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왕들에게 조(祖) 종(宗)을 쓰는 이유
공(功) 있는 왕에게 조(祖)를 쓰고
덕(德) 있는 왕에게 종(宗)을 쓴다.
묘호(廟號)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이다.
왕이 죽은 후에 남은 자들이 만들기 때문에. 정작 왕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하는 이름이다.
태조(太祖)나 세종(世宗) 등 묘호는 보통 조와 종으로 끝난다.
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왕의 이름은 모두 이 묘호이다.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가 봉안되지 못했기 때문에 묘호가 없이 00군(君)으로 부른다.
흔히 이 조.종은 왕의 업적에 대한 우열을 나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묘호의 조.종의 시법은 주나라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느 것이 높고 낮고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덕(悳)이나 공(功)이냐를 따져 붙이는 칭호라고 말한다.
공이 있는 왕에게는 조를 쓰고 덕이 있는 왕에게는 종을 쓴다.
이를 종묘의궤(宗廟儀軌. 조선조 때 종묘에 관한 제도와 의절을 기록한 책) 묘호조는 '조공종덕(祖功宗德)' 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왕이 승하 후에 받는 이름, 종묘의 묘호 라는 글을 통해 조. 종을 구분했는데. 특히 조선 국왕의 묘호 결정은 대개 의정부,
육조참판, 집현전, 춘추관의 2품 이상 대신들이 결정한다.
조선 제5대 왕인 문종(文宗)까지는 조공종덕의 원리에 따라 창업왕인 태조에게만 조를 쓰고 나머지 군왕은 종을 써서 묘호를 지었다.
하지만 제7대왕 세조(世祖)는 창업군주가 아닌데도 조를 썼다. 종법의 원칙이 무너진 대표적이 예다.
신하들이 신종, 예종, 성종 등을 올렸을 때 아들인 예종(睿宗)이 셋 모두 거부한 후 대행대왕께서 나라를 새로 세운 공덕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 의중을 말하였다고 전한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왕실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치고 이징옥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등 종사(宗社)의 중흥을 도모했다는
명분이 사워진다. 반면, 세조처럼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는데도 묘호를 조라 하지 않은 왕도 있다.
바로 제 11대 왕 중종(中宗)이다.
인종(仁宗) 역시 예종처럼 부왕의 묘호에 조를 붙이기를 원했지만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마음을 접는다.
당시 윤인경과 이기. 신광한 등 신료들은 도를 잃은 폐주 연산군은 대를 이을 수가 없으므로 대행대왕께서는 성종을 개승하여
즉위한 것이니 조를 칭하는 게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종을 붙였다가 훗날 조로 개칭된 사례도 있다.
선조(宣祖.14대)와 영조(英祖.21대), 정조(正祖.22대), 순조(純祖. 23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해 나라를 다시 세운 재조(再造)의 공을 인정받긴 했다. 하지만 대를 이어 수성한 경우 조라 칭한 예가 없다는 이유로 칭조(稱祖)를 주장했던 광해군이 즉위 8년(1616년)만에 선조로 개칭, 아버지를 높인다.
영조. 정조. 순조는 수십 년이 훨씬 지난 후대에 개칭된 경우다. 조선 후기에는 왕들이 묘호를 바꾸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순조는 철종 9년(1858년), 영조는 고종 26년(1889년), 정조는 고종 36년(1899년)에 각각 조를 받는다.
순조 칭조 상조문을 올린 이학수는 당면한 시기에 따라 칭호를 달리해야 한다. 묘호라도 영원히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묘호가 당사자의 치적이나 성격과는 정반대의 뜻을 담기도 했다.
인조(仁祖)는 묘호의 앞에 붙는 시자인 인의 뜻과는 달리 성격이 악랄하고 고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묘호는 처음 열조(咽祖)
였으나, 헌종(憲宗)을 거쳐 마지막에 인조가 됐다.
유일하게 논의 과정에서 여러번 바뀐 경우인데, 역시 아들인 효종(孝宗. 17대)의 입김이 가장 컸다.
그는 인조라는 묘호의 부당함에 대해 상소를 올린 심대부와 유계를 귀양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