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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 개념적 공성과 명상에 대해서
법무아 추천 0 조회 60 24.11.02 11:46 댓글 2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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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11.02 16:34

    첫댓글 개념적 공성은 무엇을 조건으로 있는가... 그 조건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면 되지 않을까요...

  • 24.11.02 17:32

    두가지 글에서의 <명상>은 <숙고>나 <사띠(기억하기)>가 적절한 번역인 듯 합니다

  • 작성자 24.11.02 17:33

    저쪽은 '곰'을 번역한 명상의 정의가 약간 다르긴 합니다

  • 24.11.02 17:35

    개념적 공성을 숙고하는 행위와
    소위 알아차림은
    동시에 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만약 두 가지를 섞는다면..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와리가리 왔다갔다 마음이 바쁘게 움직이는 거라.. 권장할 거슨 아닌듯요..

  • 작성자 24.11.02 17:54

    맞아요 와리가리에 가까워요. 근데 저쪽의 지관수행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시간적으로 와리가리하긴 합니다. 이 위빠사나랑 미얀마 테라와다의 위빠사나는 또 다르지만

  • 24.11.02 17:39

    두좀 린포체 말씀은, 제가 보기에는..
    공성에 대한 숙고가 깊어지면..자연스럽게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그 인식이 작동하니깐..
    굳이 개별 감정과 생각을 대상으로 다룰 필요는 없다..정도인 것 같슴다

  • 작성자 24.11.02 17:41

    동의합니다

  • 24.11.02 17:46

    두좀?뒤좀? 잘 기억은 안나는데..족첸전승의 린포체인 것 같은데여(아닐수도..) 족첸에서는 일차적으로 개념적 공성에 대한 이해를 체화시킨 뒤, 그 다음엔 생각,감정 등 마음의 작용들이 '자해탈(스스로 머물다 스러짐)'된다고 하는 것 같슴다. 행자가 그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숙고하는 등 다루지 않구여

  • 작성자 24.11.03 14:23

    맞을 거에요 닝마파니까. 족첸이 비이원적 알아차림 명상에 해당하는데 저도 원랜 비슷하게 명상하다가, 중관학도 공부하다보니 알아차림할 때 무자성이라는 개념적 공성이 자동으로 떠오르더라구요. 공부하듯이 생각하는 건 아닌데 아예 생각 안하는 건 아닌 그런..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 작성자 24.11.02 17:52

    밑은 퍼온 짧은 글입니다

    John Dunne이라는 불교학자가 불교 명상을 크게 Classical하고 Non-dual로 나눈 적이 있는데 Classical은 경전과 논서에 입각한 명상으로 주류 테라와다의 위빠사나 명상/티베트 불교의 샤마타, 분석명상이 해당되고

    Non-dual은 비이원적인 알아차림을 중시하는 명상으로 중국, 일본, 한국의 선불교/티베트 밀교의 족첸, 마하무드라/태국 숲 속 전통이 해당됨. 근데 티베트 불교나 태국 숲 속 전통은 Classical과 Non-dual을 병행해서 수행하기도 함.

  • 24.11.03 02:25

     모호한 개념이라서 명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위 본글로 돌아가서요. 위의 인용문에 그러한 내용의 글을 적은 까닭은 추측이 되지만, 그거 무리수죠? 아무래도 국어 실력을 길러야 할 거 같습니다.

     첫번째 인용문
    <<
     공성을 명상하되 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을 해독하는 확실한 요법으로 생각하며 명상할 필요는 없다.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 덕분에 버려야 할 것의 참본성을 알아차린다면 그 즉시 생각은 저절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
     두번째 문장의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 덕분에 버려야 할 것'과 '참본성' 각각은, 첫번째 문장의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과 '공성'에 대응합니다. 결국 각각을 상응시키면 인용문은 다음의 말이 됩니다.
    <<
     공성을 명상하되 이를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을 해독하는 확실한 요법으로 생각하며 명상할 필요는 없다.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 덕분에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의 공성을 알아차린다면 그 즉시 생각은 저절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
     명상은 아주 모호한 개념이지만, 문맥상 '공성의 명상'은 '공성을 알아차리는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됩니다.

  • 24.11.03 03:00

    ===

     두번째 인용문
    <<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정견이란 깨어 있는 의식이 전혀 실체가 없는 공성임을 알아차리는 것.
    명상은 그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란 이 알아차림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지혜의 증득을 실천하는 것이다.

    네가 진정 그 알아차림을 내적으로 체험한다면 그것은 네 꿈에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꿈에 문득 나타난다면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는 순간에 나타난다면 죽은 후 삶과 죽음의 중간 상태인 중음 기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너는 수승한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

     위 인용문에서, '명상'은 '정견을 지속적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네요. 정견은 계정혜의 3학 중 혜의 요소죠. 개인적으로, 견해는 경향성과 결합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전통적으로는 지혜의 요소로 이야기됩니다.

     정견은 뭐냐? 인용문은 정견을, '깨어 있는 의식'이 전혀 실체가 없는 공성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깨어 있는 의식 = 공"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죠.
     위와 같은 내용도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요. 혹 번역이 잘못되었을 순 있죠.

  • 24.11.03 02:59

    '정견은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일체가) 전혀 실체가 없는 공성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표현이었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어쨌든 인용된 내용만을 두고 보자면, "깨어 있는 의식 = 공"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정견이예요.

     정견이 알아차리는 것... 알아차리는 것은 행위죠? 그런데 "행위란 이 알아차림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지혜의 증득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따라서 인용문의 '정견이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 때의 알아차리는 것은 지혜의 요소 즉 앎에 가까운 뜻이어야 말이 됩니다. 그렇죠?
     결국 "행위란 이 알아차림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지혜의 증득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행위란 바른 앎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그 바른 앎의 증득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상에서 다음 문단에 나오는 "진정 그 알아차림을 내적으로 체험한다면"은, 앞의 행위 개념에 비춰 "진정 그 바른 앎을 증득한다면"이 될 겁니다. 증득한다면, 그 바른 앎이 꿈에도 나타날 정도라는 겁니다. 그 다음은 뭐 그냥 그냥 읽으면 됩니다.

  • 24.11.03 03:09

    . 
     뭐...위에 적은 내용에 비춰, 두번째 인용문도 대충 뜻을 요약해 봅시다.
    <<
     오직 마음뿐이다.

     정견이란, 깨어 있는 의식조차 공성임을 아는 것..
     명상은 바로 그 앎을 지속적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란 그 앎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그 앎의 증득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네가 진정 그 앎을 내적으로 체험한다면 그것은 네 꿈에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꿈에 문득 나타난다면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 ...
    >>

  • 24.11.03 03:36

    ===

     마지막으로, 개인적 감상을 첨부합니다.

     위 본글의 인용문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어요. 번역한 것을 가져온 것인지, 자신이 번역한 것인지... 여하간 몰라요.
     어쨌든 국어와 기초지식에 비춰 인용문을 이해하자면, 그 아래 법무아님의 한줄 평석과 같은 것이 나올 수가 없구요. 위 본글 제목도 뜬금 없이 인용문 내용과 무관한 것이 제시된 겁니다.

     인용문을 직접 제시한 원저자가 어떤 뜻으로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자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시간에 쫓겼거나 그럴 수가 있으니까요.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어요.
     여하간에 인용문에 비춰 그 아래에 부가한 한줄 평석이 법무아님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무아님은, 인용문의 단어만 보고, 그 단어에서 촉발된 자신의 생각만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스스로 인용한 그 짧은 내용조차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위에 제가 적은 내용을 보면요. 옳고 그름을 떠나, 이해하려는 노력은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글자 나열, 단어 나열은 아는게 아닙니다. 이해가 그런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앎의 출발점에 서는 거예요. 틀리든 바르든, 조잡하든 세련되든 말이죠...

  • 작성자 24.11.03 03:51

    티벳불교와 닝마파 특성 상 공성을 여러 관점에서 다루는데 개념적 공성뿐만 아니라 청명한 빛의 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줄 평석이 쓰인 이유입니다.

  • 24.11.03 03:57

    도대체가 제 지적에 대해 법무아님이 꼬리말로 적은 내용이, 제가 적은 내용을 포함해 위 본글과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저는 티벳불교 닝마파, 이런 거 몰라요. 그쪽에서 그러든 말든, 그건 여기서 제 알 바 아니구요. 그런 것들이 제 지적은 물론 법무아님의 위 본글 내용과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 작성자 24.11.03 04:29

    전 답을 다 드렸습니다. 닝마파인 두좀 린포체의 글에서 공성과 참본성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다시 살펴보세요.

  • 24.11.03 13:13

    ===

    참고로, 위 본글의 두번째 인용문의 뜻을 대충 적어보겠습니다. 번역 문제 떠나 인용된 한글만 두고 적어보자구요.

    <<
     오직 마음뿐이다.

     정견이란, 깨어 있는 의식조차 공성임을 아는 것..
     명상은 바로 그 앎을 지속적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란 그 앎을 간직하면서 공덕과 그 앎의 증득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다.

     네가 진정 그 앎을 내적으로 체험한다면 그것은 네 꿈에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꿈에 문득 나타난다면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 ...
    >>
     이해해 쉽게 적으면 다음입니다.
    <<
     오직 마음 뿐이다.

     "오직 마음뿐인데, 그러한 마음조차 공하다"고 아는 것이 정견이다.
     정견(오직 마음뿐인데, 그 마음조차 공하다는 앎)을 자신의 의지처로 새겨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행위 즉 수행이란, 스스로 의지처로 삼은 정견을 실제 증득하고 그 공덕과 함께 하는 거다.

     진정 정견을 증득했다면, 꿈에서조차 정견과 함께 할 것이다, 꿈에서조차 나타난다면, 죽는 순간에도 그러할 것이다... ...
    >>

     맞는 말이네요.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그렇죠?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구요.

  • 작성자 24.11.03 20:36

    아티샤의 글도 공성이 개념적 공성인지 청명한 빛의 마음인지에 따라 이해가 달라집니다. 전자에 가까워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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