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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자비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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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문득 떠오른 마태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20,1-16)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들려주신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어떤 부자 역시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자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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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현실에 정통하신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어떤 부자를 통해 환히 계시되는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 우선적인 관심사는
불의한 집사의 과오가 아니라 그의 미래의 생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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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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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에 대한 약은 집사의 반응입니다.
어떤 부자의 냉정한 처사에 좌절한 것이 아니라 즉시 살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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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떤 부자로 상징되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고뇌도 깊었을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현실을 묵과할 수도 없고, 그의 미래도 걱정되고
참 진퇴양난의 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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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집사의 반응이 참 기민하고 영리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의 심중을 깊이 헤아렸음이 분명합니다.
약은 청지기 처럼 때로 충분히 숙고한 후
대담하게 일단 일을 저질러 놓는 것도 위기 타개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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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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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하신 하느님은 분명 불의한 집사의 이런 미래 현실을 예상하셨을 것이고,
그가 땅을 파거나 빌어먹게 되는 비참한 현실을 추호도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하느님의 고민을 불의한 집사가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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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집사는 즉시 살길을 찾아 결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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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기름 백 항아리 빚진 이에게는 빚 문서에 쉰으로 적게 하여 쉰을 감해주고,
밀 백 섬 빚진 이는 빚 문서에 여든으로 적게 하여 스무 섬을 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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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윤리의 차원에 앞선 생존의 차원입니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하느님이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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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로 상징되는 자비하신 하느님은 내심 불의한 집사가 고마웠을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미래가 저절로 해결됐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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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집사가 정직하게 사실대로 실토하고 쫓겨났을 때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인데
이런 자신의 심중을 알고 말끔히 해결해 줬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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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떤 부자로 상징되는 무한히 부요하신 하느님께 이런 손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손실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불의한 청지기의 미래의 생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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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13,7).
하느님은 결코 따지고 밝히고 캐고 추궁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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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하신 하느님은 누구나 기본적 의식주의 보장으로 존엄한 품위의 삶을 바라십니다.
주인(하느님)은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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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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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 역시 세상의 자녀들처럼
세상사를 영리하게 풀어 갈 것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심중을 깨닫습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주님의 권고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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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집사는 예외적인 현상이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집사 직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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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름대로 주님의 집사 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로마서의 사도 바오로가 충실한 집사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충실한 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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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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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의 집사 역을 충실히 수행 사도 바오로의 자랑스러운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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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각자 주어진 집사 직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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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우표 수집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우표 수집에 온 힘을 다 쏟았던 것 같습니다. 새 우표가 나오면 꼭두새벽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우표를 구입했고, 우표를 가지고서 스토리를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지요. 얼마 전에 당시에 모았던 우표들 중의 일부를 어머니께서 주셨습니다. 집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우표들, 이 우표 중에 한 장만 없어져도 화를 내고 그 우표를 찾다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내 삶을 바꾸는데 별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괜히 쓸데없는 힘을 쏟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에 온 힘을 쏟곤 합니다. 특별히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지요. 알몸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는 내가 벌었던 재물들을 가지고 갈까요? 아닙니다. 알몸으로 왔듯이, 다시 알몸으로 주님께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이란 내 것일까요? 아니면 내 것이 아닐까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욕심을 갖고 나누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집사가 주인에게 혼나는 이유입니다. 즉, 재물이란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으로만 생각하고 함부로 낭비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인의 말을 들은 집사는 곧바로 바뀌지요.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서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시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것뿐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때서야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잠시 내게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 주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도 하셨지요.
“무릇 재물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는 방법은 베풂 만한 것이 없다. 내 재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될 재물이 받는 사람의 마음과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다. 그럼 그 재물은 변치 않는 보석이 된다.”
재물을 벌기만 하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화폐수집가’가 될 뿐입니다. 세상에는 이 화폐수집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과연 주인이신 주님께 칭찬받을까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길은 바로 ‘나눔’뿐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약은 집사의 비유>
11월 8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6장 1절-8절,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정직한 집사가 해고를 당하게 되자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다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그 집사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서 빚을 줄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주인이 집사의 행동이 아니라 '영리함'을 칭찬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주인의 칭찬은 아마도 "너, 머리를 잘 쓰는구나." 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주인이 집사의 행동을 칭찬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신명 23,20)."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이 모두 동족(유대인)이고,
집사가 줄여준 빚이 원금이 아니라 이자였다면,
집사가 한 일은 율법을 지킨 좋은 일이 됩니다.
빚진 사람들의 빚을 줄여준 것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 되고,
주인도 집사 덕분에 율법을 지킨 좋은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까
주인에게도 좋은 일을 한 것이 됩니다.
원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을 한 셈이 되고,
그래서 주인이 집사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빚진 사람들 가운데 이방인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집사가 줄여준 빚이 이자가 아니라 원금이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해석은 백 퍼센트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빚’을 ‘죄’로 해석하고,
집사가 빚을 줄여준 일을 ‘용서’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경에서 ‘죄’를 ‘빚’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그런 뜻은 없습니다.
그리고 집사가 줄여준 빚은 자기의 돈이 아니라 주인의 돈입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줄여줄 수 있는 빚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입니다.
뭔가 본받으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인데,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일까?
그 집사의 부정직함을 본받으라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말씀에서 '영리하다.' 라는 말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가 아니라 '전력을 다한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단어 뜻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본받아라."입니다.
'빛의 자녀들', 즉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력을 다한다.' 라는 말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가 절대로 아닙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전력을 다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나쁩니다.
우리는 선(善)과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행동해야 합니다.
전력을 다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신앙생활은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짝을 지어 다니면서
이상한 이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은데,
그들의 이론을 귀담아들으면 안 되지만 그들의 열성만큼은 본받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무속 종교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기복신앙을 본받으면 안 되지만
그들의 지극한 정성은 본받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기도할 때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가?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만일에 그들의 마음속에 자녀의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욕망만 들어 있다면
그것을 칭찬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그 간절함은 본받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가?
우리는 선행과 사랑을 실천할 때 자기 편한 대로 대충 하면서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하지 말고,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서 행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늘나라를 향해 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루카 14,28-30).
그런데 만일에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또는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탑의 마지막 한 층을 완성하지 못하면,
부족한 그 한 층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탑을 쌓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끝까지(마태 10,22)' 가지 못하면 처음부터 안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꾸준히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 소통에도 밑천이 있어야 한다>
‘포프리쇼’의 김창옥 교수의 아버지는 청각장애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그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돈은 절대 집에 안 가져다주고 술과 도박으로 사회에 환원하시는 분이셨고, 그래서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는데 폭력도 사용하셨습니다. 김창옥 교수는 아버지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이 앉아있으면 어색해서 먼저 자리를 뜨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자신도 아버지와 소통을 하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김 교수 강의 주제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전화를 드려도 귀가 잘 안 들리시니, “어, 그래 창옥이냐? 끊어라. 전화세 많이 나온다.”라는 말씀이 전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씀이, “그래 전화 해 주어서 고맙고, 너나 건강해라. 우리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라는 말씀으로 들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색한 관계가 편안해지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집에 갈 때마다 용돈을 드리니 너무 기뻐하시더랍니다. 어느 날은 공항까지 배웅 나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생전 처음 겪어본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크고 무서워보이던 아버지의 작은 체구와 쳐진 어깨를 보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용돈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시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생각에 자신도 뒤를 돌아보셨다고 합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은 보지 않고 봉투에서 돈을 꺼내어 세고 계셨습니다.
저도 이것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제가 신학교 가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제로 사는 저의 모습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용돈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돈이란 것이 내가 가지고만 있으면 죽음의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남에게 베풀 때는 소통의 약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의 어머니도 말로는 “너 쓸 돈도 없을 텐데 왜 자꾸 이런 돈을 붙이냐?”라고 하시지만, 전화를 끊고는 딸들에게 전화해서, “야, 이것들아. 창옥이는 이렇게 용돈 자주 주는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냐?”하며 자랑하신다고 합니다.
모든 관계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을 마련해야합니다. 부모님을 위해서는 용돈을, 조상들을 위해서는 제사상을, 애인을 위해서는 신상 핸드백을, 내 자신을 위해서는 맛있는 음식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약삭빠른 청지기를 칭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청지기처럼 주인의 재산을 유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와 같이 살면 안 된다는 말씀일까요?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려면 오늘 복음 다음 구절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그러니까 주인을 속이더라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이 부정한 재산이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친구를 사귀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부정한 돈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돈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다면 하늘나라에서 나를 맞이할 친구를 사귀어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프.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리암니슨 분)는 폴란드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합니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됩니다. 인건비 한 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하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합니다.
그러나 쉰들러도 자신의 눈을 통해 나치의 살인 행위들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들 일명 '쉰들러의 유태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프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태인 명단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됩니다.
그는 적어도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건, 또는 나라의 법을 어겨가며 사람의 생명을 구했건 하늘나라에는 좋은 일을 한 것은 잊히지 않고 남아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이태인들이 그를 하늘나라에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를 지옥에 보내려도 해도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간청하여 그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저희가 어렸을 때 부대 철창 밑으로 들어가 부대 철거를 하고 사용하던 카페트 쌓아놓은 것을 빼내어 그것을 팔아 저희에게 자장면을 사 준 기억이 납니다. 부정한 돈임을 그 나이에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장면 하나 사 줄 수 없는 가난한 형편에 미군들이 쓰던 중고 카페트를 철창 밑으로 빼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희를 위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물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되겠지만, 혹 그런 돈이 있더라도 친구를 사귀는데 사용합시다.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오산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지혜로운 삶을 축복하소서>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어떤 부자집 집사가 결국은 주인으로부터‘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할 짓 못할 짓을 다합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빛의 자녀들은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는 주인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그들의 빚을 조금씩 덜어 주었습니다. 설사 그가 집사 자리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인심을 사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집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것들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가정, 공동체, 사회, 자연 등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맡기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소홀히 여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처럼 우리도 쫓겨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도 약은 집사처럼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조금씩이라도 덜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의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죄’를 ‘빚’이라는 뜻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마태 6,12 참조). 곧 우리가 하느님께 저지른 죄는 곧 그분께 빚을 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집사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이들의 빚을 덜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늘의 비유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인정받아 집사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많은 죄를 지으며 사는지 아시면서도 기꺼이 우리에게 집사의 자리를 맡겨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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