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결벽증을 극복하십시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찾아내려고 하고 더욱더 주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 죄에서 떠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은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데 그 중에 “영적 결벽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일체의 죄에 대해서 용납하지 못하는 극단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더욱더 정결해지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인들의 이중적이고 죄를 반복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려고 더욱 노력하게 되고 철저하고 완전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주일 예배에 한 번이라도 빠지면 큰 일이 난 것처럼 여기고, 주일에는 여행도 가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갔다가도 주일에는 반드시 돌아와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괴로워합니다. 완고할 정도로 정도만 생각하고 편법이나 부당한 일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삶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원리 원칙에 벗어난 것은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원리주의가 삶의 전부인 것이지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가까이 하기에 무척 힘이 듭니다.
이런 원칙주의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정죄에 빠지게 합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아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고 하는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 7: 16~18). 우리의 삶은 천칭과 같고 시이소오와 같은 면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기울어진 쪽으로 한 없이 쏠리게 됩니다. 자신의 삶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 균형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더욱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언급한 것은 우리의 삶이 너무 모가 나면 사람들과 적응하는데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고단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픔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극단을 피할 것을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가 있는데 모든 일을 적당히 타협해서 하려는 혼합주의가 그것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양시론적(兩是論) 삶을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혼합주의는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뜨겁든지 차갑든지 분명한 것을 좋아하시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한 쪽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고 다른 쪽을 배격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한 점도 범하지 않으려고 율법의 경계선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적어도 두어 시간 전에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일을 준비하도록 정한 것은 자칫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그 시작 시점을 잊고 안식일을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경계선을 그어 지킴으로써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은 모든 율법에 적용되었고 따라서 율법 보다 이런 규례가 더욱더 복잡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법들을 배우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는 알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 시간도 없었습니다. 극단에 치우치면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목적보다도 수단이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삶 전체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정신을 오로지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만 가득하고 그 생각에 옥죄어 사는 것은 바람직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 뜻을 알고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할 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선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상황적이므로 의식적으로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무조건 따르려고 하는 것은 극단적이며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장벽이 될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절대적 가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따르게 한 것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실수였고 그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으려고 주님이 직접 율법을 깨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의식과 경계심을 풀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있지만 그것에 메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하고 성령의 자유케 하시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의로우며 조금 덜 악한 존재입니다. 극단적으로 의를 추구하고 그런 삶을 살려고 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황폐해지고 모가 납니다.
은혜가 충만할수록 세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결코 그들과 하나같이 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너무 거룩함 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위선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것들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의 뜻을 잊지는 않았는지요. 너무 완벽함만을 추구한 나머지 다소 어설프고 부족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실수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워야만 하는 부족한 존재이며, 늘 실수를 행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속 받은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은 의식하고 그것이 몸에 익숙할 때까지 신경을 쓰고 행동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숙을 위한 숙성시간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 기간이라도 우리는 한 쪽으로 치우치는 절대적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몸에 익혀지면 자연스런 행동이 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고달파지지 않게 됩니다.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과 몸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것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원숙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을 끌어내지만 매이는 것은 거북하게 보기고 다른 사람들 눈에 어색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런 행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보다는 비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깨끗한 것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극단적 결벽은 불편을 주는 것처럼 영적 결벽증에 빠져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허물을 용납하려 하지 못하며 그렇게 살도록 강요하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입니다.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상이 아닙니다. 때로는 한 순간 그렇게 결단함으로써 성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각오를 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일상의 삶은 서서히 몸에 익혀야만 하는 절대적인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서도 안 되고 너무 게을러서도 안 되지요. 너무 의롭지도 말고 너무 악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전도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답니다.
첫댓글 퍼갑니당^^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