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평면에서 보통 '의식'이라고 부르는 식이
[연기성공]에 포섭되는..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불교의 견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방님이 종종 언급하시듯, 고대 인도 전승에서도
일상의 평면의 의식(이하 '의식')은 소위 환상으로 다룬 것 같습니다.
[멸진정 or 무색정 or 색계선정]이란 <근원>에서 투사된 현상으로 본 것은 불교와 다르지만..
어쨌든 의식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뭘 해보려는 건 아니었단 말이죠..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가 이 전승을 잘 계승함)
방님 과거글에서 라마누잔 베단타?라고..
수직적 구조를 배제 혹은 간과하고
소위 '일상의 의식상태' 위에서, 뭘 해보려고 하는 흐름이 후대로 가면서 나타났다고
소개됐던 것 같은데요 (맞나?)
닝마파와 카규파 린포체들이
'청정하고 빛나는 의식' '열려있는 자각' '마음의 본성' '근원적 의식' 등등의 표현을 통해,
'일상의 평면의 의식'에, 위의 단어들이 지시(암시)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한 두명이 아니고.. 거의 예외없이 같은 얘기를 해서..번역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달라이라마가 소속된 겔룩파는 전형적인 '연기성공'에 충실한 교학을 유지하고 있구여,
겔룩파에서는 닝마파와 카규파가 <어떤 초월적 의식이 있다>는 입장인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한지붕 식구인지라... 대놓고 까지는 못하는데... 내부적으로는 '저거 왜 저러냐..'라고 생각한답니다 ㅎㅎ
아무튼..닝마파와 카규파의 최상승 차제인 족첸과 대수인의 가르침에서 빈발하는..
'청정하고 빛나는 의식' '열려있는 자각' '마음의 본성' '근원적 의식' 의 표현들과
이 표현들이 암시하는 (더 정확히는, 대중에게 암시되어지는) 표상들이..
결과적으로.. [일상의식의 평면에, 어떤 심오한 의식상태가 있다]는 아이디어로 귀결되는 경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경향성은 불교-비불교, 승-속 막론하고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저거 랜덤하게 읽으면서 배우는 경우..
이 함정카드?에 기본적으로 낚인 다음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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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카페에서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화엄은 첫 문장의 견해에 아주 매우 엄청~ 충실한 곳임을 고려하는 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 위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그렇다는 사실을 모를 때.. 서로 피곤하죠..
첫댓글 제가 티벳 그쪽은 몰라요. 그런데 유식논사들... 저는 유식학 강의도 듣고 나름 지식을 배울 때요. 이런 말은 참 건방지지만요. 솔직하게 말해서요. 유식논사들 상당수가 "이 애들 선정에서 소멸은 커녕 무색정도 잘 모르면서 논리와 글자 상상에 매몰되어 제시한 부분들이 꽤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굳이 해당 강의를 들으면서 교순님한테 그렇게 주장할 바도 아니구요. 위와 같은 저의 판단이, 그들이 그릇되고 무용하다는 거는 아닙니다, 수행에서 그런 두뇌 훈련이 필요한 측면도 있구요. "그에 상응한 의심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한 대처나 이해력을 기르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부 사항에 집착해서 맞니 실제가 이러니 저러니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거예요.
티벳쪽 불교를 모르지만요. 그쪽에서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많은 표현이 곧잘 애용된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황벽님이 본글에서 거론한 청정하고 빛나는 의식, 열려있는 자각, 마음의 본성, 근원적 의식 등의 표현도 문제를 일으킬 수는 있어요.
그런데요. 삼매 전승을 이해하면, 불필요한 혼동이 좀 사라집니다. 삼매 전승의 특성이 말입니다.
삼매 전승은요. 기본적으로, 기법에 따라 스쿨이 갈라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대로 된 기법이라면요, 기법이 지혜고 사실의 체계를 제시하는 거라서 그래요. 그리고 삼매 전승 기법에서는, 삼매를 유도하기 위해 암시를 많이 사용합니다. 상좌불교쪽에서도요, 삼매와 관련해서는요. "마음은 빛난다"느니 "마음 고유의 빛이 드러난다"와 같은 표현들을 흔히 사용하거든요. 그게 암시예요. 암시인데, 해당 암시에 따라 삼매 수행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사실'입니다. 팩트라구요. 정말 그러한 암시에 입각해 선정에 들려고 할 때에는 마음이 빛나요. 그러니까 마음이 실제 빛나냐 아니냐, 그거는 굳이 서로 따질 일은 아니예요.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나도록 조건지어져 일어났다면, 사실이 그와 같이 드러날 것이다... 그 정도까지 체킹하면 더 좋기는 합니다.
전체적 체계에서, 그 구조에서 불교라면, 그냥 불교인 겁니다. 애용하는 표현이 어떻든 간에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나는 없다고 하셨지만, 불교에서 나를 긍정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 체계도 가능해요. 나를 부정하기 위해 나를 긍정하면, '나'라는 표현이 중심에 등장한다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에서 크게 그릇되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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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매 전승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마음의 닻은 필요하기도 하구요, 소중한 것이기도 합니다.
굳이 삼매 전승까지 가지 않아두요. 애기가 있으면 부모의 범죄율이 떨어집니다. 왜 그러냐? 애기가 마음의 닻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구요, 불자의 경우엔 부처님 가르침일 수도 있구요, 닻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많아요.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시구요, "앞으로 내가 깨달은 이 법에 의지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마음의 닻이거든요. 부처님까지 가지 않더라고, 상좌부나 니까야 경전만 봐두요. 무색정을 아는 이가 자신이 아는 무색정에 기대어, 의지하여, 마음의 닻으로 삼아 폭류를 건너는 것이 나옵니다.
마음의 빛으로 삼매 수행하고 마음의 빛을 닻으로 삼은 이에게, 마음의 빛은 의지처이고 늘 함께 하는 겁니다. 지혜를 잊지 않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시계 소리를 듣는 의식과 공무변처 의식등이 함께 사실로 병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요. 그거는 당장 최근에 언급된 소공경의 내용에도 반합니다. 즉 그런 것처럼 말해도, 사실이 그런 게 아닌 겁니다. 이해의 문제예요. 이해해야 되요.
대체로 맞는 얘기인데 첨언하자면 달라이라마도 그 마음의 본성을 긍정합니다. 단, 그것도 무자성이라고 말합니다.
달라이라마는 '기절 등 의식의 단절 상태의 기저?에 흐르는 미세한 의식'의 존재를 긍정했는데요, 이 의식에 '본성'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죠. 연기하는 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니깐여
@황벽 근본적인 가장 심오한 의식, 진리의 법신인 근본 마음, 본래부터 청정한 불성, 청명한 빛은 원인과 조건에 기대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있어 온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연속적이다, 구생원시광명심은 인지를 자신의 본성으로 갖는다
위에 다 달라이라마가 직접 표현한 겁니다. 물론 각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맥락을 봐야합니다.
@법무아 어떤 맥락에서의 언급인지 모르겠지만..해탈의 서 등을 소개할 때(카규나 닝마 입장을..) 나온 표현일 것 같슴니다..
겔룩파는 연기성공의 예외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데 말이죠.. 뭐..제가 다 아는건 아니니깐요..
@황벽 "승의제와 세속제를 동시에 직접 지각할 수 있는 붓다의 의식, 즉 붓다의 지혜에 있어서도 이전 찰나의 의식으로부터 현재 찰나의 의식이 생겨난다는 사실은 유효하며, 붓다의 지혜 또한 인지(認知) 상태 또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붓다의 지혜가 인지 상태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붓다의 지혜로 변하게 될 요인인 원심(구생원시광명심) 또한 인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지를 자신의 본성으로 갖지 않는 것이 인지를 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번째 관점에서 보면 구생원시광명심(인지상태)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합니다."
@황벽 이건 더 덧붙인 말인데 달라이라마가 언급한 모든 것도 무자성이며 황벽님이 말한 연기성 공을 벗어나진 않습니다.
멸진정이나 무색정 등 특정 상태(조건)를 의지처로 삼아, 현실의 탐진을 여의는 방식에서.. 이 의지처는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멸진정, 무색정 등 <일상의 의식과 무.관.한> 조건을 의지처로 삼는 경우.
1-1. 의지처를 직접 체험한 케이스
예) 마하라지
1-2. 의지처의 표상을 듣고, 추론해서
<믿는> 경우 : 체험을 요구하지 않음
예) 마하라지의 제자들 상당수..
2. 일상의 평면에서..순수의식, 자각, 주시자 등으로 일컫는 <무엇>에 의지하는 경우.
: 아래의 3.에 비하면 순수한 행자입니다..
3. 1.과 2.를 섞는 경우. ㅡ..ㅡ;;;
ㅡ 기본적으로 2.인데, 2.로는 꿈없는 잠, 기절 등의 설명에 대응이 안 되기 때문에.. 수시로 1.을 섞습니다. 몬소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주류가 된 베단따나 이쪽은요. 샹키아가요. 진아와 현상을 절연시킨 것을 몬마땅하게 여긴 쪽입니다.
샹키아는요. 진아와 현상은 서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이게 왜 몬마땅하냐? 현실은 외면하는 거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현실과 진아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는 시도가 나오는데요. 그게 베단따입니다.
가교를 놓는 방식을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 두가지를, '샹카라의 베단따'와 '라마누자의 베단따'라고 각각의 대표자 이름을 붙여 분류합니다.
소위 구루풍을 보면요, 베단따류가 절대 다수로 보이는데요. 각 베단따의 원형을 취하고 있는 분들은 소수인 거 같구요, 보통 나름의 경험이나 개성에 따라 변형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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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요. 애초에 진아가 없구요, 소멸은 논리적 의미에서의 근원 정도로 접근하는 편인데요. 논리적 의미에서의 근원이라는 말은, 보통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근원처럼 서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 심소멸 추구하는 계열, 즉 삼매 전승들이 소멸을 근원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아주 강한 편입니다. 그거는 뭐... 우흥우흥... 화엄행자의 입장에서, 그쪽에서 그러는 거는 좀 사심이 들어가 있는 거 같기는 한데요. 어쩌겠어요.
저는 방장님의 화엄행자란 표현도 구체적으론 모르겠는데 .방장님이 언젠가 ..'일체의 어리석음을 함유한 한량 없는 어리석음의 장엄'이라는 표현을 보고
뿅! 갔습니다.. 그 또한 구체적이지 않아서 선명하게 다루긴 어렵고 지금 문득 떠오르는 것은 금강경의 이름이 부처이다 등등의 대목인데
확대하자면 조심스럽고 매칭이 될라나 모르겠는데 ..보는 놈을 보는 것은 보는 놈이 아니다 또는 보는 것을 보는 놈은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마치 눈이 스스로 지 눈을 본다고 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미친놈이다
뭐..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단 건데요..
우몽도 온라인 여행이 20여 년이 넘어가는데요 의외로 참 이상한 사람들도
많더군요..당연히 그 이상한 놈이 우몽일 수도 있겠고요..낮술에 한말씀 땡깄습니다
-()-
더 확대하자면 눈이 스스로 지 눈을 못 보듯 본다는 것도 오리무중인데 굳이 또 보는 놈을 세워서 또 굳이 또 보는 놈을 엎어치나 매치나 말하자면 체상용 등으로 나눔은 보는 놈을 못 보니까 열나리 삽질하는 거 아니겠습니까..마치 산타크로스나 달걀귀신은 바로 보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근데 또 다행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으니 열심히 살아야죠
아..내가 말하고도 웃긴다는 ㅎㅎㅎ ㅋㅋ
아직 화엄을 잘 모르니, 여전히 화엄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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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알 이야기는요.
우리는 "내가 눈으로 꽃을 본다"고 알지만요.
(상좌부) 부처님 가르침을 엄밀히 따르자면, '꽃의 형상의 감지'와 '눈이라 이름하는 형상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과 '꽃의 형상'이 함께 성립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꽃의 형상의 감지'라는 표현은, "꽃의 형상을 감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꽃의 형상을 떠나면 바로 그 감지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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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는게 쓸데 없이 복잡한데요, 보다 쉽게 도식화해 보자면요.
"내가 눈으로 B를 본다"는 표현은, 친구가 없으면 안되니까, 단지 편의적으로 긍정하는 거구요.
"감지A와 형상성립기반B 그리고 형상C가 있다"가 사실과 맞다는 거죠.
여기서 감지A와 기반B는 형상C일 때만 성립합니다. 형상甲은 기반乙과 감지丙과 함께 합니다.
개념 분류상, 감지A와 감지丙을 모두 동일한 이름인 '안식'으로 칭하고, 기반B와 기반乙을 모두 동일한 이름인 '눈'으로 칭하고, 형상C와 형상甲을 모두 동일한 이름인 '형상'으로 칭하긴 하지만요. 구체적으로는 A와 丙 각각 성립한 것이고 각각은 같은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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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해, 아함부나 니까야에 따를 때, "모든 사실(법)은 찰나로 성립하고, 소멸한 찰나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부적 논리로, "형상과 상응하는 눈에서, 형상에는 눈이 없고, 눈은 눈을 보지 못하는데, 눈으로 보는 줄 어떻게 아는가?"라는 말도 성립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를 때 '눈으로 본다'는 판단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눈으로 눈을 보지 못하니까요. 눈의 기능이 보는 기능임을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즉 눈이 있어 형상이 알려지니까, 곧바로 성급하게 '눈으로 본다, 눈에는 보는 기능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눈이 과연 그런게 맞냐는 의문이죠.
저를 포함해 이쪽 논의를 하는 경우, '눈으로 본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봐도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구요. 굳이 그런 논점이 나오거나 필요하지 않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 측면이 필요하거나 그런 논점이 등장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좀 더 엄격할 때, 그러한 판단에는 비약이 있다"는 점을 그냥 감안하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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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글과 직접 관련 없지만 적었습니다. 죄송
우몽이야 메뚜기꽈지만 별말씀요_()_
아..저도 황병님께 지송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