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2. 경남 의령군.
여름 같은 봄날. 계획 없이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선 길. 시골 마을을 이어주는 포장도로를 여유롭게 달리며 때로 뒤차가 바짝 붙으면 비상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붙여서 먼저 보내주기도 하면서 창밖으로 멋진 풍경을 감상하다가 개울을 건너는 다리만 보이면 과감하게 방향을 꺾어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가보기도 했습니다. 죄 지은 건 없어도 시끄러운 개 소리(개가 짖는 소리 맞습니다. 개 같은 인간이 소리 치는 거말고요. ^^;;) 때문에 동네 사람들 스트레스 쌓일까 서둘러 도망치듯 나오기도 부지기수.
그러다가 다다른 막다른 시골 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어느 집앞에서 팥꽃나무를 발견하고 다가 갔더랬습니다. 서해안에 자라는 팥꽃나무가 경상도 첩첩산골에서 피다니... 신기해서 차에서 내려 꽃이나 보려고 갔더니 도로 옆에서 밭일 하시던 할머니께서 참견을 하십니다.
그 꽃 예쁘죠?
예에, 보랏빛이 참 예쁜 꽃이지예. 그런데 이 마을에선 이 꽃을 뭐라고 부릅니꺼?
그거 팥꽃나무예요.
헉, 시골 사투리 꽃이름 하나 알려나 했더니 국명을 제대로 알려주십니다. 이웃 집에도 많이 심어져 있고 당신 집 안에도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합니다. 기껏 알려주시는데 관심 없다고 할 수 없어서 밝은 표정으로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어느새 그늘이 졌다고 하십니다. 소 키우는 외양간(요즘은 큰 외양간을 그냥 우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옆이고 작업 장비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어서 사진은 포기하고 꽃나무 예쁘게 키우셨다고 감탄사 몇 마디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와 넘어가는 석양빛으로 꽃사진이나 찍으려고 다가갔더니...
세상에나 만상에나... 갈구리나비와 애호랑나비가 쌍으로 날아들어 꿀 빨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두 나비 모두 오래 기다려왔던 만남인지라 DSLR 사진은 ISO를 높이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200mm 허겁지겁 연사로 마구 갈겼더니 제대로 선명한 게 없고, 그나마 똑딱이 사진으로 몇 장 건졌네요. 에구, 내가 왜 그랬지?
석주명 선생의 <조선 나비 이름 유래기>에 의하면 앞날개 앞쪽 모서리가 갈고리 모양이라서 갈구리나비가 됐다고 합니다. 앞날개 윗면 갈고리 모양에 주황색(내가 보기엔 노란색인디... 쩝) 무늬가 있는 걸로 봐서 이 녀석은 수컷이겠네요.
사진을 올리려고(요즘 말로 포스팅이라고 합니다.) 정명을 검색했더니 난감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석주명 선생 이후 한국나비도감, 한반도 나비 도감 등 많은 책에서 '갈구리나비'로 표기하고 있는데, 오늘 현재 국생정과 자원관 모두 '갈구리'를 표준어인 '갈고리'로 바꾸고 흰나비 종류라는 걸 표시하려고 그러는 건지 중간에 '흰'자를 넣어서 '갈고리흰나비'를 정명으로 올려두고 있더군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 이름의 선취권 원칙에 의거하여 갈구리나비로 표기하고 괄호 안에 갈고리흰나비를 표기하기로 하였답니다.
최근 들어 예전에 쓰던 용어를 바꾸는 일이 종종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합니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일본식, 한자식 법률 용어 같은 걸 쉬운 말로 바꾸는 거야 저도 적극 찬성하지만 식물명이나 동물명까지 확실한 기준이나 개명 원칙도 없이 일부의 의견을 좇아 마구 바꾸는 건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동물명이나 식물명, 세균명 같은 생물명은 엄연히 선취권 원칙이 있는데... 싫으나 좋으나 그 원칙을 따라 줘야 후학들의 헷갈림도 줄어들 것이고 사람들의 혼동도 줄어들 텐데 말입니다. 이름 하나 바꾸는 거야 손가락만 까딱하면 될 것 같지만 수많은 책과 인터넷 백과사전까지 모두 바꿔야 하는 정말 엄청난 품이 드는 일인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어어, 어쩌다가 글이 이렇게 딴길로 빠져버렸지? 나이가 들고 아이큐가 떨어지면 주제의 통일성 유지가 힘들다더니 점점 딴길로 새는 일이 많아지네요. 어쨌든 다시 정신 차리고 본 주제로 돌아와서... 오늘의 주제는 갈고리나비이고 부제는 '안 가 본 길을 가는 재미'이니까 계속 이어 가야쥬. ^^;;
꽃이나 새나 풍경을 찾아 나선 길에서 종종 예전 학창 시절에 접했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립니다. 그 시의 내용처럼 어느 쪽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 두 갈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는 영원한 화두일 겁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는 남들이 알려준 곳에 가서 꽃이나 새나 풍경을 만나는 데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어디 가자고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나오지 않는 집돌이가 되어갔지요. 모처럼 맞이하는 휴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올해 34년의 직장 생활을 일찍 끝내고 3월 한 달은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주변 사람들이 자꾸 어데 가자고 들쑤셔서... ㅋㅋㅋ)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가 하고픈 일, 가고픈 곳을 찾아나서보고자 목표를 세웠답니다.
내가 한 선택 때문에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내가 선택한 것으로 인해 갖게 될 즐거움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처럼,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 있는 날은 허탕친 다른 날 며칠을 합친 것보다 충분히 즐겁더군요. 갈 때마다 대어를 잡아서 낚시꾼들이 낚시를 가던가요, 어디? 허탕을 쳐도 언젠가 대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남은 날들이 충분히 흥분되고 즐거우니 그러겠지요. 복권 추첨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요. ...저도 그렇게 살려고요. 생각한 대로 되는 인생이 아니라지만, 생각도 안 하고 살다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까 봐 나름대로 파닥거려 봅니다. 저는 주는 대로 먹고 마련해준 잠자리에서 편안히 잠들다가 어느 순간 그 주인의 손에 운명을 달리하게 될 가축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요. 인간이기에 인간답게 살다가 언젠가 그날이 오면 인간으로서 웃음으로 회상하며 눈을 감을 겁니다.
갈구리나비 사진 올리면서 별 희한한 얘기들을 짬뽕으로 섞어서 주절주절한 거 보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갈구리나비한데 걸려들었구나. 역시 갈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