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뉴스투데이]그들의 광주,우리의 광주 - 장이기(앵커) 광주 학살의 만행을 알리려다 고문을 당한 이들이 광주 밖에서도 많았습니다. 고문의 충격은 죽음에 이를만큼 혹독했고, 살아도 산 게 아니었습니다. 김철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1986년 3월 5일,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예비군 훈련소에서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전두환...www.youtube.com
“어디 가지마세요. 두렵습니다.”
故 장이기 열사가 고문을 받고
병원에 이송된 뒤 임종 직전
가족들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장 열사는 1979년
청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형의 의류상을 도와주며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 열사는 사회전반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당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
비판하는 글과
나름의 민주화 방안 또는
개헌에 관한 글을 써서
각종 신문이나 정당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장 열사는
1986년 3월5일,
안양 박달교장 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정권을
극찬하는 정신교육에 대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교육에 참여하던
예비군들을 향해
“정권탈취야욕에 불타
광주시민 수천 명을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외쳤고 많은
참가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함께 했다.
장 열사는 즉시 군에 체포되어
군 수사기관으로 끌려가
가혹한 폭행 속에 조사를
받았다.
며칠을 군부대에서 조사받던
그는 민간인 신분임을 이유로
다시 남부경찰서로 이첩,
유치장에 수감됐다.
당시 가족들은 장 열사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던
상황.
장씨의 형수 양경화씨는
“예비군 훈련이 있었던
당일 오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시아버님이
‘애미야 정보부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이기가 헌병대에
끌려갔다고 한다’고
말했다”며
“이후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몰랐고 면회도 할 수 없었다”
고 말했다.
가족들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늦은 저녁,
경찰서 옆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양씨는 “병원에 도착해보니
삼촌(장이기 열사)이
너무 많이 맞아 머리가
피에 엉켜 떡이 돼있었다.
엉망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며
“당시 삼촌은
‘재우지도 않고 하루
종일 맞았다’며
고통을 호소했다”고
당시상황을 전했다.
결국 장 열사는 가족들이
도착한 뒤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씨는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문제에 관해
얘기하는데 안기부가
예비군 훈련장부터
시작된 관련 내용에
대해 일체 함구할 것과
삼촌이 급사한 것으로
하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장 열사의 시신은 한밤 중
화장된 채 한강에 뿌려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한동안
가족들은 집과 가게에
도청장치가 설치되고
감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장이기 열사의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결국 2001년 5월29일,
민주화유공자 관련자
인정을 받아 지난
2014년 5월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 이장됐다.
장이기 열사가 졸업한
청주대학교 민주동문회
송재봉 회장은
“못난 후배들이 이제야
선배님을 찾아뵙게 됐다”며
“선배님께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것을
잊지 않고 후배들도
그 길에 함께 하겠다.
앞으로 추모위원회를
구성해 선배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알려나갈 예정”
이라고 말했다.
첫댓글 이제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시절이었는지 잊지 않겠습니다.
죄송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찾아보시고...시간되실때마다
혼자 또는 가족분들과
다크투어도 많이 해보셨으면
좋을듯 합니다.
정말 우리가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네요. 그 엄혹한 시절에 분연히 일어날 용기를 가지신 분이셨네요.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장이기 열사 사망사건이후 일어난것이
국방위 회식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5공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