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3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아바이마을이 있는 속초
신흥사를 품에 안은 설악산 자락에 속초가 있다. 원래 양양군 도천면의 작은 포구였던 속초의 옛 이름은 속새, 속초(束草), 속진(束津)이라고 하였다. 속초가 속초면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37년이다. 교동 서쪽에 있는 만천동(萬千洞)은 집이 만호(萬戶)가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예언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그 예언이 맞았는지 자그마한 포구 마을인 속초가 1942년에는 읍으로 승격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속초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연유는,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에 밀려 내려오자 남쪽으로 같이 내려온 북한 지역 사람들이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이 든 어르신들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라는 노랫가락을 부르곤 하는데, 그 노랫말 속에 남아 있는 사건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이다. 1952년 12월 4일부터 25일까지 단행되었던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속초항1905년 연안항로가 처음으로 개설되어 연안 선박의 기항지로서 선박 출입이 잦았다. 근해에 수산자원이 풍부해 어항으로 발전했으며 철광석 적출항, 관광 항만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12월 6일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였다. 그러자 함경도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에 적진에 고립되어버렸다. 한때 함흥과 원산 해안 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 철수를 지시하였다. 철수 작전을 총 지휘한 아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과 함흥 그리고 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막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흥남 앞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력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때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만 5000여 명이었고, 차량이 1만 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만 5000여 톤의 막대한 규모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과 병기의 철수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다. 그러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 철수 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 철수도 병행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중공군의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 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이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호기였으나 그때 그들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주력의 대부분이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패했고, 남아 있는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 사격과 공중 공격으로 인한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흥남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난제가 발생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다. 아군의 엄중한 통제에도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 방책이 사실 없었다. 대대로 살았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오고자 하는 피난민들을 남겨둔 채 떠날 수는 없었다.
당시 아몬드는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흥남부두로 밀려들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배편이 허락하는 대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9만 8000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철수 작전이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 폭격 덕분이었다. 그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만 8637발이었다. 12월 24일 오후 2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물자들과 항만시설을 북한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한 것이다.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던 피난민들이 피난살이를 하다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되면서 속초로 많이 몰려왔다. 속초가 함경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들 중 남자들은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일할 수 있는 고깃배를 탈 수밖에 없었고 여자들은 그물째 걷어온 고기를 그물에서 떼어내거나 낚시에 미끼를 다는 일을 하며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다.
사람이 몰려들다 보니 상업이 활발해져서 갈대밭이 우거졌던 언덕배기가 중앙시장으로 탈바꿈했고, 초창기에 장사를 시작했던 피난민들 중 일부가 속초의 상권을 잡고 있기도 하다. 속초는 그런 의미에서 실향민들이 이루어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청호동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을 건네주는 나룻배와 아바이순대가 사람들에게 실향의 아픔을 일깨워주고 있다.
아바이마을청호대교 북단 해안 쪽에 위치한 아바이마을은 실향민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속초항 방파제 연장 공사로 2010년 진입도로가 끊기고 지금은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양양에서 속초로 접어드는 초입에 대포동이 있다. 대포라는 지명은 조선 성종 21년에 강릉 안인포에서 대포영(大浦營)을 옮겨오며 붙은 지명인데, 이때 쌓은 성이 대포성이다. 대포 북쪽에 솟은 말처럼 생긴 산인 마산째(마성대)에 중종 15년(1520)에 쌓은 이 성은 높이가 12척에 둘레가 1469척이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헐리고 흔적만 남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대포항에 횟집들이 단지를 이룬 채 줄지어 있고,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외옹치에 이른다. 외옹치리 동쪽 동해 바닷가 덕산(德山)에 조선시대 봉수가 있었다. 북쪽으로는 간성의 죽도에, 남쪽으로는 수산에 응하여 봉화를 들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봉수대 터만 남아 있다.
아바이마을은 실향민들의 집단 정착촌으로 이름난 곳이다. 본래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지역이었으나 수복 이후 피난민들이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주 당시에는, 해일이 일면 마을이 휩쓸려갔기 때문에 땅을 깊게 파서 창문과 출입구만 지상으로 내놓은 토굴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청호동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을 건네주는 나룻배와 아바이순대가 사람들에게 실향의 아픔을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