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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은 행복해 져야 돼.
내가 그렇게 해줄게.
던전 천장을 향해 치켜올려졌던 남자의 검 끝이 손톱 달을 그리며 내려앉는다. 공기가 갈리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서 있었던 적은 이제 없다. 남자의 일격을 맞고, 달그락거리는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를 단말마의 비명처럼 내지르더니 어두운 공기와 같이 무너져 침묵하였다.
" 후우"하고 남자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진 열쇠를 주워들어 어둑한 샹들리에의 빛에 비추어 보니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의 열쇠였다.
" 아아……. 아까 그놈이 마지막 놈이었나?"
남자는 배시시 웃으며 바닥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차가운 돌바닥에서 날카롭게 한기가 스며들어온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검집을 허리에서 빼내어 엉덩이 밑에 깔아 그 위에 걸터앉았다. 검사라고 보기엔 가벼운 모습.
남자의 얼굴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깊은 자국으로 남아있다. 아직 머리에 흰머리는 없지만 남자는 자신의 검푸른 머리색이 하얗게 셀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이젠 젊지 않은 오랜 나이 이건만, 남자의 팔과 다리에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다.
' 그나저나 정말 이상하군. 이 던전, 누군가가 한번 지나간 흔적이 있어.'
바닥이나 벽면을 천천히 살펴보니 던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발에 의해 벗겨진 이끼자국. 부분적으로 부서져 있던 몬스터들이나, 벽면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작은 손자국과 핏자국으로 침입자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 피가 검게 말라 있군, 출혈양도 심하게 적어……. 손자국의 크기를 봐선 10살 정도 어린 아이인데, 혼자서 들어 온 건가? 무모하군. 그래도 보스는 잡지 못한 것 같지만…….'
던전의 주인이 죽는 순간, 던전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며 오랜 세월에 걸쳐 완전한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던전 안에서 이전 모험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건 던전 주인이 살아 있어 던전이 무너지지 않았단 소리이기도 했다.
' 뭐…. 상관없나.'
검집을 잃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이 남자의 손에 의해서 일어선다.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남자는 무겁게 일어섰다.
" 가자. 내 마지막 적을 위하여……."
가장 깊게 침묵했었던 문을 통해 나가는 남자의 등 뒤로 검은 색의 망토가 씁쓸하게 휘날렸다.
#2
' 소리가 가까워진다…….'
베로니카는 문에서 귀를 떼며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뛰어난 실력의 전사……. 며칠 전 이곳에 왔던 작은 소년과는 대조되는, 숙련된 전사의 검명이었다. 전력으로 싸웠을 부하들도 이토록 쓰러졌으니, 그녀 자신도 저자의 검에 죽을 것을 운명임을 예상했다.
" 아아……."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소리. 베로니카는 거기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턱 하고 숨이 막힌다. 두려움에 눈물마저 흐를 것 같다.
이상하게…….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없던 감정이었다. 얼마 전까진 분명히 없었던 감정이다. 언제부터 생긴 거였지?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도 나오는 것은 암흑뿐이다. 그래, 그게 당연한 거다.
어둠뿐인 이 방에서 줄 곧 혼자였으니까.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어둠만 나오는 게 당연한거다.
그러나 그때, 작은 빛이 보였다. 어둠 이외의 기억. 좀 더 그것을 자세히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던전 문이 열리고 처음으로 문 밖의 것을 눈으로 확인 한 순간이었으며, 다른 방의 샹들리에에서 쏟아진 빛이 방을 채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뭐였지……?
막 그 다음 것이 떠오르려는 찰나, 방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가는 문 밑으로 빛과 낯선 이의 신발이 보였다. 베로니카는 장검을 집어 들었다.
#3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문이 열리는 순간, 던전의 주인인 서큐버스가 보였다. 검은 드레스와 하얀 피부. 그리고 달빛처럼 하얗게 빛나는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그러나 평소에 봐왔던 서큐버스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 되었다.
문을 열리는 순간, 그녀의 검 끝이 날라 왔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검을 올려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뭐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의 칼날은 그의 허리를 향해 휘어져 날아온다.
- 챙!!
발을 놀려 서큐버스와 거리를 벌리며 허리를 막아 냈다. 제기랄, 생각 할 틈을 달란 말이다! 마지막 적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다 허무하게 끝내는 싸움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지막을 장식할 던전으로 이곳을 찾은 것도, 이 곳의 보스는 침입자라고 무작정 덤벼드는 짐승 같은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 채앵!
" 크윽…!"
"…!!"
거리를 벌렸다고 방심 했었다. 잡념이 싸움에 끼어드는 순간 남자의 몸동작이 느려지고 말았다. 그녀는 남자의 칼을 쳐내려 하고 있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남자가 방어에 능숙하다는 것을 깨달아
그의 무기를 빼앗으려 한 것이다. 손잡이 근처 가드 바로 윗부분을 거칠게 쳐 내어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 했다.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서큐버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검이 아닌, 어깨로 그녀의 몸에 부딪쳐 밀쳐 내었다.
" 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몸이 멀리 떨어졌다. 그럼에도 칼을 놓치지 않고 검 끝은 여전히 남자를 향해 있다. 엄청난 집념. 마치 짐승과 같은 투기다.
남자는 이빨을 갈았다. 마지막으로 이 던전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라비 던전의 보스는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표정을 지으며, 삶이 오가는 싸움 속에서도 느긋하고 장난스럽게 검을 휘둘러 살고자 하는 의지를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대 이었기 때문에 편히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마치 살고자 하는 짐승과 같잖은가?!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길이 유난히 거칠었던 것 같다. 그것도 이 여자의 소행인가……. 남자는 이를 악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왜 이러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향해 땅을 박찼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칼은 그녀를 향해 힘차게 뻗어 지고 있다. 그녀도 위협을 받을 만한 공격이었기에 황급히 일어서며 남자의 칼을 받아냈다.
- 채애앵!!!
마치 칼날이 부서질 듯 날카로운 검명이 던전 안을 크게 울렸다. 그리고 힘의 싸움이 시작 되었다. 빠드득거리며 칼날과 칼날이 맞문 질러지며 거칠게 이빨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들거리며 서로의 팔이 떨려오는 게 느껴진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주름이 지도록 이를 악물고 있는 표정. 하얀 이빨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인다. 붉은 눈동자는 증오와는 다른 것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눈빛을 보인 마물이나 마족은 없었으니까. 짐승은 증오를 품고 남자를 바라 봤고 마족은 오만한 눈빛이거나 부드럽게 떠진 눈으로 남자를 유혹하려는 눈빛뿐이었다.
이 눈빛이 무엇으로 빛나는지, 알고 싶다.
" 왜……. 그러는 거지?"
제길. 힘이 너무 들어가 목소리가 떨린다. 말을 뱉는 것조차 힘들어 말 꼬리가 저절로 길게 늘어진다.
"……?"
" 넌 지금 까지 내가 보아왔던 서큐버스와는 너무나 다르다……. 너는 살고자 하고 있어. 도대체 왜 그런 거지? 말해봐……."
" 웃기지 마라. 늙은 인간……. 내가 왜 너에게 그런 걸 말해야 하지……?"
"……."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대화가 아주 무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힘이 빠져서 그런 걸 진 몰라도, 그녀의 칼의 힘이 약해졌다. 남자로 조금은 느슨하게 팔에서 힘을 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 전 처 럼 힘이 들지 않아 말 꼬리가 깨끗하다.
" 너에게서 살고자 하는 빛을 보았다. "
" 그게, 무슨 상관이냐?"
"……. 나는 모든 것을 끝내려 이곳에 왔다. 이 던전을 도는 것으로 내 전사의 삶을 마감하고, 끝 까지 '꿈꾸었던 것'을 이루지 못한 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려 했지……. 그런 나에게 너의 존재는 너의 생각 보다 거대한 것이다. 궁금하다. 그러니 말해다오. 너는 어째서 살려고 하는 것이지?"
"… 나는……."
그녀의 팔에서 힘이 더 떨어졌다. 검은 이제 마주 붙어 있기만 할 뿐, 어떠한 힘의 부딪침도 없다. 그녀의 시선이 과거를 향해 밑으로 떨어졌다. 방문이 열리기 전 떠올렸던 기억이, 남자의 말의 힘을 빌려 탄력 있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4
그래, 작은 남자 아이였다…….
이제 막 10살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인간 아이였다. 숏소드를 들고 울먹이면서 싸우자라고 바락 거리는 모습이 귀여운……. 녀석이었다. 결국 상대해 주긴 했지만 소년의 힘없는 공격을 이리저리 처내어 힘을 빼고 마지막엔 칼마저 빼앗아 덤비지도 못하게 한 바보 같은 싸움이었다.
그때 한 말을 기억한다.
분명히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아니 웃음 까지 지으며 이야기 했던 것 같다.
' 저기, 이제 그만하지 않을래? 많이 다쳤잖아, 아프겠다…….'
' 시끄러워! 난 끝까지 싸울 거야!!'
…… 생각해 보니 시끄러운 놈이었구나. 그래도……. 처음으로 나 이외의 존재의 목소리로 이 방이 울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을 하던 중, 그 아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본래 상대를 유혹해야 하는 존재이니 만큼 특별히 허락된 힘이었다. (어떤 성격을 좋아 하는지, 어떤 외모를 좋아 하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생각을 읽는 순간,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고독한 아이. 아무도 어울리지 못하고 머릿속엔 세 용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종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강해지고자 하는 일념으로 뭉쳐진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걸 알고 나니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어 빙그레 웃음을 지었었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사탕임을 알아내자, 생각을 읽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마력을 뭉쳐 사탕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맛이야 뭐 무조건 달면 괜찮겠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사탕을 작은 종이로 말아 끈적이지 않게 해서 그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 자, 이걸 줄게. 그래도 안 되겠니?'
'…….'
아이는 말이 없다. 그래도 울음은 멈추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 어린 아이여서 그런지, 단순한 놈이었다.
아무튼 그 아이는 잘 타일러 던전 밖으로 돌려보냈다. 짧게나마 열려 있던 던전의 문이 다시 닫혔고, 죽거나 죽은 척 했었던 던전의 마물들은 다시 일어나 다음 침략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시 이 방엔 어두운 암흑만이 가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왠지 그 날은 하루 종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하면서…….
#5
잠시 바닥을 향해져 있던 여자의 눈길이 다시 남자를 향해졌다. 그리고 칼을 거두어 바닥을 향하게 내려놓자 남자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검을 풀을 줄은 몰랐다. 여자의 표정은 이미 상냥하다. 즐거운 추억을 떠올린 것 마냥 옅은 즐거움이 베어 나와 있는 얼굴로 그녀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직접 말하는 것 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 헤치지 않을 테니 손을 이리로……."
그녀가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남자는 잠시 여자의 눈을 처다 보더니, 공격 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알고 기꺼이 여자에게 손을 맡겼다.
손과 손이 겹치는 순간, 여자의 기억이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끝없는 암흑이 빠르게 흘러갔고, 그 고독함에 미치려 할 때 소년과 여자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기억은 상당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이해가 가며 여자의 생각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여자가 손을 놓자 흘러들어 오던 기억은 끊기고 말았다. 남자는 손이 감전 된 것처럼 여자에게 건넸던 손을 주무르며 당황스런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 이제 알았지……?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이 추억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아. 길고 거창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
그녀가 떠올렸던 생각의 일부가 떠오른다.
그래도……. 왠지 그 날은 하루 종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하면서…….
남자는 한참을 고민했다.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켜 가며 눈을 감고 과거를 빠르게 회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뜬 후……. 환하게 웃으며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 좋아! 결정했다!!"
" 으, 응?"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 남자에 당황하며 여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즐거워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은 체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 네가 사악한 마족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 아니, 오히려 착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존재야. 착한 사람은 행복해 져야 돼."
그리고 등을 돌려 여자를 등진 체 들어 왔던 곳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방을 완전히 나가기 전 남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웃는 얼굴을 보였다.
" 내가 그렇게 해줄게."
그리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멀어졌다. 뜨거워진 마음을 가슴에 품은 체…….
#6
그녀의 마지막 말이 북처럼 내 심장을 울렸다…….
내가 검을 처음으로 든 것은, 강해지려 마음먹은 것은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멘마하에 살던 때 부모가 마물의 침공으로 죽은 뒤로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각오가 되었다.
각오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실천을 불렀다.
나이가 15살이 되자마자 근처 용병단에 들어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삶을 살게 되었다. 처음엔 만족스러웠다. 부모님을 죽인 것은 마물이었으니까 한 마리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년이 고작이었다. 점점 불러오는 은행의 재산과 그 재산으로 사 입은 장비를 걸칠 때마다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마물을 죽여 예방을 해 다른 사람이 마물에 죽는 걸 예방하니, 그 걸로도 충분히 지키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핑계일 뿐이란 걸 알고 있다. 나는 거의 던전 안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가끔 던전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마을과는 거리가 먼 곳의 마물을 처리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지킬 누군가를 찾으려 했을 때엔 이미 내 곁엔 도움을 바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눈엔 그저 의례를 기다리는 잔인한 용병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해도 자연스럽게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고, 이런 건 필요 없다고 해도 있지도 않을 나의 보복이 두려워 억지로 쥐여 줄 뿐이었다.
허무했다…….
그토록 갈망했던 힘이 흘러넘치는 데도,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한탄스러워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할 준비를 했다. 마법이 걸린 갑옷을 불태우고, 재산을 바닥에 흩뿌려 돈 없는 자들이 가지게 했다. 준비한 것은 오직 몸을 가린 최소한의 옷과 추위를 막을 망토, 그리고 옛날부터 사용해 몸의 일부와도 같은 칼과 몇 년은 먹고도 남을 정도의 여행용 음식이었다. (물론 소형에 고열량 음식이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이 던전에 들어왔다. 삶의 의지에 무심한 서큐버스를, 누구도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나라고 생각해 그것을 죽이고 나도 죽거나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몸이 많이 늙었으니까, 빠르든 늦든 죽음은 곧 찾아올 운명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기억은……. 말로 표현 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런 서큐버스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마치 나를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사정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추억을 품은 마물, 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누군가가 지켜 주어야만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 질 수 있다.
기억을 보내는 것에 익숙지 않아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보내 버려 그녀 자신도 모르던 소망을 말이다……. 그 소년을 만나 행복해 지고 싶다는…….
내가 그 소망을 '지켜' 주마.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 소년이 올 때까지 말이다. 베로니카…….
#7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웬 젊은 검사가 보였다. 다소 불량해 보이는 복장과 등 뒤에 멘 커다란 클레어모어가 위협 적으로 보인다. 젊은 검사의 손에는 고기조각이 쥐여져 있다. 저걸 재물로 넣을 건가…….
그녀는 고기조각을 바친 던전에 살고 있었다.
남자는 킁 하고 코로 숨을 크게 내뱉더니, 젊은 검사를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 젊은 검사여. 혹시 그 손에 쥐여진 고기조각을 재물로 바칠 생각인가?
" 응? 그렇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노인네?"
역시 버르장 머리 없는 녀석이다. 그래도 노인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 미안하지만 다른 걸 재물로 바칠 생각은 없나?"
젊은 검사의 눈이 도전적으로 번뜩인다. 마치 재미난 장난거리가 생겼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으면서 거만하게 말을 뱉어낸다.
" 싫다면?"
" 그렇다면……."
늙은 남자는 허리에 메었던 검집에서 칼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 내가 방해하지…."
남자는 검 끝을 젊은 검사에게 향한 체 날아가듯 덤벼들었다.
싸움은 길었다. 젊은 검사가 생각 이외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랬고, 무엇보다 방어구라곤 얇은 옷이 전부였기에 그의 커다란 클레어모어에 한대도 맞지 않도록 조심히 싸운 게 그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래도 격렬한 긴 싸움에서 상처가 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젊은 검사를 이기긴 했지만, 이미 노인의 몸 이곳저곳엔 검상이 남아 있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 크…윽! 제기랄! 두고 보자! 길드 마스터에게 부탁해서 네놈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리고 그 젊은 검사는 도망치듯 상처 입은 몸을 끌고 로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로비가 텅 빈 것을 확인 하자 남자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바닥 위에 올라서 여신상에 등을 기댄 체 로비의 입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겨우 한번의 싸움을 했을 뿐인데 몸이 피곤하다……. 몇 년을 지키면 소년이 다시 돌아올까? 1년? 2년?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금은 지키는 것에 집중하자.
남자는 행복했다.
#8
1 년이 흘렀다…….
그리고 2년이 흘렀고…….
세월이 더해져 3년이 흘렀다…….
4 년이 흐르자 남자의 머리엔 백발이 무성해 졌다.
5 년이 지나자 소년은 남자가 용병단에 가입 했을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라비 던전에 오지 않았다.
6 년이 흘러……. 남자는 노인이 되었다. 옷은 볼품없이 헤졌고 볼은 수적하게 메말라 들어갔으며 근육은 검을 휘두르는 게 필요한 곳만 남게 되었다. 상처는 두 말할 것이 없었다.
7 년 뒤엔 남자는 이미 던바튼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라비 던전 로비엔 강한 노인이 있어서 고기 조각을 제물로 바치려 하면 무력으로 저지 한다고……. 당연히 노인의 실력에 호기심을 느낀 많은 이들이 노인을 도발하려 고기 조각을 가지고 라비 던전 로비로 갔다. 당연히 그들의 수만큼 노인에겐 흉터가 남았다.
8 년이 흐르자 그동안 꾸준히 늘어나던 노인을 도발하던 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을 지키려 했을 때 노인과 싸웠던 녀석의 길드를 괴멸 시킨 건 이미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 그래도 베로니카와 관련된 기억은 뚜렷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계속된 싸움으로 인해 노인의 몸은 폐인이 되었음에도, 그는 행복했다.
9 년 후엔 노인은 검을 드는 것도 괴로워했다. 힘이 없어 몇 번이고 자리에서 쓰러졌었다. 이미 처음에 소지했던 음식은 옛날에 떨어졌다. 이젠 노인을 동경하는 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노인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래도 노인의 허리엔 언제나 검이 꽂혀 있었다. 지난 9년간 고기조각으로 열린 던전이 없다는 것에 노인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내……. 10년이 흘렀다.
#9
노인은 잿빛의 슬랜더 로브를 입고 있었다. 옷이 더 이상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헤어지자 보다 못한 사람이 사다 준, 깨끗한 새 옷이었다. 노인은 고마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 받아 입었다. 노인 그 옷을 입자 우스울 정도로 로브의 자락이 펄럭였다. 노인의 몸이 너무나 메말라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이 마치 이불을 두른 것처럼 펄럭였다. 그래도, 이 로브는 노인의 검을 덮어 검을 쉬게 했고, 후드 또한 노인의 얼굴을 입을 제외 하고 얼굴 모두를 가려 어두운 안식을 줄 수 있었다.
여신상을 등진 체 정자세로 앉아 로비를 바라보던 여느 때와 같은 날, 로비에 아무도 없던 때였다.
천천히 로비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정된 걸음 거리로 라비 던전의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은 눈을 덮은 후드를 살짝 걷어내 남자를 확인했다. 안정된 남자의 발걸음 소리는 대단한 실력의 검사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발걸음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청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청년의 표정이 당혹스럽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이 던전 로비에 홀로 앉아 있는 것에 그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까지 이곳에 오래 있었어도 자신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에 걱정한 놈은 없었다. 근래에 보기 드믄, 착한 마음씨의 청년이다. 노인은 천천히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쓰러 질 것 같은 노인의 모습에 청년은 당황하며 괜찮으세요? 를 외치며 노인을 부축해 주었다.
노인은 청년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쳐내 그의 얼굴을 보았다. 말을 꺼내야 한다. 무엇을 제물을 바칠 것인지 라고……. 그러나 노인은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똑같다……. 그 소년의 얼굴과…….
10 년 전 베로니카가 남자의 손을 통해 전해 준 기억 속의 소년과 청년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좀 더 길어진 것과, 심술 맞은 청색의 눈동자가 깊은 호수처럼 변한 것은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노인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힘겹게 청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지난 10년간 그토록 기다리던 얼굴……. 그 얼굴이 눈앞에 있다. 노인은 마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청년이여……. 혹시 아주 오래 전, 이 던전에 왔던 적이 없는가?"
" 아, 예? 그걸 어떻게……."
" 그리고 던전을 실패했지? 이 던전의 주인에게 말이야……."
" 윽……."
"…… 자네군."
노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가 여신상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청년이 외친다.
" 괜찮으세요?!"
" 아아. 괜찮네. 괜찮아……. 그나저나, 무엇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 아, 글쎄요. 딱히 생각해 둔건 없습니다. 그저 주머니에 남는걸 아무거나 넣을 생각입니다."
" 그렇다면……. 이걸 넣게."
노인이 청년에게 건네 준 것은 고기조각이었다. 청년은 잠시 멀뚱히 그것을 바라보고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청년은 자신이 10년 전 던전에 넣었던 제물이 무엇인지 까먹은 듯 하다.
그래서,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노인에게 제물을 주어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청년은 노인을 부축해 주고는, 제물을 바치는 석판에 고기 조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옅은 빛을 남긴 체 그는 사라졌다.
노인은 한참을 그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10년 만에 던전 로비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밖은 이미 어둡다. 고요한 밤이 가라 앉아 공기는 시원하고 하늘은 별과 달빛으로 밝다. 노인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던전 입구를 둘러 싼 숲 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 지켰다… 지켰어!! 드디어 지켰단 말이다!! 베로니카… 그리고 이름 모를 청년이여 행복해라. 영원히……."
갑자기 찬 공기를 마셨기 때문일까? 쿨럭쿨럭 하고 노인은 기침을 했다. 폐 속 깊숙이에서 끌어 올라 오는 듯한 기침 소리와,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전해졌다. 입을 가렸던 손엔 피가 묻어 있다. 검이 그 동안 몸을 관통한 적도 있었다. 화살이 심장 부근에 박힌 적도 있었고, 마법에 큰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가끔씩 독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한 놈도 있었다…….
노인은 손에 묻어 나온 피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것을 로브에 쓱 하고 문질러 닦았다. 어차피 이젠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었다. 후회는 없어…….
노인은 숲 속을 향해 계속 걷기 시작했다. 청년이 던전 밖으로 나올 때 청년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노인은 숲 속으로 계속 해서 걸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10
"후우. 이게 마지막 열쇠인가?"
청년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거대한 붉은 열쇠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방을 빠져 나와 좁고 긴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는 문이 달린 방이 있었다. 그 문은 지금까지 거쳐 온 문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것이었다. 커다란 열쇠구멍. 그리고 사슬로 굳건하게 봉인된 모양. 후욱. 청년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열쇠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 드르륵.
문이 거짓말처럼 위로 올라가며 지금 것 보지 못한 거대한 방이 청년을 반겼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짙은 마의 기운. 청년은 침을 삼키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서자 한 여인이 보였다. 검고 화려한 복장의 여인. 뒤돌아 서 있기에 앞모습은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검은 드레스 사이로 늘어진 은백색의 검은 볼 수 있다.
"서큐버스!! 모리안의 이름으로 너를 처치하러 왔다!!"
청년은 검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청년은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여자가 고개를 뒤로 돌려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어……"
"아……"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여자가 청년에게 달라오기 시작했다. 청년이 피할 틈도 없이 여자는 청년을 껴안아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아하……. 아하하!! 너 예전에 그 꼬맹이 아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 베로니카는 청년을 껴안으며 옛날에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행복하다.
어떻게 10년간 던전에 누구의 침입도 없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품속에 있는 이 청년이, 이 소년이 중요할 뿐이었다. 품속에서 그가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치는 게 느껴진다.
" 하하하하하!!"
베로니카는 밝게 웃음을 터트리며 더욱 힘주어 청년을 끌어 안았다…….
<후기>
이것으로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써놓은지 한 5년 다 되어가는 오래된 글을 꺼내들어 조금 민망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거라 굳게 믿고 여러분들에게 조심스럽게 선보이는 바입니다.
이 글에서 한줌 즐거움을 찾으셨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첫댓글 우와_ 이런느낌_ 정말 좋네요~재밌게 잘 읽었습니다_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은 언제나 재미있어야 한다. 라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리플은 지은이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고생에 보답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3
하아 너무좋네요 진짜 ㅋㅋㅋ 감명깊게 읽엇습니다! 판타지에서 한번 연재해보시는게? ㅋㅋ
부족한 글에 관심을 보여 주셔서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장편 판타지를 준비하고는 있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기엔 시기상조인것 같아 공개를 미루고 있습니다. 이제 되었다. 싶으면 그때 공개토록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