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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부는 중랑장(中郞將) 휘 중현(仲賢)이다.
증조부는 상호군(上護軍) 휘 효손(孝孫)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휘 환(紈)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휘 사종(嗣宗)이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선생은 휘는 신(紳)이고 자는 경여(景餘)이며, 성은 배씨(裵氏)이니 본관이 경산(京山 성주(星州))이다. 고려 말에 중랑장 용신(用臣)이 현풍(玄風)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이분이 선생의 5세조이다.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15년(1520, 중종15) 12월 기유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일곱 살에 같은 고을에 사는 김렬(金挒)에게 글을 배웠고 여덟 살에 엄한경(嚴漢卿)에게 글을 배웠는데 학문이 날로 진보되어 기재(奇才)라 일컬어졌다. 한번은 길가에 나가서 놀고 있는데 한 고을 수령이 나졸들의 보호를 받으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지나가자 다른 아이들은 다 겁이 나서 숨었으나 선생은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으니, 수령이 속으로 남다르게 여겼다. 관소(館所)에 가서는 선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예모(禮貌)를 갖추면서 찬탄하기를,
“뒷날 이 아이는 큰 덕을 갖춘 군자가 될 것이다.”
하고, 그 성명을 적어 갔다. 열일곱에 향시에 합격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선생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저의 사업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엄한경의 집은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많았는데, 한 여인이 선생이 예절을 엄격히 지키는 것을 보고 시험해 볼 요량으로 자기 댕기를 풀어서 책 사이에 끼워 두었더니 선생이 그것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하직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고 아직 그 일을 실천해 보지도 못했는데 그 책만을 더럽혔으니 떠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매우 부끄러워하였고 엄한경도 선생에게 사과하였다. 처음으로 글을 배웠던 스승 김렬이 역질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고 온 집안이 모두 전염이 되었을 때에 선생이 몸소 밤낮으로 약물을 준비하여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그 뒤 김렬이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글을 지어 그 아들을 경계하고 선생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아들을 부탁하니 그대가 잘 가르쳐 주시게.”
하고, 또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경외하는 사람이니 너희들은 나를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
하였다. 그 아들은 선생을 매우 공경하였고, 세상에 착실한 사람으로 이름이 났다.
선생은 약관의 나이가 된 뒤에 처음에 남명(南冥) 선생을 만났고 뒤에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선생을 종유하여 옛 선현의 학문을 들었다.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 김범(金範), 이제신(李濟臣) 등과 더불어 나이에 따라 위차를 정하는 예(禮)를 강론하기를,
“태학은 예의(禮義)를 따라 서로 높이는 곳인데 장유(長幼)의 질서가 없으니 의리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당시에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좋게 생각하였다. 지성균관사 성세창(成世昌)이 곤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공자의 문하에 이러한 예절이 있었는가?”
하니, 태학생 홍인우(洪仁祐)가 말하기를,
“있었습니다. 네 사람이 뜻을 말할 때에 증점(曾點)이 가장 뒤에 대답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나이로 보자면 증점이 당연히 둘째로 대답해야 할 것이나 비파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뒤에 대답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성세창이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묘년(1519, 중종14) 이후로 선비들이 예(禮)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홍인우는 학문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매양 “배경여(裵景餘)는 독실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중종 말년에 태학에 있다가 즐겁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명나라 세종 가정 31년(1552, 명종7)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상례(喪禮)가 크게 허물어진 시대였는데도 염빈(殮殯)과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고, 여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10년 뒤에 어머니 박 유인(朴孺人)의 말씀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4년 뒤에 공천(公薦)으로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고 얼마 뒤에 경릉 참봉(敬陵參奉)으로 바뀌었다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다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나라 목종 융경 2년(1568, 선조1)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빙고 별제(氷庫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선비를 등용하는 데에 마음을 쏟았는데, 선비들을 양성하는 방도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겨 학행(學行)에 경술(經術)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다. 그때 선생과 예안(禮安)의 조목(趙穆)이 첫째로 선발되어 교관(敎官)이 되었다. 선생은 본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벼슬살이를 한 것이었으므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수하는 왕명이 두 번이나 왔기 때문에 사은(謝恩)이나 하고 돌아오려 하였더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벼슬을 권하였다. 선생이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으로 우선을 삼아 그 음석(音釋)을 분명하게 알게 하고 그 구두를 바르게 떼게 하였으며 충분히 탐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순차에 따라 차근차근 배워 나가게 하고 등급을 뛰어넘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우명으로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써 붙여 놓고 배우는 자들에게 항상 보도록 하고 말하기를,
“학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안과 밖을 함께 수양해야 하니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거처하는 모습이 근엄하였고 동작에 위의(威儀)가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경외하였고 보고 느끼며 배우는 것이 더욱 많았다. 이에 배우려는 자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에게 배우는 선비들이 모두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고 말이 구차하거나 망녕되지 않아, 말하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재신(宰臣)이 그 자제가 태만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선생에게 책임지고 가르치게 하였는데, 몇 달 만에 그 자제가 법도를 지키며 조심스러워지고 몸가짐을 단속하여 경외할 줄을 알았다. 그 재신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몸소 실천하기를 독실하고 경건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감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나라 신종 만력 1년(1573, 선조6) 겨울에 선생이 병환이 나서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그런데도 날마다 의관을 정제하고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다가 반달이 지난 뒤에 세상을 떠나니, 곧 12월 17일이었다. 선생의 나이가 54세였다. 선생의 친구 중에 문덕수(文德粹)라는 분이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문병을 와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병환이 이미 심해졌다. 죽을 때에 처자(妻子)를 부탁하는 것은 친구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죽음은 천명이다. 내 어찌 아녀자를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로부터 벼슬이 없는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무릇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옷을 마련해 보내 수의(襚衣)로 쓰라고 하였다. 이듬해 1월에 아들 희(暿)가 고향으로 운구하여 돌아와 다음 달 27일에 고령현(高靈縣) 봉삭(鳳朔) 남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손씨(孫氏)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다. 아들은 희(暿)와 위(㬙)이다. 희가 계서(繼緖)를 낳았는데 계서는 훌륭한 행실로 천거되어 태릉 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계서가 아들 셋을 낳았는데 후적(後迪)과 후도(後度)와 후계(後洎)이다. 위는 일찍 죽었다. 사위 셋은 안사신(安士信)과 정인흡(鄭仁洽)과 곽영진(郭永鎭)인데, 정인흡은 생원이다.
선생은 자품이 남달라서 어릴 때부터 도(道)를 추구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도는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그 공부하는 방을 경재(景齋)라 이름하고 매일 종일토록 책을 읽으며 보냈으며 성현(聖賢)이 남긴 글의 요지를 적어 걸어 놓고 자신을 면려하였다. 일찍이 《대학》 〈성의장(誠意章)〉 아래의 주자(朱子) 주석에 “기미를 살펴야 한다.”라는 글을 읽고는 탄복하여 말하기를,
“여기에서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이 나뉘는 것이니, 이것을 잘 살피지 못하면 두서를 찾지 못하여 힘쓸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집안에서 지낼 때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예절을 지키게 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를 잘 섬겼다. 어진 사람과 가까이하기에 힘썼으며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진실하였다. 말을 꺼냈으면 반드시 약속을 지켰고 행실은 반드시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사소한 일이라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남이 모르는 일이라 하여 조금도 멋대로 하지 않았다. 배우는 자들에게는 항상 안락과 방종과 나태와 욕심을 경계하도록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고생스러움 속에서 무한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시국과 정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백성의 슬픈 일을 들으면 마치 그 아픔을 자기가 당한 것같이 여겼다. 임금의 초상을 당했을 때에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말하기를,
“임금과 부모는 섬기기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삼년상 기간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다.”
하였다. 《주역》을 즐겨 읽었다. 문장이 유려하고 법도가 있었으니 대개 학문이 높아서 그러한 것이었다. 〈남명선생실기(南冥先生實記)〉와 〈송계행장(松溪行狀)〉을 지었다. 선생이 낙동강 가에서 살았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낙천(洛川) 선생이라 불렀다. 영남 학자 곽준(郭䞭)과 박성(朴惺)이 모두 선생의 제자였는데, 곽준은 황석산(黃石山)에서 패전하였을 때에 순절하여 죽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나서 상주(尙州)와 경주(慶州) 이남이 왜적에게 7년 동안 함락되어 있을 때였다. 선생의 저술이 매우 많았으나 글이 모두 없어져서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0여 년 만에 정표비(旌表碑)가 세워졌다.
후학(後學) 양천(陽川) 허목(許穆)이 짓는다.
高祖中郞將諱仲賢。
曾祖上護軍諱孝孫。
祖副司果諱紈。
父參奉諱嗣宗。
母密陽朴氏。
先生諱紳。字景餘。姓裵氏。本京山。麗末。有中郞
將用臣。始居玄風。於先生爲五世祖也。明武宗正德十五年十二月己酉先生生。七歲。學於同縣金挒。八歲。從嚴漢卿學。學日進。號爲奇才。嘗出遊途上。遇一邑宰捧擁呵叱行過。群兒皆畏匿。而先生端拱立。宰心異之。之旣就館。召與語。爲之禮貌而嘆曰。他日。兒當作大德君子。識其姓名而去。十七。選解額。鄕里皆賀。先生謝曰。吾人事業。豈止此也。嚴家富饒多美人。見先生守禮甚嚴。欲試之。解其紒。挾之冊間。先生覺之。辭主人曰。讀聖賢。未能行其事。而汚其書。請去。
其美人大慙。嚴謝之。初受學師金挒。遘厲疫殆死。闔家皆染。先生躬日夜。執藥物救而得全。後金病目死。爲書戒其子。托先生曰。以此付吾兒而且敎之也。謂其子曰。斯人者。吾所畏也。若以事吾看事之。其子事先生甚敬。世以篤行聞。先生旣弱冠。初見南冥先生。後從李先生於陶山。得聞古人之旨。學旣通。與金範,李濟臣。講諸生序齒之禮曰。太學禮義相先之地。而長幼無序。無義。時李忠正公爲大司成。心善之。知館事。成世昌難之曰。孔子之門。有此禮乎。太學生洪仁
祐曰。有之。四子言志。曾點最後對。朱子曰。以齒則曾點當次對。而以鼓瑟故最後。成無以應。然自己卯之後。士以言禮爲戒。事竟不行。洪仁祐以學問聞。每推許裵景餘之篤實云。恭僖末。在太學。不樂歸。其明年。士禍作。世宗嘉靖三十一年。先府君歿。時喪禮大壞。殮殯葬祭。一從朱文公家禮。居廬以終二年。後十年。以朴孺人命。應擧成進士。後四年。以公薦。除南部參奉。明年。移慶基殿參奉。尋改敬陵參奉。以親老歸。復除慶基殿參奉。不就。穆宗隆慶二年。先孺
人歿。旣二年。爲氷庫別提。又不就。方昭敬初政。專用儒雅。以爲養士之道。莫先於敎育蒙士。選學有經術者。先生與禮安趙穆。首膺是選。爲敎官。先生本爲親屈也。自先孺人歿。不欲復出而仕也。以除命再至。欲謝命而歸。穌齋,草堂諸公勸之仕。先生敎授生徒。必以小學爲先。辨其音釋。正其句讀。優游探頤。使自得之。循序漸進。不許躐等。座右書九容九思。使學者常目之曰。爲學。必內外交修。不可偏廢。先生居處必嚴。動作有儀。人自畏敬。得於觀感者尤多。於是學者
坌集。至累數百人。從學之士。皆步履有法。言不苟妄。不言可知爲先生弟子也。有宰執憂子弟慢不率敎者。責令就學數月。其子弟循循雅謹。戒飭祗畏。其宰執歎曰。苟非躬行篤敬。安能感人如是。神宗萬曆元年冬。先生寢疾彌留。日猶冠帶必飭。不改常度者半月日而歿。十二月十七日也。先生年五十四。先生有故人。曰文德粹。從仕在京城。來問之。執手曰。疾已病矣。死而屬妻子。朋友之責也。毋念。先生曰。死命也。吾豈爲兒女子爲憂。旣歿。自朝之賢士大夫。以至韋布
士。凡所與相識。莫不涕泣相弔。歸衣服以襚。明年正月。孤子暿以喪歸。後月廿七日。葬于高靈縣鳳朔南岡。先生娶孫氏女。生二男三女。男暿,㬙。暿生繼緖。以行誼爲泰陵參奉。繼緖三男。後迪,後度,後洎。㬙早歿。壻三人。安士信,鄭仁洽,郭永鎭。仁洽生員。先生資稟卓異。自髫齔。慨然有求道之志。常謂爲學之方。不出於窮理踐實。扁其室曰景齋。每對卷終日。揭聖賢宗旨以自勔。嘗讀大學誠意章下朱子審幾之說。歎曰。此舜跖之分。於此不察。頭緖茫茫。無所用力。其居
家之節。內外有禮。昆弟克順。以事父母。篤於親仁。忠於交友。言必信。行必敬。不以小節而或懈。不以幽暗而或肆。對學者。每以安肆逸欲爲戒。又曰。學者於勤苦中。須覓無限意味。與鄕人處。未嘗一言及於時政。聞民慼則若恫瘝在己。有君喪。必不食肉三年曰。君親之義。事之如一。喪三年。食甘脆。不安於口也。喜讀易。文章贍麗有法。蓋得於問學者然也。作南冥先生實記,松溪行狀。先生居洛上。學者稱之曰。洛川先生。南方學者郭䞭,朴惺。皆弟子也。䞭黃石之敗。守節死
之。時東方大亂。尙慶以南陷倭七年。先生所著述甚多。而書皆亡不傳於世。先生歿九十餘年。立閭表碑。後學陽川許穆。撰。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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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 행장에는 <빙고 별제를 제수받았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라 되어 있으나
경북인물지[(3) 나씨~심씨]의 기록에는 <빙고 별제를 역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기록을 알려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