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제 3세계 국가들만 착취한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역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16세기부터 영국 농촌에 불어닥쳤던 종획운동(인클로저)도 지금으로 말하자면 농업을 산업화시키자는 소위 최첨단 농촌개량사업에서 시작되었다.
소규모 농토에 작물을 키우는 것보다는 대규모 초지에 양을 대량 사육하는 것이 지역경제뿐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훨씬 더 이익이었다.
다시 말해 인클로저는 토지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추진된 현대적 의미의 용도변경 사업인 셈이다.
그런데 영국 역사에서 ‘빈곤’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도 바로 영국 의회가 이런 인클로저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했던 18세기부터였다.
특히 산업혁명 시기의 인클로저는 횟수뿐 아니라 규모에서도 전례가 없었다.
그 결과 그동안 영국 농촌을 지탱해 왔던 자작농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농부들은 임금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노동력이 부족한 산업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이었다. 어디에 살든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이들의 삶은 ‘개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고,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당시 영국은 무역과 산업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전대미문의 국부로 흥청거리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빈곤층이 빠르게 늘어났던 것이다.
맬서스 같은 진보주의자들은 무역이 흥성하는데도 빈곤이 증대하는 이유로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법칙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벤담 같은 공리주의자들도 증가하던 빈민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원형감시체계(파놉티콘)가 달린 노역소를 구상했을 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 등장한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었지만 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추진한 토지의 상품화가 엄청난 풍요와 함께 극도의 빈곤을 초래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인클로저와 성공적인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가 된 영국은 눈부신 번영과 동시에 최초의 현대화된 빈곤을 경험했다.
빈곤층의 분노와 규모에 놀란 나머지 의회는 각 교구를 중심으로 최저생계비를 현금으로 보조하는 유럽 복지법의 원조였던 스피넘랜드 법과 넘쳐나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집단노역소를 운영했지만 대부분의 농부와 노동자들은 구빈원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것은 이 제도가 인간의 자존심과 영혼을 무시한 자본주의 방식의 기계적인 구걸이자 자선이었기 때문이다.
곧 영국이 최초로 경험한 경제적 번영은 새로운 방식으로 빈곤을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풍요였으며, 그 결과 영국 민중들에게는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만 일하는 지옥 같은 헐벗은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