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 산창 5
시월 넷째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정한 퇴근 시각보다 앞당겨 교정을 나와 고현으로 가 창원으로 복귀했다. 아내와 초등교장으로 재직하는 대학 동기 내외와 함께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달포 전 약속된 자리다. 울산 친구의 경주 산내 지음산방으로 가 세 가족이 하룻밤 같이 보내기로 한 날이다. 동기가 운전한 차에 동승해 밀양을 거쳐 가지산터널을 지나 석남사 근처로 갔다.
대현에서 산내로 내려가 지음산방으로 드니 어둠이 내려와 캄캄했다. 울산에서 먼저 도착한 주인장은 창원 친구를 위해 거실을 덥히고 저녁차림을 준비했다. 산방 주인장은 요리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잘 해 내었다. 손님을 위해 여러 가지 시장을 봐왔다. 해조류 한 종류인 마재기로 콩나물국을 끓여 놓았다. 치열한 야간 전투를 치를 숙취에 대비해 속을 든든히 하려는 의도였다.
매번 방학이면 대학동기 여덟 명 부부가 모이는 그룹에서 세 가족에 해당했다. 지난 여름방학 때 지음산방에서 얼굴을 보고 올겨울에 창원 근교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 그 중간에 일부가 한 번 더 만나는 셈이다. 산방 거실 탁자에 앉아 그간 밀린 안부를 나누었다. 서각에 취미를 붙인 울산 친구는 그새 새로 새긴 작품이 몇 점 더 늘어 있었다. 이제 전문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창원 동기 아내는 도토리로 빚은 묵과 떡을 마련해 와 입맛을 돋워주었다. 울산 친구는 횟집에서 떠온 전어와 광어회를 펼쳐 꺼내 본격적인 맑은 술 대전에 들었다. 울산 친구는 손이 커서 준비된 여러 안주가 차례로 나왔다. 정육점에서 눈여겨 봐둔 특품 육회가 배를 썰어 올려졌다. 세 가족은 산방에서 도토리묵에다 생선회에서 육회까지 맛보고 있으니 산해진미를 먹는 셈이었다.
요리에 관심 많고 경험이 많은 울산 친구였다. 문어숙회는 좀 특이하게 만들었다. 냄비에 물을 붓지 않고 양파를 썰어 바닥에 깔고는 살아 꿈틀거리는 문어 먹통을 빼고 넣어 뚜껑을 닫아 렌지의 불을 켜 익혔다. 향과 식감이 좋은 문어숙회가 안주로 올랐다. 이제 퇴근 직전 통영에서 택배로 왔다는 가리비 차례였다. 아이스박스 포장을 여니 씨알이 굵은 홍가리비가 가득이었다.
맑은 술을 잔에 채워 권하고 비우는 사이 밤은 이슥해졌다. 깊은 산중이라 기온이 내려가도 보일러가 가동 중이라 추운 줄 몰랐다. 부녀들은 안방으로 들어 먼저 잠에 들었다. 남은 동기 셋은 세상 사는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창원에서 함께 간 동기가 이부자리를 펴둔 거실에서 곯아 떨어졌다. 나는 울산 친구와 날짜변경선을 훌쩍 넘긴 시각까지 잔을 채우고 비우다 자리에 누웠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방의 날은 천천히 밝아왔다. 새벽에 밖으로 나가도 할 일이 없어 날이 다 밝아오길 기다렸다. 창원 동기 내외가 먼저 일어나 뒤뜰에서 참나물을 몇 줌 뜯어왔다. 연전 내가 심어둔 참나물로 봄날엔 보드라웠다. 가을에 새로 돋아 데치면 나물이 될 듯했다. 농장에는 무와 배추가 자라고 고춧대는 어직 서리가 내리질 않아 파릇했다. 당귀 농사는 작황이 시원찮았다.
울산 친구는 지난주까지 따다 남은 구지뽕나무 열매를 따고 난 창원 동기와 엄나무가지를 잘랐다. 밭둑에 자라는 엄나무는 아주 굵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 가시를 조심해 가며 잘랐다. 수세가 좋아 잘라야 할 가지가 많았다. 아침 식후 창고 앞으로 옮겨 전기 톱날로 약재로 쓰기 좋게 잘게 잘랐다. 끝물 풋고추와 표고버섯을 땄다. 울산 친구는 매실로 담은 술과 효소까지 챙겨주었다.
산방 둘레 나무들이 우거져 가지를 잘아야 할 것이 많았는데 일부만 손 보고 다음으로 미루었다.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산방 문을 닫고 산골을 나왔다. 당고개를 넘어 건천 들머리서 염소탕으로 점심을 들면서 짧았던 1박 2일을 돌아보며 겨울방학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어쩌면 산방에 눈이 내리기 전 한 번 더 들려 일손을 거들지 모른다. 고속도로를 올라 통도사와 김해를 거쳤다. 19.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