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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1일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서울 6.21~6.24)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21일 서울 워커
힐호텔에서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시작
됐다.
회담 첫 공식일정으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주최한 환영만찬이 오후 8시부터
두 시간 가량 진행됐다. 북측이 착석하자
현악단이 ‘통일 6·15’라는 곡을
연주했다.
사회자는 “북한이 6·15 남북정상회담 5
주년을 기념해 만든 노래”라고 소개했다.
행사에는 남북 대표단과, 열린우리당 배기선·한명숙·최성,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 등 여야 의원 10여명과 학계·재계·
사회단체 대표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워커힐호텔에 35분
쯤 늦게 도착했다. 인천공항 출발 후
올림픽대교 부근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 때문
이었다.
북측은 시위대를 보고 차를 세운 뒤 항의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오후
7시로 잡혀 있던 만찬도 1시간 가량
지연됐다.
22일 15차 남북 장관급회담 첫날 전체
회의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기조
발언을 통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
주소 확인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7월 중
개최하고, 8·15를 계기로 11차 이산가족
상봉을 하되 6월 중 ‘화상(畵像) 상봉
준비기획단’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정 장관은 또 “7월 중 남북 장성급회담을
열어 이를 정례화하며 국방장관회담도
갖자”고 제안했다.
북측 권호웅 단장은 이런 제안에 대해 이
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장성급 회담은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
위원장이 약속했고, 국군포로·납북자의
생사·주소 확인은 2002년 9월 4차
적십자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다.
권 단장은 8·15 이산가족 상봉과 화상
상봉만 응했다. 그는 상호 비방방송을
중지하자고도 했다.
권 단장은 또 “식량 사정이 어렵다”며
구체적인 양까지 요청했다. 이와 관련,
회담 관계자는 “예년 수준 규모”라고
했고, 정부 당국자는 “쌀 40만t 정도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예년처럼 우리측
이 40만t을 국내산 10만t과 동남아산
30만t으로 충당해 지원할 경우 1400
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핵문제와 관련, 북측은 “미국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면 단 한 개의 핵무기
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 위원장의
발언을 반복했다. 북측은 그러나 ‘7월 중
6자회담 개최’ ‘장관급회담에서 핵문제
도 협의’라는 우리측 제안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북측 대표단 일행을 접견했다. 청와대측
은 북측 대표단이 김 위원장의 특사자격
은 아니라고 밝혔다.
북측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5차 장관급
회담 때 이후 4년 만이다. 이들의 청와대
면담은 청와대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6·17
면담‘에서 정리한 큰 가닥을 거의 벗어나
지 못했다. 그만큼 합의도 쉬웠지만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북핵문제는
비핵화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고
많은 현안을 장성급회담·경제협력추진위
등 하위 회담으로 넘겼다.
그래서 이번 회담을 ‘6·17 면담’ 구체화
를 위한 실무 협의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또한 우리측이 요구했던 회담
정례화도 완전하게 이뤄내지 못했다.
▶2014년 강원도 고성군 군부대
총기난사 사건
21일 오후 강원도 동부전선 내 고성 22사단 GOP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병사 5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다.
이날 GOP 소초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임모 병장은 동료병사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한 뒤 실탄60여발과 수류탄, K-2 소총을 소지한 채 탈영했다.
이후 고성군 금강산콘도 500m 서쪽에서 군 병력과 대치했으며, 군 병력은 이날 오전 7시쯤부터 임 병장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아버지와 형이 임 병장과 7~8m 떨어진 거리에서 투항을 권유했지만 임 병장은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돌아가면 사형 아니냐? 나갈 수 없다”고 버텼다.
임 병장은 23일 오후 군 병력에 포위된 상태에서 자신의 K-2 소총으로 자해를 시도한 뒤 생포됐다. 임 병장은 자해 시도 직전 “선임(先任)과 후임(後任)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따돌림을 당해 부대 생활이 힘들었다. (희생자)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전선 22사단은 예전에도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15명이 숨졌고, 지난 2012년 ‘노크귀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2014년 6월 23일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뒤 강원도 고성군 산속에서 군(軍)과 대치하던 임모 병장이 23일 오후 자해를 시도하고 군인들에 의해 들려 나오고 있다. 임 병장의 자수를 설득하려고 현장에 있던 아버지 임모씨(*모자이크 처리)가 호송되는 아들을 보고 울며 달려가려 하자 한 장병이 팔을 잡으며 말리고 있다.
▶2009년 터키서 살인진드기
‘케네’ 공포
2009년 6월 21일 유행성 살인진드기 ’케네’ 공포로 터키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고 현지 주요 일간지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일명 크름 콩고 출혈성 열병(KKKA)의 원인이 되는 이 진드기는 사람이나 동물의 혈관을 통해 병을 일으키며 목숨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네는 추운 계절에 잠복해 있다가 더운 날씨와 함께 활동하며 터키에서 올 들어서만 벌써 1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2002년 가을 터키 중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케네는 천적인 닭이 조류 독감으로 양계장들의 집단 폐사와 함께 줄어들면서 생태계가 파괴돼 서서히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터키 보건 당국에 따르면 이 병원체로 인해 2002년 이후 현재까지 145명이 사망했다.
▶2005년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서울 6.21~6.24)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21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시작됐다.
회담 첫 공식일정으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주최한 환영만찬이 오후 8시부터 두 시간 가량 진행됐다. 북측이 착석하자 현악단이 ‘통일 6·15’라는 곡을 연주했다. 사회자는 “북한이 6·15 남북정상회담 5주년을 기념해 만든 노래”라고 소개했다. 행사에는 남북 대표단과, 열린우리당 배기선·한명숙·최성,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 등 여야 의원 10여명과 학계·재계·사회단체 대표 등 90여명이 참석했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워커힐호텔에 35분쯤 늦게 도착했다. 인천공항 출발 후 올림픽대교 부근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 때문이었다.
북측은 시위대를 보고 차를 세운 뒤 항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오후 7시로 잡혀 있던 만찬도 1시간 가량 지연됐다.
22일 15차 남북 장관급회담 첫날 전체회의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기조발언을 통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주소 확인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7월 중 개최하고, 8·15를 계기로 11차 이산가족 상봉을 하되 6월 중 ‘화상(畵像) 상봉 준비기획단’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정 장관은 또 “7월 중 남북 장성급회담을 열어 이를 정례화하며 국방장관회담도 갖자”고 제안했다.
북측 권호웅 단장은 이런 제안에 대해 이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장성급회담은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약속했고, 국군포로·납북자의 생사·주소 확인은 2002년 9월 4차 적십자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다. 권 단장은 8·15 이산가족 상봉과 화상 상봉만 응했다. 그는 상호 비방방송을 중지하자고도 했다.
권 단장은 또 “식량 사정이 어렵다”며 구체적인 양까지 요청했다. 이와 관련, 회담 관계자는 “예년 수준 규모”라고 했고, 정부 당국자는 “쌀 40만t 정도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예년처럼 우리측이 40만t을 국내산 10만t과 동남아산 30만t으로 충당해 지원할 경우 140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핵문제와 관련, 북측은 “미국이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면 단 한 개의 핵무기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 위원장의 발언을 반복했다. 북측은 그러나 ‘7월 중 6자회담 개최’ ‘장관급회담에서 핵문제도 협의’라는 우리측 제안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청와대에서 북측 대표단 일행을 접견했다. 청와대측은 북측 대표단이 김 위원장의 특사자격은 아니라고 밝혔다.
북측 인사가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5차 장관급회담 때 이후 4년 만이다. 이들의 청와대 면담은 청와대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6·17 면담‘에서 정리한 큰 가닥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합의도 쉬웠지만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북핵문제는 비핵화원칙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고, 많은 현안을 장성급회담·경제협력추진위 등 하위 회담으로 넘겼다.
그래서 이번 회담을 ‘6·17 면담’ 구체화를 위한 실무 협의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또한 우리측이 요구했던 회담 정례화도 완전하게 이뤄내지 못했다.
▶2004년 사상 첫 민간 유인우주선
‘스페이스십원’ 대기권 밖 비행 성공
민간회사가 개발한 첫 우주선이 2004년 6월 21일 역사적인 유인 비행에 성공했다.
이륙용 추진 비행기 위에 얹힌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십원.
미국의 스케일드 콤포짓사(社)가 만든 유인 우주선 ‘스페이스십원’은 베테랑 비행사 마이클 멜빌(62)을 태우고 이날 오전(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있는 에드워즈 공군기지를 출발했으며, 우주의 경계로 분류되는 고도 100㎞를 넘어 비행한 뒤 무사히 귀환했다.
국가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개발해 발사한 유인 우주선이 대기권 밖을 비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페이스십원은 이륙용 비행기에 힘입어 고도 5만피트(약 15㎞) 상공까지 비상한 뒤 자체 엔진을 점화해 음속의 3배 속도인 마하3의 속도로 고도 100㎞를 돌파했다. 우주선은 지구의 대기권 밖에서 몇 분간 체류한 뒤 약 한시간 반만에 활주로로 되돌아왔다.
약 2000만달러가 투입돼 개발된 스페이스십원은 1986년 보이저호를 설계했던 버트 루탄이 설계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인 억만장자 폴 앨런이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의 우주연구 후원단체인 ‘X프라이즈’ 재단은 최초로 3명을 태우고 우주여행에 성공한 민간 유인 우주선에 1000만달러(약 115억원)의 상금을 준다고 공언한 바 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 2남 김홍업씨
22억 수수혐의로 구속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가 청와대·검찰·국세청·예금보험공사·신용보증기금 등 국가기관의 업무와 관련해 기업체의 청탁과 함께 22억8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로 2002년 6월 21일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홍업씨는 2000년 2월 삼보판지 유종규 부사장으로부터 모범납세자로 선정되게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국세청 간부에게 청탁해주겠다며 1억원이 든 통장을 받았고, 같은 해 9월∼2002년 2월 성원건설 전윤수 회장으로부터 화의 인가와 관련한 청탁조 및 사례비조로 4차례에 걸쳐 1억4000만원을 받았다. 홍업씨는 또 2000년 6월 당시 대한주택공사 오시덕 사장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내사종결 사례비로 오 사장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는 등 총 2억6000만원을 직접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홍업씨가 직접 받은 1억4000만원과 별개로, 김성환·이거성씨 등이 성원건설에서 10억원을 받는 과정에서 예금보험공사 이형택 당시 전무에게 “화의안을 신속하게 동의해달라”고 청탁했고, 2001년 평창종건의 신용보증서 취득과정에서 당시 신용보증기금의 모 전무와 이 회사 간부의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공범혐의를 적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3남 김홍걸씨에 이어 차남 김홍업씨도 구속되자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국민여러분 앞에 섰다”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1999년 경북 성주서 발견한 수륜
광산, 국내 최대 금광맥으로 확인
대한광업진흥공사가 1999년 2월말부터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광산, 전남 진도군 가사도광산, 충북 음성군 금풍광산 등 3개 광산을 대상으로 시추탐사를 벌인 결과 1999년 6월 21일 수륜광산이 국내 최대의 금광맥으로 확인됐다.
수륜광산의 금광석 가채매장량은 184만4000t으로, 당시 국내 총 금광석가채매장량(400만t)의 절반에 가까웠다. 순금으로 환산하면 9˙9t이며, 당시의 국제금값으로 계산하면 943억원에 이른다고 산자부는 추정했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최대 금광은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광산으로 가채매장량은 78만t에 불과했다. 수륜광산의 품위(금광석 1t당 금함유량)는 442˙4∼530˙4g/t으로, 무극광산(10g/t)의 50배 수준에 달했다.
국내에서는 무극광산에서 연간 1t 안팎의 금을 생산했으나 매장량이 고갈되면서 1997년 말부터 금생산이 중단돼 필요한 금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국내 최고품위의 최대 금광맥을 발견함으로써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금의 상당 부분을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콜롬비아 대통령에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당선
▶1998년 시인 윤동주,
육필원고 150점 공개
▶1995년 오영선 선생 등
독립유공자 7위(位) 유해 환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한 오영선 선생(1886~1939) 등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 7위의 유해가 21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환국했다.
중국, 미국 및 일본에서 이날 봉환된 7위는 오영선 선생을 비롯, 광복군사령부 선전부장과 정보국장을 지낸 양기하(1878~1 932)선생, 임정 임시의정원 재무위원장이었던 윤현진(1892~192 1)선생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7위의 유해는 김포공항에 도착한뒤 황창평 국가보훈처장, 김승곤 광복회장, 유족과 친지 등 2백여명의 영접을 받았으며 국군의장대 소속 지프편으로 김포공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로 봉송돼 국립묘지 내 영현봉안관에 임시로 안치됐다.
정부는 이홍구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오영선-양기하선생의 유해를 22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윤현진 선생 등 5위를 23일 대전국립묘지에 각각 안장할 계획이다.
▶1995년 일본 전일공(ANA)
857편 여객기 피랍
1995년 6월 21일 오전 11시32분 일본 동경 하네다 공항을 출발, 홋카이도 하코다케로 향하던 전일공(ANA) 857편 점보여객기가 야마가타현 상공에서 공중 납치됐다. 여객기에는 일본 북해도 관광길에 나선 승객 3백50명과 승무원 15명이 탑승해 있었다. 범인들은 단 1명의 승객도 풀어주지 않은 채 탑승자 전원을 볼모로 철야 대치를 계속했다.
범인은 이날 여객기 2층 뒷좌석에 앉아 있다 아이스스틱을 들고 스튜어디스 1명을 먼저 인질로 잡았다. 범인은 스튜어디스를 위협, 승무원실로 간 뒤 자신이 옴교도인 고바야시 사부로라며 객실에 또다른 동료가 승객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2일 새벽 3시43분 일본경찰의 전격적인 진압작전으로 검거된 범인은 옴진리교인도 아니며 휴직한 은행원 출신 구쓰미 후미오로 단독 범행임이 밝혀졌다. 이번 납치 사건은 1인 단독범행으로 15시간 30분 만에 해결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1993년 네이디르 사건 발생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도피한 거부실업가인 에이질 네이디르(52)의 돈을 받고 금지된 키프로스섬 터키점령지역을 여행하고 또 거기에 호화 주택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이 1993년 6월 21일 야당인 노동당에 의해 정치쟁점화 됐다. 이른바 네이디르 사건의 시작이었다.
터키국적의 네이디르가 그동안 저질렀던 사기와 횡령 등의 중죄를 수사하다 보니 그 배후에 집권 보수당의 중진 의원들이 이른바 비호세력으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북키프로스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네이디르는 1981년 영국으로 와서 `폴리 펙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적 대기업의 회장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축재과정에서 많은 의혹을 받았던 그는 1994년 4월 마침내 탈세 사기를 비롯한 13종의 범죄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돈을 내고 보석을 받아 풀려난 뒤 북키프로스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정치추문 소동은 여기서 시작됐다. 기부금 때문에 법망이 좁혀들자 그의 돈을 받은 사람 중 누구하나 그를 감싸주려 하지 않자 앙심을 품은 네이디르가 도망지에서 잇따라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1992년 중국 원로 이선념 사망
▶1990년 이란 라쉬트 대지진 발생.
5만여명 사망-20여만명 부상
1990년 6월 21일 자정, 이란 북서부 카스피해 인접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5만여명의 사망자와 20여만명의 부상자, 50여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리히터 지진계로 7.3을 기록한 이 대지진은 1백30여개 도시와 마을을 완전히 폐허화시켰으며 수일 동안 3백60여 차례의 여진이 계속돼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79년 회교혁명 이후 폐쇄적인 자세를 보였던 이란 정부도 어쩔수 없이 서방측에 긴급원조를 요청했으며 세계각국은 신속하게 구호의 온정을 전달했다. 이라크와의 8년전쟁에 이은 이 지진참사는 이란을 덮친 또하나의 비극으로 기록됐다.
▶1989년 유네스코 문맹퇴치 공로상인
`세종대왕상` 창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한국어 이름의 상이 제정됐다. 1989년 6월21일 유네스코 집행위원회는 세계적으로 문맹퇴치에 공헌한 개인 또는 단체에 수여하는 문맹퇴치 공로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으로 결정했다.
이날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세종대왕상은 우리 정부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으로, 유네스코 심사위원회가 매년 선발하는 수상대상에게 3만 달러를 한국정부가 상금으로 제공하며 1990년부터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문맹퇴치의 날인 매년 9월 8일 시상하고 있다. 상은 본상과 장려상의 2부문으로 수여된다.
수상대상은 1. 문맹퇴치사업에 직접 종사한 경우 2. 국가 또는 지역 단위의 문맹퇴치사업 종사 3. 문맹퇴치를 위한 언론캠페인 종사 4.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자재개발 생산 5. 문맹퇴치관련 학술연구 6. 문맹퇴치사업계획 수립 및 이를 위한 조사업무 7. 청소년의 문맹퇴치사업 참여유도 8. 문맹퇴치에 공이 있는 언론 등이다.
▶1988년 소설가 전광용 별세
호는 백사(白史). 1919년 3월 1일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일본에 건너갔으나 전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귀국하였다. 1951년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국어국문학회 대표, 한국현대문학연구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6월 20일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1939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었으며,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흑산도'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인활동을 시작하였다. '흑산도'는 서해의 고도 흑산도에 대한 학술 조사 기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섬에 운명적으로 매달려 있는 어민들의 생태를 그린 작품이다. 이후 1968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꺼삐딴 리>, <충매화> 등 30여 편의 단편과 <나신>, <창과 벽> 등 4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대표작 <사수>는 친구 사이에 운명적으로 내재해 있는 승부의식과 대결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집으로 <흑산도>, <꺼삐딴 리>, <동혈인간> 등을 발간하였다
▶1983년 체코 프라하 시민 300여명,
68년이후 처음으로 반정시위
▶1982년 반 베트남,
캄푸차 연합정권 구성 선언
▶1977년 프랑스 화가
루시엔 쿠토 사망
▶1974년 이슬람제국 외상회의 쿠알라
룸프르서 개최, 38개국과 PLO참가
▶1972년 주한태국군 철수 완료
▶1971년 국제사법재판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미비아통치 위법판결
▶1970년 미국,
앨버트 크루 원자분리 촬영
▶1970년 브라질 제9회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통산 3회 우승 달성
브라질이 1970년 6월 21일 열린 제9회 월드컵 경기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고 우승해 통산 3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3번째 우승으로 브라질은 줄리메컵을 영구 보관하게 됐다.
결승전은 11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12시부터 멕시코시티 아즈테카경기장에서 열렸다. 시합전에 내린 비로 운동장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양 팀은 전력투구, 멋진 묘기를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전반전은 1:1이었지만 후반들어 대공세를 펼친 브라질이 연거푸 3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압도했다. 이로써 월드컵 우승 회수는 브라질이 3번, 이탈리아와 우루과이가 2번, 독일과 영국이 각각 1번을 기록하게 됐다.
▶1970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1949-66) 수카르노 사망
▶1968년 플로리다에서 휴고 빌렌,
1.83m의 보트로 84일 간의
대서양 횡단 항해
▶1963년 프랑스,
대서양함대 NATO철수를 통고
▶1962년 대한무역진흥공사 설립
▶1961년 혁명재판소 및
검찰부 조직법 의결
▶1960년 사상초유의 경찰데모 발생
▶1957년 휴전협정 제B조,
D항 (무기반입금지) 폐기
▶1955년 북한 공군장교 이운용.
이인선 야크기 타고 귀순
1955년 6월 21일 북한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 소속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 두명이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했다.
1955년 6월 21일 야크18 연습기를 타고 귀순한 북한 공군장교 이운용과 이인선.
평양출신이며 소련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운용 상위와 평남 강서군 출신이며 중국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인선 소위 두명은 이날 오전11시경 소속부대인 조선항공사령부 직속 독립연대 858군부대에서 무단으로 나와 야크18 연습기로 평양을 탈출, 오후1시30분경 서울상공에 도달해 수차례 선회하며 귀순의사를 밝힌 후 여의도 비행활주로에 착륙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북한의 신문지 및 연락서류를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초도라는 섬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날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기내에서 탈출을 상의해 그대로 남으로 방향을 틀어 인천을 경유해 여의도공항에 착륙한 것으로 밝혀졌다.
8월 16일 공군본부는 귀순한 이운용, 이인선 장교를 공군으로 정식 편입해 각각 대위와 소위로 임명했다.
https://m.blog.daum.net/gmania65/1279
▶1949년 농지개혁법 공포
1949년 6월 21일 재정된 농지개혁법 문서.
1949년 6월 21일 남한에서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을 몰락했다. 북한이 1946년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에 자극받은 바가 컸다.
당초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무상분배’안, ‘유상매수 유상분배’안이 집중 논의됐으나 좌익세력의 약화와 농민운동의 분열-쇠퇴에 따라 ‘유상분배’ 토지개혁안이 거의 확정됐다.
국회는 농림부가 작성해 국회에 제출한 농지개혁법안과 국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농지개혁법안을 비교 검토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1949년 4월 28일 통과시켰다. 재정상의 이유로 정부가 보상액을 일치시켜줄 것을 국회에 요구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하고 이날 공포했다.
그러나 지주층의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로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도 시행에 들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더구나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에 대상농지가 축소됐다. 한편,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가게 한 농지개혁법은 남한에서 6.25때 농민들의 적화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8년 미국 콜롬비아사
LP레코드 첫 공개
미국 콜롬비아사가 개발한 지름 30cm LP 레코드가 1948년 6월 2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종래 1분에 78회씩 회전되는 SP를 대신해 1분에 33과 1/3을 회전하는 이 LP 개발로 연주시간이 최대 25분으로 늘어났다. 더구나 원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재생할 수 있어 SP에 비해 음질이 뛰어났다.
LP레코드를 개발한 콜롬비아사 공장의 모습.
LP개발은 음악감상자나 연주자, 가수에게도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1949년 콜롬비아사의 라이벌인 RCA빅터사가 지름 17cm의 45회전 레코드 EP를 발표했다. LP와 EP의 대결은 수년동안 계속됐으나 결국 EP는 SP와 마찬가지로 싱글곡을 수록하는 미디어가 되었다. 이로써 LP의 독주시대는 30여년 이상 계속되다 1980년대 들어 CD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국 참가 승인
▶1926년 제2차 공산당 사건
▶1921년 런던서 개최된 영제국회의서
`영연방`결성에 합의
▶1914년 주트너 사망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로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이며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13년 미국 죠지아 브로드윅,
여성최초의 낙하산 강하 성공
▶1908년 행크 허스트,
부인참정권을 요구하는 25만인 데모
▶1905년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출생
▶1904년 서울에 공중변소 설치
▶1900년 의화단 사건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퉈 중국을 향해 탐욕의 발톱을 곧추 세우던 시기, 중국에서도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 농민집단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 열강의 침략, 청일전쟁 배상금 등이 불러온 민중의 고통은 의화단의 세력확대를 도와준 자양분이었고, “권법과 봉술을 익혀 주문만 외우면 총탄도 피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문은 이들을 지탱해 준 힘이 됐다.
의화단이 점령한 베이징에 진입 중인 독일군.
산둥성에서 처음 일어날 때만 해도 미미했던 세력이 1900년 5월에 부청멸양(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기치로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어느덧 20만의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 외국공관이 포위되고 서양 선교사가 피살되는 등 베이징 거리는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고, 철도·전선 등 서양과 관계있는 시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됐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독일·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500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미 톈진이 점령되고 베이징·톈진 간 통신선마저 파괴돼 오히려 고립되는 결과만 낳았다.
처음에는 의화단을 탄압했던 청조도 이들의 힘을 빌려 6월 21일, 열강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군사개입만 자초했다. 2만명의 연합군이 톈진을 공략한 데 이어 8월 14일에는 베이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이미 실권자 서 태후가 빠져나가 주인없는 도시가 된 베이징은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일어난 반제운동이었지만 그 실패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조의 숨통을 빨리 끊어 버렸다.
출처 한국행시문학
▶1893년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철도
건설자, 미국 상원의원 스탠퍼드 사망
▶1870년 청나라, 천진구교사건 발생
▶ 1863년 228개의 소행성을 발견한 독일의 천문학자 볼프 출생
▶ 1852년 독일의 유치원 창시자, 교육개혁가인 프뢰벨 사망
▶ 1832년 시조시인 이세보 출생
▶ 1646년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쯔 출생
▶ 1527년 `군주론` 저자 마키아벨리 사망
정치행위의 냉혹한 일반이론을 제시한 비수 같은 이성의 소유자, 마키아벨리가 1527년 6월 21일 사망했다. 58세였다. 종교를 정치의 수단쯤으로 치부하고 윤리를 군주의 화장술인 양 묘사한 마키아벨리였다. 사상사에서의 그의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나아가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한 데 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장을 맡아 내정과 군사를 담당했으며, 대사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512년 한동안 쫓겨났던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 권력을 잡으면서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정계에서 축출됐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작은 공직에서 밀려난 그가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 대한 울분과 공직 복귀에 대한 가망없는 기대 속에서 써내려간 불행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특히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저작물로, 그는 이 책에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 대항해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가 죽자 로마 교황청은 ‘군주론’을 비롯한 그의 저서 전부를 금서로 지정했다.
https://youtu.be/2RoPnKqhuf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