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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죽음에서 살아남(1)
엡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10 / [죽음에서 생명으로] 여러분도 전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죄에서 헤어나지 못해 영원한 파멸을 코앞에 두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2)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풍조에 젖어 살았고 마음에는 죄악만이 가득 찼습니다. 공중을 다스리는 세력자인 사단에게 붙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할뿐이었습니다. 이 사단은 지금도 주님을 대항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3) 우리 역시 과거에는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곧 우리가 품고 있는 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욕망, 아니 악한 생각이 이끌어 가는 대로 우리는 악한 일만 저질렀습니다. 날 때부터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악한 데로만 달려 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4) 그러나 더없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 5) 죄 때문에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6)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를 무덤 속에서 일으켜 영광가운데로 인도하였고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게 알리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처럼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8)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 받은 보수가 아니므로 아무도 자신의 선행을 내세워 자랑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생활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가 서로 남을 도우면서 살도록 새로운 일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와 우리를 살리시는 과정, 그리고 결과를 설명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확정합니다.
거듭나기 전의 상태(1-3) 바울은 거듭나기 전의 인간 상태를 보여줍니다. 허물(헬. 파라프토마)은 선을 넘었다는 뜻이며, 죄(헬. 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맞추지 못하였다’는 뜻이며,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사탄에게 조종당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의 별칭이며, ‘공중’은 그의 활동 영역, 곧 천상계, 혹은 영의 세계를 말합니다. ‘육체’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본질’이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죄성을, 그리고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하며, ‘다른 이들과 같이’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함께 살리셨고(4-7)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바울은 ‘그러나’(한글 성경에는 생략)와 ‘인하여’라는 말로 구원의 동기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망 상태였으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살리십니다. 구원의 핵심은 ‘함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며,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습니다. ‘하늘’은 우리의 영적인 위치, 곧 우리의 하늘 시민권을 보여줍니다(빌 3:20).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이유는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은혜에 의하여(8-10) 이 모든 구원의 과정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조차 은혜요 선물입니다. 구원이 조금이라도 인간의 업적이라면 우리가 자랑할 수 있겠지만, 구원에 있어서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만드신 바’(헬. 포이에마)는 예술 작품을 의미합니다. 첫 창조 때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하나님께서 홀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선한 행실이 구원받는데 아무런 역할을 못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실로 믿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관에 누워있는 죽은 자는 편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살아난다면 그는 숨 막혀서 나오려고 할 것입니다. 죄, 육체, 세상이라는 관에서 당신은 편안합니까? 아니면 숨 막힙니까? 당신의 영혼은 살아있습니까?
지나간 과거가 현재로 이어진다면 과거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허물과 죄 가운데서 제멋대로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죄에 속박되어 하나님의 심판 받을 대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죽은 영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 설 교 >
전에는 그리고 이제는
엡 2:1-9 / 문기태 목사
한 독실한 기독교 여신도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긴 비행시간에 지루해진 여자는 성경을 펴 보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비꼬면서 말을 했다.
"그 책에 쓰여진 것 다 믿수?"
"그럼요, 이건 성경이에요."
"그럼 그 고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도 아슈?"
"예, 요나였죠. 알아요."
"고래 뱃속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슈?"
"글쎄요,,,나중에 천국에 가면 물어보죠, 뭐."
"그 친구가 천국에 없으면 어쩔꺼유?"
그러자 여자가 다시 성경을 펴며 대답했다.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인류역사는 둘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과 후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은 절망에 빠진 인류에게 엄청난 소망을 안겨주엇습니다. 멸망당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안겨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예수님을 만나기전과 후는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주고 잇습니다. 예수님없이 살던 때와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고 난 후는 인생의 전환기로 구분되고 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롭게 변화되고 잇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의 전직은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법의 묵인 아래 많은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하였고 또 그 돈으로 고리대금을 놓아 재산을 불리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과 창기는 전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천민 계급에 속하였습니다.
마태와 같은 큰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그렇게 지어주셨나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큰 죄인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일생 동안 자기 이름을 기록할 때 마태라는 이름 앞에 꼭 세리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인 중의 큰 죄인인 세리가 마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그는 세리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을 일생 동안 잊지 않기 위해서 그는 세리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마태와 유사한 예로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포학한 노예 상인이었으며 이름난 탕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 믿고 변화받아 목사가 된 후 40여 년 동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존 뉴턴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고 하지만 나 같은 노예 상인을 용서하셨을까? 정말로 나 같은 탕아를 용서하셨을까? 하고 문득 문득 과거의 죄가 떠오를 때에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벽에 이사야 43장 4절 말씀을 써 붙여 놓고 그 말씀을 되뇌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는 일생 동안 구원받고 용서받은 것을 잊지 않으려고 이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82세로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가면 아마 세번 놀랄 것이다. 처음엔 하나님 나라에 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가면 반드시 만나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세 번째는 노예 상인인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세리가 마태가 된 것과 뉴턴이 새사람이 된 것은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마태보다 더 큰 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적어도 마태와 꼭 같은 죄인입니다. 얼마나 주의 사랑이 넓고 큽니까? 우리는 변화받은 마태처럼 겸손히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2장 1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보니 '여러분도 전에는'이라고 시작됩니다. 3절에도 '우리도 전에는'이라고 반복하여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을 열거해줍니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 형편과 구원 이후의 변화를 비교하여 보는 것은 구원의 감격을 되살리는 좋은 방법입니다.
1. 전에는 우리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1-3)
1)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채 살았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육적인 존재로만 살았습니다. 영적인 축복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상실한채 세상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2)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마귀의 무서운 형상을 닮은 존재였습니다. 거짓과 탐욕과 온갖 죄를 지으며 아무 소망없이 살았습니다.
3) 공중권세잡은자에게 종노릇하였습니다. 우상숭배에 열심이었습니다. 세상의 풍속을 쫓으며 살면서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골라했습니다. 의의 도구로 되지 못하고 죄의 도구로 살았습니다. 공중권세잡은 마귀 사단이 시키는대로 조종당하며 살았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의지로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마귀를 영원히 멸하기 위해 준비한 지옥에서 마귀와 함께 멸망당할 운명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습니다. 저주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불행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저주가 3-4대에 이르며 대물림하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평안과 안식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쉽게 허무함에 빠져 버립니다. 인생을 살 의욕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매사에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며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과 은혜를 거부하며 살았습니다.
2. 이제는 우리 형편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4-6)
구원받으면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1) 구원을 받았습니다. (5)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멸망당할 위기에서 구출받았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 주듯이, 불속에 갇힌 사람을 구출해 주듯이 하나님이 곧 멸망할 위험에 처한 우리들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마귀 사단에게 눌려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를 건져내어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4)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영적 형제 자매가 생겼습니다. 영적 가정인 교회에서 사랑을 받고 주며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큰 사랑을 나타내 주셨고 앞으로도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5)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였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돌같이 딱딱하게 굳었던 우리의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사람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움으로 가득차 모든 이들을 거부하던 사람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헛된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교만으로 가득찼던 사람이 겸손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불신하던 사람이 믿음으로 충만하여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4)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미래의 문제도 다 해결되었습니다.(7 ) 과거의 죄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 안고 살던 무거운 짐이 다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도 다 해결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사라집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믿습니다.
5)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6)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게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영화로운 보좌에 앉혀 주십니다.
어느날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응, 사단이 자주 자주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소리칠 때가 있다네. 그럴때마다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이 나가셔서 문을 열어 주신다네. 마귀가 `이 집에 루터가 살고 있지요?"하고 물어오면 예수님은 `과거에는 루터가 살았지,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사를 가고 내가 살고 있어'라고 대답하신다네. 그러면 마귀는 대경실색해서 도망가 버린다네. 내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이것이라네."
그렇습니다. 에수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 마음에는 예수님이 함께 사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유혹에 약한 부분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항상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만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마귀가 두들기고 유혹해와도 우리 대신 주님이 모든 것을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발이 시험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당신에게 아무리 약한 부분이 있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요. 다만 당신의 약한 부분을 주님이 대신 지켜주시도록 기도에 힘쓰십시요.
그러면 마귀가 아무리 우는 사자와 같이 당신을 향해 덤비고 쓰러뜨리려고 해도 당신을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레오 툴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5년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취해 기분 좋은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목적있는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이다.
3. 어떻게 우리의 형편이 극에서 극으로 바뀔 수 있게 되었습니까? (8-9)
1)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잇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값없이 고귀한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선물을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8)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어떻게? 하며 따지려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은 나를 왜 사랑합니까?" 하고 물어오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응, 당신이 착해서", 또는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예쁘니까" 이런 대답은 옳은 대답이 아닙니다. 가장 정답에 근접한 대답은 "그냥, 좋아서"입니다.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설명이 용이하지 않으니까 그냥 믿어라 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사랑의 증거로 아들을 희생하지 않았느냐?' 그걸 보고 내 사랑이 진실된 증거를 확인하고 그냥 믿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 가구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동생은 집안 일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동생 춘팔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형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날도 춘팔이는 도박판에 가서 어울리다 돈을 모두 잃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형 춘삼이 크게 다칠 뻔한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춘팔은 형에게 애걸을 합니다. 도박빚을 갚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 남은 통장을 달라고 조릅니다. 형은 할 수 없이 도박빚을 갚고는 삼남매가 행복하게 살자며 통장을 내어줍니다.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운좋게 돈을 많이 땃지만 돌아오는 길에 따라붙은 깡패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채 집으로 뛰어들어온 춘팔이 공포에 질려 형에게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경찰이 집을 포위하고 스피커로 자수를 외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형을 각오하며 걸어나가려는 춘팔을 돌려세우고 형 춘삼은 피묻은 옷을 벗겨 자기가 입습니다. 만들다 만 나무 십자가를 꼭 쥐어주며 춘삼을 달려 나갔습니다. 경찰의 정지 명령에도 마구 달려 나갔습니다. 마침내 총성이 들리고 춘삼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경찰은 후에 죽은 것은 살인자 춘팔이 아니고 형 춘삼이였음을 알게 되었으나 형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에 춘팔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춘팔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박을 끊고 형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던 십자가가 점점 형의 아름다운 작품을 닮아갓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삶도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어느날 형의 무덤을 찾은 춘팔은 두 개의 나무 십자가를 무덤에 꽂습니다. 하나는 형이 만들었던 것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춘팔의 십자가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당신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이것은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와같이 의로우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선물이 주어지고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하고 온전히 믿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해방과 치유
엡 2:1-10 / 조용기 목사
오늘 저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해방과 자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들이 교회라고 말하면 여러분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뭡니까? 교회당을 말하지요. 건물, 적은 건물, 큰 건물, 적은 교회, 큰 교회 그렇게 생각 하는데 실제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모임의 장소에 불과하고 예수님의 교회는 믿는 사람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건물은 교회당, 교회가 들어가는 집이고 진실한 교회는 건물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보혈로 값 주고 산 교회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 가운데 와서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 주고 산 자유와 해방이 넘쳐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냥 우리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여기에 보혈의 권세가 임하여 있고 성령께서 임하여 역사하고 있고 십자가에서 값 주고 산 은혜가 역사해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는 굉장한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예수님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하는 예수님의 나라요, 예수님의 권세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우리는 영육간에 자유와 해방을 얻고 기쁨과 행복을 가슴속에 받아들이는 처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의 정권과 권세 아래서 짓밟히고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귀는 안 믿는 사회를 자기 나라로 삼아서 공중에 본부를 두고 온 세계를 다스립니다. 마귀는 정사를 통해서 다스리고 권세를 통해서 마귀의 군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정사라는 것은 정부와 같은 조직을 말하고 권세라는 것은 능력과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딱 잡고 그의 군대를 동원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합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세상 나라는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흑암의 권세는 마귀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귀의 영향력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모르는 사이에 배후에 마귀의 영이 점령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하시고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왜 우리 인류가 마귀의 종이 되었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났으니까 먼저 쫓겨난 마귀가 뒤에 쫓겨 온 아담과 하와를 받아들여서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셔서 죄를 대신 청산해 버리고 용서와 의를 주시면 마귀가 이 세상 인류를 메고 있는 끄나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안 보이는 죄의 끄나풀을 가지고서 마귀가 여러분을 묶어서 끌고 다니는 것인데 그 죄의 끄나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꺾어져 버리고 제켜버리니까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서 해방이 되고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귀의 나라에서부터 해체시켜 버리고 해방과 자유를 선언했으므로 예수 믿고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허물에서 놓여남을 받고 병 낫고 연약에서 해방되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축복을 받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천국백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는 것은 예배드리는 것이 첫째지만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해방과 자유를 얻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동안에 여러분 심신이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얻게 되고 육체적으로 병 고침을 얻게 되고 생활에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환경의 저주에 고통당하는 여러분 그 자리에서 축복을 받는 은혜를 입게 되고 죽음이 다가와도 겁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마음속에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마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마귀와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에게 이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귀의 정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귀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원래 천사장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거느리고 있는 천사 중에는 가브리엘, 미가엘, 루시퍼가 천사장인데 가브리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장으로서 그 밑에 있는 천사 3분의 1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여러분의 뜻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소식 전달꾼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엘은 군대장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 천사들이 그 밑에서 무장하고 마귀와 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시퍼는 성가대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가를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천사 루시퍼인데 그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하나님의 군대장관 미가엘보다 루시퍼를 더 사랑했습니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므로 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이 얼마나 찬양과 예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감사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찬송하므로 주 앞에 나가며 감사하므로 그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시퍼가 거기에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다른 천사장들보다 자기가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존대를 받으니까 야, 내가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지 않느냐. 나도 하나님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가지고서 만유를 다스리지 내가 섬길 필요 있겠느냐.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이사야 14장 12절로 14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이 계명성이라는 것은 루시퍼, 마귀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자기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하고 같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4절에 보면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
마귀는 루시퍼가 마귀가 되어서 용으로 표상되는데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당겨서 땅에 던지더라는 것은 하늘천사 삼분의 일을 반역에 가담시켜서 사람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동원시켰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하나님 제일 높은 보좌가 계신 그곳에서 공중으로 쫓겨났습니다. 자기 혼자만 쫓겨나온 것이 아니라 천하를 꾀는 이 마귀는 자기의 사자들 따르는 천사들을 데리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한때는 우리가 말하는 이 귀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귀신들과 더불어 이제는 사람들 가운데 온갖 흉악한 일을 다 행하고 흑암의 역사를 집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침에 우리가 나가면 계명성이 찬란하게 하늘에 밝지 않습니까? 저 동방에 계명성이 빛을 확 발하는 것처럼 이 루시퍼가 나타나면 하나님 다음으로 영광스럽고 찬란한 광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침의 아들 계명성으로 명칭을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국을 지배했습니다. 열국을 다스렸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하게 되어서 이사야 14장 13절로 14절에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별은 천사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천사를 다스리는 지배자 계층에 제일 높은 곳에 내가 올라가겠다. “내가 북극 집회”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거하시는 가장 높은 처소를 말하는데 그곳에 동일하게 앉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진다.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목적이기 때문에 하와에게도 말하기를 이 실과를 먹는 날에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도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하게 된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 유혹으로 유혹했던 것입니다. 제일 하나님께서 경계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우주를 다스리는데 참여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우주의 주권자는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밖에는 우주를 지배할 정권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도전한 것이 루시퍼, 천사장 중 하나인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먼저 쫓겨났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재창조하실 때 궁창을 지어놓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쫓겨나서 궁창에 자리를 트고 자기 본부를 삼았기 때문에 궁창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쫓겨난 이후로 하늘 보좌에서 쫓겨나서 궁창에서 권력을 잡고 그곳에서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인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마귀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만 진리를 안 사람은 마귀가 모든 부정적인 파괴적인 행동을 공중에서부터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중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서 쫓아내고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사야 14장 17절에 보면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역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마귀인 것입니다. 그가 공중에 권세 잡았다는 것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가 오늘날 이 세상에 여러 가지 흑암의 권세와 싸우는 것은 세상에 통치자들 배후에 있는 마귀와 배후에 있는 권세들과 기도로써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이것들이 배후에 있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눈에 보이는 단체가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 배후에 공산주의의 마귀가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 김정은이나 다스리는 자나 군대나 관리들 그 배후에 마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총과 칼로써 육과 혈로써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써 싸우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을 내려보냈으나 20일 동안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가 기도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기도해서 21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네가 기도하는 첫날에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갖다주라고 했으나 20일 동안 공중에서 권세 잡은 원수 마귀가 막아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째 되는 날 미가엘 천사장을 보내주므로 천사장이 와서 싸워 그들을 헤치고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 응답은 즉각 하늘에 상달되지만 응답을 가지고 내려올 때 막는 자가 있어 여러분 기도가 상달된 것이 응답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2, 3일 막는 사람들도 있고 한주일, 열흘, 한 달, 몇 년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응답을 간구할 때는 확실히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진이 무너지고 응답이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귀는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마귀의 군대가 있습니다. 마귀의 경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직을 통해서 마귀의 군대와 경찰로써 사회를 점령하고 국가를 점령하고 세계를 점령해서 혼란스럽게 하고 고통을 가져오는 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고 말했고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귀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이 세상을 완전히 자기 발아래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세계 속에 살 때는 마귀가 있는 것도 모르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생각 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악한 생각, 세속적인 생각 이런 생각이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그렇지 않고 배후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가 조정하고 있는 것을 훗날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안 백성들이 예수 이름으로 대적을 하니까 마귀는 다 쫓겨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대적하면 이깁니다. 알고 대적하면 이기는데 모르고 있으면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도 자기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서 예수님께 돌아오니까 예수님께서 귀신이 너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보십시오. 알기만 하면 우리가 굉장한 능력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파워,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권세는 힘은 아니지만 힘보다 더 강한 것이 권세인 것입니다. 교통 순경은 자동차보다 힘이 없지만 교통 순경이 자동차 운전사를 보고 세우라고 하면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힘도 없는 교통 순경 밀어 제켜버리고 가면 될 것 아니냐. 그 뒤에 밀어제킨 뒤에는 쇠고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힘은 자체로 능력이 있지만 힘보다 강한 것이 권세인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할아버지가 힘이 없지만 힘이 있는 손주가 할아버지 말에 순종을 하는 것은 할아버지는 힘은 없으나 권세는 있습니다. 할아버지 권세가 있고 손주는 힘이 있습니다만 권세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여러분 깨달아 알았다고 생각하고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 섭섭하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고통이 있을 때 자기가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상당히 고통스럽고 불행할 때 그때 여러분 시간을 내어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원수 귀신아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대적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에 마귀가 여러분을 밀어 제키고 나오는 것입니다. 쫓겨 나오면 마음에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어요. 행복이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마귀는 한때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완전히 손에 잡고 정사와 권세를 잡고 다스렸으나 예수님 십자가 이후 2천년 전부터는 이제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만 잡지 진리를 아는 사람과 대결해서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병마와 대결해서 싸우고 환경에 저주를 가져오는 마귀와 대적하여 싸우고 행복을 빼앗아가는 원수 마귀와 꼭 싸우십시오. 세례요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마귀에게 뺏길 수가 없습니다. 불안, 초조, 절망, 저주 같은 것은 마귀가 가져오는 것인데 대적해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워서 대적하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그 자리에 성령께서 역사해서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육신적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으로 우리를 영혼을 파멸시키고 정신적 고통을 가져오고 병들게 하고 훼방시키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 즉, 혈과 육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있는 마귀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안보이는 마귀의 영향을 받을 때는 악마화 되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지만 마귀가 쫓겨나가면 선량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놀라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부부싸움 할 때라도 옛날에는 주먹을 쥐고서 싸우는 때가 있었는데 무식할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서는 지금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배후에 영향력을 미쳐서 싸우게 하는 것이 마귀 인 것을 알게 되면 기도와 믿음으로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해서 저 마귀를 나가도록 해달라고 간구하면 마귀가 쫓겨나가면 상대방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성을 내었던가. 내가 왜 이렇게 미워했던가. 왜 내가 우울했던가. 이상하다. 마음이 왜 이렇게 싹 달라지는지 모르겠다. 달라지는 것은 나쁜 친구인 원수 마귀가 쫓겨나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지고 축복을 받고 평안히 살려면 항상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렇고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들어와서 훼방을 하는 원수 마귀를 쫓아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전쟁, 갈보리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매달릴 때 엄청난 고통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영적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영적으로 버림받았지요. 정신적으로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버리고 도망쳤지요. 그리고 육신적으로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고 6시간 동안 고난당했지요. 보통 사람으로써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도 예수님이 절대로 못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 끝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죄악은 다 청산되었습니다. 허물도 청산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병도 다 이겼습니다. 저주의 고통도 사라졌습니다. 지옥도 이기고 천국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엄청난 세계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고난당했으므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여러분을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과 사랑과 교통을 하기 위해서 지었는데 죄를 짓고 원수가 되고 쫓겨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 구원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보통 사람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나를 말로 다할 수 없이 사랑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 사랑한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계신 것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셨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지금도 계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서 우리를 사랑하느냐. 여러분에게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서 행복하게 살며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는 여러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어코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은혜로 해방과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대하십시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헌화했던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기념비에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세상에서도 공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6.25 사변에 참전했던 미군들 중 약 54,000명이 죽었습니다. 미국에서 잘 살 수 있었던 그분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까지 와서 54,000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무려 103,0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웃나라 청년들이 와서 이렇게 고난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날 해방과 자유는 공짜가 아닌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용서와 치료와 축복과 영생을 주고 계시는 이 큰 선물은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몸찢고 피흘려서 그 대가로써 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주님의 공짜로 주는 그 사랑의 대가를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병 나아야 돼요. 안 나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잘 살아야 돼요. 저주를 주님께서 청산했는데 얼마나 대가를 지불했는데 대가를 우리가 누려야지요.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부요하게 돼야지요. 여러분 천당 가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지옥가면 안돼요. 예수님이 여러분을 천당 보내려고 그런 고생을 하셨는데 천당을 안가고 지옥을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엄청나게 여러분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대가를 그렇게 지불했기 때문에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람도 몸에 다이아몬드를 지니고 있으면 굉장히 그 다이아몬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비싸기 때문인 것입니다. 납보다도 비싸고 양철보다도 비싸지 않습니까? 값이 나가기 때문에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는 여러분 현재 있는 그대로 인간적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에서 값 주고 산 보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배가 무엇이냐.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보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비교할 수도 없는 큰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친히 희생제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죗값으로 마귀의 종이 되었던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다 해방을 얻었습니다. 진리를 알면 누구든지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복음을 못 들었으면 모르겠지만 듣고도 해방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원수 마귀와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타락하게 하고 이적을 행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며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을 가져와 사람에게 심한 고통을 주며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여 온갖 범죄와 악을 행하게 하는 일을 하는데 이 마귀에서 벗어날 길을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투쟁은 우주적인 전쟁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원수 마귀는 여러분을 두고 우주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의 나라 정사와 권세로 인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도전해 나왔습니다. 내 백성을 내놓아라. 그래서 예수님은 몸 찢고 피 흘려 고난당하므로 죄악의 대가를 다 지불하고 난 다음 내 백성을 내놓아라. 마귀가 안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값을 주고서 주장을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마귀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를 내놓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도로 빼앗아서 이제 여러분에게 주는데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강제로 주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진리를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로 22절에 보면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자기가 구원한 백성들이 만드는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나라의 백성이고 여러분이 모인 곳이 교회고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이 교회에 우리가 나오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권세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권 제도를 보면 대통령이 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5년이 지나면 선거를 통해서 정권 교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요번에는 박대통령이 정권 교체를 가지고서 새로운 대통령이 된 것처럼 이 우주에 하나님을 대하여 도전을 했던 원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십자가에서 자기가 도전하므로 예수님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안 박히도록 온갖 노력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원해서 올라갔습니다. 몸 찢고 피 흘려서 대가를 지불하므로 예수님이 도전해서 이겨서 마귀의 권세를 허물어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예수님의 나라 교회를 세우시고 그 우두머리가 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는데 이제는 우리가 교회 속에 있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죄악을 물리치십시오. 병을 물리치십시오. 귀신을 쫓아내시고 저주를 물리치십시오. 너희 가난은 물러가라! 너희 저주는 물러가라! 너희 궁핍은 물러가라! 물리치십시오. 사망의 세력도 물리치십시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서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의 역사에 반드시 동참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정권 교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제는 이겼습니다. 여러분, 자유와 해방의 열매가 여러분 생애 속에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구주시니까 여러분의 머리가 예수님이시고 여러분의 몸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 몸에 붙어있는 여러분은 자유와 해방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어떤 자유와 해방입니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자유와 해방인 것입니다. 중생의 복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의로움을 얻고 성령충만의 복음을 통하여 성결과 성령충만을 얻고 신유의 복음을 통하여 치료와 건강을 얻고 축복의 복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얻고 재림의 복음을 통하여 부활과 천국을 얻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함을 얻게 되는 것이 여러분의 본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 찢고 피 흘려서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이것을 빼앗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 누리면 예수님이 헛고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생을 무효로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핏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이 여러분 생애 속에서 가치가 있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악과 싸우고 허물과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저주와 가난과 싸우고 죽음과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내 것일세. 승리는 내 것일세. 승리는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 진리만 알고 깊은 각오를 하고 나오면 승리가 여러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나라는 이제 패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승리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제 사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기도로써 그 배후에 있는 원수 귀신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로 15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오늘날 공산주의 같은 것은 완전히 악한 통치와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직접으로 총칼을 들고 싸우면 큰 파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면 그들에게 힘이 없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힘을 주는 마귀가 쫓겨나오므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남북통일은 총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상달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기도가 하나하나 모이면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이면 강이 되고 강이 모이면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대표기도하던 장로님께서 공산주의가 물러가고 우리나라가 통일될 것을 기도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번 기도한다고 무슨 영향력을 있느냐. 천만에요. 티끌모아 뭐지요?(태산) 태산이 되는 것입니다. 한두 명이 조금씩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쌓여져서 나중에는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여러분의 기도가 효과를 발생할 날이 다가올테니까요.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새로운 정사와 권세하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정사와 권세
예수님의 정사, 예수님의 다스리는 정사와 예수님의 군대들을 천사들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동시에 이 교회를 지키는 그리스도의 정치적인 역사와 교회를 지키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지금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파견한 교회를 다스리는 천사들과 교회를 지키는 천사들이 이 자리에 같이 와 계신 것입니다. 교회를 얕잡아 보면 안됩니다. 교회를 짓밟고 욕을 하면 한없이 해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우리 여러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새로운 정사, 정치적인 조직과 권세가 와서 있기 때문에 얼마 참지 않다가 때가 오면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로 18절에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가 여러분 우리를 속이고 도적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이 전신갑주를 여러분에게 다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진리의 허리 띠를 띠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의롭다하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서 마음에 간직하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예수님이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축복을 신으로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여기에 있는 무장은 전부 주님이 만들어서 주신 것이므로 무장을 받아서 여러분 몸에 장치를 하면 더 큰 승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될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의 선물로 주신 것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벗고 병과 허약을 이기고 저주에서 자유를 얻고 죽음과 음부에서 건지심을 받으며 전인구원을 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하늘나라에 백성으로 등록한 것입니다. 오늘날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래 살면 한국 사람으로 시민권을 얻게 되잖아요. 이와 같이 여러분이 교회 오면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10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값없이 선물로써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얼마든지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새로운 정사와 권세를 못 누리고 사는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새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기는 예수님의 정사와 권세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정사와 권세가 바로 죄와 허물을 이기고 질병과 저주를 이기고 죽음과 멸망을 이긴 새로운 세계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주장하고 기도하면 여러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교회,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교회는 예수님의 정사와 권세가 다스리시고 돌보는 곳으로써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교회는 보통나라 아닌 것입니다. 세상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당신의 몸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교회로 나오면 반드시 마귀의 속박과 고통을 당했던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와 마귀의 정사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에게서 구속 곧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흑암의 권세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합법적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큰 영적전쟁을 일으켜서 예수님이 이겼습니다. 이제는 정권교체가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귀가 지배하던 세상이 권세를 잃고 예수님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정권교체에 여러분 마귀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오신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가 값 주고 사신 정사와 권세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 복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축복받은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그렇게 가난에 짓이겨진 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영혼은 잘됩니다. 범사가 잘됩니다. 여러분은 강건합니다. 건강합니다. 행복합니다. 축복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셔서 다 듣게 하면 좋은데 부끄럽거든 안 들리는데서 하세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복 많이 받았다. 나는 형통한다.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 입술의 고백은 그 열매를 누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꿈을 꾸십시오. 긍정적인 생각은 아름다운 꿈을 꾸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말하십시오. 믿으면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말하면 그를 통해서 여러분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영적생활과 자아의 변화
시 103:1-5, 엡 2:1-5 / 이정익 목사
저는 일생 중 크고 작은 당첨이나 무슨 추첨에서 당첨된 일이 없습니다. 참 신기할 만큼 전무합니다. 그래서 복권에 대해서 미련이 없고 자유롭습니다. 아예 내 마음에 개념조차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꿈에 복권이 당첨되었는데 실제로 11조를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복권을 샀는데 그가 운영하는 회사 직원이 당첨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주변에서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사람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인생가운데서 가장 큰 당첨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예수를 알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당첨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가 예수를 알게 되면서 받은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 제일 큰 은혜는 내가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사람이 되고 내가 예수의 생명을 이어받았고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에베소서는 서간문의 꽃이라고 할 만큼 그 안에 신앙 신학 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우리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는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성인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화받기 전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본문은 “옛날의 너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다”고 언급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옛날 예수를 모를 때 우리는 모두 구태의연하였고 자연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그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옛날의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죄로 인한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왜곡된 자아상
죄로 인하여 왜곡된 자아관은 “불행한 자아상”입니다. 이 불행한 자아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신하는 자화상”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살았던 40년처럼 자신을 과신하고 기고만장하고 우쭐대고 큰 소리 치는 자아상입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아상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것이 뭘”하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사람은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면 그대로 됩니다. 말대로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말은 내 입에서 내 뱉는 순간부터 내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뱉은 말 그대로 되기 쉽습니다. “오늘 기분이 어쩐지 이상해”,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러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안의 또 다른 내 자아상이 나를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각, 말, 기분대로 되기 쉽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불행한 자아상이 있습니다. 또 “병약한 자아상”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허약하고 병약하고 무력하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 같은 사람이 뭘 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야, 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라고 우깁니다. 내가 나를 존대해야 남이 나를 존대해 주는데 내가 나를 작게 생각하고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존재로 인정해 버립니다. 그것은 내 안의 자아상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또 “가난의 자아상”때문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나는 가난하다, 나는 하류인생이다”라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패배의식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오늘 삶이 풍성해졌어도 옛날 가난했던 시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움켜쥐고, 욕심부리고, 너무 인색하게 살아갑니다. 먹지도 못하고 간직하고 살다가 그냥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궁상을 떨며 살아갑니다. 많이 가진 재산가인데도 매일 짜장면으로 때우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궁상입니다. 내 안에 있는 가난한 자아상 때문입니다. 옛날 가난한 때를 잊지 못하고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가난해서 먹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었으면 적절하게 사용하고 써야 합니다. 돈은 벌고 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보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쌓아놓고 먹지도, 입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주지도 못하고 간직만 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의 자아상이 내 안에서 나를 꼭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물, 보석, 비싼 다이아는 집에 두면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은행 금고에 넣어 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 가서 열어보고 닫고 돌아옵니다. 별난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보석입니까. 누리지 못하고 향유하지 못하는 것은 보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을 우습게 여깁니다. 돈은 사람을 막 갖고 놉니다. 사람을 비겁하게 이기적이 되게 구두쇠가 되게도 하고 속이게 미치게도 하며 교활하게도 만듭니다. 사람은 돈에 대해서 가치관이 분명해야 놀림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이 10개의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중 한 병에는 독약을 넣었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골라 마시라 먹고 무사하면 1억씩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1억 받기 위해 마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마시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독약 때문에 주저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병 하나를 골랐습니다. 마실까 말까 머뭇거리는데 1억이 생각나서 “죽으면 죽으리라” 그래서 과감하게 마셨습니다. 그런데 안 죽었습니다. 용케도 독약이 들어있지 않은 병을 고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환호하면서 1억을 받아가지고 가서 잘 놀았습니다. 곧 돈이 떨어졌습니다. 다시 왔습니다. 남은 9개 중에 또 한 병을 골랐습니다. 마시기 전에 또 망설였습니다. 재수 좋으면 1억원을 벌고 재수 없으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그래도 1억이 얼마입니까. 또 마셨습니다. 그런데 또 용케도 독약이 없는 병을 골랐습니다. 이 사람은 신나게 돈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 사람은 돈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돈의 중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또 왔습니다. 그때마다 이 사람은 용케도 독약이 없는 병을 골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두병만 남았습니다. 남은 두 병중 한 병에는 독약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은 심사숙고 했습니다 망설였습니다. 망설이다 보니 1억의 돈이 또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병을 선택하여 마셨는데 또 안 죽었습니다. 독약이 들어있는 병을 용케도 잘 골라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환호를 지르며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초부터 독약은 없었다, 그런데 너는 이제 돈에 중독이 되었다. 이제 너는 마침내 독약이 든 병도 마시게 될 것이다“
아주 섬뜩한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세상에 돈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내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돈에 영혼이 병들게 하고 정신이 병들게 하고 마음이 병들게 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아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 돈에 매이고 찌들어 중독되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속이고 배반하고 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기부하라고 나누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그냥 꽁꽁 묶어 놓고 살다가 죽을지라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 자손들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공짜로 생겼는데 아껴쓰고 절약하고 나누고 베풀겠습니까. 그래서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해서 개념이 없으면 죽은 후에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죽은 후에 재앙을 만나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초상도 치루기 전에 난장판이 되는 것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죄로 무너진 왜곡된 자아상입니다.
변화된 자화상
성경은 그렇게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예수를 만나서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렇게 살던 우리들이 예수안에서 변화받은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사건입니다. 이런 병든 자화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예수께 가는 길뿐입니다. 고후 5장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화받은 자아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행복한 자아상”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고 예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사람은 행복한 자화상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새 인생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자아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갈 3장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로 인하여 변화를 받게 되면 갑자기 내형편이 변화되고 내 가난한 삶이 풍부하게 변화되고 갑자기 내 신분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내 형편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하면 내 자아상이 행복한 자아상으로 변화 받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 형편이 천국으로 화평으로 조화로 만족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는 찬송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 속사람과 내 자아상이 변화하고 보니까 내 형편은 옛날 그대로이지만 알고 보면 그대로가 아니고 내 형편이 천국으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자아상으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변화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건강한 자아상”으로 변화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고 채찍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나는 약함을 자랑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 두터운 안경을 착용하였습니다. 간질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그는 병약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도 병약자였습니다. 영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핍박하였던 사람입니다. 영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난후 건강한 자아로 바뀝니다. 육신만 아니고 영이 건강한 자아로 변화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평생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다하였습니다. 쉬지 않고 전도하였습니다. 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할 때 유대인들이 몰려와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까딱하지 않고 전도를 하자 그들은 돌로 쳐 바울로 하여금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체를 동구 밖으로 끌고 가 던지고 그 위에 돌무더기 쌓아놓았습니다. 한참 후 돌무더기 속에서 깨어난 바울은 시내로 들어가 하루 밤을 쉬고 다음날 더베로 떠났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거기서 더베는 20km의 거리입니다. 걸어서 절뚝거리며 갔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을 때 건강한 영혼으로, 건전한 영적 자아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전도하였을 것입니다.
또 “부요의 자화상”입니다. 예수 안에서 부요는 양이 아닌 질의 부요입니다. 이 세상은 매사를 양으로 따집니다. 그래서 의기소침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거의 다 가난합니다. 전도자는 대부분 가난하고 빈천합니다. 이것 때문에 전도자 되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종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가난한 전도자들을 노립니다. 돈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러면 가난한 전도자들은 그것이 이단인지 알면서도 넘어가기도 합니다. 가난과 배고픔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가난한 전도자였습니다. 원래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 유학을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의 제자가 되면서 가난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동시대 인물인 아불로는 그 시대의 웅변가였습니다. 희랍의 거리에서 광장에서 화려하게 웅변을 하면 많은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바울도 그 좋은 기대와 기회와 가능성과 화려해질 수 있는 조건들을 가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다 버렸습니다. 매일같이 초라한 옷차림으로 소아시아 비탈길을 걸어 다니면서 전도를 하였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가난하다, 무명하다, 초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자들이 듣기 가장 싫은 소리가 바로 그 소리입니다. 세상은 화려하게 되는 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출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울도 다 포기하고 다 버리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바울도 초라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초라하다 무명하다 하고 한마디씩 할 때 바울이 한마디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고후 6장8절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징계 받은 자 같으나 죽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로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받은 부요한 자아상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한 자 같이 보이나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근심하는 자 같이 보이나 나는 항상 기뻐하고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초라하고 무명한 자 같이 보이나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자니라.” 이것이 자아의 변화입니다. 이 자아의 변화는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갈 때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변화 받은 자아상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변화를 받으면 가치관이 변화하게 됩니다. 변화를 받으면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먼저 자기를 버리는 삶을 살게 되고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주어지고 다 받아들이는 능력을 입게 됩니다. 여러분 바다는 왜 바다인줄 아십니까. 바다는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으면 다음과 같이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존재를 지극히 사랑하게 되고 볼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을 향하여 날마다 친근하게 말을 건네게 되고 채움을 받으려고 자신을 비우고 옳다함을 얻기 위해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일어나기 위해 쓰러지고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해지고 가장 가난할 때 가장 행복해지고 내가 죽음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가지기 위해 지닌 것을 모두를 버릴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그리고 아는 것 그 이상을 알게 됩니다(토저).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변화 받은 삶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이고 이것이 변화 받은 건강한 자아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안에 들어와 살아가게 되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고 새로 변화 받은 건강한 자아를 지닌 나 자신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성숙한 제자입니다.
자랑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
에베소서 2:1-10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보다 앞서는 1:16-19에서 쓰기를 자기가 기도할 때마다 성도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20-22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지극히 높이신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본문 1절에서 쓰기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 죽는 것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 죽어본 적이 없는데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전에는 누구나 다 죽은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리신 사람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합니다. "허물"이란 실수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즉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곧 죄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죄 가운데 있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다 죽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서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죄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입니다. 죄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사도 바울은 불순종의 아들들이라 부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 할 때 "공중"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는 그의 졸개들과 함께 하늘과 땅 사이의 영역을 지배하면서 그에게 굴복하는 자들을 하늘의 세계로부터, 생명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을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삶에서 떼어놓아 그저 이 세상의 삶만을 살게 만드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지 않으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순종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진노의 자녀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고 또 영원히 죽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를 따르며, 하나님나라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며,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것은 죽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랬고 우리 모두가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본문 4절 이하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리심을 받은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우리 개신교의 구원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하며 또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본문 6절)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 그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보다 길게 연장시켜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인 쳐주셨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거나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정된 것이고 실현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앞선 1:20-22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시고 당신 우편에 앉게 하시고 모든 권세와 능력과 주권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과 만물을 통치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우리를 위협하거나 해하거나 근심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불해야 할 아무런 대가가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우리는 감격하고 감사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나서 그 의미를 부언합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 믿음 또한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로 인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은 아무리 조건 없이 거저 베푸시는 은혜라 해도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기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뭔가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시면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구원,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은 "선한 일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응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선한 일을 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선한 일을 하는 행위를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는 그 가운데서 즉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즉 선한 일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 말 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힘써 선한 일을 많이 행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았음을 기뻐하되 자기가 이룬 일인 양 자랑하지 말고 겸손히 기쁨으로 선한 일을 힘껏 행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이 본문 4-6절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고는 이어서 7절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한 데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 놀라운 자비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보여주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한 없이 풍성한 은혜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던 우리가 선한 일 가운데 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힘과 위력을 온 세상 만인이 보고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눈길이 여전히 차갑고 따갑습니다. 좀처럼 나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내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럴수록 한편으로는 더욱 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며,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따라가며, 더욱 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풍성한 열매 맺기를 힘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겸손하게 쉬지 않고 선한 일에 더욱 더 매진하는 우리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엡 2:1-10 / 김상수 목사
요즘 몇 일 사이에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악마(惡魔)라고까지 표현한 몇 가지 사건들을 보았다. 그것은 육군 28사단에서 발생한 윤일병 사망사건과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이다. 물론 예전에도 군대 안에 구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이 사건들이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는 것은 그 방법이 너무나 엽기적이고, 잔인하고, 인간의 도를 넘은 악마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육군 28사단의 윤일병은 선임병들에게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구타를 당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야말로 고문수준의 가혹행위였다. 폭행을 한 사람은 주로 이모병장인데, 죽는 당일에도 음식을 쩝쩝거리며 먹는다는 이유로 아침부터 쉬지않고 몇 시간을 구타 당했다. 치약 한 통을 강제로 먹이고, 구타하다가 정신을 잃으면 링거주사를 맞게하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매질을 했다. 누운 상태에서 입에 1.5리더 페트병을 물리고 쉬지않고 물을 먹게했다. 물고문이다. 가래침을 땅에 뱃고 개처럼 그것을 핥아먹게까지 했다. 성기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서 고통을 줬다. 또 부대에서 있는 부모님 초청 행사에 윤일병의 부모가 면회를 오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 사건이 터지자 다른 병사들에게 거짓증언을 하도록 지시까지 했다고 한다. 거미줄이 계속 나오듯이 조사하면 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악마의 구타라고 표현했다.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도 윤일병 사건 못지 않게 엽기적이고 악마적이다. 24살 이모씨는 SNS 채팅을 통해서 숨진 여고생 윤모양과 다른 여중생 3명을 유인하여 성매매를 시키고, 가혹한 구타와 폭력을 가했다. 냉면 그릇에 술 두 병을 가득 담고 한꺼번에 마시게 하고, 마시다가 토하면 토한 것을 다시 먹게했다. "너무 맞아 온몸이 화끈거리고 답답하니 물을 뿌려 달라"고 하자 팔과 다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화상을 입혔다. 물도 삼키기 어려워하는 윤양에게 '앉았다 일어서기'를 100회씩 시켰다. 심지어 윤양에게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함께 갈 사람을 지목하라고 하고, 지목당한 여중생들과 번갈아 가며 일대일 싸움을 붙이고 관람하기도 했다. 처음에 범인 이모씨 등은 2주 만에 윤양을 집으로 잠시 돌려보냈었다. 왜냐하면 윤양의 아버지가 경찰에 가출 신고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매매를 강요한 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하루 만에 불러내 모텔로 데려왔다.
그후 윤양은 대구 등으로 끌려다니며 성매매를 하다가 윤양은 4월 10일 대구의 한 모텔에 주차된 승용차 뒷좌석에서 탈수와 쇼크로 인한 급성 심장정지로 숨졌다. 그러자 이들은 하루 뒤 경남 창녕의 한 과수원으로 윤양의 시신을 옮겼다. 신원 파악이 어렵도록 얼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그을렸다. 심지어 시멘트를 반죽해 시신 위에 뿌리고 흙과 돌을 덮어 암매장했다. 그후에 다시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암매장했다. 그야말로 엽기수준을 넘어 악마적인 행동들이다. 죽은 사람의 얼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고, 그 얼굴에 시멘트을 뿌리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제 정신으로는 그렇게 못한다. 신문에서는 윤일병에 이어서 이들은 또 다른 악마라고 적었다.
도대체 왜 이런 잔인한 일들이 계속 되는가? 언론이나 상담가들은 고참들이 신병일 때 받은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서 자신이 당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라고 분석하는 것같다. 물론 이런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못된다.
각종 뉴스 보도를 보면 몇 일전 박근혜대통령은 제4차 문화융성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면서 학교폭력이나 군부대 내 가혹행위 등을 근절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인문 교육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근본적으로 마음속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병영문화를 새롭게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문정신 문화”라고 말했다고 한다(영남일보,2014.8.6). 마음 속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더욱더 엽기적이고 잔인해 지는 진짜 원인은 무엇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 근본원인은 영적인 것에 있다. 에베소서 2장 1-3절을 보라.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이 말씀을 자세히 보라. 왜 이 사회에서 엽기적인 살인 사건들이 계속되고, 그 외에도 인간의 수 많은 고통과 문제들이 계속해서 생기는지 알 수 있다. 그 원인의 첫째는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배후에 역사하는 불순종의 영 곧 마귀 사단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는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었다.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마귀 사단은 이 세상의 풍속(문화)과 거짓된 가치관들을 이용하여 견고한 진을 쌓고, 그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고후10:4-5). 마귀는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발악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 자신을 닮은 엽기적이고 잔인한 죄악들을 저지르도록 사주한다. 그래서 점점더 흉악하고 악랄한 사건들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번 살인사건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이러한 마귀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한 성경은 가르침은 명확하다. 그 결국은 영원한 사망 곧 불못(지옥)에 던지우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5)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은 없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것이나 이 세상의 가르침에는 절대 대안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만 대안이 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에게서는 절대 완전한 대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본래 완전하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노력하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마귀가 주는 거짓 메시지일 뿐이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2장 4-7절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대안’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다함께 4-6절을 함께 읽자.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실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도 함께 죽었고, 함께 부활했고,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지긋지긋한 우리의 죄의 문제, 죽음과 심판의 문제, 율법의 문제, 인생의 모든 근본문제들 그리고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고 멸하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다(요19:30). 그렇기에 주님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고, 에수님의 승천이 내 승천이며, 예수님의 권세가 내 권세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다.
이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것은 없다. 오직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예수님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말씀이 8절과 9절 말씀이다. 다함께 읽자.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이제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고, 온갖 잔악한 일을 뒤에서 사주하는 마귀 사단을 몰아내고, 허물과 죄악을 용서받을 수 있는, 그래서 진짜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참된 방법을 분명히 알았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복음이 개인과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된 애국(愛國)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참된 변화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여야 한다. 영접할 때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영접은 교회만 왔다갔다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초청해야 한다. 그때 주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미 영접한 사람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님이 나를 주관하시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할수만 있으면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는 마귀에게 다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지면 안된다.
서두에 언급한 윤일병 사건의 경우에, 악마의 구타라는 언론의 표현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영적으로 볼 때 잔인하게 구타한 사람들의 배후에는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는 어둠의 영이 있었다. 그러나 윤일병이나 윤일병의 가족은 믿음이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보도를 보면 윤일병 가족들은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윤일병이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의 증언이나 윤일병이 다니던 학교 교우들의 증언들을 미루어 볼 때, 윤일병이 묵묵히 그 고통들을 참았던 것도 신앙심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의 윤양도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에 출석하던 학생였던 것같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은 것같다. 윤양이 중간에 잠깐 집에 들어 왔다가 가해자들에게 다시 불려나갈 때도 윤양은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 중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아쉽다. 이때 교회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지켜 봤다면 어땠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구타와 폭력을 행사하는 영적인 이모병장같은 요소가 내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그런 못된 존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신을 질책하고 패배감과 열등감과 우울감 속에 빠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의 관점으로 나를 보지말고, 나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라. 그러면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예수님 밖으로 나오라고 마귀의 손짓에 속지말라. 오직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라. 주님의 손을 붙들라. 복음만이 나의 문제, 세상 모든 문제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대안이다.
만약 지금의 자신의 영적상태를 돌아볼 때,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이 약화되었거나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갈등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주님 안으로 확실하게 더 들어오라. 이 시간 그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우리 마음의 뿌리로부터 솟구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의 선물
엡 2:1-10 / 이동휘 목사
1. 지난 국회에서 김영란 법이 통과되어 2016년부터 시행되는데 거기서는 직무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액수를 받기만 하면 다 뇌물이 됩니다. 3만 원 이상을 넘으면 뇌물이라고 기계적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물과 뇌물은 3만원을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흔히 선물과 뇌물을 구별하기 힘들다고 해서, 혹자는 “받거나 주고 나서 발 뻗고 자면 선물, 그렇지 않으면 뇌물, 언론에 발표되었을 때 문제가 되면 뇌물, 문제가 안 되면 선물, 그리고 자리를 바꾸면 못 받는 것은 뇌물, 자리를 바꿔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선물,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 선물, 아래에서 위로 흐르면 뇌물” 이라는 등등으로 재미있게 구분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서 잠언17:8에, “(잠 17: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는 말씀을 들어 뇌물 예찬론을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뜻을 현대역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잠 17:8) 뇌물을 쓰는 사람의 눈에는 뇌물이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
(잠 17:8) 어떤 사람은 뇌물을 마법처럼 생각하여 그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뇌물은 받는 자의 마음의 문을 열리게 하며 공정한 판단력을 둔화시켜서, 뇌물을 주는 자에 대해 무작정 호의를 베풀게 하여 일을 그릇되게 하여, 결국 주는 자의 사욕을 정당화시켜 주게 됩니다. 그러나 뇌물을 주거나 받는 것은 분명한 죄악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법관이나 관리가 “뇌물”, 즉 부정한 금품을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출23:8)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법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재판관에게는 특히 엄하게 “뇌물”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삼상8:3)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5:23)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미3:11)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잠17:23) (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욥기서는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욥15:34) (34)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비록 그 대가가 정당하다 할지라도 뇌물은, 무죄한 사람을 암살하게 되는 “청부 살인자”를 생산할 수도 있기 때문에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받을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신27:25)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로우심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19:7) (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2.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 는 것이었습니다.(창3:19) 그래서 본문은 너희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문화와 문명을 지니고 살고 있다 해도, 그리고 최고의 지성과 환경에서 산다 해도, 그리고 최고의 가문과 혈통으로 태어났다 해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은 태어나서부터 너무나 착해서 도덕과 법이 없어도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아왔노라고, 그리고 많은 선행을 베풀며 살고 있노라고 할지라도 그 역시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역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앞에서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20-22)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직접 살인하지 않았을지라도 욕하는 행위도 살인과 마찬가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27-28)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음욕을 마음에 품은 것도 간음죄와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볼 때,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원죄’(原罪) 의식을 철저히 깨달아야, 값없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원죄의식을 철저히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51:3-5)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리고 그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죄악을 이렇게 회개합니다.
(시32:1-5)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뼈가 쇠할 정도로 회개하고, 진액이 빠져나가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마음 깊숙이 회개했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지라도 “너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선포하는 이유는, 철저히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가운데 도사린 본질적인 죄의 모습을 깨닫고 이렇게 탄식하며 토로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인생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를 깨달을 때부터 믿음의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실존을 깨달을 때 일단은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신앙의 첫걸음부터 자기 부정을 요구하셨겠습니까? 인간이 자기의 죄악의 모습을 바로 들여다보고, 그 추함과 악독함을 바로 보고, 자기를 부정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참된 감격과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죄됨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부정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안에 있는 긍정으로 옮겨가야 할 터인데, 도리어 자기 긍정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선물의 의미를 깊이 모르는 은혜 불감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인간의 죄악과 부패를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말을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부패와 죄를 설명할 때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쓴 충고마저도 싫어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누가 조금 건드려도 얼굴을 붉히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인데, 하물며 몸뚱아리는 걸어 다니고 가정생활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영혼은 죽었다는 말은 감당할 수 없는 욕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이것은 사실이고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인정하고 정직하게 죄인됨을 고백하고 살아야 합니다.
(렘17:9-11)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이렇게 인간, 자신의 죄인됨과 그 부패한 마음을 진실되게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본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라고 했습니다. 이어 본문 7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으신 성도 여러분은, 이제 자신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 세대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3. 다음으로, 본문 8,9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대가 없이 받는 것입니다. 선물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믿음이 나의 결단이나 결심, 내게 있는 믿기에 좋은 성품이나 성격 등으로 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2:8)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9)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현대역) 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여러분의 노력이나 공로, 성품이나 행위 등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 여러분의 행위에서 믿음이 난 것이 아니고, 때문에 누구든지 그 믿음을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믿음은 또한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5-17) 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고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주신 목적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3:7-9을 보겠습니다.
(엡3:7-9)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신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부담이 되는 선물도 있고 뇌물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선물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최고의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믿음까지 포함합니다. 그 믿음의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부인하며 진실로 회개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거룩한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에 감사하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엡 2:1-6 / 이종철 목사
인간의 죄성
오늘 말씀에는 신앙인의 Before와 After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포우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입니다. 애프터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이란 누구인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인간관은 부정적입니다. 특히 종교개혁의 인간관은 특히 그러한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표현하는 유명한 말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를 보면서 세상은 천진하고 순수하다고 말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인간관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의 인간관이 부정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말할 때의 의도는 인간의 부정성을 강조하기 위한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관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욥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묵상집 『매일성경』으로 묵상하는 중에 우리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런데 이 말씀처럼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욥이 시련이라는 용광로를 통해서 정금 같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식으로 고난의 유익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욥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변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를 용광로에 한 번 집어넣어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불순하지 않은 정금임을 알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표준새번역판 성경이 잘 번역하였습니다.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23:11-12) 욥의 이런 확신은 신앙인들에게는 좀 낯설어 보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 교만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부정적 인간관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죄에 쉽게 노출이 되고 죄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삶을 말합니다. 율법의 두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벗어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죄입니다. 과거에는 죄가 단순했습니다. 십계명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우상숭배하지 않고, 살인이나 도적질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철저히 개인적인 윤리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죄악이 구조화, 복잡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메커니즘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그는 성실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전쟁 무기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무기로 인해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면 나는 죄가 없는 것입니까? 칭찬받는 우리의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누구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유태인이라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누구를 죽이지 않는 착한 사람이지만 우리나라를 잘 지켜줄 것으로 기대하여 현재 집권당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집권당의 수상은 잠재적인 위험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가자 지구의 양민들을 무차별 폭격으로 학살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죄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투표 행위는 전혀 죄가 없는 것입니까? 억울하게 죽어간 어린 생명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들은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고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백일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이 첨예합니다. 참사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화물 과적, 배의 개조, 급격한 변침 등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왜 배가 그렇게 변침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모든 죄를 유병언 한 사람에게 몰아 씌웠지만 그는 석연찮은 죽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선원들이나 해경은 왜 그렇게 무능력,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는지, 골든타임이라는 그 중요한 시간대에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도대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가족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정치권이 진상규명의 의지가 없어 보이고,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청와대와 자신들의 적폐가 들어날까봐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8.15 민족해방 후 결성되었던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결국 와해시켰던 자유당 정권의 전횡을 연상케 합니다.
문제는 국민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밀어붙이게 된 배경에는 7.30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 이 압승하데 대한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재보궐선거에 어떤 마음으로 투표했을까요? 누구는 인물 때문에, 누가는 자기가 늘상 지지했던 정당이기에, 누구는 무차별적인 선심성 공약 때문에, 누구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투표했을 것입니다. 절반이 넘는 대다수의 사람은 바빠서 또는 관심이 없어서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여당은 이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해석을 했습니다. 이제는 유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망언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또한 천안함 침몰 사고처럼 영구미제 사건으로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은 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곡기를 끊으면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어야 이후의 안전대책도 강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어물쩡 넘어가다 또 다른 희생이나 안전사고가 터진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나는 선한 마음으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투표에 참여 또는 불참을 하였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투표 행위는 죄가 없는 것입니까? 당신의 침묵이나 선택은 스스로를 세월호 참사의 공범임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죄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대 사회가 복잡하고 구조화 될수록 죄 또한 구조화되고 복잡해집니다. 문제는 자신이 직접 저지른 개인적인 죄는 그 심각성을 인정하는데, 이렇게 구조화 되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책임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라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종교개혁의 인간관에 적극 찬동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죄의 통로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것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죄가 어떻게 실체화되는지 그 통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사람이 안전을 도모하고, 먹고 마시는 등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고 교육시키는 것은 좋은 것이고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본적인 필요를 넘어선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먹을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용할 양식 곧 꼭 필요한 부분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구하면 욕심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도 욕심입니다. 바알 우상이란 것이 왜 나왔습니까? 자신의 안전과 풍요를 지키기 위한 수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육체의 욕심의 결정체는 돈이고 돈은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맘몬이라고 칭할 정도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고 과소비하도록 유도합니다. 전자제품을 주기적으로 바꾸어야 하고, 정도 이상의 옷과 명품들을 소유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로 일하고 때로는 거짓도 행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전쟁도 하고 경쟁도 해야 합니다. 자연은 훼손되어 가고, 기후 변화 등 인류는 안전을 위협하는 새로운 도전들에 직면해야 합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의 풍속입니다. 이는 구조악이라도 부를 수 있습니다. 주위 환경이 악해서 자연스럽게 악을 행하도록 만듭니다. 마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자리가 아니라 떠내려가고 맙니다. 요즘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으로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군대라는 집단에는 집단의 악이 있습니다. 누구를 왕따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면 거기서 그들의 폭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적당히 눈치 보아야 군대생활 별 탈 없이 마칠 수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우리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눈치 보며 살라는 매우 비굴한 교훈입니다.
세상의 풍속은 텔레비전이나 모임 등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소위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아파트 평수, 자동차 크기, 사는 곳이 강남인지 어딘지 끊임없이 비교를 당합니다. 여기에 뒤처지면 자신은 못난 사람처럼 느낍니다. 현대사회의 가난이 더 힘든 것은 실제 못 먹고 못 입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들도 옛날의 왕후장상 못지않은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적 인식입니다. 중세사회에서 가난은 신의 뜻이나 소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버리고 자유나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가난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무능력과 직결되었습니다. 청백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모두가 물질에 눈이 멀고,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맘몬 사회를 만든 주범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거론이 됩니다. 막스 베버가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예수 믿고 잘살아 보자 식의 물질 축복 성공 신학이 지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부의 축적이나 낭비와 사치를 목표로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노동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물질, 시간을 낭비하거나 묵혀두는 것은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가 부자가 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대부흥가 요한 웨슬리는 청교도들의 이런 근면 성실성 때문에 신앙인들이 모두 부자가 될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잘 탄다. 나는 하나님의 짐을 하나 덜었다.”고 했던 말은 단순히 유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물질의 짐을 덜었다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제 부의 축적과 과시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현대의 물질적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한 죄입니다.
셋째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는 곧 마귀를 말합니다(6:11-12). 마귀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과장해서도 안 됩니다. 악은 인간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칭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에 불화살을 맞추어 우리를 미혹합니다. 때로는 두렵게 합니다. 베드로가 넘어 갔고 수많은 수도사들이 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초월적인 힘으로만 역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마귀는 공중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우리의 이성과 과학을 가지고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데 신앙인들은 엑소시스트에 등장하는 초월적 세력이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땅 밟기 등의 기도를 하면 물러가는 영적 세력처럼 취급을 합니다. 미개한 사회에서는 그랬지만 마귀는 현대사회에 맞게 변모했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세상 속에서 악의 조장과 인간의 패망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라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책임을 악마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악마는 충동질할 뿐이고 그 선택은 인간이 합니다.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여기에 뱀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뱀을 사탄으로 해석하여 사탄이 유혹했다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이후의 해석일 뿐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사탄이 아니라 교활한 짐승인 뱀이 등장할 뿐입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서 타락의 원인을 다른 누구에게 돌리는 것을 차단합니다. 타락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마귀가 아니라 마귀가 작용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이 모든 것을 통칭해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이 세상의 풍속에 휘둘리고, 마귀의 지배를 받던 삶은 과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에는 ‘함께’라는 단어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스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과거를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육체의 소욕이나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삽니다. 우리 정신과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허무함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려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와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죄와 허물로 우리가 죽었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씀은 현재형이나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이거나 완료형입니다. 앞으로 올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재미있는 표현은 이 죽었다와 살았다는 단어입니다. 누가 죽은 자이고 누가 산 자입니까? 목숨이 붙어서 산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살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길을 가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좀비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사람을 보는 기준입니다. 우리도 이런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부유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권력자 흉내를 내고 있다 할지라고 그 안에 진리가 없다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죽은 자요, 좀비입니다.
더 놀라운 표현은 하늘에 앉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땅 위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 앉아 있다는 말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있고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져서도 서로 마음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늘 우리 생각을 하기에 우리는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확실히 갈 것이기에 완료형으로 이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구원의 현재성을 보여줍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땅에서 하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그 안에 품고 있는 자들은 이미 하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는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장차 상속을 받을 자는 상속을 받기 전부터 그 권세와 지위를 누립니다.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하늘나라를 인정하고 느끼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더 당당하고 부요하고 여유로우며 평화롭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은혜, 풍성한 은혜
엡 2:1-10 / 이윤재 목사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아라”. “은혜받으세요”. “하나님의 은혜”, 오래전에 음악회를 갔는 데 성악가 한분이 나오더니 이렇게 인사합니다. “여러분, 음악회에 오셨으니 마음껏 은혜받으십시오”. 청중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한 곡 끝났는 데 또 나와서 말합니다. “어때요? 은혜 많이 받았나요? 은혜 많이 받았으면 기립박수합시다”. 음악회가 때아닌 부흥회로 변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은혜받는 것입니다. 설교도 은혜받는 것이요 찬양도 은혜받는 것이요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다 은혜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중 하나가 은혜입니다. 신약성경에 무려 150번쯤 나옵니다. 성경뿐 아니라 영어를 말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좋은 말은 은혜와 관련됩니다. 신하들이 왕을 부를 때 “폐하”라고 부르는 데 영어표현은 Your grace입니다. 왕이 은혜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어떤 과목 수강을 면제받을 때 receive a grace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사면령을 발표해서 죄수를 풀어줄 때 사명령을 act of grace라고 합니다. 사면은 은혜입니다. 신용 대출 기관이 고객에게 지불 유예 기간을 줄 때 그것을 grace period 라고 합니다. 봐주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성경에만 나온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문제는 은혜라는 말을 안다고 해서 은혜안에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래넌 매닝이란 사람이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많이 말하지만 사실상 은혜를 부인하고 있다. 말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삶으로는 은혜를 멀리 한다”. 은혜를 아는 것과 은혜안에 사는 것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은혜안에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은혜를 말하지만 가장 핵심있게 은혜를 알게 해주는 성경이 에배소서입니다. 에배소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주제로 합니다. 그런데 1장과 2장의 접근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큰 그림으로 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망원경처럼 봅니다. 그런데 2장으로 오면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집중됩니다. 그래서 엡1장에서는 망원경처럼 보고 2장에서는 현미경처럼 봅니다. 오늘의 말씀 2:1-10절은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엡2:1-10
2:1-3 2: 4-7 2:8-10
은혜가 필요한 상황 은혜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 은혜의 결과
2:1-3은 우리가 은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은혜가 필요할까요? 1절입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러분은 이 선언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 우리가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우리보고 죽었다니 이해가 됩니까? 문제는 이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입니다. 이 죽음은 육신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죽음의 본질은 생명의 근원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줄기에서 잘려 땅에 떨어져 있으면 그 가지가 아무리 파릇 파릇해도 죽은 것입니다. 현상과 존재는 다릅니다. 현상은 파릇 파릇한 나뭇가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나무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코드가 전원에서 뽑히면 아직도 전구가 따끈 따끈해도 전기는 흐르지 않습니다. 전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나와 펄쩍 펄쩍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물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입니다. 2절, 엡2:2,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좇고”. 이 세상 풍조는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세속적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는 공중권세 잡은 자입니다. 2절, 엡2:2, “공중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권세잡은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는 악한 영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영적 세력입니다. 셋째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3절,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욕심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있는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날 수 있는 많은 위협과 위험속에 삽니다. 밖에서 세상이 우리를 타락하게 합니다. 위에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안에서 육체가 우리를 타락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 절대절명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4-5절입니다. 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우리 말에는 없지만 원문에 보면 4절 앞에 “그러나”가 붙습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세상이, 위에서는 마귀가, 안에서는 우리 육체가 우리를 하나님을 떠나게 해도 “그러나”,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풍성하신 사랑으로 예수님이 우리르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베푼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세 가지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이룹니다. 첫째, “그 은혜를 인하여” 둘째, “믿음을 말미암아” 셋째는 “선한 일을 위하여”.
그 은혜로 인하여
먼저 모든 것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할 때 “말미암아”는 헬라어 “가르”입니다. 이 말은 “무엇 무엇으로 인하여”, “무엇 무엇 때문에”. 곧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의 출발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받아주심
세 가지입니다. 먼저 받아주셨습니다. 7절입니다. 엡2:7,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 “자비”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신 첫 번째 은혜는 “자비”입니다. 자비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운전하다 교통순경에게 걸려 딱지를 떼게 되었습니다. 교통이 와서 위 아래를 살펴보더니 “그냥 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학생이 컨닝하다가 선생님에게 걸렸습니다. 시험지를 몰수당해 빵점 맞아야 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씩 웃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운전하다가 악셀을 잘못 밟아 앞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나가보니 밤바에 흠집이 났습니다. 그런데 운전수가 오더니 “눈이 미끄러워서 그랬나 봐요. 그냥 가세요. 괜찮아요” 합니다. 이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자비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가 더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은혜는 또한 내가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비는 부모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화 ”질긴 잡초“(Ironweed)에 보면 잭 니콜슨과 메릴 스트립이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쓰러진 늙은 에스키모 여자를 발견합니다. 두 사람은 이 여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술에 취했나, 아니면 부랑자인가?“ 니콜슨이 묻습니다. ”부랑자예요. 평생 그랬죠.“ ”그 전에는?“ ”알래스카 창녀였고요.“ ”평생 창녀는 아니었겠지. 그 전에는?“ ”아마 그 부모의 어린애였겠죠“. 니콜슨이 말합니다. ”그럼 됐어요. 부랑자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고, 어린애였다면. 우리 데리고 갑시다.“ 그리고 눈밭에 버려진 여자를 안으로 끌고 옵니다. 짧은 장면이지만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은혜란 사람을 부모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부랑자요. 창녀였지만 그도 과거에는 부모의 사랑받는 어린아이였을 것입니다. 부모의 눈으로 보니 불쌍합니다. 부랑자, 창녀는 그 뒤에 생긴 이름입니다. 실패자, 사기꾼, 거짓말쟁이, 나쁜 놈은 그 뒤에 살아가면서 생긴 이름들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부모의 사랑받는 자녀였습니다. 부모의 눈으로 볼 때는 누구나 사랑스럽습니다.
은혜는 자비에서 시작합니다. 자비는 사람을 부모의 눈으로 볼 때 생긴 긍휼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누구도 자식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죄를 가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은혜의 눈으로 보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보신 관점이 이 관점입니다. 남자와 간음하고 현장에서 걸린 여자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도 여인에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어도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니 불쌍했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시는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비”라 합니다. 자비는 다른 말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한 교회 집사가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목사님이 소문을 듣고 그 집사를 만났습니다. “집사님, 정말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네”. “그렇다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날 때 지난번 철야기도때 회개한 죄가 무슨 죄였는지 물어 보시고 저에게도 말해주세요". 얼마후 집사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 ”예수님께 물었습니까? 지난번 고백한 죄가 무엇이었는지?“ 집사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그 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던데요”. 그렇습니다. 은혜는 죄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는 잊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살려주심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뿐 아니라 살려주셨습니다. 5절 보십시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여기에 “살리셨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두 번째 은혜가 살리신 은혜입니다. 제가 몇 년전 작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를 몰고 앞으로 가고 있는 데 갑자기 뒷차가 제 차를 칩니다. 제가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갔는 데 제 차 뒷 부분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보다 가해자가 더 많이 다쳤습니다. 저는 안전벨트를 맷고 그 사람은 안 맷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젊은 학생입니다. 제가 가서 말했습니다. “많이 다쳤어요? 보니까 많이 고장 난 것 같지 않고 나도 바쁘니 그냥 가세요. 없는 것을 할께요”. 그리고 돌아섰는 데 이 학생의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교통사고내서 정신도 없는 데 다쳐서 어쩔줄 몰라 하는 학생을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피가 난 자리를 지혈시키고 뇌 사진을 찍었습니다. 또 자세히 보았더니 가슴도 다쳐 가슴에 타락상을 입었습니다. 뼈사진도 찍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따라 병원에 입원시키고 가족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은혜는 먼저 받아주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낸 가해자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통사고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줘도 그 머리에서 난 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통범칙은 용서로 없어질 수 있지만 피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없어집니다. 피를 흘린 사람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수술하고 수혈시켜줘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먼저 자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다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피를 주셨습니다.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살리셨습니다.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하늘에 앉히심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엡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고”. 여기에 “하늘에 앉히셨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5절, “살리셨고”, 다음, 6절,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살리셨고"와 "앉히셨고"는 동시적 사건입니다. 우리를 “살리신” 그 순간에 우리를 또한 하늘에 “앉힌 것”입니다”. 살리신 것은 죽은 자를 살린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앉히신 것은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에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주거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면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가 달라지고 영적 주거가이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는 죽었다 살아난 우리의 존재가 바뀐 것이고 영적 공간은 땅에서 하늘로 우리가 공간이 바뀐 것입니다. 둘 다 다 완료형입니다. 이미 살아났고 이미 옮겨졌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천사가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 몸은 여전히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하늘에 삽니다. 나는 이미 하늘에 앉혀 졌습니다. 내 몸은 땅에 삽니다. 그러나 내 영은 하늘에 삽니다.
문제는 어디 사느냐가 신분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땅에 살면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 미국의 보호를 받습니다. 몇 년전 두만강가에서 취재하던 미국 기자 두명이 북한에 억류되었습니다. 두 명중 한 명은 중국계, 한 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얼굴은 중국인, 한국인과 똑같습니다. 이들이 석방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핵문제로 미국과 관계가 나빳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비행기로 데려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부색때문이 아니라 어느 사느냐의 문제 때문입니다. 핵문제로 미국과 북한이 극도로 민감할 때였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고 싶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미국 시민은 건져내야 합니다. 그래서 전 대통령이 직접 갔습니다. 미국국민은 미국이 책임집니다. 얼굴이 중국인, 한국인 같아도 국적이 미국인이면 미국이 책임집니다. 미국 국민을 위해서 대통령이 직접 달려갔다면 하늘에 속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할까요? 가만히 두고만 있을까요? “너희들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할까요? 스테반이 순교할 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서 있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스테반을 도우려고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아버지는 하늘에 앉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은 한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우리는 하늘에 사는 하늘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문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이 은혜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8절 보십시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다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겨서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입니다. 이 말을 “무엇 무엇을 통하여” 수단과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가 구원의 원인은 나타낸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구원의 수단을 나타냅니다. 한 마디로 은혜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은혜의 파이프라인입니다. 은혜가 저수지 물이라면 그 물을 우리 논으로 끌어오는 수로가 믿음입니다. 유전에서 기름이 나올 때 송수관을 통해 공장으로 들어옵니다. 그 송수관이 믿음입니다.
“은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가끔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믿음”은 내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믿음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개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는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 편에서도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 일종의 역할분담론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주시고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입장을 “신인협동설”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서로 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본래주장과는 다릅니다. 구원은 두 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합해져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선제적 은총”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previous grace”라고 합니다. “먼저 베푸신 주신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5세기의 성 어거스틴은 “은혜의 주입”이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 하나님의 은혜가 선재적으로 우리에게 주입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고 그 은혜속에 또 믿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주시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시고, 계속적인 은혜입니다. 보통은 2차 은혜, 2차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 믿음
선제적 은총 은혜의 주입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은총을 베푸셔서 우라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우리에게 은혜를 주입해 주셔셔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1차 은혜와 2차 은혜라고 합니다. 1차 은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은혜입니다. 2차 은혜는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은혜입니다.
1차 은혜 2차 은혜
우선 사랑하고 사랑받을만한 자로 만드시는 은혜
죄인을 받아주시고 받아주신 나를 내가 받아들이는 은혜
있는 대로 받아주고 그가 원하시는 모습대로 만들어가시는 은혜
십자가로 구원하고 용서하신 은혜 그 은혜로 십자가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은혜
예수님으로부터 온 희생적인 은혜 예수님을 향한 헌신적인 은혜
은혜 믿음
“그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선한 일을 위하여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하나님이 그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앉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전에 하나님이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선한 일을 위하여”란 말이 나옵니다. “위하여”를 뜻하는 전치사 “에피” 곧 “어떠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곧 목적과 방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이 원인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착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착하고 의롭게 되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올해가 마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슬로건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너무 자주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훗날 루터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이면 된다”는 말로 자주 오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 시대에 생긴 것이 농민전쟁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오해한 농민들이 자기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니 누가 그 자유를 막겠느냐 하며 무질서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루터는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에 대한 남용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것은 맞지만 그 자유는 남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얻었으면 우리는 스스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는 순종으로 가야 하고 은혜는 선행으로 가야 합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가 무조건 받은 은혜는 이제 우리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은혜의 자녀요 또한 선행의 어머니이다”. “선행은 칭의의 조건이 아니요 칭의의 필연적 증거다.”. 은혜에서 믿음이 나온다면 믿음은 또한 선행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은혜로 의롭게 되었으면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루터의 말입니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을 묻기 전에 믿음은 이미 선행을 행할 뿐만 아니라 항상 선행을 하고 있다. 믿음과 선행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다.” 좋은 뿌리에서 좋은 가지가 나오고 좋은 가지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듯이 은혜는 반드시 믿음을 낳고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말이 히12:28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게 됩니다. 은혜에서 믿음이 나오고 믿음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의 진수를 설명한 오늘 바울의 말을 통해 여려분은 세 가지를 확신하십니까?
“그 은혜로 인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살리시고, 지금은 하늘에 앉히신 것을 믿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여러분의 믿음의 피이프를 통해 받아들입니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습니까?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까? 은혜의 아들은 믿음이고 믿음의 아들은 선행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은혜받았으니 그 은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스스로 종이 되어 사람을 섬기고 세상에서 사랑으로 선한 일에 힘써야 함을 아십니까?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풍성한 은혜로
엡 2:1-10 / 김용구 목사
한 심리학자가 아주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정해놓고 매일 집집마다 10만원씩 놓고 가면서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가지고 갔습니다. 사흘 쯤 되니까 돈을 집 앞에 놓고 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해졌습니다.
2주 정도 되니까 현관 앞에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3주 정도 되니까 돈을 갖다 놓은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더니 4주 정도 되었을 때에는 아예 당연한 것처럼 돈을 가져갔습니다.
실험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매우 불쾌해 하면서 “오늘은 왜 돈을 안 주고 가느냐?”라고 오히려 따지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베풀어주는 은혜를 아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서운해 하거나 몹시 불쾌해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아마존 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입니다. 강 하구가 얼마나 큰지 강으로 들어서도 강인지 바다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한번은 바다를 지나가던 배 한척이 마실 물이 떨어졌습니다. 아마존 강에 올라가서 식수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한참 아마존 강을 찾아 헤매다가 작은 배 한척이 지나가니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올라가야 아마존 강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작은 배의 선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당신은 이미 아마존 강 위에 와 있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마시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생수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 크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런 은혜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어떻게? 하면서 계속 따지려고만 합니까? 물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왜 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음, 그것은 당신이 착해서 그래." 또는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예쁘니까!" 이런 대답은 결코 옳은 대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그 질문에 근접한 대답은 "그냥 좋아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설명이 쉽지가 않으니까 그냥 믿으면 된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증표로 독생자까지도 희생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보고 너에 대한 내 사랑의 진실됨을 그냥 믿어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 5:8에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가구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동생은 집 안 일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남동생은 도박에 빠져서 도무지 헤어나오지를 못했습니다.
형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날도 남동생은 도박장에 가서 돈을 다 잃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형이 크게 다칠 뻔한 동생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형에게 도박 빚을 갚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하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마지막 남은 통장까지 달라고 애걸복걸을 합니다. 형은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도박 빚을 갚고 삼남매가 다시 행복하게 살자. 라고 하면서 통장을 줍니다. 그런데 동생이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운 좋게 돈을 많이 따게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따라붙은 깡패들과 싸우다가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집에 뛰어 들어온 동생이 두려움에 떨면서 형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경찰들이 집을 에워싸고 자수하라고 소리칩니다. 체념하고 사형을 각오하고 걸어나가는 동생을 붙잡더니 형이 피묻은 동생의 옷을 벗기어서 자기가 입습니다.
만들다가 만 나무 십자가를 동생의 손에 꼭 쥐어주면서 형이 대신 나갔습니다. 멈추라는 경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마침내 총성이 들리고 형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경찰이 나중에 죽은 사람이 동생이 아닌 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형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동생을 사면해주었습니다. 그 후에 동생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도박을 끊어버리고 형 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이 없던 십자가가 점점 형의 솜씨를 닮아갔습니다. 그의 삶도 함께 변해 갔습니다.
어느 날 형의 무덤을 찾아간 동생은 두 개의 나무 십자가를 무덤에 세워 놓습니다. 하나는 형이 만든 것이고 하나는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똑같았습니다. 동생이 만든 십자가 위에 한 통의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당신이 사신 것이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말씀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에 실제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도 이처럼 의로우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그냥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러분의 삶을 예수님께 믿음으로 더 확실하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고 하는 말입니다. ““은혜 받으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설교를 듣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150번 정도나 나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영어를 말하는 세계에서도 모든 좋은 말이 다 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옛날에 신하들이 왕을 부를 때에 “폐하”라고 불렀는데 영어로 표현해보면 Your grace(당신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은혜입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떤 과목의 수강을 면제 받았을 때에 receive a grace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사면령을 발표해서 죄수를 풀어줄 때에 act of grace라고 합니다. 신용 대출 기관에서 고객에게 지불 유예 기간을 줄 때에 그것을 grace period 라고 말합니다. 뭔가를 면제해주는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경에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은혜라는 말을 안다고 해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래넌 매닝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많이 말하지만 사실상 은혜를 부인하고 있다. 말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삶으로는 은혜를 멀리 한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것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은혜를 말씀하고 있지만 은혜를 가르쳐주고 있는 가장 핵심 되는 말씀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1장과 2장에 보면 은혜에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설명을 합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원경처럼 크게 확대를 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의 사역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1장은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2장은 현미경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오늘 2장 1-10절까지의 말씀은 이런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7절까지는 은혜를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10절까지는 은혜의 결과가 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1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선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본질은 생명의 근원과 단절이 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줄기에서 잘려 땅에 떨어져 있으면 나뭇가지가 아무리 파릇파릇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현상과 존재는 다른 것입니다. 현상은 파릇파릇한 나뭇가지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존재는 줄기로부터 단절된 가지라는 것입니다. 코드가 전원에서 빠지게 되면 전구는 따뜻해도 전기는 흐르지 않습니다. 전원으로부터 단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떠나면 당장은 펄쩍 펄쩍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 풍조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세속적 삶입니다.
두 번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곧 마귀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아주 사악한 영입니다. 우리를 죽음가운데로 몰아가는 어둠의 세력입니다.
세 번째는, 육체의 욕심입니다. 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를 떠나게 만드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살아갑니다. 밖에서 즉 세상이 우리를 타락하게 합니다. 위에서 즉 마귀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또 안에서 즉 육체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4-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 보면 4절 바로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것은 밖에서는 세상이, 위에서는 마귀가, 안에서는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할지라도... 라는 말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본문 8절 이하에 보면 세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8절에 “그 은혜에 의하여”라고 했습니다.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닌다. 그리고 10절에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그 은혜에 의하여’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에 의하여’라고 했습니다. ‘의하여’는 헬라어로 ‘가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인해” “무엇 때문에” 즉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이 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먼저는, 자비하심입니다.
7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자비”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은혜가 바로 “자비하심”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책임을 면해 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교통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떼게 되었습니다. 교통순경이 다가와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냥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학생이 컨닝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걸렸습니다. 시험지를 빼앗기고 빵점처리가 되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냥 씩 웃으시고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마땅히 받아야 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비는 부모의 시선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어떤 자식도 다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런 자비하심에서 시작이 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절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그 잘못을 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시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받아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예수님을 환상으로 본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정말로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네.” “그러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날 때 제가 지난 번에 회개한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고 저에게 말씀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목사님이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 만났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고백한 죄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 죄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던데요.”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살려주심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살려주셨습니다. 5절에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두 번째 은혜가 바로 살려주신 은혜입니다.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서해도 다친 상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법규를 어긴 것은 용서함으로 없어질 수 있지만 다친 상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렸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풍성한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에 앉히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나를 살리시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늘에 앉히셨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5절에 “살리셨고”와 6절에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살리심”과 동시에 “하늘에 앉히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영적인 상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늘에 앉히시는 것은 우리의 존재 즉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땅에 속해 있던 우리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거주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크게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영적인 상태가 달라지고 영적인 거주지가 달라집니다. 둘 다 완료형입니다. 우리는 이미 살게 되었고, 이미 하늘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가 우리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땅에 살면 대한민국의 신분을 가지고 보호를 받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실 때에 예수님이 그 곁에 계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된 이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뜻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에서 “말미암아”는 헬라어로 “디아”라고 하는데 “무엇을 통해서” 즉 수단과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가 구원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이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바로 은혜의 통로입니다. 은혜가 저수지의 물이라면 그 물을 끌어오는 수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와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믿음”은 내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믿음은 내가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역할분담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야 하고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협동설”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서로 협동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일리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원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합해져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 우리의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또 다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서 우리가 믿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선제적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베풀어주신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감리교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5세기 경 성 어거스틴이 이미 “은혜의 주입”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입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들어왔고 그 은혜 안에 믿음을 주셔서 우리로 믿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또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계속되는 은혜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선한 일을 위하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선한 일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위하여”는 “에피”라고 하는 전치사인데 “어떤 목적을 위해” 즉 방향과 목적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일을 위해서” 즉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착하고 의롭게 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 바로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나중에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로 오해를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루터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농민전쟁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잘못 이해한 농민들이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으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무질서한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물론 루터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에 대한 남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남용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으면 오히려 스스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갈 5:1에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자유는 순종으로... 은혜는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은혜의 자녀요 또한 선행의 어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부터 믿음이 나온다면 그 믿음이 선행을 낳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로 의로워졌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뿌리에서 좋은 가지가 나오고 좋은 가지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듯이 은혜는 믿음을 낳고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히 12:28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처럼 은혜에서 믿음이 나오고 믿음에서 선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의 진수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들을 마음에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살리시고, 장차 하늘에 앉게 해주시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하여” 즉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위하여” 이처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풍성한 은혜를 받아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만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도 더욱 더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
엡 2:1~9 / 양은익 목사
1. ‘그러나’의 用法
오늘 말씀 제목은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입니다. 용법은 사용하는 방법이므로 ‘그러나’라는 단어를 신앙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자는 말씀을 오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쓰는가?(用法)에 따라 달라지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 영어로는 But. However’ 다 똑같은 말입니다. 문법용어로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다를 때 쓰는 역접 접속사라고 합니다. ‘다들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지만 나는 믿지 못하겠다’. 부정의 역접입니다. ‘지금 많이 힘들다. 그러나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긍정의 역접입니다. 긍정이던 부정이던 ‘그러나’를 기점으로 앞과 뒤의 내용이 다릅니다.
신앙인들이 ‘그러나’를 쓰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하나는 ‘그러나 하나님, But God’의 방식이 있고, ② ‘그러나 나, But I’라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없음에서 있음에서 나가는 길이고, ‘그러나 나’는 많은 경우, 긍정에서 부정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게 만듭니다.
어떤 방식을 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But God’을 많이 쓰십시오. 우리 신앙인들이 써야 할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입니다. 아쉬운 것은 But God보다 But I가 훨씬 많고, 쎄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면서 힘든 때가 있습니다. 결론이 버킹검일 때, 어떤 설교를 해도 답이 하나일 때입니다. 하나님이 쎄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마지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러나 나’는. 이걸로 끝납니다.
‘내 형편에 처해봐. 하나님도 별 수 없지. 배부른 목사가 내 상황을 알까?, 해도 안되잖아. 운명이고 팔자야’ 하나님보다 나 입니다. 힘들어서 그런 것을 알지만, ‘자신’ 속에 막혀 있는 것을 보면 참 심란해 집니다.
부정적인 But I의 용법이 너무 깊게 교회와 신앙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주저하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있게 하심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나면 희망이 살아나고, 믿음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서 꺽여도 무너지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길이 열리는 데 ‘그러나’의 하나님과 ‘그러나 나’의 경계에서 ‘그러나 나’ 쪽으로, 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계몽주의와 현대성의 후예답게 ‘내’가 중심이 되서 하나님까지도 나의 판단과 생각 속에서 휘두르는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go가 강합니다. Ego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약하고, 깊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인데, 자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최고라는 착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자신의 부족을 메워주는 정도의 존재, 그러면 신의 소임을 다하는 정도의 하나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분위기가 ‘그러나 나’를 버리기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Ego가 강한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만 강해지고, 하나님이 사라지면 그런 자아는 강한게 아니라 취약한 자아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자존심, 자존감만 남아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며 높아진 것을 내려 놓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고후 10:5) 할 때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속 깊은 말, 고백, 믿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그러나’ 용법(엡2:4)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새번역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4,5)
4절에서 ‘그러나’가 중요한데 개역개정에는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원문에는 De ho Theos. ‘그러나, 하나님(But, God)’으로 되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나’를 놓치면 안됩니다. 표를 보시면 알겠지만, ‘그러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전인 1절부터 3절에서는 인간의 상태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절망하고 있습니까?
①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허물과 죄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② 2절.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따르고, 3절,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세상과 사탄과 욕심에 매여 있습니다.
③ 하여,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좋겠지만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4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5절.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살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으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아멘.
②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매임에서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자와 육체의 욕심에 매여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십니다.
5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6절.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 주십니다.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앉히신 것은 누구에게 일어난 일입니까? 주님에게 일어난 일인데 그와 동일한 일을 우리에게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하여 진노의 대상인 우리를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구원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고, 감격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8절.9절 다시 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런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여러분의 희망이 되고, 여러분의 자유함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며 기독교 신앙입니다.
3. 절망에서 나오는 ‘그러나, 하나님’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그럭저럭 합니다. 꾸역꾸역 합니다. 억지로 합니다. 수동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재미 없어 합니다. 재미 없어 하는 이유는 예수 믿어 자신이 이익과 유익과 잘됨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충해도 크게 손해를 보는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충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의 유익과 이익을 자신의 잘됨쪽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거의 고정되 버렸습니다. 비교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날에는 슬펐는데 지금은 기쁘다. 옛날에는 약 먹어도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했더니 나았다. 이제는 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제는 기쁨이 있다. 아파트 하나 샀는데 엄청 올랐다.
뭔가 유익이 되는 게 있어야 안심합니다. 이걸로는 복음을 알 수가 없고,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로 신앙을 비교하고,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이런게 없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련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속았다 그러면서 떠나시겠습니까?
신앙은 기쁨, 잘됨, 유익, 축복에서 출발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러나 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절망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과 세상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절망에서 출발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복과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점검하는 최고의 방법은 축복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나에게 기쁨이 있는가, 기적을 체험했는가? 사랑이 있는가?로 점검하기 이전에 절망을 알고 있는가? 절망하고 있는가? 이것을 먼저 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얼마큼 절망하고, 실망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그러나 내가, 그러나 돈이, 그러나 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직은 아닙니다. 더 절망하셔야 하고, 더 깊게 하나님께 항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깊게 절망해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는데 복음이 들리겠습니까? 절망 속에서 부른 하나님만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가 오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이 나라에 정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깊게 절망해야 됩니다. 편만 들면 안됩니다. 절망해야 새 길이 생기고, 고침이 생깁니다.
깊게 절망할수록 깊은 희망이 나옵니다.
의지와 믿음은 자신에게 절망하여 ‘그러나. 나’를 버리고,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랜 습관으로 남아 있는 ‘그러나 나’, 버릴 때가 됐습니다. 버리십시오. 버리시고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님 처럼, 나도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은혜의 보좌에 앉혀 주셔서 세상이 아니라, 사탄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영광된 자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실망과 절망이 포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그러나, 하나님’을 더 깊고, 깊게, 신중하게 말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신앙의 자리를 확보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가장 큰 선물
엡 2:1-10 / 류영모 목사
1. 인간 진단서
영어로 역사를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His 그분 이라는 말과 Story 이야기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역사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금년은 2008년입니다. 이 말은 A.D.2008. Ano Domini.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8년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 이전의 역사를 우리는 B.C. Before Christ.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전 몇 년 그런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던 바로 그날 아침, 인류 역사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의 역사로.
한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삶과 예수 이후의 삶으로 나뉘어 집니다. 예수 이전의 삶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예수 이후의 삶은 그가 세상사람들의 눈에 볼 때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나를 뭐라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죽었다"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자식들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으면 가장 행복할까?" "우리 아버지는 참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참 사랑하셨던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이웃을 위해서 늘 사시던 분이시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한 어르신이 그러십니다. "나는 내가 죽었을 때 우리 아이들이 내 주변에 둘러 앉아서 앗! 우리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 사형수가 사형을 받는데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죽으면 좋을지 죽는 방법에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총살을 해도 좋고 교수형을 해도 좋고 죽는 방법을 제게 소원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네. 저는 늙어서 죽고 싶습니다."
II. 사망과 그 원인
죽음이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living soul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의 요소인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 living soul입니다. 죽음은 바로 흙의 요소인 이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누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선악과 속에 독약의 성분이 있어서 즉사했습니까? 아니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잃은 것이요, 이것이 곧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자신의 자격을 가지고, 자신이 쌓아왔던 선행을 가지고 그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과 철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긴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황새 한 마리가 깊은 늪에 빠졌습니다. 묘하게도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다리는 점점 더 깊은 수렁이에 빠져들어 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는 긴 부리가 있지. 그래서 부리를 흙에다가 박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다 힘을 주고 다리를 부들부들 힘을 주었더니 아 다리가 쑥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다리는 빠져나왔는데 부리가 더 깊이 푹 빠진 겁니다. 아 부리를 아무리 흔들어도 더 깊이 빠져만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 다리가 있지. 두 다리로 버티고 부리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힘을 줘서 뽑는데 부리가 쑤욱 빠져 나왔어요. 아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또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번엔 다리가 푹 빠졌습니다. 다리를 아무리 뺄려고 해도 더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 부리에다 힘을 주자. 다시 부리를 흙에다 박았습니다. 그리고 몸부림해서 겨우 다리가 빠져나왔습니다. 아 또 날 수가 없네요. 부리가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10년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의 제목이「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바로 이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란 모두 그렇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의롭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했는데 교만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산업을 발전시켜야지 부지런히 공장 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습니다. 공해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지역경제를 살려야지. 개발을 허가합니다. 식수원이 오염되어서져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잘 살아 봐야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합니다. 이제는 집 한 칸 마련했는데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몸부림을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는 게 인간 아니었습니까? 내 자식만큼은 제대로 공부시키고 사회에 우등생을 만들어야지. 애착을 가지고 하나하나 간섭을 해 봅니다. 아뿔사! 벌써 반항아, 방탕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담배 꼴초가 담배를 끊으려고 은단을 하루에 두통씩 먹었더니 은단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번엔 은단을 끊기위해 담배를 하루 두갑씩 피웠더니 다시 담배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모순된 공기관이 KT&G(담배인삼공사)라고 합니다.
그 기관을 놀리는 표어가 뭔지 아십니까? "담배로 버린 몸 인삼으로 보신하자."
이런 인간을 향한 본문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그때에"(2절)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인간의 상황을 세 가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시신의 이미지"요.
2절에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노예의 이미지"요.
3절에서는 진노의 자녀가 된 "죄수 이미지"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너는 죽었다"고 하는 사망진단서의 사망원인을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허물이 무엇입니까? 원문에 허물이라고 하는 말은 밟지 말아야 될 땅을 밟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 허물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과녁이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화살로 명중시켜야 할 과녁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박혀야 될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했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말을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랑해야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해야될 때에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어야 되는데 친절을 베풀지 못했고, 헌신해야 될 시간에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입으로 눈으로 지은 죄가 더 많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았고 너는 반쯤 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었다. 모두다 죽었다. 모두 죄인이다.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더란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이야기조차 싫어합니다. 철저히 회개를 거부합니다. 교회에서 죄 문제 얘기하면 즉각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죄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에서 질병의 문제를 말하지 말 것이며, 질병을 치료하지 말라고, 그냥 격려해서 보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더 나쁜 죄에 대한 태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는 둔감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함부로 비판합니다. 회개를 말하는데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의 조금 나은 점을 들어서 다른 사람의 나만 못한 점을 부각시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작은 모래알 하나도 물에 빠집니다. 큰 바위도 물에 빠져들어 갑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크고 작은 죄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큰 죄도 지옥갈 죄요, 작은 죄도 지옥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중에 가장 악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던 지난 날의 우리 모든 삶이 가장 악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도 말이 안통하고 어머니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 안통해. 그러고는 후딱 집을 나가더니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출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 세월이 흘러갑니다. 10년 세월동안 자기 나름대로 출세 해보겠다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도 넣고, 철가방을 들고 배달도 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 아 그럴듯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 꽤나 벌어서 10년 후에 부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착한 아이입니까? 아니요. 그 사이에 부모 속은 다 썩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이미 병상에 누운지 오랜세월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10년동안 그 어떤 것 보다도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더라도 어쩌면 회복하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존경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던 바로 그 삶이 가장 악한 죄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 살았던 그 삶이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한 것입니다.
개도 주인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신의 주인을 모른데서야, 내 인생의 주인 하나님을 떠나서 산데서야 말이 될 것 같습니까?
이미 죽은 자가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 둘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죽은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을 가리킵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풍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문은 '아이온'인데 그 의미는 상당히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생명, 시대, 수명, 영원, 기간, 등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풍속이란 말을 여기의 단어로 바꾸어 보면
'이 세상의 수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영원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생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시대를 좇는 자'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란 누구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죽은 자라고 성경은 가리킵니다. 세상은 인간이 거처를 삼은 곳을 뜻합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풀이하면 사람이 자신이 거하는 거쳐, 보여지는 세계가 영원한 줄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노예 이미지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해석하는 문제입니다.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좇는다는 것과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공중은 '순수하지 못한 영들이 거처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서 권세를 잡은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사단입니다.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보면 세 번째 이미지 죄수 이미지가 나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쉽게 해석하면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자' '육정에 끌려 사는 자'란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의 본능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입니다. 식욕은 우리 몸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고 성욕은 인간의 삶에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는 것, 자녀를 낳는 것이 죽은 자로서의 삶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다스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조금만 먹고 운동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맹수에게 네가 천하에 사자인데 힘없고 병든 짐승은 잡지말고 힘있는 짐승만 잡아먹고 살아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얻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원히 아버지 품에서 살아가게 될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무수히 하나님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혔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습니까?
III. 가장 큰 선물 - 예수
오늘 본문 4절 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살리셨도다" 8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에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장 큰 선물입니까?
1.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또 가장 귀한 것이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 예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인류역사,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준비하시는 내용입니다.
3.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받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집도 좋은 옷도 예쁜 애인도 아닙니다. 그에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입니다.
이 지구가 생긴 이래 제일 축복받는 날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인류의 자유가 탄생한 날이요, 구원의 오랜 꿈이 실현된 날입니다. 이 날 죄 중에 고민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신음하던 자연이 '용서의 소리'를 들은 날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중 6일은 일을 하고 오늘은 쉽니다. 왜요?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일 주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류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에 버려지셨습니다.
어디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분은 나를 죽일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 주시기까지 주님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IV. 손을 내밀어 이 선물을 받으십시요.
어떻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선물이란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됩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내 것이 되는 게 선물입니다.
옛날 한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놀랍게도 살기 좋은 낙원과 궁궐 같은 집들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그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그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낙원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거지 소년이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는데 그 땅굴마져 홍수에 없어지고 만 것이지요. 거지 소년은 내 손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 옷은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땅굴밖에 없는데 -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소년은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거지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겠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선한행위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내 모습이 거지 소년과 같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이제 손을 내밀어 그 선물 - 예수 그리스도 -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이제 믿고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차흘러 넘쳐도 여러분이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은 이 길! 한 길 밖에 없습니다.
- 진리는 하나! 예수 밖에 없습니다.
- 생명은 하나!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종교가 가는 길은 다 같다"라고 말하면 참 고상해 보이지요. 인격자처럼 보입니다. 도량 있고 아량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암에 걸린 사람에게 소화제 한 알만 먹으면 나을 것입니다. 좋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입니다. 진리는 하나, 구원도 하나, 영생의 길도 하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길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독선적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편협해 보여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하고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요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VI. 예수님을 얻으면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인생이 수학문제처럼 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생의 신비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절간에 들어갔습니다. 중이 되고 보니 불교계가 썩어도 너무 썩었더랍니다. 그는 순수하고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워보겠다고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꾼들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갑니다. 자기를 지키는 간수에게 목탁과 불경을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더니 간수가 성경책을 주더랍니다. 좋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감옥에 있는 동안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경에 그런 얘기가 있답니다. 어떤 과부가 외아들을 사랑으로 키우다 그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을 안고 부처님을 만나 살려달라 애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아래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아 그 집의 물 한 사발을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곧 살아나게 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미는 좋아서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는데 어디 그런 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망으로 돌아온 어미에게 부처가 얘기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감옥의 스님이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어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그렇게도 찾고 찾든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데 성경에도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죽은 아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가는 불교도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극락의 불나비」「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게 되었다」라는 책을 쓴 김성화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요, 예수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예수! 그분은 바로 당신의 그리스도, 당신의 왕,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는 당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에스컬레이터 인생
엡 2:1-10 / 윤태성 목사
지난 9일 국내 프로야구에 대기록이 세워졌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 선수가 341호 홈런을 터트리며 통산 홈런왕이 됩니다. 이 기록이 대단한 것은 이 선수는 17년간 시즌 가운데 단 한 번도 홈런왕에 오른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 홈런왕은 장종훈 선수 같은 팀의 이승엽 선수에게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제 양준혁 선수가 홈런을 때릴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세워 나가는 것이고, 은퇴 할 때에 그의 기록도 마무리가 될 것 입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접하며 우리가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과거의 하나님을 알기전의 우리의 모습은 부끄럽고 죄악 된 모습입니다. 주목받지 못 하는 삶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BC와 이후 AD의 삶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워지고,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처럼 주님의 등에 엎혀 사는 삶입니다. 계속해서 올라가고 올라가는 삶이 된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구원 받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였으며, 달라져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겠습니다.
1. 구원을 받기전의 인간의 모습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공평한 것은 잠과 죽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주어진 시간을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럼에도 짧은 인생가운데 ‘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이 있느냐’ 많은 것이 비교되어지고, 평가가 되어집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실존의 질문은 딱 한 가지 무엇입니까? “그가 주님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로 하나님의 평가로 인생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허물은 원어적인 의미로,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죄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삶을 말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과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창조주이신 주님과의 단절은 전적인 무능과 혹은 전적인 부패의 상태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겠습니다.
① 2절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았습니다” (영토) 여기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땅의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옳은 대로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ex)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드릴 수 있는가하면, 외국에 있을 때 보면 중동에서 온 친구들을 봅니다. 대부분 중동의 나라들은 이슬람의 원리들을 엄격하게 지키기에 술이라든지 여자라든지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묘해서 밖에 나가면 안 해보던 것 다 해보고 싶어 합니다. 술도 마시고 도색 잡지도 보고 영토 밖을 벗어나서는 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영토 밖에 살던 사람입니다.
②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감 (주권)
ex) 2004년 개봉한 영화가운데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라는 영화가 있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동유럽의 크로코지아 나라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미국 뉴욕으로 옵니다. 그의 아버지의 소원은 유명한 재즈 연주가들의 싸인을 받아 수집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명연주가의 싸인을 다 받았는데 딱 한사람의 싸인이 필요해서 뉴욕공항으로 옵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까 입국이 거절이 되면서 공항에 묶이게 됩니다. 동유럽의 이름 없는 그 나라에서 분쟁이 일어나 그 나라와 외교 관계가 두절이 됩니다. 결국 오도가도 못 하는 톰행크스는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고 스튜어디스와 사랑에 빠지는등 좌충우돌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려냅니다. 결국 그 뒤로 그는 다시 나라의 분쟁이 가라 앉게 됨에 따라 공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로써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나라의 주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의 의미는 주권이 어디에 있느냐. 이 주권을 이야기할 때 공간적인 개념이 나옵니다. 이 공간의 개념을 이야기하면 유대인들은 3층천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후 12:2) 첫째는 사람이 사는 땅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층은 마귀가 사는(마귀가 지배하는 공중) 세 번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위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이 기도하였을 때 천사 미가엘로부터 하늘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미가엘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이 땅에 올 때 21일이 지연이 되는데 하늘에서 바사군과 미가엘의 전쟁이 있게 됩니다. 바로 이 마귀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악한 영의 계획을 따르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악한 영의 주권에 사로잡혀사는 모습입니다.
③ 3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거절하고 사단의 악한 지배아래서 종노릇하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기에 마귀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악한 군주의 나라의 백성의 삶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북한 치하에 있는 굶주림의 북한 동포들과 폴포트 치하에 있는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완전한 타락에 빠져있는 죄인들은 마귀의 나라의 국민으로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철저한 패망과 지옥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2.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마귀의 지배아래 살던 사람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누구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까? 따라서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셔서 그들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가 참 놀랍고 감사한일입니다.
ex) 제가 아는 여자 집사님의 딸이 삼성에 입사를 합니다. 지방대학을 나와서 삼성에 입사했다는 것도 대단한데 사연을 들어보니까 재미있습니다. 이전에 대전 엑스포 도우미를 삼성에서 600명 뽑는데 6천명이 응시를 합니다. 그래서 대전 엑스포 도우미로 삼성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나니까 이제 삼성에서 수고했다고 그 도우미로 수고한 사람가운데 5명만 특채로 삼성직원으로 뽑는다고 했는데 그 5명안에 뽑힙니다. 6천명에서 6백명으로 뽑히고 다시 5명안에 들고 참 특별한 기회다. 그런데 그 권사님은 이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밀접한 부분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사경회를 드리고 있지만 목사님께서 자기 신분을 이야기할 때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를 강조하시는데 용식이 대근이 다른 친구들은 다 술을 먹고 죽었는데 자신은 목사가 되어서 구원받고 부르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감사 속에는 그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이 있습니다.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죄악을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남자에게는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는 노동의 형벌을 주시고 여자들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겪게 하십니다. 많은 벌 가운데 왜 노동과 해산의 수고가 있었을까 생각해보시면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분이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이 핍박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해산의 수고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바로 생명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영적인 새 생명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ex)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를 바라보시며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으시길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기업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업은 분깃 몫 소유, 땅 이런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신비의 관계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마음과 생활과 육체를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하다가 녹초가 되어 들어오시는 남편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을 하면 됩니까? “아이고 저 OO 매일 늦게 들어오고 내가 못살아”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노동이라는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고 저렇게 피곤하구나 아끼시기를 바랍니다. 아내에게는 늘어가는 뱃살을 보며 “잘 한다 매일 집에서 잠이 나자”고 이렇게 생각마시고 예수님 닮은 해산의 수고가 있던 것이고, 자녀를 키우느라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뱃살이 저렇게 나오는 구나 이렇게 아껴주시기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수 있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가 넘쳐 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떤 조건을 보고 뽑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하신 일을 믿느냐 그것을 인격적으로 감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느냐 믿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셔서 보여 주신 사랑에 응답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고백해야하는 것은 “나는 아무 공로 없습니다” 공로가 없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10절에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선한일이 무엇입니까 나만 구원 얻고 나만 복을 누리는 것을 선한일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죄악에서 나를 위한 삶을 살았는데 주님의 은혜를 알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직도 주님을 일지 못하는 내 형제 내 친척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선한일이라고 합니다.
나오는 말)
이런 구원을 생각을 하면 마트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나, 무릎이 시원치 않은 사람 모두에게 에스컬레이터는 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 오르는데 어떤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무거운 몸을 그위에 얻게 되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편하게 옮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이 에스컬레이터는 뒤로 가는 후진이 없습니다. 그 위에 올라탄 순간부터 상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편리한 기능을 보며 주님을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그분의 구원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런데 주변에는 이런 에스컬레이터를 모르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기에 나에게 짊어진 인생의 무게가 왜 이리도 무거운가 탄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ex)지난 월요일에 제가 살던 동네에 있는 한분의 부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큰아들의 이름을 따서 정춘이 엄마라고 불렀기에 저는 어릴 때부터 정춘이 아줌마로 부르던 분입니다. 제가 어릴때 살았던 동네는 가난한 동네였는데 가난한 동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편견이 있는데 ‘동네가 드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가난하였기에 아끼고 마음이 남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분은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동네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나신 분이고 아들만 4형제를 키우신 분입니다. 특별히 이분이 불쌍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다른 지역에서 작은 부인을 데리고 삽니다. 이혼하고 싶었지만 인연의 끈이 길어서, 아버지와 남편의 관계는 유지 하는데 생활 대책은 세워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막노동을 하시며, 개인적인 즐거움은 이웃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정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이 짠하는 것은 그런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동네 분들과 술을 마시고 자신의 운명을 기억했는지, 동네 분들에게 모두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그렇게 어렵게 했던 작은 부인에게도 전화를 남기고 집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60대 중반의 치열했던 삶을 그렇게 마감 한 것에 동네 분들이 같이 슬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호소했을 것인데 사람들은 그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술김에 하시려했을까? 그분이 돌아가시며 도대체 인생이 무엇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참 억울하다’이런 생각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분은 운명이 기구하여서 슬프다고 하지만 부자가 되어서 헬스클럽에서 건강을 관리하고 좋은 식당에서 웰빙의 음식을 먹고, 좋은 주택에서 산다고 하여도 주님 없는 삶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잠시간의 세상적인 찬사나 얼마간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주님 앞에 복된 인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가치인생, 복된 인생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을 아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안다면 그분의 역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에컬레이터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탈수 있고 편리한 기능을 가진 구원의 기쁨을 알게 하고, 함께 권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계속되어지는 말씀 사경회가 있습니다. 시간 시간 은혜의 말씀이 임합니다. 함께 들어야할 분들이 계십니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소개하며 권면해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고 에스컬레이터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권면하시고 우리의 증거가 복음의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