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삼년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삼십삼년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더듬어 보렵니다.초식동물 중의 대표겪인 소는 되새김 질을 하지요.한자로는 반추라고 말합니다.그럼 지금부터 어린시절...눈물나게 그리운 기억의 한자락을 반추해 보렵니다.
때는 1974년 경
정치적으로는 군부 독재가 영구 집권의 욕망을 가슴에 감추고, 경제적으로는 고도 성장으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본격적으로 벌어져 버린 그때 나는 초등학교6학년 이었다.아버지께서 하시는 사업이 제 괘도에 진입을 하지 못한 관계로 늘 집안은 어수선 했지만 금전적인 어려움은 크게 느끼며 살지는 않았기에 보통의 어린아이 보다 오히여 생각의 폭이 좁을수 밖엔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께서 거의 신앙과도 같이 나에게 책을 사주시는 바람에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지만 농촌의 정서는 책에서만 읽었을뿐 그 직접적인 체험을 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6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 계시는 큰고모댁에서 지내게 되었다.보통때 같으면 집에서 오랜동안 나가서 있는것을 허락하실 아버지도 아니셨지만 당시는 사업이 이미 그 기울기가 시작된 관계로 여러가지 분위기가 나를 한달 정도 큰고모댁에서 지낼수 있는 여건을 자연스레 만들어 주었다.
큰고모댁을 어떻게 찾아갔는지 지금 기억은 확실치 않다.어렴풋이 고모댁의 제일 큰형님의 손에 이끌러 간것 같은데 아리삼삼하다. 어쨋든 큰고모가 계시는 동네의 초입에는 동화에서 읽었듯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그루 있었다.아마 여름이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평상에 앉아 부지런히 노래하는 매미를 쳐다보며 손부채로 가슴에 흐르는 땀을 식히는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넉넉한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를 지나 동네 입구로 들어서서 조금만 올라가면 아주 평범한 시골마을의 모습이 펼쳐지면서 바로 옆으로 커다란 버섯이 생각나는 다정한 초가집이 나타난다.푸짐한 모양새로 사람의 마음을 이완 시켜주는 완전한 건강식 주거형태인 황토를 바른 벽과 지붕에 얹혀진 볏단의 아름다움. 큰고모댁 이다.지금은 웰빙 열풍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벌어지지만 그때 당시만해도 황토벽과 초가지붕은 넉넉치 못한 시골의 평범한 농가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과 같았다.
큰고모부님,큰고모님,,그리고 사촌형제들...사촌형제들이 일곱남매였으니 큰고모님의 허리가 일찍 휘실 만도 하다.그 당시에 이미 허리가 굽어지기 시작하셨으니 그 시절의 어머니들이 모두 그렇게 어렵게 사셨겠지만 유독 착하신 큰고모님을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간에 나의 무심함이 싫기만 하다.큰고모부님은 당시의 키로 적은키도 아니셨고 몸태도 좋으셨다. 게다가 얼굴도 동안이셨고 늘상 미소를 짓고 계셨던 분이시다.이제 글의 편의상 고모,고모부로 부르기로 하겠다.
고모와 고모부는 정말 법 없이도 사실 분들이었다.부부 서로간에 금슬도 좋으셨고 자식들에게는 엄함과 인자함을 동시에 갖추신 분들이었다. 당시 서울에 사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자주 다투시는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의식과 사업의 부진, 그것에 제대로 맞추어 드리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사이에는 늘 건너지 못하는 강 같은 간격이 있었고 그것이 어린 가슴 한켠을 어둡게 물들인 까닭에 속으로 의기소침함이 생기게 되었고, 의기소침은 그후 성장기 동안 많은 문제를 헤쳐 나가야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시끌거리던 서울에서 갑자기 적막하기 까지한 야트막한 앞산.동네초입의 느티나무.초가지붕.진흙벽.소.돼지.닭은 안정되지 못했던 어린 마음을 평안히 진정시켜 줌에 부족함이 없었다. 서울과 같은 문화적 편리함은 없었지만 꾸밈없는 농촌이 주는 정서적 영향을 어찌 말로 표현할수 있으리.어린 내가 받은 그 평안함의 가장 밑바닥에 고모부님의 인격이 자리하고 계셨으니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고모부께서는 큰 소리를 내시는 적이 없으신 분이었다.사촌형제들도 고모와 고모부를 닮아 모두다 착하였고 머리 또한 좋아서 시골학교지만 전교에서 늘 1등만 하던 그런 형제들이었다. 실제로 어려운 농촌에서 공부를 했지만 넷째인 형과 다섯째인 동생은 서울의 명문대학으로 진학하여 형님은 변호사를 하시고 동생은 의사를 하고 있으니 이 역시 착하게 살아오신 고모와 고모부의 덕이 아닌가 싶다.물론 다른 형제들도 모두 일가를 이루고 잘살고 있음이다.
그때 고모부를 뵈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나의 아버지,어머니도 고모부와 고모처럼 그렇게 지내시고, 특히 아버지는 고모부 같이 그런 분이셨으면 좋겠다" 라고..물론 나의 아버지에 관한 가치관은 사십이 훨씬 넘어서야 다시 정립이 되었지만 당시 어린 마음으로 고모댁이 있을때는 정말 간절한 소원과도 같았다.
농촌의 생활이란 것이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겨울은 농촌에서 별일없이 그리 지내는 것으로 생각 했었는데 새벽 4시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머리는 까치집을 지으신채 커다란 가마솥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군불을 때시던 고무부를 보았다.그 가마솥에서 폴폴 나는 김과 살랑거리는 냄새를 재미라고는 먹는것 밖에 모르던 내 궁금증이 피해 갈리가 없었다.
"고모부님,,,그게 뭐예요?"
"뭐긴,,쇠죽이지"
어,,,소는 풀 먹이면 되는데 왜 죽을 쑬까.무엇을 넣고 쇠죽을 쑨다는 말씀이실까.가만 들여다보니 짚단 썰은것과 콩깨묵,보리쌀 같은것을 넣으시고 물을 부어 펄펄 끓이시는 것이었다.이상하다.그냥 지푸라기 주면 안되나.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여쭈어 보지는 않았다. 겨울철이라 날씨가 추우니 소도 따뜻한 먹을것이 필요 했을테고 짚단은 영양가가 별 없을터이니 다른 곡류를 더 넣어 주는것이 소를 온전히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내 들었기 때문이다.
정성을 들여 죽을 쑤어 커다란 바가지로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짚단을 소의 여물통에 놓아주니 아직도 뜨거울텐데 소란 녀석이 참 잘도 먹는다.그때 소가 어떤 모습으로 먹는지 자세히 관찰을 해 보았는데 짚단을 꺼칠한 혀로 말아 올리고는 아래 턱을 시계반대방향(소의입장에서)으로 돌리면서 씹는 것이었다. 결국 맷돌처럼 갈면서 동시에 씹어서 일단 첫번째 위장으로 넣는다고 보면 될것이다. 아주 맛나고 먹음직스레 먹는 소를 보면서 나는 꼴까닥 하고 침을 넘겼다. 무슨 맛일까?
소의 먹는 모습을 저녁에 식구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니 고모부께서는
"자세히도 봤다" 하시면서 털털하게 웃으셨다.
그렇게 몇번을 고무부의 뒤에서 지켜 보기만 하던 나는 더이상 궁금증을 참을수 없었다. 그날 따라 고모부께서 끓이시는 쇠죽은 유난히 구수한 냄새를 풍겼고 아침 식전의 고픈 배가 인내를 용인하지 못한 것이다.소에게 푸짐하게 얹어놓고 가시는 고모부를 뒤로한채 나는 소의 먹는 모습을 보는 척하며 일단 김이 모락거리는 짚단을 하나 집어서 소처럼 아래턱을 돌리면서 먹어 보았다.
'뭐가 이래,,퇴,,퇴'
구수한 냄새와는 다르게 그냥 닝닝한 맛과 지푸라기 냄새. 이번에는 국물을 찍어서 먹어 보았다. 배고픈 내 입이 거부를 할 정도이니 그 맛은 그냥 실망의 맛이라 이야기 하련다.
'저게 뭘 맛있다고 소란 놈은 저리도 열심히 먹는담.'
혀는 속으로 부터 쓴/신/짠/단의 맛을 느낀다고 배웠는데 소의 꺼칠한 혀는 풀을 감는 용도로만 사용되는지 도대체 그 맛있어 보이는 쇠죽의 맛은 생각과 너무나 달랐다. 여기에서 내 식욕이 멈추었으면 그 다음 일이 벌어지질 않았는데 그날따라 아침에 고모께서 만들어주신 늙은호박과 신김치를 넣어 끓여주시는 국과 밥을 배부르게 먹고도 소가 맛있게 먹는 궁금증이 멈추질 않았다.다시 소에게 가보니 이제는 이놈이 되새김질을 하나보다. 새벽에 먹을때 보다 더 맛있게 아래턱을 돌리고 있었다.못 말리는 나는 소의 아래턱으로 삐질하게 나온 조그마한 지푸라기 찌끄러기를 하나 빼앗았다. 일단 코로 냄새를 맡으니 그냥 그런것 같다. 용감하게 입에 넣지는 못하고 혀만 가까이 대어 보았다.이번에도 실망.두번째 위장에서 올라온 놈인가 보다. 세번째,네번째 위장에서 올라오는 것 까지 시식을 해보려다가 다른 맛있는 먹거리들이 생기는 바람에 쇠죽 맛에 대한 실습은 그것으로 마치게 되었다.
저녁에 화로불에 묻어둔 고구마도 먹어보고,,호롱불을 밝히고 기도를 하는 평온한 농촌을 겪어 보았다.얼음 덮힌 조그만 개울 아래로 물은 여전히 흐른다는 것도 배웠고,눈이 무릎까지 차는 날 토끼를 잡는다고 커다란 장대에 못을 꼽아 사촌형,동생과 산자락도 뛰어다녀 보았다.그때 사촌형은 아마 토끼를 잡지는 못한다고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형님의 마음 씀이 지금도 고맙다.
참새를 잡으려 새그물도 쳐 보았고,저녁이면 초가지붕에 후래쉬를 비추어 도망가지 못하는 참새를 잡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참새구이를 먹어 보기도 했다.꿩을 잡으려 약을 넣은 콩을 먹고 대신 죽은 까치를 홀딱 벗겨 구워 먹어보기도 했고(질김니다),실제로 야생 꿩을 넣고 끓인 찌게를 먹어보기도 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무엇인지 느꼈고,밤 하늘의 별이 보석이라는 것을 확인했다.얼마를 걸어야 십리가 되는지를 걸어 보았고,이십리를 걷기가 쉽지 않다는것도 그때 알았다.담배를 재배하고난 그 마른 줄기에 불씨를 놓아 벅벅 빨면서 담배피는 흉내를 내보기도 하였고,곳곳에 얼음 얼은 논에서 썰매도 타 보았다.새끼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도 그때 배웠다.고모부님은 나에게 누가 빨리 새끼를 꼬는지 해보자는 말씀도 하셨다.
이렇듯 내 가슴 곳곳에 남아 나를 부자로 있게 해준 편안한 기억들의 가장 아래에는 언제나 인자하셨던 얼굴로 쇠죽을 끓이시던 고무부님이 자리하고 계시다. 세월이 정말 화살과 같이 빨라 벌써 삼십년이 넘어 버렸다. 그간 제대로 찾아 뵙지도 못했고 친척 결혼식때 형식적으로 몇번 뵌것이 전부이련가. 나의 무심함에 가슴 아파오지만 그냥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인것을 이제사 어찌하리오.
내가 존경했던 고무부님께서 지금 위중하시다. 분당에 있는 사촌동생이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중 이신데 다시 일어나시긴 어려울듯 하다. 엊그제 뵈오려고 병원을 찾았는데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조금 취하시고 주무신다기에 그냥 발길을 돌렸다.어쩌면 지금 뵙는다는건 또 다른 나의 이기심인지도 모를일이다. 별로 보지 못하던 친척들이 문병을 오는것을 아시고 고모부님은 당신께서 일어나지 못함을 직감하신것 같다고 동생이 이야기한다.
그래. 그것은 나의 속 좁은 이기심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고모부님의 위중하심을 들으면서 내 정서의 저 깊숙한 곳에 그 분이 자리하신 것을 절절이 느끼니 그간 제대로 한번을 찾아뵙지를 않은 나의 무심함에 마음이 한스럽도록 시리다. 다시 일어서실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전해 드리련만 이제 여든이 넘으신 연세도 있으시고 그간 모르고 계시며 위장약만 드셨는데 대장의 암이라니....게다가 통증을 이겨낼수 있는 주사가 지금 치료의 전부라니 참 답답한 일이다. 내가 이리 답답한데 친아들인 사촌동생의 마음이야 오죽하리.자신이 의사이면서 더 빨리 알아내지 못한 동생의 마음은 많이 괴로우리라.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신 분들중에 지금 위중하신 큰고모부님도 커다랗게 자리하고 계심이니 그때 내가 그렇게 먹고 싶었던 쇠죽의 사랑스러운 냄새도 이제는 세월 속으로 묻혀만 간다.
첫댓글 아련한 어린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구공탄님의 글이 구수했던 시절을 되새김하게 해주셨네요 좋은 밤입니다^^ 다음엔 또 어떤 글을 올리실지 기다려집니다^^
저도 어릴때 시골에서 자라 쇠죽 끓이고 쇠죽주고 ...옛날이 그리워지네요
참으로 호기심많은 어린시절을 보내셨네요..쇠죽의 맛을 보시다니..ㅎㅎ..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띠고 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그옛날 어린시절 농촌생활의 추억을 떠올려 봤습니다..행복한 밤 되시길..
흐르는 세월에 생로병사는 비켜갈수가 없지요..고모부님의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