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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Re:비유비무와 관련해 댓글 단 적이 있는데
법계유심 추천 0 조회 38 24.10.24 19:10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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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10.24 19:17 새글

    첫댓글 관육정품을 화엄에서 찾아보니 눈꽃님이 올리신게 있는데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 24.10.24 19:28 새글

    첫 문단 내용처럼 주체, 작용, 대상 세 가지로 나누는 방식이 제가 말하는 바와 맥락이 같습니다.

  • 작성자 24.10.24 20:26 새글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법무아님은 보는놈은 식이고 보는작용은 식작용이라고 주장하는데 본글에서는 보는작용을 배제하든 하지않든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식작용이 있을때도 식은 없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좀 이상하죠?
    관거래품에서도 간다는 것에는 감도 없고 가는놈도 없다고 나오는데 여기서도 본다는 것에는 봄도 없고 보는 놈 즉 보는 주체도 없다는 의미 같습니다.
    보는 놈은 아트만같은 자아개념으로 볼 수 있구요.




  • 09:43 새글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아는 작용(식작용)이 있을 때도 아는 놈(식)은 없다가 좀 이상하다구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는 작용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아는 놈은 그 안에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론에서 설명하는 보는 놈, 보는 작용, 보이는 것 등은 '자성'을 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했을 시 틀렸다는 걸 논증하는 게 대부분의 게송들이구요.

    용수 스님이 중론을 저술한 이유 중 하나는 유부의 해석을 문제삼는 동시에 인무아가 아니라 법무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트만 같은 건 모든 불교 학파에서 부정해온 것이라 새삼스레 또 다시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보는 놈, 봄, 보이는 것 모두를 부정하는 논증을 통해 법무아를 말하는 게 목적이지, 보는 놈에 초점을 맞춰 자아 혹은 아트만 개념이 없다는 걸 굳이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 작성자 24.10.24 22:12 새글

    비유비무와 관련해서 올리신 글도 잘 봤습니다.
    그리고 법담에서 방문객님이 우리가 못보는 맹점이랄까 이런 부분을 잘 지적하시는 거 같습니다. 노파심에서..ㅎㅎ

  • 24.10.24 23:50 새글

    '불교에 맞춰 엄밀히 적으려고 하면 말이 아주 난삽해지고 어려워진다'는 말을 여러번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소위 자성적 사고에 맞춰 성립한 거라서 그래요.

    중론의 번역, 이해, 접근 방식...등등에서 사람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구요. 또한 강학상의 전형적 접근 방식도 있기는 한데요.
    저는 뭐...위에 제가 적은 내용에 기반해서 쉽게 쉽게 가는 편입니다. 아래 내용은 다른 논점을 다루면서 여러번 적었을 건데요. 별 내용은 아니라서요.

    위에서 소개된 중론은 그 처음에, 여섯가지 기반과 여섯가지 경계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섯가지 중 '눈'이라는 '보는 것의 기반'을 검토하고, 같은 논리를 나머지 다섯가지에도 적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흔히 눈으로 본다고 하는데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눈은 귀등 다른 다섯가지 기반이나 소리등 다른 다섯가지 경계와 상응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형상이라는 경계와 상응합니다. 그런데 형상은 눈이 아니고, 눈으로 눈을 볼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하지 않습니끼? 도대체 눈으로 보는 줄 어떻게 알까요?

    반야부는 기본적으로, 아함부 또는 니까야에서 설해진 내용의 의미를 고찰하는 겁니다.

  • 00:15 새글

    그리고 아함부나 니까야에서의 부처님의 설법을 살펴 보면 "눈으로 본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함부나 니까야의 논리에 따르면, 단지 '눈' 즉 '보는 것의 기반' 곧 '형상이 성립하는 조건'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형상을 떠나 그러한 조건을 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엄밀하자면, 어떤 기반과 상응하는 경계를 연결시켜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다는 식의 표현을 할 수 없어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다고 생각하기에, 자꾸 '보는 자'나 '듣는 자' 따위도 나오고, 조건을 떠나 성립해 있는 눈이나 귀를 생각하게 되는 거구요. 그러한 생각은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한 생각은 아닙니다.

    아주 엄밀하게 따지자면, 위와 같은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매사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친구가 없어져요...

    중론이 무슨 오묘한 뭔가를 제시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엄밀하게 파악해 보자는 거예요. 불자라고 이름을 내걸었으면, 한번쯤은 자신이 그런 노~력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친구에게는 그러지 말고...

    중론은 인연법 즉 연기라는 법을 설하신 부처님을 경배하면서 시작합니다. 이걸 기억하면 되요.

  • 작성자 09:08 새글

    눈으로 본다는 표현보다 부처님이 사용하신 <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내가 본다거나 나는 보는자란 생각이 안 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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