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개년 계획상의 정유공장 건설> 울산공업단지 건설이야 말로 혁명정부의 경제개발을 성공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거사였다. 여기서 울산 정유공장은 센터의 중심이었다.
이리하여 혁명내각(상공부)은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상에 다음과 같이 정유공장건설을 최중요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업명 울산정유공장건설 주체: 국영기업 공장규모: 일산 3만 5천 배럴 원유처리 소요자금: 와자 1천6백만 달러 내자 35억 환 공사기간: 1962 착공, 1964 시운전 업자선정: 국제경쟁입찰(상공부추진) 제공자료 : UOP 기본설계 비고: 국제 경쟁 입찰 시 소요자금 절감 기대 (전민제 위원 자문)
정유공장 건설이 발표되자 한국에 석유류를 ICA 무상 자금으로 공급하고 있던 KOSCO를 구성하고 있던 ESSO St'd와 Shell 그리고 CALTEX는 미국이 ICA 자금으로 공짜로 석유류를 공급하고 있는데 왜 비싼 돈을 들여 정유공장을 지으려고 하느냐고 반대하였다.
한국의 일부 식자들 간에서도 정유공장 건설을 반대하기도 하고 ESSO에서는 공장을 거저 지어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다.
<국영 댸한석유공사 설립> 정부는 5개년 계획상의 국영에 의한 정유공장건설을 확고하게 밀고 나갔다. 1962년 1월 16 일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하고 62년 7월 24일에 법룰 1111호에 의거 대한석유공사법이 통과됨으로써 법에 근거한 국영 대한석유공사(Korea Oil Corp KOCO)가 설립되었다. (유공의 탄생일 62/7/24일)
혁명정부 최초의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의 사장( 이성호)을 비롯한 임원 임명은 최고 회의에서 내려왔지만 기술이사만은 상공부(오원철 과장 자문위원회 간사)가 정유공장건설 자문위원 이재성 나윤호 전민제 중 공로가 많은 전민제를 추천하여 기술이사로 임명되었다. 일반 직원은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하였다.
한편 상공부(고석윤 국장 오원철 과장)는 상공부와의 계약으로 공장의 기본설계를 UOP(Sedlacek Swanson)의 도움으로 1개월 이내에 국제경쟁 입찰을 할 단계에 와 있었다.
<경쟁입찰에서 수의계약으로 변경> 돌발사건이 생겼다. 625 동란시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의 은인인 밴플리트 장군이 미국의 대한투자 사절단장의 자격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사절단은 울산 공업센터도 방문하여 투자를 약속하고 경제인헙회와 회담도 가졌다.
최고회의 의장실에서 상공부 장관(정래혁 박충훈 차관)에게 울산정유 공장 건설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온 미국의 Fluor Corp에 수의계약으로 맡기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625 동란시 한국을 살린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이 어려울 때 투자사절 단장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요청한 것을 거절할 수 없는 박정희 의장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었다.
국제 경쟁입찰로 여유 있게 계상된 1천6백만 불이란 금액이 2,3백만 불 정도는 깎일 것이라는 희망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공사 건설업체로 고자세로 지정되어 상공부 실무진의 건설공사 금액 삭감 요구에 전연 응하지를 않아 삭감을 못하고 일방적인 건설계약을 체결했다.
대한석유공산(유공)이 동년 7월에 국영기업체로 정식으로 발족하여 상공부(고석윤국장, 필자)가 추진했던 UOP와의 공정설계계약과 Fluor와의 건설계약 모두를 유공에 인계하였다.
유공은 상공부가 인계하여 준 계약서(가계약) (초안 필자 보유)에 따라 62년 10월 Fuor사와 일산 3만 5천 바렐의 정유공장을 1천6백만 불의 금액으로 16개월간에 완성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유공과 Fluor 사는 63년 12월 공장건설의 기간을 2개월 단축한 기계적 준공을 거쳐 64년 2월에 정상가동에 들어가서 역사적인 준공을 본 것이다.
<100% 국영에서 Gulf Oil과 합작> 한편 혁명정부는 국가의 기본 에너지 생산은 국영으로 한다는 방침하에 울산센터의 주력 공장으로 정부의 5개년 계획상 최중요 사업추진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공사계약에 따라 정부 보유불로 1차 지불 금액인 3백만 불을 지불하고 나니 정부의 외화 금고가 바닥이 났다. 외화 지불 불능상태에 빠졌다.
혁명정부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유지하겠다는 기본 에너지 확보정책에 금이 갔지만 유공의 주식을 매각하여 합작투자 회사를 만들어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유공은 정부의 승인아래 메이저 오일의 하나인 Gulf Oil을 합작선으로 선정하여 Gulf가 유공 간에 63년 10일 주식 25%를 매각하고 2천5백만댤러의 외자 도입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미 합작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것으로 정부의 그 당시의 긴급한 외환 소요액은 해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준공식 거행> 1964. 5. 7일 울산 정유공장의 준공식은 정부의 울산 공업 센터의 준공식 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최두선 국무총리 버거 미대사등 많은 내외 귀빈들의 참석과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성전을 벌였다고 했다.
혁명정부의 국가적 기공식으로 출발한 울산공업센터가 성공적인 결실을 거둠으로써 혁명정부는 경제개발에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울산 계속) 2024.3.30 김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