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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위 롯데 자이언츠는 올 시즌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로이스터가 이끄는 롯데 선수들의 플레이에는 여유가 있다. 로이스터가 팀을 만드는 방법에는 자율야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사진 한상무) |
4월 1일 LG전을 앞둔 잠실구장에서 삼성
선동열 감독은 인적이 드문드문한 스탠드를 바라보며 롯데 이야기를 꺼냈다.
“야구는 사직구장에서 해야 할 맛이 난다.” 지난 3월 25일 프로야구 미디어데이 직후 우리 히어로즈의 신인 투수
김성현은 “선배들이 야구를 재미있게 하려면 롯데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선감독의 말이 있은 지 얼마 뒤 사직구장. 지난해 챔피언 SK를 상대로 롯데는 1회에만 8점을 뽑는 괴력을 선보였다.
SK 선발투수 다윈 쿠비얀은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7점을 내줬다. 쿠비얀은 생전 이런 경기는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쿠비얀이 메이저리그에서 3년 동안 뛰며 기록한 1경기 최다 실점은 6점이었다. 그 때는 2⅔이닝을 던지기라도 했다.
사직구장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3월 29, 30일 대전 개막전 승리까지 더해 3연승이었다.
다음날 새로운 외국인타자 카림 가르시아는 2-0으로 앞선 4회말 SK 선발투수
송은범의 바깥쪽으로 낮게 깔린 직구를 선 자세로 걷어올려 왼쪽 담장을 넘기는 묘기를 보였다.
그때 SK 더그아웃에 있던 안교훈 기록원은 “다들 입을 딱 벌렸다”고 했다. 뛰어난 수비를 자랑하는 SK 외야진은 이날만은 실수 투성이였다.
롯데 타자들이 친 공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금씩 더 뻗어가는 듯했다. 이런 손이 실제로 있다면 부산 팬들은 ‘새 감독의 손’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1999년 이후 9년 만의 개막 이후 4연승으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순식간에 부산의 영웅이 됐다.
언론에서는 로이스터 감독의 새 별명을 지어주기 바쁘다. 2002년 한일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한 야구팬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로이스터 감독의 별명으로 ‘제리 포터’를 제안했다. 출신 학교는 호그와트란다.
로이스터 감독의 이름과 함께 자주 짝이 되는 단어는 마술보다는‘자율야구’다. 홈 개막전 상대가 김성근 감독의 SK였기에 두 팀의 대결은 자율야구와 관리야구의 대결로 비쳐지기도 했다.
1989년 이광환이 OB 베어스 감독으로 취임한 뒤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율야구와 관리야구는 언제나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어느 정도 과장돼 있다.
관리야구의 ‘관리’는 말 그대로 관리 또는 통제를 뜻한다. 선수의 행동 하나하나가 플레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 아래 식단, 외출, 심지어 성생활까지 코칭스태프가 관여해야 한다는 주의다.
관리야구의 원조로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6대 감독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꼽는다. 그 후계자가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을 지낸 히로오카 다쓰로다.
히로오카는 선수들에게 일체의 육류를 금지하고 생선과 두부, 현미 등만 먹게 했다. 아직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이런 식으로 선수들을 관리한 감독은 없다. SK 김성근 감독은 흔히 관리야구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김감독은 선수의 사생활을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엄청난 훈련량으로 사생활을 즐길 시간이 줄어들 뿐이다. 관리야구라는 말에는 작전이 많은 세밀한 야구, 선수의 개성을 죽이는 야구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가와카미의 요미우리는 일본시리즈에서 9연속 우승하며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호리우치 쓰네오 등 수많은 스타선수들을 배출했다. 지난해 SK는 희생번트와 주루 플레이뿐만 아니라 많은 장타로 점수를 뽑았다.
김감독은 최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관리야구와 자율야구라는 이분법은 의미가 없다”며 “선수가 스스로 생각을 하며 문제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 강한 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79년 한신 타이거스의 첫 외국인감독 돈 블레이싱게임은 경기 전 훈련을 최소화했다. 한신의 1루수 가케후 마사유키는 감독의 방침에 반발하며 자청해 훈련량을 늘렸다. 이해 가케후는 생애 최다인 48홈런을 기록했다.
거꾸로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실상 첫 외국인선수 데이비 존슨(전 LA 다저스 감독)은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에게 “타격 훈련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존슨은 두 달 동안 18개의 홈런을 때렸다. 야구는 상대성이 지배하는 경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해까지 LG 스카우트로 활동한 이효봉
해설위원은 “자율야구든 무슨 야구든 결국 선수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야구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위원은 “과거 해태 타이거즈는 권위적인 감독과 수직적인 선후배 관계로 유명한 팀이었다. 그러나 해태의 진짜 힘은 선수들이 상황에 맞게 알아서 야구를 했다는 데 있다”고 덧붙였다.
해태의 야구는 자율야구 맞을까, 관리야구 였을까. 김성근 감독의 말대로 자율야구와 관리야구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에서 얼마 전까지 자율야구라는 말은 거의 죽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94년 이광환의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잠깐 꽃을 피웠지만 생명은 길지 않았다. 자율을 강조한 많은 감독들의 재임기간도 그랬다. 몇 년 전부터 구단들은 너나없이 강훈을 외치고 있다.
한화 김인식 감독 정도가 예외지만 그의 야구에는 어느 순간부터 ‘믿음의 야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율야구가 더 이상 매력적인 단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14년 전
로이스터 이전 롯데에도 자율야구가 있었다. 1992년 롯데는 창단 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5할 승률에서 1승 모자란 62승63패1무의 성적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1994년 구단은 ‘미스터 롯데’로 통하던 김용희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3년 계약이 끝난 강병철 감독이 한화로 팀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른 감이 있었지만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김용희는 일찌감치 차기 감독감으로 꼽히고 있었다. 당시 나이 서른 여덟 살이었다. 미국 연수를 다녀온 김용희는 ‘롯데식 자율 야구’를 꿈꿨다.
2년 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1994년 롯데는 강팀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당시 한 롯데 출입기자는 구단에 “김용희는 오래 보고 키워야 할 사람이다. 전력이 떨어지는 팀을 맡기면 나중에 인책론이 나올 수 있다. 좀 더 준비된 팀을 만든 뒤 감독으로 임명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1992년 우승 당시에도 팀 득점은 2위였지만 팀 방어율은 4위에 정규시즌 순위는 3위였다.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한 고졸 신인 염종석이 없었더라면 이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의 이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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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가르시아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치른 첫 5경기에서 2홈런을 쳤다.(사진 제공=롯데 자이언츠) |
김용희의 첫 시즌은 쉽지 않았다. 투수진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전해 10승 이상을 했던 염종석, 윤형배, 김상현은 방위병 복무로 홈 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전해까지 200이닝 넘게 던진 시즌이 여섯 번이었던 에이스 윤학길의 어깨는 피로 증상을 보였다.
부산고를 졸업한 신인 왼손 투수 주형광 만이 11승을 올리며 외롭게 던졌다. 주형광은 4월 1일 사직구장 홈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3번 타자 김응국은 타율 3할2푼3리를 기록했고 4번 타자 김민호는 팀 내 최다인 15홈런, 78타점으로 활약했지만 뒤를 받칠 선수가 약했다.
통산타율 2할4푼8리인 3루수 공필성이 5번 타순에 기용되는 처지였다. 결국 1994년 김용희의 롯데는 전해보다 6승 모자란 56승에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5년 롯데에 기적이 일어났다. 정규 시즌 3위에 오른 뒤 플레이오프에서 20승 투수 이상훈이 버틴 LG를 6차전 승부 끝에 눌렀다.
주형광은 10월 1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6차전에서 막강 LG 타선을 1안타 무사사구 완봉으로 눌렀다.
왼손 투수가 바깥쪽 직구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교본은 주형광의 이날 투구였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한국시리즈에서도 OB 베어스(현 두산)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쳤다.
7차전 3회말 2루수 박정태의 실책이 없었더라면, 2-4로 뒤진 9회초 2사 2, 3루에서 대타 손동일에게 던진 OB 권명철의 슬라이더가 조금만 밋밋했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신인 1루수 마해영과 포수 임수혁은 김용희와 김용철의 시대 이후 롯데에서 잊혀지다시피 했던 ‘백투백 홈런’의 맛을 볼 수 있게 했다. 임수혁은 아직 병상에 누워있지만 마해영은 올해 8년 만에 고향팀 롯데로 돌아왔다.
김용희 감독은 상무에서 갓 제대한 신인 마해영을 초반 부진에도 4번 타자로 믿고 기용했다. 마해영은 “김 전 감독의 믿음 때문에 내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95년 롯데의 진짜 힘은 활발한 기동력에 있었다. 김용희 감독 부임 전에도 롯데는 빠른 팀이었다. 해태 이종범과 당대의 도루왕을 놓고 겨룬 전준호 덕분이었다. 김용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에는 뛰는 선수가 더 많아졌다.
1994년에는 이전까지 시즌 최다 도루가 9개였던 1루수 김민호가 21도루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1995년 세운 220개의 팀 도루는 당분간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하지만 김용희의 자율야구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1996년 롯데는 4위 현대 유니콘스에 9.5경기로 크게 뒤진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7, 1998년에는 2년 연속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영원한 롯데맨’일 것 같았던 김용희는 경질됐다.
김용희의 실패를 감독의 능력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구단은 투자에 인색했다. 뛰는 야구의 선봉에 섰던 전준호는 1997년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롯데는 현대에게서 트레이드 머니 5억 원을 받아 국가대표 에이스 문동환에게 계약금으로 줬다.
1998년 첫 외국인선수 더그 브래디는 70경기에서 2할5푼8리의 성적만 남겼다. 롯데의 최초이자 최악의 외국인선수였다.
더 큰 문제는 애초 구단이 외국인선수 계약 자체를 꺼렸다는 점이었다. 롯데는 1996년 차명주를 시작으로 1997년 손민한과 문동환이라는 거물 투수들을 잇따라 영입했다. 계약금은 모두 5억 원이었다.
계약 당시를 기준으로 차명주는 역대 최고, 손민한은 역대 2위 기록이었다. 그러나 세 투수 가운데 누구도 데뷔 시즌에 50이닝 이상 투구를 하지 못했다. 부상 때문이었다.
김 전 감독은 “프로에 와서 다친 게 아니었다. 아마추어 때부터 부상을 안고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김 전 감독은 잠깐 복귀하긴 했다. 2002년 우용득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뒤 김용희는 나흘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
우용득의 뒤를 이은 인물은 백인천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잔뼈가 굵은 백인천은 롯데 구단 사상 자율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감독이었다. 그렇게 롯데에서 자율야구는 사라졌다.
김용희와 자율야구
김용희 전 감독은 2006년 시즌을 끝으로 롯데 2군 감독에서 물러났다. 올해부터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전 감독은 4월 3일 인터뷰에서 올 시즌 롯데의 초반 돌풍에 대해 “속단은 이르지만 아직까지는 성공”이라고 평했다.
그는 “한화와의 대전 개막 2연전에서 이겼지만 한화는 올해 전력 보강이 미미한 데다 4번 타자 김태균까지 빠졌다.
SK도 초반 선수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하지만 힘으로 눌러 이겼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4월의 기록을 믿지 말라는 야구 격언도 있다.
그는 “4, 5월을 잘 버텨야 한다. 잘 나가다가도 사소한 문제 때문에 연패에 빠지는 게 야구”라며 “연패를 피하기 위해서는 투수력이 좋아야 한다. 올해는 투수들의 상태가 좋다”고 덧붙였다.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는 불펜도 “다른 팀들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김 전 감독의 판단이다.
김 전 감독에게 로이스터 감독은 따지고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사이다. 지난해 강병철 감독이 물러난 뒤 롯데 차기 감독으로 숱한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김 전 감독도 물망에 올랐다.
그가 야인으로 물러나 있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김 전 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에 대해 “구단이 100% 감독을 믿어야 한다. 그건 구단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지 이제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선수들에 대한 파악이 아직 완전하지 않을 때다. 전지훈련을 치르며 선수들의 장단점을 눈여겨봤겠지만 섬세한 인간 관계까지 아우르기는 어렵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다른 구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로이스터 감독 자신도 3월 29일 대전 개막전을 마친 뒤 “이제 3개월이 지났다. 다른 팀들에 대한 준비가 완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격려의 목소리 아래에는 부러운 마음도 깔려 있다. 김 전 감독은 “외국인감독인 데다 메이저리그 사령탑까지 지냈다. 주위에서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나친 훈련량에 반대하는 건 전, 현직 감독의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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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사직구장은 2년 연속 개막전 매진 사례를 했다.(사진 제공=롯데 자이언츠) |
지난해 11월 경남 김해 상동야구장에서 로이스터 감독은 날씨가 쌀쌀해지자 훈련 중단을 지시했다.
그때 한 선수는 “전임 감독 아래에서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겨울 단체 훈련기간이 적었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필요한 건 다 했다”는 입장이다.
김 전 감독의 지론은 “통계적으로 시즌을 마칠 때쯤에 선수들의 체력은 가장 좋을 때의 13~22%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때 일정 기준을 벗어난 훈련은 선수를 지치게 만든다. 피로가 누적되면 부상이 찾아온다. 정신력이 약해 다쳤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전 감독은 “당시에는 내 방침을 구단이나 팬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게 최고라는 식이었다. 선수들도 내 방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점에선 지금의 로이스터가 더 나은 환경 아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감독이 홈런을 치고 들어온 노장 선수를 껴안으면 경망스런 사람이라고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김 전 감독은 “나는 자율야구를 ‘자생야구’라고 부른다. 선수가 알아서 성장하는 야구라는 의미다. 감독과 코치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창의력이 사라지게 마련”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가 아직까지 자랑스러워 하는 건 1995년에 기록한 220 팀도루다. ‘그린 라이트’를 줬지만 처음에는 선수들이 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들에게 계속 뛰라고 독려했다.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면서 ‘왜 뛰냐’던 선수들이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패 속에서 창의력이 길러진 것”이라고 회상했다.
1994년에 비해 지금의 한국프로야구는 보다 선진적이 됐다. 무지한 투수 혹사는 사라졌고 선발투수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등판하고 있다.
프런트는 기록 분석 시스템과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지원하고 있다. 2군 경기도 팀당 36경기에서 80경기 이상으로 늘었다.
그런 가운데 시스템의 개선을 코칭스태프의 지휘 방식이나 선수들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지금까지 자율야구의 상징은 LG였다. LG의 한 관계자는 “자율야구가 오히려 LG를 망쳤다”고까지 말했다. 롯데에서 17년째 뛰고 있는 염종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을 믿는 야구다.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훈련도 선수에게 맡겨 둔다. 선수로서는 이런 감독이 편하다. 그러다 보니 감독의 방침을 악용하는 선수들도 생겼다.”
김용희 전 감독도 관리야구와 자율야구를 칼로 두부 베듯 구분해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미국야구든 일본야구든 결국 야구는 똑같다. 하지만 내게 굳이 선택하라면 지금 롯데에는 감독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앞세우는 일본식 야구보다 미국식 자율야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그동안 선수들의 창조력과 창의성이 부족했다. 자신감도 떨어졌다. 지금 롯데 선수들에게는 자기를 표현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들었다. 스스로 야구를 이해하지 못하며 흘리는 땀은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말이다.
2008년 롯데 자이언츠
롯데는 4월 3일 사직구장에서 SK에 0-5로 완패하며 개막 후 4연승을 마감했다. 그리고 LG와 3연전이 기다리는 잠실로 향했다. 3연패에서 탈출한 SK 김성근 감독은 “막강 롯데를 이겨 기쁘다”며 상대에 대해 경의를 나타냈다.
자율야구와 관리야구의 이분법에서 대척점에 서 있어야 할 김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에 대해 가장 큰 기대감을 나타낸 한국 야구인이기도 하다.
김정준 전력분석팀 과장은 “지난 경기에서 롯데가 점수를 내는 방식이 좋았다”고 짧게 평가했다.
김성근의 말대로 롯데는 과연 막강한 팀으로 거듭날 준비가 된 것일까. 이날까지 다섯 경기만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4승1패를 하는 동안 롯데는 팀타율 3할4푼8리에 OPS(출루율+장타율) 0.926을 기록했다. 역사상 최고의 강타선으로 꼽히는 1927년 뉴욕 양키스의 팀 OPS가 0.870이다. 4월의 기록은 믿을 게 못 된다.
아직은 로이스터 감독의 적응기다. 다섯 경기 동안 로이스터 감독은 네 차례 라인업 카드를 고쳐 썼다.
고정된 타순은 4번 이대호, 5번 가르시아, 8번 조성환뿐이었다. 김주찬은 중견수, 우익수, 1루수로 번갈아 기용됐다. 3루수는 이대호와 정보명이 나눠 맡았고 포수 마스크도 강민호와 최기문이 번갈아 가며 썼다.
유격수도 다섯 번째 경기에서는 박기혁 대신 이원석이 나왔다. 선수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자기의 팀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효봉 해설위원은 “로이스터 감독도 결국 자기 야구에 맞는 선수들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은 준비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4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 건 좋은 출발이자 행운이다. 로이스터보다 14년 앞서 자율야구를 실험했던 김용희 전 감독은 “감독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을 받기 위해선 믿음을 얻어야 하고 언행이 일치돼야 한다”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자신을 ‘선수들의 감독(Players’ Manager)’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어떤 감독이라도 선수들에게 대해 수직적인 리더십은 필요하다.
감독은 결국 어떤 선수들을 어떤 자리에 써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언행이 가장 자주 빗나가는 분야가 바로 선수 기용 문제다. 염종석은 “누구나 편견 없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선수들을 뛰게 한다”고 말했다.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25일 롯데 1군과 2군은 사직구장에서 연습경기를 치렀다. 스탠드에 앉아 기록을 하던 한 2군 선수는 “1군 투수와 2군 투수의 실력 차이가 도대체 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취임 3개월째인 감독은 앞으로 몇 번은 위기를 겪을 것이다. 이효봉 해설위원은 롯데에는 로이스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롯데는 계획을 짜서 롯데의 야구를 만들어야 하는 팀이다. 지금까지는 거칠게 말하면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팀’이었다. 지금 롯데 선수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야구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약기간을 3년이 아닌 2년으로 한 건 구단에서 모험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다는 증거”라며 “결국 야구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한다. 감독을 믿고 선수들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당장의 스타일이 낯설다고 조급해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SPORTS2.0 제 98호(발행일 4월 7일) 기사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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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봤자 만년꼴찌 꼴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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