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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 :4 오래 참고 온유하며 ( 2 ) (2) 온유하며 ( 1 )
Ⅲ. 오래 참게 하는 사랑
또한 사도는 ‘오래 참음’이 결국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명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올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끼는 영혼의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의 경험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오래 참음’ 없이 자기가 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지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신자에게 고통 가운데서 오래 참게 하심으로써 사랑의 특성을 드러내실까요?
A. 은혜의 지속적 시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졌고 신자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의 성향을 만들어내어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친절과 사랑을 드러내게 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까지도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은 한 번 물 붓듯이 부어진 것 이상으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갑자기 사랑이 놀랍게 부어져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한 번에 사랑하게 되는 장면도 나오고, 끊임없이 진리에 인도되고 연단되어 점차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고심하다가 이것이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랑의 형태는 각기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 이 두 사실 안에서 하나의 통합을 이루며 신자 안에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했을 때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의 작용에 대한 밑그림이었습니다.
B.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경험의 핵심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용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죄에 대한 심오한 용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비참하고 더러운 자신을 죄에서 자유케 해주신 은총이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도가 복음 전파를 시작한 후 세상이 좋아하는 헌신의 대가는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원래 어떤 인간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같은 몹쓸 죄인을 용서하시는 그분의 큰 사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은혜 받을 때 한 번 불현듯 떠오른 것이 아니라 백발의 노사도가 되어 순교의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되풀이되던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고백은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는 해줄 수 있지만 사랑은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 후에도 당신의 그 품에 불러들이시고 그 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더욱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과거에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사죄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 가기위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이전에 경험했던 용서와 큰 사랑, 자기 겸손의 고백들은 빛이 없어 쓸모없어진 거울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랑은 한 순간의 격렬한 감정의 체험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기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고저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 사랑의 분량의 척도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판단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까리따스의 사랑은 공동체의 삶의 지평 속에서만 입증될 수 있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간의 감정은 격렬하지만 충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발휘되는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자 스스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특성이 발휘되는 것을 보시며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이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 천사의 말과 사람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작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앙의 한 특성이지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경건의 최고봉, 참된 복음의 영성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사랑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에 붙들렸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주기 위해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게 하고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타락은 술 취하고, 간통하고, 탈세하고, 살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한 타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모든 경건의 비밀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매일 깨닫고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가 분에 넘치는 것임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힘겨운 부르심을 예수의 그 사랑 때문에 가볍게 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짧은 인생을 돌아보면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서 입술을 굳게 깨물고 사명의 자리에서 고난을 감당했더라면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참음’에는 열매가 있지만 욕망대로 살면 열매가 없습니다. ‘오래 참음’이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달라서 거절하실 수도, 외면하실 수도, 또 다른 것으로 바꿔주실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해달라는 그 간절한 기도는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을 위해 드리는 가장 핵심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항상 들어주십니다. 방황한 날들의 절반이라도 그 분 앞에 엎드려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다 태워 사랑의 빛을 발하며 그리스도의 화신처럼 살아도, 인생은 짧고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먼저 알게 하시고 은혜를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비록 높은 지위, 탁월한 학문, 미모가 없을지라도 모두 자기가 주인인 세상에서 그리스도 사랑을 기억하며 참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오래 참음’을 드러내는지 보여줄 때,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를 이 세상은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하늘에 모든 성도들은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영혼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도 그리스도의 피를 먹물 삼아 보낸 핏빛 편지였습니다. ‘오래 참음’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임을 보여줄 때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우리의 희생보다 넘치는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영혼에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2) 온유하며
사랑은 또한 온유하다. ‘온유하다’는 원어(크레스튜오마이)는 ‘친절하다’는 뜻이다(KJV, NASB, NIV). 사랑은 거칠거나 사납지 않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고 구타하지 않고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 친절할 것이다.
"온유"란 말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①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 아 8: 6-7 – 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②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번째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 약 5: 7-8 –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I. 온유의 말 뜻 (출처: 섬김과 나눔 글쓴이: 새벽지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온유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 ‘크레스튜오마이’
희랍어 성경에서 온유하다는 단어는 ‘크레스튜오마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다’, 혹은 ‘친절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에서 이 부분을 ‘친절한’(kindnes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마음에 있는 사랑의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나타나는 친절과 자비를 가리킵니다.
B. 오래 참음과 온유함
짝을 이루는 ‘오래 참음’과 ‘온유함’은 인류를 향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끊임없이 훼방하면서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묵묵히 참으시면서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벌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심판을 행하시지 않는 것은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당신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그 자비가 바로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성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들을 오래 참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래 참음이 하나님 사랑의 수동적인 특성을 보여준다면, 그와 반대로 온유함은 하나님 사랑의 능동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온유함의 근원 : 사랑
그러면 이러한 온유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온유한 인격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한테서 오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통해서 오게 됩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
첫 번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손해를 입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온유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회복하였을 때 이 평화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 원리적인 평화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평생 취소되지도 않고 폐기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 속에서 이 평화를 수시로 잃어버립니다. 죄를 짓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평화의 파괴는 온유함을 잃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자연적인 성품의 온유함이 아닙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격 안에서 생겨나는 온유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데 알맞게끔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친절하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가장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 속에 있을 때에 인간이 가장 평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아무리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더라도 지금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온유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온유함은 사랑의 특성이고 이 사랑은 끊임없이 부어지는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 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친 사람들에게 이런 온유함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본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오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안에서 사랑을 받는 관계였고,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 계셨기 때문에 자기를 대적하는 많은 무리를 향하여 긍휼히 여기고 또 그들을 향해 온유함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일생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B. 자기 사랑을 버림에서 오는 친절
그리고 온유함은 자기 사랑을 버리는 데서 오는 친절로 나타납니다. ‘온유하며’의 희랍어인 ‘크레스튜오마이’는 원래 형용사인 ‘크레스토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유용한’, ‘도움이 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친절이라는 말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한’, ‘쓸모가 있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하나의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에 붙잡히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성향이 되어서 계속 그러한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온유하며’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해 친절해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까? 예전에는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었고 나도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참 소중하구나’,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귀한 존재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자기를 관통하면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 사랑은 자기라는 존재를 관통하여 이웃을 향해 흐르게 되고, 이웃을 향해 흘러간 그 사랑은 다시 하나님 당신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나누어지지 않고 나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또한 나누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는 나, 하나님 안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통합적인 하나의 사랑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온유함의 모본, 그리스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 전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로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육체와 영혼을 관통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비참한 모든 인간에게 소망이 되고 빛이 되는 중보자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온유함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온유함의 모본이 되십니다.
A. 지상 생애에서 - 인격과 삶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에서 당신의 온유한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드러내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고난과 핍박을 가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증오의 감정도 품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온유한 인격 속에서 끊임없이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죄인들을 선대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던 온유한 인격에 관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의 온유함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예수를 박해하는 모든 인간도 유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나타났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한 병정들에 대하여 당신이 받는 고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셨으니 당신 자신의 유익은 일체 포기하고 원수와 같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친절한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B. 천상 통치에서 - 긍휼과 자비
주님의 온유함은 지상 통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상 통치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도 여전히 이 땅의 백성들을 구원의 은혜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원수 맺고 반역하는 모든 인간을 매순간 그 행위에 합당하게 징벌하셨다면 이 세상에는 피 묻은 시체들로 가득하였을 터인데 그리스도는 일체의 오래 참음을 통해서 온유하심을 펼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극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도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해 넘치시는 천상의 그리스도의 온유함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렇게 오래 참음과 인내 속에서 온유함을 베푸실 때 그들이 자신의 길을 돌이켜 회개에 이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우리의 이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웃들은 또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그래서 모든 세상이 하나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지기를 사모하시면서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우리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류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꿰뚫려 완전한 일치된 사랑으로 흐르는 것, 그래서 하나의 완전한 사랑의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서 가지고 계셨던 도덕적 의도입니다. 그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이 땅의 인류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받은 이웃이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완전한 하나의 사랑의 질서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의 모상을 이루는 것이 비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먼저 사랑의 모형을 이루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거짓 사랑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돌아오도록 보여주려고 만드신 종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끊임없이 자기사랑을 못 박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임한 것처럼 자기를 관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서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으로 인해 나 자신이 다른 지체들에게 쓸모 있고 유용한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 받은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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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건강함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남에 감사합시다.
모든 일을 감사하고, 감사하다 보면 감사 못할 일이 없으며,
감사가 넘치다 보면 우리의 삶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입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