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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생 -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생,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유언으로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바른 태극기’를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아들 이인수 박사(정치학)· 조혜자 부부는
“어머님께선 아버님을 뵈러
매주 금요일 국립묘지에 가시곤 했는데,
80년대 초 거기서 만난 한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님께
‘오스트리아인이시죠?’했더니
대번에 ‘아니요, 난 한국인이예요’하실 정도로
한국 사랑이 끔찍하셨다”고 회상한다.
그런만큼 이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를 구별 못하고
편의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으로 불렀던
한국 국민의 무신경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시정 물가를 몰랐다던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잉보호로 인의 장막을 쳤다는 등
세간에 떠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혈육으로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초대 대통령 부인으로 기록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90여 년 삶을 이화장의 이인수· 조혜자 부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취합해 재구성해본다.
결혼 이전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생장했다.
중고시절 수학성적은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고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추었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
이승만 박사를 만나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
이 박사는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서 급히 날라 와 국제연맹 방송,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대접으로 발전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사랑하는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을 받으며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반지도 여자가 준비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1910년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를 얻은
이승만은 미국 정관계, 언론계를 통해 일제의 학정을 알리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1913년부터 39년까지 하와이를 근거지로 민족교육과 홍보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기독교를 통한 한국민족의 갱생을 목표로
한인기독교회(KCC)를 세우고 선교단을 만들어
하와이 뿐 아니라 아이오와,
LA로 확산시켰고 또 한국 민족화를 위해
기독교 학교인 한인 기독학원을 만들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1921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 때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년에는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
호놀룰루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첫 번째 한 것이 한국말을 배우려 노력하고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구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 기관을 움직이는 남편을 따라 할 일이 많았고,
특히 한인기독학원의 실무를 지원했다.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고 식사도 준비했다.
대한YWCA 고문을 한 박에스더는
10살부터 한인기독학원 기숙사 생활 중에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교장선생의 외침이 어린 마음에도 민족에 대한
어떤 자각심을 싹트게 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겼다.
41년에 이 박사는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경고를 주었고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무서운 예언서”라고 평가했다.
세 번의 타이핑에 아내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아내에게도 여윳돈을 주어서
이때 맞춘 검정 예복이 40년을 넘어 며느리가 물려받아 입고 있다.
이 박사의 집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은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사랑의 충만,
남편과 남편의 일에의 전력투구”를 꼽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교제를 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은 내핍과 검약뿐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이동할 때
프란체스카는 운전을 담당하였으며
무릎 담요는 온기 없는 차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의
필수 품목이었다.
45년 해방되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고 하며
아내의 은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해방 대한민국에서 남편이자 대통령의 일등 비서가 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박사는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탁통치반대, 모스크바 3상결정 취소 요구, 국토분단과 공산테러, 폭력, 혼돈이 난무하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 박사는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하지중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자결주의를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국회구성 총선거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아래
48년 5월 10일 실시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영부인 시절 축첩 타파에 힘써...임영신 초대 상공장관 임명에 영향력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녀는 꿋꿋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미 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은 도맡았다.
경무대 안주인이 되면서 한 가지 관행을 바꾸려 애썼다.
손님을 초대할 때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들의 회합에 기생이 노래와 춤을 하고
첩이 동행하는 풍습을 바꾸려 한 것이다.
축첩을 금지하는 내용을 임시국회 첫 회기에 반영시키려 하였다. 아내의 보좌를 받아온 이 대통령은
여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
초대 상공장관에 임영신 여사를 임명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검약으로 경무대 안살림을 꾸렸고
‘쪼끔,쪼끔 사모님’으로 별칭을 얻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의 건강과 식사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일본 총독과 미군정 하지 준장이 살았던
경무대를 전혀 수리하지 않고 지냈으며
목욕통이 짧아서 다리를 펼수 있도록
구멍을 더 파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장원엔 가지를 않고
블라우스는 천을 끊어서 만들어 입고 옷,
양말은 기워 입었고
내외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하였다.
허술한 데가 없었다.
장교들의 도미시찰 여비를 일찍 귀국한 날짜만큼 반납을 받았고
도미유학장교단의 여비가 1.3배 과다 청구되었다고
미국 지도를 펴놓고 설명할 정도로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박마리아 여사만이 아니라 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씨 등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과는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6.25전쟁 초기 석달 간 비망록 기록...영문편지로 세계 각지에 구호손길 요청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기차로 대구를 향했다.
작전상 탈출이었으나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초대사가 영부인의 도쿄 피난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수원, 대전, 부산으로 임시 정부수도를 옮겨가는
누추하고 헐벗은 피난생활은 대통령 부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은색으로 변해갔으나
그의 명랑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과 재빠른 언변은 남편을 늘 생기 있게 하였고,
남편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선 장병, 부상병, 포로 등을 접해야하는
최전방의 영부인이었고 학교, 병원 고아원,
30만명의 과부와 10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한국부인회가 함께 하기도 했다.
피난민의 생활을 둘러보고 미군 병사들도 방문하는 일정도 바쁘다. 항상 한복 긴치마, 앞섭이 긴 저고리,
손에 든 큰가방,
검은 선글라스의 차림이다.
부산에서의 생활환경은 척박했다.
여사는 남편의 체력과 건강을 위한 스케줄을 관리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이대통령을 위로하는
세계 각지로부터 답지하는 글에 답장을 쓴다.
영어로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루는 대통령과 같이 밤새워 하와이와 미주에 있는 친지들에게
그리고 빈에 있는 친정가족에게 우리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대달라고 37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우리 동포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여사의 친정에서 제일 먼저 구호품을 보내왔고
하와이 미주에서도 속속 구호품이 도착했다
전쟁 중에 미국사령관을 만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내외가 함께 나서서 많이 풀어나갔다.
영부인은 6.25일부터 9월 5일까지 전쟁 비망록을 써놓았다.
9.28 수복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과 기쁨을
김활란 박사와 나누기도 했다.
서울 환도 짐 속에 제일 먼저 타이프라이터를 챙기고
대통령의 낡은 스프링 코트을 접다가는 석달 전
한강철교를 건너 남하할 때 침통한 표정으로
자꾸 서울 쪽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괴었다.
‘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YWCA, 한국부인회 등의 활동…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 등과 교우
서울YWCA 회관건립 건축모금 위원회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명예회장,
다울링 대사부인을 회장으로 한 국제바자를 57년 5월 25일
미 대사관저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고
이날 모인 1만2천 달러는 최이권 회장에게
건축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후원금을 박마리아 연합회 회장에게 전달하고 다음해 1958년 6월 23일 기공식에 박에스터와 함께 회관 건설의 첫 삽을 함께 떴다.
임영신이 회장인 한국부인회와의 교류 정도로 관계를 맺었다.
60년 대통령 하야 후 하와이 병상의 ‘베스트 와이프’로 헌신 간호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다녀가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5월 29일 출발했다.
하와이에서는 옛 친구들, 한인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공경과 사랑으로 받들었으나 고국을 그리는 마음과 나라 걱정만 커져갔다.
양자를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 문중에서 추진하여 17대 손 중에서
조카뻘 되는 청년 이인수씨를 입적시키고
12월 13일에 하와이에서 처음 대면했다.
이박사는 자나깨나 귀국만 생각하여 여비를 생각해서
이발비도 아꼈다.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감사한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일과였다.
주치의의 조언을 받고 62년 3월 17일 출발 준비를 마쳤는데
박정희 정부가 귀국을 만류한다는 전갈을 갖고
총영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후 이 박사는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65년 6월 말에 병세가 위독하여 인수씨가 다시 왔고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조국의 품안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설움으로 남아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의식을 잃었다.
실의에 차고 병들기까지 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본 프란체스카여사의 별명은 베스트 와이프(best wife)였다.
그녀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염려 속에 잘 지냈다.
아들 이인수씨는 68년에 조혜자씨와 결혼을 하고
70년에 첫 아들을 낳았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5월 16일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이화장에 다시 돌아와 ‘행복한 할머니’로 20여 년 여생 보내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결혼으로
32년 같이 보낸 사랑하는 남편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방지 하와이에서 한스럽게 떠나보내고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생활이었다.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손자 병구와 병조를 1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가족의 기쁨을 맛보았다.
근검절약의 정신과 가족 건강을 지키는
우리 음식 솜씨는 며느리가 고스란히 전수받았고
기운 양말과 내복은 손자들도 다 수용한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국립묘지 공작봉을 매주 찾으며
날마다 남북통일과 집없는 사람을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지 않고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여인이 되어 한국을 사랑했다.
이화장 뜨락에 꽃이 만발할 때 많은 손님을 맞는 것이 늘
가족보듯 반가운 일이다.
안분지족을 잘 아는 분인 것 같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가족의 기도 속에 영면하고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프란체스카 여사 일대기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막내딸로 출생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상업전문대학 졸업 후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1920년 개신교 자동차경주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
1923년 헬무트 뵈룅과 이혼
1933년 2월 어머니와 구라파 여행 중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 박사 만남
1934년 10월 8일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이 박사와 결혼
1934년 워싱턴으로 독립운동 근거지 옮김
1940년 이 박사의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
(원제: Japan Inside Out) 원고 타자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워싱턴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도움
1945년 8월 15일 광복 / 10월 16일 이 박사와 함께 귀국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기거
1948년 7월 20일 이승만박사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50년 6·25 전쟁 발발. 임시수도 부산 피난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5월29일 이승만 박사와 하와이 망명길 동행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박사 별세
1970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
20여년 간 이화장에서 생활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1992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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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자신이 장수한 원인을
『과식을 피했으며 여유가 있을 때라도
비 싼 고기류를 못 사오게 해서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모든 성인병이 자동적으로 예방되었고
아내 인 나도 덕을 보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 손님들에게 커피보다 는
건강에 좋은 국산차를 대접했다.
여름에 는 시원한 오미자차,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 차와 유자차를 내놓았다.
율무를 볶아서 율 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 서 차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 눈차를 만들어 대접했다.
모과차와 유자차는 특히 외국 귀빈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은
프란체스카에게 모과차 만드는 법과
불 고기 양념하는 법을 배워갔다.
경무대에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
콩나물 잡채와 닭찜을 주로 했다.
죽순, 밤, 잣, 은행, 표고, 대추를 넣은 닭찜은
늘 외국 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은
오스트리아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대사관에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란체스카였다.
흥분된 어조로 朴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없는지,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물었다.
10여 일 후 그녀는 1·21 사건에 관한 각종 기사를 스크랩해서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며 이번 사건은 철저히 규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장을 개방했을 때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녀는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못 받게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런저런 단체에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거절하고 이화장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정동교회 예배 참석과
매주 금요일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해 李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외출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서는 프란체스카 일행을 보고
오스트리아인이 다가와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죠.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왔습니다』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오스트리아에 태어났을 뿐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李仁秀씨는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했다.
『머리를 뒤로 쪽을 찌고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어요.
양식은 거의 안 드시고 한국음식만 드셨지요.
나라 걱정, 국민들 생각으로 하루해를 보내셨어요.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게 보이면
이산가족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라고 당부하셨지요.
무슨 물건이든 어머니는
그것을 영구적으로 아니 영원히 사용하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할 때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는데
우선 그 돈으로 틀니를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曺惠子씨가 왜 외국에 있는 동안 틀니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
단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
메디컬센터 치과과장 최상열 박사가 만들어 준
틀니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 방문할 때면
『한국에서 틀니를 하고 가라. 틀니는 한국이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틀니를 하라고 당부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정신
프란체스카의 절약정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李仁秀씨가 양자로 하와이에 가면서
선물했던 국산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하는 등
절약에 있어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평이다.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다.
1976년에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하자
프란체스카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금성사에서 다시 작은 선풍기를 보냈는데 아주 더울 때
겨우 한두 번 트는 것이 고작이었다.
191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입한 앨범에
옛날 사진을 떼고 손자들 사진을 붙이기도 했다.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으며
1904년에 산 타자기로 남편의 독립운동과 한국 외교를 돕고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의 옷은 어느 것 하나 깁지 않은 것이 없으며
속옷과 스타킹까지 기워 신었다.
손자들의 체육복을 몇 번이나 기운데다
아랫단을 여러 번 내는 바람에 손자들이 창피하다며
학교 가기 싫어했을 정도이다.
프란체스카는 가난하던 시절
경무대에서 알뜰하게 살던 것보다 더 알뜰하게 여생을 보냈다.
이화장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만들어 먹었다.
점심에는 감자가 주식이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들거나 현미,
보리 콩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먹었다.
가뭄이 들었다는 TV
뉴스가 나오면 손자들 목욕도 시키지 못하게 했다.
며느리에게 세세한 것까지 가계부에 적게 한 후
15일마다 검사했다.
검사할 때마다 『全국민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근검 절약을 생활화해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늘 겨울에 추위에 떨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다.
『기름값을 아끼려고 겨울이면 비좁은 경비실로 옮겨서
생활하셨어요.
기름을 함부로 때는 것
은 달러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너무 추울 때면 저에게 72도 작전을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둘이서 껴안고 있으면 온도가 72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어머니와 가난해서 더 친해졌을 정도예요.
너무 추워서 1985년에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이화장 본관 아래 이층집을 지었어요.
말년에 좀 따뜻하게 지내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정말 지독하게 절약하신 분이에요.
밥알 하나, 두부 한 모, 콩나물 하나 버리면 큰일이고
식사를 할 때 늘 접시가 깨끗했어요.
평생 돈 한번 마음놓고 써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죠』
22년 동안 미장원에 한번도 가지 않고 머리를 길러 쪽을 졌다.
세제는 반드시 정량만 사용하고
빨래한 물을 모아서 걸레를 빨았으며,
세탁기는 남북통일 되면 사용하라고 해서
曺惠子씨는 1985년이 되어서야 겨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느 해인가 독도사랑회에 프란체스카는 10만원을 기탁했다.
曺씨는 남들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10억원만큼 큰돈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한 뒤 22년 동안 한 번도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화도 하지 않았다.
李仁秀씨가 1972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8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들에게도 국제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전화를 못하게 하여
두세 번 정도 몰래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척에 있는 가족을 못 만나는 이산가족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남편도 8년 동안 딱 두 번 한국에 다녀갔어요. 生父(생부)가 돌아가셨을 때와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든 연락을 편지로 했는데
항공우편 대신 가격이 훨씬 싼 배를 이용했다.
추석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12월에 받아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생일카드도 생일 몇 달 전에 미리 발송했다.
미8군사령관을 지낸 매구르더 장군에게
생일 몇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장군이 이미 사망한 일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집에 선물이 들어오면
그냥 두었다가 선물 보낼 일이 있으면 그걸 다시 이용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해진 옷을 기웠다.
경무대 시절 그녀는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헌 양말을 넣어 통통하게 만든 구두 속주머니를 만들어
미국 대사와 미국 상공회의소 부인들에게 선물했다.
구두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구두에 끼워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선물을 하면서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도와줄 물품을 요청했던 것이다.
재봉틀과 각종 악기를 지원받아 전쟁미망인과 고아원에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전쟁 중에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나중에
고아 중에 한 명이 이화장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선물을 싼 끈도 모았다가 엮어서 찻잔 받침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알뜰한 유품들은 현재 이화장에 전시되어 있다.
아들 편애하는 한국 시어머니
曺惠子씨는 프란체스카를 완전한 한국 시어머니라고 말한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언제나 아들 앞으로 밀어주었으며
겨울이면 남편의 신발을 따뜻하게 해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마흔이 된 아들 仁秀를 미국으로 유학보내면서
속옷에 주머니를 달아 달러 몇 장을 다려서 넣어주었다.
1973년에 이화여대 金玉吉(김옥길) 총장이 가스레인지를 선물하자 『아들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해
몇 년 동안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근검절약하기로 소문난 프란체스카는 1974년 8월 朴正熙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본 뒤
『내가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아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는 틈만 나면 며느리에게 유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개 그것은 근검절약과 관계된 것이었다.
曺惠子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니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죠.』프란체스카는 말년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건강도 좋아 귀국할 때보다 살이 찌고 안경을 안 끼고 책을 읽을 정도였다.
매일 코리아 헤럴드를 비롯한 영자신문과 한국 TV, AFKN을 시청했다. 어지간한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집안에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81회 생일 때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녀는 당시 근황을 이렇게 말했다.『고향에 있는 언니에게 가끔 카드가 와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해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은 게 바로 우리나라니까요. 늙어서도 축복받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끝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야말로 세계 으뜸가는 자랑거리죠』
특히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고 피력했다. 특히 첫 손자인 丙久(병구)의 출생소식을 빈에서 듣고 『당장 남편 산소에 달려가 우리도 손자가 생겼습니다 하고 힘껏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책에 기록했다.
1990년 90회 생일 축하연이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렸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일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국가유공자 가족들을 초청하는 자리로 대신한 축하연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장수 비결을 묻자
『무엇에든 감사하는 마음이 저의 생활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지요』라고 답했다.
며느리 曺惠子씨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평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산책하고 小食(소식)한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감자를 쪄서 간식을 자주 드셨어요.
명랑하고 유머가 있고 자기 자랑을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게 웃으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살아 생전에 손자들이 장가가는 것을 본 뒤에 죽고 싶다고 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92년 3월19일 타계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죽거든 틀니를 반드시 끼워주고,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관뚜껑은 남편의 친필휘호인 南北統一(남북통일)로
덮어달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말을 늘 유언처럼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소원대로 국립묘지 남편의 옆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정동제일교회서 영결식을 가진 뒤 경찰차 한 대가 선도한
장례행렬은 승용차와 버스 10대뿐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이화장을 찾는
이가 급격히 줄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연금과 李仁秀 박사의 월급 대부분은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들어갔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화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8년에 비가 많이 새서 지붕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는데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돈을 보내서 고쳤다.
崔圭夏 대통령과 全斗煥 대통령이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을 뿐
퍼스트 레이디 중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도
미장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실핀으로 머리를 감았다가 드라이로 말리는 게 고작이었다.
옷도 산 적이 없다 고 한다.
천을 구입해 와서 비서인 김신영씨와 함께
블라우스를 만들어서 입었다.
경무대에서도 옷을 꿰매 입는 건 여전했는데
어느 날 대통령이 方在玉씨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대통령께서 내복을 들고 저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라 그런다」하시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던 기억이 나요.
너무나도 알뜰하신 영부인이었죠.
양말도 기워 신고 가루비누도 숟가락으로 재서 썼어요.
무 섭게 절약하셨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영구 귀국하실 때는
다 떨어진 행주까 지 갖고 오셨더군요』
14년간 한집에서 생활하면서 대통령의 수발을 들었던 方在玉씨는 두 사람이 부부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급한 성격이어서 화를 내면 할머니(方씨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할머니라고 지칭했다)가 일단 피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되지 않아요.
할머 니가 李대통령의 음식을 일일이 만들어 드리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 을 일일이 확인해 봤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지시를 하면 우리들이 알아서 척척 했지요. 우리들에게 많이 맡겼어요.
소탈한 성격이어서 아랫사람들 하는 일에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 어요.
다만 두 분 내의와 양말은 항상 할머니께서 직접 손으로 세탁하셨어요. 언제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사람 차별하지 않고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셨지요.
한국말을 배워서 우리들에게 간단한 명령어와 단어를 사용해 말씀하셨어요.
두 분은 아랫사람들과 격의없이 지내셨어요.
그야말로 인정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셨어요.
제가 허리가 아파 고생할 때 할머니께서 허리에 안티프라민을 바르고 손으로 맛사지해 주셨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명절 때 선물 이 들어오면 모아두었다가
일하는 사람들 생일이 되면 나눠주셨어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李起鵬씨의 아내 박마리아와 유일하게 친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것도 잘못된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열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윤치영 내무장관의 부 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냈으며
정운수 의원 부인 편정희 여사,
YWCA 총무였던 박에스더, 이화여대의 金活蘭 박사,
김신실·김영의 교수,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씨 등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경무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김활란 박사와 임영신씨는 李承晩 대통령 영결식 때
흰족도리를 썼을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다.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5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잔병을 앓은 일조차 거의 없을 만큼 건강했다.
83세이던 1958년 북한산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가
직접 ‘문수사’라는 휘호를 썼을 정도.
1934년 이 전 대통령과 결혼한 뒤 평생을 함께 살다
92년 9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박한 한식 상차림
이들 내외의 건강 비결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차린 밥상.
독립운동을 하면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이 전 대통령은 평소 반찬 수가 세 가지를 넘지 못하게 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했지만 입맛은 철저히 한식이었던
그는 물김치·콩나물·두부·김·된장찌개·콩자반·생선구이 등을 즐겼다.
달걀은 프라이보다 찌개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던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달걀찌개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남편의 식성에 맞추기 위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결혼 뒤 한국 요리법을 배웠고,
김치까지 직접 담가 상을 차렸다.
특히 콩 요리를 좋아하는 이 전 대통령을 위해
집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직접 만들었다.
콩을 갈아 끓인 비지찌개도 자주 상에 올렸으며,
계절마다 제철 나물을 무쳐 식탁을 채웠다.
주전부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줬던 것과 같은
메밀묵을 만들고,
종종 콩가루 넣은 주먹밥을 준비하기도 했다.
누룽지와 견과류도 이들 부부의 단골 간식거리.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전 대통령 주머니 안에 늘 잣을 넣어두어
그가 언제고 먹을 수 있게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약과와 약식 등 한과류도 좋아했다.
약 대신 음식으로 치료
이 전 대통령은 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프란체스카 여사가 동상에 걸렸을 때도
약을 쓰는 대신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에
손·발을 담그도록 했을 정도.
자신도 웬만하면 약을 들지 않았고,
평생 인삼 등 보양식도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식단 안에 보약을 대신할 수 있는 건강식품을 포함시키려고
애썼다.
대통령 취임 전 가정 살림이 어려웠을 때는 꽁보리밥에 짠지,
날된장만으로 식사를 할 때도 있었는데,
이때는 날달걀에 식초를 타서 먹는 것으로 영양을 보충했다.
율무차, 들깨차 등을 물처럼 마셔
프란체스카 여사는 건강차 끓이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건강차를 맛본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에게 차 만드는 법을 물어봤을 정도.
특히 이 전 대통령 부부가 즐겨 마신 건강차는 율무차와 들깨차였다. 이들 내외는 항암효과가 높은 율무, 들깨 등을 날 것으로 씹어 먹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머리를 많이 쓰는
이 전 대통령을 위해 늘 밀눈을 살짝 볶은 밀눈차와 콩과 함께 볶아 구수한 맛을 더한 결명자차 등을 준비해두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오미자차, 겨울에는 따끈한 유자차 등으로 변화를 주기도 했다.
고깃국보다는 북어국, 쌀보다는 현미 즐겨
이 전 대통령은 고깃국보다 북어국을 더 좋아했다.
북어 머리를 듬뿍 넣고 파·고추를 썰어넣어 끓인 국물을 즐겨 먹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끓여주는
북어 떡국을 좋아했는데, 국물 맛이 좋았을 뿐 아니라
현미로 떡을 만들어 넣어 감칠맛이 났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현미와 백미를 섞어 밥을 짓고,
백설기를 만들 때도 현미를 썼다.
그는 이처럼 평범한 음식이라도 색다른 재료를 이용해 건강식으로 변신시키곤 했다.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로 닭찜을 내놓았는데,
밤·잣·은행·표고·대추 등을 듬뿍 넣어 맛과 멋을 살렸다.
건강한 치아 유지 비결은 김치
이 전 대통령은 김치 예찬론자였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에서 요양하던 시절,
의사가 짠 김치를 많이 먹으면 혈압이 높아진다며
김치를 줄이도록 권하자
“나는 김치를 못 먹으면 오히려 혈압이 오른다”며 거부했다.
그는 80세가 넘은 후에도 딱딱한 누룽지를 즐겼을 정도로
치아가 건강했는데,
그 비결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것을 꼽았다.
이 전 대통령은 ‘소금에 절인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충치도 없다’고 믿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34년 미국 뉴욕에서 이 전 대통령과 결혼한 뒤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
나중에는 망명 독립운동가와 유학생들에게 김치를 나누어줄 만큼 실력을 쌓았다.
김치는 늘 이 부부의 식탁에서 가장 중요한 메뉴로 대접받았다.
규칙적인 식사 습관
59세 때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이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독립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때로는 사과 한 개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는 폭식도 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결혼 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남편이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전 대통령이 외부 일정이 있을 때도
도시락을 싸는 등 음식을 준비해 식사시간을 엄수하도록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냉수 한 잔
오스트리아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이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가난한 독립운동가 이 전 대통령과 결혼한 뒤
갑자기 달라진 환경으로 인해 한동안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다.
이때 이 전 대통령이 권한 것이 새벽 냉수 마시기.
이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공복에 냉수를 마셨고,
산책이나 운동 후에도 음료수 대신 물을 마셨다.
감기에 걸렸을 때도 이 전 대통령은 약을 먹는 대신
맹물을 계속 끓여 마시며 병을 이겨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을 따라 냉수 마시기를 생활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장병을 치료했다.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특효약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건강하게 90세까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모유를 먹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직접 해준 음식을 먹고 큰 덕분에
독립운동 과정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결혼 후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랑과 도움이 그의 힘이 됐다.
이들 부부는 새벽마다 함께 기도했고, 성경도 같이 읽었다.
이 전 대통령이 붓글씨를 쓸 때면
언제나 프란체스카 여사가 먹을 갈아줬을 정도로
공무시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 해야 건강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겨울이면 늘 이 전 대통령 구두를 따뜻하게 데워 내놓았을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술·담배 하지 않고 자연을 가까이해
이 전 대통령은 늘 “사람은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말했다.
또 “욕심내고 화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면 늙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장작을 패는 것으로 마음을 풀었고,
틈나는 대로 산책을 하거나 맨손체조를 하며 건강을 지켰다.
평생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가꿔서
말년에는 수목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이 전 대통령은 늘 숙면을 취했으며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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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장
1945년 이승만(李承晩)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로
당시 서울시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張震英)으로부터 빌린 집으로서,
장진영은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약 700평의 정원에 뛰어난 미관(美觀)을 지녔다.
장진영은 6·25사변 때 납치되어 죽었고,
돈암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1986년 현재 문화재로 지정받지 않은 채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이승만은 환국 후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묵고
경비과중으로 이 집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윤치영(尹致暎 : 비서실장)·이기붕(李起鵬 : 서무담당)·윤석오(尹錫五 : 문서담당)·송필만(宋必滿 : 비서)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 소식을 들은 미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지(Hodge,j. R.)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을 얻어 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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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건축물로
사적 제4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의 구조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을 발표했다는 조각당,
1985년 이화장의 효과적인 보존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이 있다.
이외에 1988년 8월 15일 건국 40년을 기념하여 국내외동포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이승만 동상이 있다.
본관은 1988년부터 역사자료 및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소 사용하던 가구 및 유품을 전시해 개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