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전 교수 프로필
신조 : 나를 스스로 괴롭히거나 다그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생년 : 1965년 5월 9일
고향 : 부산
학력 : 서울대학교, 오하이오 대학원 정치학 박사
경력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라틴어로 이상적 인간을 뜻하는 후마니타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란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대에 후마니타스는 여전히 유효할 뿐아니라 더 중요해졌습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인문 교양 교육을 대폭 강화한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교양 교육 입니다.
2009년 김민전 교수 아들 딸 가족사진
경희대 김민전 교수의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
2006. 3월 17일 취재.
“욕심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게 참살이입니다”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우먼파워’가 거세지고 있는 시대에 엘리트 코스만을 밟고 대학교수로서 방송과 신문, 시민단체를 넘나들며 1인 다역을 맡고 있는 여성, 바로 김민전 경희대 교수이다. 이렇듯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교수도 엄청난 좌절을 딛고 지금은 새 삶을 살면서 ‘행복세상’을 그리고 있다.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아이오와대 대학원에서 ‘미국의회’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 중인 여성. 여기에다 방송 진행자와 시사토론 프로그램 패널로, 신문사 운영위원 및 필자로, 시민단체 등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여성. 그것도 모자라 미모까지 갖춰, 흔한 말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해 많은 여성들의 시샘과 함께 롤 모델로 평가받는 여성이 바로 김민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정치학)이다.
김 교수는 2001년 KBS의 <심야토론>에 패널로 처음 방송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같은 프로그램에 연속 3회 출연한 것이 인연이 돼 시사 다큐멘터리 <추적 60분>과 YTN 시사토크 프로그램 <생방송 쟁점토론> 진행자로, MBC <100분토론> 등 각종 TV토론 단골 패널로 참여해 일반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정치통’의 한 사람으로서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말투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됐던 ‘똑 부러지는’ 여교수에게도 그러나,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 엄청난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잘나가던 여교수, 뇌종양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진단받고 절망
2004년 1월 어느 날, 김 교수는 자신의 시력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병원에 가서 시력검사를 하는데 동그라미가 반 밖에 보이지 않아 결국 MRI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뇌종양. 뇌종양으로 인해 시신경이 눌려 시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더욱 청천벽력이었던 것은 빨리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시력이 완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전신마비와 심할 경우 사망할 수도 있었다는 것.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흔의 나이가 될 때까지 술, 담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그 흔한 귀도 뚫지 않을 정도의 지나친 결벽증을 갖고 있던 그로서는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무척 괴로웠어요. 나쁜 짓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하필 나인가?’라는 자괴감에 빠졌죠.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은 당시 12살 딸과 8살 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스스로 괴롭히거나 다그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는 생활신조를 갖고 살아왔던 김 교수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 교수 스스로도 ‘자학적’인 생활신조였다는 표현을 쓸 만큼 매사 완벽을 추구했고 잘못된 모든 일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감기만 들어도 밖에서 일을 하는 자신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괴롭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김 교수의 성격은 4월에 이르러서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강의와 방송 일을 멈추지 않게 했다.
“집에서는 강의는 하더라도 방송은 중단하라고 난리였어요. 목숨이 위험한 지경인데 당연한 것이었죠. 하지만 일을 중단하면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고 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아이들에게 열심히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친정어머니, 조교 부축 받으며 강의 강행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라는 직업상, 강의 준비를 위해 책을 읽어야 할 때는 한글로 된 책은 아이들이 읽어주었고, 원서는 남편이 읽어주었다는 말과 “더도 덜도 말고 딱 20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말을 할 때, 김 교수의 눈에는 2년여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친정어머니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학교에서는 조교의 부축을 받으며 강의실을 가면서까지 교수로서의 역할을 1학기까지 마친 김 교수는, 그러나 눈을 떠도 세상이 깜깜하게만 보이자 결국 7월 7일 8시간에 걸친 대 수술을 받게 된다.
“한 학기동안 학생들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몰랐어요. 다행히 방학 중이라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어요. 수술 사흘 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눈은 보이는지 말은 되는지, 손발은 움직이고 기억력은 멀쩡한 지를 차례차례 확인하는 것이었어요. 수술 전 이 모든 것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를 의사선생님한테 들었기 때문이었죠.”
오른쪽 눈은 안보였지만 왼쪽 눈은 보이고 손가락 또한 조금씩 움직여지며 강의했던 내용이 생각나서 수술이 성공적이었음을 느꼈다는 김 교수는 2주 후 재활훈련에 들어가고 다시 한 달 동안 친정어머니와 지리산에 들어가 새 삶을 위한 고행에 들어갔다.
“친정어머니는 참 독하신 분이었어요. 새벽이면 어김없이 깨워 4km씩 걷게 했고 소리가 잘 나지 않아 발성연습을 수도 없이 하도록 했으니까요. 그래서 인지 2학기 강의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데다 강의가 대부분 대형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병을 안후부터 2년 동안은 참 힘든 시기였어요.”
사실 김 교수의 삶 자체가 치열함 그 자체였다. 어릴 때부터 하루, 일주일, 월 계획을 촘촘히 세워놓고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시작해 대학 2학년부터 대학원까지는 집과 학교, 독서실밖에 몰랐고, 독서실도 남학생과 부딪히기 싫어 여고생들이 이용하는 독서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원 시절 짬짬이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은 비행기표와 한 학기 등록금에 불과했지만 과감히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장학금을 못타면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지만 그의 성격은 2학기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사회에 나와서 교수와 방송 일을 병행하면서도 바쁜 일정으로 차안에서 숱하게 김밥으로 때울 정도로 철저하게 살았다.
완벽주의, 모범생 콤플렉스 털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행복세상’
이렇듯 철저하고 완벽한 삶을 추구했던 김 교수는 뇌종양 수술이후 ‘모범생 콤플렉스’를 버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어버리기 때문에 요즘은 아이들과 등산을 즐깁니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일만 감사해하면서 즐기면 행복해집니다. 다시 태어난 인생이기에 남들 하는 것은 다 해볼려구요. 조만간 술도 배워 볼 생각입니다.”
얼마 전에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활짝 웃는 김 교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이제는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며 그저 건강하면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뿐이란다. 유일하게 좀 거창한 계획이 있다면 20~30년후 쯤 수필집을 내는 것인데, 도종환 시인의 시에 나오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것을 책제목으로 지어놓았다고.
불혹의 나이를 넘겼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이 즐겁다는 김 교수의 행복한 모습과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말투는 오는 4월부터 새로 신설돼 매주 월요일 자정에 방송되는 EBS의 <지식의 최전선>이란 토론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