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살며시 다가온 그대'를 왜 하필 '보랏빛'에 빗대었을까? 고성 라벤더팜으로 향하던 중 문득 '보랏빛 향기' 가사를 떠올렸다.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 이 길 위에서 스친 건, 곧 만나게 될 보랏빛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비 내리던 6월 어느 날
고성에서 만난 신세계, 하늬라벤더팜
고성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인제와 진부령을 통과해 약 3시간을 꼬박 달려야 한다. 인제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를 탄생시킨 38선 접경지역이고 진부령은 인제와 고성을 잇는 태백산맥 줄기다. 꼬부라지는 산길이 많아 초보운전자들은 더욱 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으로 향하는 이유가 있다. 하늬라벤더팜의 라벤더들이 일제히 보라색 꽃망울을 터뜨려 장관을 연출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라벤더는 단풍이 들기 전까지 초록밖에 보여줄 것이 없는 이 가난한 계절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다. 그 특별함을 알기에,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일부러 고성을 찾는다.
차라리, 한 폭의 수채화
매표소와 허브샵을 지나야 라벤더 밭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호기롭게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구에서 멈춰서 짧게 탄성을 지른다. 예고 없이 불쑥 눈에 담긴 풍경이 꽤 놀라운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은 다른 리액션을 해보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짐작하고 마주하는 풍경에도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왼쪽/오른쪽]사진으로 남겨야만 하는 풍경 / 빨리 걸어야 할 이유가 없다.
보라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라벤더 밭이 주인공이라면 한편에 군락을 이룬 호밀과 양귀비꽃은 라벤더를 빛내주는 훌륭한 조연이다. 페인트붓이 지나간 흔적이 외벽에 그대로 남은 건물들 역시 이 꽃밭에 가장 잘 맞는 배경이다. 산 밑까지 내려온 안개는 오늘따라 더 반갑다. 보랏빛의 몽환적인 느낌을 극대화시키는 무대장치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울린다. 가본 적은 없지만 늘 꿈에 그리던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과도 닮았다. 그 묘한 기시감에 미소가 떠날 새 없다.
라벤더와는 완전히 다른 호밀밭의 운치
구석구석 하늬라벤더팜 산책
우산을 쓴 채 본격적인 라벤더팜 탐방에 나선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정면과 오른쪽에는 라벤더 밭이, 왼쪽으로는 호밀밭이 있다. 산책길은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정표상 시작점은 왼쪽 길이다. 결국은 빙 돌아 원점에 돌아오는 코스라 오른쪽 길로 걸어도 무관하다. 그러나 밭이라는 캔버스에 이토록 훌륭한 그림을 그린 농장주의 어떤 생각이 있을 테니 따르기로 한다.
자전거 바퀴가 라벤더와 양귀비를 연상케 한다
호밀밭 규모는 크지 않다. 파릇하고 여린 호밀을 기대한대도 조금 실망할 수 있다. 이맘때 호밀은 성장을 끝낸 상태이므로 대가 노르스름하게 익은, 벼와 비슷한 모습이다. 그래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어 샛길로 거닐기 좋다. 호밀밭을 지나면 라벤더를 호위하듯 바깥쪽에 자리한 양귀비 군락이 반긴다. 저마다 꽃송이에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화려함을 뽐내는 듯하다. 빠르게 지나치면 모를 얘기지만, 사실 이 양귀비꽃은 다섯 번의 식재 끝에 제 모습을 찾은 것들이다. 올해 유난히 가물어 꽃이 계속 죽은 탓이다. 다행히 이날은 새벽부터 내린 단비에 목을 축이고 기운을 회복한 모습이다.
[왼쪽/오른쪽]힘겹게 피어난 양귀비꽃 / 앉아 쉬기 좋은 메타세콰이어길
입구 반대편에는 메타세콰이어가 병풍처럼 서 있다. 나무들 사이에 군데군데 테이블과 의자가 설치돼 있어 잠시 쉬어가기 좋다. 누군가는 메타세콰이어를 보며 '뜻밖'이나 '우연'같은 단어를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농장주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풍경임을 알아야 한다. 부지를 매입할 때 원래 땅 주인이었던 조경농장 측에 웃돈을 주고 메타세콰이어까지 사들였다.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는 구상이 있었던 셈이다. 메타세콰이어길 바깥으로는 밤꽃이 한창이다. '설마 이것도?'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왼쪽/가운데/오른쪽]풍경이 다양하니 사진 찍는 재미가 있다. / 어미닭과 병아리의 여유로운 산책 / 라벤더색 트랙터
이제는 본격적으로 라벤더를 관찰할 차례다. 꽃잎을 가까이서 보니 첫인상은 수수하다. 메타세콰이어나 양귀비가 저 홀로도 위용을 드러냈던 것과 사뭇 다르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도 훨씬 작다. 무릎을 겨우 가리는 정도다. 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라벤더 군락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향기는 진해지고 빛깔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늘처럼 비가 오면 더 그렇다. 바람에 살랑이며 보랏빛 바다를 만들어낸다. 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농장에서 기르는 닭과 병아리는 이곳에서 먹이를 찾고 산책을 한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꿀벌도 꽃가루 채취에 여념이 없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이면 꿀벌의 행복한 노랫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라벤더는 파란 하늘보다 흐린 하늘일 때 제 색을 뚜렷하게 내보인다.
하늬라벤더팜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체험거리가 많아지는 주말이면 그것보다 길어질 수 있다.
라벤더 향기에 담긴 노력
하늬라벤더팜이 지금처럼 멋진 농장이 되기까지, 하덕호 대표의 10년 피땀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허브차 따위를 팔다가 차별화 전략으로 선택한 무기가 라벤더였다. 외국을 드나들며 모델이 될 만한 장면을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훗카이도의 라벤더 필드를 부분적으로 참고해 하늬라벤더팜을 탄생시켰다. 경관농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2002년의 일이다.
[왼쪽/오른쪽]허브샵 제품들. 라벤더팜에서 직접 추출한 에센셜 오일도 있다 /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라벤더 향주머니
라벤더팜 적격지로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한 강원도 고성을 선택했다. 내한성이 약한 라벤더를 키우기에 이만한 곳은 없었다. 알맞은 부지를 매입하여 라벤더, 호밀, 양귀비, 화이트핑크셀릭스 등 다양한 식물을 심었다. 처음에는 물론 어려웠다. 고성 산골짜기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적은데, 끝을 알 수 없는 투자는 계속됐다. 결국 매입했던 땅 일부를 팔아 라벤더를 늘렸다. 작은 개인 농장이지만 꾸준히 축제도 열었다. 이런 노력은 10년 만에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올해 6월 초 유료입장 인원만 해도 작년대비 4~5배나 증가했다.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들었고, 각 방송사와 영화제작사들의 러브콜도 잇따랐다. 일은 여전히 고되지만 라벤더를 보고 감탄하는 손님들을 보면 묵은 피로가 날아간다.
시화전이 열린 뒤뜰에는 고성군청소년문학회에서 배출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하늬팜 라벤더 축제'는 올해로 10회를 맞았다. 부제목은 '눈물을 머금은 향기'다. 실제로 눈 녹은 물을 많이 먹으면 라벤더가 잘 큰단다. 눈물은 한편으로 하 대표의 눈물을 뜻하기도 한다. 10년의 시련을 눈물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축제 팜플렛에 적힌 '눈물을 머금은 향기'의 중의적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도 하 대표는 향후 이곳을 아트팜으로 발전시켜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을 홍보하는 지역채널로 활용하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을지 모른다.
눈 덮인 라벤더팜 겨울 풍경을 메타세콰이어 나무마다 걸어둔 이유도 짐작이 된다.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보랏빛 향기'에 등장하는 '살며시 다가온 그대'의 정체를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마도 그는 몽환적이면서도 은은한 매력을 가졌을 것이다. 스스로 빛나기보단 어울려 빛났을 것이다. 비오는 날이나 물안개 피는 새벽에 만나면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는 어느 누군가의 눈물이었던 적 있을 것이다. 라벤더처럼.
여행정보
- 기간 : 2017.06.01.~2017.06.21.
- 위치 : 하늬라벤더팜(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어천리 786-5)
- 문의 : 033-681-0005
- 관람시간 : 9:00~19:00
- 주요 프로그램 : 향기음악회, 허브레슨, 라벤더향수추출시연, 슬리퍼 날리기, 그림그리기, 시화전 등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관광진흥팀 양자영 취재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