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방문객님과 법무아님의 대화를 보며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조금 적어봅니다.
우리의 경험은 전부 '있음'의 영역이며
'있음'이 곧 경험입니다.
(멸진정, 기절 등의 조건을 제외한다면요)
다른 말로..
우리의 경험은 '식과 식의 대상'의 구조하에 드러나고
일체의 경험.. 즉, 정보는 감지되기에.. '있음'이죠.
일상의 평면에서요.. [식]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지는 일체는 예외 없이 [식의 대상]인데요..
'일체'라고 했으니.. 당연히
이 [식의 대상]에는 온갖 산냐..직관..판단 등등의 정신작용이 포함됩니다.
(예 : '아는 놈'이라는 인상, '있지 않다, 없지 않다'는 등의 정신적 덧씌움,
'~작용(식작용, 보는작용 등)'이라는 말로 건립된 허상 등등..)
위의 ( )는 제가 예전에 애지중지 했던.. 아이템들이기도 합니다 ㅎㅎㅎ
제가 기초도 없이 혼자 책으로 공부를 해가지고..
(거기다 인도 전승, 불교 등 잡탕으로..ㄷㄷ)
[말]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경험]을 정신화하는 경로를..혼자서 열심히도 밟았었죠
사람의 마음이란 게 요지경이라..
(요지경 : 확대경을 장치하여 놓고 그 속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그림을 돌리면서 구경하는 장치나 장난감)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면(예를 들어, 어떤 방식으로 '보려고=인식하려고=정신화하려고)..
그에 상응하는 드러남이 있게 됩니다.
행자가.. 자신이 어떠한 마음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 드러남이.. 행자의..행자만의.. <심오한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의 작은 세계를 건립하고, 자신을 그러한 드러남 속에 조건지은거죠..
어떻게 보면 작은 꿈.. 행자에게는 현실인.. 그런 꿈을 꾸는 거죠..
(꿈에 함몰되면..직관, 인상은 물론이고.. 일차적 감각정보에 대한 경험까지 왜곡되는 지경이 이르기도...)
예전에..제가 꿈 속에 있을 때(비유 겸 실제..)
방님이 '소리를 집중해서 들어봐라. 소리 자체의 있음만이 알려질 때까지' 라고 권해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정말로 '소리만 있음'을 경험하고.. 그간 공들여 쌓.았.던. 저의 작은 세계가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글이 좀.. 삼천포로 갔다는... ㅡ..ㅡ;;;
어떠한 알려짐(감지)이 있다.. 그리고 알려짐에 상응하는 식이 있다..
그리고 일체의 알려짐은, 식의 대상으로 평등하다.
이것이 전부다..
잘먹고 잘사는 갑돌이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 문장이,
도판 꿈나무 아무개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죠..
왜냐하면.. 심오한 산냐, 직관, 인상과 함께하는 꿈이 소중하기 때문이죠..
(제가 그랬슴다..)
자진납세하자면..
첨에는 비유비무가 뭔 멍멍이소리여? 라고 생각했고
어느 즈음에는 비유비무를 알았다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맹구입니다.. ㄷ ㄷ
글을 마무리하며..
[있는 그대로 보라. 사실을 사실로 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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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혹은 대놓고 아는 척 하는 거랑
자기비하적 멘트들..
요즘말로 전형적인 하남자입니다..
영양가 없는 글 읽어주신 노고에 감사를.. _()_
첫댓글 법무아님이 식에는 주체. 식작용. 주인공을 모두 포섭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유식에서도 식을 견분 상분으로 구분하는데 일체의 알려짐은 상분이고 식은 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견분인 식에는 대상을 아는 작용과 객관과 다른 주관의 의미인 주체. 수동적인 상분과는 차별되는 능동적인 의미가 있어 능견이란 말도 있으니 견분을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소법(수상행)이 아니더라도 심법(식)자체에 식작용. 주체. 주인공의 의미가 있는거죠.
애초에 제가 오온 중 식온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자명한 것은 자명합니다.
유식에서 기본적으로 식은 연기의 이치에 따라 식작용으로만 존재하는데, 견분과 상분 모두 식(식작용)입니다.
즉 오온 중 식온을 주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한다면요, 상분도 주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해야 합니다.
게다가 보는 놈,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그러한 구별은 유식에서도 다루지 않습니다.
억지로 끼워맞추자면요. 보는 놈,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각각에 자증분, 견분, 상분을 대응시켜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증분은요. 견분과 상분의 토대라서요. 역시 오온 중 식온만을 주체로 상정함은 유식과 맞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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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파를 다른 말로 유가행파라고도 합니다. 유가행파는 yoga_cara 즉 요가행파의 한문 표현입니다. 그래서 유식학파의 논사를 '요가의 스승(한문 표현:유가사)'이라고도 칭했습니다.
요가 즉 삼매 전승이라는 것인데요. 그것도 (최소한) 심소멸까지 요구하는 전승입니다.
요가행파에서 가끔 등장하는 주관심이라는 것은요. 무색계 선정과 밀접합니다. 욕계 내지 색계 선정 정도로는, 소위 주관심을 해부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아닌데요...선정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자는 도중 깬 상태는 아닌데 푸른 색이랄까 빛이랄까 알아차리고 주관 객관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답답한 느낌이 들어 머무르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는데요.
이때 처음 알아차림은 주객분별이 일어나기 전이니 자증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선정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빛이 이미 대상입니다. 즉 논점에 비춰, 이미 견분과 상분으로 식이 전변한 상태인 거죠.
자증분까지 긍정하는 유식체계(3분설, 4분설)에서, 견분과 상분으로 전변한 경우, 자증분은 (직접) 경험되지 않습니다. 이미 견분과 상분으로 식전변한 상태라면, 그냥 견분과 상분 상태의 경험만 있기에 그래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뭐랄까...경험하지 못한 경우, 구체성의 획득이 참 어렵습니다.
상분은 감지되는 즉 알려지는 마음인데 심과 심소법에서 촉 작의 수 상 사는 반드시 따르는 법인데 상분은 심소법의 상에 해당되는거 같습니다. 상분도 감지되는 대상이니 감지되지 않는 식은 아닌거죠.
견분과 상분이라는 이름을 따로이 성립시킨 까닭이 있는 거구요, 그 용어를 사용하려면 그것을 존중하고 감안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토대에 입각해 이해한 것이 아닌데, 체계를 함부로 섞으면요. 자꾸 혼동합니다.
유식은, 기본적으로 '식'만 인정하는 겁니다. 단지 식은 식작용 형태로만 성립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견분과 상분 모두 식전변 즉 식작용입니다. 견분도 식작용, 상분도 식작용... 보다 엄밀히 말하면, 성립한 식작용을 견분과 상분으로 나눈 것 뿐입니다. 그래서 '분'이라는 표현을 붙인 겁니다. 견분은 식이고, 상분은 식작용이고 이런게 아니라구요. 견분과 상분에서는 그래요.
물론 이해의 편의를 위해, 식을 견분으로, 수상행 그리고 '내면의 색온(관념등)'을 상분으로 대응시켜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본다고 하여, 상분은 식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식에 어긋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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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견분과 상분이라는 유식의 용어를 가져다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증분은 마음에 드는데, 그래서 유식을 부정하지만 유식을 가져오겠다... 이런 방식은요. 그냥 스스로 혼미해지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 그런 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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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를 섞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요. 그러한 작업에는 섞으려는 각 체계의 기본 구조에 대한 뚜렷한 이해, 적절한 용어 선택과 적절한 접근 방식 등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안그러면 삑살이가 나버립니다.
상좌부 경전을 보면, '나는 있다'는 느낌이 있니 없니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간극이 없이 연속으로 파악되는 생멸에서, '나는 있다'는 막연한 느낌 그리고 '나'라는 관념이 생깁니다. 그것이 자증분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말엽의 산냐구요. 견분과 상분으로 전변한 상태로 성립한 판단일 뿐입니다.
내가 형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판단과 그런 느낌은, 그냥 일상에서 안식과 눈과 형상의 성립이라는 연기로 이해하고 자신을 세뇌시키다 보면 엷어지는 편입니다. 그런데 자증분에서는요. 이론적으로, 엷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 사람들이 삼매가 없으면 성취도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유식에서 알리야식이나 7식 6식 전오식 할때의 식과 오온의 식 개념은 다른거 같습니다. 식 뿐이니 식에 심과 심소법 색법이 포함되는거죠.
유식에서는 모든 식에 반드시 따르는 심소법이 있습니다. 식이 견분 상분으로 전변한다고 할때 견분은 심법이고 상분은 심소법이란 의미로 한 말이구요.
견분 상분의 토대를 의미하는 주객미분의 상태는 진여 아닌가요. 자증분과 진여개념이 어렵네요.
알라야식이 6식과 전5식으로 전변한다고 할 때, 6식과 전5식은 홀로 성립해 있는게 아니구요, 6식과 전5식의 대상과 함께 성립합니다. 즉 식전변의 끝자락 상태인 6식과 전5식 역시 식작용으로만 성립합니다.
진여는 워낙 다의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니까요. 일단 논외로 하구요. 우리는 어리석음만 잘 알면 그만...
흔히 말해지는, 주객미분은요. 삼매 상태가 주객 미분입니다. 즉 특정 견분과 상분(만)이 뚜렷해진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를 '선명하다'고 표현합니다.
자증분의 개념은요.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의 형성 정도로 이해하면 가장 쉬운 편입니다.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은 업을 짓는 마음을 말하는데, (3분설이나 4분설 등에서) 견분과 상분으로의 전변은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이 성립해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계유심님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2분설이 아닌 3분설이나 4분설등에 입각한 견분과 상분을 말하고 있어 그에 맞춰 적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2분설이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2분설에 따르면, 자증분이나 증자증분 따위도 그냥 상분과 견분으로의 전변의 한 유형일 뿐입니다. 나누는 것, '분'은 필요성에 따른 것인데요 필요성은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요.
견분, 상분, 자증분..
우리는 어떤 단어를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취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소위 '산냐의 말렵'에서..
견분) 인식작용의 주체라는 인상
상분) 인식대상
자증분) 견분과 상분을 포섭하는 의식(식)
이라고.. 내맘대로 생각했던 적이 있죠 ㄷㄷ
옛날에 지나가다님이
"그게 무슨 멍멍이 소리여!" 라는 늬앙스로
지적?하신 기억이 납니다 ㅎㅎ
이런저런 인상, 직관등이 산냐의 말렵에서의 이벤트라는 사실은..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듯도 합니다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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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말이 어려워지는데요. 이해를 하면, 그냥 별 거 아닙니다.
식전변에서 식작용을 필요성에 따라 구별해서 견분과 상분 그리고 자증분이나 증자증분등으로 구별하는데, 그것은 이해의 모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각종 경계와 정확히 매칭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외적 대상을 형성하는 우리를 기준으로 경계와 매칭시켜 자증분은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의 형성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욕계) 선정에서 특정 선업에 고정시킨 선정들이 색계 선정입니다. 그리고 선업과 악업은 무색계 선정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즉 외적 대상을 형성하는 우리들은 선업과 악업이 성립할 수 있는 업형성에 묶여 있습니다.
무색계 선정은 '(선업과 악업이라는) 업형성의 토대(능작근으로서의 마음)'가 성숙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 대상이 알려지는 중생 즉 선업과 악업의 업형성에 묶인 중생에게는 무색정 영역이 자증분의 영역이라고 해도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를 할 때, 자증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작용인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수 있습니다.
업형성의 토대. 업을 나라고 보는 측면에서 자증분과 맞아떨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것을 지으니까 '나'가 있다고 하지만, 무색정을 아는 이에게 그 '나'는 무색정에서 벗어나야 작동합니다. 그래서 무색정을 아는 이들은, '자증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조금만 설명하면, 바로 어떤 작용을 말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아요. 체험이 구체적 이해의 토대이거든요.
무색정을 아는 이들이 스스로 궁극을 선언하지 않고 부처님의 제자일 수 있다면, 이런 저런 것을 짓는 '나'라고 하는 것의 토대가 형성된 거라는 점을 분명하게 압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쪽에서는 무색정을 상당히 중요한 관문으로 봅니다. 체험만을 두고 볼 때, 색계 선정을 포함한 욕계 선정 정도로는 그처럼 선명한 앎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쪽에선 소멸도 분명하게 알려져야 한다고 합니다. 소멸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마찬가지로 상응한 앎이 선명하게 발생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앎은 앎인 것이구요, 각각의 체험은 앎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아는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또한 동일한 체험을 해도, 행자마다 구체성의 수준이 조금씩 다릅니다. 애초에 구체성도 상대적인데다, 위의 설명을 읽은 이가 감을 잡듯, 모든 앎에서 반드시 체험이 요구되지도 않습니다.
유식에서 식 자체(자증분)가 전변하여 견분과 상분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다시 말해 식은 인식작용(인식주체)인 견분과 인식대상인 상분으로 나눈 것입니다.
호법은 식의 주체적 부분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으로 나눕니다. 자증분은 견분을 내면으로부터 인식하는 측면입니다.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대상으로 확인하는 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