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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탐화,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소?"
이심환은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훑어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보니 철담진팔방 진대협이었구려. 어쩐지 저 어린것이 겁도 없이 함부로 살인을 행한다 했더니 진대협이 그의 뒤를 도와주고 있으니 그가 누군들 죽이지 못하겠소?"
진효의는 앞으로 걸어오면서 냉소를 날렸다.
"내가 살해한 사람은 아마 이형의 절반도 되지 못할 것이오."
이심환은 아무 표정 없이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야릇한 눈빛을 발했다.
"진대협, 겸손할 필요는 없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만약 내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악독하고 냉혹한 것으로 해석되겠지만 귀하가 살인을 한다면 그것은 즉 하늘을 대신해 도(道)를 행한 것으로 평가되지 않겠소?"
여기까지 말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어린애를 가리켰다.
"오늘 일만 하더라도 만일 저 어린것이 나를 죽였다면 필시 의원을 모셔 가기 위해 정당한 살인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 것이오. 그리고 그가 진대협과 함께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암적인 존재를 제거했다는 풍문이 퍼질 게 분명하지 않소?"
진효의는 비록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모조리 겪은 능구렁이지만 이때는 얼굴이 다소 붉어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이심환이 은근히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는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가 분해 죽겠다는 듯 다시 방성통곡을 했다.
"진백부님, 왜 저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습니까?"
진효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너를 손상시켰다면 자연히 복수해 줄 사람이 나서겠지만 이탐화가 널 상하게 한 이상 너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어린애는 울음을 뚝 그치고 반문을 했다.
"왜... 그것은 무엇 때문이죠?"
진효의는 대답을 하기 앞서 우선 이심환을 힐끗 쳐다보았다.
"너는 너를 상하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어린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잔악무도한 흉적(兇賊)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진효의의 눈동자에 한 가닥 악독스러운 미소가 스쳐갔다.
"그는 바로 이름도 거룩한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이심환이다. 다시 말해 너의 아버지와는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은 사람이지."
그의 말이 입 밖에 나오자 어린애는 물론 멍해졌지만 이심환은 깜작 놀라 다그쳐 물었다.
"그는 누구의 아들이오?"
진효의가 입을 열기도 전에 파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는 바로 용소운(龍嘯雲), 용어르신네의 외아들 용소운(龍小雲)입니다."
그 순간, 이심환은 흡사 청천벽력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해 온몸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그 자리에 앉은 채 칼날같이 예리하던 눈빛도 잿빛으로 변하여 관자놀이의 근육은 쉴 새 없이 실룩거렸다. 뿐만 아니라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양 볼을 타고 입가로 흘러내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텁석부리 사나이 역시 안색이 크게 변하여 온몸이 삽시간에 흥건히 땀에 젖었다.
텁석부리 사나이, 그는 누구보다도 용소운(龍嘯雲)과 임시음(林詩音) 부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심환은 그들의 외아들을 상하게 했으니 그 고통은 상상만 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영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진어르신네의 큰도령, 옥면신권(玉面神拳) 진중(秦重)이 매화도(梅花盜)를 생포하려다가 불행히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비록 소림의 성약 소환단(小還丹)으로써 잠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역시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누가 듣든 말든 계속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매이선생을 찾아왔는데 뜻밖에도 운도령이 변을 당할 줄이야....."
매이선생도 이때 이심환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발견하고 우선 용소운의 상세부터 살펴보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이 어린애는 비단 생명에 지장이 없을 뿐더러 일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내가 보장하겠다."
일순 파영의 눈빛이 환희로 빛났다.
"무공도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매이선생의 신색은 금세 차갑게 변했다.
"구태여 무공을 회복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가 계속 살인을 해야지만 모두들 속이 시원하겠소?"
그의 호통을 치는 듯한 말투로 인해 파영은 멍해지더니 곧 천천히 좌우로 고개를 내둘렀다.
"매이선생, 그것은 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용어르신네의 혈육이라곤 오직 하나뿐입니다. 더욱이 운도령은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 용어르신네 내외분께선 그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운도령이 다시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매이선생의 표정과 음성은 여전히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전에 자식의 버릇을 잘못 가르친 자신을 탓해야 될 것이오."
이심환은 그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 이 시각에 그의 사고는 추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 일순간에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정월(正月) 초여드렛날이었다.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생겨 설을 쇠자마자 관외(關外)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날도 역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임시음은 그를 위해 특별히 푸짐한 요리를 만들어 뒤뜰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설경(雪景)을 감상했다.
임시음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부친은 바로 이심환의 외숙이었다. 두 어르신네가 생존해 계실 때 벌써 이미 이심환과 임시음의 혼사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가까운 친척끼리 혼례를 올리는 것이 당연지사로 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 혼사를 정한 남녀는 성장해감에 따라 쑥스러워하고 서로 상대방을 피하려는 게 상례지만 그들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단 정인(情人)일 뿐 아니라 가장 의사가 상통되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비록 십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이심환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매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녀의 취기가 약간 오른 얼굴에 띠어진 웃음은 매화보다도 더 아름답고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곧 그들에게 닥쳐왔다.
이심환이 관외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그와 원한이 있는 자가 당시 흉명이 가장 드높은 관외삼흉(關外三兇)과 결탁해 한단 부근 관도에서 느닷없이 기습을 가해 왔다.
이심환은 비록 수중의 비도로 연거푸 열아홉 명을 죽였지만 역시 중상을 입고 곧 대흉(大兇) 복패(卜覇)의 독창(毒槍)에 목숨을 잃을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유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용소운(龍嘯雲)이었다.
용소운은 나타나자마자 한 자루의 은장도로써 복패를 죽여 그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정성껏 이심환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직접 집까지 호송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용소운은 비단 그의 은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용소운은 갑자기 병상에 앓아눕게 되었다. 무쇠같이 단단하던 용소운은 한 번 앓게 되자 보름도 채 못 되어서 안색이 누렇게 변해 대나무처럼 깡말랐다.
이심환은 거듭 그에게 물어 비로소 그가 임시음 때문에 병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사병(相思病)이었던 것이다.
용소운은 물론 이심환이 이미 임시음과 혼약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심환에게 사촌동생인 임시음과 짝을 지어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했다. 아니 그것은 요구라 하기보다는 간곡한 애원이었다.
이심환이 어찌 그런 엄청난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 상사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는 임시음에게 그 일을 언급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임시음은 역시 그의 청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심환은 고통과 모순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술로써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술에 젖어 닷새를 지내자 이심환은 드디어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는 뼈아픈 결정이었다. 임시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곁을 떠나게 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곧 자신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임시음으로 하여금 용소운의 병을 간호하게 하고 그 자신은 주색잡기에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심지어 한 달 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일쑤였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임시음과 용소운이 친근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임시음이 눈물을 흘리며 수차 그에게 옛날로 돌아가 달라고 애원했으나 이심환은 도리어 욕설을 퍼부으며 훌쩍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리고는 설상가상격으로 경성(京城)의 명기(名妓)로 알려진 소홍(小紅)과 소취(小翠)를 집에까지 데려와 공공연하게 잡스러운 행동을 감행했다.
그러는 중에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이 년 후 임시음의 마음은 결국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녀는 이심환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느껴 끝내 자기에게 깊은 정을 표해 온 용소운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이심환의 계획은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어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예전과 같이 겨울이 되면 임시음과 함께 매화를 감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집과 모든 재산을 임시음에게 결혼 선물로 주고 단신 홀몸으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갔다. 자기가 죽어 땅에 묻힐 때까지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데, 그는 지금 그들의 외아들을 손상시키지 않았는가.
이심환은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눈물과 함께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용소운(龍嘯雲)은 어디에 있소? 당신네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가겠소."
이어 파영이 앞장선 가운데 일행은 흥운장(興雲莊)으로 향했다.
예전에 이심환이 거주하던 이원(李園)은 지금은 비록 흥운장으로 변해 있지만 대문 양쪽에 걸려 있는 황제가 친필로 쓴 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문칠진사(一門七進士) 부자삼탐화(父子三探花)>
한 문중에서 일곱 명의 진사를 배출했고 부자 세 사람이 모두 탐화라는 뜻이었다.
이심환은 그 문련을 보자 마치 무거운 쇠뭉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서 걸음이 굳어지고 말았다.
파영은 벌써 용소운(龍小雲)을 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진효의 역시 매이선생을 이끌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장정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이심환을 쳐다볼 뿐이었다. 웬 낯선 사람이 문 앞에서 넋을 잃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자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8장. 돌이킬 수 없는 옛 추억(往事不可追)
그러나 이곳은 이심환의 옛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임시음과 단란했던 한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친히 부모님과 형님의 영구를 이곳에서 옮겨 매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 집 앞에서 낯선 사람이 되어 있지 않는가.
그는 감회에 젖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한 감정을 의당 느껴야 하건만 오히려 허전하기만 했으니.....
텁석부리 사나이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울적하게 입을 열어 권했다.
"도련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이심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까지 온 이상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군."
그런데 그가 막 대문 앞 돌계단 위로 발을 내딛자 우악스러운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용사야(龍四爺)의 문전에서 서성거리는 너는 누구냐?"
그 호통소리와 함께 비단옷을 입고 수중에 새장을 든 곰보 사나이가 뛰쳐나와 이심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심환은 상대방을 훑어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귀하는....."
곰보 사나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큰소리로 대꾸했다.
"이 어르신네는 이 집의 총관이다. 그리고 내 딸은 용부인과 자매를 맺은 사이다. 어쩔 테냐?"
이심환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정녕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곰보 사나이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
"누구를 기다린단 말이냐? 용사야의 문전에서 잡인들이 서성거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상대방의 거만한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으나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심환의 지금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곰보 사나이는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한술 더 떠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냉큼 꺼지지 못하겠느냐? 보아하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이심환은 그런 대로 계속 참을 수가 있었지만 텁석부리 사나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앞으로 막 달려가 곰보 사나이를 혼내 주려는데 안쪽에서 격정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심환, 정말 자네가 왔나?"
화복(華服)을 입고 턱 밑에 짧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곰보 사나이를 제치고 문전에 나타났다.
그 중년 사나이는 이심환을 보자 격동한 안색을 금치 못하며 다짜고짜 손을 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자네가 왔군...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화복의 중년인! 그가 바로 이심환이 사랑하는 정인(情人)마저 양보한 절친한 친구, 용소운(龍嘯雲)이었다.
이심환은 용소운의 손을 굳게 움켜쥐며 격동된 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형님....."
한 마디를 입 밖에 내뱉은 후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곰보 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소운은 중얼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현제, 자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는가... 왜 이제야....."
그는 자신의 벅찬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힘차게 내두르며 미친 사람마냥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우리 현제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인데 나는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는 말을 하면서 이심환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속히 부인에게 알려 모두들 나와서 나의 현제를 맞이하게 하라! 너희들은 나의 이 현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하하하, 그의 내력을 알면 너희들은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역시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그도 자신의 감정을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곰보 사나이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뒤통수를 멋쩍게 긁적거렸다.
"맙소사...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이... 이탐화였군. 이 집도 원래는 그의 소유였는데 나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 내가 죽일 놈이군....."
용소운(龍小雲)은 열댓 명에게 둘러싸여 대청 한복판에 놓여 있는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부친과 이심환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눈물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용소운(龍嘯雲)이 이심환의 손을 잡고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용소운(龍小雲)의 양쪽에 서 있던 두 명의 장한이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와 이심환에게 삿대질을 했다.
"운도령을 손상시킨 장본인이 바로 당신이오?"
이심환은 대답보다 한숨이 앞섰다.
"그렇소."
그러자 장한은 버럭 화를 내며 싸늘한 노갈과 함께 다짜고짜 좌우 양쪽에서 이심환을 향해 덮쳐갔다.
"건방진 놈, 감히 운도령을....."
이심환은 강맹한 기세로 덮쳐오는 두 장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혀 몸을 피할 기색이 없었다. 그는 용소운(龍嘯雲)에 대한 미안감 때문에 차라리 두들겨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두 장한의 신형이 이심환을 막 덮치려는 순간, 용소운(龍嘯雲)이 성난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젖혀 일 장을 격출해 덮쳐가는 두 장한을 일 장 뒤로 밀어냈다.
"발칙한 놈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희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두 장한은 아첨을 부리려다가 도리어 호통을 맞는 역효과를 자초한 것이다.
"우리들은 단지 운도령을 위해....."
한 장한이 어색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이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소운의 싸늘한 호통이 다시 대청 안을 진동시켰다.
"닥쳐라! 이 자리에서 말해 두지만 용소운의 아들은 바로 이심환의 아들이다. 이심환이 설사 저 철부지 녀석을 죽였다 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욱 음성을 높였다.
"앞으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일을 언급하지 말아라! 만약 오늘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정면대결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이심환은 나무토막처럼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용소운이 만일 그에게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원수를 갚겠다고 나섰다면 차라리 그의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용소운이 이다지도 의리를 앞세우자 그는 더욱 부끄럽고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운아가 바로 형님의 아들인지는 꿈에도....."
용소운은 힘 있게 그의 어깨를 치며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했다.
"하하하... 현제, 자네답지 않게 왜 구질구질한 얘기를 하는가. 워낙 버릇없이 자란 놈이라 그렇지 않아도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하네."
그는 대소를 터뜨리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자, 모두들 들으시오. 오늘 나의 현제를 취하게 할 재간이 있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오백 냥을 사사하겠소."
용소운은 이심환을 원망하기는커녕 뜨거운 우정으로 대했다. 실로 그것은 진정한 사내대장부가 아니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의연한 태도였다.
좌중의 인물들은 그러한 용소운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문득 밖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휘장을 젖히시오. 부인께서 나오셨소."
그러자 문 옆에 서 있던 동자가 휘장을 젖히는 가운데 임시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심환은 드디어 임시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임시음은 어쩌면 완전무결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안색은 다소 창백했다. 그리고 몸이 약한 편이며 눈동자는 비록 샛별같이 빛나고 있지만 너무 냉막(冷漠)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질(氣質)은 명실 공히 따를 여인이 없었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그녀를 한 번 보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이심환이 꿈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그리던 얼굴이었다. 매번 먼 산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던 얼굴.
이심환이 그녀에게 달려가 품안에 안으려면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는 가슴과 함께 깨어나던 악몽. 그럴 때마다 이심환은 식은땀 속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창 밖 어둠을 더듬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는 고통과 씨름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날이 밝은 후에도 그의 고통은 추호도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더욱 농후한 자세로 그를 엄습해 오곤 했다.
지금 꿈속에서 그리던 얼굴이 드디어 현실로서 눈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의 촉감을 똑똑히 의식할 수도 있다. 이번만큼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손을 내밀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단지 그것도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꿈보다 몇 갑절 잔혹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미소로서 내심의 고통을 숨겨야만 한다.
"형수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형수님!
그 한 마디는 심장을 토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의 청춘과 영혼을 앗아간 정인이 지금은 형수님이 되어 있는 것이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차마 이 광경을 지켜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이심환이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숨겨져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심환의 현재 입장이 되었다면 도저히 형수님이란 말을 입 밖에 낼 자신은 더욱 없었다.
그가 만약 고개를 돌려 창 밖 뜰에 쌓인 눈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면 아마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한편 임시음은 이심환의 칭호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심신은 완전히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용소운(龍小雲)은 어머니를 보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님, 저는 이제 다시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는 폐인이 되었어요. 저는... 차라리 죽고 싶을 뿐이에요....."
임시음은 그를 품안에 꼭 껴안았다.
"누가... 누가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바로 저 사람이에요."
임시음의 시선은 용소운(龍小雲)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옮겨가더니 드디어 이심환의 얼굴에 던져졌다.
이심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그 싸늘한 눈빛이 차츰 원한의 빛으로 물들어 가더니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었다.
"당신이, 정말 당신이 내 아들을 손상시켰나요?"
이심환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무슨 힘이 그를 지탱하고 있는지 그는 뜻밖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임시음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잘 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당신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 내 행복한 생활을 파괴하리라고 예측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악랄하게도....."
용소운(龍嘯雲)은 얼른 헛기침을 하여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여보,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이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소. 운아 그 녀석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오. 더군다나 그 당시 심환은 운아가 우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소운(龍小雲)이 별안간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에요. 그는 모든 것을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는 원래 저를 상하게 할 수도 없었는데 아버님의 친구라는 말에 제가 손을 거두는 순간 기습한 거예요."
한쪽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나이는 그 말을 듣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전신의 혈관이 모조리 파열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심환은 태연히 그 자리에 서서 전혀 자신을 위해 변호할 뜻을 비치지 않았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다 극복한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일개 어린애를 상대해 얼굴을 붉혀가며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는가?
용소운은 싸늘하게 호통 쳤다.
"닥쳐라! 이 고약한 녀석.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첫댓글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받으세요.^ ^
감사합니다
즐감요
즐감~1
ㅎㅎ
쟴나게 읽었습니다
즐감
즐감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속이 부글 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아비는 된 사람인가?
즐감
잘보고갑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돌이킬 수 없는 옛 추억(往事不可追)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일반적 으로 부모들 이란 제자식 허물에 눈을 감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