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 관육정품(觀六情品) : 8송.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6정(情) 즉 근(根)이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여러 게송을 주석하면서, 견(見) 즉 보는 작용과 견자(見者) 즉 보는 주체와 가견(可見) 즉 보여지는 대상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하고, 이어서 견과 가견이 없기 때문에 식(識) 촉(觸) 수(受) 애(愛) 등의 4법(法)이 없고, 애(愛)가 없기 때문에 4취(取) 등의 12인연분(因緣分)도 없다고 설한다. 이어서 이(耳) 등의 5정(情) 즉 근(根)과 성(聲) 등의 5진(塵) 즉 경(境)도 역시 이와 같다고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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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 觀六情品(8偈) 六根에 대한 관찰
cak ur d ndriyapar k n ma t t ya prakara am
눈(眼)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3장(8게)
3-1)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은 육정인데 눈 등의 六情은 色 (聲, 香, 味, 觸, 法) 등의 六塵에서 작용한다.
3-1) dar an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indriy i a ete dra avy d ni gocara //
보는 작용(시각), 듣는 작용(청각), 냄새 맡는 작용(후각), 맛보는 작용(미각), 촉감을 느끼는 작용(촉각), 생각을 떠올리는 작용(사고), 등은 여섯 가지 인식능력이다. 보여져야 할 대상 등(의 여섯 가지)은 이것들의 (=여섯 가지 인식능력의) 활동영역이다.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2) svam tm na dar ana hi tattameva na pa yati/
na pa yati yad tm na katha drak yati tatpar n//
실로 보는 작용은 그 스스로에 있어서 그것 (=눈 자신)이 그것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3)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불의 비유는 눈으로 본다는 법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미 가버린 것 아직 가지 않은 것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이미 이에 대해 충분히 답변했다.
3-3) na pary pto 'gnid nto dar anasya prasiddhaye/
sadar ana sa pratyukto gamyam nagat gatai //
불의 비유는 보는 작용의 증명을 위해 적절치 않다. 그것(=불의 비유)은 앞에서 설명했던, '가는 중인 것, 간 것, 가지 않은 것'에 의해 보는 작용과 함께한다.
3-4)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보는 작용이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본다고 말할 수 없는데 보는 작용이 능히 본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옳지 않다.
3-4) n pa yam na bhavati yad ki cana dar anam/
dar ana pa yat tyeva kathametattu yujyate//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보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3-5)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
3-5) pa yati dar ana naiva naiva pa yatyadar anam/
vy khy to dar anenaiva dra c pyupagamyat m//
보는 작용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고 보는 작용이 없는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보는 작용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 것을 가지고 보는 놈도 이해해야 한다.
3-6)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3-6) tirask tya dra n styatirask tya ca dar anam/
dra avya dar ana caiva dra aryasati te kuta //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3-7)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四法은 없다. 四取 등의 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3-7) dra avyadar an bh v dvij n dicatu ayam/
n st ty up d n d ni bhavi yanti puna katham//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取 따위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3-8)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8) vy khy t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dar anenaiva j n y cchrot rotavyak di ca//
앞에서 설명했던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 보는 작용, 촉감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등은 보는 작용(에 대한 논파)에 의해 알 수 있으리라. 또 듣는 놈과 들리는 것(=소리) 따위도…
첫댓글 관육정품을 화엄에서 찾아보니 눈꽃님이 올리신게 있는데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첫 문단 내용처럼 주체, 작용, 대상 세 가지로 나누는 방식이 제가 말하는 바와 맥락이 같습니다.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법무아님은 보는놈은 식이고 보는작용은 식작용이라고 주장하는데 본글에서는 보는작용을 배제하든 하지않든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식작용이 있을때도 식은 없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좀 이상하죠?
관거래품에서도 간다는 것에는 감도 없고 가는놈도 없다고 나오는데 여기서도 본다는 것에는 봄도 없고 보는 놈 즉 보는 주체도 없다는 의미 같습니다.
보는 놈은 아트만같은 자아개념으로 볼 수 있구요.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아는 작용(식작용)이 있을 때도 아는 놈(식)은 없다가 좀 이상하다구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는 작용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는 놈은 그 안에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론에서 설명하는 보는 놈, 보는 작용, 보이는 것 등은 '자성'을 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했을 시 틀렸다는 걸 논증하는 게 대부분의 게송들이구요.
용수 스님이 중론을 저술한 이유 중 하나는 유부의 해석을 문제삼는 동시에 인무아가 아니라 법무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트만 같은 건 모든 불교 학파에서 부정해온 것이라 새삼스레 또 다시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보는 놈, 봄, 보이는 것 모두를 부정하는 논증을 통해 법무아를 말하는 게 목적이지, 보는 놈에 초점을 맞춰 자아 혹은 아트만 개념이 없다는 걸 굳이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비유비무와 관련해서 올리신 글도 잘 봤습니다.
그리고 법담에서 방문객님이 우리가 못보는 맹점이랄까 이런 부분을 잘 지적하시는 거 같습니다. 노파심에서..ㅎㅎ
'불교에 맞춰 엄밀히 적으려고 하면 말이 아주 난삽해지고 어려워진다'는 말을 여러번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소위 자성적 사고에 맞춰 성립한 거라서 그래요.
중론의 번역, 이해, 접근 방식...등등에서 사람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구요. 또한 강학상의 전형적 접근 방식도 있기는 한데요.
저는 뭐...위에 제가 적은 내용에 기반해서 쉽게 쉽게 가는 편입니다. 아래 내용은 다른 논점을 다루면서 여러번 적었을 건데요. 별 내용은 아니라서요.
위에서 소개된 중론은 그 처음에, 여섯가지 기반과 여섯가지 경계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섯가지 중 '눈'이라는 '보는 것의 기반'을 검토하고, 같은 논리를 나머지 다섯가지에도 적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흔히 눈으로 본다고 하는데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눈은 귀등 다른 다섯가지 기반이나 소리등 다른 다섯가지 경계와 상응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형상이라는 경계와 상응합니다. 그런데 형상은 눈이 아니고, 눈으로 눈을 볼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하지 않습니끼? 도대체 눈으로 보는 줄 어떻게 알까요?
반야부는 기본적으로, 아함부 또는 니까야에서 설해진 내용의 의미를 고찰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함부나 니까야에서의 부처님의 설법을 살펴 보면 "눈으로 본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함부나 니까야의 논리에 따르면, 단지 '눈' 즉 '보는 것의 기반' 곧 '형상이 성립하는 조건'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형상을 떠나 그러한 조건을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엄밀하자면, 어떤 기반과 상응하는 경계를 연결시켜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다는 식의 표현을 할 수 없어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다고 생각하기에, 자꾸 '보는 자'나 '듣는 자' 따위도 나오고, 조건을 떠나 성립해 있는 눈이나 귀를 생각하게 되는 거구요. 그러한 생각은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한 생각은 아닙니다.
아주 엄밀하게 따지자면, 위와 같은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매사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친구가 없어져요...
중론이 무슨 오묘한 뭔가를 제시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엄밀하게 파악해 보자는 거예요. 불자라고 이름을 내걸었으면, 한번쯤은 자신이 그런 노~력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친구에게는 그러지 말고...
중론은 인연법 즉 연기라는 법을 설하신 부처님을 경배하면서 시작합니다. 이걸 기억하면 되요.
눈으로 본다는 표현보다 부처님이 사용하신 <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내가 본다거나 나는 보는자란 생각이 안 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