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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
(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에 의거한 중화학 담당자인 실무를 맡은 전문가로서 아무나 기록할 수 없는 여수 석유화학 단지의 형성과정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비사를 빼놓지 않고 기록하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1 제2정유공장의 입지는 박정희가
호남으로 정하다
정부(상공부)는 제1정유 건설 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힘입어 석유류의 수요가 폭증하여 유공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1966년 중반 제2 정유공장을 건설키로 하였다.
제2정유의 실수요자는 민영으로 하고 민간이 사업계획서를 제출케 하여 적격자를 선정키로 하였다. 이 당시 제2 정유공장 건설은 민간의 최대의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공장건설과 입지에 조예가 깊은 박정희는 제2정유는 호남으로 가져가야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호남지역에 정유공장을 건설하여 호남지역을 개발하고 떠돌아다니던 호남 푸대접이라는 말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만나는 오직 한 사람의 대구 고보 동기인 서정귀(흥국상사)씨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 서 씨는 이 정보를 러키한테 가지고 갔고 러키는 이정보에 따라 여천을 입지로 하는 사업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하였다.
효성 삼성을 비롯한 3.4개사가 희망을 가지고 사업계획서 상에 공장입지를
모두가 정유공장 적합지인 조수 간만의 차가 1~2 meter 내외인 진해, 마산, 거제등의 영남으로 하였다.
이유는 여수만 하더라도 조수간만의 차가 3 meter 이상이어서 30만 dwt 대형 유조선에 의한 원유의 부두계류 하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상공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정방침에 따라 전남 여천(현재의 여수)을 입지로 신청한 러키를 무조건 제2정유 실수요자로 선정했다. 이로서 동업자가 된 서정귀 씨는 추후에 러키에 주식을 팔고 나갔다. (실무 작업자 구평회 상무 한성갑 부장)
윈유하역 문제는 수심이 깊은 해상에 원유 하역시설 ( IMODCO Buoy )를 설치하여 해결하였다
2. 호남정유 탄생
러키화학은 미국의 Major Oil인 Caltex( 현재까지 존립)와 손을 잡고 합작회사를 (66/11/17) 만들어 제2정유 호남정유를 탄생시켰다.
이리하여 호 님 정유는 67년 2월 기공식을 거행한 이래 2년간의 공사 끝에 69.3월 박정희 대통령 참석리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67년 2월에 기공식을 거행할 때만 해도 양사방이 바다로 들러 싸여 망망대해에 보이는 것이 한 두척의 어선이 보일까 말까 하는 쓸쓸한 시골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이곳에 호남정유의 하루 6만 배럴의 원유 처리의 웅장한 현대식 정유시설을 보게 된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박정희 연설문집 참조)
이리하여 60년대 유공의 3만 5천 배럴은 10년 만인 1970년대 초 한국의 정유시설은 유공이 28만, 호유가 23만, 경인 6만 배럴 총 57만 배럴 생산규모가 되었다
2022 현재는 (1,000 BPSD) SK 1,125 , GS 8000 , S Oil 669,
HD 520, 계 2,800럴의 생산이나
한때 5백만 배럴의 생산규모였다.
이것이 박정희의 중화학 후 60여 년간에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현실로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발전상인 선진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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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중차대한 우리 국민의 위대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분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수계속)
2024.4.13 김광모
(선거단상)
4,10 22회 총선은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패를 인정하고 국정쇄신을 하겠다고 딤화문을 냈다.
윤석열 정권은 선거에서 졌지, 국정운영에서 진 것이 아니다. 전정권에서 물려받은 여소 야대의 정치구도에서 일어난 도이치 주가 조작을 비롯한 두어 개의 사건은 야권의 특검이지 국정이 아니다.
이것으로 승패가 끝난 것은 아니다.
잎으로 국내외적으로 더 험악한 3년의 임기가 기다리고 있다.
전 세계를 향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국가 안보와 경제성장에의 대활약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던 보수세력이 궐기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