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단편 소설 '순이 삼촌' 에서 4.3사건 묘사해준 부분만 가져왔어 전부는 너무너무 길어서
이것만 읽어봐도 괜찮을듯......... 그래도 길면 굵은글씨만 읽어도 괜춘
혹시 원하면 이따가 셔틀방에 텍스트파일 찔게 시간내서 한번만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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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상마저 소각 때 태워먹고 송진내 물씬 나는 날송판때기 위에다 제물이라곤 마른생선 하나에 메밀묵 한 쟁반, 고사리, 무채 각각 한 보시기밖에 진설할 것이 없던 그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메는 꼭 산디쌀밥이었다. 자정이 넘어 큰아버지가 우리들을 깨워 세수하고 오라고 방 밖으로 떠밀었을 때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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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순이삼촌이 단서(端緖)가 되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흉물스럽던 까마귀들도 사라져버리고, 세월이 삼십년이니 이제 괴로운 기억을 잊고 지낼 만도 하건만 고향 어른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잊힐까봐 제삿날마다 모여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때 일을 명심해 두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제사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다시 머릿속에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그 사건은 당시 일곱살 나이던 내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바로 전해에 폐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도피자라는 낙인을 받고 노상 마룻장 밑에 숨어살던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밀항해 가버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나는 큰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죽은 어머니 생각에 걸핏하면 남 몰래 눈물짓던 내가 그 울음을 졸업한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의 그 사건이 내 어린 가슴팍을 짓밟고 지나간 뒤였다.
말하자면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이 뚝 떨어진 거였다. 그리고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마다 흔전만전 허옇게 널려 있던 시체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나자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유독 나에게만 닥쳐온 불행이 아니고 그 숱한 죽음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어머니가 폐병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날 그 사건에 말려 어차피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날 헛간에 앉안 멕(멱서리)을 잣고 있는디 군인들이 완(와서) 연설 들으레 오랜 하지 안해여.” 큰당숙어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그날은 유달리 바람 끝이 맵고 시린 날씨였다. 그래서 여편네들은 돈지코지 미역밭에 나가 물질할 엄두를 못 내고 집에서 물레로 양말 짤 실을 잣거나, 텃밭의 배추포기에 오줌거름을 주든지, 시아버지를 도와 지붕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동여맬 동아줄을 띠풀로 꼬고 있었다. 그 무렵 젊은축들은 공연히 도피자로 몰려 낮에는 마을에서 사오리 한라산 쪽으로 올라간 큰냇가 자연동굴에 숨어 있다가 밤에나 내려오는 박쥐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나절에 길수형과 나는 큰아버지를 도와 밭거름으로 쓰려고 밤사이 갯가에 올라온 듬부기나 감태 따위 해초를 한군데 모아놓는 일을 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점심요기로 할머니가 내준 식은 고구마 한 자루씩 받아먹고 있노라니까 별안간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보통때 같으면 순경이나 대동청년단원 몇사람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수십 명 퍼져 다니면서 득달같이 재촉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좀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전해 5․10선거 무렵에도 그렇게 득달같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적이 있어서 그때처럼 무슨 중요한 연설이 있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길수형과 나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뒤를 따라 국민학교로 갔다. 먼저 온 동네아이들 여남은 명이 벌써 조회대 밑에 진을 치고 있었다. 시국 강연회는 아이들에게 퍽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 연사들에게 유행하던 신파조의 웅변이 퍽 재미있고 맨 끝순서로 부르는 “역적의 남로당을 때려부숴라”라는 씩씩한 노래와 우렁찬 만세삼창은 정말 가슴 뛰게 하는 것이었다. 길수형과 나는 할머니 곁을 떠나 아이들 있는 데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운동장 흙은 진눈깨비가 녹은 다음이라 몹시 질척거렸는데 밑창 터진 고무신에 물이 새어들었다. 나는 발이 젖어 시렸지만 참고 기다렸다.
“그때 운동장에 뫼인 사람 수가 대강 얼매나 되어시까 마씸?” 하고 육촌 현모형이 물었다. 형은 당시 열댓살 나이에 도피자로 몰려 피해다녔으므로 요행히 그날 사건현장에는 없었다.
“겔쎄, 마을 호수가 삼백 호가 넘어시니까 한 천 명쯤 안됐이까? 병든 할망들까장 부축해연 나와시니까." 하고 큰당숙어른이 말하자 큰아버지가 참견했다.
“아니 그보다 많을 거여, 선흘리와 논흘리 쪽에서 소개해연 온 사람들도 건줌(거의) 백 명은 되어시니까.”
잠시 후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조회대 위로 권총 찬 장교가 올라섰다. 그 장교의 지시에 따라 모두 질척거리는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강연이 시작되나보다 했는데 웬걸 장교는 지서 박주임과 이장 강씨를 단 위로 불러세우더니 지금부터 군인가족을 골라내겠다고 큰소리로 언명하지 않는가.
“군인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단 밑에는 입산자 색출 때문에 종종 마을에 나타나던 함덕지서 순경 두 명과 창 끝이 검게 그슬린 대창을 든 대동청년단 청년 예닐곱 명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뒤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군인들이 이열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한결같이 굳은 표정을 보자 사람들은 적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문 모르는 그들은 옆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안간에 무슨 일일까? 군인가족들에게 보리쌀 배급이라도 주려나? 막상 군인가족 당사자들도 나가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자, 장교는 빨리 나오라고 빽 고함을 질렀다. 군인가족들은 주뼛주뼛 눈치보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단 앞으로 가 이장과 순경과 대동청년단 사람들의 심사를 받고 나서 단 뒤로 인솔되어 따로 앉혀졌다.
그 다음에 순경가족이 나가고 이어서 공무원가족이 나갈 즈음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군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가족에 이어 마지막으로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왔을 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정숙이 아버지, 우리 친정 오래비가 작년에 병정간 거 무사(왜) 알지 않우꽈?”
“이장님 마씸, 우리 사촌동상이 금녕지서에 순경으로 있우다. 김갑재라고 마씸.”
“뒤로 물러갑서. 다들 직계가족이 아니라 아니됩니다. 물러갑서.”
이장은 손을 내저었다.
“직계가족이 뭐우꽈?”
“이장님. 날 좀 내보내줍서.”
이런 북새통에 별안간 군중 속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났다.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에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그때 서편 울타리 돌담이 여기저기서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에 못 이겨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울타리 터진 데로 몰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지체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다시 운동장 복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적삼에 갈중의를 입은 노인이 한 사람 엎어져 죽은 모양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군인 여남은 명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조회대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 명의 군인들도 앞에총 자세로 잽싸게 뛰어나오더니 정면에서 사람들을 포위했다. 단상의 그 장교는 권총을 어깨 위로 빼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강하게 턱을 올려젖히자 철모가 햇빛에 번쩍 빛났다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수행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둥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장교의 귀설은 이북 사투리가 겁 집어먹는 부락민들의 머리 위에 카랑카랑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제주읍으로 소개시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만 완전히 넋잃고 절망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무엇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는가? 마을 쪽에서 해풍을 타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더욱 심하게 밀려오고 불티가 까맣게 뜬 하늘에 불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게다가 이따금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난 그날 섯(西)동네에 쇠(소) 흥정하레 갔다 오던 참이랐우다. 마악 빌레동산 잔솔밭에 당도해연 내려다보난 묵은 구장네 집허구 종주네 집이 불붙어 있십디다. 잔솔밭이 숨어서 보난 군인들이 조짚뭇을 빼어다 불붙여 들고 이 집 저 집 옮겨댕기멍 추녀 끝뎅이에다 불을 당기고 이십디다."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교문을 향해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별안간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 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때 큰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이고, 난 그때 저 길수놈하고 상수녀석(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로고. 어머님하고 아명(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이놈우 새끼들이 어디 가 박혀신지……”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바친 욕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두살난 그 아기가 바로 방앳간 허는 장식이여, 후제 외할망이 키웠쥬. 이젠 결혼도 하고 씨 멸족할 뻔한 집이서 아들 둘까지 낳아시니 죽은 어멍 복을 입은 것일 거라, 아매도.” 작은당숙의 말이었다.
죽은 사람을 보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앞이 트였지만 길수형과 나는 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서 있는 조회대 뒤로 달려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다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총을 쏠 테지.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서편 울타리에 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군인들은 긴 장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건 교무실 앞 추녀 끝에 매달아두었던 것으로 학교 운동회 때마다 비둘기들을 넣은 대바구니 두 개를 맞붙여 얇은 종이를 발라 만든 큰 공을 높이 매달아놓은 데 사용되던 거였다. 그것은 얼마나 신나는 경기였던가.
청백으로 나뉜 우리들이 모래 넣어 꿰맨 헝겊공(오제미)을 던져 상대편 바구니를 먼저 터뜨리는 순간 비둘기들이 날고 머리 위로 오색 테이프가 흘러내리고 색종이가 나부끼던 기분이란. 그런데 바구니공을 매달아놓던 장대가 이런 엉뚱한 데 쓰일 줄이야. 장대 두 개는 이제 한쪽에 몰려 있는 사람을 울타리에서 떼어내서 내모는 구실을 했다. 장대 양끝에 군인 한 사람씩 붙어서 군중 속으로 끌고 들어가 장대로 오십 명쯤을 뚝 떼어내어 교문 밖으로 내몰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을 틈타 길수형과 나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할머니가 있는 조회대 뒤편으로 냅다 뛰어갔다. 청년단원들이 우리 다리를 겨냥해서 대창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나 용케 맞지 않았다. 우리가 쫓기며 조회대 뒤로 가자 거기 모인 우익인사 가족들이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넣어 주었다. 할머니가 달려들어 치마를 벌리고 닭이 병아리 품듯이 우리를 싸서 숨겼다. 우리 뒤를 쫓던 청년단원 두 명이 우리를 포기한 것은 마침 우리 뒤미처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과 아낙네 열 명쯤이 달려들었다가 마구 내지르는 대창에 쫓겨갔다.
장대 두 개가 서로 번갈아가며 사람들을 몰아갔다.
장대가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장대에 걸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렸다.
장대 뒤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공포를 쏘아대자 사람들은 장대에 떠밀려 주춤주춤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사람들은 휘둘러대는 총개머리판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갔다. 가면 죽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떻게 제 발로 서서 걸어가겠는가. 뒤처지는 사람들에게는 뒤꿈치에다 대고 총을 쏘아댔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길수형이 말했다.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름들을 밀어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 안 들어가젠 밭담 우엔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흘리멍 살려달렌 하던 모양입디다.”
“쯧쯧쯧, 운동장에 벳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놓으면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죽은 사람 몇백 명이나 되까?” 하고 작은당숙이 말하자 길수형은 낯을 모질게 찌푸리며 말을 씹어뱉었다.
“면에서는 이 집에 고구마 멫가마 내고 저 집에 유채 멫가마 소출냈는지는 알아가도 그날 죽은 사람 수효는 이날 이때 한번도 통계 잡아보지 않으니, 내에참. 내 생각엔 오백 명은 넘은 것 같은디, 한 육백 명 안 되까 마씸? 한번에 오륙십 명씩 열한 번에 몰아가시니까.”
열한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사람들이었다. 때마침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중지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예외없이 ‘만약’이란 가정이 따라왔다.
만약 대대장이 읍에서부터 타고 오던 찝차가 도중에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면 한 시간 더 일찍 도착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삼백 명이나 사백 명은 더 살렸을 것이다.
따라서 희생자는 백 명 내외로 줄어들 것이고, 또 적에게 오염됐다고 판단된 부락을 토벌해서 백 명 정도의 이적행위자를 사살했다면 그건 수긍할 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살자 육백 명이란 수효는 옥석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사격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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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안팎으로 혹독하게 부대낀 마을 남정들 중에는 아버지처럼 여러 달 전에 밤중에 통통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해버린 사람도 있고 육지 전라도 땅으로 피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사내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큰놈은 읍내 이모네 집에, 샛놈(가운데 아들)은 함덕 외삼촌한테, 막내놈은 또 어디에 하는 식으로 사방에 뿔뿔이 흩어놓았다. 그건 아마도 한군데 모여 있다가 몰살되어 씨멸족하면 종자 하나 추리지 못할까봐 생각해낸 궁리였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 있었는데, 이들은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할 수 없이 한라산 아래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난했다. 행방을 알 길 없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던 순이삼촌도 따라 올라갔다. 이 섬은 워낙 화산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뚫려 있어서, 우리 부락처럼 폭도에도 쫓기고 군경에도 쫓긴 양민들이 몰래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 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 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쌀은 아끼고 들판에 널려 까마귀밥이나 되고 있는 썩은 말고기를 주워다 먹었다. 겨울이 되어도 난리 때문에 미처 내리지 못한 소와 말이 목장에는 좀 남아 있었는데 그냥 놔두면 한라산 공비들의 양식이 된다고 토벌군이 총으로 쏘아죽여, 쇠고기만 운반해가고 말고기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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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 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에서 여러 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女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날 마당에서 도리깨질하던 순이삼촌이 남편의 행방을 안 댄다고 빼앗긴 도리깨로 머리가 깨어지도록 얻어맞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들은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 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써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 보낸 우리 할아버지의 처사는 백번 잘 한 일이었다. 아직 스무살 어린 나이에 별 분수를 모르던 고모부는 할아버지가 꾀로 어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하고 만 것이었는데 고모는 고모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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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섣달 열여드레 그날 해질녘이 다 되어서 군인들이 두 대의 스리쿼터에 분승해서 떠난 다음에도 마을사람들은 그대로 운동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조회대 뒤 우익가족이 있는 데로 몰려 살아남은 가족끼리 서로 붙안고서 마을에서 들려오는 타죽는 소 울음보다 더 질긴 울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내 입에서도 겁먹은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운동장의 진창흙은 함부로 내달린 스리쿼터 바퀴자죽으로 여기저기 무섭게 패어 있고, 벗겨진 만월표 고무신짝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밀려와 땅거죽이 붉게 물들었다. 교실 창이 이내 벌개졌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하늘 가득히 붉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불기운에 압도되어 더욱 서럽게 곡성을 올릴 뿐 누구 하나 울타리께로 가서 불타는 마을을 직접 내려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마을을 태우는 불빛은 어둠을 사르며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확 붉었다가 꺼져버리는 저녁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빛은 오히려 어두워질수록 더욱도 큼직하게 군림하여갔다. 낮게 드리운 구름떼는 불빛에 물들어 붉은 내장처럼 꿈틀거리고, 바다는 멀리 달려도섬까지 불빛이 벌겋게 번져나가 마치 들불이 타오르는 형국이었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도 더러운 피에 얼룩진 듯 불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마을 쪽에서는 집집마다 불붙은 고방(庫房)의 쌀독들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할아버지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던 큰아버지는 군인들이 마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싶자 변소 가는 척하고 몰래 학교를 빠져나갔다. 할아버지는 며칠 전 남의 집 소뿔에 찔린 허벅지 상처 때문에 기동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맥없이 돌아왔는데 그의 축 늘어진 적삼 소매에서는 연기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할머니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 우리도 따라 울었다. 할아버지는 짐작대로 총 맞고 죽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시신에 화기가 미치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문짝들을 떼어 텃밭으로 내던지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병풍을 들고 나오다가 감나무 밑에서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한기를 피해 모두 한교실로 몰려들어가 서로 붙안고 밤을 지새웠는데, 밤중에 우리들은 두 번 호되게 놀랐었다. 한번은 마을에서 대밭이 타면서 마구 터지는 폭죽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밤이 이슥해진 그때까지 시체 무더기 속에 파묻혀 까무러쳐 있었던 것이다. 교실 안에 들어선 당신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길수형이 가서 소매를 잡고 끌어도 막무가내로 뿌리치고 저만치 홀로 떨어져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울지도 않았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 울음은 공포가 물러가는 며칠 후에야 둑이 터지듯 밀려나올 것이었다.
불은 이튿날 아침까지 탔다. 밤새 울음으로 탈진했던 사람들이 날이 새자 아연 활기를 띠었다.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인데 우리들은 마을로 한꺼번에 몰려갔다. 갯바람에 밀려오는 자욱한 연기 때문에 맞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멀찍이 우회해서 바닷가로 해서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은, 밤새 뜬눈으로 새우며 운데다 독한 연기를 쐬어서 토끼눈처럼 빨개 있었다. 아니, 살려고 눈이 벌개 있었다는 표현이 더 옳으리라. 불타고 있는 집이 아직도 많아서 사람들은 불 꺼진 해변 쪽에 하얗게 몰렸다.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었다. 불타버린 집터 아무데나 들어가 타다 남은 좁쌀, 고구마를 퍼담았다. 고구마 중에도 탄숯같이 되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먹기 좋게 익은 것도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으로 전날 점심과 저녁을 거른 고픈 배를 달랬다. 타죽은 소, 돼지도 각을 내어 나누어 가졌다.
이렇게 사람마다 등짐 하나씩 만들어 지고 함덕으로 소개하였다. 밤새 울음으로 탈진했던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을까? 모두가 보통때 두 배나 되는 짐을 지어날랐다. 순이삼촌은 멱서리 하나를 지고도 부족했던지 몸뻬 가랑이에다 탄 좁쌀을 채워넣어가지고 함덕까지 시오릿길을 걸어갔던 것이었다. 수용소 시설도 없이 그냥 함덕에 내팽개쳐진 우리 부락 사람들은 우선 잠잘 곳이 문제였다. 용케 빈방이나 온 가족이 다 떠나버린 도피자 집이 얻어걸린 경우는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식구들은 말방앗간이나 남의 집 헛간, 외양간을 빌려 써야만 했다. 하기는 빈방을 구한 사람도 이불 없기는 매한가지라 방에다 보릿짚을 잔뜩 넣고 살았으니 헛간이나 외양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도피자 가족들은 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취조를 받고 닷새 만에 풀려나왔는데 순이삼촌도 그중에 끼여 있었다. 그 닷새 동안 할머니 심부름으로 길수형과 내가 번갈아가며 차좁쌀 주먹밥을 매일 한덩어리씩 차입해주었다. 마지막날엔 내가 주먹밥을 가지고 가다가 도중에 풀려나오는 순이삼촌을 만났는데 그 몰골은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비녀가 빠져나가 쪽이 풀리고 진흙으로 뒤발한 검정 몸뻬에다 발은 맨발이었는데, 길가 돌담을 짚고 간신히 발짝을 떼며 허위허위 걸어오고 있었다.
삼촌은 서울 우리 집에 있을 적에 궂은날이면 허리뼈가 쑤셔 뜨거운 장판에 지져대곤 했는데, 생각하면 그게 다 그때 얻은 골병임에 틀림없었다.
함덕으로 온 지 두 달도 못되어 양식이 떨어진 피난민들은 들나물과 갯가의 파래나 톳을 삶아 멸치젓 국물에 찍어먹으면서 간신히 두 달을 버텼는데 그제서야 소개령이 해제되어 향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락민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일주도로변의 순이삼촌네 밭을 비롯한 네 개의 옴팡밭에 늘비하게 널려진 시체를 제각기 찾아다가 토롱(土壟)을 만들어 가매장했다. 석 달 가까이 방치되었던 시체들이라 까마귀밥이 되고 풍우에 썩어 흐물흐물 문드러져 탈골되었으니,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옷가지를 보고 구별했는데 동(東)동네 누구는 제 아버지 시신을 찾아놓고 지고 갈 지게를 가지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가져가버린 일도 있었다. 애어머니들은 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건 죽는 순간에도 몸으로 총알을 막아 자식을 보호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그럭저럭 시체를 가매장하고 나서 밭에 나가 보리를 거둬들였는데, 거둬들일 시기를 놓친 뒤라 대궁이 썩은 보리들이 온 밭에 늘비하게 쓰러져 몽창몽창 썩고 있었다. 썩어가는 보리이삭들은 퍼렇게 싹이 트고 들쥐들이 마구 설쳐댔다. 게다가 난리 때문에 한번도 김을 못 매어 범이 새끼치게 잡초가 무성했으니 그해 보리농사란 게 한 집에 멱서리로 하나가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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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순이삼촌만큼 후유증이 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재주도는 왜 박그네를 찍었냐고... 나도답답하다..나는 달님지지였는데 아빠는 박지지였어 내가 왜?박지지하냐고 물어봤더니 아빠가그러더라 박이되야 제주도가발전한다고 그때생각났어 아빠가 육칠년전에 나한테 한말을.. 내가중학교때 아빠가이런말을 해줬어 박정희가 죽기직전까지 제주도 개발에 박차를가하고 있었데 박정희 계획 속에서 제주도가 꽤 큰비중을 차지했나봐 한창 개발이 진행되던 중에 딱박정희가 암살당한거야 그래서 개발계획이 중단됬어 아빠는 그때가 청년시절이었는데 그렇게 박정희가 죽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개발중단의 피해를 본거지 그래서 그딸인 박이 이어서 해줄꺼라 믿는거같았어 6년전부터 그때박정희가 몇년만
더살았다면 제주도 훨씬 잘살았을꺼라던 생각을 갖고있던 아빠한테 내가뭔말을 하겠어.. 그리고 4.3사건은 여시들알다시피 이승만시절이라 우리아빠 즉 50대에서 60대는 그렇게 큰 트라우마가 없나봐 5.18이나 부마항쟁은 비교적 중장년층들이 직접겪은 사건이지만 4.3유공자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그게아빠 엄마는 아마그때 갓난아이이거나 태어나지도 않았으니..잊혀진거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이나 전두환군부독재시절 민주화항쟁소식은 제주도와는 좀유리되있었어 피해자가 거의없다고 들었다.. 민주화의바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못받았다들었어 이게변명이라면 변명인데 제주도 답없다 다잊었냐하니까 마음아파서 댓글남긴다..
첫댓글 광주만 기억하고 제주도는 4.3을 잊고 부산은 부마항쟁을 잊었다
쪄줬음 좋겠어...읽고 싶은데 도서관에 없다라고.. 아 ..
깨어있지 못한..대부분의 제주도민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꼭 기억하세요
인천사람도 아는 4.3사건을 제주도는 잊었냐구요...
제주도 4.3관련 민속박물관만 가서 설명듣고 그림으로 본것도 난 끔찍하던데.... 진짜 잊어나요?
제주도..............잊었나요................도대체 왜 박근혜를 뽑은거야........
스크랩하게 해줘..ㅠㅠ
우리 외증조 할아버지도 4.3때 돌아가셨어... 이번 정부도 이명박때처럼 4.3을 진상규명하긴 개뿔 인정하려고도 들지 않겠지 너무 착잡하고 속상해 진짜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언니들 미안 ..
나 대구여시인데 오늘 동네가 축제분위기라는 느낌때문에
너무 열받아서 막 싸질렀나봐 기분나빠진 여시들에게 사과함..
슬프다 정말...
제주도는 잊었어 잊은거야 어떻게 그렇게 된거지?
아진짜화난다 우리나라진짜 미친거같애
돌았다 진짜...
참...
재주도는 왜 박그네를 찍었냐고...
나도답답하다..나는 달님지지였는데 아빠는 박지지였어
내가 왜?박지지하냐고 물어봤더니 아빠가그러더라 박이되야 제주도가발전한다고 그때생각났어 아빠가 육칠년전에 나한테 한말을..
내가중학교때 아빠가이런말을 해줬어 박정희가 죽기직전까지 제주도 개발에 박차를가하고 있었데 박정희 계획 속에서 제주도가 꽤 큰비중을 차지했나봐 한창 개발이 진행되던 중에 딱박정희가 암살당한거야 그래서 개발계획이 중단됬어 아빠는 그때가 청년시절이었는데 그렇게 박정희가 죽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개발중단의 피해를 본거지 그래서 그딸인 박이 이어서 해줄꺼라 믿는거같았어 6년전부터 그때박정희가 몇년만
더살았다면 제주도 훨씬 잘살았을꺼라던 생각을 갖고있던 아빠한테 내가뭔말을 하겠어.. 그리고 4.3사건은 여시들알다시피 이승만시절이라 우리아빠 즉 50대에서 60대는 그렇게 큰 트라우마가 없나봐 5.18이나 부마항쟁은 비교적 중장년층들이 직접겪은 사건이지만 4.3유공자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그게아빠 엄마는 아마그때 갓난아이이거나 태어나지도 않았으니..잊혀진거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이나 전두환군부독재시절 민주화항쟁소식은 제주도와는 좀유리되있었어 피해자가 거의없다고 들었다.. 민주화의바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못받았다들었어 이게변명이라면 변명인데 제주도 답없다 다잊었냐하니까 마음아파서 댓글남긴다..
읽을 책이 너무 많다..그러나 기쁘다..계속 무지하지 않을 수 있어서..
나제주도여시인데..진짜제주도사람들4.3에대해무지했어..나는초등학교때였나담임선생님이되게생각이올곧고그러신분이라서우리반끼리개인이운영하는4.3사건일어났던그런장소같은데현장체험이라고데려가시고해서알게되었는데..그때그런일이있었다는걸처음알았어.진짜순이삼촌읽고엄청울었어..무지가죄다진짜
나도 제주도 투표율보고 너무 놀람...
시간날때 읽어야겠어 스크랩해갈게~!
[제주도4.3사건] 부끄럽지만 이 사건 잘 몰라.. 무지몽매한 국민이 되지 않을게 고마워
소름이... 이게 과거만일까... 어찌 살아야되는걸까..
알쓸신잡보고 연어했는데 좋은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