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Ballerina)
여자는 말없이 술이 가득 담긴 글라스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손장난을 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띄우며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봤다. 남자는 막 술을 글라스에 따르다가 의아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해줄까?"
여자의 입에 걸린 미소는 매력적이다 못해 유혹적이었다. 한껏 꼬고 앉은 체 가슴이 살짝 파인 옷을 입은 여자 자체가 매력적이었지만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나오는 말은 그 매력에 아름다움을 한껏 더 해 줬다. 남자는 미소를 띄며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다시 한 번 붉은 입술을 열었다.
"잘은 기억이 안나. 음... 어렸을 때야. 한창 장난감이랑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그 때 생일선물로 받은 장난감이 하나 있었어. 상자 뚜껑을 열면 노래와 함께 예쁜 발레리나가 나와서 춤을 췄어."
"그게 뭐가 재밌는 이야기라고..."
"계속 들어봐. 난 그 발레리나가 너무 예뻐서 자세히 보고 싶었어. 그래서 멈추려고 그걸 손으로 잡았는데도 계속 돌아가지 뭐야. 화가 났어. 이 장난감은 분명히 내 것인데 왜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거야? 하고."
여자는 그 때 생각이 나는지 슬쩍 웃으며 다시 글라스를 기울이며 손장난을 쳤다. 남자는 그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발레리나를 멈추려면 상자 뚜껑을 닫아야 하는데 그럼 예쁜 발레리나를 볼 수 없잖아. 난 그 발레리나가 보고 싶은데...내가 어떻게 했을거 같아?"
남자는 매혹적인 목소리에 홀려 있다가 갑작스런 여자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음... 잘 모르겠네. 하하."
"부쉈어."
"어?"
"그걸 높이 치켜들고 땅으로 힘껏 던졌지. 그러니까 상자나 발레리나나 노래나 모두 파편이 되서 부서지는 거야. 그 발레리나의 팔 다리 몸통 얼굴이 모두 따로 떨어졌는데 아직 상자랑 연결되어 있는 다리만 빙글빙글 돌았어. 그래도 난 좋았어. 멈춘 발레리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여자는 여전히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남자의 눈에는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원래의 섬뜩한 미소를 아름다움으로 덮어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발레리나의 얼굴을 본 순간 그걸 내 손으로 다시 부숴버렸어. 한쪽이 일그러져 깨진 흉측한 모습이었거든. 난 그저 예쁜 발레리나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멈춘 그 모습은 흉측하기 그지없었어."
여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글라스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지."
"..."
"아.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없애버려야 하는구나."
"..."
"...어때? 내 이야기?"
잠깐 섬뜩한 표정을 얼굴 가득 드러낸 여자는 위험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매혹적인 미소를 띄며 남자를 돌아본 여자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남자는 잠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글라스에 입을 댔다.
"피이. 재미없었구나."
"아,아니. 재미있었어."
입술을 삐쭉 내밀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 여자를 달래기 위해 남자는 허둥지둥 변명을 만들어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숨죽여 웃었다. 남자란. 여자의 미소를 보던 남자의 어색한 미소가 점차 굳어져갔다. 곧 굳은 입가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여자는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목을 부여잡고 켁켁대기 시작했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시뻘게지며 고통스럽게 뒹굴었다. 한동안 그 고통스런 몸짓이 계속되더니 마지막으로 크게 부르르 떨며 몸부림을 멈춘 건 몇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제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체 가만히 앉아만 있던 여자는 그제야 무표정하게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여자는 쓰러진 남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그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어쩌나. 나는 재미없었는데."
그게 여자의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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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들어선 상희는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상희는 잠깐 입에 미소를 지었다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검은 옷의 여인을 보고 다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미소를 감췄다. 검은 옷의 여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다. 그 눈물은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을 나타낸 것이지만 상희는 그걸 보고 마음 속으로 경멸어린 미소를 다시금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지독하고 악독하고 사악한 년. 비웃는 듯한 상희의 눈이 검은 옷의 여인의 마음을 꿰둟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상심이 크시겠어요."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격식만을 담은 교과서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장례식에 맞는 검은 정장을 입은 상희였지만 그 매혹적인 입술만은 여전히 붉은 장미빛을 담고 있었다. 검은 옷의 여인의 눈물어린 시선이 잠깐 그 입술에 머물렀다. 상희는 그런 시선을 못본척 다시 눈을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사진으로 돌렸다. 그는 평범한 남자에 속했다. 능력도 가진 재력도 그냥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그러나 상희가 알고 있는 남자는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마음 좋은 착한 남자였다.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특별한 남자였다고 생각하는 상희다. 이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검은 옷의 여인에게로 상희의 시선이 다시 옮겨갔다.
"장례가 끝나면 어디로 가실건가요."
"글쎄요...... 일단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요."
괴로다는 듯 말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상희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러시겠지.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겠지. 당신은 충분히 그런 여자니까.
"그럼 아이들은요?"
"물론 내가 힘이 닿는데까지 키울거에요."
"힘이 닿는데까지......라."
검은 옷의 여인은 이제 더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서서히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인적이 드문드문 끊기자 여인의 눈에도 상희와 같은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여인은 눈을 똑바로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경계. 별로 위험할 것같지 않다고 판단한 여인의 입에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독기어린 말이 나왔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뭐죠? 우리 사이에 이야긴 다 끝난것 같은데."
"그냥. 궁금해서요."
"뭐가......"
"당신이 웃고 있을지. 그게 궁금해서요."
여인은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상희는 이제 손수건을 움켜진 여인의 손을 바라보고있다. 하얀 손수건을 그러쥐고 있는 하얀손. 고생 한 번 안하고 큰 손 처럼 여인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대기업의 막내딸이다. 학력도 재력도 가진 권력도 좋아 벌써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딴 그녀는 다음 달에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 나라를 영영 떠나게 될 것이다. 그게 그녀가 바라던 행복한 결말이니까. 여인은 잠깐 미동없이 서있다가 백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상희에게 건넸다. 상희는 두말 없이 봉투를 받아 자신의 백 속에 넣었다. 그녀가 바라던 행복한 결말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상희 자신이 바랬던 행복한 결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괜한 자책감에 빠져있을 필요가 없다. 상희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인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겨 반대편 홀 쪽으로 가버렸다. 상희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꼽고 서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간 여인이 남자의 팔짱을 다정스럽게 끼며 옆 코너로 사라져 버린다. 여인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상희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사진 속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희의 눈에서 흐른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신에겐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어. ...... 알고 있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결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
처음.
안녕하세요. 단편방에는 너무 오랜만인거 같아요.
원래 이걸 늘려서 장편을 쓰고 싶었지만 저에게는 그런 재주가 부족하기에 그냥 단편에다 올립니다.
뭔가 좀 무거운 분위기의 글을 쓰고 싶어서 끄적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요즘 비도 많이 오고 그러면 무거운 분위기가 딱이죠
전 겁이 많아서 공포 영화 절대 못보는데 언젠가 한 번 도전해 보려구요.
Tip.
워낙 글재주가 없이 쓴 소설이라 다 이해 하실거라고 믿지만 혹시라도 있을 질문을 위해.
맨 위에 나온 죽은 남자는 장례식장의 사진 속의 남자와 동일합니다.
남자를 죽인 여자는 상희씨구요.
검은 옷의 여인은 죽은 남자의 아내입니다.
마지막.
댓글을 나의 힘.!!
첫댓글 잘 보고 가요. 제목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