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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댕이 보고리
할머니의 걱정은 요새 년들 즉, 며느리와 동내 새댁들을 늘 걱정하시는 말씀이 여인들이 보고리도 못 만들고 바가지 깨진 것도 소나무 뿌리로 잘 꿰메 고칠 주 모르고, 무명을 자아서 실을 만들거나 베틀에서 베를 짤 주도 모르고, 물건의 고마움을 모르고 함부로 흩어버리고, 자연이 주신 재료로 여러 음식들을 만드는 솜씨도 없고, 철철이 나오는 나물을 무칠 줄 모르고 산의 버섯을 식용인지 구별도 못하면서 어찌 살 것인지 걱정이 없는 것이 늘 걱정이었다. 그리곤 보고라와 채반을 댕댕 이로 그늘에 멍석을 깔고 앉아서 송곳과 창칼만 사용 댕댕이 만으로 생활도구를 잘 만드셨고 모양도 둥글고 솜씨가 좋으셨다.
그런데 . 요새 년들이 잘하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아이를 잘 만들어서 시어머니 등에 꼬맹이들이 대여섯씩은 늘 맡기고 지들은 들에서 소채나 호박 오이 가지 등을 다듬어 주면 그 것이나 리어카에 실어 끌고 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개용이나 쓰고 있으니, 당신은 점점 늙어가면서 체력이 떨어지고 힘이 드시니 걱정을 시작하시면 엇박자 장단이라도 내게 옆에서 맞춰야 흥이 나시는 모양이다.
나의 엇박자 장단은 아이고, 할머니 바가지 깨지면 버리고 장에서 빨간 나일론 바가지 사오면 일 년은 쓰고, 무명은 뭐하려 짜 광목으로 빤스 만들어 입히고, 위에는 난링구 입으면 일 년은 입는데..
야, 이놈아 돈이 있어야 사오지?
그야 벌어오면 되는 것이지 누가 땅 팔아서 사뢨나?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보고리 못 만들면 대소쿠리 들고 다니면 되고, 나일론 다라 들고 댕기면 편해요!
뭐하려 할아버지는 삼태기 만들고, 삼을 꽈서 소 바 만들고 싸리나무로 지게 바소쿠리를 만들어?
당돌하게 초등학교 10살 백이 3학년 학생이 천연스런 대답을 해 싸면 할머니는 점점 수긍을 하시는지 지기는 싫으신지 내 내년부터는 보고리 만들면 성을 간다. 몽니를 부리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칠월이 되니 산의 초목의 분포도가 바뀐다. 묘소에 댕댕이 넝쿨이 무성이 자라난다. 나를 끊어 가란 듯이 그러나 우리는 이 자원을 활용 할 줄을 모른다.
올 봄 귀향하여 내가 제일 먼저 주문한 것이 손수레와 등에 질 알루미늄지게와 싸리 바소쿠리와 나일론 밧줄이었다.
그리고 외양간에 농기구와 지게 예초기 각종 소모품등을 보관하는데 방을 치우다 나온 할머니의 보고리가 낡고 닳아서 구멍은 낳으나 그럭저럭 쓸 만하여 내지게 소쿠리에 올려놓고 이것저것 넣어 두었다.
사당 앞에 심은 우리 감나무가 종손인 당숙이 터를 4차선 대로길이 뚫리자 상가로 팔아 벌여 우리는 감나무가 없어졌다. 물론 사당은 동내 가운데 좋은 터로 복원을 했다. 그 몇 년 후 내 차장 진급기념으로 조부의 묘소에 두 구루를 심은 것인데 이제는 아주 큰 나무가 되었는데 서리도 내리기전 홍시가 되어서 꼭지가 떨어지니 주워 모아 온 것이 반접인데 아마 추석전후에 온전히 있을까 걱정이다.
그 댕댕이 보고리에 감을 담아서 집으로 가져오니 마고가 질색을 한다. 내가 옛 것은 모두 모아 두는 습성이 있어서 가묘에서 신주 독 까지도 가져다 두는 습성 때문에 놀라서 먼저 소리를 친 것이다.
아 이 사람아! 감을 보고리에 풀을 깔고 담아 오니 좋은 것 왜 놀라나?
그리고 그 보고리는 이튿날 다시 외양간 지게위에 올라갔다.
초등시절에 내일이 작은추석이면 반공일이라 우리는 대나무로 감나무를 털었다. 할아버지가 시범을 보이고 형님과 나는 털고 두 동생들은 대소쿠리에 주어 담는 일이다. 할머니는 닷 말들이 통개에 물을 데워서 목욕물 온도가 되면 감을 담고 감이 물에 뜨지 않도록 짚단을 넣어 뚜껑을 얹고 헌 담요로 성정으로 덮어 보온을 하셨다.
이튼 날은 우리는 덟은 감이 단감이 되어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곤 했는데 먹을 과일이 그것과 산에서 턴 밤을 쪄 먹는 일이었다.
오늘 알루미늄 주머니가 달린 3중 롤러 대를 가지고 산에 올라간다. 그 보고리를 들고 이제 약간 노란색만 든 감은 모두 따낸다. 반 보고리 정도 찬다. 최근 둬 접은 족히 따고 아직 반은 남기어 두었다.
다시 보고리를 들고 들어오니 마고가 이제는 알아차리고 반긴다.
꼭지가 털어지려는 홍시는 목도 마르니 감을 따면서 떨어진 놈은 먹었는데도 열 댓 개가 넘는다. 건조기에 넣어 말려야 한다고 도마에 올려서 썰어서 건조시킨다. 오후 내내 이 작업을 한다.
내일 새벽에 역귀성을 하여야 하니
제수로 토란 사과 형수가 주문한 참기름, 아들에 줄 전류 밑반찬을 만드는 라 마고는 이들 간 바빴다.
나는 평택 창고에서 자전을 찾아오려고 창고열쇠를 챙긴다. 댕댕이 보고리를 보면서 깐깐하시고 유별나게 부지런하고 솜씨 좋고 예의범절과 난세를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질긴 생명력을 가지셨던 할머니가 모처럼 생각나 글을 정리한다.
우리 할머니는 진주 정씨로 옥산면 수락리 무중굴이 친정으로 나를 친정에 데려갈 때는 접지 고개와 몽단이 고개의 전절과 돗대산밑에는 천민촌이 있고 망난이가 사는데 큰 칼로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의병과 천도교가 총 탈환을 어깨에 둘둘 감고 몽단이 고갤 넘으면 바로 망덕산 아래 우리 충간공 묘소 밑 집으로 들이닥친단다. 천석꾼이 이병호씨 집이다. 그리고는 멍석을 깔고 소반에 청수를 올리고 소지를 올리면서 빙빙 돌면서 펄쩍펄쩍 뛴단다. "지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망사지" 을 계속해 독경을 하면서 속도가 빨라진단다. 주인은 쌀을 몇 섬 내야 목숨을 부지하고 할머니는 주인아들과 동갑네로 꼬마소녀인데 벌벌 떨면서 그 집 여종이 업어서 같이 숨겨주면 내다보고 구경을 하신 이야기를 리바이벌 하신다. 지금도 내가 외워대는 것을 보면..
할머니는 정말 대쪽 같던 분인데 가끔 의사표시를 곡기를 끊는 단식으로 항거를 여러 번 하시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식구 모두는 할머니의 성정을 이해하고 빨리 풀어지도록 공손하게 빌어야한다. 그리고 적당한 빌 비를 주어 식사를 하시게 하여 화합의 장으로 모셔야 한다. 그런데 한번은 최장 14일의 신기록을 수립한다. 인근의 고모들이 차례대로 찾아서 어머니를 위로하고 곡기를 잡수셔야 사시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감히 어머니께 불경스럽게 했겠느냐? 읍소를 하신다. 열흘이 넘자 임지에서 아버지도 달려오시고 며칠 뒤에는 어머니가 달려와 이는 며느리의 죄가 크므로 어머니가 곡기를 끊고 자진을 하심은 며느리인 저의 죄이므로 저는 친정으로 돌아가 속죄를 하겠다는 결단을 말씀하시고 소생이 고개를 넘어가시는 중에 미음을 들어 모든 것을 풀었던 기억이 있다.
이 수법도 몇 번 통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손자들이 성장하면서 심술퉁이 되어서 나는 할머니가 죽겠다고 하시면 말리는 말이 "빨리 죽어" 그래야 우리도 제사를 지내고 고기 맛 좀 보지 부추긴다.
죽을 때는 신위지지도 다 해놓았으니 새끼를 입에 물고 가급적이면 죽으셔! 우리가 새끼를 끌고 가 취 총을 파서 묻기가 좋지!
안 그려? 한다. 옆에서 듣던 할아버지도 고소한 웃음을 지으신다.
동생은 한수 더 떠서 할머니 이 것 드시면 바로 죽는 약을 사왔는데 물 떠
다들일까? 심통을 부리다. 그 약은 전에 할머니가 늘상 속알이로 복용하시던 뇌신이란 가류약이었다.
그냥 있다가 먹을 테니 거기에 둬라 하신다. 그리고 죽는다는 말 대신 식사는 일정한 량을 일정한 속도로 하시곤 했었다.
사람의 고집이나 권위도 건강해야 서는 법인데 할머니는 7년을 집안에서 대소변을 조부와 선친이 받아내고 고생을 하시였다.
사유는 장판방에 일어나시다 버선이 미끄러워 낙상을 하신다. 그런데 고관절과 대퇴부가 골절인데 성미가 깁스를 용납 못하기고 내가 팔십이 넘은 나이에 이 고생은 못 한다. 붕대를 모두 끌러내시고 7년을 버티시다 승천하셨다. 나이 90에
할머니의 댕댕이 보고리는 내가 마고여사 몰래 잘 보관할 유물목록에 올리고 잘 간수하면서 할머니의 엣 걱정과 정취를 느껴봐야겠다.
2014 09 06
첫댓글 댕댕이 할머니가 가셨으니,
언젠가 마고 여사가 그 자리를 이어 받겠지요.
댕댕이 할머니 보다는 옛 것에 대한 향수가 적을 수는 있어도... ㅎㅎ
53년이 지난 보고리
마고도 며느리 손녀 봤으니, 손자를 보면 손자에 다른 추억거리를 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