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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도(1)
엡 1:15-23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 1:16-23 /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려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또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분명히 알게 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18) 나는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장차 나누어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19) 또 믿음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 이 위대한 능력이 ㄱ)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어떤 왕이나 지배자나 권력자나 지도자보다도 훨씬 높은 하늘의 하나님 오른편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영예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어느 누구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ㄱ. 시110:1) 22) ㄴ)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만드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도의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의 기도와 감사(15-16) 바울의 기도와 감사의 동기가 에베소교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로써 에베소교회의 믿음과 성도 간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음과 사랑이 더욱 지속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증거가 서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을 오늘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17-21) 바울은 먼저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교인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 17:3). “하나님의 자녀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최고의 과학, 가장 고상한 사색, 가장 힘 있는 철학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 본성, 인격, 일, 행위, 존재입니다.”(Spurgeon) “철학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 자신을 알라’이지만, 복음은 훨씬 더 영광스럽고 결실을 맺는 표어를 인간에게 주는데 그것은 ‘너의 하나님을 알라’입니다.”(Alford)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성도가 누릴 부활, 영생, 그리고 영화로운 미래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 된 복을 의미합니다. 또한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는데, ‘오른편’은 권세와 능력의 자리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22-23)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께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수를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고 이로써 교회가 그의 몸이 되었으며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골로새서의 주제인 충만의 개념을 예수와 교회에 적용합니다(골 1:19; 2:9; 10). 비록 보이는 교회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충만한 능력으로 사탄과 세상과 죄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적용: 지금 당신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고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성령의 은혜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말씀은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옵니다.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갈지 밝히 알게 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 설 교 >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 1:15-19 / 이종철 목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
3절에서 14절에 이르는 긴 송영을 마치고 15절부터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처음을 먼저 바울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이나 사역을 했던 곳입니다. 바울의 선교 과정에서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바울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중심 교회로 우뚝 섰습니다. 바울이 없는 이때도 15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사랑도 풍성해서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지만 이 소식이 바울의 귀에 들려왔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자기가 뿌린 씨가 자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역의 보람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도들이 은혜 받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우러납니다. 16절입니다. “감사하기를 그치니 아니하고” 생각할 때마다 기쁜 것이지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수고가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거나 멀리서 도움을 주고 계신 분들은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에 제가 물질로 보답할 수는 없고,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사도 바울처럼 “내가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 심령 가운데 있습니다.
제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주로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직장에서 안정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되고 여러분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대부분 이 땅에서의 축복을 위한 기도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기도는 우리 기도와는 다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단순한 축복을 기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기도합니다. 초대교회는 물질적으로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날마다 생명과 안전의 위협을 받으며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땅위의 안전이나 축복을 위한 기도를 바울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것과 관련된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를 위해서 간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도도 달라져야 합니다. 물질적으로나 안전 면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기도는 압도적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합니다. 맨날 손 벌리고 “무엇을 달라”는 기도 말고 이제는 우리 기도가 “하나님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마음 중심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원에 대한 지식을 위한 기도 전에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길’(17) ‘너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길’(18) 기도합니다. 바울이 이런 기도를 먼저 드리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무능력에 대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에베소서의 말씀들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까?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셨고, 그 기업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까?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서 조금만 연구하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이성을 초월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습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문제고 우리의 미련함이나 치우침이 문제입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항상 우리 눈앞에 펼쳐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다른 데를 향하고 있으니 그 보배들을 도무지 담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말씀이 들어오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이 즐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세 가지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기를 원합니다.
부르심의 소망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4, 5절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통일케 하는 사역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9, 10절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소망’입니다. 소망한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요 희망입니다. 신앙인들은 향방 없는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그림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의 이미지입니다. 장차 망할 성인 ‘장망성’을 떠나 천국을 향하여 나갑니다. 미래를 향한 전진입니다. 이 땅은 지나가는 곳이기에 그들은 그 쾌락이나 탐욕에 매이지 않습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미 과거의 짐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지만 그 때문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가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짐은 가볍습니다.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는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동료입니다. 함께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고 때로는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라고 유명한 주석학자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 필립 헨리의 이야기입니다. 필립 헨리는 출신이 좋지 않았는데 신앙 안에서 좋은 가문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집안은 “이 사람 필립 헨리는 어느 출신이냐?”며 그 가문을 문제 삼아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때 이 신앙의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요. 그러나 제가 아는 확실한 사실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과거입니까 미래입니까?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둘수록 우리의 마음은 가볍고 세상은 건강해집니다. 세상의 희노애락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이상이 세상에 도전을 주고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 한국교회의 문제는 더 이상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매여서 세상과 함께 더러워져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의 안타까움도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기득권에 안주하여 미래를 계획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그림이 없습니다. 이념에 매여 집안에서 아옹다옹 싸우기만 하지 통일에 대한 비전도, 격전의 동북아에서 민족의 평화나 발전을 어떻게 구상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나 대책이 없습니다.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여 모두가 행복하면서도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려는 노력이 없습니다. 젊은 층들이 꿈과 열정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기보다는 노인들의 생각과 기득권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단순히 정권의 위기로만 보고 대통령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연연할 뿐이지 대한민국의 안전이나 정부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혁신이나 개조의 노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답답함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삽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현재의 어려움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 분명할수록 우리는 오늘 하루를 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
두 번째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알기를 기도하는 것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풍성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기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입니다. 분깃입니다. 히브리어로 ‘나할라’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기업 신앙’이라고 합니다. ‘기업’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각 지파별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업으로 받은 땅들은 비옥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을 방문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평야지대가 아니고 산악지형입니다. 강수량도 많지 않고, 돌멩이와 거친 광야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유머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느보 산이란 곳에서 가나안 땅을 볼 수 있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모세는 숨을 거두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사인이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모세가 쇼크를 받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했는데 돌멩이와 산지 투성이라 쇼크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지로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은 땅은 흠모할만한 곳이 아닙니다. 땅으로 치자면 애굽의 나일 삼각주나 메소포타미아 유역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옥하다 그렇지 않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이 땅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언약이 담겨 있기에 비록 거친 황무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소중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런 기업 신앙은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실제 세상의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이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8-9) 그런 점에서 오늘 팔레스틴 땅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 가자 지구를 콘크리트 장벽으로 고립시키고 무차별 맹폭을 퍼붓는 이스라엘의 만행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성서적 근거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과거의 것일 뿐입니다. 이제는 신성한 구속사가 아니라 흘러가버린 세속사의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중세기의 나라 없는 설움과 홀로코스트의 위기를 겪었던 그들의 아픔과 상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그들이 억압자가 되어 팔레스타인들을 홀로코스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힘으로 지키려는 평화는 일시적이고 불안합니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그들은 모색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정의를 세우는 것, 그것이 참다운 기업신앙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라는 막대한 유산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풍성한지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향한 관용과 용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의 막대함으로부터 나옵니다. 너무나 크고 좋은 것을 받았기에 작은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우리가 당당하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이유는 장차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된다는 약속으로부터 나오는 권위 때문입니다. 사장님의 아들은 지금은 비록 말단 사원일망정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거나, 자신 또한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는 장차 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비난받는 이유는 이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어질 영광의 풍성함은 보지 못하고 이 땅의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누리고 대접을 받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키기에만 연연합니다. 자리 하나 지키려고 온갖 거짓과 폭력과 어떠한 부끄러움도 무릅씁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하늘나라의 영광도, 그 풍성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능력의 지극히 크심
사도 바울이 세 번째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짧은 한 절에 ‘힘’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힘’은 ‘이스쿠스’입니다. ‘위력’은 ‘크라투스’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입니다. 이 두나미스가 지극히 크다는 말씀입니다. 19절과 20절의 ‘역사한다’는 단어도 ‘에네르게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의 ‘에너지’입니다. 힘과 관련된 모든 헬라어가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임한 능력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 힘의 능력이 빛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입니다. 20절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인류를 얽어매는 힘은 죽음의 권세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막강한 죽음의 권세는 그리스도에게서 파괴되었습니다. 이 힘의 능력이 장차 우리 또한 부활시킬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바로 이 강력한 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죽음을 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의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오른편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 이 모두는 어떤 초월적인 세력들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모든 존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주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운명이나 사주팔자나 어떤 악한 세력에 속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께 맡겨드리십시오.
그리스도의 주권은 먼 미래에만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21절 말씀대로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은 미칩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라는 찬송이 있지만 잘못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 가운데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 하지만 천당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이곳에서부터 천국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눈이 안 열렸다는 점입니다. 아직도 눈이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힘의 능력을 모르니 물질이 많으면 교만해지고, 없으면 비굴해집니다. 위력 앞에 비겁합니다. 누가 알아주면 홀랑 넘어가고, 알아주지 않으면 포기하고 맙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의 태도를 한 번 보십시오. 빌립보서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2-13)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얼마나 담대한 고백입니까?
그래서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코너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코너에 몰려 악에 바쳐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할 때 그 능력이 임합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이라는 것도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요, 그가 주님의 일을 자청했기에 주어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5천 명을 먹여야 하는 절박한 위기 가운데서 나옵니다. “주여, 주려 죽겠나이다.” 할 때 하늘의 양식이 쏟아집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강한 손을, 그 능력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5:16-18) 자연 현상도 인간의 기도를 통해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알고 행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아버지, 기도의 능력
엡 1:15-23 / 이윤재 목사
본격적인 가을입니다. 가을은 기도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시인 김현승이 “가을의 기도”에서 기도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오래 전에 한 남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주님, 저는 평생 주님을 섬기며 신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남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자주 하와이를 가서 휴가를 즐기고 싶사오니 한국에서부터 하와이까지 다리를 하나 놔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뭐?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 달라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자원낭비와 환경 파괴가 일어나겠느냐? 그러지 말고 다른 소원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제게 여자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무엇이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왜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여자의 기분은 왜 자꾸 바뀌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한참 침묵하시다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 주겠다.”
자, 우리는 에배소서를 통해 “넘치는 은혜”를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는 엡1:1-14절을 중심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살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피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 인치시고 보증하시고 힘과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사도 바울은 이제 주제를 바꿉니다. 16절입니다. 엡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에배소 교인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말한 다음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말씀한 다음 기도를 말할까요? 그것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자, 도표를 보시겠습니까? 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입니다.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있습니다. 두 사이를 잇는 다리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과 교회에 다가오십니까? 그 통로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시켜 줍니까?
영광의 아버지
바울은 에배소 교인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7절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이 기도를 말하면서 강조한 것은 누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떻게 기도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주기도의 첫 마디가 이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냐가 먼저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항상 “아버지”란 말을 쓰셨습니다. 마11:2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요11:41,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눅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신약성경에 “아버지”란 단어가 130번이나 나옵니다.
문제는 어떤 아버지이냐입니다. 다시 17절로 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인간의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나름대로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없어서 못주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있어도 충분히 못주는 아버지들도 있고, 술먹고 방탕한 아버지, 자식들을 구타하고 가정을 깨는 아버지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광의 아버지”. 아멘. 가난한 아버지가 아니라 “부요한 아버지”, 부정한 아버지가 아니라 “의로운 아버지”, 힘없는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통치하는 “힘있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할 때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합니까? 우리가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겸손한 기도와 작은 기도는 다릅니다.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앞에 몸을 낮춰 엎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하소연한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주여, 주의 나라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17세기 어떤 어부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 잘 잡게 하시고 마지막날에 주님앞에 섰을 때 쓸모없는 물고기라 버림받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것이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작은 기도도 있습니다. 작은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바쁘신데 내가 귀찮게 하면 안돼. 하나님같이 바쁜 분을 나같이 작은 문제로 귀찮게 해서야 되겠나?, 주여,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게 도와주세요. 주여, 그저 삼시 세끼 잘 먹게 도와주세요. 주여, 제 아들이 직장에서 제발 짤리지 않게 해주세요. 주여, 요즘 비가 많이 오는 데 제 고추밭에는 비가 조금만 내리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비유하자면 세계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 부러진 다리에 밴드 하나 붙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밴드 붙이는 것은 세계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못고치는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찾아가 밴드 하나 붙여달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엡3:20절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하나님은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큰 기도가 교만한 기도가 아니고 작은 기도가 겸손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1장8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항상 먼저 말씀했습니다. 창18:7,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예수님도 자신을 제자들의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요15:15, “너희는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슴이라”.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친구라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외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가까이 계시고 예수님이 우리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밀할 뿐이지 종류가 다릅니다. 친밀하다고 해서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저희 딸은 미국애서 고양이 한 마리와 사는 데 외롭고 심심할 때마다 큰 위로가 된답니다. 그렇다고 딸이 고양이와 같은 종류입니까? 친하지만 종류가 다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기도중 친밀하게 만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격이 다르고 종류가 다릅니다. 높으신 분이 자신의 키를 낮추시고 강하신 분이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우리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작은 심부름이나 하는 종이 아닙니다. 웬디 라이트라는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진짜 친구인줄 알고 착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우리가 부탁한 것을 신속하게 들어주는 119비상 구조원정도로 오해할 수 있다. 물론 고장난 데를 고치고 상한 데를 치료하는 것도 영적인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문제나 치다꺼리는 중고품 센터 사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급한 문제나 처리해주는 119 수리센터 사장도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잡스러운 소원이나 들어주는 심부름꾼이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약1:17, “변함도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보좌에 앉아 역사와 세상을 통치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시편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시33:15, “그는 모든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8세기 인도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은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열방을 유업으로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열방은 all nations, 모든 나라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엡3:20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넘치는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 누군지 말한 다음 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17절 뒷 부분입니다.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다같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기도의 목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로서의 기도와 인격적 교제로서의 기도입니다. 문제 해결은 필요를 주는 것이고 교제는 사귐을 위한 것입니다, 우선 문제 해결은 기도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는다고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기도가 만능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만능입니다.
그러나 문제해결이 유일한 기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17절, “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도의 긍극적 목적입니다. 문제 해결은 기도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면 문제 해결받습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목적이고 문제 해결은 선물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의 왕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왕은 세 왕비를 불렀습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이 멀지 않소. 내가 그대들에게 한 가지씩 주고 싶으니 소원을 말하시오”. 첫 번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름다운 왕궁을 주옵소서”. 왕이 말했습니다. "알았소“. 두 번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십시오. 예전에 왕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알았소. 약속대로 하겠소“. 마지막 왕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시오“. 셋째 왕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오로지 왕과 함께 있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왕이 죽자 왕은 모든 것을 셋째 왕비에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안 안 쳐다보고 하나님의 손만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자신은 안중에 없는 채 하나님의 선물만 목매달아서는 안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크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도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어머니를 붙잡으면 자식들도 소유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17절 보세요.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정신”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가능하게 한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지혜와 계시”입니다. 지혜는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쪽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동시에 두 가지를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에게는 계시를 보이게 하시고, 우리의 귀는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은 마음을 열어 자신의 신비한 계획과 뜻을 알게 하시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게 합니다. 성령님은 기도의 중매장이요, 연결자요, 동시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성령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합니까? 세 가지를 알게 합니다. 18절에 두 개, 19절에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 18절,절 뒷 부분입니다. 엡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절,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 가지를 알게 합니다. 첫째 부르심의 소망, 둘째 기업의 풍성함, 셋째 능력의 심히 큼.
먼저 기도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을 알게 됩니다.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선을 이루려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 그냥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괜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번 부르시면 끝까지 책임집니다.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부르지 않았습니다.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부른 후에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하라” 하지 않습니다. 최종적 구원인 “영화”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불렀으면 의롭게 되고 의롭게 되었으면 영화롭게 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효한 부름”이라고 합니다. 기도할수록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 두 번째는 기업입니다. 18절 뒷 부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이것을 알게 됩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참 많구나”. 이것이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몸이 기업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기업입니다. 우리 직장, 일터가 기업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이 기업입니다. 자녀가 기업입니다. 온갖 자연과 땅과 우주와 거기 있는 모든 것이 기업입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살아서만 선물받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받은 선물은 더 큽니다. 기도는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Prayer opens the way for God to do His work in and through me).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 한복판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아멘.
지극히 큰 능력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절, 엡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능력의 크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단순히 큰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큰 것입니다. 이 말은 “훨씬 능가하는”. “비교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당연히 우리 문제가 커보입니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문제가 작어지더니 더 기도하면 이제는 하나님이 커보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보게 됩니다.
메뚜기에 관한 놀라운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작은 곤충은 잘 날지는 못하지만 자기 키의 200배 높이까지 점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하느냐? 아무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나무 가지가 움직이면 메뚜기는 안답니다. “아, 지금이 점프할 시간이다”. 그래서 팔짝 뛰어서 바람에 자기를 맡기면 아주 멀리 까지 납니다. 기도는 성령의 바람에 나를 맡겨 멀리 하나님 가까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 점프할 수 없습니다. 메뚜기가 할 일은 바람부는 타이밍을 잡고 그것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듯이 우리가 할 일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불 때를 그것을 민감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둬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때 우리 몸을 맡기면 됩니다. 메뚜기도 자기 몸의 200배까지 점프하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 점프를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바람이 불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엡3:0절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넘치는 은혜, 지극히 큰 능력, 이것이 에배소서의 주제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우리 개인이나 교회나 역사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에 가장 힘이 있었을 때는 역시 기도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지쳐있을 때는 역시 기도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더 사랑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기적이 42번 나오는 데 기도로 인해 일어난 기적 90%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낫게 하시지만 아픈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레드랜드스 대학에서 5년간 실험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아픈 사람 45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습니다. 첫째 그룹은 심리요법으로 치료했습니다. 둘째 그룹은 믿음과 상관없이 치료했습니다. 셋째 그룹은 기도해서 치료했습니다. 그 45명은 서로 모르며 연락도 안했습니다. 9개월 후에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습니다. 심리치료받은 사람은 65%가 개선되었습니다. 무신론적 방법은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72%가 개선되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입증된 과학적 실험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히 큽니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더 빨리 부흥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가 1872년 영국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열흘 동안 무려 400명이 구원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는가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 선천적 장애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마리안 아들라르드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병상에서 매일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는 예배에 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부흥을 주시옵소서.” 하면서 그 동네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답니다. 그 기도로 말미암아 그 교회는 크게 부흥했던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번에 제가 부흥회하는 데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미션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목사님 몸이 무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이런 중보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지고 부흥되는 줄 믿습 니다.
기도를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1980년,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라는 목사가 차별받고 있는 동족들을 보살피겠다고 루마니아의 작은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는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마다 예배당에 교인들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부임 당시 40명에 불과하던 교인 수가 무려 5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공산당 정보 요원들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여러 차례 폭력을 행사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공산당이 토케스 목사를 끌어내겠다며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택을 에워싸고 인간 보호벽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얼마뒤 철권 통치 루마니아 공산주의는 망하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로지 기도밖에 하지 않았는 데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독일 라이프니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 1990년, 독일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뿐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일은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믿음의 출발점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도 말했습니다. “기도해도 우연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이나 역사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기도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큽니다. 다시 19절, 엡1:19,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믿는 사람이어야 이런 능력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만 이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가을에 기도하겠습니까? 가을에는 더 사랑하기 위해 더 기도하겠습니까? 가을에는 더 큰 능력을 사모하여 더 기도하겠습니까?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엄청만 기업을 주신 것을 기억합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본격적인 가을입니다. 가을은 기도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시인 김현승이 “가을의 기도”에서 기도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오래 전에 한 남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주님, 저는 평생 주님을 섬기며 신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남자가 말했습니다. "제가 자주 하와이를 가서 휴가를 즐기고 싶사오니 한국에서부터 하와이까지 다리를 하나 놔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뭐?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 달라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자원낭비와 환경 파괴가 일어나겠느냐? 그러지 말고 다른 소원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제게 여자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무엇이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왜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여자의 기분은 왜 자꾸 바뀌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한참 침묵하시다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하와이까지 다리를 놔 주겠다.”
자, 우리는 에배소서를 통해 “넘치는 은혜”를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는 엡1:1-14절을 중심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살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피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 인치시고 보증하시고 힘과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사도 바울은 이제 주제를 바꿉니다. 16절입니다. 엡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에배소 교인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말한 다음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말씀한 다음 기도를 말할까요? 그것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자, 도표를 보시겠습니까? 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입니다.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있습니다. 두 사이를 잇는 다리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과 교회에 다가오십니까? 그 통로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기도
인간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시켜 줍니까?
영광의 아버지
바울은 에배소 교인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7절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이 기도를 말하면서 강조한 것은 누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떻게 기도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주기도의 첫 마디가 이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냐가 먼저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항상 “아버지”란 말을 쓰셨습니다. 마11:2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요11:41,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눅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신약성경에 “아버지”란 단어가 130번이나 나옵니다.
문제는 어떤 아버지이냐입니다. 다시 17절로 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인간의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나름대로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없어서 못주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있어도 충분히 못주는 아버지들도 있고, 술먹고 방탕한 아버지, 자식들을 구타하고 가정을 깨는 아버지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광의 아버지”. 아멘. 가난한 아버지가 아니라 “부요한 아버지”, 부정한 아버지가 아니라 “의로운 아버지”, 힘없는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통치하는 “힘있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할 때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합니까? 우리가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겸손한 기도와 작은 기도는 다릅니다.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앞에 몸을 낮춰 엎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하소연한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주여, 주의 나라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17세기 어떤 어부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 잘 잡게 하시고 마지막날에 주님앞에 섰을 때 쓸모없는 물고기라 버림받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것이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작은 기도도 있습니다. 작은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바쁘신데 내가 귀찮게 하면 안돼. 하나님같이 바쁜 분을 나같이 작은 문제로 귀찮게 해서야 되겠나?, 주여,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게 도와주세요. 주여, 그저 삼시 세끼 잘 먹게 도와주세요. 주여, 제 아들이 직장에서 제발 짤리지 않게 해주세요. 주여, 요즘 비가 많이 오는 데 제 고추밭에는 비가 조금만 내리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비유하자면 세계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 부러진 다리에 밴드 하나 붙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밴드 붙이는 것은 세계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못고치는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찾아가 밴드 하나 붙여달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엡3:20절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하나님은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큰 기도가 교만한 기도가 아니고 작은 기도가 겸손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1장8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항상 먼저 말씀했습니다. 창18:7,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예수님도 자신을 제자들의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요15:15, “너희는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슴이라”.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친구라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외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가까이 계시고 예수님이 우리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밀할 뿐이지 종류가 다릅니다. 친밀하다고 해서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저희 딸은 미국애서 고양이 한 마리와 사는 데 외롭고 심심할 때마다 큰 위로가 된답니다. 그렇다고 딸이 고양이와 같은 종류입니까? 친하지만 종류가 다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기도중 친밀하게 만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격이 다르고 종류가 다릅니다. 높으신 분이 자신의 키를 낮추시고 강하신 분이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우리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작은 심부름이나 하는 종이 아닙니다. 웬디 라이트라는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진짜 친구인줄 알고 착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우리가 부탁한 것을 신속하게 들어주는 119비상 구조원정도로 오해할 수 있다. 물론 고장난 데를 고치고 상한 데를 치료하는 것도 영적인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문제나 치다꺼리는 중고품 센터 사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급한 문제나 처리해주는 119 수리센터 사장도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잡스러운 소원이나 들어주는 심부름꾼이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약1:17, “변함도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보좌에 앉아 역사와 세상을 통치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시편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시33:15, “그는 모든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8세기 인도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은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열방을 유업으로 네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열방은 all nations, 모든 나라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엡3:20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넘치는 영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 누군지 말한 다음 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17절 뒷 부분입니다.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다같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기도의 목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로서의 기도와 인격적 교제로서의 기도입니다. 문제 해결은 필요를 주는 것이고 교제는 사귐을 위한 것입니다, 우선 문제 해결은 기도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는다고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기도가 만능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만능입니다.
그러나 문제해결이 유일한 기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17절, “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도의 긍극적 목적입니다. 문제 해결은 기도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면 문제 해결받습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목적이고 문제 해결은 선물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의 왕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왕은 세 왕비를 불렀습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이 멀지 않소. 내가 그대들에게 한 가지씩 주고 싶으니 소원을 말하시오”. 첫 번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름다운 왕궁을 주옵소서”. 왕이 말했습니다. "알았소“. 두 번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십시오. 예전에 왕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알았소. 약속대로 하겠소“. 마지막 왕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시오“. 셋째 왕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오로지 왕과 함께 있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왕이 죽자 왕은 모든 것을 셋째 왕비에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안 안 쳐다보고 하나님의 손만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자신은 안중에 없는 채 하나님의 선물만 목매달아서는 안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크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도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어머니를 붙잡으면 자식들도 소유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17절 보세요.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정신”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가능하게 한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지혜와 계시”입니다. 지혜는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쪽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동시에 두 가지를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에게는 계시를 보이게 하시고, 우리의 귀는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은 마음을 열어 자신의 신비한 계획과 뜻을 알게 하시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게 합니다. 성령님은 기도의 중매장이요, 연결자요, 동시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성령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합니까? 세 가지를 알게 합니다. 18절에 두 개, 19절에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 18절,절 뒷 부분입니다. 엡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절,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 가지를 알게 합니다. 첫째 부르심의 소망, 둘째 기업의 풍성함, 셋째 능력의 심히 큼.
먼저 기도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을 알게 됩니다.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선을 이루려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 그냥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괜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번 부르시면 끝까지 책임집니다.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부르지 않았습니다.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부른 후에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하라” 하지 않습니다. 최종적 구원인 “영화”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불렀으면 의롭게 되고 의롭게 되었으면 영화롭게 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효한 부름”이라고 합니다. 기도할수록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 두 번째는 기업입니다. 18절 뒷 부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이것을 알게 됩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참 많구나”. 이것이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몸이 기업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기업입니다. 우리 직장, 일터가 기업입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이 기업입니다. 자녀가 기업입니다. 온갖 자연과 땅과 우주와 거기 있는 모든 것이 기업입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살아서만 선물받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받은 선물은 더 큽니다. 기도는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Prayer opens the way for God to do His work in and through me).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 한복판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아멘.
지극히 큰 능력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절, 엡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능력의 크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단순히 큰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큰 것입니다. 이 말은 “훨씬 능가하는”. “비교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당연히 우리 문제가 커보입니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문제가 작어지더니 더 기도하면 이제는 하나님이 커보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보게 됩니다.
메뚜기에 관한 놀라운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작은 곤충은 잘 날지는 못하지만 자기 키의 200배 높이까지 점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하느냐? 아무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나무 가지가 움직이면 메뚜기는 안답니다. “아, 지금이 점프할 시간이다”. 그래서 팔짝 뛰어서 바람에 자기를 맡기면 아주 멀리 까지 납니다. 기도는 성령의 바람에 나를 맡겨 멀리 하나님 가까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 점프할 수 없습니다. 메뚜기가 할 일은 바람부는 타이밍을 잡고 그것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듯이 우리가 할 일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불 때를 그것을 민감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시선을 둬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때 우리 몸을 맡기면 됩니다. 메뚜기도 자기 몸의 200배까지 점프하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 점프를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바람이 불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엡3:0절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모든 이에게”. 다같이 “넘치도록”. 넘치는 은혜, 지극히 큰 능력, 이것이 에배소서의 주제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우리 개인이나 교회나 역사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에 가장 힘이 있었을 때는 역시 기도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지쳐있을 때는 역시 기도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더 사랑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기적이 42번 나오는 데 기도로 인해 일어난 기적 90%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낫게 하시지만 아픈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레드랜드스 대학에서 5년간 실험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아픈 사람 45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법으로 치료했습니다. 첫째 그룹은 심리요법으로 치료했습니다. 둘째 그룹은 믿음과 상관없이 치료했습니다. 셋째 그룹은 기도해서 치료했습니다. 그 45명은 서로 모르며 연락도 안했습니다. 9개월 후에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습니다. 심리치료받은 사람은 65%가 개선되었습니다. 무신론적 방법은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72%가 개선되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입증된 과학적 실험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히 큽니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더 빨리 부흥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가 1872년 영국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열흘 동안 무려 400명이 구원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는가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 선천적 장애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마리안 아들라르드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병상에서 매일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는 예배에 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부흥을 주시옵소서.” 하면서 그 동네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답니다. 그 기도로 말미암아 그 교회는 크게 부흥했던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교회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번에 제가 부흥회하는 데도 제게 문자를 보낸 분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미션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목사님 몸이 무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이런 중보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지고 부흥되는 줄 믿습 니다.
기도를 통해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1980년,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라는 목사가 차별받고 있는 동족들을 보살피겠다고 루마니아의 작은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는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마다 예배당에 교인들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부임 당시 40명에 불과하던 교인 수가 무려 5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공산당 정보 요원들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여러 차례 폭력을 행사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공산당이 토케스 목사를 끌어내겠다며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택을 에워싸고 인간 보호벽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얼마뒤 철권 통치 루마니아 공산주의는 망하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로지 기도밖에 하지 않았는 데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독일 라이프니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 1990년, 독일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뿐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일은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믿음의 출발점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도 말했습니다. “기도해도 우연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개인이나 교회나 민족이나 역사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기도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큽니다. 다시 19절, 엡1:19,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믿는 사람이어야 이런 능력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만 이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가을에 기도하겠습니까? 가을에는 더 사랑하기 위해 더 기도하겠습니까? 가을에는 더 큰 능력을 사모하여 더 기도하겠습니까?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엄청만 기업을 주신 것을 기억합시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더욱 알게 하소서
에베소서 1:15-19 / 배 혁 목사
한 달 전쯤에 저는 우리 교회 몇분의 남자분들과 함께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 관리를 스스로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하였고, 몇 분은 본인들이 직접 오일체인지를 하고, 브레이크 패드를 간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았을까 궁금해서 여쭈어 보니, 공통된 점이 ‘유투브’를 찾아 보아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유투부가 인기있는 것은 그곳에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 검색어를 넣기만 하면, 관련된 영상이 뜨고 자신이 알고자 원하는 것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투브를 '유튜브 선생님'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삶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알고자 열심을 냅니다. 어릴 때에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부모님께 귀찮을 정도로 물으면서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배워 갑니다. 그리고 좀 크면 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적인 지식을 배웁니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배움의 길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에 들어가 직장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배웁니다. 그리고 각종 매체를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배우기에 힘써야 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에 그것은 영적인 세계의 입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을 육신의 눈과 감각으로 바라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영적인 세계가 있음 알고, 영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세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영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관심도 그것이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때에 3년을 머물면서 사역했던 곳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쓴 편지인데, 이 편지를 쓸때에 에베소교인들로 인해서 감사할 내용이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좋은 소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멀리서 에베소교회에 대한 소문이 참 좋았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수고했던 교회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성도들도 사랑안에 잘 있다고 하니 그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하늘을 향해서는 주를 믿은 믿음이 있었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생활을 할 때에 더욱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더 알기에 힘써야 할 지를 깨닫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며 믿음생활하는 지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먼저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더 알기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교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가르쳤으니,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앎,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 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는 ‘앎, 지식’이라는 뜻의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위에’라는 뜻의 ‘에피’와 ‘알다’라는 뜻의 명사인 ‘그노시스’의 복합어 입니다. 곧 하늘로부터 오는 앎을 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주 듣게 되니까 그 이름이 친숙해져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을 잘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해 4월달에, 블랙홀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블랙홀을 관측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우주에 대해서 대단한 뭔가를 알게 된 것처럼 경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블랙 홀을 비롯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기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조금 더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계시해 주셨을 때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제한시키고 부분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어떤 것을 아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너무 멀리있는 것도 잘 알지 못하고, 작은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을 통해서 봐야 하고, 멀리있는 것은 커다란 망원경을 도구로 해서 보아야 합니다. 현미경이 있기 전에는 너무 작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망원경이 있기 전에는 너무 멀어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그 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어서, 우리로 영적인 감각을 깨워주셔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잘 알수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듣고 알아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너무 사모하는 바람에,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가 받게 될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야곱은 복된 일이 아니라, 아주 저주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형 에서가 분하게 여겨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는 이렇게 두었다가는 야곱이 죽게 생겼으니, 외삼촌에게로 야곱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리고 밤에 들판에서 자게 됩니다. 천막도 없었고 들판에서 자는 것이 불편합니다. 더우기 들짐승들의 공격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밖에서 야영을 하는 야곱은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밤에 잠이 들었고, 이내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해주셔서, 다시 평안가운데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자신을 보호해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욥같은 경우도 그랬습니다. 욥기 42:5-6절에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지적으로 아는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하늘부터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더욱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성경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들음으로 아는 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서,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더욱 드러내시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서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을 구하며, 그분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간구해야 합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친구가 부릅니다. 그런데 왜 부르냐고 했더니, “그냥 불러봤어…” 라고 아무 이유없이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부른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심심해서라든지, 아니면 장난 삼아서 부르던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언제 알 수가 있습니까? 18절에는 “마음의 눈을 밝혀 앞으로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왜 사는지 그 존재의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삽니다. 어떤 이들은 잘못 알고 엉뚱하게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적인 출세와 성공에는 눈이 아주 잘 떠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우리의 소망을 이루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도 육신의 눈에 소욕에 따라 살아가는데 익숙했습니다. 에베소 지역이 그랬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중요한 도시였고, 무역 도싱였습니다. 아데미신전도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매일 보는 것이 세상적인 풍요함이었습니다. 육신적인 눈, 욕심의 눈이 밝아져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편함과 쾌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경험한 바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려고 갈 때에 길에서 하늘에서 강한 빛을 보았을 때에 그의 눈은 멀었습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해서 마음의 눈을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으로 하여금,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의 사도로 세워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에 소망가운데서 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20절에,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우리가 살아갈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 천직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일제치하 때 의사가 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께 이런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의대에 입학을 했고, 졸업 후에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 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84세되는, 성탄절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부르신 소망임을 알고 평생을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관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있는 이곳이 우연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지금 현재의 자리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가정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셔서 우리를 부르셔서 가정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교회로, 직장으로, 이 사회로 보내신 것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왜 불러주셨는지를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임을 깨닫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게 되고, 결국 우리가 하는 일들이 사람의 욕망을 이루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일, 천직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고, 믿음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에는 우리의 생각과 지혜가 너무나 협소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 때에 내 생각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내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성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삶속에서도 역사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살아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라고 믿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되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세상의 어떠한 지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풍성하시기를 원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소망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받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의 기도제목
엡 1:15-23 / 김용국 목사
여러분!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뭘까요?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 보시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한 교회가 될 때에 세상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모든 교회들이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도록 해야 하며,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합니다.
1930년대 초기에 미국이 경제대공황 상태가 되었을 때에 시카고에 있는 어느 흑인 교회에 초청되어 가서 설교했던 클레어린스 목사님이 그날 그 교회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큰 격려를 받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공장 지대였기 때문에 공장들이 가동을 못하니까 많은 실직자들과 극빈자들이 모이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교인 전체의 60% 정도가 실업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찬송만큼은 늘 활기차고 기쁨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클레어린스 목사님이 너무 감격해서 설교를 하시다가 잠간 멈추고 성도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경제 대공황상태인데 여러분은 무엇이 그렇게도 기쁩니까?” 그 때 한 여 성도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비록 가난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충만하게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살아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성도들이 많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주장하고 사람들이 높임을 받는 교회는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평온교회도 믿음과 사랑을 겸비한 교회,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항상 뜨겁게 기도해주는 교회, 무엇보다도 마음이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소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뭔가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꿈이 되고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목회자가 교회를 위해서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니까 다 다른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교회 문을 들어서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패잔병처럼 어깨가 축 늘어져서 교회 문을 들어서는 성도들도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성도들은 사탄에게 이단 옆차기로 얻어맞았는지... 아예 늑골이 부러지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절뚝거리면서 들어오는 성도들도 있고... 이렇게 성도들의 모습이 다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강단에서 성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낼 때 그냥 아무렇게나 보내면 안 되는 가장 분명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오늘날 목회자들의 기도여야 하고... 또 우리 성도들도 함께 합심해서 기도함으로써 응답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으로 잘 양육해서 세우고 섬긴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바울이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부으면서 목회했던 교회를 그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 되었지만 복음은 절대로 매이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그 어떤 것들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스커드 미사일보다 더 정확해서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아주 훌륭한 무기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10년 전에 세운 교회로서 선교의 가장 절정기에 모든 정열을 다 쏟아부었던 곳입니다. 53년 경에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첫 번째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19 이하에 보면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이 사도행전 19:1 이하에 보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바울이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육시켰습니다. 마치 생고구마와 같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복음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2년 동안 푹 삶아서 잘 익은 고구마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정열과 사랑을 쏟아 부었겠습니까? 그만큼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크고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2년 동안 한 영혼 한 영혼을 붙들고 시름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양육했던 바로 그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지금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담아서 기도하는 내용을 편지로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9:9-10에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권면하되 10 두 해 동안 이 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였습니다. 한 10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생이 감옥 안에서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10년 전에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결코 잊어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감옥 안에서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없이는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가 없이는 영적인 싸움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인 동시에 우리 평온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제목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함께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에 단단히 결심해야 맞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면서 모든 성도가 같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먼저, 바울은 ‘하나님을 더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구하고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명예를 구하고 있는 기도도 아닙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해달라.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어떻게 다릅니까? 그냥 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16살 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습니다. 청년의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 등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1654년 11월 23일 밤에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서 그 유명한 「팡세」라고 하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날 파스칼은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이니라.』라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 즉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법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욥기 42:5에 보시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또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치료를 받아 본 사람들이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려 본 사람들이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신앙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니다.
원래 하나님은 영으로 계셔서 우리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육신 즉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찾아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요 1:18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과 사역들이 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4:7에도 보시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 17:3에 보시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 고난도 나에게 유익이 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통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라고 기도했습니다.
쥐를 독 안에다가 넣고 뚜껑을 닫은 후에 빛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때는 쥐가 3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서 빛이 들어가게 했을 때는 약 36시간을 살았다고 합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또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18절에 보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고 했습니다. 물건들마다 다 만들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또 쓰여지는 용도가 다 있습니다.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실 때 아무 목적도 없이 교회를 세우셨겠습니까? 그런 경우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뭔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알고 거기에 맞는 목표를 가지고 살면 꿈이 생깁니다. 그리고 꿈이 있는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헤매이지 않습니다.
개인이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교회나 국가가 되었든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르심의 소망을 우리는 비전이라고 말을 합니다. 비전을 가진 개인, 비전을 가진 가정, 비전을 가진 교회는 내가 가진 비전만큼만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태해질까요? 우리가 왜 안주를 합니까? 우리의 삶이 왜 흔들리게 됩니까? 그 이유는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고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여러 개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사장에게 아주 똑똑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너무 탁월해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입사해서 첫 연봉으로 10만 불을 받았고 다음 해에는 50만 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그만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이 가진 소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성경에서는「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게 떠져야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분명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소망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로마서에 보면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5:3 이하에 보시면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려고 환난을 통해서 그 소망을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순수해져야 합니다. 더 단순화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평온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목적이 뭘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감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보십시오. 다 가난하고 능력도 없고 특별히 뛰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 같이 별 볼일 없는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을 품고 기도를 하니까 세상을 바꾸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부르심에 대한 소명의식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이곳에 우리 교회를 예수님의 핏 값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달라”라고 정말로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소경인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더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 119:18에 보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119:130에서도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 타국에서 고생고생하다가 배를 타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일했지만 가진 게 없어서 자신의 돈을 다 털어서 배를 탔습니다. 이제 한 푼의 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착하는 데까지 보름 이상 배를 타야 했습니다. 그 배에는 일등 식당이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사흘을 굶었습니다. 굶는 것도 고비가 있고 한계도 있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름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결국에는 굶어서 죽을 것이다. 그러면 굶어서 죽으나 맞아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일단 실컷 먹어나 보고 죽자." 하면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식당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시켜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었다. 생각하고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웨이터가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이 내신 배 값에 이미 음식 값도 다 계산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하고 또 자신에게 화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성도인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거렁뱅이로 살아갑니다. 믿음의 부요함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깨닫게 해달라고 바울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이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계적인 부자 록펠러가 한때 위장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 년 반 동안 우유와 크랙커만 먹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몸이 아프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겨우 우유와 크랙커로 삶을 연명한다면 그것은 부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되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해달라.’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군들처럼 자신들을 메뚜기 같은 연약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민 14:9)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고백은 인간적인 만용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난관에 부딪히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성경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쥐어주시고 원수를 우리의 발밑에 복종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악한 세상을 그것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제목들을 다 묶어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자의 충만함이니라.”라고 고백합니다. 그 충만함을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 항상 소망이 넘쳐나고, 풍성함을 누리게 되며,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드림으로써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에 더욱 더 넘치도록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앞으로만 전진해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
엡 1:15 / 김양인 목사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있었던 도시인데. 이 도시에 세워진 이방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 세계가 그러했듯이, 에베소 역시 우상숭배가 심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도시에도 무명의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아굴라라는 성경학자가 에베소 교회에서 잠시 머물면서 가르친 적이 있었고, 1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2년 동안 날마다 성경을 강론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로마 선교의 꿈을 품고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유대인들의 고소를 당해 옥에 갇혔으며, 그가 로마 시민이므로 로마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 로마 군대의 호송 하에 로마로 이송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의 심장부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유인이 아니라 옥중에 갇힌 죄수의 신분으로서 옥을 지키는 로마 시위대 군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주후 62년 즈음에 쓴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하여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편지의 서두에서 사도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섭리를 찬송하고 나서, 곧 이어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그의 관심을 언급했습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 역시 사도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다른 믿음의 형제들을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의무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기도로써 주 안에서 교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하나님께 구했는지, 그 내용을 살펴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그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달리 말하면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도 탁월한 지혜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은 지혜를 숭상하는 사람들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철인들의 지혜는 지금 들어도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중국의 노자나 공자와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 속에는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우리에게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석가의 가르침 역시 큰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가르침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학문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 지혜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장 19절에 이르기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 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무지한 백성들이 아니라 유대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온 백성을 대신하여 성전에서 제사의 직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장로들 역시 온 백성을 대표합니다. 서기관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자구 하나까지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통달했다고 자부했으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불상사가 생겨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를 거부한 것 역시 세상 지혜로써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눈으로 세상의 사물을 볼 수 없지만, 만약에 개안 수술을 통해서 시력을 회복한다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밝히 보고서 비로소 세상의 참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허망한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들이 영적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불신 이웃에게 전도할 때에도 우리의 말만 가지고는 성과를 거둘 수 없고, 반드시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셔야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오는 은혜로운 결과가 생겨납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믿는데 인간 편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실 때 교만을 버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복음을 들을 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받고 가책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해 주면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감화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 편에서 반응할 때입니다. 죄를 지적 받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다면 겸비해져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도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위해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기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매일 매일 그 날의 양식을 거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어제 거두어 보관해둔 만나를 먹으려고 하니 썩어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어제 받은 은혜는 어제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오늘은 또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어제까지 믿음으로 살았으나 오늘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심령이 곤비해지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믿음생활 잘 한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했습니다.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단 한번만 충만하게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같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마음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왜 성도들의 마음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을까요? 눈은 사물을 보고 분간하는 역할을 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앞을 분간하지 못해서 자칫하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눈의 중요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2)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요 23)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 6:)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육신의 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눈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눈이 밝아야 영적인 것을 올바로 분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자연인의 본성이 죄에 감염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로마서 1장에 영적 소경된 인간들의 실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혹 이는 저희로 핑계치 못하게 하심이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에베소서 4장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실상에 대하여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며,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며,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다’(17-19, 22)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마음눈이 어두운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이처럼 악인이 교만히 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의 마음눈이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빛이 환히 비추는데도 눈이 먼 사람은 빛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마음눈이 밝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도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며, 그 양심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할 때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성령의 감화를 순종하면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지만, 고의적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성령의 감화를 거부하면 또 한 번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셔서 그런 사람들에게도 다시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지만, 불행하게도 끝까지 거부하다가 결국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마음눈이 밝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도 마음눈이 밝아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항상 밝아야지 실족하지 않듯이, 우리 마음눈도 언제나 밝은 상태여야 푯대를 향해 바른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눈이 밝아져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은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소망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취직을 하려는 것도 소망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무 소망도 없이 우리를 부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 같은 소망을 제시하셨습니다.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
사랑하는 성도님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싶거든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위대한 소망을 보증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히실 때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갖고 있는데, 로마서 8장 17절에 이르기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후사란 상속인을 의미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부요를 상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많은 부동산을 상속 받거나 사업을 물려받거나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 사람을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지상의 부동산이나 기업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과 부귀가 다 성도들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이며,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입니다(딤후 2:12).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며 예배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과 22장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읽어 보시고 장치 누릴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를 알게 하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극히 크신 능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세우셨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더욱이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성도들이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와 몸과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듯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신 구절은 교회로 말미암아 만물이 충만해진다는 것이니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에게 이 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약점이 있고 결핍이 있지만 그렇더라도 교회의 본질은 약하지 않고 결핍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무결한 영적 교회인 천상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지상의 성도들도 인간적인 약점과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주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어나갑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의 인품이 고상해지고, 우리의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점점 더 겸손해지고, 점점 더 지혜로워지고, 점점 더 온유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극히 크신 능력을 힘입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벌써 2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세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복잡해져서 우리를 분주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주의와 관심을 끄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유럽인들은 선조들이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인간본위의 생활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 출석을 하지 않으니 거대한 예배당 건물들이 매각되어 창고가 되고 술 창고가 되고 춤추는 장소가 되고 심지어 이슬람 사원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을 신앙과 윤리의 기준으로 삼았던 미국에서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였고, 동성결혼을 한 목회자가 버젓이 활동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배교와 타락의 풍조가 벌써 우리 눈앞에까지 밀어닥쳤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모두 기독교에 반기를 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졸며 잘지라도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빌어준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주 안에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한 성도들이 상속받게 될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믿음의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배도의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고 처처에 전쟁과 난리 소문이 들려오고,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재난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말세가 가까움을 말해 줍니다. 이런 때일수록 영적으로 깨어나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서로 믿음을 격려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와 교회의 지체된 성도로서의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 1:15-22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이 말씀은 육체의 눈이 보는 바에 따라 마음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 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 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육체의 눈과 마음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눈은 너희 몸의 창문이다. 네가 경이와 믿음으로 눈을 크게 뜨면 네 몸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네가 탐욕과 불신으로 곁눈질하고 살면, 네 몸은 음습한 지하실이 된다. 네 창에 블라인드를 치면, 네 삶은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성한 눈’, 즉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진리에 집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 양다리를 걸치고 산다는 뜻입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세상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을 동시에 소유한 자를 가리키는데, 사실 “하나님”과 “세상”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눈이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눈이 나쁘게’ 되면 ‘온 몸이 어두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세상 재물에 현혹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 몸’, 즉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치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소경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영적 소경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바리새인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16-26)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겉으로는 거룩한 성전을 사랑하고, 가장 잘 율법을 지키며, 가장 깨끗하다고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랄한 책망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로 자신들이 소경된 것 조차 모를 뿐만 아니라, ‘눈 먼 인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밝은 데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눈 먼 인도자’, 바리새인들을 따라 가면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이 성한 눈이 되어 온 몸, 즉 여러분의 인격과 영혼에 빛으로 충만하여 항상 밝은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이 밝히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혀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혈육’, 다시 말해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등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그 분의 말씀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1) 이처럼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자’ 하는 목적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성경 에베소서1:3-6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신령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하시고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비스럽고 신령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머리나 지혜로 도저히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신령한 것입니다. 오직 신령하신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혀지지 아니하면 깨달을 수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성도 여러분은 범사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바” 즉 아무런 대가 없이 전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되었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은혜를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성도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를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자신을 부르셨다는 소명감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자리가 어떠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게 하신 것은 성도들 안에 있는 “그의 기업의 풍성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뜨이기 전에는, 우리가 신앙의 눈이 뜨여지기 전에는 우리가 가진 기업이 얼마나 부요하고 풍성하고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본문에서 “기업”이란 말은 ‘재산’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산이 너무도 풍성하고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음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영적 유산과 재산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모릅니다. 우리는 귀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산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계시 가운데 성도 여러분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 여러분이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곳인가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21:18-21)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곽이 벽옥으로 쌓였고, 그 기초석은 각색 12보석들로 꾸며졌으며, 12문이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일부만 해도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업의 풍성함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845년경, 아람 왕이 이스라엘 공격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습니다. 아람은 오늘날 시리아를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적대관계에 있었는데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이스라엘에 게릴라 특공대를 보내 매복했다가 기습공격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매복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어느새 이스라엘이 이를 알고 피하므로 공격에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이에 의심을 품은 시리아 왕은 군참모들을 소집하고 “우리 중에 누군가가 첩자가 있지 아니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심복 하나가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희 중에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며 매복 공격 실패의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왕은 “엘리사가 있기 때문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심복이 말하기를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왕께서 침실에서 하신 말씀까지라도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그대로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시라아 왕은 격분하면서 “그렇다면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 내가 당장 그를 잡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엘리사는 도단성에 있나이다.” 이같은 첩보에 시리아 왕은 곧장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서 밤에 도단성을 빽빽하게 포위했습니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이 이 광경을 보고 “아~아,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이까!”라며 두려워 떨며 비탄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 큰일났다는 뜻입니다. 사환의 눈에는 실로 빽빽하게 둘러싼 적들만 보이기 때문에 두렵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환이 황급하게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했습니다. 사환이 장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안을 여시었다는 것입니다. 사환이 열려진 영안으로 보니까 불말과 불병거, 곧 하나님의 군대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 진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시리아 군대가 엘리사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여호와여, 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눈이 어두워 헤매이는 시리아 군대에게 엘리사는 “너희는 길을 잘못 들었다. 이 곳은 너희가 찾는 성이 아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안내하여 너희가 찾는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겠다.”면서 그들을 아군의 진지 한 복판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시리아 침략군을 통채로 사로잡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성에 들어갔을 때 엘리사가 “여호와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이 적군의 수도 사마리아성 안에 꼼짝없이 포위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군을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건 안 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자 그들은 실컷 먹고 마신 다음 자기들의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왕하6:1-23) 이 사건은 영적 안목을 가진 엘리사 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시리아 군대를 소경이 되게 하여 승리한 전쟁사입니다. 눈뜬 사람과 소경의 전쟁은 전쟁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던 시리아 군대는 사탄과 원수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고난과 역경, 병고나 실패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때로 엘리사처럼 온통 원수들로 둘러 쌓여 진퇴양난의 어려운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으로 자신을 둘러쌓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환은 신령한 눈이 아직 열리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시리아 군대가 자신을 포위한 것을 보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어 예수를 구세주로 깨닫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하였다가 다시 눈을 뜨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고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신 분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영안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영안이 없이는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는 불말과 불병거,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없습니다.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도 보고 천국도 봅니다.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성경을 바로 읽을 수가 있고, 내 속에 있는 죄악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영안이 열려야만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크게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내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모세는 영안이 열리자 “내가 누구관대 감히 주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면서 죄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도 영안이 열리자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둔한 자외다”라며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영안이 열리자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르나이다” 며 자신을 바로 보았습니다. 바울도 영안이 열리자 “죄인중에 내가 괴수로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허물많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고 세리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려지지 아니했을 때 시리아 군대만 보고서 떨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서 본 것은 하나님의 군대 불말과 불 병거입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시리아 군대만 보면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볼 때에는 없었던 소망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영안을 가지게 되면 모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엘리사가 영안으로 본 모습은 “우리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16절)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시리아 군대를 눈이 멀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중에 때로 고난과 역경, 위기와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엘리사처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안이 열려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실 때도 시편 기자처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체험하시게 됩니다. 두려울 때나 어려울 때나 괴로울 때에도 ‘내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병고를 겪을 때, 가정에 어려운 일 생겼을 때 ‘하나님이여 이것들을 없애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하나님, 내 눈을 열어 그 고난과 어려움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들지 말고 그 주어진 문제, 고난과 역경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12명의 정탐군을 밀파했습니다.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탐군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은 모세와 백성들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그 곳에 가 보니 정말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이것이 거기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시들은 아주 크고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거인 아낙 자손까지 살고 있었습니다. ... 그 땅에는 힘 센 장사들이 수두룩하고 사람들의 키가 모두 컸으며 게다가 우리는 네피림의 후손인 거인 아낙 자손들도 거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온 백성들이 밤새도록 소리높여 방성대곡하며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군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러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옷을 찢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탐지한 땅은 아주 좋은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좋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여 기름지고 비옥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 땅 사람들은 우리 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름지고 비옥한 그 땅을 똑같이 보았으면서도, 여리고 성의 철옹성같은 모습과 그 성에 거하는 힘센 거인들만을 바라본 10명의 정탐군은 자신들을 메뚜기처럼 생각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사람들이 자신의 밥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믿음의 눈, 영안을 가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축복을 점령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 어느 한인교회에 매일 새벽마다 70마일(112km)을 달려 <70일 새벽 특별 기도회>에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그 성도를 불러서 그렇게 먼 거리를 어떻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성도가 대답하기를, “목사님, 제가 은혜를 받기 전에는 교회가 왜 이렇게도 먼가 라고 생각했는데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집이 왜 이렇게 먼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나니 생활중심이 자기 집에서 교회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도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고 힘과 용기,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삶에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안이 열린 후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6:9-10)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서는 비록 무명한 자 같으나, 아니 실제 무명할지라도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유명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다 보니 세상에서 죽은 자 같지만, 여러분의 심령 안에 영원한 생명이 감추어진 진정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 때로 고난과 역경 등을 당해, 마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마침내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이 세상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진 자,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 유업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항상 충만하여,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고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듣고,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기억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으로 마음의 눈이 밝혀지기를 간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 위에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하는 생활로, 범사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령한 기도
엡 1:15-16 / 류영모 목사
어떤 권사님이 앵무새를 키우는데 너무너무 훈련을 잘 시켰어요. 왼쪽 다리를 당기면 주기도문을 외워요.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당기면 사도신경을 외우는 거예요.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권사님이 자랑했어요. "왼쪽 다리를 당기면 주기도문을 외우고 오른쪽 다리를 당기면 사도신경을 외운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두 쪽 다리 다 당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랬더니 앵무새가 하는 말 "넘어지지 바보야!!"
신령한 노래와 신령한 기도 - 이 둘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신령한 노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님께 늘 매달려 우리는 신령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쁠 때 노래하고 슬플 땐 기도합니다. 주신 은혜 노래하고 주실 은혜 간구합니다. 신령한 노래와 신령한 기도 - 성도의 두 기둥, 두 다리를 당기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넘어지지 바보야!
에베소서 1장은 1절 2절 은사를 빼고 나면 3절부터 마지막 23절까지 무려 21절(스물한)이 단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3절-14절까지가 헬라어 문장 중 가장 긴 한 문장입니다. 200단어 이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찬양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문장이 15절-23절 9절(아홉)에 걸친 두 번째 긴 문장입니다. 169개 단어가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흘러갑니다. 그 내용은 하늘에 속한 성도의 신령한 기도입니다. 신령한 복을 찬양하는 일과 신령한 복을 간구하는 일은 성도를 신령하게 만드는 두 기둥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기둥 - "신령한 기도"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은 두 기둥이 아니라 삼각 기둥을 말하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열매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집을 튼튼하게 잘 세우려면 기둥부터 튼튼하게 잘 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필을 들면 감사가 줄줄줄줄 흘러나왔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옥중에 있어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에베소교회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령한 기도는 감사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매사에 감사하는 감사 체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매사에 긍정,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 체질이었습니다.
로마서1:8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고후1:3-11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수많은 고난을 언급한 후 "감사하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 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1:3 "기도할 때마다 ...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려고 하니 고린도교회엔 온통 문제투성이였습니다. 분쟁문제, 음란, 소송, 은사문제 등등. 그러나 앞으로 고린도교회가 신령해 질 줄로 믿고 기대되는 감사의 조건을 끌어다가 감사를 했습니다.(고전1:4-9) 소위 감사가불이라는 겁니다.
에베소교회를 바라보며 감사하는 오늘 본문 15절 16절에 보면 "말미암아"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감사의 이유가 독특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3년 목회사역을 마치고 그 교회를 떠날 때 장로들과 성도들을 불러 어린교회에 "믿음과 사랑"이 넘치도록 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사도행전 20:29-35) 그런데 그 어린교회에 듣자하니 "믿음과 사랑"이 끓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역자의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어린 신자들의 믿음이 자라고 교인들 사이에 사랑의 역사가 이곳 저곳에서 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밥 안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이로 말미암아"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로 말미암아"입니다. 사도바울의 감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은 감사였습니다. 교역자가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가 자기가 떠난 다음 더욱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로 말미암은"감사입니다. 당연한 감사일까요? 특별한 감사일까요? 당연한 감사지요? 그런데 나는 이게 당연하지가 않더라구요. 다른 목사님이 나보다 더 유명해지고 이웃 교회가 우리교회보다 더 잘되고 친구네 자식이 우리자식보다 더 훌륭해지고. 그때 감사가 줄줄 나오지 않더라구요. 여러분은 그게 잘 되던가요? 「이거 완전히 잘되는 분위기네. 나 혼자 안되나?」 바울은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했습니다. 내 안에 일어난 어떤 환경적 조건이 아닙니다.
그 감사를 한번쯤 하게 되었다구요? No.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감사가 끝나는 그 자리가 불평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감사가 적어지는 그 자리가 불평이 많아지는 자리입니다. 감사가 식어지는 그 자리가 불평이 끓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 감사가 신령한 기도의 출발입니다.
II.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엡1:17)
신령한 감사로 출발한 바울의 기도 내용이 17절부터 이어집니다.
첫 번째 기도내용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중하고 크게 보여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중요한 기도제목은 늘 잊어버리고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문제에만 치우치게 됩니다.
어린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 다섯 손가락의 균형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엄지 -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찬양하는 기도
검지 - 감사 기도
장지 - 회개하고 고백하는 기도
약지 - 간구하는 기도
새끼지 -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
여러분은 기도의 질과 양에 있어서 다섯 손가락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까? 기도의 대부분이 간구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까? 내 삶과 생각이 현실 문제에 너무 묶여 있으면 눈만 감으면 간구만 흘러나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문제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만 묵상하게 됩니다.
이 철부지 신앙, 현실기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영광의 아버지께서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 영(프뉴마)이 성령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영(정신)일까요? 바울은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지혜의 성령이 임하셔야 내게 지혜의 정신이 생깁니다. 계시의 성령이 임하셔야 내게 계시의 정신이 생깁니다.
내 영이 현실에만 매이지 말고 영적 세계를 보고 영적인 세계를 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중요한 것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입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단순히 성경지식, 신학적인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내가 사내를 알지 못했다"고 할때 안다는 말은 남자와 성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경험과 깊은 관계, 신령한 교제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과 살아봄으로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내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러면 망한 인생입니다. 주님, 제가 주의 이름으로 봉사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제가 아무개 교회 목사, 장로, 집사입니다. 그때 주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태7:23) 하나님이 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생최대의 비극이지요. 이것이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신론, 삼위일체론, 성령론, 예정론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서 어떤 교제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6:3)고 호세아 선지자가 절규했던 게지요. "하나님,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요"라고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 내용이 너무 신령하기에 신령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참 많이 다르지요. 바울이 아는 한 성도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기도는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기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봉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내는 열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는 선행 - 모두 헛다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능력 - 그 깊은 세계를 배우고 알아가다가 너무 감사하고 신비하여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통404장)
III.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1:18-19)
신령한 기도의 내용 중 두 번째 기도제목이 18절에 나옵니다.
"주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소서"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에 눈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 눈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은 애꾸눈인 모양입니다.
하나를 보면 하나가 안보입니다.
한 눈에 반했다?
부정적인 것이 잘 보이는 마음의 눈은 긍정적인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땅의 것만 보고 사는 눈은 하늘의 것이 잘 안보입니다.
"주여,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소서"하는 기도는 지금 우리 눈이 멀었다는 뜻입니다. 물질로, 욕망으로, 세상욕심으로 인하여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잘 보는 눈이 되었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영적인 눈은 멀고 욕망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세상의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눈이 밝아지자 영적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산, 아파트, 자동차, 건강, 환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인생의 전부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덴동산에서 앓았던 마음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세 가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첫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둘째 성도라는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셋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크신 것인지를 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얘기를 들었을 때 아! 정말 거기에 소중한 것이 있었구나! 이렇게 감탄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게 뭔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인데?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왜요?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이 멀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르심"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그때부터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하는 소명을 알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천당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명이 보이면 과거에 내가 왜 그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지금 내가 왜 이런 환경을 견디어 내야 하는지. 미래 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후 그의 신앙, 가치, 인생의 목적...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나는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다" 이것이 바울의 인생 목적선언문입니다. 부름받았다고 모두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란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의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불신 가정 안에서 혼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 가문을 구원하기 위한 가정 선교사로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가족 중 누군가가 기도제목, 십자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맡긴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부르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주신 달란트, 재산, 똑똑한 아들... 거기에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길 원합니다.
우리 한소망교회로 나를 부르고 여러분을 부르신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 우리교회를 세우신 부르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한 사람도 의미없이 우리교인이 되신 분은 없습니다. 은사를 주신 소명이 있고 직분을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함께 모여 우리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소명을 이루어 가는 겁니다.
여러분의 직장, 직업, 사업을 통한 부르심이 있고 "대한민국" 이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신 부르심이 있습니다. 짜증나는 인간들이 우리 곁에 있어도 "대한민국" 국민, 여기에 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둘째,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성도가 가진 기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분깃을 알고 감사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가 가진 분복은 안보이고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 눈을 밝혀 성도가 가진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 풍성한 것인지를 보여 달라고 바울은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 기업, 영적 유산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행복, 교회생활의 재미, 충성하고 헌신하는 멋을 알고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기쁨,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재미, 용서하고 사랑하는 축복을 알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 좀 보고 살아도 천국에 가면 다 잊습니다. 너무 속상해 하지말고 사세요.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어떤 분이 환상 중에 천국에 다녀왔는데 천국엔 결혼생활이 없더랍니다. 남녀간의 사랑의 기쁨, 결혼생활이 주는 행복 - 그런 것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부이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친밀하게 지낸다는 겁니다. 결혼생활의 부정적인 것은 없고 좋은 것은 다 있습니다. 사유재산도 필요 없더랍니다. 소유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네것 내것이 필요하지 모자람이 없는데 혼자 가질 필요가 뭐 있겠어요? 이것이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셋째 바울은 성도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만 크신지를 알고 담대히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돈의 능력 앞에서 낙심한 사람들, 권력 앞에서 속상한 사람들, 지식의 힘 앞에서 자존심 상한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얼마나 당당하고 위엄있는 삶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겁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중세에 광적인 미술품 수집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시 사용하신 은잔이 유렵 어디엔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은잔을 찾아 나섭니다. 이곳 저곳 전 유럽을 뒤지는 가운데 중요한 정보 한가지를 얻습니다. 십년전에 백마를 탄 한 백작에 의하여 그 은잔이 팔려갔다는 것입니다. 이 백작의 키는 얼마정도이고 어떻게 생겼고 말은 어떻게 생겼다 자세하게 알아본 다음에 사방을 찾아 헤매지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일까? 오랜세월 찾고 헤매고 헤매다가 그 은잔을 십년전에 사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은잔은 화려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창고 한쪽 모퉁이에 집어 던져 두었던 게지요.
당신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에 그토록 배고파 하십니까?
무엇이 그렇게 비참하고 속상하십니까?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힘써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마음의 눈을 떠십시오.
이미 당신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당신 안에 있습니다.
영혼의 창고에 처박아 두지 말고 복음의 능력, 하늘의 복을 누리십시요!
하나님 더욱 경험, 예수, 성령 경험!
마음 눈을 밝히사
엡 1:!5-19 / 박덕기 목사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또한 “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결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거나 ‘신자라고 하는 이름만 갖고 있어도 지식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지성,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지식은 대학 교수라도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고, 돈만 있으면 양심의 가책도 이겨내고 행복할 줄로 알만큼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짐승도 제 부모나 제 새끼를 죽이지 않는데,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자는, 그가 제아무리 대학의 교수일지라도 사실은 짐승만도 못한 무지몽매한 자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줍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와 참된 지식이 필요한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마음눈’을 밝혀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 먼저 감사하기를 마지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감사한 이유는, 에베소 교인들의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였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고, 신자라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가 못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시금석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 믿음에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행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 그 둘은 늘 함께 있는 것이고 나누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줄기찬 주제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고, 야고보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렇듯 참된 믿음에 대한 증표는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인들이 갖고 있는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사활에 관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윤리 도덕적으로 매우 선량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하고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일지라도,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넘기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강하게 기독교를 반대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 덕분으로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믿는다고 해서 모든 믿음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영생교’나 ‘신천지 이만희교’와 같은 것들을 믿는 사이비 이단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주 예수’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이시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물고기 모양의 표지 ΙΧΘΥΣ-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지만, 그러나 불신자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하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하였습니다. 성도를 향한 사랑은 ‘주 예수 안에 있는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 마치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과 같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벧전 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신자들에게 하등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융통성이 없고 마음이 좁다고 하면서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고,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로이드 죤스 목사는 “나는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떤 위대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가장 비천한 그리스도인과 친구가 되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쩌다 좋아지게 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영리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배운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쾌활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의 고향이 어디지? 그가 어떤 학교 출신이야, 그의 재산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주석가 메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 역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필립 헨리의 신분을 상관치 않았습니다. 아주 높은 신분에 속하는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충고하면서 “이 사람 필립 헨리는 어디 출신이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딸은 그 묻는 말에 불후의 명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요. 그러나 제가 아는 확실한 사실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하늘 본향을 향하여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 같은 가족에 속하여 있고, 같은 고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와 성령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이 더 고상하거나 영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이 오셨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광의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영광의 원천이십니다. 영광은 주 하나님, 전능하신 그 하나님의 모든 위대하심과, 모든 완전하심, 모든 속성들을 다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특성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성부는 성자와 영광을 같이 하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 영광을 일시적으로 버리셨지만, 부활하신 후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주님의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은 바로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영광을 알기 위하여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너무 사람 중심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시작하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모든 문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행복이나 그들의 기쁨보다는, 그들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언제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있어 왔습니다. 여기 ‘아는 것’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말은 피상적이고 엉성하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리하고 정확한 지식, 확실한 지식을 말합니다. 또한 그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곧 인격적이고 친밀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엄하심을 모르지 아니합니다. 귀신들도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저 아는 정도지’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나는 그 사람을 한번 소개받은 적이 있고, 몇 마디 말을 나눈 적이 있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그 사람을 결코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바울 사도가 말하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기도 하는 ‘지식’이라는 용어는 친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암 3:2에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른 족속이 존재하는 것을 모르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족속을 아십니다. 여기서 ‘너희만 알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안다는 뜻입니다. 직접적인 앎, 특별한 의미에서의 앎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한 ‘정신’이란 단어는 사실 ‘성령’을 의미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그 사랑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그 죄가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였으며, 교제가 끊어지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방황하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께 대하여 외인이 되었고,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않았습니다. 구속의 목적은 사람으로 다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께서만이 우리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시 갖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윌리암 핏트는 영국의 수상이었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특별한 기회에 몇 번씩 교회에 출석하곤 하였습니다. 한편 그의 친구 윌리암 윌버퍼스는 국회의원으로서, 노예폐지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고,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윌버퍼스는 수상이자 친구인 핏트에 대하여 많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유명한 설교자인 리챠드 세실의 설교를 들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윌버퍼스는 그토록 성령 충만한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친구인 핏트는 설교가 끝난 후 친구에게 “여보게 윌버퍼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양반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였네. 그런데 난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네 그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화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이 해당되는 모릅니다. 윌리암 핏트는 윌버퍼스보다는 천성적인 능력이 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리챠드 세실이 강해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그 핏트에게는 아무 것도 이해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의 눈이 성령에 의하여 열려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인 인간의 마음의 상태는 어두워진 눈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눈을 가지고서는 결코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눈은 베일이 그 위를 덮어버리고, 셔터가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스런 빛이 성경 속에서 비취이고 있고, 또한 자연 속에서도 그러한 계시의 빛이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총명의 눈이 열려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눈을 열어달라고 항상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눈을 밝히사 에베소 교인들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보증금조 주신 성령으로 인해 장차 있을 완전한 구원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갖는 이 소망은 온전하며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인이 갖는 하늘나라의 소망은 찬란하고 영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히 알아야 하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눈이 열려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기업의 성격, 곧 기업의 영광,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모세가 느보산 위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듯이, 우리의 기업에 대해 자주 살펴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설교가들은 이 세상만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이 땅위에서의 기복신앙만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하늘나라와 그 영광에 관한 설교가 인기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세를 망각해버리고 현실 생활에만 집착할 때, 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무법과 불법, 부도덕이 판을 치는 산지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 기업의 영광이 풍성에 대하여 알려고 애를 써야 됩니까? 그것이 가져오는 말할 수 없는 위안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고난을 이길 수 있으며, 죄를 버릴 용기와, 또한 육체를 죽이고,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생각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까?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시선을 돌리십니까? 우리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면 사람일수록, 하늘나라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며칠이 지나서 그 꽃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꽃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고 부패되어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늙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얻을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병이나 슬픔, 죄악이나 분쟁 등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탄식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세 번째의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크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우리를 위한 능력의 가장 큰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반드시 부활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 세상의 죄악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우리 몸 안에 있는 부패와 질병과 사망의 씨앗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원수 마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강력한 원수들, 사망과 지옥과 마귀도 모두 이미 패배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데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이 엄청난 능력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데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필요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어찌하여 내가 이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오늘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 십 억의 사람들과 같지 아니합니까? 어찌하여 나는 성경을 믿습니까? 오직 하나의 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진행하여 나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마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하여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서가 한 목회자의 서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앉아서 신학적인 논문이나 쓰는 신학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강하게 해주며, 구원의 확신과 찬란한 소망을 갖고 살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성자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 성령님의 인 치침과 보증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더욱 뜨겁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 곧 성령으로 충만해서 마음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가 얻을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부요한가를,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고 부활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깨달아서, 구원의 확신과 찬란한 소망을 갖고 살게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떤 신앙의 질(Quality)로 사는가?
엡 1:15-19 / 조영식 목사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몇 년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최대 쟁점은 위안부 문제였습니다. 위안부로 할머니들이 이 세상을 떠나가서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위안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또다시 합의를 미루었습니다. 한일양국이 과거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미래의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도 우리가 주님께 과거에 대한 진실한 회개 없이 미래의 동역자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은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잠시 들렸습니다. 그리고 3차 선교 여행 중에 다시 방문하여 3년 동안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9:9). 그 말씀의 영향력이 대단하여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마술책을 모두 불사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19:19). 그러나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가 직공들과 함께 소동을 일으켜서 복음 전파를 방해하였습니다(행19:23,24). 이처럼 복음의 역사가 강한 곳에는 사탄의 방해도 강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영적인 사랑의 마음을 전했습니다(16절).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어떤 감사의 질(Quality)인가?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감사의 열매를 드리고 있습니까? 열매의 생김새가 비슷할지라도 질적인(Quality)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감사의 질이 달랐습니까? 첫째는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15절). 여기서 그는 안으로 자신을 향한 믿음의 질을 강조했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우상과 이단이 많았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밖에 있는 믿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유혹을 이기고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둘째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15절). 여기서 그는 밖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을 강조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출신이 달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화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주님의 사랑으로 극복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한 해 동안 안으로는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지킨 것과 밖으로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에 대하여 감사의 질이 높아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바울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였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그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16절). 그가 사랑하는 영혼들을 기억하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7절).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능력을 베풀고 예언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능력이나 문제를 해결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핍박과 병에 걸려 죽을 위험과 사랑하는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야 하는 위기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좋은 조건이나 환경으로 바꾸어 달라고 먼저 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핍박하지 않는 황제로 교체해달라거나 병에 걸려 죽지 않게 해달라거나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우리의 기도를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바울의 기도에는 현대 교인들이 구하는 불편한 조건들이 사라지고 편안한 조건에서 살게 해달라는 것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질(Quality)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분문에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17,19절). 그러므로 그 사이에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우리의 생각대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먼저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준비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18절).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영적인 눈이 밝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합니다(엡4:18). 에베소 교인들 중에 영의 눈이 어두워짐으로 죄악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부디 우리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18절). 여기서 소망의 질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느냐?”가 결정합니다. 진정한 소망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바뀌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시작된 소망은 바뀌거나 사라지며 열매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자신에게 있는 소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18절). 여기서 기업의 질은 “누구의 소유이냐?”가 결정합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만 세상의 기업보다도 주님의 기업이 더 풍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기업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업이 아무리 크더라도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업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19절). 여기서 능력의 질은 “누구에게 공급받느냐?”가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부터 공급받는 능력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요17:16). 이런 말씀을 근거로 우리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다는 것이 세상을 떠나거나 분리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별된 삶은 세상 사람들과 삶의 질(Quality)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삶의 질이 달라져야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삶의 질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복음의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삶의 질이 성숙해지는 만큼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감사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삶의 질이 이전보다 더 성숙해져서 주님께 감사의 열매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안으로는 자신의 믿음을 지킨 것과 밖으로는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나눈 것에 대하여 감사의 질이 높아지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 질도 편안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구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소망과 영원한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은혜를 통하여 삶의 질이 성숙해져서 주님께 감사의 열매를 드리게 하소서.
계시의 영을 주소서
엡 1:!5-19 / 곽선희 목사
‘기본으로 돌아가자’ 하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요새 유행하는 말입니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MIT 공대의 박사인 배순훈 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 중에서 그는 창의력 개발을 위한 다섯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현대를 살아가려면, 현대에 살아남으려면 결코 자본이나 지식이나 기술이나 흔히 말하는 정보, 이것가지고 살지 못합니다. 이제는 창의력이 있어야 삽니다. ‘정보시대’란 말을 합니다. 그것도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지식이 정보입니다. 그러나 창의력은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미래로 향하는 지식이 아니면 결코 이 세대에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해도 남 하는 대로 했다가는 끝나는 거예요. 남 그거해서 돈 벌었다, 하는 순간 벌써 이젠 그건 끝나는 거예요. 그걸 따라가다가는 아주 다 원자본까지 다 망치는 거예요. 결국은 작은 일도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일이 아니고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창의력 개발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먼 얘기가 아니고 아주 현실적인 절박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의력을 개발하려면 첫째로 ‘프라블럼 데피니션(Problem definition)’ 문제를 정의하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뭔가? 도대체 내가 추구하는 문제가 뭔가? 적어도 why 라고 하는 말을 세 번 이상 물으라는 거예요. 왜?, 왜?, 왜? 이 일을 해야 되느냐? 목적 의식이 분명해야 되요.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 그리고 왜 나는 이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분명치 않게 허우적거리듯이 이것도 한번 해보고 저것도 한번 해보고 이생각도 한번 해보고 저 생각도 해보고 이래가지고는 안되는 것이에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분명히 해야 된다. 두 번째는 ‘프레퍼레이션(Preparation)’이올시다. 철저하게 공부하라는 것이죠. 내가 정한 이 일, 이 사업,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해야돼요. 많이 연구를 해야돼요. 얼마나요? 꿈을 꾸어도 그 꿈을 꿀 정도로. 자나깨나 집중적으로 그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큐베이션(Incubation)’이올시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미 연구했지만은 많이 연구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라는 거지요. 여기서 여유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한 시간이에요. 인큐베이트(incubate) 라고 하는 말은 원래가 ‘닭이 알을 품고 부화를 기다리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닭이 알을 품고 있어요. 뜨뜻하게 자기 체온으로 계란을 데우면서 계속 부시럭거리고 계란을 굴리더라고요. 자, 이래서 속에서 병아리가 되어 나오는데, 병아리가 되어나올 때까지는 여전히 계란이에요. 동그란 계란 뿐이요. 그러나 그 속에서는 지금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런 과정이란 말이에요. 이런 인큐베이션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공부한 그 마음, 이제 그 아이디어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해요. 숙성시키는 과정.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그 일에 너무 집중하면 안돼요. 너무 집착하면 정신병자가 되요. 다른 아무생각을 할 수가 없고, 더 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요.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잠깐 까맣게 잊어버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빙산이라는 것은 수면 위에 나타나는 것이 그 전체의 8.3%라고 합니다. 수면 아래에 있는 그 빙산이 91.7%입니다. 인간의 능력도 지금 생각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가 가진 능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가 가진 기억력,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인간은 적어도 자기가 최대한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지식을 얻었다 한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분의 1 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특별한 계기가 올 때 이 엄청난 능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고로 그 큰 능력을 위해서 잠깐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요 조용하게 생각을 숙성시키는 그런 과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이 올시다. 조명이라고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것이,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것을 포착해야 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에도 번쩍 좋은 생각이 있었지요. 그런데 놓쳤지. 그만 놓쳐버렸단 말이에요. 번쩍 번쩍 생각이 나는데 이것을 잘 붙잡아야 되는데 100가지를 붙잡으면 그중에 하나가 진짜에요. 아흔아홉가지는 공상이에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번쩍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영감이라고도 하고 성경에서는 계시라고도 하겠지만 어쨌든 번쩍하는 생각을 포착해야됩니다. 그리고 ‘팔로우-업(Follow-up)’ 이제는 거기에 계속 집중적으로 생각해서 붙잡은 생각을 완전히 성숙시켜야 됩니다. 거기서 성과를 맞아야 되는 것이죠. 자, 이렇게 과학적으로 주장합니다.
여러분, 지식이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적 지식이요, 하나는 실증적 지식입니다. 합리성과 귀납성, 이걸 따라서 증명되지 않는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 하면 꼭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올시다. 생각으로 경험하는 것도 경험이에요. 그런데 전혀 실증될 수 없는, 전에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한 특별한 경험이 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잘 받아들여야 되고 잘 소화해야 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지식은 실증되는 지식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우리 경험에서 검증될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막의 교부로서 영성의 대가이기도 했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라는 사람은 인간의 감정에 잘못될 수 있는 방향, 그리고 극복해야할, 잘못되기 쉬운 습관을 세가지를 지적합니다. 이것이 있는 동안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하면 계시적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첫째가 비탄입니다. 나는 쓸모없다. 이미 과거에 실패했다. 그런고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비탄하는 것이에요. 이미 자기자신을 포기해버렸어요. 이러한 사람에게는 영감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분노올시다. 너무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있었어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는 동안에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 마음에는 번쩍 지나가는 것도 없어요. ‘CEO가 되는 길’ 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Lessons from the Top’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50명의 CEO를 연구해 보니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를 미워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수를 갚고, 이런 마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어요. 창의력이 없다는 것이에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또 하나는 ‘나태’ 올시다. 게을러빠진 사람에게는 영감이 없어요. 부지런해야 되요.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주 부지런한 성격의 사람에게 새로운,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함께 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지식이란, 아는 지식이 있고 알려지는 지식이 있습니다. 내가 내 생각, 내 경험을 통해서 공부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어요. 그런 때는 내가 주체고 내가 공부하는 내용이 객체가 됩니다. 그러나 그 객체가 인격인 경우에는 얘기가 다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가 내게 알게 하는 것이올시다. 이게 물건이 아니에요. 사람이요 혹은 때로 인격인 경우에는 이제는 그가 나에게 알게 해줄때만 압니다. 그가 내게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물건인 때는 두드려보고 알고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알 수 있지만, 이 사람이 사람이에요. 인격이에요. 울면 슬픈가 보다, 웃으면 기쁜가보다 할 것이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이거 두드려 본다고 압니까? 이거는 저분이 나에게 자기 자신을 알려줌으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두가지 지식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내게 알려주셔야만 내가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계시의 영, 계시의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에 ‘영’이라고 제가 번역을 했는데, 우리 본, 지금 읽은 성경책에는 ‘계시의 정신’ 그랬습니다만은 그 밑에 ‘영’이라고 다시 번역을 고쳐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영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확실히 ‘프뉴마’ 라고 하는 것은 ‘영’이라는 뜻입니다. 프뉴마 소피아스 카이 아포칼루프세오스, 라고 하는 말은 프뉴마, ‘영’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적으로 중요한 인식론적 진리가 있습니다. 적어도 무엇을 알려면은 절대 3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대상이요 하나는 주체인 나요 그 다음에는 빛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본다’ 할 때 보려고 하는 물체와 볼 수 있는 ‘눈’과 그리고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객체와 주체와 조명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죠. 여러분, 아무리 귀한 것이 여기 있어도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볼 수가 없어요. 내 눈을 뜰 때만 볼 수 있지. 그런데도 내 눈이 뜨여졌고, 보았다 하더라도 빛이 없으면 못봐요. 지금 여기서 환하게 다 보고 있지만은 깜깜한 시간이 오면은 앞에 무엇이 있던 없던 알 수가 없고, 내 눈을 아무리 떴다 하더라도 내 눈은 말짱 헛것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이에요. 조명이 없으면 안되는 거예요. 바로 몇주일 전에 제가 ‘요로결석’이 생겨가지고 참 되게 아픈 시간에 밑에서 진통제를 맞고 기다렸다가 또 맞고 세 번을 맞고 올라와서 설교를 하는데요 몽롱하더라고요. 아무것도 안보여요. 그야말로 뿌연걸 그걸 놓고 그런 가운데서 설교한 일이 한번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잘 보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내가 보려고 해도 내 눈이 흐려지면 안되고요. 내 눈이 아무리 밝아도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빛을 주는 것만큼만 보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런고로 오늘 성경말씀은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다한들 계시의 영이 어두워지면 아무 소용없어요. 오늘 우리는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상식이하의 실수를 합니다. 왜요? 어두워졌어요. 마음이 어두워졌어요. 조명이 없어요.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이 다 아무 소용없어지고 마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즉각적으로 해설을 하십니다. ‘그건 네 혈육이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네게 알게 한 것이니라. 그런고로 너는 복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나 자신을 알게하고 세상을 알게하는 것,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올시다. 그런고로 오늘 본문에 ‘계시의 영을 주시사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을 알 때 나를 알고 나를 알 때 세상을 알게 되는 거죠.
또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세요.’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름받은 자의 미래, 소망에 대해서 알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과거가 문제가 아닙니다. 미래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있는지, 이걸 똑바로 알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계시의 영을 밝혀 줄 때 비로소 미래를 내다 볼 수가 있어요. 또한 성도의 기업이 어떠함을 알게 해주십시오. 궁극적으로 예수믿는 사람의 마지막 종착점, 마지막 기업,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통과할 때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만은 문제는 저 가나안 땅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가나안 땅에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만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다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마지막 성도의 기업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올시다.
또한 베푸신 능력, 이 귀한 약속에 대한 믿음이 내게 능력을 줍니다. 현재적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죄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허영을 이기고 방종함을 이기고 죽음을 이깁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 사랑의 능력, 엄청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깊은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입니다. “What I Belive” 라고 하는, ‘나의 신념’이라고 하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야말로 모든 과학과 예술의 진정한 원천이다. ‘신비’ 바로 계시의 영, 영감, 그것이 과학과 예술의 원천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섭리, 그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보다 더 멀리 봐야 됩니다. 오늘이 아니라 멀리. 저는 오래 전에 읽은 글을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가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생각이 나요. 처칠경에게 물어보았어요. “정치가에게 가장 갖추어야할 자격이 뭡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는 딱 한마디로 대답하는데 “최소한 2년을 앞서 볼 수 있어야지. 좀더 멀리 볼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보다 멀리, 최소한 2년을 내다 봐야돼요. 발등의 것도 못보면 되겠어요? 백성들은 못봐요. 그래도 지도자들은 보다 먼 것을 봐야 되요.
요새 이런 재미있는 우스갯 소리가 있어요. ‘평등 시리즈’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요새 몇 일 전에 들었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뭐냐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는 거예요. 뭐 옛날에 공부한 거 다 말짱 헛것이에요. 뭘 알긴 뭘 알아요. 컴퓨터를 압니까, 뭘 알아요. 그래서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몽땅 똑같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그러고요.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데요. 아, 거 맞더만요. 젊었을때는 예쁜 사람도 있고, 좀 덜 예쁜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러나 50이 넘으면 똑같아요.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자같이 생겨가지고 50이 되면 모조리 다 똑같아요. 같습니다. 괜히 뭐, 이제 가서 두들기고 맛사지 해봐야 별거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60이 되면은 성의 평등이 와요.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주책이 없다, 이거지요 뭐. 그리고 70이 되면요 건강의 평등이 와요.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만큼 그만큼 늙어가는 거예요. 다 평등해요. 80이 되면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에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지 못하는 거. 집이 좋으면 뭘하고 못하면 뭘해요.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평등이요. 90이 넘으면요 생사의 평등이요.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예요. 그 참 재미있는 얘기예요. 이게 뭡니까? 내다봐야돼요. 오늘 여러분 아이가 그대로 있습니까? 10년후 20년 후 그 앞을 훤하게 보세요. 평등한 거예요.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어요. 이걸 알아야지요.
그리고 우리의 종말을 내다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마지막 종말이 어디입니까? 호세아 4장 6절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래요. 참 지식, 바른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거예요. 왜 모르게 되었느냐고요? 죄가 있고 증오가 있고 시기가 있고 끝없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어요. 마음이 흐려졌어요. 계시의 영이 떠났어요. 그 마음에는 번쩍 하는 것이 없어요. 참 의욕이 없어요. 이래서 세상은 어지러워지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계시와 지혜의 영,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기도해야겠어요. 경제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닙니다. 세상, 국제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저 미래가 밝게 보일 때 현재를 알 수 있고 나의 나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끝없는 욕심과 허영과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어두워진 지 오래됐습니다. 주여, 우리 눈을 밝히시고 계시의 영을 주시사 우리 앞에 있는 소망도 알고, 우리 앞에 있는 기업도 알고, 내가 가고 있는 운명의 길을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계시의 영을 주시사 어려운 세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 음성을 조용히 들을 수 있게 하시며 바로 응답하며 늘 승리생활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망을 뿔을 굳게 잡아라
엡 1:15-19 / 황광민 목사
영생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여기서 종교가 생겼습니다. 또 실제로 죽지 않으려는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00명을 삼신산으로 보냈습니다. 중국의 한 무제는 승로반을 만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을 받아먹었습니다. 죽지 않고 오래 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헬라신화에는 서방으로 계속 가면 낙원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도의 고담에는 바닷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용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영생을 위하여 피라미드를 세웠습니다. 자신의 몸을 썩지 않게 미이라로 만들어 잘 보존했다가 만일의 부활을 예비하려고 했습니다. 피라미드 중에 가장 큰 것은 밑변이 233m. 높이가 146m입니다. 2.5t짜리 돌이 230만개 들어갔습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그런 것을 하나 세우려면 1년 중 3개월 동안 10만 명이 동원되어 10년 간 공사를 해야된다고 합니다. 모두가 영생을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확실한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어떤 성현도 자신을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아름다운 행위를 역설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주님을 믿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위한 바울의 기도
본문은 소망의 뿔을 굳게 잡기를 바라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이 말씀을 썼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사랑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위하여 감사하기를 마다하지 않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소망이 부족했습니다. 믿음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으나 소망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믿음과 사랑도 중요하지만 소망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온전한 신앙의 3요소입니다. 믿음의 소망을 갖게 하고 소망은 형제를 온전히 사랑하게 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골로새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3∼5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3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교회에 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는 소망이 부족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현대인의 신앙은 믿음과 사랑 중심입니다. 믿음으로 평화를 추구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현대교회는 사랑과 구제를 많이 합니다. 사회봉사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메시지는 퇴조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는 소망의 말씀이 사라지면서 윤리의식이 퇴조했습니다. 소망의 말씀이 약화되면서 십자가 정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이름으로 현재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천국에서 상 받기 보다 이 땅에서 상 받기를 원합니다. 희생하기보다는 대접받기 원합니다. 섬기는 삶보다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소망의 메시지가 퇴색하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소망의 메시지를 살려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분명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소망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소서
소망을 위한 바울의 첫째 기도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생기고, 또 여기서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하셨습니다(이사야54:10). 사람은 쉽게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굳으십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조카 롯을 좋은 땅으로 보내며 허전해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의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아멘.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에 보내시고 그곳에서 큰 민족으로 키우셨습니다. 당시 셈족이 내려가 통치하던 애굽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키우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21:43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땅을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주셨습니다.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셨다는 증거가 무사히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아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망의 풍부함을 알게 하소서
소망을 위한 바울의 둘째 기도는 소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를 불러 약속하신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누릴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불러 그의 백성 삼으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은 참으로 풍성합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천국의 영광을 잠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주님의 예고를 듣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는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영광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외침입니까? 천국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는 외침입니다.
스데반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본 스데반은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한 미움보다 하늘 나라의 영광이 더 컸습니다. 돌로 치는 자들이 왜 밉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영광이 상당히 컸기에 미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기도하는 중에 천국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온갖 보물들을 가지고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계21:2). "그 도성은 하나님의 영광에 쌓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계21:11).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계21:18).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 중에 천국을 맛보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대문만 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좋은 곳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천국은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성도가 누릴 기업은 참으로 풍성합니다. 소망 중에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소서
소망을 위한 바울의 셋째 기도는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 하심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약속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현실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활을 약속하거나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윤회를 주장한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는 영생의 약속이 아닙니다. 환생을 말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생의 보증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영생을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능력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성도가 누릴 기업이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천국에서 상 받는 것을 믿으십시오. 주님을 위해 수고한 것,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신한 것, 천국에서 누릴 기업이 될 줄 믿습니다. 천국의 소망으로 십자가 지는 성도가 되십니다. 천국의 소망으로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십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라
엡 1:15-23 / 오장우 목사
1.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아는 것이 힘이다`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까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영어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한 죄수가 기자와 인터뷰에서 하는 말이 "이제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회에 나가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힘이라는 것입니다.
자원이 별로 없는 우리 나라가 오늘날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만이 우리 가정의 살길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우리들은 자식 교육시키는데 지나칠 정도라 할 정도로 우리는 열심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하는 일이라 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배워서 알면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 자신감이나 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눈이 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오래 하다보면 소위 노하우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러면 장사의 눈이 뜨입니다. 장사는 물건을 사고 파는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그 길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오래 산 분들의 경험도 이와 같습니다. 오래 동안 산전수전 겪다보니까 산다는 것이 먹고 입고하는 것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하는 지혜를 이야기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출세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에 유학을 갔다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던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선진국의 문물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의 삶의 미래를 미리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배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가졌다는 소유의 가치를 넘어서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의 길이 보이고,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정치의 길이 보이고, 교육하는 사람에게는 교육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인생의 선배를 찾고, 선진국으로 유학을 나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안다고 하는 것은 제한적이라고 하는 사실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지역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역마다 가치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브리짓 바르도는 그의 유명세를 가지고 우리 나라 개고기 식문화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블란서 요리에는 달팽이 요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달팽이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중국의 유명한 요리 가운데는 살아있는 원숭이의 골을 깨서 골을 먹는 요리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원숭이의 골을 먹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래도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음식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의 문화를 보고 할 수 있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단지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먹는 것 하나도 지역에 따라서 가치관이 다른 법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지식의 제한성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시간적인 제한도 있습니다. 백년 전의 지식 중에 지금까지 통용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안경을 예로 들어봅시다. 안경은 높은 지위나 나이 많은 사람들만이 쓸 수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안경을 쓰면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안경을 쓴다고 무례하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어제 신문을 보니까 어느 회사에서는 사장님, 부장님, 이런 직급에 대한 호칭은 없애고 서로 이름에 `아무개님`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큰 일이야 작은 일이냐의 구분은 없어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존중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에서 나온 직장문화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더 많이 진행될 것입니다.
예측이 빗나간 것 가운데 대표적인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있습니다. 1943년, 컴퓨터가 처음 나왔습니다. IBM회장인 로버트 왓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컴퓨터를 보고하는 말이 "이거는 만들어봤자 온 세계에 다섯 개도 안 팔릴 거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각 가정에 한 개씩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기를,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기를, 그것도 지식 있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 예견하기를, `이대로 석유를 쓰게 되면 2010년에는 석유매장량이 완전히 바닥이 나고, 석유는 없고 이 시대는 공황이 일어날지 모른다`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처럼 이 세상의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웠다, 뭘 배웠다는 말입니까? 다 인간의 삶을 배운 것뿐입니다. 우리 선배들의 지혜를 배우든, 내가 창의력을 내세우든 다 인간의 것입니다. 땅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다 안다고 하지만은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배운 것만 압니다. 시간적, 지역적 제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성공한다, 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배운 사람 중에는 그 힘을 가지고, 그 뜨여진 눈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제한을 모르면 남을 비판하게 되고 그 자신도 비판받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자신도 헤아림을 당하는 법이다" 말씀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남을 비판하게 되면 절대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구원의 확신조차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2. 우리가 참으로 추구해야하는 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우리가 추구해야될 참 지식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의 한계를, 인간 지식의 한계를 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협동목사이신 박창빈 목사님이 지금 북한에 가 계십니다. 지난 월요일 날 북한으로 출발했습니다. 가기 전에는 저하고 꼭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합니다. 같이 기도를 합니다. 또 북한 선교보고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합니다.
지난 주일날 점심을 같이 하는데, 이번에 가는 일행 중에 소망화장품의 강석창사장님도 같이 동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소망화장품이 무슨 화장품이냐고. 여러분 아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 `꽃을 든 남자` 로 선전을 합니다. 그 회사가 대단한 회사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에서 매출액의 1%, 수익금이 아닌 매출액의 1%를 북한돕기사업을 위해서 헌금을 한다는 것입니다. 1%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자그마치 5억1천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년 매출액이 510억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돈으로 평남 개천의 국수공장을 지원하는데, 이 국수공장에서 유치원과 인민학교 어린이 2만8천7백명, 인민병원 1600명의 환자에게 하루 한끼의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씨감자 생산을 위한 비용을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원활히 지원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강집사님이 가셔 가지고 현장을 보고 이것 정말 해야 되겠다, 이미 헌금을 했지만은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망화장품 잘 모릅니다. 박목사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회사가 생긴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자본금 5천만원에 세 평짜리 사무실에서 직원 두 명 데리고 시작한 회사인데, 지난해 매출이 500억이 넘고 올해는 750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복 받은 회사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이 회사의 사장님은 40대로 나이가 많은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부모가 특별히 지원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대단히 허약해서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니까 세상적인 지식도 별로 없습니다.
이분의 성공비결은 철저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생각하기를 자기 마음 속에 `내가 성공하는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사의 이름을 소망이라고 지었는데, 이 소망이라고 지은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믿음의 기업이다` 라는 뜻과 함께 뒤집어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가겠다` 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94년에 강사장에게 교통사고가 크게 났던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휴지조각처럼 되었으니까 얼마나 큰 대형사고였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은 약간의 찰과상만 입고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강사장의 마음 속에는 `내가 살았다`는 기쁨보다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왜 나는 살게 하셨는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이 자리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라고 소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에 공장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기도 중에 인천 남동공단, 뒤에는 산이 있고 공기가 너무 좋은 땅을 평당 150만원에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차이로 계약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서 실망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 땅 옆에 목재단지가 있어 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목재 먼지가 날아와서 화장품을 만들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땅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후에 연락이 왔는데, 고속도로 옆 교통이 편리한, 바다가 옆에 있어 공기가 좋은 땅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이 땅은 평당 50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0만원짜리, 더 좋은 땅을 계약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분이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럴 듯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안 그런게 있고,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그럴 듯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안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하나님의 손길만 있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그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회사는 현재는 매출액의 2%를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는데, 1%는 월드비젼을 통해서 북한돕는 일을 하고, 나머지 1% 가운데 0.5%는 실로암 안과병원에 실명자들의 개안수술을 하고, 0.5%는 기아대책본부에 보내서 아프리카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그는 철저히 하나님 믿는 회사를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회사에서는 매일 예배를 먼저 드리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매주 월요일에는 목사님 모시고 300명 전직원이 예배를 드립니다. 철저히 하나님 믿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업자체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사의 앞으로의 계획은 매출액의 5%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어떤 사업이 매출액의 5%, 그것만 수익금으로 얻으면 굉장한 회사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배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은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뭐냐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것이 신앙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내가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람 마음도 다 모르는데, 하나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셔야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내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내가 다 하는 것처럼, 내가 다 판단하고, 이러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자신을 보여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내가 노력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반에서 기본적으로 하는 것 중에 QT가 있습니다. 이 QT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경 말씀을 놓고 먼저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 중에서 내게 음성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마음의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내 발의 등이고 내 길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통해서 내가 그대로 시행해야될 일이 무엇인가? 주의 성품과 인격과 생활을 닮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가지고 나가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QT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내게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가장 수준이 있다는 바리새인이요 랍비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상류층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야 자부심을 가진 자신만만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종교재판에 회부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핍박자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던 사울이 변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은 빼어놓을 수 없는 신앙적 경험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의 종교적 행위 즉 성경공부 많이 하는 것,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 많은 시간 기도하는 것 등의 종교행위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단하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악한 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로마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알만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만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세상적인 지식을 가져도 눈이 뜨여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마음의 눈, 영적이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영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자의 세 가지 축복
18절, 19절 말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사람, 영적인 눈이 뜨여진 사람, 마음의 눈이 뜨여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이 무언가 하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근본이 무언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근본 찾기에 바쁩니다. 좀 먹고 살만 하니까 하는 일이 뭐냐? 족보 만드는 일입니다. 여러분, 족보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 나라가 양반, 상놈 구분한 것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 나라의 역사 속에 위대한 왕들도 있었고, 똑똑한 신하들도 있었지만은 양반 상놈 이 차별 때문에 이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라가 또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 양반 만들려고 합니다. 양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조선일보에 한 외국인이 인터뷰한 기사를 봤습니다. 이 사람이 외국의 여러 나라 다니다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잠깐동안 살고 있습니다. 그 인터뷰 기사 가운데 오늘 한국의 문제가 뭡니까? 하는 질문에 "한국에는 수직관계는 있는데, 수평관계가 없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수직은 위아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앉으면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부터 따지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나이가 같다면 생일까지 따져서 내가 형이다 네가 동생이다 하는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의 약점을 들춰내고 그를 약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수직입니다.
오늘 이 땅에 문제가 뭐냐?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어떻게 해서라도 줄서기 하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으로... 여러분, 이것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절대 수직관계에서는 행복이 없습니다. 힘있는 자, 힘없는 자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나라가 망했는데, 이제 좀 살만 하니까, 하나님이 6·25전쟁 통해서 반상제도 완전히 철폐시켜 버렸더니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어떻게 삽니까? 수직관계 다시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수평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다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이고 성경의 법입니다. 사람은 동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국제도 만드는 것을 절대 반대했던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의 수직의 위에는 하나님뿐이지 사람 두어서는 안됩니다. 밑에도 사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법 속에 노예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더라도 50년째 되면 다 풀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평이 없습니다.
요즘에 우리 나라에 소위 명품 열풍이 불어가지고 뭐 핸드백 하나에 몇 백만원 하는 핸드백을 들고 다닙니다. 그거 안 하면 안 된다고 해서 가짜 들고 다닙니다. 그걸로 자기의 수준을 높입니다. 그리고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세계의 명품 회사들이 우리 나라에다가 매장만 만들면 다 돈 번다 그럽니다.
그래서는 신문에 표현이 이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명품에 환장했다" 무슨 말입니까? 미쳤다는 겁니다. 얼마나 조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아는 것은 우리의 근본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근본이 뭡니까?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 되기 전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다 지옥 갈 사람입니다. 잘난 사람도 지옥 가고 못난 사람도 지옥 가고, 하나님 보실 때에는 잘나고 못나고 있고 없고 그건 별거 아닙니다. 다 죽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아궁이에다가 불쑤시개 집어넣는데, 잘난 나무 넣고 못난 나무 못 넣고 그렇습니까? 다 똑같습니다. 지옥에 집어넣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잘나고 못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죄인에서부터 출발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뜨여지면 내가 죄인이었음을 압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다 죄인입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우리가 수직을 세웁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데.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월드컵에 나가는 선수들 예수 믿는 얘기를 했는데, 지난 월요일에 목사님들 모임에 잠깐 갔다가 제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석교회 이용남 목사님이 "오목사, 나는 기독교TV를 봤는데, 거기 최태욱이라는 선수가 나왔어. 그 선수가 말을 하는데, 자기들 16강에 들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그래. 그래서 사회자가 물었어. 왜 16강에 들어야 되느냐?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나를 축구선수 만들어준 이유가 뭐냐? 이것을 통해서 예수 복음 증거 하라고 나에게 축구 선수 되게 하시고, 월드컵대표가 되게 하시고 이런 영광의 자리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거기 나가서 1등을 하고 골을 넣어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복음 증거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골 넣고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청년이 바로 그 최태욱이라는 청년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여기에 왜 그리스도인 되게 하시고, 왜 나에게 직분 주시고, 왜 나를 이 가정에 시집오게 하시고, 왜 나에게 이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게 하시고, 왜 나에게 이 가정에서 이 일을 하게 하시는가?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린 다 죄인에서 출발했음을 깨닫고 늘 겸손하게 주님 맡겨준 사명에 최선 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아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아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풍성한 은혜의 영광을 알지 못하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가지고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더불어서 좋은 땅을 선택할거냐 거친 산을 선택할거냐 할 때, 그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합니다. 거기에 수직관계를 안세웁니다. 거기에 내가 그동안 했던 일도 얘기 안합니다.
단지 하나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게 신앙인들의 여유로움입니다. 우린 이런 여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김익두 목사님 아십니까? 이분이 깡패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이 분이 한번 나섰다 그러면 정말 산천초목이 다 떤다 할 정도로 대단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거칠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교통수단이 좋지 않을 때니까 여름에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덥고 괴롭고 힘들어서 빨리 올라가서 산정에서 쉬어야 되겠다 하고 올라갔습니다. 보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웃옷을 다 벗어버리고는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다가 술취한 사람이 비틀비틀 거리며 올라와서는 하는 말이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어" 하고는 마구 때렸습니다. 그냥 맞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표현대로 하면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수듯이` 때렸답니다.
한참을 때려도 대항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형님, 다 때렸소? 악수 한번 합시다" 학수를 하는데, 이 김익두 목사님의 손이 아주 억셉니다. 목사님이 딱 붙들고 악수를 하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내가 그 유명한 김익두야!" 그러니까 이 사내가 깜짝 놀라고 술취했던 사람이 죽었구나 하고는 벌벌 떨었습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던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까지 끝나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네가 살아있지 않느냐. 이것이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 하는 뜻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목사님 나 좀 살려 주십시오" "그래 네가 사는 길은 딱 하나야. 나 따라와" 그래서 부흥회에 참석하고 예수 믿고 교회 장로님으로 충성하셨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모르니까 여유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나 때리면 같이 때려야 되고 남이 화내면 같이 화내야 되고, 남이 섭섭하게 하면 같이 섭섭하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눈이 뜨여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헌신하고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대신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더 높아진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그런 영적인 눈이 뜨여진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아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받는 축복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 삶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미국에 유명한 노만 빈센트 필이라고 하는 목사님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 보게 되면 한 프로야구팀이 우승후보였는데, 그만 20게임을 치르는 동안 17번을 졌습니다. 그러니 골찌입니다. 남들이 우승후보라 그럴 때는 이 야구팀이 갖고 있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프로야구팀의 감독이 선수들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자, 너희들이 잘 사용하고 사랑하는 배트를 나에게 줘라" 그래서 그 배트를 싣고는 목사님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술라터 목사님을 찾아가서는 "목사님 우리 야구선수들이 하는 배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팀이 우승후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계속 지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들이 사랑하는 배트를 하나씩 가지고 왔으니 이 야구배트에다가 안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그 야구 방망이에다가 안수를 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와서 선수들에게 하는 말이 "이것은 목사님이 축복기도한 방망이다. 그러니 이것은 너희 방망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방망이다."
야구선수들이 그 다음날 이 방망이를 가지고 경기에 나가서 경기를 하는데, 자그만치 안타를 37개를 치고, 20점을 득점해 가지고 그날 게임에 승리한 것 뿐 아니라 그 후에 우승가도를 달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 엄청난 진리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의 마음 속에는 내가 축복기도 받은 그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소망화장품의 강사장의 마음 속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승리할 수 있다, 자기의 세상적인 한계, 지식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놓고 하나님 앞에 축복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능력으로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사모하고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 내 속에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은혜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4. 결론
세상적 지식을 맹종하지 말라. 하나님의 지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이 높이시는 은혜를 받으라.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은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 즉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알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많은 시련들 속에서도 우리가 절대로 낙심해도 안되고 교만해서도 안되고 더 나아가서 이들을 대항해 싸워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이 능력을 믿고 나가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지식을 맹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적인 눈이 뜨여져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은혜의 한주간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엡 1:15-23 / 박조준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역 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에게 더욱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신령한 축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축복이 얼마나 귀한가를 감사드리며, 그와 같은 신령한 축복이 더욱더 풍성할 것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신령한 복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신령한 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매우 좋게 생각했습니다. 본문 15∼16절을 보세요.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 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저희가 기업을 보증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생각하기를 이제 유업에 대한 보증을 받았으니 이 제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이제는 더 염려할 것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필요도 없고 나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오히려 그 반 대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데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돼. 그래서 나도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 너희를 기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때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을 그 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더욱 더 풍성한 성령을 주실 것을 위해서 기도했습 니다.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에 가서 사도 바울이 이런 기도의 부탁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 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6:18∼20).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성도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 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이야 얼마나 다른 이의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왜 교회에 서 교역자와 교회에 봉사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는지 아십니까?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이 없이는 무슨 일이든지 바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지금까지도 여러분께서 저희 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에베소의 성도들이 박해를 받는 데 서 자유함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돈을 좀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 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세상 연락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사도 바 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7절 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 는 말은 세상 학문을 배워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얻지 못 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일찍이 칼빈 선생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 중에 가장 고 상한 지식이라 고 했습니다.
전에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던 헬라의 아덴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신을 섬겼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하면서 경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고 경배하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 의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리는 우리가 노 력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 다. 이것을 일컬어 계시 (啓示)라고 합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에 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을 일반 계시 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 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한다 고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 서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 라고 합니다. 이 특별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 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 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했 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면 안됩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단 11:32). 그냥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아니 고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 나님 으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나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셨고,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나를 매일 인도하시며, 나와 함께 계셔서 힘 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 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에게 이 지식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것이 본래적인 히브리 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사도 바 울은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눈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역사는 우리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 십니다. 세상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바 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디매오는 이중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 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남의 것을 빌어 먹어야만 하는 거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는 아마 여러 의사에게 가보았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소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치 지 못하고 포기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디매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떤 이의 말이 나사렛에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 게 훌륭하신 분이 이 여리고 같은 데 오실까? 만일 오신다고 해도 나같이 가난하고 눈 먼 거지 를 만나시지는 않을 거야. 아마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이 그를 모시겠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그래서 바디매오는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누가 오십니까? 그러나 그에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무 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아무도 그의 물음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바디매오의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누군 지 모르나 어떤 사람의 옷을 꽉 붙들면서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바디매오 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옷자락을 뿌리치면서 내뱉듯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 나사 렛 예수! 아,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이 순간 바디매오는 소리치기 시작했 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를 구해주십시오! 예수님, 어서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바디매오는 바로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꼭 맞는 시간에 부르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만일에 그가 이번에 내가 기다려야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테니 나는 다음 기회에 만나지 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거기에 그대로 앉아 기다렸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바디매오는 잘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다시 그 길로 오실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예루살렘에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순간은 그의 온 생애에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바쁘신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늙은 거지는 함께 이야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그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바디매오야,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 어서 빨리 가봐! 바디매오는 그가 걸치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지팡이를 팽개치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바디매오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흥분한 어조로 주님, 보게 해주십시오 했습니다. 그가 주님 이 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영의 눈은 이미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보세요! 너의 지적인 이해가 너를 낫게 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재산이 너를 낫게 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한 일이 너를 낫게 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믿 음이 너를 낫게 했다 고 하셨습니다. 믿음, 믿음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평생을 소경으로 늙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 처음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 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바디매오는 정말 바로 구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 내 옷이 너무 낡았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제가 다음에 먹을 끼니가 없습니다 라고 하지 않 았습니다. 주님, 저는 집 한 칸 없습니다 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보게 해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에게는 보는 것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어떻습니까? 육 신의 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의 눈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지는 않았습니까? 만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기쁨, 감격, 평화, 만족에 대해, 또 우 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는 것 이 당연합니다.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럽니다. 이 어두운 눈은 고쳐야 합니다. 보게 해야 합니 다.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지금 우리의 심 령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시며,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일찍이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현재만 보지 않고 장래를 보게 됩니다. 물질만 보지 않고 영혼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만 보지 않고 저 세상을 보게 됩니다.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 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기독교를 부름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부 르심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하는 위대한 목표를 분명히 내다 보고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 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 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 다. 소망이 있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기업이 준비되어 있고 이 세상에서도 기업이 있습니다. 이 영광을 경험으로 알며 신령한 생활의 능력과 기쁨과 원리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골 3:1∼2). 이 세상에서 영광 을 얻게 하는 지식을 누구나 갖기를 바라고 누구나 기쁨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나 라에서 그의 백성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된가 하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 떤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전능하 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동행하고자 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십니까? 본문 20절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 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우리가 그분의 말씀 을 직접 듣고 나니 마음 가운데 변화를 느끼게 된다 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앞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밝아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마련하신 샘물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 우리의 소망, 기업의 영광, 그 크신 능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뜨라
엡 1:!5-23 / 김태환 목사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선교(宣敎)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씌여지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선교라는 말대신 전도(傳導)라는 말을 썼습니다. 영어로 하면 선교는 "mission" 이라고 하고, 전도는 "evangelization" 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한다면, 선교는 "보냄"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미시오(missio)"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다시 이 말은 "보낸다"라는 뜻을 가진 "미테레(mittere)" 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에서 미션이라는 말을 사명(使命)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씁니다. "미셔나리(missionary)"라고 하면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선교사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전도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라는 희랍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밴젤리스트(evangelist)"라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거부터 사용해 온 전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흔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반면에 선교라는 말은 주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선교사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1952년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국제 선교사 대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부터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과거부터 써온 전도나 선교라는 말과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면 영어로 "미션 오브 갓(mission of God)" 이라고 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 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의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선교를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선교비를 많이 책정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하면 그 교회가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교회가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하여 선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어저께는 아침 새벽 기도부터 시작해서 온 종일 이번에 단기선교사들을 위한 훈련을 했습니다. 단기선교를 떠나는 19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생각도 나누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구체적으로 선교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1995년 경입니다. 그 때 뜻있는 몇 사람이 모여서 교회에 선교부가 있지만 교회에 속한 하나의 작은 부서 같은 인상을 주니까 교회 내에 선교회를 구성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선교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바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기에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선교사님들을 초청해서 선교 부흥회나 선교 세미나를 열어서 선교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가다가 조금씩 단기선교에 대한 관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하나님께서 저에게 강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말로만 선교를 해서 되겠느냐? 이제 선교사들을 현지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때 저는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단기 선교라니요? 다들 자기 공부하느라고 바쁜 사람들인데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경비를 누가 댑니까?" 저는 이렇게 그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그런 질문에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다시 1-2년을 그냥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초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제직회에서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의논하면 가부(可否)를 물어야 하고, 논의를 하다가 보면 단기선교가 아직 시기상조라는 말도 나올 수 있고, 경비 문제도 나올 수 있고 해서 부결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올 해는 우리교회에서 단기선교를 가겠습니다." 하고 선포해버렸습니다.
그 때 저는 선교 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의 말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A church exists by mission, as fire exists by burning.)." 정말 말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實感)했습니다. 교인들의 관심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단기선교를 기쁜 마음으로 후원했습니다.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는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중보기도 팀이 생겨서 단기선교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역사 상 처음으로 1999년에 중미(中美)에 있는 코스타 리카(Costa Rica)로 단기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한의 식량 난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탈북자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도 좋지만 내 나라, 내 민족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2001년에는 탈북자들을 위한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저께 단기선교 훈련을 하면서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감격을 제가 간증삼아 얘기했습니다. 오랜만에 말씀을 전하다가 가슴이 벅차서 울었습니다. 저를 찾아와서 똑똑한 말로 "저는 목사가 되겠습네다!" 하면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던 아이들, 그리고 짧은 시간에 한마디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려고……"지금 내가 이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마 이 형제는 복음을 영원히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고 다급한 음성으로 복음을 전했던 한 자매의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데 저는 그만 울어 버렸습니다.
제가 좀 장황하게 우리교회 단기선교 역사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선교 훈련에 강사를 따로 초빙하지 않고 모두 우리교회 안에 있는 분들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모두 일류 강사들입니다. 시간 시간들이 모두 알차고 유익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단기선교를 직접 다녀 온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지만 그만큼 선교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졌습니다. 선교를 다녀 온 사람들이 대부분 지원팀에 들어가서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선교 역량(力量)이 그만큼 늘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무엇입니까? 어제 선교 훈련을 받는 사람 중에 한 자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착각 속에 살았다고요. 하나님의 비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나의 비젼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했다고요. 하나님의 선교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불붙는 소원을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를 사용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십니다.
다시 진부하게 도구론(道具論)을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요? 도구가 무엇입니까? 톱, 대패, 끌, 망치, 붓, 연필 같은 연장들입니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작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작가의 주된 관심은 자기가 만드는 작품에 있지 연장에 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연장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뜬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이 말씀처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교만하지 않습니다. 거만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대하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선교 현지에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만해지려고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잘 사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잘 사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내가 먼저 믿은 예수를 전해주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티를 내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도구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이 형제, 자매에게 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남의 나라 국경을 넘은 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17절).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이 어렵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알기 쉽고, 너무나 분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내 주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에베소 교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이런 말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8절). 영어 성경에는 마음의 눈을 "eyes of heart"라고 했습니다. 그냥 눈이 아니고 마음의 눈입니다. 그냥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기?" 하는 것들은 우리의 육신의 눈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떠야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깨달아집니다.
셋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19절).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들이 있습니까? 이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증거를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교회생활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22-23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교회의 일원(一員)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교회 마당에 세워졌던 그리스도 상이 부서졌답니다. 흉측하게 팔이 부러져 나갔습니다. 교회에게는 이 일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보기에 흉하니까 아예 새로 만들어 세우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하면 돈아 먾아 드나까 보수(補修)를 하자는 사람도 있고 해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교회에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상을 팔이 부러진 채로 두기로 했답니다. 그대신 상 밑에 이런 말을 붙이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당신의 손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오늘 에베소서 말씀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짧게 오늘 말씀을 요약한다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뜨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1952년의 빌링겐대회에서 선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定義)를 내렸습니다.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심 곧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게획과 목적을 깨닫고 그 계획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잠자던 때는 지났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던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떠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만큼 살았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할 때입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노인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걸 젊었을 때 다녀 올 걸 그랬어. 이제 은퇴가 내일 모레인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제 힘이 달려서 긴 여행은 못해. 젊어서 다녀와!" 그렇습니다. 어찌 성지 순레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때가 없다고 하지만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은퇴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뭔가 아쉽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뭔가 우리의 인생이 후회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드리겠습니다. 힘이 넘치고, 의욕이 넘치고, 꿈이 있는 이 때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일찍이 눈을 뜬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1806년에 윌리암스 대학(Williams College)에서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에 들어갔다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로 작정했던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를 중심으로 한 네명의 대학생들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유명한 건초더미 운동(Haystack Movement)입니다. 이 운동이 프린스톤 대학으로 번져나가서 프린스톤 해외선교회(PFMF)로 발전했고, 거기서 유명한 프린스톤 선언이 나왔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아래 서명한 우리는 기꺼이 자원하여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세계의 어느 곳이든 나아갈 것을 선언한다." 이 운동은 다시 그 유명한 SVM(The Sudent Volunteer Movement)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슬로건을 걸고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SVM에서 1970년까지 전 세계 선교사의 70%를 충당했고, 선교 자원의 75%를 충당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와 아펠셀러(Henry G.Appenzeller) 선교사도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1883년 커네티컷(Connecticut) 주(州))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알버트 울트만스 목사가 말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 삼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나라 문을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가기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날, 이상하게도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더우드를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왜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언더우드, 왜 너는 안된다고 하느냐?" "저는 인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너는 안된다고 하느냐?" 언더우드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안된다고 하는가? 주님,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조선으로 가겠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