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포
김포의 옛 이름 금포의 '금(黔)'은 '검'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기한 글자이며 개=포 이므로 김포는 '검개'라는 말이 된다.
'검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김포의 지형을 나타낸 말로서 검=금(金)=금(黔)이 모두 '큰 개펄'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또 '김포(金浦)'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고려 때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길가에서 금덩어리를 주웠다가 그 금으로 인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상할까 걱정되어 한강에 금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그곳을 '투금뢰' 또는 '투금탄(投金灘)'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김포'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2) 고촌면
고촌면은 고란태면의 '고', 임촌면의 '촌'을 합칭한 것이다.
3) 고란태면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대동지지〉에는 고란태면 으로 표기해 한자가 다르나 김포군에서 만든 세개의〈김포군읍지〉에는 모두 고란태면 으로 일치한다.
옛 고란태면의 면소재는 향산리였고, 천둥고개 북편과 서 남쪽 일대를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고란태면의 고란태는 '골안터'가 변천한 것을 의미가 좋은 한자를 표기한 지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4) 임촌면
임촌면의 글자 풀이로는 '숲고을'의 뜻이지만 이 일대에는 숲고을이라 할만큼 큰 산이 없으므로 훈으로 표기한 지명은 아닌 듯 하다.
한자표기도 수풀 임과 임할 임으로 일관성이 없는것도 이를 방증한다 1976년 간행된〈김포군지〉에 따르면 예전 검포현 시절에 고을의 현치소재가 은행정 마을이었다고 했는데 이를 근거로 '임촌'은 곧 임고을이 되고 '수령이 있는 고을' 이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5) 사우동
사우동은 마을이 진산을 중심으로 그 앞자락에 펼쳐 있고 조수가 드나들던 한강변에 위치함으로 인해 갯벌에 모래가 많이 쌓였다 하여 "모래모퉁이 마을"이라는 뜻의 사우동으로 불리어졌다.
6) 풍무동
풍무동은 풀무골 즉 한자로 야동(冶洞) 이라고 했었는데, 조선조에 풍무리로 써왔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풍무리 전체의 형국을 보고 풀무골이라 했고, “풀무질할 때의 불꽃처럼 마을의 생활형편도 흥했다 꺼졌다 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7) 양촌면
조선시대에 양릉면과 상곶면, 반이촌면으로 있었으나, 1914년 3개면을 합하여 양릉면이라는 '양'자와 반이촌면이라는 '촌'자를 따서 '양촌면'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법정 9개리와 42개의 행정리로 되어 있다.
8) 양곡리
양곡리는 옛날에 양릉리와 고단리(고다니), 곡촌, 오라리 일부를 1914년의 행정구역 재편시에 양릉리라는 '양'자와 곡촌이라는 '곡'자를 따서 '양곡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양곡리 시장은 경기 서부지방에서는 큰 시장으로 유명했으며 장날은 매 1일, 6일로 되어있다.
9) 양곡1구(오라니장터)
이 마을은 '오라리'가 '오라니'로 변한 것으로 보이며, 보통 '오라니장터'로 부르는데 지금은 '양곡시장'이라 부른다. 양곡에는 양촌면사무소와 양곡초등학교가 있다.
10) 골마을
이 마을은 골짜기에 있다 하여 '골마을(골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1) 양 릉
옛날에 아기능이 있었다 하여 '양릉'이라 불러왔는데 '능안말'이라는 마을도 있다.
그리고 그 능으로 인하여 '양릉면'도 있었으니 그리 작은 능은 아닌 것 같다.
양릉리 옆으로 한강으로 통하는 큰 ‘개’, 즉 포구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양릉에 옛성(토성)이 있다 하였는데 성지는 찾아볼 수 없다.
12) 누산리
이 마을은 옛날에 누리, 온산, 발산, 3개리였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에 '누'자와 '산'자를 합하여 '누산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13) 원 산
이 마을은 48번 국도변에서 양곡으로 진입하는 삼거리로서 대개 '원산'또는 '누산삼거리'라 부르고 있다. 조선조의 행정구역표를 보면 '온산리'라 되어 있는데 현재는 '원산' 이라 불렀다고 한다.
14) 누 촌 (다락마을)
이 마을은 한강변에 위치하여 있는데 다락과 같이 매달려 있다 하여 '누촌'이라 칭하는데 현재는 한강변에 제방이 완벽하게 축조되어 있다.
15) 구발산
보통 '바라미'라고 부르는데 '바리때'의 '바리'와 '뫼'가 결합한 '바리뫼'가 '바리미'로 변한 것이다. 산의 형세가 그릇 모양을 닮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발산삼거리의 산이 바리를 엎어 놓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 해 평(게들이)
이 마을 앞 논에 옛부터 게가 많이 서식하여 게를 많이 잡는 곳이라 하여 '게들이'라 불러오게 된 것이다.
17) 석모리
옛날의 석산리, 모산리, 질곶리를 합하여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 때, '석산리'라는 '석'자와 '모산리'라는 '모'자를 따서 '석모리'라 칭하게 된 것이다.
18) 석 산(돌미)
돗자리의 고어는 '돗'이었다. '돗뫼'가 음이 변하여 '돌뫼', '돌미'로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의 형세가 돗자리를 펴놓은 듯 편편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 반 월
이 부락의 산 형세가 반달과 같이 생겼다 하여'반월'이라 불리워 오고 있다고 전한다.
20) 질 곶
마을 뒤 산형세가 거머리와 같이 길게 뻗어나갔다 하여 '거머리 질'자를 사용하여 '질곶'이라 했다고 전한다.
21) 모 산
이 마을 지형이 '모'자 형으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모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22) 지 난
이 마을은 운요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지형이 '이끼야' 자와 비슷하다하여 '지야'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운요산에 난초가 많이 자란다 하여 그 마을을 '지난'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23) 마산리(마리미)
이 마을은 옛 상곶면 대마산리와 양릉면의 소마산리를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두 개 이를 합하여 "마산리'라 칭하게 된 것이다. 마산의 유래는, 옛날에 의류의 재료로 대부분 삼베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마재배가 번창하여, 이 마을에서도 삼 재배를 많이 한 관계로 '마산리'라 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리미'의 '미'는 '뫼'가 변한 것이다.
24) 구래리
구래리는 원래 상곶면의 구래동 상곶리와 양릉면의 오라니 일부를 병합하여 구래리라 부르게 된 것인데, 현재의 행정리는 구래동, 구지, 가오대, 오라니, 성산 등 5개리로 분리되어 있다.
25) 구래동
이 마을은 옛날에 궁중의 내시부에서 근무하던 내관 또는 환관들이 퇴직하여 내려와서 살던 마을인데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아홉번이라도 다시와서 살고싶은 마을'이라 하여 '구래동'이라 불러왔다고 전한다.
26) 구 지
이 마을 뒷산에 율사라는 절이 있어서 지금도 '밤절굴'이라 부르는데 이 절이 이름난 절이 되어 시인들이 모여 작시를 하였는데 구지라는 시구절을 많이쓴다하여 이 마을이름을 '구지'라 불러 왔다 한다.
27) 가오대
이 마을은 가현산맥에서 구래동을 거쳐 궂지로부터 내려와 꾸불꾸불한 토성곽과 같이 생기고 마을터가 아름답다고 하여 가오대라 불리워 왔다고 한다.
28) 오라리(오라니)
이 마을은 원래 양릉면 오라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에 구래리로 편입된 마을이다. 그러나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오아리' 또는 '월안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29) 대포리
대포리는 원래 향모포, 황포, 대포리와 검단면 금곡리 일부를 합하여 대포리로 부르게 된 것이며, 행정리로는 향동, 황포 등 2개리로 되어 있다.
30) 향 동
옛날에 마을 아래에 포구가 있어서 '향모포'라 불리워 오다가 행정구역 병합시에 금곡리 일부를 합하였다. 옛적의 포구가 없어졌으므로 '포'자를 빼고 '향동'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옛날에는 마을에 향나무가 많이 있어서 '향나무골'이라 불리워 오던 것을 '향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1) 황 포
이 마을은 원래 대포리와 황포리의 두 개의 포구마을이 있었는데, 현재 눌재 양성지선생의 대포서원이 있는 곳이 대포리이며, 그 아래마을이 황포인데 이 곳에는 옛날에 포구가 있어 '황개울'이라고도 했던 곳이다.
P/S 윗글은 출처불명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지명은 원래 당연 한글이었으나 일제치하에서 행정편의의 기치아래 통치의 편리를 위해 행정단위를 구획하면서 원래 지명의 일부를 따오거나 한자로 바꾸어 따온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에서처럼 고촌면(현재는 고촌읍)이 고란태면의 ‘고’와 임촌면의 ‘촌’을 단순해서 합쳐 지었습니다. 해서 지명이 거의 두글자이지요. 강화, 김포, 인천, 군포, 부천, 포천, 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