그 복을 보면 육신적인 것은 하나도 없음을 볼 때에 우리 김해삼일교회 믿음의 가족들은 육신적인 복을 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영적인 복을 사모하고 받기를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 저는 “신령한 복을 가꾸고 지키는 교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열린 심령으로 말씀을 들으셔서 한 해 동안 여러분이 받고 누려야 하는 복을 잘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신령한 복은 어디로부터 누구에게 옵니까?
0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신학의 근본이며 그의 삶의 중심이었던 이 말은 바울을 바울 되게 하였던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의 안에서” 라는 말이 무려 10회나 나오며 바울 서신 전체에는 164회나 나오는데 이는 바울 사상의 중심적인 용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뜻하는 말로서 우리를 위해 그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죄를 씻어 주셨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무슨 선행을 행하였거나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절대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한정 된 이 말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이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 밖에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여기 신령한 복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받고 누릴 수 있는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땅위에서 누리거나 찾을 수 있는 물질적인 복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복으로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세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받고 누릴 것이요 하나님을 멀리하고서는 전혀 누리거나 찾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복을 받아서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 안에 있는 자입니다.
2. 신령한 복의 구체적인 실체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0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택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곧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지목하여 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이 선택은 하나님의 임의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아무런 조건도 참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무조건 선택 교리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그 선택의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신 만큼 인간의 공로나 신앙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무조건으로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독자적으로 정하신 어떤 설계도가 있어서 그것에 따라 구원 역사가 하나씩 하나씩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는 이 프로그램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것인 만큼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을 가감하거나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선택론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크신 긍휼과 놀라운 은총을 깨달으라고 주어진 교리이지 안 믿는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나 없나를 따지는 논쟁거리로 주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메시지이지 논쟁의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의 시기와 그 방법은 어떠합니까? 창세 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창조 이전부터 신령한 은혜 속에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우주 만물이 조성되기 전에 이미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해 놓은 존귀한 존재인 것이죠.
이 위대한 축복 속에 사는 성도는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선택의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이며 또한 성도가 신령한 복을 누릴 장소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인데 이곳을 벗어나면 즉시 신앙의 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고후 0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러한 성도의 행동 반경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영적 활동도 할 수 없으며 아무런 영적 축복도 누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면 성도들은 본질적으로는 무가치한 존재이었지만(엡 02:0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심으로 마침내 영적 축복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갈 04:08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여기 선택의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같이 04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0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말씀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생 제물과 관련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어느 한 곳이라도 흠이 있으면 그 흠으로 인해 제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습니다.
레 22:18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 열납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정 가운데 구속함을 받아 양자 되고 성령님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온전한 제물처럼 부정과 불법에서 떠나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활이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만 하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거룩하다는 말은 세상의 부정한 것들과 구별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구별되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각 자의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면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답게 구별되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3. 신령한 복의 구체적인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0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기 전에 우리의 신분은 어떠합니까? 사단의 자녀의 노릇을 하면서 지내는 죄의 종의 신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엡 02:0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게 되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평강과 기쁨과 풍족과 영생의 복을 받고 사단을 제어하는 권능까지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흠이 많고 죄가 많아 더러워진 우리가 거룩해 지는 비결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얻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은 자임을 믿고 사십시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은 하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차원이 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대 식민지 개척 시대에 영국인 출신으로 아프리카를 개척한 두 명의 탐험가가 있었습니다. 세실 로오드(Cecil Rhodes)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입니다.
이들은 다같이 영국의 탐험가로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였지만 전혀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는데 로오드는 남아프리카에서 소위 황금전쟁(Boar War)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을 수십 만 명이나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 등 각 종 좋은 것들을 영국에 빼돌림으로써 위대한 영웅이요 애국자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가서 자기의 조국 영국의 침략 정책을 반대하고 노예 제도와 원주민 압제를 비판하고 투쟁하면서 그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조국을 저버린 배반자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탐험가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당시와 아주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로오드라는 이름은 잊혀지고 그의 무덤조차 찾을 길이 없는 반면 리빙스턴은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영국이 배출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만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 지하에 안치되어 지금도 관광객들의 참배가 끊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같은 장소에서 살았지만 그들의 지녔던 삶의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후대 사람들로부터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들은 그 무엇에 가치를 두면서 살고 계십니까? 신령한 일에 가치를 두고 사십시오.
06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0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말씀 전체를 잘 읽어보시면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신령한 복을 주신 그 뜻을 이루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령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신령한 복을 받은 자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신령한 세계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이 다르고 계획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자들이며 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구별 된 분명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금년의 표어가 신령한 복을 가꾸고 지키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방심하면 신령한 공동체가 훼손되기 쉽지 않을까요?
이 표어를 금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잘 적용하여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사업 등 생활 영역 전반에 있어서 신령한 은혜로 윤택해 지는 일이 넘치고 그 신령한 은혜의 영역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받은 신령한 직분들을 잘 관리하면서 활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자
엡 1:3-14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만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3-14절의 말씀은 길지만 한 문장으로 된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논술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서정적인 찬양의 시로 되어 있기에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3-14절의 말씀 안에 기독교회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가 다 들어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모든 용어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정통한 교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3절의 말씀에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되는데, 성부 하나님에게 드리는 찬송이 3-6절의 말씀이요, 성자 예수님에게 대한 찬송이 7-12절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3-14절의 말씀에 성령께 대한 찬송입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여 6절에 마지막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다시 12절 마지막에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마지막에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부 하나님의 예정하시는 은혜를 찬송하고, 이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찬송하며, 우리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보증과 인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1.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3-6)
우리 인생은 복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복이라고 하면 우선 오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복이라고 하면 오래 사는 수(壽), 부자가 되는 부(富), 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평안한 강녕(康寧), 덕을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호덕(攸好德), 명대로 살다가 보기 좋게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도 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적인 복은 아닙니다. 동양적인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이요, 형태적이요, 현상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복이라는 말을 할 때 "마카리오스"( )라고 하는데 "행복한 섬"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후와 아름다운 꽃과 각종 열매가 가득하고 토지는 비옥하고 외적의 침입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다른 육지를 찾을 필요가 없는 그런 환상의 섬을 "마카리오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이 "마카리오스"를 좀 내면화하였는데, 자신만이 가지는 기쁨과 삶의 다양한 변화에서도 평안을 누릴 때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을 마카리오스라고 할 때 헬라인들은 대단히 철학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보고 복의 원천은 꼭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이란 것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의 생애에 기여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였고, 자기의 내면 세계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복이라는 말을 할 때는 이런 내면적이고 신앙 속에서 누리는 복을 말해야 성숙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히브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이라는 말을 "아사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에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는 불행이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질 때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말하는 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다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서술하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복은 영적이요, 무형적이요 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양적인 복은 물질적이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다른 이보다 더 잘 살고 오래 살고 높임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3절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위하여 신령한 복을 준비하셨는데,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구속은 선택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늘에 속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구속을 이해해야 하는데, 먼저 우리를 만세 전부터,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생각하신 것은 창세 전부터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사실은 믿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김세윤 박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예정 교리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정리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정을 이해하려면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되돌아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막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을 놓고 예정 받았는지 받지 못하였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정교리는 우리들이 믿음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에서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나처럼 영적으로 눈먼 자가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이것은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께서 내게 임하셔서 나로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시고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꺾어 그에게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된 은혜요, 선물인데, 바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구원은 창세 전부터였다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주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증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정의 교리는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위안을 주는 교리인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 인간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은 참으로 불안한 것이지만,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을 알면 우리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구원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택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온전하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죽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이 사실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살아온 것을 다 직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그 사명과 의무를 잘 감당하고 서 있는지 아니면 허송세월하고 방탕하다가 서 있는지 그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잘 알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중에 가장 도전이 되고 있는 말씀이 있다고 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보면 저에게 많이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는 저 혼자 받은 것으로 생각이 될 정도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저의 것이 없고,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받은 것이 좀 있을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잘 못한 것은 다음으로 밀어놓고 우선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까? 더럽고 추한 모습이지만 우리 주님과 함께 들어가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 옆에 서시면서 "이 사람, 더럽고 추한 사람이지만, 나의 친구요, 내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라고 변호해주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아들 예수님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3) 우리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들들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후사되었는데, 사실 후사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양자법에 따르면 양자로 입적이 되면 본성적으로 낳은 아들이나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아들로서 당당한 권한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는 주시고 온갖 책임을 추궁하고, 잘 잘못을 따지고 흠집만 찾아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타락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엡2:10에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구별하신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상품처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오직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상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대량으로 찍어내고 생산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공감하는 가격과 가치가 메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작품은 값을 메길 수 없습니다. 주인이 부르는 것이 가격입니다. 온 천하보다도 소중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알아야 하고, 고귀한 존재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2.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7-12)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속량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폴리트로시스"라고 하는데,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보석시키는 것을 말하는 특별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엄청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화해의 제물이 되어주셨으며 속죄의 제사를 지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죄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셨습니다. 내가 훌륭하게 생활하여 자녀가 아니라,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다 지불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값을 지불할 수도 없지만, 공연히 다 지불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을 할 때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이익을 가져오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에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 대신이라는 말과 대표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주님의 구속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의 깊은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내포적 대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대표하시고 우리를 대신하는 것을 "내포적 대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신 죽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장차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우주 만물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통일되는데, 통일된다는 연합과 조화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전 세계 모든 피조물은 다 일치하고 연합하고 조화를 이루고 질서를 이루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에 보시고는 좋았다고 하는 그런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경륜은 그 초점이 아들 예수님에게 맞추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경륜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을 찬송해야 합니다.
3.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찬송해야 합니다. (13-14)
성부 하나님에게 대한 찬송은 아들 예수님의 구속하심으로 이어지고 이제는 성령의 인치심을 인하여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또한 믿어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 안에 약속의 성령을 주신 것은 인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을 치셨다는 말은 보증하신다는 말로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 값을 지불할 때까지 제공되는 담보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보증하고 확증하시려고 도장을 치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리에서 살게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어나는 것,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진행시키는 모든 일들이 하나의 리듬을 형성하고 음정과 박자를 만들어내면서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고 창세 전부터 선택하시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우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들 예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를 대표하시고 우리의 진정한 이익을 위하여 구속하신 주님이십니다. 속전을 지불하는데,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면서 일치와 조화와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는 것을 찬송해야 합니다. 지금도 불편하신 것이 너무나 많지만 우리 속에 임재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확증하시고 인쳐 주시는 성령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찬송을 택하여 부르고, 교회에 와서 찬양대의 찬송을 듣는 것만이 찬송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 구원받은 것이요, 오는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전 삶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도 구원받았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듀크 대학의 제프리 웨인 라이트 박사는 "신학의 최종 목저, 또는 지향점은 영광의 찬송이다"고 했습니다. 어찌 신학뿐이겠습니까? 목회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인생도 그렇습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학생도 사업하시고 직장 생활하는 것도 우리들이 교회를 나오고 신앙 생활하는 것도 다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찬송이라는 목표가 빠지고 나면 무의미해지고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영광의 찬송이라는 말은 Doxology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서 있어야 평정을 잃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주님의 영광, 성령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였지만 이에 주님을 영접하고 나니 전혀 새로운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만드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모든 사업이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