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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도(3)
엡 1:15-23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설 교 >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라
엡 1:17-19 / 피종진 목사
우리가 눈을 감으면 앞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고, 반가운 사람이 옆에 찾아와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길을 갈 때도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이 감겨져 있으면 깨닫지 못하니까 답답할뿐더러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 장래 기업의 풍성함에 대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베푸신 능력 곧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의 눈을 밝히라고 한 이유는
첫째,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지식 중에 최고의 지식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 알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자세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선과 의를 행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호세아 4장 6절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바로 깨달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강하심과 변치 않는 사랑을 바로 알고 이를 통해 사랑의 삶, 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창조주요, 구원자이시며, 심판주 되신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종말을 예비하는 자로 깨어 기도하는 삶, 방심하지 않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사 40:10)
둘째,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광야와 같은 애굽에서 천국과 같은 가나안을 소망하고 바라보았던 모세와 같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알지 못하는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땅을 악평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불평과 원망을 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해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예비해놓으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우리를 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을 악평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알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 14:8)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을 보면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강건해질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힘의 능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을 밝혀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시며, 심판주 되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을 알아 기도함으로 응답 받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알아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7-23 / 이종철 목사 / 빛과생명의교회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론과 관련하여 가장 권위 있는 책은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교회론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무려 800페이지에 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단순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림이 그려집니까?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교회가 그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의 밀접한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교회의 모든 영광과 능력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씀입니다. 머리가 영광스럽기 때문에 몸도 영광스럽습니다. 머리에서 모든 생각과 감각과 능력이 뻗어 나오듯이 교회의 능력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랍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교회의 목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또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간 가지는 마르고 결국 불살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6절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교회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에 전심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염려나 인간적인 친교나 많은 일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게으름이나 나태함이나 무지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진 진주이고 밭에 감추인 소중한 보화같은 것임을 안다면 자기 전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시길” 18절에서는 “너희 마음눈을 밝히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욕심과 두려움과 무지 때문에 참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눈이 어두워서 진짜 보배를 보지 못합니다.
3, 4세기 이후 모든 가진 것들을 버리고 사막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사막의 수도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한참 때에는 이집트 사막에만 근 2만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재산이나 지위나 심지어 가족까지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으로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있으면 탐욕 때문에, 세상에 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막에 가면 별이 잘 보입니다. 다른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별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주위의 불빛이 너무 강하고 대기 또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나, 현대 교회에 은혜가 없는 이유는 세상에 많이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빛들이 너무 많고 밝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행위들은 다 지켰으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 그러나 청년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10:22)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 중심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그것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의 재물을 다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안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고무하기 위해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들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가 소중한지 알아야 그리스도를 추구할 것이 아닙니까? 18절과 19절입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 가지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소망’ 곧 ‘희망’, ‘풍성함’ 곧 ‘부요함’, ‘지극히 크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희망차고 부요하고 지극히 큰 무엇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택하셨습니다. 이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예정된 일입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도 전인 수십 수백 억 년 전에 하나님은 이 날을 예정하셨고 때에 되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런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소망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곧 완벽한 사람들로 만드시려는 소망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격은 점점 더 완벽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서 완벽한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 또한 완벽해져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르심의 소망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자 떼아르드 샤르뎅이 ‘오메가 포인트’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세상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인간의 모습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진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동안의 진화는 물질적 진화였고, 이제는 영성적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적 진화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온 인류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결국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완성에 이른 때가 오메가 포인트 곧 종말입니다. 진화론의 대가 리처드 도킨스도 그의 책에서 ‘밈’이라고 하여 ‘문화적 유전자’를 언급합니다. 인간에게는 의식이란 것이 있어 그 진화의 양태가 기존의 물질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압니다. 인류가 또 교회가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둘째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입니다.
기업은 하나님께 받은 유산입니다. 분깃입니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기업’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각 지파별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 기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런 기업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받았던 기업은 흠모할 만한 비옥한 땅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을 방문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들이 정착했던 곳은 평야지대가 아니고 산악지형입니다. 강수량도 많지 않고, 돌멩이와 거친 광야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옥하다 그렇지 않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받은 기업을 영광스럽게 대하면 정말 그 기업이 영광스럽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변화가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좋은 땅이 아닌데 이스라엘은 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프링클러가 광야를 옥토로 바꾸었습니다. 산악지형에 맞는 포도나무나 감람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유럽에 비싼 값에 수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도 개인에게 맡기신 일이요,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에베소서 1장 9,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경륜, 곧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만물이 다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세상은 그리스도 – 교회 –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교회에 충만히 임하고 교회의 충만함을 통해서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려는 영광스러운 목표 가운데 교회를 불렀습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한 까닭은 그 사명이 영광스럽기도 하려니와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충만하게 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자연을 살리는 기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신앙인들이 가는 곳에 가정이 살아납니다. 회사가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나라가 살아납니다. 교회는 복이 흘러가는 복의 통로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신선한 은혜를 공급받지 않으면 죽음의 강, 녹조의 강이 되어 오히려 세상을 해치고 죽게 만들 것입니다.
셋째는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19절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짧은 한 절에 ‘힘’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힘’은 ‘이스쿠스’입니다. ‘강력’은 ‘크라투스’입니다. ‘능력’은 ‘두나미스’입니다. 이 두나미스가 지극히 크다는 말씀입니다. 19절과 20절의 ‘역사한다’는 단어도 ‘에네르게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의 ‘에너지’입니다. 힘과 관련된 모든 헬라어가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능력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20절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인류를 얽어매는 힘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힘은 이 죽음의 권세를 파했습니다. 죽음을 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의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오른편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 이 모두는 어떤 초월적인 세력들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모든 존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난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주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교회는 그 어떤 권세도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에는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우리 안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9)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의 도대체 몇 퍼센트나 활용하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평상시에는 활용을 못합니다. 그러다 코너에 몰리면 그때서야 초인적인 힘들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십시오. 거기서 놀라운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행동파 신앙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들을 경험합니다. 행동하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이미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시대에 증명된 바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1.5%에 불과했던 신앙인들이었지만 민족의 선각자들과 독립운동들을 이들이 주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근 20%에 이른다고 하지만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세력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우리 능력을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충만함은 헬라 어로 ‘플레로마’입니다. 빛이 비추면 빈틈이 없이 가득 채우듯이 그런 충만함입니다. 그릇 안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충만함입니다. 그 충만함이 얼마나 큰지 에베소서 3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다보다 넓고 깊고 하늘보다 높은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수원지가 풍부하면 수도꼭지를 조금만 틀어도 엄청난 힘으로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런 다함이 없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세 수도사들이 산속에서만 생활하면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리스도의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동굴 수도사라고 하여 평생을 동굴에서만 살아도 그들이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그들의 영혼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넘치고 넘쳐 만물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마치 전파의 충만함 같습니다. 우리 공간에는 전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전파가 수신이 되면 말이 뚜렷하게 들리고 대화도 가능합니다. 선명한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이 되지 않으면 마치 텅빈 공간으로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은 자신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우리의 목표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의 가장 충만하신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모습이 우리가 닮아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데 열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채울수록 우리 인생은 생명으로 넘치고 밝아지고 올바른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교회의 목표는 성장이나 부흥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과 자유와 진리와 풍요로움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것입니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가 다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
엡 1:17-19 / 피종진 목사
사람의 눈은 육신의 눈도 있고, 마음의 눈도 있으며, 영의 눈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생각도 어둡고, 마음의 눈이 밝으면 생각도 밝습니다. 마음의 눈이 부정적이면 생각도 부정적이고, 마음의 눈이 긍정적이면 생각도 긍정적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첫째,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엡 1:18a)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증표로 주신 성령으로 인해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류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은 부르심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복스러운 소망((딛 2:13), 영생의 소망((딛 1:2), 구원의 소망(살전 5:8), 영광의 소망(골 1:27), 영원한 소망(잠 14:32)” 등 여러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기업의 풍성함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b) 여기서 ‘기업’이란 ‘상속, 분깃, 분배, 유산’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기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마련해 놓으셨어도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어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곳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4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레미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근거이며 소망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함으로 기업의 풍성함을 바라보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 보면 육신의 눈으로 도단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를 발견하고 두려워하던 엘리사의 사환이 엘리사의 기도로 인하여 마음의 눈이 열리자 허다한 불말과 불병거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눈이 열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장래 기업의 풍성함과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베푸신 능력을 바라보며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르심의 소망
엡 1:17-19 / 피종진 목사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보면 돼지 목에 아주 비싼 보석을 걸어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이 돼지가 그의 목에 걸린 보석이 아주 값비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이나 소유에 대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가치있는 것을 모르고 가치관을 상실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부르심’이라 하지 않고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소망이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본문에 말씀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첫째, 범한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입게 하신 소망입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주님은 바로 우리의 범한 죄를 속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인류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3:9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애처롭게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도 죄의 형벌과 저주에서 속량해주시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인류를 부르신 부르심은 모든 죄에서 구속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부르신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속량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1:4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또 에베소서 1:7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정죄의 복음이 아니라 속죄의 복음, 용서의 복음이고, 저주의 복음이 아니라 축복의 복음입니다.
둘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소망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로마서 8:24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은 영생의 소망이요, 영원한 소망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소망이 아니라 영원토록 누릴 소망 즉 천국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9에 보면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망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5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과 지옥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죽음이 곧 영원한 천국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를 부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이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해보지만 낙심을 하게 됩니다. 낙심을 하게 되면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집니다. 낙심하고 좌절되는 일이 있어도 기도하면 새 힘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넷째,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소망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에베소서 4:3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구속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인치심’이란 고대 근동 사회의 관습으로 볼 때 ‘왕의 도장의 효력’을 강조하는 의미로 여기서는 ‘확증’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구속받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증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증거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진리로 알게 하시며, 복음을 믿게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도장 찍으신 성령만이 오직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원수 마귀가 손대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7:3에 보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범한 모든 죄를 속량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게 하시며,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 하시는 이 놀라운 소망으로 채워주시는 축복이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간구
엡 1:17-23 / 피종진 목사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통한 하나님의 응답과 크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자신을 위한 기도도 하고, 타인을 위한 기도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바울의 간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절) 흔히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많이 구하는 기도는 건강을 위한 기도나 직장과 사업을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등 우리 육신에 관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기도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령한 것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을 구하면 신령한 은혜 속에는 육신에 관한 것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관한 것까지도 풍성한 은혜가 그 안에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정신'이란 말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령에 의한 신령한 은혜를 구했는데, 왜 지혜와 계시를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구했을까요?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세상 학문을 많이 알아야 되고, 또 인생 처세도 알아야 되고, 인간 통솔법도 알아야 되고, 또 사물과 이치의 판단도 알아야 되지만 이 아는 것 중에 가장 먼저 알고 가장 많이 알고 가장 귀하게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부족했고,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서 인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시대에 이 호세아 선지자가 외친 이 말씀이나 오늘 우리들이 사는 이 시대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인생이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손에 생사가 있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 수단 방법으로 장수하고 잘되고, 자기 수단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그리고 자기 손으로 복을 생산하는 것으로 착각을 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9:10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최고의 명철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만권의 책을 통달하고 이 세상의 수많은 지식을 다 연마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이라면 그것은 썩어지고 죽었고 텅 비어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식한 존재인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과학, 지식이 좀 빈약해도 하나님을 똑바로 안다면 그 분은 최고의 지식의 소유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①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심판주의 하나님, 영원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주의 뜻대로 나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주의 뜻대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러한 믿음과 기도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있어야 됩니다.
창세기 41:39에 보면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꾼 꿈도 잊어버려서 알기 어려운데 바로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린 그 꿈을 요셉이 해몽해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행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알려고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알려고 하고 아버지가 오늘도 나를 향하여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하기만 해도 그 아버지는 그 자식을 참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③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그 말씀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1:4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6, 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우리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 항상 이 성경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신령한 마음과 기도로 준비해야 됩니다.
둘째, 마음의 눈을 밝혀 주소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18절) 우리는 육안도 밝아야 되고 지식의 눈도 밝아야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이 밝아야 됩니다. 우리 육의 눈도 귀하나 마음 눈은 더 귀한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항상 신령한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멀리 천국도 바라보게 되고, 복스러운 소망도 바라보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①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 것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이 말씀을 인류의 초청장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부르셨습니다. 멸망에서, 죄 가운데서, 시험과 환난을 당한 데서, 가난과 궁핍에서, 온갖 저주에서 우리를 다 불러서 궁핍한 자는 부요하게 하시고, 병든 자는 낫게 하시고, 멸망 중에 있는 자는 구원받게 하시고,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기 위해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런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됩니다.
②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 것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궁핍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업에는 두 가지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의 기업입니다. 요한복음 14:1∼3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하나는 땅의 기업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위해서 손대어 하는 일에 영육간의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하소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절)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이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모든 역사는 예수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참된 구원과 생명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 피조물된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능력의 원천을 알고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나갈 때 신앙의 승리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 안에서 참된 생명이 있고, 주 안에서 참된 소망과 참된 응답이 이루어지고, 주 안에서 열매가 맺혀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의 능력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능력이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우리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마음 눈을 밝혀서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하시며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합시다
엡 1:18 / 강성찬 목사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났습니다.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니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누워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습니다. 비로소 똑바로 갈수가 있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 스토아학파에 속한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는 말하기를, "사람은 배를 단 하나의 닻에 매어 두거나 인생을 단 하나의 소망에 매어 두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닻을 가지고 있는 데, 그 닻은 바로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태풍이나 허리케인과 같은 대폭풍이 몰아칠 때 항구 근처에 여러 개의 닻을 내린 배들을 봅니다. 그러나 폭풍우에 그 닻들은 아무런 견고함도 주지 못하고 그 배들은 맥없이 전복되거나 침몰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배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배는 견고하지도 확실하지도 않은, 전혀 소망이 없는 닻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대심판의 폭풍우에 이 세상은 완전히 전복되어 침몰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닻을 확실하고 견고하여 결코 끊어지지 않고, 전혀 요동함이 없는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두고 있으므로 결코 전복되거나 침몰할 염려가 없습니다.
이 소망을 부르심의 소망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며, 그 부르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온전하게 하시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유명한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생애 속에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와 선생님이 가지신 성자와 같은 인격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선생님의 기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 때 프란시스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거야 간단한 말이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내려다보셨네. 그리고 가장 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불결한 삶으로 고통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으셨네. 하나님의 그 눈길은 나에게 머물렀지. 나를 본 순간 하나님은 박수를 치셨다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일세".
부르심이란 일반적으로는 어떠한 특수 임무 직업 직분에로의 소환에 대하여 세상이 내게 대하여 간절히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는 마음이요 내가 무엇하기에 태어났고 살고 있는가를 느끼는 마음이며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을 느끼는 마음을 말합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해 『지금 내 나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나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세상의 유치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했듯 이웃에 헌신하며 살겠다』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헌신의 길로 나섰다 오랜 세월 후 나이팅게일이 세계인의 칭송을 받게 되었을 때 기자로부터『이처럼 큰일을 하시게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담담하게 말했다.『예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살아온 것밖에 없습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는 한 해를 살며 소망으로 즐거워하되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달입니다.
구원과 안식을 위한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부르심(Calling)은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면서 와서 죄사함을 받아 구원 얻으라는 뜻과 이제부터는 내 종이 되라는 뜻도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내가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것이 구원이고 이를 위해서 복음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계시하살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오라고 초대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쉬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은 마지막 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터미널선교회 김덕녀회원의 간증문입니다.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빠질까?]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처럼 빠져 나갈 때 나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췌장염을 앓으면서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는 듯한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췌장염은 머리카락만 빠지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도 잘 보이지 않게 했고 귀도 잘 들리지 않게 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 온 몸에 이상이 생겨 합병증으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중개소에 들렀더니 주인이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찾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소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렵고 지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현실은 기독교신앙과 점점 멀어지게 했습니다. 구원의 감격보다 세상과 가까웠지만 그날 집에 돌아와 나지막이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 보았습니다. 얼마 만에 부르는 위대한 이름인가.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회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중에 췌장염에 걸려 고통당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매]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췌장염이 깨끗하게 낫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새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준 자상한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온 딸을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내가 변화하자 가족들도 가정에 복음이 들어오니 행복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다시 신앙을 찾은 뒤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전도해야겠다는 소원이 불타올랐습니다. 내 자신이 다시 구원과 감격을 갖고 치료를 체험한 것은 바로 부동산중개업소 주인의 그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때부터 전도지를 들고 [거리의 선교사]로 나섰습니다. 88올핌픽 때는 외국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터미널선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터미널선교회는 공항이나 고속버스터미널, 기차역전 또는 전철역전이나 시외버스역전, 상가 주변내 경우를 생각하니 전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전도지에 손을 얹고 [주여, 이 전도지를 받는 사람들이 변화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전도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생명을 찾으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전도하는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예화뱅크)
사명과 상급을 위한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은 경주의 승리자에게 상을 주기 위해 심판관 앞에 있는 높은 단으로 올라오도록 명하는 것에서 연유된 표현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르심을 의미하며'상'은 경주 뒤에 있을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시사합니다.
서울 앰배서더호텔에서 한국기독교 선교 대상을 받은 서만수 선교사님의 간증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만 20여년을 선교사로 보낸 공로를 인정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상을 받게 한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성령의 은혜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 뿐이습니다. 1963년 대학원에 재학 중 미국유학을 일주일 앞둔 때였습니다. 간간이 기침을 했지만 갑자기 상태가 심해진 것 같아 병원을 찾았습니다. [농립성결핵입니다. 중증인데 어떻게 이제야 병원에 오셨습니까] 당시만 해도 결핵은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전도 창창한 26세의 대학원생에겐 이 일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결핵과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패배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결핵으로 쓰러진 사림이 많았거니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늘 나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고 의사도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최종선택은 [집에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느니 산속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져 버리자. 그것이 내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가 머문 곳은 산속의 어느 기도원이었습니다. 형식적이나마 교회를 다녔던 경험이 그곳으로 나를 인도한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향해 절박하게 부르짖는 성도들을 보며 나도 내 병을 치료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원래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의 하나로 생각했고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이런 내게 기독교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적세계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생활과 환경을 변화시키게 된다]는 목사님의 메시지는 내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내게 남은 것은 [절박한 기도]뿐이었기에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기도로 하루하루 보낸 내게 성령의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기도원에서 6개월을 지낸 후 하산했을 때 나는 전보다 더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삶의 목표였습니다. 대학교수가 아니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집안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나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덤으로 받은 내 인생, 당연히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1970년 제55차 예장합동 총회에서 내 자원한 인도네시아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왜 그런 오지에 가느냐고 만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더 어려운 곳도 기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낙후되고 미개한 인도네시아인들을 선교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불타는 사명감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사가 오면 내가 일한만큼 새로 시작해야 하니 선교가 그만큼 더디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역의 지혜를 주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일을 돕고 지원할 뿐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권을 갖더라도 선교단체장등은 언제나 인도네시아인을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해온 결과 현재 인도네시아에 2개의 법인선교단체와 종합대학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정규 신학대학을 설립해 이곳에 한국의 뜨거운 신앙을 심는 일에 더욱 주력할 것입니다. 아울러 나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준 많은 성도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립니다(국민일보에서-덤으로 사는 내 인생 기독교 선교 대상 서만수 예화뱅크)
내세를 위한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합시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내세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황해도 안악 산골에 사는 윤함애 자매는 열병을 앓으면서 상태가 악화되어 대소변도 가리지도 못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살려보려고 무당굿을 하고 당산 나무에 치성도 들여 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사로 일하던 김씨가 날마다 찾아와서 자매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들려주었습니다. 윤씨는 생전 처음 듣는 희한한 소리였지만 하나님이 병을 나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자매는 병석에 누어서 새벽이나 밤만 아니라 거의 하루 종일 주님을 부르면서 기도했습니다. 두 달 째 되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갑자가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 쪽에 있는 문으로 어떤 분이 등불을 들고 들어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춰주고는 나갔습니다. 꿈이 너무나 신기해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간 문밖을 내다보려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굳었던 몸이 풀렸습니다. 병이 나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18세였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초가집 방 한 칸을 빌려서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이면 장대 끝에 십자가를 매달아서 이곳이 예배 장소임을 알렸습니다. 자매는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얼마 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순회할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로부터 부모들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윤 진사 댁 딸이 양코배기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아버지는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거듭난 자매는 예수 없이는 한 순간도 살수 없었습니다. 자매는 섣달 그믐날 몹시도 추운 밤에 드디어 집을 나왔습니다. 보름 만에 평양에 도착해서 게일 선교사의 도움으로 양녀로 살면서 평양 숭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25세 때는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이기풍 조사와 혼인했습니다. 목회자 아내로서 십자가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907년에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분으로 안수를 받고 제주로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선교사에게 배웠던 의술로 산파 노릇도 했습니다.
벌교에서는 한센씨 병을 앓는 분들이 찾아오면 따뜻한 밥을 지어서 대접했습니다. 손을 쓰지 못하는 이에게는 손수 밥을 먹여 주기도 했습니다. 사모님은 여름부터 솜바지 저고리와 여자들의 옷을 만들어 모았다가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베푼 잔치에 찾아온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4남 2녀 6남매를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린 자녀를 셋이나 불러 가셨습니다. 사모님은 슬픈 일을 당할 때면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의 성경책 욥기는 유달리 너덜거렸고 사모님의 병든 가슴처럼 붉은 줄도 두세 겹으로 그어져 있었습니다.
욥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봄 같이 "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7) 하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으며 내세를 바라봅시다.(예화뱅크)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완성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될 것을 바라는 일이기에 소망을 가진 사람은 헌신 봉사합니다.
오하이오 신시내티에 임파선 암이라는 불치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딘 마스라는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화학요법으로 몸이 쇠약해졌던 그는 예수를 믿고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뉴스 시간에 골수암으로 한 다리를 잃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암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동시에 캐나다 암협회가 기금 마련을 위해 대륙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주파하기로 했는데 천여마일 달리고 난 뒤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딘 마스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그 청년이 못 다한 꿈을 자신이 대신 실현시키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는 약한 몸을 이끌고 청년이 쓰러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과 동시에 인정미를 느껴가며 남은 2,100마일을 다섯 켤레의 운동화와 30파운드의 체중을 소모한 뒤 완주를 했고 청년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건강은 더욱 좋아졌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기도와 능력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 생을 어떻게 할까하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나는 약한 병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응답을 받았습니다. 나는 가는 길에서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고 도움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도 응답이 있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내 장래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암이 낫지는 않았지만 내 공포는 나았습니다. 의심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암은 내 안에 있지만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전 할 노래를 주셨습니다. 나는 남은 날 동안 계속 그것을 전하고 찬송하겠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희망기도능력사랑-예화뱅크))
소망으로 인내하되 부르심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눈먼자들의 도시
엡 1:18-23 / 류영모 목사
노벨상 수상작가인 사라마구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일본인이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하얀 백지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예비조짐도 없었는데 희얀한 눈병이 찾아와 눈이 먼 것입니다. 이 희얀한 눈병은 거리에서 당황해 하는 이 일본인 환자를 도운 행인에게로 옮겨지고 그를 치료하던 안과의사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자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 수용 시킵니다. 이때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남편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갑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던 이 부인은 수용소의 비참한 상황을 걸머지고 괴로워합니다.
수용소는 무서운 혼돈상태로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고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오물 위를 짐승처럼 뒹굴며 삽니다. 아예 냄새나는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살기도 합니다. 수용소 안에서의 신뢰는 무너지고 불화가 깊어집니다. 어느날 총을 든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수용소의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배급된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이 왕이라는 자에게 가지고 들어왔던 돈, 보석, 패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급기야 한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총 든 왕이 있는 3호실 수용소로 여자들을 상납합니다. 거기 무슨 도덕, 윤리, 인간의 존엄성, 건강한 상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보기도 듣기도 민망한 역겨운 장면들이 지나갑니다. 앞을 볼 수 있었던 부인은 총가진 왕을 가위로 찔러 죽입 니다. 곧이어 누군가에 의해 수용소는 불길에 휩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눈뜬 의사의 아내를 따라 무법천지 수용소를 빠져 나왔을 때에는 온 도시 전체가 눈먼자들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앞을 보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너도 나도 세상을 볼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혼란과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상상하게 해 줍니다.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나 혼자 앞을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책임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눈먼자들의 도시」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다면 어찌 지구촌의 혼란과 범죄와 갈등이 이처럼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가 묻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눈먼자들의 도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1:18에서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죄악된 세상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유명한 글을 아시지요.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를 가르쳐 주신 셜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가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지막으로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또 어떤 이의 글엔 이런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아내가 꿈에 나타날 때도 소리만 듣지 얼굴은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소리뿐입니다. 사람들이 봄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봄이 없습니다. 느껴지는 봄은 있지만 봄은 없습니다. 초록색을 모릅니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리며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태양과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한번 눈을 떠서 아이들이 웃는 것을 보고 아내의 얼굴을 보고 태양을 보고 들을 보고 산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 눈이 감겨져서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보지 못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마음의 눈을 밝혀”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는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II. 하늘에 계신 예수가 보이는가?
마음의 눈이 먼 자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보고 사는지 본문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은 자들이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지를 통하여 눈먼자들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18절 - 눈이 밝은 자는 부르심의 소망이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자신이 이 땅에 왜 태어났는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의 땅만 보입니다. 눈이 밝은 자는 성도가 가진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자신의 기업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달리 돈과 땅의 위력 물질 세계의 위력만 보입니다.
19절 - 눈이 밝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세상의 능력 앞에 압도당해 있습니다. 사탄의 힘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20절 - 눈이 밝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가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죽음의 위력이 보입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살아야 합니다.
21절 - 마음의 눈이 밝은 자는 만물의 주인되신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세상의 통치와 권세 그리고 악령의 능력과 주권이 보입니다.
22절 - 눈이 밝은 자는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 충만한 세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교회의 허물과 약점 그 안에 모인 인간의 실수만 보입니다.
특별히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사건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요?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이 모으고 쌓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그 죽음을 이긴 힘이 있습니다. 사망의 힘을 부수고 지옥의 권세를 깨부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이 말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도, 한 과부의 아들도 죽었다가 예수를 만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죽었습니다. 한번 죽기도 힘든데 두 번씩이나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능력이란 인간의 죄짐을 지고 죽은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죄로 묶어 지옥으로 끌고 가던 사탄으로부터 승리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죄가 우리를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옥이 우리를 가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고 예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하늘, 오른편, 앉다」는 이 말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우선, “하늘”이 무엇입니까? 새가 날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저 푸른 창공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 외경인 「레위의 유언서-Testament of Levi」에서 하늘은 세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하늘은 인간의 죄악과 불의로 물들고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 하늘은 하나님의 심부름길 천사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계신 하늘이요 그를 믿는 성도들이 영원히 살 곳입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 우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명예의 자리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예수께서 온 만물과 역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앉았다는 말은 바로 이 권세를 영예롭게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오른편에 앉았다」는 이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21절 말씀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계속되는 22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
여기서 「통치, 권세」이란 말들이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영적 실체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의 황제 숭배사상을 일컫는 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혹 에베소를 지배하고 있던 아데미 숭배사상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성도들이 개종하기전 그들이 섬겼던 미신, 우상, 다른 종교의 신, 점성술, 마술을 일컫는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힘과 유대 종교의 힘을 이길 수 없어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이런 모든 로마의 힘과 신, 에베소의 우상 잡신을 발로 짓밟고 이 땅을 다스린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혁명선언입니다.
III. 교회의 머리(주인 영광)가 보이느냐?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가가 보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보입니다.
죽음의 힘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 보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우주와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늘과 땅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 이 모든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펼쳐지는 교회의 영광이 보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이 교회의 영광이 보이면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눈먼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영광이 보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한낱 인간의 종교집단 정도로 보입니까? 여러분 눈에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허물과 약점이 보입니까?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말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핍박한 적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내가 언제 예수 -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물을 만도, 항변할 만도 한데 - 그는 항변하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의 육신의 눈은 멀었고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아! 예수는 살아계시는 구나. 예수는 하나님이시구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구나.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구나!” 이것이 보였습니다.
7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저는 학생회장으로 당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심문하던 한 경찰이 “이 나라에서 교회들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돼.” 철부지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말을 받아 후배 한 사람이 “이 정권이 없어지나 한국교회가 없어지나 두고 봅시다” 자신있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결과는 누가 없어졌을까요?
지난 2천년동안 많은 나라 많은 세력들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세력들은 모두 망했다” 민족이든 정권이든 개인이든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귀히 높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보이는게 마음눈 밝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파인애플」이라는 작은 소책자가 베스트셀러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파퓨아 뉴기니에 갔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파퓨아 뉴기니에 선교사 부부가 갔습니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부인이 의사여서 그 섬의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약을 주고 건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된 입장에서도 이들을 전도하는데 돈도 필요하고 수입이 있게 되면 학교를 짓던지 병원을 지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선교비를 받아 교회뿐 아니라 넓은 땅을 샀습니다. 과수원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는 땅을 샀습니다. 땅을 개간하고 사람을 사서 경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파인애플을 심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파인애플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쑥쑥 자라납니다.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내일이면 따서 시장에 내다 팔게 되면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고 선교사님의 마음속에도 많은 꿈이 생겼습니다. ‘학교를 먼저 만들까? 병원을 먼저 만들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까?’ 많은 구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파인애플이 다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았더니 밤새 동네 사람들이 다 훔쳐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싶어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의 촌장을 찾아갔습니다. “이 파인애플 농장을 지어서 나 혼자 잘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이 무엇이냐? 당신들이 도와주어야지. 이것을 훔쳐가면 되겠느냐?” 그러나 촌장이 하는 말이 “우리 풍습에 의하면 모든 열매는 심는 사람이 먹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노임을 주고 심었다 할지라도 심은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파인애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매번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농장 주위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 철조망을 끊고 그 사이로 파인애플을 다 갖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개들을 사다가 풀어놓았습니다. 개들이 파인애플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전엔 선교사 부부에게 인사를 잘하던 원주민들이 인사를 안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속이 상합니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기도원에 갔습니다.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하는데 알아주는 이 없고 오히려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 하십니다. “그 파인애플 농장이 누구 것이냐? 파인애플 농장의 파인애플은 누구것이냐?”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자신의 것이라 했고 동네 사람은 동네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 것도 동네 사람들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깨달은 선교사는 돌아온 후에 개들을 걷어 들이고 철조망을 걷어내고 표지판에 “이 파인애플 농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파인애플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다가 죽으면 어떡하냐고 대답합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우리의 생활에서 언제부터인가 내가 주인이고 내가 아니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IV. 몸된 교회의 충만이 보이는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이 교리는 그것이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게도 큰 비밀이라고 했습니다.(엡5:32) 머리와 몸이라고 나누어서 말했지만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몸이라고 할때 그것 또한 하나가 아닙니다. 목, 가슴, 손, 손가락, 다리, 발, 발가락, 오장육부... 등등 여러 부분의 집합체가 몸입니다. 몸의 각 부분은 분명 하나인데 또 서로 다릅니다. 손과 손가락은 다른데 하나로 연결된 생명체요 유기체입니다.
왼발 밑에 가시가 박힙니다. 발하고 제일 멀리 떨어진 입이 “아야~” 소리를 지릅니다. 금방 궁뎅이가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왼손이 발목을 잡고 눈이 볼 수 있도록 뒤집어 줍니다. 눈이 “가시를 찾아라” 비리비리비리... 가시를 발견하자마자 오른손이 달려가 가시를 뽑습니다. 이빨이 질근질근 씹습니다. 목구멍에서 바람이 나와 “퇴” 뱉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이 연합과 관계가 깨지면 병이 든 것입니다. 각 지체는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과제를 수행할 때는 빈틈없이 서로 연합 합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파가 아닙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소망교회라는 건물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에크(...로부터)라는 말과 칼레인(부르다)이란 말이 합쳐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 모인 장소의 건물이야 크든 작든 아름답든 초라하든 거기 예수가 계시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이 밝혀졌을 때 교회의 영광, 교회의 신비가 보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교회를 헤치는 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지체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작은 믿음마저도 지키지 못해 실수하고 낙심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매우 작고 중요하지 않는 지체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나는 현재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과 좌절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나는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나와 다른 지체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내 언어나 행동이 다른 지체를 낙심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와 다른 지체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싶을 때 입술을 깨물고 잘못된 언어를 지켜야 합니다. 어떤 못난 지체도 주님의 몸의 일부입니다.
어떤 지체는 콧등처럼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보이지 않는 몸속에 들어있습니다. 늘 눈에 잘 들어나는 콧등이 보이지 않는 심장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들어나지 않는 더 중요한 지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몸처럼 물질로 되어 있지만 또 어떤 지체는 영, 정신, 마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다양합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귀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 보완과 조화의 관계일 뿐입니다.
어느날 다섯 손가락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엄지가 고개를 들고 “내가 최고야” 할때 이렇게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최고야!
검지가 앞으로 나서며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이리 가세요. 저리 가세요” 주인이 언제나 나를 앞세우잖아!
장지가 “전부 일어서 봐. 나보다 키 큰 놈 있으면 나와 봐. 까불고들 있어. 내가 최고야”라고 합니다.
약지가 “너희들 그래도 아무 소용없어. 다이아반지를 내게 끼워주는 걸 보면 모르겠어. 내가 최고지”라고 합니다.
그때 새끼지가 “그래 너희들 다 잘났다. 그래도 내가 없으면 너희 모두 병신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싸우지 않고 서로 잘 지내기로 했더랍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자기 잘났다고 남을 짓밟다가 병신되지 마세요.
교파끼리도 서로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교회끼리도 비전이 다르고 장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성도끼리도 서로 은사가 다르고 장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하여 교회는 충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약한 동물이라도 떼를 이루고 있으면 아무리 강한 짐승이라도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힘 자랑하는 놈이 생깁니다. 무리 중에 힘이 제일 강한 수놈이 무리를 떠나서 저 혼자 자만스럽게 지냅니다.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저 놈이 죽을 차례구나.’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동물들의 집중 공격에 힘없이 넘어져 죽고 맙니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나 혼자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장담하며 무리에서 떠나서 떠도는 신자는 반드시 사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 보면 수만 개의 철근이 들어갑니다. 긴 것, 짧은 것, 두꺼운 것, 얇은 것 등을 가득 쌓아 놓습니다. 아주 긴 철근이 있는가 하면, 짧은 것은 조그만 나사못보다도 더 작습니다. 두꺼운 것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만큼 크고 묵직합니다. 얇은 것은 가는 철판같이 생겼습니다. 이런 수만 개의 철근을 하나하나 끼우고 맞추며 쌓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이 다양한 은사와 헌신이 모여 교회의 충만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충만케 하는 교회
엡 1:19-23 / 문기태 목사
오래전 어느날 독일 트리에에 살던 유대인 소년이 법률가인 그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안가고 교회(독일 루터교회)에 나가요?"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외면(왕따) 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본래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 아버지도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빠르고 이재에 밝았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수 없었습니다. 나이 6살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지만 그것이 이 소년을 믿음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해 1847년 그는 엥겔스라는 사람과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칼 막스였습니다. 결과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만일 이 소년이 교회를 통해서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수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경험할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교회를 출입하며 교회안에서 자라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생겨난지 스물 한 돌을 맞이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렇게 특별한 날 우리는 생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냥 좋아하기만 하기보다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지역안에서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 어떤 비전을 이루며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있으나 마나한 교회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이 지역에 필요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랑받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1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역사를 나타내신다는 말씀입니다.
동양의 종교는 비우는 것을 강조합니다. '공' 자에 큰 의미를 둡니다. 텅 빈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우려고 명상을 합니다. 욕심을 비우고 잡념을 비우고 번민을 비우고 무아지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 도를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비우는 것은 다시 더 좋은 것으로 채움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버리는 것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는 것은 더 나은 목적지를 발견할 때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비운 곳에 하나님의 선물로 가득 충만하게 채우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충만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성령 충만, 기쁨 충만, 지혜 충만, 권능 충만, 믿음 충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더 좋은 것을 충분히 채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충만케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것을 채워주시고자 먼저 우리 마음에 가득찬 죄를 토해 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된 생각, 헛된 욕심, 죄책감을 정직하게 예수님께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받아 털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행 2:38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다. 우리가 정결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하십니까? 무엇으로 충만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십니까?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하십니까?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하십니까?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자아와 자존심과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족하여 아우성입니다. 건강도 부족합니다. 행복도 부족합니다. 물질도 부족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지혜도 부족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족함을 느낀다면 교회안으로 깊숙히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분께서 여러분의 삶속에 좋은 선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됩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사랑이 충만하게 되고 소망으로 층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답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충만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바울은 골1:19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위에 계신 성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받아서 항상 충만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이 충만하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충만하게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안에 온갖 하나님의 선물로 충만하심이 임하고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넘쳐나 제자들에게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제자들도 그런 충만한 주님으로 인하여 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됩니다. 여유없이 긴장하며 살던 제자들이 충만한 예수님을 통해 흘러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믿음이 없어 말씀에 회의적이며 의심의 말을 일삼던 제자들이 충만한 주님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은혜를 받고 결국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제니시스 멀티미디어의 김진욱 사장은 몇 년전 사업의 심각한 위기를 직면했습니다. 워낙 닷컴 위기설이 확산되어 사업설명을 하며 투자자들을 만나 설득해도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을 제대로 풀어가려면 600억원이 필요한데 100억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아 자본금을 다 까먹고 바닥이 났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 이 사업을 내가 나를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닌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겠다고 하고서 나혼자 뛰어다니며 내가 다 해결하려고 하였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무릎꿇었습니다. "주님 이 사업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이제부터 사람들을 움직여 주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1년 6월부터 석달동안 뛰어 다녀도 단 한 건도 투자 유치를 못했는데 기도한 후 똑 같은 방식으로 설명을 하였는데도 9월초에 불과 3주만에 5백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답니다. 코스닥장에서 당시 그렇게 많이 짧은 시간에 큰 금액을 유치한 사업가는 제니시스 멀티미디어의 김진욱 사장외에 아무도 없었고 모두 깜짝 놀랐답니다. 그는 지금도 이는 분명히 내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충만하신 주님이 도우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충만하신 주님을 힘입어 충만을 경험하며 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부족함을 극복하려고 하다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이와 비슷한 간증들이 세워진지 21년이 된 우리 교회안에 많이 있습니다. 난치병, 불치병으로 고통을 오랫동안 겪다가 교회를 통해서 치유받고 건강해져 새 힘이 충만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IMF를 만나 집과 사업체를 다 잃을 위기를 겪다가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기도하여 회복되고 크게 번창하여 잃은 것들을 다시 찾고 풍성함을 누리는 이도 있습니다. 가정이 가족간에 심각한 갈등으로 해체될 위기속에서 우리 교회를 만나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이 충만한 가정으로 변화된 간증도 많이 있습니다. 또 청소년기에 문제아로 심각하게 방황하던 아이들이 전도되어 교회의 수양회에 이끌려왔다가 변화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해체와 여러 불우한 환경으로 반항적이고 삐뚤어진 마음으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아이들이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순한 양처럼 변화되고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반듯한 사회인이 되어 옛날 그를 알던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외에도 우리 교회를 통해 기쁨이 충만해지고 믿음이 충만해지고 영적 체험이 충만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는 역사가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언젠가 테레비전에서 통영 근방의 납도라는 곳에 사는 모녀의 얘기가 방영되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쉰 여섯살된 정신지체 1급 장애자인 딸과 단 둘이 사는 일흔 다섯 노모의 이야기였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도시에서 살면 딸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전기조차도 없는 곳에서 딸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흔 다섯의 그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건강한지 모릅니다. 백치나 마찬가지인 딸은 어머니가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밥 세끼를 따듯하게 해 먹이고, 불에 델까, 물가에 갈까 애지 중지 합니다. 아들 다섯은 다 할머니 곁을 떠났지만, 딸 하나를 위해서 인생을 던져서 외딴 섬에서 고독하게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목사도 없는 교회가 있었고, 할머니는 항상 거기서 기도를 드립니다. '내가 죽으면 이 딸을 누가 돌보나?' 마지막까지 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낮이나 밤이나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안에는 이렇게 조건도 없이, 절대적인, 희생적인, 일방적인 사랑을 쏟아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안에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함께합니다.
뉴욕에 플리모스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1928년 12월 추운 겨울 어느 주일이였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80이 가까운 노파가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교회당안으로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려고 할때 노파는 목사님을 향하여 손을 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한가지의 간증을 꼭하고 돌아갈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제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백인 목사는 흑인 노파에게 간증을 허락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60여년 전 1850년 12월 주일이였습니다. 제가 12살 때였습니다. 저와 오빠와 부모님이 이 교회의 건너편 노예매매 시장에 팔려왔습니다. 우리 집 주인이 파산을 해서 우리의 가정을 다른 가정에 팔려고 내놓았지요. 그 순간 저희 가족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네 식구가 흩어지지 않토록 해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어느 농장으로 제일 먼저 팔려가셨습니다. 1,001불에 아버지는 팔려가셨고, 어머니는 어느 식당으로 팔려가셨습니다. 오빠는 공장에 900불에 팔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남았습니다. 제가 경매에 올려졌을때 이도 성하고, 건강하고, 인물도 예뻐서인지 누구든지 700불에 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한 노신사가 손을 들더니 제가 700불에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함께 온 것이 바로 60년전 바로 이 교회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교회 성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헌금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얻게하는 선교운동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간 700불의 헌금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은혜에 너무나 감사해서 노예 때 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고, 돈을 모아 저축을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양로원에 가있습니다. 그리고 노파는 자기가 그 동안 쓰지 않고 모아두었던 700불의 100배가 되는 돈 7만불을 헌금하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80년 전에 7만불이면 엄청난 돈입니다. 뉴욕에 플리모스 교회가 구령하는 일에 매달 힘을 쓸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충만을 경험하며 누리며 사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지난 날에 죄값으로 팔린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구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교사로 파송하셔서 우리를 거져 탕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거져 받았으니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우리의 시간과 기술과 물질을 바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생명체요 성장체요 활동체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이 교회를 중심해서 남은 생을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일에 동참하며 사는 길이야 말로 가장 보람있는 생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의 충만으로 가득찬 복된 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 그리스도의 몸
엡 1:20-2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말하며 매우 의미 있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22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23절에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의미 중에 첫째는 교회의 단일성(unity)일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몸에 머리도 있고 몸통도 있으며, 그 몸통에 두 팔과 두 다리가 있고, 두 손과 두 발에 각각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있으며, 머리에도 두 눈, 두 귀, 코 하나와 입 하나가 있지만 그 모든 지체가 합하여 한 사람을 이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도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교회는 다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오직 같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시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교회는 동에 있든 서에 있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며 한 교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들이 서로 다투거나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 되기를 힘쓰지 않거나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으며, 어떻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20절을 보면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고백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놀라운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하늘 보좌의 오른편에 앉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른편”이라는 것은 최고의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1절을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하며 22절 상반절에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다시 요약한 말이 뒤따르는 22절 하반절의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풀어서 보다 쉽게 쓰자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도 모두 주관하시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시고 교회를 그의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영광과 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영광과 복의 대단함과 더 이상 바랄 것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 “충만함”입니다. 본문 23절을 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한 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교회에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바로 그의 충만하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에 대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을 그리스도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그의 충만함이 그를 통하여 또한 교회에도 충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충만해지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또한 교회로 인하여 충만해지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로서 모두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당신 외의 다른 존재 없이도 영원히 부족한 것 없이 충만하실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당신 외의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주는 다른 비유들 가운데 “신랑과 신부”의 비유가 있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신부가 없는 신랑을 생각할 수 없고 가지 없는 포도나무를 상상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가지심으로써 더 온전하고 충만하여지기를 스스로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할 때 교회는 세상을 다스릴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갖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잃으면 세상을 다스릴 권세와 능력을 잃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의해 우겨 쌈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잃지 않게 해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믿기만 하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로 다스려지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이 선교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권위 아래 복속시키는 일이 그의 몸 된 교회의 선교적 사명입니다. 이 사명으로 충만하고 이 사명을 충만하게 수행하는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이 어디냐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발생지는 예루살렘입니다. 박해받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로 로마가 기독교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기독교인의 80퍼센트가 지구의 북반구에 살았지만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북반구의 교회들이 급격히 쇠퇴하는 반면 남반구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교회들이 새로 부흥하면서 오늘날에는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남반구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중심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옮겨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중심은 지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변하지 않는 유일한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즉 그리스도를 바르게 예배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곳은 어디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상 어디에나 기독교의 중심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중심이든 급속히 변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과 예배와 순종이 사라지거나 변질되는 교회는 곧바로 기독교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서구의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서진을 해왔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아시아로 서진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 가리키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이 이제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선교대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서진은 계속될 것이고 이미 한국에서 더 서진해서 중국과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선교의 불길이 옮겨 붙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중국교회는 눈만 뜨면 “합일선교”를 외치고 있습니다. 즉 하나가 되어 선교에 나서자는 것입니다. 중국 안의 교회에서 세계 속의 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과 선교에 나서는 것은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에 충실한 것입니다. 필리핀의 교회들은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세계선교에로 부르시는 나라는 자기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그들이 제시하는 것이 전 세계 바다에 떠있는 배의 선원 중 3분의 1이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필리핀인들이 영어를 잘 하며 노동임금이 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세계선교를 맡기시기 위해서라고 그들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세계에서 영어학원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필리핀이라는 사실에서도 그들은 필리핀이 세계선교의 중심이 되라는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슬람교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큰 문제와 우려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도수로 볼 때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는 인도네시아입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교회들은 세계 이슬람권에서의 복음전도는 자기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선교의 빚을 진 한국의 첫 번째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선교의 열정이 식고 연말만 되면 어김없이 선교를 축소할 궁리를 계속한다면 기독교의 촛대는 한국을 떠날 것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의미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교회가 중심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잃은 교회는 급속히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기독교와 선교의 중심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회, 그리스도의 몸
엡 1:20-23 / 인명진 목사
옛날 결혼식에 가면 주례사 말미에 빠지지 않고 꼭 사용하는 관례적인 용어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식상한 줄 압니다. 뻔한 말인 줄도 압니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그래서 하는 말이 관례적인 말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도 우리 귀에 신선하게 들리는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들어왔던 관례적인 용어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식상하고 뻔한 말인 줄 알지만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암수가 한 몸인 상태 즉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은 부부가 되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이고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부부가 되어 사는 모습을 놓고 창세기의 저자는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묘사했습니다. 한 몸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나 삶의 태도까지도 일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되어서 이런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됩니다.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이지만 동상이몽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고, 승천하신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현재와 다가올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증언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되듯이 예수와 결혼한 신부와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오늘은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말을 당시의 종교와 철학 그리고 정치사상과 비교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최고의 사건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고, 아시아의 도시 중에서 가장 번성하고 헬라문명이 왕성한 곳이었습니다. 신에 대한 이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반신반인간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사람들은 신이 인간뿐 아니라 지상의 어떤 생물체로도 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올림푸스 산의 최고신인 제우스는 질투심이 많은 아내인 헤라(쥬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나 동물로 변장해 인간의 딸들을 유린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제우스의 아들이 되어 제우스의 보호를 받습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위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버지나 어머니가 신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신의 혈통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천하장사인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헬라식의 신의 변신 이야기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너무나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문명의 충돌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은 자기 필요에 의해서 잠시 동안 인간으로 모습을 변화한 것이지, 진짜로 인간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잠시 동안 변신해서 임무를 수행한 뒤에는 다시 본래 신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헬라 신화에서 사람과 신은 그 근본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만 신에게 죽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과 신들의 변신(變神)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신이 잠시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변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사신 사건입니다. 지고지순한 신,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유혹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배고프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신을 당시 사람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월등한 신이 인간으로 변신할 수는 있지만, 신이 인간으로 강등한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라는 분은 자기들의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때 헬라 사상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복음을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하심이 바로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 자체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능력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의 진술 속에는 바리새인 랍비로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된 바울의 신앙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재림과 부활 그리고 심판을 믿었습니다. 서신서 본문에도 재림과 부활, 심판 사상이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고, 이 예수가 이미 부활하셨다고 주장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아직까지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험한 신앙 여정을 거쳤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이 했던 말을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부활 이야기는 헬라 사상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낯선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중해 문화권은 영혼불멸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불멸을 믿고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혼불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죽음과 전인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예수 부활은 헬라 사람들이 말했던 영혼불멸과 확실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부활’이고 ‘영원히 사는 것’은 영생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불멸은 ‘영혼이 죽지 않기’ 때문에 ‘다시 산다.’는 아예 생각이 없습니다. 영혼에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육신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 몸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인간 이해는 몸이나 육체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코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 사상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부정한 것, 타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바울의 주장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는 자기의 문화와 종교와 가치관에서 걸림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몸과 영혼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헬라 사람들이 말했던 영혼불멸과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사람들에게 신은 죽을 수 없는 분입니다.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신이 아니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죽임당한 신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로마 총독으로부터 이런 소리까지 듣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영혼불멸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성서에 말하는 부활은 영혼만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도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인적인 것입니다. 육체가 부정한 것이라는 헬라 사상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부정한 것을 입으신 셈이 되고, 예수의 부활은 완전한 것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을 이야기했고, 이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예수의 승천 즉 높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킨 다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이 세상 뿐 아니라 다가올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헬라 신화에는 신의 수난이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신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하늘의 별이 되게 했다거나 특별한 식물이나 동물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는 나옵니다. 카시오페아 자리나 오리온 자리 등 별에 얽힌 이야기가 있고, 물망초에 얽힌 이야기가 여기에 속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부활하신 예수를 하늘과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하늘과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는 말은 곧 하늘과 땅, 금생과 내세에 세상의 심판주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세상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이며,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또 세상 만물은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는 만물의 기초입니다. 예수가 없다면 만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헬라 신화는 자연을 신격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주신(主神)이 있더라도 신들은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는 어떤 한 영역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리고 천지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고, 금생과 내세까지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사실 바울의 이런 말은 그 당시 종교나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고려한 것입니다. 우선 그 당시의 종교를 배경으로 이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중세시대 때 천사들에게 급수를 매겨놓았던 것처럼 신들에게 급수를 매겨놓았습니다. 주신이 있고, 종신(從神)이 있으며, 종신 아래에 또 시중을 드는 신들 혹은 영적인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밑에 시중을 들거나, 신의 뜻을 전하는 님프라 불리는 요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인간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이런 신관을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란 말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이 부분을 더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바울은 하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그 어떤 영적인 존재보다 뛰어난 존재, 신중의 신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봐도 바울의 이 말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하던 당시 로마 전역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식 모임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인 가이사에게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제국에 안정과 번영을 제공하는 바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로마 황제 아구스도는 “신이 현현한 자”라는 뜻입니다. 신의 아들이 내려와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관리 들이 세상이 주인이 누구냐? 물으면 “로마 황제 가이사입니다.”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정사 잡은 자들에 의해 죽임 당했습니다.
요즘 북한에서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가이사가 통치하던 당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증언이야말로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최고 존엄 가이사를 모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초대교회들도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사람들이었고, 반체제 인사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능력에 대해 쉽게 그리고 당연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기까지 바울은 굉장히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고, 엄청난 고민과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여정이 이 신앙고백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예수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를 그의 우편에 앉히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세와 다가올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고, 세상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목숨 걸고 전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문명의 충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충돌이 예수 사건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울은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교회’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라는 말이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각기 자신의 신을 향해서 예배 또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그 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라는 말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생겨났고 현재 존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 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교회의 구약의 명칭은 ‘카할’(להק)입니다. ‘카할’이란 말은 ‘모임’ 또는 ‘부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입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 있는 백성이 주된 의미입니다. 구약의 공동체는 신약에 와서도 이어졌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 역시 공동생활을 했고 이런 전통은 초대교회의 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교회론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긴장 가운데 형성되었며, 이런 의미에서 기독론의 바탕에서 비로소 교회가 정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핑크라는 학자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 부르는 것은 예수께서 모으시고 그의 죽음을 통해 거룩하게 된 하나님 백성 안에서 살고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구절을 중세 교회처럼 ‘교회가 세상의 모든 것의 머리가 되어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 몸에 병이 있듯이 교회의 몸도 병이 나타납니다. 가장 심각한 질병이 교회의 중풍병과 간질병입니다. 중풍병은 머리가 명령을 내리는데도 몸이 움직이질 않는 병입니다. 간질병은 머리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병입니다. 그리스도가 명령을 내리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움직이면, 이미 교회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회, 예수의 정신과 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교회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는 길은 다시 말하고 다시 말해도 예수 따라 가야합니다. 예수가 걸어셨던 길 걸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따로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몸입니다. 교회는 머리가 아니라 실천하는 몸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회가 세상의 머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머리처럼 판단하고 머리처럼 행동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머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적어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냥 함께 있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실천하는 몸이라 생각해야 이 땅에 아파하는 사람들, 억울한 일 당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실천하는 몸이라 생각해야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실천하는 몸을 세상에 팔아버리고 머리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아프게 표현하자면 입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개벽천지 세상이 된다고 해도 몸이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실천하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예수의 생각과 행동을 닮아가고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삼을 때, 예수의 명령을 따라갈 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만약 교회가 예수의 생각이나 행동, 삶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누구에 의해 움직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 움직여져서도 안 되고, 사람이 주인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결코 자기 몸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 월급 주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고, 마음 맡는 사람끼리 교양을 나누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교회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세상 속에서 재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교회 역시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수권에 순종하여 주님을 뜻을 세상 속에 실현하고 예수를 보여주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
엡 1:20-23 / 이종철 목사
그리스도의 몸
오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는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라는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먼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니 당연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이 단순히 비유인가, 아니면 실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주로 은유 또는 상징처럼 해석되었습니다. 주로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되었습니다. 첫째, 교회의 영광입니다. 만물을 다스리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주님이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니 교회는 영광스럽습니다. 우리의 지도자가 능력 있고 믿을만하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이 우리가 믿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표현은 이처럼 교회의 영광을 보여주는 은유로 해석을 합니다. 주로 에베소서에서 보여주는 교회론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유기체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각각의 역할이나 은사가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것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 역할에는 중하고 천한 것이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몸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 능력과 사역은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 됨으로 연결이 됩니다. 손가락 끝에 종기가 나도 온 몸이 아파합니다. 그것처럼 교회는 한 몸 된 공동체로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경우도 역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하나의 비유나 은유처럼 해석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서신에서 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이와는 달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을 비유가 아니라 실재라고 해석하면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긴밀성을 보여줍니다. 머리 없는 몸이나 몸 없는 머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명령과 생명의 근원이 머리에 있고 몸은 머리가 공급하는 생명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긴밀성을 강조하는 성경은 요한복음입니다. 그 중 15장이 대표적인데 여기에서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를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17:21)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연합이 이제는 교회로까지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연합이 실재라면 교회와 하나님의 연합도 실재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또한 성만찬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만찬 제정사 중에 예수님은 떡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 몸이니”(고전11:24)라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This is my body’입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입니까? 아니면 몸의 상징입니까? 실재라고 믿는 것은 가톨릭의 화체설이고, 상징으로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기념설이 됩니다. 이 둘의 중간에 있는 것이 루터의 공재설입니다. 떡 위에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는 해석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결정됩니다. 어쩌면 성만찬을 소홀히 취급하는 개신교의 오늘날의 모습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고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bread of life”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얻는다는 비유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실제 예수님이 떡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씹고 먹으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살과 피요 생명이 됩니까?
자칫 신비주의로 흐르기 쉽지만 이런 해석은 우리 신앙을 생생하게 합니다. 비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재라고 믿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합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너무 지나치게 이성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이나 어떤 신비적인 것들을 버리고, 이성적인 이해가 가능한 것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이 윤리나 교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설교라는 행위는 사람의 이성을 자극하고, 설교의 결론은 윤리적인 각성이나 행동을 촉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도 우리 모두 하나 되자, 연약한 지체의 아픔을 알자, 각자의 역할을 다하자, 교회는 그만큼 영광스럽다 식의 윤리나 교훈을 도출하고 그칩니다.
오늘 말씀에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란 말의 영어 식 표현도 ‘The church is my body’입니다. 실재 몸입니까? 아니면 상징입니까? 저는 실재 몸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달라집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더 긴밀해집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교회와 그에 소속된 우리 각자는 머리와 긴밀히 연결되었습니다. 뇌에서 명령이 즉각 전달됩니다. 우리의 고통이나 감각이 즉각 머리로 전달됩니다. 머리의 명령에 의해서 우리 각 기관에 피와 에너지가 공급이 됩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아주 세밀한 곳의 고통도 우리의 고통으로 느껴집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를 언급할 때 ‘속성의 교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성이 신성에 침투하고 신성이 인성에 침투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이 성립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 간에도 속성의 교류와 같은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교회와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실제 우리가 되어가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갑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충만한 분량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까지 우리가 자라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 각성하는 것, 체험하는 것,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생명과 변화는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교부 시대에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사들이나 중세의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을 목표로 용맹정진하였던 것입니다. 용맹정진은 어떤 어려움에도 물러섬이 없이 목표를 향하여 용감하게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 이제는 사랑의 관계선상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체험하고 이론화하였던 분 중에 16세기의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습니다. 테레사는 기도의 단계를 7단계로 나누며 그 마지막 완성의 단계를 ‘신비적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완벽한 일치의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완성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신부로 삼으신 영혼을, 당신이 그리워해서 못 견디고 못 견딘 일을 어여삐 여기셔서 영성적 결혼이 끝나기 전에 그 영혼을 당신의 밀실 즉 제7궁방에로 들게 하신다. 말하자면 저 하늘에 당신의 궁실을 가지시는 것처럼, 영혼 안에도 하나님 홀로 계시는 궁실인 또 하나의 다른 하늘을 가지시는 셈이다.” 이런 체험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체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단순히 윤리적 교훈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완벽한 일치의 단계가 있으며 우리는 이런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행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빌라의 성인 테레사의 기도문입니다. “주님, 당신은 이 땅에 몸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당신은 손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당신은 발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자들의 행함입니다. 우리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일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행함이 진정한 행함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
또 다른 문제 구절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시다는 말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정사와 권세를 비롯한 모든 만물의 주권자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만물 안에 계시다’,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물 안에 계시다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돌멩이 속에도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기독교는 범신론을 반대합니다. 범신론이라는 것은 자연이 곧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을 무시하고, 결국 자연의 일부를 신처럼 숭상하는 우상 숭배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반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조물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로 만드는 전적인 초월신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4장 6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구약 예레미야 선지서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4)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 계십니다. 저 음부에도 계시고 우리가 연기로 공중에 흩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곳에 계시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1세기 전후의 유대 신학자 필로는 당시 헬라 철학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을 통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고 아무것도 빈 채로 내버려두지 않은 다음에는 여기저기에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시는 분”
그렇다면 우리는 돌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돌 가운데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돌멩이 하나의 생명과 목적을 이끌어가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헬라어로 ‘플레로마’입니다. 플레로마라는 단어는 빛을 연상하면 그 의미에 가장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가득 비치고 있는 것 그것이 충만함입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빛이 충만히 비추고 있습니다. 이 빛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충만합니다.
필로의 설명입니다. “로고스는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끝까지 그리고 거꾸로 가장 바깥의 끝으로부터 중심에 이르기까지 연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든 부분들을 포괄하고 함께 묶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예수님은 로고스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법칙이나 질서의 총합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로고스가 아닙니다. 자연의 질서를 주재하시는 분, 만물의 의미와 목적을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며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돌멩이뿐만 아니라 깊게는 분자와 원자라는 작은 알갱이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곳에 빛이 있고 로고스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과 하나님은 피조물과 창조주라는 점에서 분명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의 빛을 통해서 그 안에 계시다는 점에서 만물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휴가철이면 우리는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납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과 함께 할 때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며 육신이 재충전됩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단순히 정복하고 착취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그 안에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함께 들어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도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9-22) 바울은 피조물이 생각을 하고 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자연은 살아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 영을 살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을 좀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피조물 또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빛이 약해졌습니다. 그들 또한 만물을 충만케 하는 분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세계는 그리스도 – 교회 – 만물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교회는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만물을 섬기고 보살피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중세기의 성자 성 프란치스꼬의 ‘태양의 노래’에서 우리는 자연세계가 살아 있음을, 자연세계와 친구가 되는 것이 무엇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태양과 별과 달과 바람과 대지가 우리 형제요 자매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와 온 인류와 만물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하나를 이루는 세계 그것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경륜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분과 온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주권을 찬양하며 그 충만한 은혜를 자연 세계과 더불어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머리 그리스도
엡 1:20-23 / 박덕기 목사
바이올린을 켜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그 부인도 곱고, 아이들도 매우 예뻤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소경이었습니다. 부모가 남겨 준 유산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술 감각이 예민한 그는 어느 목사님에게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아내가 꿈에 나타날 때도 소리만 듣지 얼굴은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소리뿐입니다. 사람들이 봄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봄이 없습니다. 느껴지는 봄은 있지만 봄은 없습니다. 초록색을 모릅니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리며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태양과,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한번 눈을 떠서 아이들이 웃는 것을 보고, 아내의 얼굴을 보고, 태양을 보고, 들을 보고, 산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 눈이 감겨져서 영원히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소경의 이야기를 들은 그 목사님은 집에 돌아온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경이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다 하도록 감사를 해도 다 감사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 11:7에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안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정말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복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 곧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육의 지배를 받을 때는 물질세계만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권력 때문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망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돈 때문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부모를 자식도 보고, 색정에 눈이 멀어진 나머지 불쌍한 소녀 가장을 성폭행하는 인간도 봅니다. 이렇듯 사탄에 의해 마음눈이 어두워지면, 사리 판단력도 없어지고, 비참하게 될 자신의 모습도, 영원한 지옥형벌도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육의 사람은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입니다. 땅엣 것은 보나 하늘나라에 관한 것은 보지 못합니다. 세상 소리는 들으나 하늘나라의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무지몽매한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확실히 지혜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존전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뜨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오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주일날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야 축복을 받는다는 것, 이 한 가지만 알아도 여러분은 영안이 뜨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눈이 더욱 밝아져서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얼마나 놀랍게 나타났습니까? 사탄과 지옥의 세력들, 사망과 무덤이 그리스도를 붙잡아 놓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 강한 능력으로 인하여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를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무덤이 그를 막아두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망의 결박을 푸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을 이기고 승리하며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거기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 순간에도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오른편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주권적인 개념입니다. 우편은 권위의 상징이요, 요즈음 말로 표현하자면 측근, 또는 실세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권세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계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자에게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빌 2:9에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것보다 더 높은 지위와 더 높은 영예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악한 영들보다 훨씬 뛰어나시고, 모든 선한 천사들보다도 비할 수 없이 탁월한 분이신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통제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물질세계를 포함한 모든 만물을 장악하는 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참새 한 마리도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셨으며, 만물을 주장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는 별들이 그 길을 가도록 주장하십니다. 대양의 움직임을 주장하십니다. 바람과 비, 태풍과 폭풍, 햇빛과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비단 물질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세계에도 해당됩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그는 모든 만물 위에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서 이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권세와 존영을 그리스도께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신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어떻게 잠자코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교회를 위하여서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끝내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흠 없이 뵙도록 하기 위하여, 그 모든 권세와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주어진 영광은 주님 자신만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 위에 그 큰 권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몸 된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 모든 존영과 영예가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이만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특권! 그리스도인의 영예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영예를 얻기 위하여,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 어떤 주목할만한 인물이 되려고 서로 다투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한 영예를 얻기 위하여 많은 돈을 뿌리기도 합니다. 다가 올 대통령 선가 때가 되면, 또 온갖 추태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신분이 어떠하든지,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외 없이 우리 주님의 영광의 높은 지위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분이 영광을 얻으셨으니, 그의 몸 된 우리 또한 그러한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 1:14에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구원 얻을 후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2:5에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속하는 것입니다. 시편 8편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물이 우리 발아래 복종하는 것이, 아직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전 6:2,3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했고,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고전 3:21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 때문에, 모든 만물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찌하여 사도 바울이 ‘마음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바람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현재의 악한 세상만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영광에 대하여 어렴풋한 실마리라도 잡았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여러분의 욕구를 자극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눈을 열어서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하고, 또한 교회를 그의 몸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입니다. 곧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에 대한 유일한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권세를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교회의 머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적 교회관에 있어서 핵심적인 진리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는 인간을 알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사람의 친목단체에 불과하지, 주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임금이시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회의 최고 통치권이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영국은 반대하여 1535년 영국 국회에서는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가결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으로부터 교회의 통치권을 국가에 예속시키는 제도가 나오고, 국가 교회주의 제도가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관은, 인간은 결코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요, 유일한 머리로, 그 권위의 원천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외에는, 어떤 인간의 권위도 배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잡음이 교회의 회중을 움직이고,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교회의 영향을 미칠 때, 그 교회는 발전하지 못하며,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인으로, 머리로, 최고의 통치자로 모시지 않은 탓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예속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권위가 십자가 앞에 내던져질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진정한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되, 느슨하거나 기계적인 방식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고, 유기적이고 생명적인 방식으로,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연합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리의 또 하나 커다란 진리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그 몸은 서로 간에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연합된 것이 아닙니다. 이 기이함은 모든 부분들이 실제로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며, 각 부분이 유기적이고 사활을 같이하는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곧 그것은 살아있는 연결이요, 생명적인 연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있는 손은 손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 안에서 발은 발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는 코 나름의, 눈은 눈 나름의, 귀는 귀 나름의, 몸의 각 부분은 각 부분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한 지체도 있고 부족한 지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몸 된 송정 중앙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서로 상부상조하고, 또한 무엇보다 분쟁이 없이 화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힘써야 할 일입니다. 고전 12:25절에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그의 몸 된 교회를 충만케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2:9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와 꼭 같은 원리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히 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 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아무리 연약하더라도, 비록 죄와 육체와 마귀의 세력에 대하여 시달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들과 은혜들이, 그의 몸의 지체인 우리들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께 해당되는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최고로 영광스러운 사실은, 내가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골 2: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였고, 엡 2:5-6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으로 인하여,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신다면, 사실 우리도 이미 거기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증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가르침대로, 이 교회의 진정한 머리는 주님이 되게 하고, 그의 몸 된 우리는 분쟁이 없이 서로 화목하고, 상부상조하고, 동고동락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송정 중앙교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엡 1:20-23 / 오창우 목사
오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잘 믿으려면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교회생활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도 잘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즉 모인 무리라는 말입니다. 세상 가운데서 예수믿고 구원받아서 모인 사람들이 ‘에클레시아’ 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라고 하면 예배당 건물도 이야기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세상과 구별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에클레시아’, 모여진 성도의 무리들이 서로의 관계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주변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 우리나라의 교회와 세계나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교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교회 속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교회를 가르켜서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데, 모여 있는 모임을 향해서 표현하기를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잘 알면, 교회생활 잘 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이라 할 때에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주인이 누구냐?
교회의 주인이 목사입니까? 장로입니까? 여러 교인들입니까? 누가 교회의 주인입니까? ‘그리스도의 몸’ 이라 할 때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마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돈이 많아서 이 교회당을 세웠어도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돈 많이 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것이 세상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은 예수믿는 구원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도 작은 교회입니다. 만 명이 모여도 교회이고, 혼자 있어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몸 된 교회’ 라고 한다면 우리인생의 주인도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런 사람이 진정한 교회라는 말입니다.
「파인애플」이라는 작은 소책자가 베스트셀러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파퓨아 뉴기니에 갔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파퓨아 뉴기니에 선교사 부부가 갔습니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부인이 의사여서 그 섬의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약을 주고 건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된 입장에서도 이들을 전도하는데 돈도 필요하고 수입이 있게 되면 학교를 짓던지 병원을 지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선교비를 받아 교회뿐 아니라 넓은 땅을 샀습니다. 과수원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는 땅을 샀습니다.
이 분도 파인애플 농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개간하고 사람을 사서 경작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파인애플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쑥쑥 자라납니다.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내일이면 따서 시장에 내다 팔게 되면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고, 선교사님의 마음 속에도 많은 꿈이 생겼습니다. ‘학교를 먼저 만들까? 병원을 먼저 만들까? 어려운 사람읕 도와 줄까?’ 많은 구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파인애플이 다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 보았더니, 밤새 동네 사람들이 다 훔쳐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싶어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의 촌장을 찾아갔습니다. “이 파인애플 농장을 지어서 나 혼자 잘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이 무엇이냐? 당신들이 도와주어야지, 이것을 훔쳐가면 되겠느냐?”
그러나, 촌장이 하는 말이 “우리 풍습에 의하면 모든 열매는 심는 사람이 먹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노임을 주고 심었다 할지라도, 심은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파인애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매번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농장 주위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 철조망을 끊고 그 사이로 파인애플을 다 갖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개들을 사다가 풀어 놓았습니다. 개들이 파인애플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전엔 선교사 부부에게 인사를 잘 하던 원주민들이 인사를 안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속이 상합니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기도원에 갔습니다.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와서 봉사를 합니다. 알아주는 이 없고 오히려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 하십니다. “그 파인애플 농장이 누구 것이냐? 파인애플 농장의 파인애플은 누구 것이냐?”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자신의 것이라 했고, 동네 사람은 동네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 것도 동네 사람들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깨달은 바가 있어, 돌아 온 후에 개들을 걷어 들이고, 철조망을 걷어내고, 표지판에 “ 이 파인애플 농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파인애플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다가 죽으면 어떻 하냐고 대답합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우리의 생활에서 언제부터인가 내가 주인이고,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무당 찾아가서 비는 사람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합니다. 무당에게 굿하면서 내는 비용을 보면 교회 헌금하는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그리고 무당이 써 준 부적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갈 때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 잘 보겠다고 속옷 안에 부적을 넣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요즘엔 몸에 새기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서 정말 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얼마나 그들이 정성껏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 미신 좇는다고 하지, 신앙좇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미신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미신은 인간이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하여서 돈이나 능력 별의별 것을 다 동원해서 신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산신령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내게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바알신을 보면 하늘에 남신과 여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햇빛도 잘 내리고, 비도 잘 와서 농사가 풍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신과 여신이 싸워서 등을 지고 있게 되면, 이 땅에 흉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복달라고 하는 것이 미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미신입니다.
미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변화시켜서 내가 복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화될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나의 목적에 맞추는 것이 아니고,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신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변화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기는 변화시키지 않으려면 이것은 미신입니다.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능력을 행하지만 변화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로 날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참 신앙인이요, 그런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는 사람인가?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기 원하는 사람인가?’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머리에서 지도를 받는 것처럼
우리의 지도는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 믿는 것을 미신 좇듯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변화될 생각을 안 하고 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변화될 생각을 안 하고 남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이 세상에 카펫 깔 생각 하지 말고, 내 신발 좋은 것 사서 신으면 되는 것입니다. 왜 남을 변화시키려 합니까? 내가 변화되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가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나를 변화시키기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갈보리 선교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신 강문호 목사님에게 사돈댁 동생부부를 소개시킨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부가 의사인데, 남편은 내과이고, 부인은 산부인과입니다. 이 남편은 늘 의사인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하며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 해서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고 돈 받기 어렵다며, 그 당시 500원씩 받았다고 합니다. 아내는 속상합니다. 그래서 병원이 유지되겠느냐 해서 아내가 벌어서 남편 병원을 유지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지역이 개발되었습니다. 시청직원들이 모여서 지역개발 논의를 하는데, 시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동네에 꼭 있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 의사선생님입니다. 이런 분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논을 하다가, 요지에 땅을 주어 병원을 짓게 하자고 해서 새로운 개발지역에 땅을 짓게 해서 남아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특혜를 받아서 그 땅에 10층짜리 병원건물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평당 2000만원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쁘면 바빠서 예수님 못 믿겠다, 어려우면 어려워서 예수 못 믿겠다고 합니다. 상황이 나로 예수 믿게 합니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바쁘면 바쁠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그 안에서 섬기며 나를 변화시켜 나가기를 애쓸 때에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를 하나님이 책임 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살아갈 때에 내 인생의 주인, 교회의 주인으로 살아 갈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도 기대 이상의 복으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병들면 병든대로,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그 다음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너무 다 하려 하지 말고,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서 우리의 가정이, 내 살림이, 시집살이가 승리하고, 직장생활이 승리하고, 교회생활이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는 ‘성도와 성도는 하나 이다’라는 뜻입니다.
‘성도와 성도는 하나 이다’, 차별이 없습니다.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지 않습니까? 얼굴만 보아도, 눈, 코, 귀, 입, 각각의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각각이 몸인 것입니다. 손가락을 보아도 다섯 손가락이 다릅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다 중요한 것입니다.
다 각각의 기능이 있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믿음생활 하면서 차별하는 것은 안 됩니다. ‘누구는 꼭 있어야 하고, 누구는 버려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선한 것은 선한대로, 악한 것은 악한 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날 이때껏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선한 사람이었습니까? 항상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여도 성질 날 때는 악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악해 보여도 건질만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코, 귀, 입이 서로 다르듯 우리가 서로 다르고, 그래도 주 안에서 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얼굴의 지체가 싸움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맛있는 것을 보면 눈이 먼저 보고, 맛난 냄새는 코가 먼저 맡습니다. 그리고 입이 먹습니다. 눈이 먼저 찾고, 코가 좋은 냄새를 맡는데 항상 입이 먹습니다. 하루는 눈이 코에게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냐? 이제 입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것만 보면 눈을 감습니다. 맛난 냄새가 나면 돌려 버립니다. 팔에게도 가만 있으라고 합니다. 눈이 선동을 해서 모든 지체를 움직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입이 즐거울 시간 없이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습니다. 삼일 쯤 되니, 눈을 뜨려 해도 안 됩니다.
먹어서 힘을 내야 하는 것인데, 힘이 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와 같습니다. 누구는 더 필요하고 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안에서 다 하나됨을 깨닫고 서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서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동네로 이사를 오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네가 좋은 동네입니까? 나쁜 동네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대답하길, “자네가 전에 살던 동네는 어떠했는가?” 그 사람이 대답하길 “너무 좋은 동네였습니다. 사랑이 넘치고, 정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도 자네가 살던 동네 못지 않게 좋은 동네일세.”
조금 있다가 다른 청년 하나가 옵니다. “이 동네 이사오려고 합니다. 좋은 동네입니까? 나쁜 동네입니까?” 할아버지가 똑같이 되묻습니다. “자네가 살던 동네는 어떠했는가?” 그 청년이 대답하길, “전에 살던 동네는 형편 없습니다. 동네 촌장도 별로고, 싸움질이나 하는 안 좋은 동네였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는 좋은 동네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보게, 우리 동네도 매일 싸움질이나 하고 못 살 동네야. 이사오지 말게.”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한 입 갖고 좋은 동네라고 했다가 나쁜 동네라고 합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하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좋은 동네도 없고, 나쁜 동네도 없다네.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좋은 동네일 수도 있고, 나쁜 동네일수도 있다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살면서도 늘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행복하고 감사하게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는 우리의 형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여, 내 마음이 복을 받게 하소서.”
내 마음이 복을 받으면 나쁜 동네도 좋은 동네가 됩니다. 내 마음이 복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동네도 나쁜 동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와 성도는 하나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주에 크리스챤 신문을 보는데, 경북교회 김성일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멋진 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십대 후반의 어느 장로님을 소개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임직식에 갔는데, 임직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의 임직식을 못하고, 권사님의 임직식만을 하고 마쳤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장로님이 병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예배당 꼭대기에 올라가서 유리창을 닦다가 떨어져서 다쳐서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인들과 조촐히 임직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이전에 집사시절 교회를 섬기며 교회가 어렵고 힘들 때, 목사님을 찾아와서 교회에 승합차가 필요하니, 그 승합차를 제가 사 놓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 목사님과 저만 아는 비밀로 하고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루는 또 찾아왔더랍니다. 교회 오르간이 계속 고쳐도 상태가 좋지 않자, 올갠을 새로 하겠습니다. 이 집사님이 단칸방에 아이와 함께 살면서 단칸방을 옮기지 않으면서도 교회 올갠을 새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특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군으로 부족한 것을 보면 어떻게 책임질까 하는 것이 이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이 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하나 하나 들추어 내셨더라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오히려 감당하겠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너희의 죄는 내가 감당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못박는 로마 군병들까지도 용서하셨던 주님 바로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앙인으로서 가정에서 부부간에 잘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허물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족함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부족함을 감당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을 통해서만 교회는 하나되는 교회, 은혜로운 교회, 승리하는 교회로 든든히 서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명령 따라서 우리의 삶이 마땅히 변화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어야 겠습니다. 내가 그 책임 감당하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처럼 예수닮아가는 나 때문에 내 가정이 살고, 내 남편이 살고, 내 아내가 살고, 내 자식이 살고, 내 부모가 살고, 우리 성도들이 잘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좋은 교회
엡 1:20-23 / 남 호 목사
좋은 교회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감이 가는 교회' 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머리와 몸의 역할을 하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의 역할을 감당하여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몸에서 머리, 코, 눈, 팔과 다리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눈의 역할, 코와 입의 역할, 팔과 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건강한 교회가 되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에 눈이 머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입이 머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입이 머리의 의도대로 말하지 않는다든지, 다리가 머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기가 흉할뿐더러 일의 처리가 잘 되지 않을 것이며, 본래의 목적을 잘 감당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 혹은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의 내용을 통해 좋은 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
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명령하고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인 성도들은 성실하게 순응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는 머리되는 그리스도께서 명령을 해도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지체인 눈이 보이는 대로 행하고, 입은 입대로 말하고, 팔과 다리는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갑니다. 이러한 교회는 '각 지체가 머리되는 교회', 곧 '인본주의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교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 '주인이 없는 무질서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무질서가 편하고 자유로운 것 같으나 결국은 망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성도들이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교회가 진정 좋은 교회입니다.
※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1.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을 치러주시고,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사랑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낮고 천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일평생을 같이 살아온 부부도 누구하나를 위하여 죽을 수가 없고, 자식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으니 그야말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3.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꿔가면서 살아야할 정도로 삶이 고달프고 공허했지만,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심령에 치료를 받고 동네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했습니다.
·삭게오도 삶의 만족을 모르고 살았는데,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 깨끗이 치료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문둥이가 치료받고, 혈루병자가 치료받고, 귀신에 시달려 고생하는 아들 때문에 고통 당하던 아버지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말씀을 간추려보면 :
죗값을 치러주셨던 주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셨던 주님을 머리로 삼고, 그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창립 49주년을 맞이하는 신탄진침례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좋은 교회입니다.
Ⅱ.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빌2:5- 성경은 원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창조의 능력, 사람의 창조의 능력, 사람들에게 복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창조의 능력과 권세가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높혀주시고,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이때, 기쁨이 있고, 만족스러움이 있으며, 다른 사람을 높혀주는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서로간에 높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관계가 교회 안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그 말씀 따라 살아가는 일을 서로 돕고 협력하는 일들이 풍성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는 점점 부흥케 되고, 좋은 교회로 소문나게 되고, 사람들이 안심하고 정착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케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Ⅲ. 성도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지체라는 말은 몸에 붙어있는 하나의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지체는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잘 행할 때 지체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10m 전방을 바라보라고 눈에게 명령하면 바라보아야 하고, 냄새를 맡으라고 하면 냄새를 맡아야하고, 찬송을 부르라고 하면 찬송을 불러야 하고, 걸어가라고 하면 걸어가야 합니다.
명령받았는데도 그대로 행하지 못하면 지체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지체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가야 하며, 이처럼 주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이 있어야 하고, 서로 높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겸손의 은혜가 있어야 하며, 주님의 말씀이 충만해서 어느 구석을 보아도 주님의 은혜로 가득차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번은 수원중앙교회 장로님 한 분이 저에게 다가와서 저의 구두를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두가 좀 지저분했습니다. 그러자 반갑게 여기시고는 자기의 할 일이 있어서 기쁘다고 하시면서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농촌 진흥청에서 근무하시는 장로님이신데, 토요일 날이면 교회 직원들 구두를 닦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저는 그분이 눈에 선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충실하게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야말로 참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교회가 칭찬을 듣는 좋은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
엡 1:20-23 / 정필도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가 이곳에 설립된 지 만 25년이 되는 기념주일입니다. 그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이루말로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저와 여러분이 감사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중에 우리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교회가 된 것을 특별히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18절을 보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자세히 보면, 내 교회를 내가 세우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교회를 예수님 자신이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우리 수영로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지구상에 교회가 참으로 많지만, 참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세우신 예수님의 교회인줄 믿습니다.
예전에 저는 우리 수영로 교회를 제가 세운 줄 알았습니다. 교회의 부흥도 제가 잘해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저의 이런 생각을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하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주님! 저는 몰랐습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다 하는 줄 알았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제부터 주님이 우리 교회의 당회장이십니다. 저는 단지 교육전도사 같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당회장으로 모셨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고 주장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구체적인 체험을 하며 목회에 전념해오고 있습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주님께서 이처럼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교회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크게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있으나 머리는 오직 하나로 되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가 어느 특정한 목사일 수 없고 장로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하겠습니다.
머리는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를 따르듯이 교회도 항상 예수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는 줄 믿습니다. 더구나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교회를 통해 구원사역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받기 전 사울일 때에 교회를 몹시 핍박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메섹이라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다메섹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 소리에 깜짝 놀란 사울은 방금 소리가 들려왔던 하늘을 올려다 보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소리쳤습니다. 곧이어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를 핍박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해 나를 핍박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0-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며,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8).
우리 주님이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와 함께 하시므로 음부의 권세가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교회를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의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한 사람이나 국가나 민족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높이며 교회를 영화롭게 한 사람이나 국가나 민족은 모두 다 부흥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건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하게 지어졌는지 참으로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교회의 지붕은 모두 금으로 씌워놓은 곳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해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결코 그들이 가진 돈이 많아서 또는 자랑하려고 그와같이 화려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를 세울 때 그들 역시 가난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세우고 나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대단히 부강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때에 그 나라가 평안했고 그 민족이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타락하여 교회를 멀리하고 등한히 하게 되면 예외없이 그렇게도 부강했던 나라들이 형편없이 가난해지고 망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하는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 나오기를 즐거워하며, 매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 이외에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이곳저곳을 살펴봅니다.
어떤 교회에 매일 회사에서 퇴근할 때마다 교회에 들려 교회의 안과 밖을 두루 살피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이 장로님은 청년들이 모였다가 난로를 켜놓은 채 가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교회에 큰불이 날 뻔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또 제가 어려서 다녔던 교회에 교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언제나 들어오셔서 기도하고 가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 집을 어떻게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항상 교회에 들려, 바쁘면 짧게 기도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길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모두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모두 큰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고 그의 자손들이 어떻게 복을 받고 사는지, 그러한 산증인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가장 좋은 터 위에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울 때에, IMF로 많은 성도들이 실직을 하고 부도를 당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불평불만하는 사람이 없이 오직 기쁨으로 자원해서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오직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를 거쳐 우리 교회에 오신 부교역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처음 봤다. 건축비가 백 수십 억이 드는 성전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용하게 큰 어려움 없이 짓는지 참으로 놀랍다. 수영로 교회는 은혜충만한 교회가 아닐 수 없다.”라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건축헌금작정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면 하고 안 주시면 못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성전건축헌금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축헌금작정도 하지 않고 자원해서 드리는 헌금으로 새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우리 수영로 같은 교회가 이 지구상에 몇이나 있을까요?
우리 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IMF로 인해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여 회사가 부도직전에 있었지만 부도나면 어떻게 헌금을 하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부도직전에 2억을 헌금하신 장로님도 있고, 남편이 중풍으로 누워있어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억 이상을 헌금한 여집사님도 있으며, 어려울 때 쓰려고 시집올 때 가져온 비상금을 그 당시 남편의 사업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성전건축헌금으로 바친 여집사님도 있었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와 전세로 주었던 아파트까지 모두 바친 집사님과 파출부로 받은 임금을 모아 헌금하는 집사님,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을 전액 헌금하는 우리 청년들, 동전들을 모아오는 주일 학교 학생들의 벽돌헌금에 이르기까지 크건 작건 모두 동참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정성들이 모아져서 새 성전이 순조롭게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억지로 짓지 않고 아름다운 믿음으로 성전을 짓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미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대로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그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어제 밤을 교회 성전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24시간 릴레이 기도회에 참여하여 부르짖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소리와 찬송소리를 어제 밤 내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기도소리를 우리 하나님이 어찌 듣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행하고, 말없이 기도로 간구하며 성전을 짓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는 동안 얼마나 많은 간증거리가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 이미 기도하다가 축복을 받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매주 들어오는 헌금은 성도들이 돈이 많아서 또는 부자들이 많아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고 축복하셔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병이 낫기도 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며, 헌금할 수 없던 분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헌금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은 생전에 파출소를 100개 세우는 것보다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이런 훌륭한 분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오랫동안 통치했더라면 이 나라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소중하신 분이 일찍 세상을 뜨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성전건축이 끝나면 부산복음화, 민족복음화, 세계선교를 위해서 전심 전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의 간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등등 모두 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도와주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수영로교회가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교회 앞에 모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 가장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의 위대한 가치
에배소서 1:22-23 / 염규갑 목사(광성교회)
사랑하는 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중심이요, 둘째는 성경 중심이요, 셋째는 교회 중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교회를 자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중심에 세우고 사는 사람은 진정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45-46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진주 장사는 그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서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았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이 진주는 값이 비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진주 장사의 재산도 절대로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 하나를 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쉽게 유추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 진주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합친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의 가치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값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천국을 소망해야 하고, 그 천국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천국의 가치를 분명하게 깨달았을 때 말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천국이 눈앞에 있어도 그 천국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예수님의 소유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신앙고백 위에, 그리고 우리의 땀과 눈물과 기도 위에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신 위대한 권세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헌신해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권세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또한 그 복음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왜 그토록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교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교회가 가진 그 진정한 가치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해도 교회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할지라도 진정한 헌신을 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가 가진 그 가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고귀하고 위대한 가치를 가진 기관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우리 광성교회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내가 우리 광성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나를 통해서 우리 광성교회가 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교회의 위대한 가치』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교회는 가장 고귀한 기관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항구도시인 밀레도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면서 행한 고별 설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 중에 교회가 얼마나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교회를 사신 주체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전부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잃으면 끝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생명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 소유는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대가로 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그 얼마나 귀중한 것일까요? 바로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것도 죄인의 피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흘리신 피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도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피 흘림의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코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는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이나 방법으로는 결단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우리를 이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 공로도 없지만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우리를 보시고 우리에게 “내 백성”이라고 칭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가진 기관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자신의 피를 값으로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보다 더 고귀한 기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우리가 그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불러 당신을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아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자신들이 고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존심은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신분이, 나의 재산이, 나의 권력이, 나의 명예가 우리의 자존심을 나타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은 바로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지시고 죽으신 십자가에 나의 궁극적인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존심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손상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교회를 내가 사랑하고, 내가 섬기고, 내가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Ⅱ.교회는 가장 거룩한 기관입니다.
교회는 분명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곳곳에서는 이 공동체를 아주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모든 실체에 이름을 부여하셨습니다(창1:5, 8, 10).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대신했습니다(창2:20). 따라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그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특별하게 불리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공동체와도 구별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이름들 가운데서 아주 특징적이고 중요한 두 가지의 이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이름 속에 우리 교회의 고귀한 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여기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몸”은 ‘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이는 교회의 유기체적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성도 각자는 그 몸의 각 지체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각각의 지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지만, 그 모두는 결국 하나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지체가 하나이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지체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성도들도 교회가 기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그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실제로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바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1장 22-23절에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몸인 교회가 다스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명령만 하시고,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머리와 몸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인도합니다. 몸으로 하여금 일을 하게도 하지만, 쉬게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비인격적으로 복종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따라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자라갑니다.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성전의 본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이라 하지 않고, 교회 전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임재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레12:11).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 백성 가운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임재의 진리는 모든 교회에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할 때, 제사장조차도 그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아무리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죄인의 모습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성도는 거룩한 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 모인 교회는 가장 거룩한 기관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구성원이 된 성도 개개인은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결코 더럽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일에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심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21-22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건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건물에 사용된 모든 자재들이 견고하게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될 때 거룩한 성전으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되어 가고”라고 했는데, 이는 교회가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건축 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자라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생물의 성장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교회에 적용해서 사용했다는 것은 교회는 무생물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유기체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을 지속해서 완전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도를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주님은 당신의 몸인 우리 교회를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가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성전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 안에는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결국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성도는 교회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나로 인하여 교회의 거룩이 훼손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나로 인해 교회가 더 교회다워지고, 교회가 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믿음으로 맡기고,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전 생애를 다하여 사랑하고 세워가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Ⅲ.교회는 가장 아름다운 기관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집”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단순한 하나님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이 표현은 이방인들은 섬기는 생명이 없는 우상과 의도적으로 대조시켜 여호와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레26:12). 이것을 「언약문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라고 선언한 뒤에 이 언약문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를 향하여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약속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진리(ἀλήθεια)”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진리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진 기관입니다. 또한 “기둥(στύλος)”은 본래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받쳐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건물의 모습을 높이 드러내서 멀리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고 하면 교회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보여주어야만 하는 기관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터(ἑδραίωμα)”는 본래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대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복음을 왜곡하는 이단이나 복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고하게 지켜야만 하는 기관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에 대한 위대한 사명을 가진 기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사수(死守)해야 합니다. 또한 그 복음 진리를 높이 들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가진 이중적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진정한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교회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기관이 있을까요? 이 아름답고 고귀한 교회에 내가 속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한 교회를 위해서 내 작은 힘으로 헌신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고 하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서 이 역사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역사를 우리 교회를 통해서 전개하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없으면 이 세상의 역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사명을 감당할 때, 이 세상의 역사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드시고,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비록 작은 것 같고,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 주님의 몸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방주로 사용하십니다. 또한 우리 광성교회는 성령의 전, 곧 성전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완전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를 굳게 지키고, 또한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밝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하심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너무나도 위대하고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치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이 시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삶의 여정에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엡 1:22-23 / 이필재 목사
오늘은 갈보리교회 창립 21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두 가지를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고, 그 교회를 목회해나갈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3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교회와 사도를 확실하게 세우심으로 모든 세계 만민의 구원의 길을 이 공동체를 통해 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도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문화와 형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끝없는 사도들이 배출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세움으로 구원 사역에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교회가 하나 생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요 사도가 하나 생기는 것도 똑같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에 보시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 임직식 때 선배 제사장들이 새로 제사장이 되는 젊은이를 앉혀놓고 성령의 임재를 뜻하는 올리브기름을 머리에 부어줍니다. 제사장들은 젊어도 수염을 기르게 되어 있어서 머리에 부은 기름이 얼굴로 흘러서 수염으로 내려나게 될 것 아닙니까? 그 수염 끝으로 떨어지는 기름방울이 제사장 옷깃까지 다 적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모두 환호하며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영적 사역자 한 사람이 이 땅에 탄생하였다고 박수를 치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를 세우셨는데, 21년 전 갈보리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구원 사역에 이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부터 교회관이나 사도직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확실하게 했기 때문에 교회 세우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해서 교회를 많이 세웠고 지금 열심히 하는 선교 사역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또 세우라고 가르치신 교회관을 우리가 이런 날에 살펴보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교회 본질적 모습이 무엇인가?” 몇 가지가 있는데 이 교회는 제일 중요한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처음 선언하실 때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시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라도 나사렛 예수를 구원의 메시아로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인물이라도 메시야로 고백하는 교회도 교회가 아닙니다. 이단 교파들은 교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대신하여 고백하는 곳이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 고백은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항상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인류 구원의 메시야이시며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하늘 높이 십자가를 세우고 거룩한 장식으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거룩한 모임의 자리, 그것이 곧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입니다.
결혼 주례하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면서도 주례자는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간혹 어려운 일이 발생하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혼식 직전에 도망가는 하는 신부도 있었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신부를 보고 부모가 “지금이라도 늦지 아니하였으니 마음을 고쳐먹어라!” 그랬던 부모도 제가 주례하는 과정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순서가 바로 결혼 서약입니다. 이것은 고백입니다. 결혼식 준비를 잘 해서 리무진 차가 준비되어 있고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예물이 준비되어 있고 축하객도 수천 명이 모여 있을지라도 “당신은 오늘부터 이 남자나 이 여자를 남편이나 아내로 평생 사랑하며 살겠느냐?”라는 주례자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그 결혼은 무효 선언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이 써지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식 때 사회자를 따로 쓰지 않고 제가 직접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경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례하려고 막 입장하는데 사회자가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하는 말을 “지금부터 장례식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런 실수를 왜 하나?’ 생각했는데 사실 사회자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좀 발음을 빨리 해서 그렇게 들린 것이지 “장내 예식”을 시작하겠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빨리 말하니까 모두 장례식으로 알아들어 신랑, 신부 모두가 기분이 안 좋아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 답변을 아주 크게, 결혼식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하게 확실하게 대답하라고 합니다.
두 번째, 교회는 소유권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정의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누가 세웠든지 누가 헌금을 했던지 상관없습니다.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사용해야 합니다. 헌당예배라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돈을 내서 건축한 교회일지라도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는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헌당한 교회는 영원히 주님의 뜻에 최대한 가깝게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분열과 분쟁의 역사를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상처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이나 재산권을 가지고 지나친 집착을 하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을 말씀드리면 기독교 선진국에서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이민자들이 남의 나라에 가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면 교회 건축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외국인들의 교회를 빌려서 신세지게 됩니다. 그런데 서구 교회는 교인이 많이 줄어서 그렇게 잘 건축된 예배당이 필요가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다른 인종들에게 모든 교회 재산권을 다 물려줍니다. 제 친구 목회자들은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얼마나 잘 지었는지 모릅니다. 목사 사택도 얼마나 편리하게 잘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다 너희가 갖고 잘 사용하도록 하라.” 모두 사인해서 다 넘겨줍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현재 갖고 있는 은행 구좌의 헌금까지 “우리 교회가 아직 헌금이 은행 구좌에 이만큼 있는데 이것을 너희가 가져라. 이것은 우리 개인들이 가질 수 없는 돈이다. 하나님의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 사역에 사용해라.” 그래서 제 친구는 교회 건물, 사택 건물, 은행에 구좌 몇 억 있는 것까지 다 물려받아서 목회를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철학은 하나의 이유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교회는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다가 너희에게 주니까 너희가 또 필요가 없어질 때는 다른 형제들에게 주어라. 관리자는 바뀌어도 교회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지켜 나가라.” 그래서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것을 노리는 경우도 또 더러 있습니다. ‘이 교회에 할머니가 몇 남았는데 다 죽으면 이 교회 우리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이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웠던 것도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가 있고, 다른 용도를 목적했던 것도 교회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갈보리교회도 삼성동에 있을 때는 다른 용도의 건물을 구입해서 교회로 거룩히 사용을 했고 지금은 그 건물이 또 상업 건물로 변했고 갈보리교회는 지금 이쪽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팔았습니다. 그게 신학적으로 불완전의 요소라는 겁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가 않고 불완전합니다.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우리가 교회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상의 교회에 완전성을 부여하면 큰 시험거리가 생깁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을 파느냐?” 그럴 수도 있고 “상업 장사하던 곳을 왜 하나님의 성전으로 쓰느냐?” 이럴 수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잘못알고 있어 그런 차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도 필요에 의해서 헐고 다시 지을 수 있고 또 팔고 필요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교회의 요소이다.’라는 것이 신학적으로 정의가 되어 사람들이 해석합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취급을 받고 웅장하게 건축된 솔로몬의 성전도 불완전하니까 불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의 역사가 구약에 그렇게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이 지상의 모든 교회는 불완전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무형 교회만이 완전한 것이라고 정의해야 이런 시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순서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도 여러분이 잘 기억해야만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순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필재 목사가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 된 것을 누가 계획했습니까? 하나님만이 계획하신 겁니다. 저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계획한 일 조차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이 땅에 태어나서 갈보리교회 교인된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또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인도를 따라서 어디를 가든지 순례자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음 방향을 정해야 됩니다. 내가 어디에 갔을 때, 또 어느 교회를 출석했을 때 세 가지 마음을 신학적으로 정의해야만 신앙생활을 훌륭히 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뭐냐? “How to settling”이라고 하는 문제인데 “어떻게 정착할 것인가?” 내 신앙 배경은 이러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왔는데 이 교회에서 내가 정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러 가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자, 여러분 중에 과거에 가톨릭교회에 나가셨던 분 계시죠?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순복음 혹은 불교, 유교에 계시다 여기 오신 분도 계십니다. 이 교회 내용을 잘 살펴보니까 모든 내용이 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을 때 내가 거기에 정착하는 겁니다. ‘이 교회 오니까 여러 가지 내용이나 환경, 신앙고백, 설교 이 모든 것이 내 신앙에 도움이 되겠다.’라고 내 마음으로 결정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들어갈 때는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일식집을 가든지 중국집을 가든지 빵집을 가든지 한식집을 가든지 결정합니다. 그런데 빵집에 들어가서 “냉면 주세요.” 그러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신앙의 방향도 다양성이 있어서 자신에게 적당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다양한 교회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에게 제일 좋은 교회를 선택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연히 교회 다니면서 불편스럽게 교회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하러 그렇게 다닙니까? 한번 뿐인 인생인데, 이 중요한 인생을 행복하게 신앙생활 해야지 그렇게 불편하게 “이 교회는 뭐가 맞지 않고,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나갑니다. 뭐하려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정착할 것인가?” “How to settling” 이것이 첫째 순서입니다. 두 번째는 “How to participation”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방관자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는 길에 나도 거룩한 참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 교회에서 내가 이렇게 봉사하며 이렇게 참여해야겠다.’ 그 참여가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수준입니다. 주님은“너희는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어느 정도의 교인만 형성이 되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수준에 맞게 참여한 교인들은 얼마든지 행복한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 중에 어려운 무슨 기술적인 것이 있습니까? 능력 면에서 교회가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불필요한 인간관계, 불화가 항상 문제가 됩니다.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예배드리고 우리의 책임만 다 해나가면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참가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지!’ 이렇게 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행복하고 좋은 교회를 만들 수가 있고 세계 선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How to contribution”이라고 하는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 내가 있음으로 교회가 풍성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나 때문에 갈보리교회가 풍성해지고, 나 때문에 이 교회가 하나님의 큰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그것이 공헌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교회들은 바로 이 공헌한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보리 교회는 창립 21주년 이제는 성년의 나이가 되어 성년의 공헌을 위해 오늘 선교사 2차 파송을 합니다. 이 교회 하나가 생기므로 세계 350 군데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앞으로도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갈보리교회가 영원하고 갈보리 교우들이 영원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우리 모두가 크게 쓰임 받게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21년 하나님이 지켜주신 갈보리교회가 이제 성년이 되어 세계 350 군데 선교할 수 있는 큰 역사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영원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우리 모두가 신학적인 아름다운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로운 인간성
엡 1:22-23 / 이종윤 목사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1:22에 단 한번 나오지만(23절은 관계대명사로 나옴) 에베소서 전체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성령께서 교통하심이 있는 곳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전, 예수의 몸,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곳이 교회라고 합니다.
I. 하나님의 나라(God's Kingdom)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개인의 삶 속에 들어갈 때 변화를 받고 영적 축복을 누리는 천국이 임합니다. 바울은 “너희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19)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너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왕국(교회)를 보았습니다.
II.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God's Children in Christ)
바울은 교회를 친구, 노예, 고용인을 포함하는 가족(권속)이라 했습니다(19c).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가족 관계, 곧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입니다. 가족에서 부모의 성품이 자녀에게 전수되듯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돌보고 교제하며 기도하는 가족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양자가 됨으로 형제, 자매 관계도 맺어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속할 뿐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 인도하심, 상속의 축복을 받는 특권을 얻습니다.
III. 하나님의 성전(God's Temple)
교회의 세 번째 모습은 성전입니다(20-22). 첫째 그 기초(The foundation)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의 가르침 곧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둘째 모퉁잇돌(The Cornerstone)은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터(고전3:11)요 모퉁잇돌(엡2:20)이라고 했습니다. 모퉁잇돌은 기초 돌이면서 (사28:16)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 신자들은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야합니다. 이때 돌은 그 놓일 위치 따라 선택되고 다듬어져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위치가 정해지고 서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성전의 돌은 선택되고 모양과 위치가 정해져서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이루어 수천년간 한 곳에 있게 됩니다.
맺는말
새 인간성을 갖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교회(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가족관계를 정립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의 신앙 기초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고 산돌같이 신령한 집을 짓는 새사람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교회의 충만
엡 1:22-23 / 석원태 목사
스스로 독존하신 하나님 자신의 임재는 구약의 번제단과 성소와 성전에 충만함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불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리고 구름으로, 또 영광의 충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실상 구약 선민의 역사는 이 하나님 자신이 임재하시는 충만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하신 때가 찼을 때, 그 영광(구름, 불기둥, 불…)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로 이 땅에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생명 충만으로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가 승천한 후 약속대로 보혜사(성령)로 다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다시 예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운동이었습니다. 교회운동은 충만 운동이었습니다.
Ⅰ. 교회의 충만은 성령 충만 운동입니다.
사도행전 2장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하였습니다. 2장 4절에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저희’는 예수님의 사활(死活)과 승천을 목격한 예수의 제자들을 위시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던 일반 제자들이었습니다(행 1:4~5, 12~14).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주님은 약속대로 저들 가운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각 사람 위에 성령으로 임했습니다. 바로 그때 저들은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2:11). 그리고 베드로의 성령 설교 결과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에 세례를 받은 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행 2:38, 41). 그 후에 저들이 모여 기도할 때에 기도가 끝나자 그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에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였습니다(행 4:31). 그 후에 예수를 따르는 신자(제자)들에게는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행 13:52). 이러한 성령 충만은 사실상 예수의 충만, 곧 은혜와 진리와 생명 충만의 교회적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계시였습니다.
Ⅱ. 교회 충만은 선교 충만의 운동입니다.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생명 충만의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권능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행 1:8). 바로 그 권능의 내용은 은혜와 진리, 생명의 폭발을 의미합니다. 그 권능의 힘을 받은 자들은 천국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채워버리고, 유대를 채워버리고, 땅끝까지 채워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8).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받은 복음선교의 충만은 장소 충만입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입니다. 온 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 충만입니다. 만민입니다. 구원얻기로 작정된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자의 충만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있습니다. 헬라인도 있습니다. 종도 있고, 자주자도 있습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갈 3:28). ‘온 천하’에 ‘구원 얻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은 복음을 받을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행 13:48). 말하자면 전도대상의 수가 세상 중에서 꽉 차버린다는 사실입니다.
Ⅲ. 교회의 충만은 구원인의 충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양 100마리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 우리 안에 99마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의 축제를 벌인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인 회개와 구원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에 있습니다. 100마리 양은 본래의 수였습니다(눅 15:1~7).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의 수가 있습니다(행 13:48).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예정의 본수를 14만 4천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는 이 14만 4천인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과 9절은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다시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는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시온산’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나오는 ‘보좌 앞과 어린 양 앞’도 천국을 가리킵니다. ‘보좌 앞’이란 천국에 실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저들이 인을 맞았다고 하였습니다(계 7:4). 그리고 저들의 이마에 성부와 성자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14:1). 에베소서 1장 13절과 4장 30절에는 성령의 인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내용의 뜻입니다. 저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시켜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 ‘14만 4천인’이란 수는 여자적(如字的)이 아닌 상징적 수입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예정의 본수를 나타냅니다. 다르게 말하기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라고 하였습니다. 최다수의 구원인을 알려주는 상징적 계시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잠자는 구원인의 총수입니다(계 14:13). 다시 바울은 영감 속에서 이 14만 4천인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14만 4천인 가운데는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장 12절에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저희’는 ‘유대인’ 곧 구원받을 신령한 이스라엘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시기심을 일으켜 그들도 구원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혈통적인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들도 14만 4천인 가운데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이방인 가운데 충만한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방인의 충만한 수’ 역시 14만 4천인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두 충만한 수, 곧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합쳐서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곧 14만 4천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 충만은 사실상 14만 4천인을 목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Ⅳ. 교회의 충만은 예수 재림으로 성취의 마감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천국복음이 복음받을 대상인 온 세상에 충만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인의 본수 14만 4천인이 찼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때는 세상에 끝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진리 선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한 때(시간)가 꽉 찰 때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14만 4천인의 수가 찰 때입니다. 그렇다면 때가 차고(시간), 장소가 차고(온 세상-땅끝까지), 사람이 차면(구원인-14만 4천인) 끝날,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영감의 기록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13)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창조 질서는 하나님 ⇒ 인간 ⇒ 만물이었습니다. 타락 이후에 이 질서는 파괴되어 오히려 만물(피조물)이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질서를 회복하여 만물은 사람의 것이고,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고전 3:21~23). 그러므로 이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은혜와 진리와 생명의 충만(예수)은 성령 충만으로, 성령 충만은 교회 충만으로, 교회 충만은 만물 충만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피조세계) 만물(피조세계)을 충만케 하시는(꽉 채움) 충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궁극적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인의 수를 채우는 위대한 복음 충만의 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이 세상 시간의 충만입니다. 공간의 충만입니다. 사건의 충만입니다. 역사 의미의 충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 성취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비밀한 뜻인데 그것은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때가 찬 경륜’은 사실상 구원인의 수가 꽉 차버리는 때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하나의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시대(천국)가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 1:10). 그래서 교회는 은혜와 진리와 생명(예수 구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으로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은 선교 충만으로 나타납니다. 선교 충만은 14만 4천인을 채우는 구원인 충만으로 나타납니다. 14만 4천인의 충만은 바로 예수 재림의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이 세상 끝날이 오고(마 24:14), 지구의 종말이 오고(벧후 3:10~12),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벧후 3:13, 계21:1), 영생하는 불사의 영화로운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7:15~17). 그래서 교회는 역사의 알맹이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구속성취의 대 환희가 성취되고 말 것입니다(롬 11:36). 할렐루야!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엡 1:22-23 / 김영주 목사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를 보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에서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교회라 하면 먼저 건물부터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가 건물을 말한다면 예수님은 건물들의 머리가 되는 셈입니다. 아닙니다. 건물이 아니라 신자공동체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신자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신자들이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신앙생활도 풍성하고 주님과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예수님과 깊이 있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내가 무엇하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어떻게 하기 원하시는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내 삶에 최고의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잘되는 것'입니다. 롬12:2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기본적으로 3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특성은 무엇입니까? 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잘못되거나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선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과 기쁨이 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불행한 사람 없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조금 손해 볼 수 있고, 덜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행복합니다. 세상 어디서도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은 선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는 기쁩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과거 어느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계셨습니다. 그때는 겉보기엔 큰 교회의 담임목사이니까 사람들이 부러워 했씁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속이 상하고 당회 한 번씩 하고 나면 머리가 아파서 밥을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두 번 쓰러졌습니다. 목회가 아니라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다 깊이 있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개척을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저했지만 순종했습니다. 개척해서 3년이 지났는데 얼마 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하더군요.
"김목사님, 저 지금까지 목회 하면서 요즘처럼 행복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기쁩니다. 목회 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 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개척이었는데 내가 그 뜻을 모르고 개척이 부담스럽고, 겁나서 큰 교회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개척하니까 이렇게 행복하고 좋습니다."
물론 이 분은 개척한 이후에 저번에 있던 교회처럼 사례나 씀씀이는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셋째는 온전하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합니다. 후회나 실수가 없으십니다. 지금 볼 때는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 같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그 자리가 최선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취직을 위해 기도했는데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해야하겠느냐고 물어서 취직을 위해 기도했고, 문이 열렸으니 '하나님의 뜻 인줄 믿고 들어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취직시켜주심을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까지 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맘에 안 드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 선교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갔는데 그럴 가능성이 별로 안보이고, 장래 비전도 그리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실망했습니다. 한 달인가 다니더니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직장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너무 섣불리 결정한 것 같다.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 수 있느냐? 좀더 기다려봐라! 기다려보면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이 자매가 아팠습니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6개월을 병원신세 졌습니다. 한국 회사 같으면 얼마 못되어 그만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는 6개월을 쉬게 해줬습니다. 그 동안 월급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병원 치료비가 많이 들었는데 회사에서 다 해결해줬습니다. 지금은 다시 회복되어서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 자매가 나중에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많은 치료비 어떻게 해결하며, 치료되었더라도 다시 어떻게 취직하며, 병원에 있는 동안 월급까지 다 주는 그런 회사가 어디 있냐며, 그 회사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때 그만두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제가 웃으면서 가끔 묻습니다. "그 회사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실수하셨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회사야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면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유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머리의 명령을 따라야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주인이요, 머리되어 삽니다. 모든 결정을 자신이 합니다. 결정할 때는 혼자서 다 결정하고 잘 안되면 그때서야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결정을 해놓고는 안되면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다 결정해 놓고 예수님은 한쪽 구석에 밀쳐버리고 그러다가 안되면 다시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건 예수님이 머리되신 것이 아닙니다. 꼬리 되신 것입니다. 머리되어야 할 분을 꼬리에 두었으니 기분 좋을 리 없죠. 또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잘된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쳐둔 결정은 당시에는 좋아 보이고 잘될 것 같아도,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게 됩니다. 그러니 기쁨도 행복도 만족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신앙 생활 할 때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과 충분히 상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기도시간이 있어야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물어야합니다. 다른 영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안내를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 안 하시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모든 결정을 보류하고 기다려야합니다. 이것이 머리이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 전체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믿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서 무엇을 해야할 때 이 교회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합니다. 땅을 구입할 때, 건물을 지을 때, 선교 할 때, 사역을 할 때......하여튼 모든 결정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는 그 교회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려하지 않고, 사람들의 의견만 듣고 결정해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사지 교회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 무엇을 하면 안되고, 기도 없이 결정하면 안됩니다. 교회일 할 때 제일 무서운 것은 기도 없이 일하는 것입니다. 실수하기 쉽고 예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만 기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결정되더라도 기도하면서 진행합니다. 다른 교회들도 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만, 그렇게 해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공동체가 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하기 원하시는 첫 번째 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명령이 이것입니다. 마28:18-20절을 보십시다. 이 부분을 '가장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교회가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것처럼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두 번째 세 번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교회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교회가 다른 일은 다 잘하는데 전도를 소홀히 한다? 그러면 그 교회는 문 닫아야 합니다. 교회로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병원이 있는데 좋을 일을 많이 합니다. 이웃사람들도 돕고, 양로원도 돕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갔다줍니다. 주말이면 어깨띠를 두르고 하천 정화사업도 합니다. 쓰레기 줍기도 자주 합니다. 병원 때문에 주변환경이 낳아졌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병원입니까? 아닙니다. 문닫아야합니다. 병원의 첫째 존재이유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체쳐 두고 나머지 일을 아무리 잘한들 병원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구제도 해야합니다. 사회에 공헌도 해야합니다. 환경운동도 해야 합니다.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일도 해야합니다. 장애 우들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아무리 잘한들, 영혼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세운 첫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이 영혼구원의 일을 할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입니다. 순모임입니다. 순모임에 불신자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고 또 와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보면 순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도의 장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불신자들은 아는 사람이 없거나 적을 때 교회에 정착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아는 사람이 6-7명 정도는 있어야 불신자가 교회에 편안하게 정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왔다가도 금방 떠납니다. 그런데 순 에서 알고, 사귀다가 오면 최소한 6-8명 정도는 알면서 오게 됩니다. 아는 사람이 있기에 주일 예배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남의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 같습니다. 그러니까 정착이 잘됩니다. 물론 순원들의 숫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효과적인 양육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 신자들이 성장하지 못하기에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떠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초 신자 때는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하는데 주일 예배만 드리고 가면 이런 것을 먹을 기회가 업습니다. 그런데 순모임에 들어가면 거기서 양육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순원들이 돌봐줍니다. 기도해줍니다.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때로는 필요를 채워주기도 합니다. 다른 순원들의 변화되는 모습, 간증, 은혜 받은 것을 나눔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모임에서는 비판하거나, 정죄 하거나, 책망하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순이 진행되면 순이 죽기 때문입니다. 새 신자는 순에 들어가면 최고의 사랑과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3)제자훈련이 되지 못합니다.
초 신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자라면 다른 동생들을 돌보게 됩니다. 제자훈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순입니다. 순에서 제자훈련을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질문하는 분들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훈련 교재도 없고, 제자 훈련한다는 말도 없었는데 무슨 제자훈련입니까? 아닙니다. 분명 순에서 제자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순원들이 순장들의 섬김을 보면서, 순원들의 봉사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나누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어가고 순장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순장이 되면 저번 순장이 하던 대로 순원들을 섬깁니다. 제자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자훈련 하면, 성경공부를 연상합니다. 한국교회들이 제자훈련을 성경공부중심으로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머리에 정보를 집어넣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공부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여서 성경공부만 하고 끝나버리면 다른 사람의 삶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지식만 배워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 끝나면 성경지식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삶은 안 바뀌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자훈련을 하고 나서 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닮은 또 다른 제자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본 것이 없고,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 문이 불여 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삶을 보여주는 현장이 순모임입니다.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고, 삶을 나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대방들이 순장이나 순원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홀 믿음 신앙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홀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편만 믿든지 아내만 믿든지, 아니면 아이들만 믿든지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교회 와서 실컷 은혜 받고 나서 집에 가면 부부 싸움하면서 다 까먹어 버립니다. 가정이 화평하지 못하고 날마다 전쟁하면서 신앙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조금 자라려고 하면 남편이 반대합니다. 아내가 반대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순모임은 이런 것이 줄어듭니다. 가정에서 모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부부가 모임을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같이 예배드리고 식사에 참여하게 되어 서로 알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고 교회에 대한 것들을 접하게 됩니다. 여러 가정이 남녀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생활은 어떤 식이었습니까? 상대방이 믿기 시작하면 바로 남 선교회나 여전도회에 들어가서 끼리끼리 어울리는 신앙이었습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따로 따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순모임에서는 식구들이 같이 모입니다. 함께 갑니다. 훨씬 부담이 적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을 연구한 분들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그렇게 빠른 시간에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1)소그룹중심의 모임입니다.
--행2:42절을 중심으로 볼 때 소그룹에서 친교, 기도, 섬김, 배움, 나눔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 사람이 예수 믿기로 시작하면 바로 이 소그룹에 들어가서 함께 지내다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2)가족적인 개종입니다.
초대교회는 짝 믿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짝 믿음이 아니라 홀 믿음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왜냐면 개종할 때 가족적으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행10장에 고넬료의 가정이 나옵니다. 이 가정도 온 가족이 한번에 개종한 경우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신앙의 결속력이 강하게 되고, 신앙적인 갈등이 없습니다. 함께 믿으니까 오히려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남자는 남선교회 여자는 여전도회로 가면 안됩니다. 특별히 새 신자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3)가정중심의 모임입니다.
가정을 개방해서 각 가정을 돌아가면서 모이니까 서로 너무 잘 알게 됩니다. 자연히 상대방 가정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돕게 됩니다. 우리 집에는 필요 없는데 저 사람 집에는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가져다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가정을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유무 상통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 가정에서 모이다 보니 부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신자에게 가장 부담스런 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순서도 어색하고 옆에 낮선 사람이 앉으면 긴장됩니다. 불안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순모임으로 모이다보면 교회에 와서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미 가정에서 훈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적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소그룹에 참여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결신을 했다고 볼 수 없다" "한 사람의 믿음의 시작은 차가운 세상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따뜻한 환경 속에서 더 효과적으로 보육된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머리이신 주님의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아직 순에 들어가지 못하신 분들은 빨리 순에 들어가 머리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 되시길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교회
엡 1:22-23 / 마경훈 목사
교회의 영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 인줄 알게 되면 교회생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생활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마16:16, 18).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반석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고백이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의 간판을 달고 우리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마16:18).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한다면 우리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이며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강함이 교회에는 있습니다(마16:18).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던 어떤 나라도, 권력도, 왕도, 사상도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에 도전했으나 주님은 교회를 지키셨고 교회를 훼방한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교회는 천국열쇠를 가졌습니다(마16:19).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마18:18-20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천국문을 열려면 반드시 교회를 통해야 합니다. 개인이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또 다른 어떤 단체가 되었든 천국문을 열려면 반드시 교회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 외에 천국 열쇠를 주신 다른 개인이나 단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두 날개를 가졌습니다(행2:42-47).
초대교회는 대그룹날개와 소그룹날개를 가지고 비상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비행의 원리는 두 날개입니다. 어떤 새도 한 쪽 날개만 가지고 날수 없습니다. 양 날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초대교회는 성전에서 모이는 대그룹날개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날개를 사용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루터를 통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으며 그 운동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20세기 후반부터 좀 더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소그룹날개의 활동이 제2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엄청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두 날개를 사용해야 합니다. 대그룹날개인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소그룹날개인 셀모임 즉 과거의 구역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사셨습니다.
행20:28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가치가 옳을까요 주님의 가치가 옳을까요? 당연히 주님의 가치가 옳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보다 다른 것에 많은 가치를 두고, 교회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사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물건의 가치는 그 것을 사기 위하여 낸 돈의 액수만큼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면 교회의 가치는 주님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교회는 성도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고전1:2 교회를 세 가지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입니다. 둘째는 성도입니다. 셋째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목숨까지 주시면서 세우신 주님의 교회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러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귀한 듯 내 존재 가치가 값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신한다면 교만이 아니라 가치의 면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외쳐도 충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3:15).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만나기 위해서는 저의 집에 찾아오면 되는 것처럼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집인 교회를 찾아와야 합니다. 교회 오는 것이 복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만 계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저의 집에는 저만 있지 않습니다. 저의 가족들이 함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가출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가출한 영적 가족들이 많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 방황한 것처럼 하나님의 집을 나가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복음을 줘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교회에 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세상에서 천 날 보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루를 귀하게 여겼으며 악인의 장막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했습니다(시84:10).
마21:13에 보면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교회로 와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기도하기에 좋은 분위기입니다. 기도가 살아야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기도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은사를 주신 목적 중에 하나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고전14:4, 5, 12을 보면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의 원어를 보면 집을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위하여도 주셨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2-23).
그러므로 교회와 주님은 일체입니다. 몸과 머리가 하나이듯이 주님과 교회는 하나입니다. 머리의 영광이 몸의 영광이듯이 주님의 영광은 교회의 영광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몸이 머리에 순종하듯이 교회는 주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사람의 머리에서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교회의 모든 일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엡5:29에 보면 사람이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신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몸 된 교회에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까지도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주님이 교회를 보양하시지만 반드시 지체의 수고를 통해서 몸이 세워지는 것처럼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의 수고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지체는 각자 고유하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만약 한 지체라도 자신의 일을 쉬게 되면 교회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입이나 눈 혹은 팔이나 다리가 하루만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10:38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에 담긴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시133:2에 보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옷을 적시고 옷깃에까지 기름이 발라지는 것같이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부음이 몸 된 교회에도 부어지고 몸에 붙어 있는 지체에게도 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남겨 두신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부어졌던 기름부음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주님에게서 나타났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의 충만입니다(엡1:22-23).
여기서 충만이라는 말은 가득함, 넉넉함, 넘치는 등의 단어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만물을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사람들에게 새생명과 능력과 은혜와 축복을 충만하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10:10에 보면 주님이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은혜와 축복과 생명과 능력이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축복과 건강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들은 헐벗고 굶주린 자들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지 않고 그런 것들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주님은 오직 교회만을 통해서 주님의 충만하심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주님의 충만함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기루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엡5:32).
주님은 교회의 신랑입니다. 엡5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르쳐줍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주님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만큼 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교회인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듯이 주님에게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상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내년에도 더 말씀 중심으로 들어가야 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범사를 행해야겠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딤전3:15).
진리가 교회의 기둥이며 진리가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진리가 없다면 무너집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기초가 약하면 무너지는 것이고 아무리 잘 지은 집도 기둥이 무너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다른 조건이 잘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빠져 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진리를 버린다면 많은 사람이 모이고 큰 건물을 짓고 엄청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로서는 끝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강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가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 인간적인 사담과 세상 이야기 그리고 정치와 철학이 가득하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끝장입니다.
▼교회는 금 촛대입니다(계1:20).
촛대는 빛을 발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만약 교회가 빛을 일어버린다면 교회의 사명은 끝난 것입니다. 교회가 빛을 발하려면 선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기름이 타올라야 합니다. 교회가 빛을 발하려면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촛대의 빛은 촛대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촛대 안에 공급된 기름이 타면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금 촛대라고 가르쳐주는 계1:20과 2:1에서는 주님은 교회의 사자인 교회의 별 즉 하나님의 종들을 오른손에 붙잡고 계시면서 일곱 금 촛대 즉 교회 사이에 다니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가장 강력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계2:7, 11, 17, 29, 3:6, 13, 22을 보면 소아시야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는 성령이 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행13장에 보면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한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던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주를 섬겨 금식하다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세계 복음화의 중요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신앙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군들도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자세로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필요와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
엡 1:23 / 김남준 목사
1. 창조와 신적 상호교통
성경본문에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지만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한 이 구절은 생소한 구절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안에 계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계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는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지만 우리 몸 속 어디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과 물질의 차이입니다. 만물을 다 뒤져도 거기에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 안에 계심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계시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입니다.
충만케 한다는 것은 꽉 채운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꽉 채웁니까?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그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의 영광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고 동물들은 각기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대로 온전한 동물이 되었고 식물은 식물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온전한 분량의 식물이 되었고 이하 모든 사물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창조된 인간을 비롯한 이 모든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 모든 창조한 것들 속에 당신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II. 구속과 신적 상호교통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게 되어 모든 만물에 가득 채웠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은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만물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성령 안에서 이루고 있던 아주 아름다운 연결과 연합들이 모두 깨뜨려지고 무질서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 하나님의 세계를 파괴하는 큰 능력을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아름답게 연결해 놓으셨던 그 연결 속에 두신 하나님 자신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거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모든 피조물들의 상호교통이 깨어지고 파괴되는 무질서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진 이것은 죄의 힘과 능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모든 만물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충만한 것들이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라진 것입니다.
A. 구속의 목적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될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만물의 창조를 위한 위대한 계획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무한한 지혜와 영원한 능력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그 설계도를 따라서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 창조한 모든 만물들을 성령 안에 있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에 충만한 것을 그 모든 사물들 속에 스며들게 하셔서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로부터 하늘에 떠 있는 태양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창조하신 그 분의 솜씨와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가족처럼 이 존재는 저 존재에 기대고 저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지하며 상호 연결된 가운데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한 목적을 위해서 이바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 목적에 이바지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과 위대함을 드러낼 때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가장 완전한 힘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인간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사물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가서 우리 위에 있는 한 분,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봉사한다면 우리 밑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질서로 돌아가서 우리를 섬기고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서 그 어둠이 없었더라면 차마 이 세상에 보여 질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넘치는 사랑과 비범한 긍휼, 확실한 은총, 인간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아버지의 긍휼을 그 어두운 세상 위로 지나가는 한줄기 밝은 빛처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 의해 창조목적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이 세상에 보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이 죄로 인해 망가진 이 세상으로 인해 보다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가 너무 타락하고 어둡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도 얻고 세상도 얻으려는 사람들의 나약한 핑계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주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많이 미끄러졌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은 새롭게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어둡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알고 그 진리 가운데로 돌아가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그리스도를 떠나서 경험했던 그 칙칙하고 어둡고 고통스런 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행복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뜨겁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때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주님을 대적하던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하였다고 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쉽사리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무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끊임없이 낮아진 가운데 순교의 순간을 앞두고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거꾸로 보면 사울이었을 때 타락한 그 모든 시기는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주님의 명예에 먹칠을 한 인생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기가 우월해 보일만한 그 놀라운 일에 쓰임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만약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껏 실패하고 죄 가운데 미끄러져 살았다 할지라도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미끄러지고 넘어진 많은 날들은 자기에게 임한 구원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자랑하게 만드는 배경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악함이나 우리의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지만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원래 있었던 충만함을 상실한 인간과 이 세계를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하도록 채우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생명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볼 수 없을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생하게 우리와 똑같은 뼈와 살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처럼 울고 우리처럼 아파하고 우리처럼 핍박을 받으며 우리같이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당하신 그분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큰 사랑과 긍휼, 자비를 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 되심을 사람 되심 아래 철저히 감추시고 율법 아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율법을 수여하신 분이셨지만 그 율법 아래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을 따라 판결을 받으시고 멸망의 일을 위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한없이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시는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들이 못 버리는 우리의 자아 때문에 지은 그 많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친히 자기를 버리셨으니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형벌에 복종하심으로 쏟아 부어지는 아버지의 진노를 한 몸에 받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B. 교회의 모든 필요의 유일한 보고
아들의 이런 복종은 아버지께서 시키셨기 때문에 하신 복종이 아니라 아들이 기꺼이 드리신 복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보내신 사랑이었지만 십자가의 죽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아들의 완전한 복종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창조된 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고 함께 상호교통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모으셔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보물 창고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사랑보다 더 큰 인간의 감정은 미움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의 자원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미움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무 관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들을 찌르기 위해서 평생을 가슴에 품고 다니던 피 묻은 칼을 내려놓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난과 핍박, 시련과 괴로움, 온갖 시험들이 내 안팎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그 모든 것들을 참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로 격려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베푸신 큰 사랑과 분에 넘치는 긍휼, 한없이 오래 참으시는 그분의 인내가 바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들은 이 시대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알려고 찾으려고 배우려고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를 가져다주지만 그 대답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우리들이 살았던 삶은 각자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고 우리 중 누구도 복사판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다양한 문제들은 한분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 안에서 해결되었고 그분이 우리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구세주가 세상인 것처럼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익히고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듣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창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교인이 되면 제일 먼저 배워야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중에는 그리스도 없이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 사랑 앞에 하나님을 반하여 살았던 자신의 많은 죄를 참회하게 하고 핏빛보다 더 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울게 만들고 죄 가운데 미끄러진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 자신이 예수를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던 길을 돌아가게 하는 것,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 없지만 주님 한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의 자리에 서서 예수처럼 살기 위해 예수처럼 죽고 싶어 하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돈이나 재주로 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에 목말라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 진리를 몰라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찬란한 진리의 빛을, 생명이 없어 파리해진 자들의 영혼 속에 부으시는 생명의 강물 같은 은혜, 자기 사랑으로 인해 고립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의 빗장을 풀어 은혜의 강가로 나아오게 하는 이 신령한 감화의 능력, 이 모든 것들은 돈이나 한사람의 말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없어도 돈이 꼭 있어야 되는 것처럼, 예수는 없어도 우리가 행복할 수만 있으면 그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 인본주의적인 정신이 교회를 향한 하늘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기도해도 절대 응답되지 않을 수없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예수를 간절히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얘야, 곤고하게 사는 너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랴?”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C. 성령을 통해 생명을 주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 교회당을 드나들고 있는 비회심자들,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 그들에게 부어질 그리스도의 생명,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영혼을 중생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명의 나타남,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은혜의 물이 누구도 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생수의 강이 이 교회를 통해 가득차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흘러들어가는 기이한 생명의 역사,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의 수많은 문제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 생명을 주기 위해서 교회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생명을 이 땅에 분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일에 해답이시고 그 하나님의 모든 보화를 한 몸에 가지고 계신 그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께서 문을 여실 때 우리에게는 꿈꾸는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래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애적으로 만나고 변화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인생의 대안도 없다고 모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육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눈을 감고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돌아가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이 끊임없는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기를 싫어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세상에 있고 영혼 안에는 참된 안식이 없이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는 충만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미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기를 모두 주시므로 하늘의 창고를 열어주셨지만 본인이 그 쏟아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기 싫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이런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갓 결혼한 신부가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남편과 함께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만물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그분의 그 충만하게 하시는 역사를 교회가 온전히 받아들여서 그분의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자기 밖으로 이 생명을 흘려 내 보내게 하는 일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그 무한한 사랑과 십자가 고난의 덕을 입고 그분의 몸에 접붙인바 되었지만 그분의 몸으로 이 창조된 세상을 섬기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지체들을 아프게 하고 끔찍한 고통으로 그리스도에게 쓰라림을 주는 그런 몸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III. 그리스도로 충만케 됨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충만히 오셔야 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의 영혼,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도 깨우칠 수 없고 마치 불에 한번 달았던 쇠가 굳어지면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도 쉽게 녹지 않는 그 굳어진 마음에 생명의 강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신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답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무릎 꿇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 진리의 말씀에 권위를 인정하며 그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든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하찮게 여기고 그분이 주신 모든 권위를 휴지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는 막무가내의 삶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의 발 앞에 복종하는 신자의 마음을 통하여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겸손한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들은 대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꽂힌 사람들이 되십시오. 눈을 뜰 때마다 그리스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는 것을 감사하며 부딪치는 수많은 일상사속에서 그리스도 도움을 바라며 나의 언어와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께 어떤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 일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가득히 나타나도록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하고 그리스도 없는 세상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때문에 즐거워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만물 가운데 탁월하신 분이시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
엡 1:23, 빌 2:17-18, 골 1:24 / 김명혁 목사
제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닫고 또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축복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고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인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은 잠깐 보류하고 교회 사랑에 대한 말씀을 주로 하려고 합니다. 왜 교회 사랑이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삶입니까?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세우신 예수님의 집이고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교회는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찬 246). 저는 오래 전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인가 대학생 때 대구 주암산 부흥회에 참석해서 찬송가 246장을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서울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는 물론 부흥회에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많이 받곤 했는데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1절을 부르고 나서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놀랍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또한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어른 한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어” 라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아마 20여분 동안을 계속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귀중한 교회를 늘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라는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교회는 보통 집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집이고 성자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함께 모인 모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인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거룩하고 더 축복된 곳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 중의 한 말씀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 “내 어린 양”은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신 교회와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신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치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치는 목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자기 집보다 자기 일터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며 날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우리들은 지금 날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일 하루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몽둥이로 맞거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며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며 서로 교제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우리들은 지금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을 힘들어 하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새벽 기도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며 사랑과 구제와 봉사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교회를 자기 집보다 자기 직장보다 더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사모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아 제사를 드려도 자기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사도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재물과 생명을 다 바쳐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사도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보고 싶어했는데 저들이 자기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고 “교회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악의 중심부인 로마에 성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 씨앗과 거름이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사신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의 제물이 되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은 모두 자기 자신들보다 자기의 부모들과 처자들보다 성자 예수님의 교회와 양무리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성자 예수님과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사례비를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아보았기 때문에 자기와 가족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은 성자 예수님과 교회와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기들은 삼무 사무 오무의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성자 예수님과 교회와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니 원수와 같은 사람들까지 사랑으로 품으면서 성자 예수님 닮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몸에 지니는 귀중한 삶을 살다가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애양원 교회 사랑의 간절한 기도문 하나를 읽어드립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여기 "사랑" 이란 말을 21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부족하고 부족한 제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성자 예수님과 주님의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초등학생 때 평양에서 살면서 평양 제 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북한에서는 주일에도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2년 동안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시다가 감옥에 붙잡혀 가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11살 때 사랑하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라고 자주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울면서 그러면 가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저는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기 11살 때인 1948년 8월이었습니다. 몇 명 어른들과 함께 38선을 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달려와서 서서 손을 들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서서 손들을 들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서울까지 오게 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저는 한 평생을 부모님을 이별한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지만 남한에 와서 주일 날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며 봉사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평생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와 봉사와 전도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서울에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정성껏 했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중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신앙생활을 정성껏 했는데 저는 3년 동안 새벽기도를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를 드렸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12번이나 받았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로 돌아와서 한국의 예레미아 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교사의 일과 봉사의 일과 전도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우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그리고 2만 8천여 동내에 기서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서울고등학교 3학년 학생일 때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에 순종해서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토요일과 주일 찬송을 부르고 전도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고 3때는 공부에 전념하는데 저는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합격을 했습니다. 천막을 사다가 교회를 세우고 2년 동안 개척 목회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린이들 60 여명과 어른들 40 여명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부족한 제가 교회 사랑에 전념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2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 공부를 한 후 귀국해서는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교육 목사의 사역을 정성을 다해서 했고, 압구정동 영안교회에서 1년 동안 개척 목회를 정성을 다해서 했고, 그 후에는 청담동과 도곡동에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부족하지만 저의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집도 바치고 재물도 바치고 10여 년 동안의 사례비도 받지 않고 교회에 바쳤습니다. 시간도 바쳤습니다. 저는 28 년 동안 목회하면서 새벽기도에 빠지는 일은 없었고 주일 날에는 집에 가지 않고 종일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새 신자들과 성도들과 교역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주 아주 행복한 목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망극하신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은퇴 후 지난 14년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는 주님께서 피 흘려서 사신 주님의 작은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는데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기쁜 일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주님의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보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와 양 무리들을 위해서 시간과 정성과 드리는 제물 되는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귀중한 일을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했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도와주셔서 우리들도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우리들 자신보다 우리들의 집보다 우리들의 일터보다 우리들의 재산보다 우리들의 부귀나 영화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보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위한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제가 2017년 12월 28일 밤 들어 누어 자면서 쓰게 된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 라는 제목의 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므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밤에 들어 누어 자면서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도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즉 나의 지식과 나의 업적과 나의 명예 등 내가 귀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모두 내어버리고 그리고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시고 오직 나 위해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 대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서 죽게 내어버리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나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미쳐서 살 수는 없을까? 이것이 제가 가슴에 지니게 된 “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 였습니다. 사실 저는 저도 모르는 가운데 나 자신의 지식과 나 자신의 업적과 나 자신의 명예에 치우쳐서 스스로 속아넘어가면서 위선과 독선을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처절한 고민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평생 목회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교수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선교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섬김의 일도 잘 했는데, 내가 한 평생 구제의 일도 잘 했는데, 나는 지금도 은퇴 후 작은 교회들을 주일마다 방문하면서 순회 목회의 일도 잘 하고 있는데, 나만한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텐데.” 저는 이와 같은 위선과 독선 의식에 사로잡혀서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처절한 고민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위선과 독선으로 가득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몽둥이로 쳐 주시옵소서. 신앙의 선배님들 이야기는 너무 많이 하는데, 스데반 집사님과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 이야기는 너무 많이 하는데, 신앙의 선배님들을 닮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위선자를 몽둥이로 쳐 주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주님 사랑에 미치시고, 나환자 사랑에 미치시고, 애양원 교회 사랑에 미치시고 원수 사랑에 미치시고, 순교 사랑에 미치시고, 천국 사모에 미쳐서 사시다가 죽으셨는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환자 사랑에 미치고, 교회 사랑에 미치고 원수 사랑에 미치고 천국 사모에 미쳐서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앞서 가신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시다가 죽으신, ‘미친’ 삶과 ‘미친’ 죽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