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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달은 과거에 많은 책을 읽었던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상상도 못할 싯귀절을 읊으며 호탕하게 살아가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학문이 높고 고귀하게 산다고는 하지만, 한낱 농부에 불과한지라, 사는 형편은 보잘것 없이 초라했습니다.
오뉴월 뙤약볕에 하루종일 밭고랑을 매고 새참이라도 먹는다는 것이 텁텁한 막걸리 한 잔에 마늘 한 쪽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느날인가는 극심한 가뭄에 일꾼들에게 줄 품삯도 없었으며 농기구를 마련할 자금도 없어서 여간 짜증이 나는게 아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시름에 잠겨있던 서선달은 문득 몇 해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아들은 몇 해 전, 자수 성가를 한 번 해 보겠다며 고향을 떠나서 부산으로 내려가서 미곡상회 경리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좋다, 좀 염치없지만 아들 녀석에게 가서
농사지을 비용을 한 번 말해 보자."
서선달은 금방 부산으로 내려 갔습니다.
이 당시에도 경부선은 있어서 열차를 이용하면 편하건만, 노자도 한 푼도 없어서 굳이 걸을 수 밖엔 없었습니다.
마침내 부산에 도착하여 서선달은 몇 해 만에 반갑게 아들과 만났습니다.
아니, 아버님,..
전갈도 안 주시고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아들은 의아해서 물었으나 아버지의 형색을 보고는 금방 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구할 시간을 벌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기왕에 처음 부산엘 오셨으니까,
구경도 좀 하시고 며칠간 쉬었다가,
가시지요."
아들은 주인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하고, 급히 돈을 마련했습니다.
막상 오백 오십 냥이라는 거액을 한 곳에 쏟고 보니, 그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일부는 지폐로 바꾸어 십일환이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께 얘길 꺼냈다.
아버지, 십 환은 집에 가지고 가셔서 농사비용으로 쓰시고, 나머지 일환은 가시는 여비로 사용하세요."
아들은 거액을 내밀면서 서선달에게 말했지만, 서선달은 차마 아들이 시키는대로는 할 수가 없어서 얘길했다.
얘야, 일 환이면 송아지가 한 마리 값인데, 내 어찌 그런 돈으로 차를 타고 갈 수가 있겠느냐? ..
네가 객지에서 무슨 고생을 다 하면서 모은 돈인데,..
내 알아서 갈테니, 너무 걱정일랑 하지 말거라, 그럼 난 그만 갈테니 몸 조심해라!.."
그런데, 서선달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서, '동래. 울산. 경주' 등을 거치지 않아도 될 지방까지 거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안동까지 올라와서 상주를 향해, 다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엿새째 계속 헛걸음만 하던 서선달은 이레째 되는 날,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게 되었는데,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산 꼭대기의 널찍한 바위에 앉아오랜만에 품 속의 전대(돈이나 물건 따위를 넣을 수 있게 만든 보자기 모양의 긴 자루) 를 풀어 보았다.
서선달은 그대로 들어있는 돈을 보곤 흐믓한 미소를 흘린 다음에 부싯돌을 꺼내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를 가다 보니깐, 갑자기 말방울 소리가 울리면서 풍채가 당당한 양반이 경마잡이 하인 한 명을 거느린 채, 서선달을 지나쳐서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말을 타고 위풍당당히 걸어가는 양반이 부러워서 양반이 자기가 쉬었던 넙적바위가 있던 곳에 이를 때 까지 넋을 잃고 바라 보았는데, 그 양반도 산 허리쯤에 있는 넙적바위 위에 걸터앉아 쉬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입니까, 바위 밑에는 하나의 전대가 떨어져 있었으며, 그 전대 속에는 고스란히 돈 십 환이 들어있었던 것 입니다.
아니, 이 많은 돈이,...
쯧쯧!~
이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대체 누굴까? 맞았어, 아까,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의 것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여기 앉아서 돈을 찾으러 올 때 까지 기다려야겠군,.."
양반은 몇 시간이 지나도 떠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막 서산으로 기울 때 쯤, 산 아래 쪽에서 황망하여 다급하게 고함을 질르며 서선달이 쫓아오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서선달을 양반은 반갑게 맞으면서 전대를 내 주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원래는 십 일환 이었는데, 일환은 이레동안 경비로 쓰고, 십환이 남았던 것 입니다."
허허, 그래요?
그간 얼마나 걱정을 하셨겠소."
양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다시 말에 올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선달은 그런 양반이 하도 고마워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다, 산을 내려왔다.
주막에서 하룻밤을 새운 서선달은 반나절 동안 계속 걸어서, 이젠 낙동강만 건너면
상주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룻밤 사이에 강물이 불어서 나룻배를 띄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모두들 물살이 센 강물에 겁을 먹고 건느질 못하고 있을 때다.
한 소년이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 대며 '사람살려 달라'고 나부 대었으나, 거센 물살에 누구하나, 감히 소년을 구할 엄두를 못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얼마 안 가서 소년은 강물에 휩쓸려서 죽고 말 지경이었다.
위급함을 느낀 서선달이 재빨리 전대에서 돈 십 환을 꺼내 허공에 흔들면서 소리쳤다.
자, 누구든지 저 소년을 구해주면 이 돈 십 환을 내 다 드리겠소!~"
이 말에는 역시 큰 효과가 있어서, 어떤 체격이 우람한 장정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소년을 구해 안고 돌아왔다.
결국 십 환으로 소년을 구한 서선달은 소년의 은인이 된 셈이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의 은인이십니다.
그러니 저의 집에 들러서 저의 부모님들을 꼭 한번만 뵙고 가시지요."
서선달은 소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소년의 집으로 가서, 부모님과 서로 상면을 하였는데, 알고보니, 이 소년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전에 산허리 넙적바위에서 자기 돈 전대를 찾아 주었던 그 고마운 양반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은 것으로 그 양반은 자기 목숨같은 외동아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양반은 고맙다며 극진하게 서선달을 대접했으며, 그 고장에서 한다하는 갑부인 양반은 두 말 않고 돈 십 환에 사례비 까지도 얹어 주었지만, 극구 서선달이 사양하여 원금 돈 십환만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는 실화이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런 경우를 두고, 흔한 말로 '베푼만큼 거둔다!' 고 할 수 밖엔,..
착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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