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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한 몸을 이루시고 거하실 성전이 됨(1)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11-22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여러분은 전에는 다만 이교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게다가 유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더러운 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유대인들도 아직 더러운 상태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표로 할례를 받고 경건하게 의식을 행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12)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던 시절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원수가 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모르고 희망도 없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13)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를 흘려 이루신 그 구원의 성업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유대 사람과 여러분 이방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15)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사이의 강한 적대감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 적대감은 유대인만을 특별히 사랑하고 이방인들을 배제시킨 율법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 전체를 쓸어 없애고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까지 서로 대립해 있던 두 무리를 한데 융화시켜 자기 몸의 지체로 삼으심으로써 하나의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드디어 평화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16) 우리는 이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서로간의 분노는 사라져 버리고 양쪽이 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불화는 십자가에서 드디어 끝이 난 것입니다. 17) ㄱ)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 이방 사람들에게나 가까이 있던 우리 유대 사람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복음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ㄱ. 70인역 사57:19) 18) 이제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 이방 사람이든 모두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그 구원의 성업에 따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는 낯선 나그네도 이방인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안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20) 여러분은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의 머릿돌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21)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아름답게 점점 커가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22) 여러분도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사시는 이 집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가족이 되게 하여 거룩한 성전을 만듭니다.
가까워졌느니라(11-13) 은혜가 임하기 전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였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 나라 밖의 사람, 언약에서 제외된 외인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은혜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은혜의 시대가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에게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핵심적인 개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14-18) 예수께서 하나님과 개인의 화평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평을 이루십니다. 예수께서 자기 육체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 사이에 물리적인 벽이 있었고, 이는 실제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모두에게 동일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화평을 위해 주님께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심한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보다 믿음이, 율법보다 사랑이 우선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롬 13:10).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이 사랑 안에서 차별 없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하나님의 권속이라(19-22) 하나님의 나라에 이등 시민이 없고, 모두가 동일한 시민이요 한 가족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건물에 비유합니다. 교회는 공동의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교인들 모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 있으며, 여기서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곧 성경을 의미합니다. 계시가 완성된 지금 사도나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우리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모퉁잇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퉁잇돌은 전체 구조물을 묶는 결합석(혹은 갓돌)이며,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예수와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이기보다 예수에게 연결된 사람들의 모임 자체입니다. 이런 교회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교회를 지어가야 할 것입니다.
적용: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당신이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 피로 하나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노애락을 같이 하고 서로 사랑으로 권면하며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에 뜻을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우리는 서로 부딪히면서 하나님의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슬기로운 교회생활
엡 2:21-22 / 최윤영 목사
우리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거룩한 씨 성동교회 교회당에 모여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관련되지 않고 혼자서 기도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마음에 예배하는 것으로 족하다면 주님은 구태여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수행하고,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족하다면 주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하지 않기에 실망할 거리도 있고, 상처받을 거리도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때에라도 하나님은 이런 우리라도 이곳에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이런 우리를 모아두고 성도,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는 것은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한다면 더 좋은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2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 성숙과 인격 성숙입니다.
신앙 성숙이 없으면 교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그저 동호회에서 만나는 관계, 내 마음 이해하고 알아주는 절친이나 동기동창 모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교회로 살게 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갈 1:10-11)
바울은 자기 정체성이 확실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소개할 때에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누구이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었는지 영적인 실체에 다가서야 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양만 가지고 살아서는 교회의 실체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수박 겉만 핡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주님을 대할 때에 결국 주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주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다 떠났습니다.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주님이 남은 12명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안에서 신앙성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편, 우리의 교회생활이 이어지면서 인격성숙도 일어나야 합니다. 간혹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서도 인격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성령충만하다고 여기나, 사소한 일에 반복적으로 화를 내고 시험에 빠집니다.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어긋납니다. 나도 시험 드는 일이 많지만 나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도 여럿입니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잠시 멈추고 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과 섞여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인격의 성숙도 일구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 관계가 중요하듯이 이웃 교우와의 수평적 관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어려움을 느끼고, 자주 시험에 들고, 시험거리를 주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 성숙을 위해서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신앙과 인격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균형 있게 자라나야합니다. 신앙성숙과 인격성숙은 수레의 한 쪽 바퀴들입니다. 한쪽 바퀴가 작으면 수레는 앞으로가지 못합니다. 제자리를 돕니다. 성경은 이 균형이 맞지 않는 사람을 뒤집지 않은 전병 같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 7:8)
뒤집지 않은 전병은 한쪽은 타서 탄내가 나는 대도 다른 한쪽 설익어서 익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성숙과 인격성숙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 가를 일깨워줍니다.
이 일을 함께 이루어가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에 모아 주셨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저런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셨는지 우리는 압니다. 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의 신앙성숙과 인격성숙을 이뤄가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교우들은 사실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나를 확인합니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언 27:18)
볼펜심에 들어가는 작은 구슬을 어떻게 만들까 궁금했습니다. 2015년, 중국의 총리 리커창이 중국이 아무리 발전하고 강대해지고 있어도 볼펜심도 못 만드는 나라라고 질책하며 기술굴기의 출발점을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모나미에 근무하는 분을 우연히 만나서 물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원료가 되는 쇠덩어리를 깍뚝 썰기를 하고 초고속 원심기에 돌리면 깍두기들이 원심기 속을 돌면서 부딪이면서 서로를 깎아줍니다. 그래서 동그란 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방법이기도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언 27:17)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모아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지 맙시다. 우리는 교회라는 초고속 원심기 안에서 서로를 위해주고 깎아주며 신앙성숙을 돕고, 인격성숙은 돕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함께 더 좋은 교회로 지어져 갑니다. 이것이 교회생활의 목적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이러한 목적이 살아있는 교회의 생활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목적을 이루어가는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몇 가지 지침을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내 옆에 앞에 있는 이 분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시고 그들 역시 이 안에서 나와 같이 함께 지어져 가야할 사람인 것을 생각하십시다. 그러니 첫째는 서로 다음의 것들을 버리고 불쌍하게 생각합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옆에 분을 불쌍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둘째는 앞으로 모든 교회 생활에서 다음의 것을 하지 말고 그 사람을 다음과 같이 여기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
불쌍하지만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라 생각하십시오.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의 일도 열심히 할 것이지만 이 사람의 일도 돌아보고 마음도 돌아보고 돕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가끔 허물이 보고 단점이 보이면 다음과 같이 하기를 다짐하십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그래서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덮고 기다려주는 것이 더 유익할 때가 많습니다. 조용히 기도만 하는 것이 결국에는 능력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각종 은사 중에 가장 보잘 것이 없고 작은 은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잘못과 단점을 찾아내는 은사입니다. 이를 은사라 말한 이유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바로 세워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은사라 부른 것은 더 큰 은사와 열매들을 잃게 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많고 감사할 일도 많습니다. 반면에 없으면 좋겠으나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기다려 주어야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간혹 들려오는 뉴스들을 보면 적어도 교회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 사고들이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되기도 합니다. 그 때에도 교회의 생활의 목적을 잃지 맙시다. 이런 교회라도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이 지키실 것이며 주님이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맙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분명히 기억하고 한 길을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
엡 2:21-22 /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2001년 시카고 대학의 돈 브라우닝(Donne Browning)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Globalization of Family'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서 가정 해체의 문제가 점점 세계화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간에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돈 브라우닝 박사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50%의 가정이 이혼을 하고, 30%의 아이들은 부모가 누군지를 모르고 자란다, 30%는 결손 가정에서 자란다, 잘 계산을 해야 30%가 그런대로 형식적으로나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그러니 이제 이 세대가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성이니 뭐니, 교육이니 뭐니, 다 헛된 소리이다. 가정의 문제를 바로 잡기 전에는 아무것도 바로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돈 브라우닝의 박사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돈 브라우닝 박사의 주장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이혼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하고 398쌍이 이혼해 결혼대비 이혼율이 47.8%에 달했다는 연구보고가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꽃동네 현도 사회복지대학의 최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노르웨이,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보다 이혼빈도가 높으며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이혼천국'으로 꼽히는 미국이나 스웨덴을 앞지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혼율의 급증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흔들리고 결국에서 가서는 국가 존립조차 위험해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 대부분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가정 해체로 버려진 아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1만 2천명에 달합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 구성원들 간에 삐걱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는 에베소서 2장 20절로 22절의 말씀을 가지고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가정이 어떻게 하면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을지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1. 그리스도가 모퉁이돌이 되는 가정이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모퉁이 돌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연결해주는 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벽을 쌓을 때 이 벽과 저 벽을 연결해주는 돌을 가리켜서 모퉁이 돌이라고 합니다. 모퉁이 돌이 없으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한 접착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이 그래요. 아무리 좋은 건축재가 있어도 접착제가 없으면 건물을 지을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접착제가 될 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가정의 접착제가 되도록 해보세요. 서로 믿지 못해 늘 부부싸움을 한 부부가 계십니까? 자녀들과 대화가 끊긴지 오래된 가정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대방을 바라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남편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내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녀를 보세요.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바라보세요. 그러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며, 잃어버렸던 신뢰도 되찾게 됩니다.
둘째, 모퉁이돌이란 ‘기초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 28장 16절은 예수님께서 기초석임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모퉁이 돌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초석.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주춧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무엇을 믿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초석-주춧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급절하지 않는다. 무슨 뜻이에요? 표준 새번역 성경을 보니까, “불안해하지 않는다.”-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의 기초석이 될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삶이 불안해지지 않습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정이 모퉁이돌은 누구십니까? 기초석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가정이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도시”라는 책을 쓴 하워드(Lawrence Hawarth)박사는 그 책에서 “현대 가정의 위기는 도시(The City)라는 것이 가정의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의 ‘도시'라는 말은 타락한 도시 생활을 가리키는데, ‘도시가 가정의 주인이 되었다'라는 말은 타락한 도시 생활의 문화가 가정의 근간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가정이 병들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잖아요. 바쁜 일상이 대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가족 구성원 간에 사랑을 빼앗아 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가정이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부모가 자녀를 학대하고, 자녀는 부모를 멀리하고, 마치 이익단체처럼, 가정도 내게 이익을 줄 때에만 가정이다라는 인식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 생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안이 필요합니다. 그 대안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머릿돌, 주춧돌, 기초석으로 삼으십시오.
어떤 분은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 되기 위한 3B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Built on the word of God. -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고, 두 번째, Brought up by Godly parents. - 경건한 부모로부터 양육되고, 세 번째, Bound with church. -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전 위에 가정이라는 건물이 세워질 때에 그 가정은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가정의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삼은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 유계준 장로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유 장로님은 23세 때까지 평양 깡패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펫(Moffet)선교사를 때리려고 둘러쌌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 잡혀 큰 감화를 받고 깡패그룹을 해산시키고 25세에 윤덕준 양과 결혼을 하여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45세가 되었을 때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주기철 목사님이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족을 돌보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6.25 전날 밤 괴뢰군에게 잡혀가서 대동강 언덕에서 순교 당하기까지 한 ‘믿음'있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을 일관하였습니다. 그 결과 참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5남 2녀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의학박사, 교수, 학장, 등 모두가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시죠? 부모가 예수님 잘 믿어야 합니다.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견고한 믿음을 지켜나갈 때 자녀가 믿음으로 잘 자라게 됩니다. 시험 기간이 되었다고 해서 자녀들 교회 보내지 않고 학원 보내는 부모라면, 그런 부모의 신앙 정도를 보고 자녀들이 정말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겠습니까? 수능 때만 되면, 그 당시에만 특별 기도회에 나오는 정도의 믿음이라면, 그 정도 믿음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믿음으로 굳게 서세요. 그럴 때 축복받습니다. 자녀가 복을 받아요. 자녀가 믿음으로 자라요. 자녀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어요. 이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 축복받는 가정,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가는 가정이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나옵니다. 첫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한 번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어져 가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은 단 한 번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어져 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아 가족 구성원이 늘어난다고 해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얼마나 가정답지 못한 가정들이 많습니까? 끔찍한 일-엄청나게 많잖아요! 경제권을 상실한 부모가 자식들에 의해서 버림을 당합니다. 부모의 심정은 할 수만 있으면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식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다보니 부모들은 마음을 두고 살 데가 없습니다. 늘 외롭습니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살기는 하지만, 함께 사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잠간 얼굴을 맞대고 이내 자기만으로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가정은 가족 공동체가 아닌 건물 공동체-한 건물 안에서 산다는 의미에서-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언제 가정이 되는 것입니까? 참된 가정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될 때 참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의 본래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제가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22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늘 우리 가정에 함께 하실 때에 든든히 세워져 가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가정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대표적인 인물을 하나씩 말하라고 한다면, 먼저 구약 시대의 인물 중에 한나의 가정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늘 우울했습니다. 브닌나라는 첩은 아이를 낳아 늘 활기를 띄는데, 자신은 기운이 없어요.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사무엘.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나는 참으로 힘들게 아이를 얻었습니다. 브닌나라는 첩 때문에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나은 아들을 한나가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장을 보면,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만 키우고 그 이후에는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젖을 뗄 때까지만 키웠다고 하니까, 얼마 정도였을까요?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 길어야 18개월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아들을 바치겠다고 하고 진짜 받쳤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나도 대단하지만, 남편인 엘가나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나가 자신의 결심을 자신에게 말하자, 흔쾌히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엘가나의 입장에서 보세요. 그 역시 친아들을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물론, 첩에게서 난 아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평소 한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을 볼 때, 친아들에 대한 그의 바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받쳤습니다. 친아들을 하나님께 받쳤어요.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힘들게 낳은 자식치고 더 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늘 부모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잖아요. 혹시라도 어디 상하는 것은 아닌지, 다치는 것은 아닌지, 눈을 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도 받쳤어요. 바로 이런 부모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이 죽은 후 사울 왕은 블레셋의 침공에 두려워하는데, 이때 사울 왕은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을 예언한 사무엘, 어찌 보면 사울 왕의 입장에서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으면서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사무엘이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문제해결의 열쇠”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거 잘 아셔야 합니다. 누가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요? 하나님! 내가 아닙니다. 이 말은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자녀들 때문에 속상한 일을 겪어도, 시부모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앓아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하나님께 기도해놓고도 자꾸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게 됩니다.
두 번째 가정은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었느냐 하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면,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정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가정이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사도행전 10장 4절을 보면,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이었다고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가정이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늘 마음속에 품고 계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가정을 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고넬료가 어떻게 합니까? 자기만 세례를 받습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엇입니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동안 그들 마음속에서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44절 말씀.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때에-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십시오. 기도하세요. 가정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 가정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 성령께서 임재하는 가정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나이가 다르고, 출신 장소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가진 재산이 다르고, 성별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셨듯이, 가족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무너져가는 가정을 바라보면서 회의감을 느낍니다. 언제쯤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에 찬 눈으로 바라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먹고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가정을 돌본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여러 가지 선물들 중에,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가정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십니다. 든든한 기초석이십니다. 그분 위에 가정을 건축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때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한나의 가정도, 고넬료의 가정도 기도할 때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만능키를 가진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석 위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써 든든히 세워져가는 가정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안네서 함께 지어져 가자
엡 2:2-22 / 김철현 목사
루멜 하우스]라는 사람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고독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사람이 고독하게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나를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를 그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장 먼저 자기를 사랑하는데 충실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생, 내 얼굴, 내 지식, 내 능력을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람은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자 분들 부인을 보면서 잘났건 못났건 저 여자를 사랑하고야 내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자분들 남편을 보면서 저 남자를 사랑하고야 내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고독이라고 하는 무서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어도 세 개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치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인가 혹은 나를 저들이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신뢰감입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가 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바른 대답을 하지 못하면 소외감에 빠지고 열등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피해망상증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절망은 정신적인 자살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정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이 몸뚱아리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깊이 고독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고독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만난 많은 사람 중에 환자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 누가복음8장에 보면 12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혈루증으로 보냈던 절박한 고독에 지친 여자를 만나주신 적이 있습니다. 무려 12년을 앓고 있었더니 주변
에 사람들이 없습니다. 혼자서 고독하게 마지못해 살고 있던 여자입니다. 여러분,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 말처럼 가족도 혹은 자식도 나 몰라라 하는데 남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병든 지 오래되면 친구도 없어집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우선이 가족이라면 그 다음은 친구입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해줄 친구가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일 텐데 이게 쉽지 않은 겁니다.
<런던 타임즈>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친구란 무엇인가?>어떤 걸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응모를 받아 깊이 조사해서 그 가운데서 가장 잘 됐다고 하는 친구의 정의를 내 놓았습니다.
그 첫째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그때에 나를 찾아오는 그 사람이 친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내 곁에 누군가 있어준다면 그건 행복입니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더욱 행복일 것입니다. 내 곁에서 나의 침묵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습니다. 말이 필요 없어도,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고 합니다. 다 아는데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나는 너를 안다. 네 억울함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네가 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네 진실을 안다.”고 침묵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친구라고 했고,
또 하나는 나의 기쁨은 곱해 주고 나의 슬픔을 쪼개 주는 자가 친구라고 했습니다. 내 기쁨이 친구를 만나면 배나 커집니다. 함께 있을수록 제곱으로 커집니다. 반면에 슬픈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면 슬픈 마음이 반으로 감해집니다. 함께 있을수록 자꾸만 작아집니다. 그런 관계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해석이며 친구에 대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나셨던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그 여자는 이런 친구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들면 몸이 아픈 것 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더 문제는 이러한 가운데 소속감도, 가치관도, 신뢰감도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버려졌지만 자신도 자기를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는 혼자 말없이 주님을 찾아오는 믿음이 있었고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여자를 고쳐 주시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곳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중풍병에 걸려서 꼼짝 못하는 병자를 친구 넷이서 침대를 메고 와서 고침을 받게 하는 이야기가 마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 중풍 병자에게는 마음이 열려있는 친구가 넷이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없는데 빨리 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도 모자랄 판에 먼저 이웃을 향하여, 친구를 향하여 먼저 마음을 연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데 하나가 되었던 친구들입니다. 결국 성경 마가복음2장5절을 보면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펜클러]라는 역사학자가 역사를 구분하면서 생성기, 성장기, 번영기, 쇠퇴기의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쇠퇴기에 일어나는 일차적인 현상으로 이기주의가 팽창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이기주의가 세상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정말 말세지 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이기주의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버클리 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혼자서 먹이를 먹으면 얼마를 사느냐를 봤더니 600일을 살더랍니다. 다섯 마리를 함께 먹도록 했더니 700일을 살더랍니다. 세 번째 실험은 사람이 돌보면서 키웠답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더 먹고 싶어 할 때는 더 주고, 먹기 싫어할 때는 다른 것을 주면서 지켜보았더니 무려 950일을 살았답니다. 미물도 더불어 살면서 사랑의 힘을 느낄 때는 행복한 마음으로 오래 산다는 사실입니다.
2009년도 새해 표어를<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자>라는 오늘 본문 엡2:22의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더 무슨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서 세워주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고 교제를 나누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함께 지어져 가는 일입니다. 나 한사람만 잘되겠다고 혼자서만 지어지면 다른 한 모퉁이는 기울어져 무너져 내립니다. 교회 공동체란 은혜를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며 서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2009년도에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고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옆에 있는 남편을 함께 세워가고, 가족을 세워가고, 동료와 어깨동무하며 무엇보다도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의 험담은 그만하고 이제 칭찬만 합시다. 어려움을 모른 척 하지 말고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신앙의 연약함을 책망하지 말고 동반자가 되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소설가[이철환]이 이웃들의 실제 이야기를 단편으로 구성해서 베스트셀러가 된<연탄길>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한 가족이 차를 몰고 서울 근교에 유원지를 다녀오다가 어두운 골목길에 검은 물체가 길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차를 멈추고 내려 보니 한 남자청년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뺑소니 사고였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우리는 관여하지 말고 가자는 아내를 설득해서 골목에 애들과 함께 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 후 남편은 신음하는 사람을 태우고 인근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상인지라 작은 병원에서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를 차에 태워서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일을 끝내고 아내와 아이들이 서있어야 할 그 골목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편으로 집에 갔나보다 생각을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자기 집 쪽으로 불자동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갑니다. 놀라서 빨리 가봤더니 자신의 집 조그만 빌라에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밖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윗집에 살고 있던 처제 식구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골목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처제에게 전화를 했고 처제가 식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언니네 집 식구들을 태워서 가는 사이에 가스폭발로 불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모두가 무사했는데 102호에 사는 내외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뒤에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바로 102호에 사는 그 사람이 골목에서 청년을 치고 뺑소니를 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 남자는 자기 집안 식구를 다 살릴 수 있었고 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자기만 살겠다고 뺑소니를 쳤던 사람은 죽었다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군가를 향해서 닫힌 마음이 있다면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는 1등이 제일인지 몰라도 신앙 안에서는 나 혼자 잘해서 1등 하는 것보다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때로는 허리를 숙이고 때로는 발걸음을 늦추어서라도 조회를 맞춰보십시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하나하나의 벽돌이 적재적소에 균형 있게 쌓아져서 건물이 완성 되어 가듯이 우리들의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서 서로 돕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먼저 손 내밀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해 줄줄 아는 신앙으로 올 해에는<함께 지어져 가는 예중교회>와 예중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22 / 정한조 목사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된 노동을 계속 해야 했던 애굽에서의 노예살이는 몹시도 모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이루실 때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셨던 것은 단지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즉 출애굽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허락하여 만들게 하신 것이 성막입니다.
성경에서 성막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은 장막이었습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이동시설인 천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십계명의 돌판이 있다고 하여 증거의 장막 또는 증거막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 주셨기 때문에 회막, 즉 만남의 천막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소, 하나님의 집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 성막의 전체 크기는 동서 방향으로 100규빗, 남북 방향으로 50규빗입니다.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45.6센티미터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동서 방향으로는 45.6미터, 남북 방향으로는 22.8미터, 그 넓이는 약 1,040제곱미터입니다. 이것을 평수로 말씀드리면 약 315평입니다. 우리 교회 양화진봉사관과 그 뒤에 있는 1별관 그리고 봉사자 식당인 소별관 땅을 모두 합하면 약 300평 정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소가 그 정도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장인 장정만 해도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대부분 가족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수많은 잡족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사람들의 숫자는 최소한 200만 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집은 315평이었습니다. 그것도 마당까지 합친 넓이였습니다. 성전에는 아주 중요한 공간이 두 개가 있는데 성소라고 불리는 성소 바깥 공간과 지성소라고 불리는 성소 안쪽 공간입니다. 이 두 공간의 가로 세로 길이가 30규빗과 10규빗, 13.68미터와 4.5미터, 62.4제곱미터입니다. 평수로 하면 약 18.9평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19평도 되지 않는 그 좁은 곳에 거하시며 사람들을 만나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에 기숙사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까 살 곳이 없었습니다. 서울 시내와 서울 근교에 그렇게 많은 집들이 있는데 제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 동기 두 명과 함께 창문도 없는 작은 방을 얻어서 함께 1년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말씀하신 당신의 집은 315평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곳은 19평입니다. 사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 갔던 곳은 성소 안쪽인 지성소인데 그곳의 크기는 가로 세로 10규빗, 20.8제곱미터, 약 6.3평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제 단칸방이 대궐같이 여겨졌습니다. 우리의 삶이 때때로 고달프게 여겨지고 또 인생이 팍팍하다고 생각되어도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19평 속으로, 6평 속으로 오셨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용기가 되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분이 유한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것도 태어나 구유에 누우셨었던 것을 생각하면 큰 격려가 됩니다.
이동용이었던 하나님의 집이 붙박이로 바뀌게 된 것이 성전입니다. 건물 성전은 세 번 지어졌는데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 왕때 지어졌다고 하여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성전은 주전 586년 남유다가 멸망할 때에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유다 사람들이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돌아와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에서 지었다고 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성전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데 이스라엘의 통치자였던 이두메 사람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주전 19년부터 주후 63년까지 83년 동안이나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도 완공 7년만인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위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서쪽 벽이었던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보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동안이나 지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허문 뒤에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킨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를 알지 못했던 것은 제자들도 동일했습니다. 제자들은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이후로 건물 성전의 시대는 끝이났습니다. 이제는 건물을 더 이상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무엇을 성전이라 부르는지 고린도전서 6장 19절, 2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떤 건물에 이름이 붙여질 때, 그 건물에 크기나 모양, 재질보다 그 안에 누가 있는지로 명명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이 있는 건물을 우리는 병원이라 부릅니다. 또 학생과 교사가 있는 건물을 우리는 학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가장 웅장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구별되게 살아야 할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리러 오면 그들을 하나님께로 연결하여 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 주며 부당한 이득을 챙겼고 제물로 드리는 짐승들을 팔면서 터무니없는 이득을 남기며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웅장한 건물을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강도와 흡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것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삶으로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라는 주제가를 부릅니다. 그러다가 눈물의 골짜기와 절망과 실망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로 인생 주제가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을 성전으로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하나의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2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본래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밖인 아담 안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어서 그냥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전합니다. 그 터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하십니다. 모퉁잇돌은 성이나 집과 같은 건물을 지을 때 두 개의 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곳에 놓아 두는 큰 주춧돌로서 건물을 지탱해주는 기반이 될뿐만 아니라 건물을 지어 가는데 기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인 우리를 지어가는데 영원한 기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우리 각자 각자가 성전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진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을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을 드리면 이러합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성전 모양의 벽돌이라고 한다면 벽돌인 우리가 한 장씩 한 장씩 또 쌓여서 다른 더 큰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개인 성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함께 지어 가는 건물은 연합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건물을 성전, 즉 거룩한 집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는 구별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성전은 넓이나 높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모양도 중요하지 않고 재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 안에 어떤 제품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성전은 세상과 구별된 곳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가치관을 따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명성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22절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은 구별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집에 우리만 살아서는 결코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만 살게 되면 사람의 집이지 하나님의 집, 성전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에게 자녀가 열 명이 있어 그 중에 한 자녀의 집에 함께 살아야 하고 또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그 자녀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 부모는 몇 째네 집에서 함께 지내기 원하겠습니까? 무조건 첫째나 둘째네 집에서 함께 사시겠습니까? 예전에는 그랬을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넓은 아파트에 사는 자녀 집이겠습니까? 또는 연봉이 가장 높은 집이겠습니까? 아니라면 가장 공부를 많이 하여 아는 것이 많은 자녀의 집이나 사회적 신분이 가장 높은 자녀의 집이겠습니까? 아마 모두 아닐 것입니다. 아마 자녀는 부모를 중심으로 공경하여 순종하고 부모는 함께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한 집에서 함께 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 자녀의 집이 가장 넓지 않아도 괜찮고 가장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 세 끼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아서 두 끼만 먹을지라도 마음이 편한 자녀의 집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소유가 많든 적든, 사회적 신분이 높든 낮든,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 안에 거하시며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올해 우리 교회 2019년 표어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토대로 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입니다.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은 21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우리말로는 세 단어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로는 단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무를 가지고 높이 1m짜리의 물통을 만든다고 하면 모든 나무의 길이가 다 1m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하는 물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중의 한 나무의 길이가 70cm 또는 50cm라고 한다면 그 물통에는 물을 70cm, 50cm까지만 담을 수 있습니다. 모든 나무가 1미터일 때에 1미터짜리 물통이 만들어칩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로 안수 받기 위해서는 목사고시를 치러야 합니다. 시험과목은 교단마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설교, 논술, 성경, 교회사, 헌법 등을 봅니다. 모든 과목에서 합격점을 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중에 한 과목이라도 과락을 하면 다른 과목은 모두 100점을 받아도 합격하지 못하고 다음에 과락한 과목을 다시 시험을 봐야 합니다. 모든 과목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합격이 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야할 부분이 여러 곳 있습니다.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교역자와 교우님들이 자기부인과 밑가지됨을 기꺼이 그리고 자원해서 감당할 때에 우리 교회는 날로 성숙해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장년 교우님들과 청년 교우님들 그리고 다음 세대인 교회학교가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지어져가기만 하면 우리 교회는 지금보다도 10년 후 20년 후에 더 신실한 교회, 더 아름다운 교회, 더 구별된 교회가 되어서 주님 쓰시기에 좋은 주님의 손과 발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100주년기념교회와 한국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소명으로 주신 한국 교회가 200주년으로 나아가는데 그 길닦기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용인순교자기념관도 성지다운 성지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100주년기념교회와 우리 한국 사회가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있는 다양한 갈등을 해소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를 가꾸어 가기 위해서 미력이라도 보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동 담임 목회를 시작한 저희 네 명이 함께 자라갈 것입니다. 그 4인과 함께 우리 교회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함께 한국 사회와 함께 잘 지어져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공동 담임 목회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좋은 샘플이 되고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 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신약의 선지자들의 터 위에 우리들을 세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의 터를 찾아서 그 위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셔서 말씀의 터 위에 세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굳게 세워 주시기 위해서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연결이 되고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며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성령님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지어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어 가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 중인 건물이 지어져 가는한 완성을 향해 더 나은 모습으로 날마다 바뀌어 가는 것처럼 우리가 지어져 간다고 하는 것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어제보다 오늘이 더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미숙함 속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날마다 버려야 합니다. 미숙함을 버리지 않는 한 성숙함은 결코 다가오지 않습니다. 또한 바르지 못한 옛 습관, 우리의 인생을 의미없이 탕진하게 만드는 것과 이별을 고해야 우리는 지어져 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새해, 새날은 언제 맞이할 수 있습니까? 달력을 바꾼다고 해서 새해가 오지 않습니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 할지라도 새해는 오지 않습니다. 동해에서 또는 높은 산에서 해돋이를 맞이 한다고 해서 새날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어져 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맞는 오늘은 새날이 아니라 어제의 연장일 뿐이고 올해는 새해가 아니라 묵은 해의 연장일 뿐입니다.
2019년이 시작되었지만 북한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의 자국이익우선주의는 올해도 계속될 것입니다. 또한 국내의 각종 경제적인 수치는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염려를 부추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상실감, 박탈감, 눌림의 정도는 더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19년이 아무리 힘들게 여겨질지라도 또 아무리 혼란스럽게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우리는 올해를 새해와 새날로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져가는만큼 우리는 새해와 새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2019년이 날마다 함께 지어져 감으로 새날과 새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나
엡 2:20-22 / 최성규 목사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예수님과 내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교회와 나도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인천순복음교회 성도는 인천순복음교회와 분리되어도, 멀어져도 안 됩니다. 올해는 인천순복음교회가 창립된 지 26년이 되는 해입니다. 만세 전, 하나님께는 큰 비전이 있으셨습니다. 인천순복음교회를 세우실 비전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인천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불러 모을 비전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26년 전에 구체화되었습니다. 1983년 11월 8일, 인천순복음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지나간 26년 동안 인천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비약적인 성장도 했고, 건강한 성숙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되었고, 성경에 있는 효와 하모니를 찾아서 이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도들의 눈물, 땀, 사랑, 헌신입니다.
인천순복음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데에는 비결이 있습니다. 인천순복음교회의 목회철학인 5ㆍ5ㆍ7ㆍ3입니다. 인천순복음교회는 5대 비전(예배, 교제, 교육훈련, 봉사, 전도)을 품고, 5대 신앙(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예수재림)을 믿고, 7대 사명(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김, 부모ㆍ어른ㆍ스승 공경, 어린이ㆍ청소년ㆍ제자 사랑, 가족사랑, 나라사랑, 자연보호ㆍ환경사랑, 이웃사랑ㆍ자연보호)을 감당하며, 3대 축복(영적축복, 범사형통, 육체적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난 26년 동안 5ㆍ5ㆍ7ㆍ3을 위해 달려왔고, 하나님은 양적, 질적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인천순복음교회는 계속해서 5ㆍ5ㆍ7ㆍ3을 바라보며 달려갈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5대 비전을 내 비전으로 삼고 달려갈 것입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기업이든 비전이 명확해야 합니다. 비전이 불투명하면, 미래도 불투명합니다.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재능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실패를 만나는 이유는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교회의 비전이 내 비전이고, 교회의 사명이 내 사명입니다. 비전을 찾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교회의 비전을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예수님의 비전에 자신들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안디옥교회 성도들도 교회의 비전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선교비전을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했고,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 비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받읍시다.
첫째, 예배
인천순복음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우리가, 성령 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 우리가 제일 우선해야 할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모든 사역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사람을 통해 예배받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왜 중요합니까?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애타게 찾으십니다.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에 그저 왔다 그저 가서도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배자로 세워주십니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수 22:5)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고, 하나님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하여 예배드립시다. 예배가 내 삶의 우선이 되게 합시다. 예배가 내 삶의 첫 번째 비전이 되게 합시다. 예배의 영광이 회복될 때, 우리 인생도 회복됩니다. 예배 우선의 삶이 복된 삶입니다.
둘째, 교제
인천순복음교회는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거룩한 교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요일 1:3)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교제란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도 교제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자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사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고 말씀합니다. 나 홀로 신앙은 슬픈 신앙입니다. 사자성어 중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곧 악한 것은 쉽게 물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세가 다가올수록 교회와 가까워져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 가깝게 지내야 합니다.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성경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고 말씀합니다. 너가 있어야 내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철골이라도 볼트와 나사로 고정해야 집도 세워지고, 교량도 세워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볼트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너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면 교제가 됩니다. 우리 모두 용납과 용서로 사랑의 교제를 시작합시다. 성경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고 가르칩니다. 서로 교제할 때 자기 신앙이 성장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습니다. 악한 마귀를 능히 대적할 수 있고, 주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제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1,12)고 증거합니다. 서로가 교제하고 하모니하면, 어떤 어려움이든지 극복하며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인천순복음교회는 앞으로 30주년, 50주년, 100주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바는 교회의 비전을 내 비전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꿈꾸고 계십니다. “인천순복음교회가 있기 때문에 모든 가정이 행복하다, 관교동이 복음화된다, 인천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선교하는 나라가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증거합니다. 인천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을 더욱 찬미하는 교회가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될 것이고, 성령운동하는 교회가 될 것이고, 상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두 함께 성령의 힘으로 달려갑시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엡 2:19-22 / 김태복 목사
때때로 지식이 있다는 교인들 중에 이런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를 꼭 출석해야 교인입니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믿고 언제나 말씀도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잘 출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면 오히려 상처를 받고 믿음이 더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물론, 가장 위로를 주어야 할 교회가 이렇게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실망을 주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한 교인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관(觀)을 바로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바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를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는 외인이요, 손이었습니다. ‘외인’이란 모르는 사람,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요, ‘손’이란 외국인, 이주자, 유랑자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우리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지 않은 불법체류자였기에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불법체류자가 많습니다. 저들은 경찰이 붙들어 가지 않을까 불안하게 삽니다. 주인으로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지도 못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도 미국에서 불법으로 체류함으로 많은 고통 가운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여도 월급을 절반도 못 받고 잘못하면 추방을 당할까 늘 불안에 쫓긴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런 불법 체류자들이 많은 고생 끝에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으면 너무나 기뻐서 큰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미국에서 영주권과 시민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시민권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영주권을 받은 지 5년이 지난 후 시민권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영주권을 갖고 있던, 시민권을 갖고 있던 둘 중 하나만 있으면 학비는 유학생들의 3분지 1 정도밖에 내지 않는 것이나 취업 가능한 것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은 미국에서 영주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되 정치에는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가 망하여 그 나라로부터 모두 도망칠 때 미국은 자기 나라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을 대사관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을 협조하던 사람이라도 시민권이 없는 자는 제외됨으로 공산치하에서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노년이 되면 한 달에 몇 십 만원의 연금을 줍니다. 그만큼 시민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과거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불법체류자로 영원한 지옥으로 추방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더 이상 외인이나 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과 같이 동일한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란 뜻은 거룩한 무리입니다. 멸망 받을 세상 사람들 틈에서 성별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란 건물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이 없어도 하나님이 택하신 성도들이 어느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그 분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우리를 택하실 때 성품이나 외모, 학벌이나 높은 지위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 택하신 것은 너무나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당당히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민권을 가진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실 때까지 특별히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이 마28:20에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다가 주님이 보내신 하나님 나라 헬리콥터인 불 수레를 타고 그 화려한 나라 천국으로 올라가 영접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과거 마귀의 노예로 살면서 비참한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바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양자가 되면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참여하고 아버지의 권한에 따라 많은 혜택을 누립니다. 어제까지 판자 집에 살면서 라면이나 싸구려 빵으로 연명하던 아이가 부자의 양자가 되면 수백평의 잔디밭이 있는 고급 주택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는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줄 때 양자도 똑같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벤허’라는 영화를 본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로마제국시대, 유다 벤허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명문 유태가문의 아들이었는데 벤허의 옛 친구인 멧살라가 새 총독으로 부임한 뒤 서로 우정이 금이 가면서 벤허의 가족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벤허는 노예로 팔려갑니다.
노예로 팔린 이상 이제 살아날 가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5년 후 벤허가 탄 노예 함선을 해적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벤허는 로마 함대사령관을 구합니다. 그 일로 인해 사령관은 벤허를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밤낮 매를 맞으면서 노를 젓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가 하루아침에 사령관의 아들이 되니 그 권세는 얼마나 막강합니까?
결국 고향에 돌아와 멧살라에게 복수하고 가족을 모두 살리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의 노예 신분으로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막강합니까?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담대히 믿으십시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정글에서 주를 위해 일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홍수 때여서 강물은 가슴까지 차올랐습니다. 모슬렘교도와 이교도들이 강둑에서 서 있다가 웃어대면서 “하하하, 오늘이 저 친구 장사 날이군요.” 그 형제가 강물을 거슬려 건너가려고 애를 쓰는데 악어 떼가 그를 삼키려고 접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어들은 1-2미터쯤 접근해서는 꼬리로 그 형제를 박살내려고 하였습니다. 악어들이 꼬리로 치는 힘은 카누가 반 동강이 될 정도입니다. 악어들이 모여들었을 때 이 형제는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에 이 형제가 막 16:18을 기억하고 그 위기의 순간 담대히 서서 외쳤습니다. “이 악어들아, 예수 이름으로 내가 명하나니 이곳을 떠나가라!” 그러자 악어들은 획 방향을 돌리더니 헤엄치며 사라졌습니다.
강둑에서 구경하던 모슬렘교도와 이교도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악어들이 어떻게 저 사람에게 복종하는가?”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런 권세가 주어진 것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담대히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교회를 하나님의 건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열심히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고 신약 초기에 선지자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최대교회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행I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 선지자들' 행21:9에 보면 빌립 집사의 딸 넷이 있었는데 다 선지자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I2:10에 보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시에 성령 받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복음을 처처에 증거 하여 교회의 터를 닦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기초 돌이요, 벽과 벽을 연결하는 중심돌이며 또 돌에 다 건축주의 이름을 새겨서 건물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돌입니다. 건물의 제일 중요한 머리 돌입니다.
그 돌을 빼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그와 같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해서 터를 닦은 후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성도들이란 벽돌이 하나씩 쌓여짐으로 교회가 되어져 간다는 점입니다. 21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 했습니다.
건물이 온전한 건물이 되려면 기초 돌을 중심해서 모든 자재들이 잘 연결시키어야 합니다. 벽돌과 벽돌, 목재와 목재, 보와 석재, 앵글의 철재도 연결되고 철과 콘크리트가 연결되고 연결이 잘 되어야 온전한 건물이 됩니다. 구약의 성전에 골방도 있고 광도 있고 제사장의 방도 있고 곡간도 있고 이것이 다 연결되어 성전이 되어 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작게는 교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연결됨으로 교회가 되고 크게는 교회와 교회가 모여서 노회와 총회라는 큰 교단이 되고, 교단과 교단이 모이어 한국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좀 더 나가서는 세계 교회가 모여서 연결되어 세계적 교회가 되고 세계적 교회와 천국 교회가 연결되어 우주적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 하나가 교회를 이루는데 한 단위가 됩니다. 물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시내가 모여 강이 되고 강이 합하여 바다가 되어 큰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많은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이 교회 건물 안에는 보이는 기둥이나 벽도 있고 창이나 지붕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도 전기 줄이나 철근, 못이나 나사 등, 많은 자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데 모든 성도들이 다 필요합니다. 어느 분은 ‘나 같은 것은 교회에서 아무 필요 없는 존재야, 배운 것도 많지 않고 재산도 많지 않으니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고 할지 몰라도 아닙니다. 작은 나사 하나가 빠짐으로 건물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각 개개인이 교회를 이루는데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보내신 줄 알고 각자 맡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한 두 교인에 의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 개개인의 끊임없는 기도와 전도와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정신에으로 봉사 활동이 전개될 때 서로 서로 힘이 연결되면서 교회는 성장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구역과 남여선교회들, 교회학교와 찬양대원들, 전도자들과 양육자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방이나 주차장에서 앞장 서 일하는 충성자들 때문입니다.
또한 토요일마다 교회당이나 화장실을 청소하는 분들, 심지어 연노하신 한나회 회원들의 주보봉사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무슨 직책이 맡기셨습니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줄 알고 충성하십시오. 때로 목회자나 당회, 교인들은 몰라주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언제나 보고 계시다가 때가 되면 더 달란트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 백사겸씨는 옛날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함으로 예수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합니다. 얼마나 충성했는지, 어느 해는 선교사가 앞장서서 교회 건축을 위해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이 약하므로 너무나 건축이 어렵습니다.
그 때 백사겸 씨는 자기 살림도 어려운 중에 농토 1,000평 있는 것을 몽땅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그 때에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식구들도 얼마나 무모한 믿음이라고 타박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가정을 책임져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백사겸 씨가 아주 가난하게 사신 것을 보고 선교사가 교회 사찰로 그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머리가 명석하고 비전이 있는지라 미국 유학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낙준 박사가 나타나 한국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사람을 바라보고 충성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 봉사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책임져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2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어떻게 교회가 형성되어지는 가의 원리를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작게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된 우리 안에 성령이 내재하여 역사함으로 성도 개인이 주의 성전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크게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인해 성도된 자들이 모일 때 그 안에 성령이 역사 하고, 하나님이 같이 동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성령이 내재하여 역사하시는 곳이고 성부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 성도들은 그의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절에서는 교회가 건물로 표현되고 예수님이 머릿돌로 표시한 반면, 고전1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몸 안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각자 여러 가지 지체역할을 담당함으로 공동체를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죽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성령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다음, 그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거기에 성령이 역사하도록 하심으로 교회가 생명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하고 빛나는 교회를 세우고 화려한 예배를 드릴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독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퀠른에 있는 도시의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그 성당은 서기 873년에 완성되었다가 400년 후에 1248년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약 300년 후에 1510년에 다시 이 교회를 수축되어 1880년에 완성됩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 제2차 세계 대전당시에 공습에 의하여 파괴되고 그리고 지금 다시 짓고 있다고 합니다.
야기를 들어보면, 관광객은 엄청나게 몰려들므로 수입은 굉장하지만, 신자들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유명한 로마 베드로 성당도 관광객이 몰려들어 메어터지지만, 주일날 예배드리는 신도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실 리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건물,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교회란 단수가 아니고 복수라는 사실입니다. 두 세 사람이 이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만이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떠나서 아무리 혼자 거룩하게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도 없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골방에서나 혼자 예배드릴 때는 강하게 역사하시지만, 교만하게 혼자 예배드리는 때는 성령이 역사 하실 리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같은 신앙고백으로 예배드릴 때, 그리고 서로의 연약함을 대신 지는 섬김의 삶을 나눌 때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시면서 너도 뜨거워지고 나도 뜨거워지는 역사를 체험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지어져 가고 세워져 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추석연휴를 모두 잘 보내신 줄 압니다.
저의 가정은 어머니가 아직도 불편하심으로 춘천에 가지 않고 집에서 보냅니다. 추석날은 숯불을 사다가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제가 숯불 당번을 했습니다. 손님들이 8시에 오도록 되어 있는데 빨리 피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불 피우는 요령을 알게 되었는데 번개탄을 피운 후에 모든 숯을 그 위에 쌓으니 활활 붙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것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모이니까, 너도 나도 뜨거움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언제도 말씀 드린 예화입니다. 존 맥아더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전에 매우 성실하게 교회를 참석하던 사람이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교회에 참석하고 있지 않은 한 남자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이어서 그들은 불가에 앉아 몸을 녹이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이 신자에게 “요즈음 주일날 교회에서 당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자주 교회를 빠지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이 매주 교회에 나왔으면 합니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난로 옆에 있는 부젓가락을 집어 미닫이를 열고는 모든 석탄들을 흩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타오르던 석탄들은 모두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그는 “이것이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모임에서 떠나면 당신의 불은 곧 꺼져 버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크게 깨닫고 모임에 열심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베풀고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그의 구속된 백성의 회중 가운데 함께 모일 때에 너도 뜨거워지고 나도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모이기에 힘쓰십시다. 특히 이번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모여 기도함으로 성령으로 뜨거워지는 것은 물론, 놀라운 응답의 열매를 맺으시는 기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족이 누리는 유익
엡 2:19-22 / 김근중 목사
2006년 새해 첫 날 첫 주일 주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창녕의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를 기원합니다. 새는 높은 창공을 날면서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2006년이라는 희망호를 큰 날개로 도약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해를 인도하셨던 예수님이 새로운 한 해 동안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활짝 열린 하늘 문으로부터 귀한 은총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고 새로운 한 해의 공간에 첫발자국을 내딛는 마음으로 소망의 한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교회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외인, 구경꾼, 손님처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니라”
사회의 어떤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는 입회비를 내고 매달 회비를 내어 회원자격을 유지하는 회원제도와 다릅니다. 단체의 회원은 회비를 안낸다든지 회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회원자격을 잃게 되지만 교회의 가족은 회비로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왜 가족이라고 하는가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고 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족이 될 때의 유익은?
창녕교회의 가족이 갖는 5가지 유익들
1.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한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시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도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실까요? 부자나 학자나 권세자나 인재를 찾으시는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늘 하나님께 선택받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첫 단추입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뒤가 다 틀리게 됩니다. 좋은 신자의 표지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에 “주여, 예배에 성공하는 인생 되게 하소서” 가 우선순위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는 법 4가지
1)미리 준비하라: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준비된 만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준비하고, 옷도 준비하고 헌금도 미리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실패하지 않도록 매 예배시간마다 예배를 위해 집사님들을 중심으로 한 기도 정병단이 있습니다.
2)시간을 늦지 말라: 시간이 늦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더욱 나쁩니다. 조금만 일찍 서둘러야 합니다. 비행기 5분 늦어 못 탄 적 있습니다.
3)예배시간에 집중하라: 생각이나 행동 집중해야 합니다. 일주일의 168시간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시간입니다. 사단은 할 수 있으면 우리의 예배시간을 방해합니다. 몸은 와 있는데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4)말씀을 기억하라: 예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간은 설교말씀 시간입니다. 이 말씀을 설교노트를 활용해 참고하고 메모하면 말씀이 훨씬 더 귀에 잘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노트를 잘 보관한 다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신앙생활에 좋은 교과서로 삼으십시오.
2.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해 준다.
살전5:10,1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벧전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體恤)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람이 살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들을 혼자 해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형제들을 통해 도움을 주고받기를 원하십니다.
세 마리 소와 사자
검은 소, 붉은 소, 얼룩소 세 마리는 언제나 함께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만 엿보았습니다. 이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풀밭에 얼룩소가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사자는 가까이 다가가서 은근한 목소리로 세 마리의 소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자기라면서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힘을 합해 도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자는 얼룩소에게 이런 거짓말을 해놓고 붉은 소와 검은 소 있는 데로 가서 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기운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고 두 마리 소에게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소는 얼룩소의 말이 건방진 소리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함께 놀지 않았고 결국 사자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 이솝의 '세 마리의 소와 사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푸라기가 많으면 코끼리도 묶을 수 있다” 라는 영국의 속담처럼. 비록 낱낱의 힘은 약하지만 단결하면 강한 힘을 낳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단결의 힘은 서로 믿고 도우며, 한 가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모두가 참여할 때 더욱 큰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소그룹에 소속이 되는 것 중요합니다. 교회가 커져갈수록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쉽게 소그룹에 소속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구역, 남성다락방, 부부다락방, 남녀선교회, 각 사역의 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의 소그룹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적신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가장 중요한 것을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이고 가치 있는 것들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3. 나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준다.
히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데 나아갈 지니라”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3:10에서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자라는 것은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배워야 압니다. 또한 자라려면 말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해부터 말씀을 읽고 큐티하는 시간과 기도하는 1시간, 매주 봉사 1시간, 매월 전도 1명을 위해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나의 사역을 발견하게 해준다.
엡4:12“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2: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나를 걸작품으로 지으셨습니다. 작품과 상품의 특징은? 작품은 하나지만 상품은 대량생산입니다. 그래서 상품은 시간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지만 작품은 갈수록 그 가치가 귀하게 평가되고 비싸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유하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점이 고유한가요? 사역과 관계되어 우리는 다른 사람과 크게 3가지가 다릅니다. 열정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고, 스타일이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느냐? 입니다. 열정이나 은사나 스타일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임명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에 맞는 사역을 발견해서 그 사역을 할 때 내 기쁨과 열매는 배가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우리가 꼭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5. 내 생애의 사명을 이루게 해 준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롬10:13,1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영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우렌 경이 성 바울 대사원을 건축할 때의 일입니다. 많은 물질과 인원을 동원해서 큰 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크리스토퍼 우렌 경이 평복을 입고 한창 일이 진행되는 공사 현장을 혼자서 시찰을 하면서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한 석공이 무표정하게 대답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6자 길이에 3자 폭의 돌기둥을 깎고 있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한 석수가 아니꼽다는 듯이 대답을 합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이 짓을 해요” 또 다른 곳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선생님 보시는 대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렌 경의 지휘 밑에서 건축되는 이 웅장한 성 바울 대사원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꼭 같은 일을 해도 사명감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이렇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명감이 있느냐 없느냐는 생명이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유명한 프랭클 박사는 2차 세계 대전 때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독일의 항복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에 프랭클의 말을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랭클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인생을 긍정한다. 인생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묻기 전에 내가 인생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묻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케네기가 취임식 때에 인용하여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프랭클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안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프랭클 박사처럼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은 그 고통을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확신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항상 동행하십니다. 창녕교회의 가족이 되어서 누리는 것은 오직 사명감을 가질 때 풍성할 수 있습니다.
호도를 쪼개서 안을 들여다보면 호도 속살이 껍질 속 구석구석, 틈새마다 꽉 채워져 있습니다. 껍질 때문에 크기나 모양을 스스로 정하지는 못해도, 그 한계 속에서 최대한 성장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호도처럼 주어진 삶의 공간에서 꽃을 활짝 피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공동체 안에서, 창녕교회 가족으로서 성장하면서 마음껏 사명을 통한 유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만 더...
"그대가 받는 보수보다 조금만 더 일하라.
그대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하나님께 바쳐라.
그대가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열심을 내라.
그대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보다 조금만 더 높은 목표를 잡아라.
그대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조금만 더 가까이 하라.
그대의 불평과 불만보다 조금만 더 많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라.
그대가 땅의 것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조금만 더 위의 것을 사모하라."
이와 같이 되면 여러분의 섬김이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우리 교회의 꿈을 이루고 여러분의 꿈을 이루게 만들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어떻게 섬김의 삶을 살 것인지 섬김의 삶을 10계명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섬김의 삶 10계명
1. 항상 힘들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늘 힘이 되어 주는 사람 되기를 힘쓰라.
2. 항상 끌려 다니는 자가 되지 말고 늘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3. 항상 돌봐줘야 할 수준에 머물지 말고 늘 돌봐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라.
4. 항상 넘어지는 자가 되지 말고 늘 세워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5. 항상 받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는 것에 늘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6. 항상 약점만 보고 불평하는 자 되지 말고 늘 장점을 보고 격려하고 용기 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7. 항상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고 늘 할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8. 항상 상처받고 꼬여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늘 회복하고 풀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9. 항상 분열시키는 자가 되지 말고 늘 하나 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10. 항상 열 받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늘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일손 다득이요 일사 다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이 손해 보면 많은 사람이 이익이요,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꿈을 이루고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 섬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떻게 교회의 가족이 될 수 있는가?
사명선언문: 이웃을 주님께 인도하여 헌신된 제자가 되게 한다.
5대 비젼: 예배를 통해 주님을 높인다.
교제를 통해 하나를 이룬다.
성장을 통해 제자로 자란다.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섬긴다.
증거를 통해 주님을 전한다.
또 하나의 가족
엡 2:19-22 / 권영국 목사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나왔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도 없고 주택가도 아닌 남산에서 매주일 이만한 인원이 모여 예배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작한지 4년째에 3000명이 넘는 인원은 이런 곳에서는 최대한 모일 수 있는 인원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목이 좋은 신도시 지역에서 시작했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모였을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모임에 나가서 성도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면. 열심히 사역을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분인데도 “아직도 이 교회가 내 교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고 고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큰 틀은 어느 정도 잡았습니다. 예배드릴 장소도 있고 자녀들을 양육할 <청어람>도 장만했습니다. 사역도 웬만한 큰 교회 못지않게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큰 틀의 교회는 있어서, 나는 <높은뜻 숭의교회>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말하고, 또 헌금도 내고 하는데, 내가 들어가서 직접 만지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회는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외형적 성장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공동체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를 알고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려면 시간이 지나야만 합니다. 모이는 숫자로 보면 20년 이상이 넘은 교회인데 실제는 4년째 접어든 교회입니다. 외형적으로 20년 된 교회에 맞추어 그 내용을 채우려면 똑같이 20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기에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전 교회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거나, 너무나 힘들게 사역하였기 때문에 여기 와서는 좀 쉬자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믿음을 충전 받고 위로받으려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예배만 드리고 말씀만 듣고 돌아가는 일도 한때이지 그것만으로는 교회의 참 맛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한계를 발견하고 교회를 옮기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교회를 만들어 보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좋은 교회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과 우리의 헌신과 인내라는 대가만 지불하면 반드시 좋은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설계도이며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인 사도들이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그 모델입니다. 그 교회는 첫째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체란 쉽게 말씀 드리면, “나 없이는 네가 못살고 네 없이는 내가 못사는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부릅니다.
권속이라는 헬라어 <오이케이오스> 는 ‘가족, 집’이라는 뜻입니다. 가족이야말로 성경이 교회를 묘사하는데 사용한 가장 중요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가족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이며, 그 가족의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난후 영적 가족이 생겼습니까? 서로 얼굴이나 알고 만나면 인사하는 정도말구요.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고, 만나면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고 나를 붙들어 줄 사람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룹이 있습니까?
이 교회를 다녀도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상태, 무리 속에 섞여 예배드리지만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저 혼자 왔다가 돌아가지 않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고, 내게 찾아와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
그래도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의 과제는 <영적 가족>을 만드는 일이라는데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3000명을 한 가족으로 묶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가장 작은 모임에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열 명 안팎으로 모이는 <순>입니다. 하나의 순이 영적 가족이 되면 또 다른 영적 가족으로의 <순>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순이 거미줄처럼 얽혀지면 전체가 하나의 대가족, 믿음의 큰 가문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순>은 교회 속의 ‘작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순>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순을 통해서 <높은뜻 숭의교회>를 비로소 경험하게 됩니다. 순은 첫째 가정에서 모이기 때문에 <가정교회>이며, 둘째 구성원들이 서로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가족입니다. 가족 같은 교회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가족 흉내를 내는 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순은 진정한 가족이 되어야만 맞습니다. 셋째, <순> 은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넷째, 목사 혼자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이용하여 사역하기 때문에 만인 제자장직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시지 말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교회 속의 작은 교회, <순>을 세우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높은뜻 숭의교회>라는 간판은 있습니다. 그 간판에 걸 맞는 틀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교회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질 수 있고 느끼고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교회를 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두 번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1:14)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말씀이 피와 살이 되어 이웃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피부와 살을 취하셨습니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온갖 도깨비와 괴물들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는 얼른 부모님이 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서 손을 잡고 다시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방에 불을 켜준 다음 아이에게 말했다. “애야, 무서워할 것 없어, 넌 혼자 있는 게 아니란다. 하나님께서 네 겉에 계시거든.” 그러자 그 아이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몸이 있는 사람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주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지상에서 다시는 예수님을 만나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지상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 부활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성육신은 지상의 교회입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주님은 마 28:19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라고 부르지 말고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기관이나 건물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와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드신 교회는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도 대 가족, 가문 전체가 내려가기는 어렵습니다. <순> 가장 작은 교회, 가장 작은 영적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형식도 조직도 없이 그들 속으로 스며들어 갈 수 있는 <순>입니다. 그들은 그들 겉에 있는 작은 <순>을 통해 날마다 세상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 예수의 은혜를 아무리 외쳐도 세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병들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요”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가까이서 그들을 사랑해 줄 몸, 즉 그들 겉에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섬기며 돌볼 때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같은 사람은 만났습니다. 나는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당신을 통해서 예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아직도 순에 들어오지 않으신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100개 순에 평균 10명씩을 잡아도 2/3 정도가 영적 가족 없이 고아처럼, 독립군처럼 혼자 고독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의 목회적 최우선 순위는 순사역입니다. 교회 속의 작은 교회, 순을 영적 가족으로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
혹시 사람이 싫어서 이리로 오신 분들 있습니까? 그 아픈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계속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피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새로운 관계, 공동체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순>에 들어오셔야 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동체는 공기와 같이 인간이 생존하는 데 절대적인 환경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는 하나님의 존재양식도 들어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관계로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공동체가 아닙니까?
그냥 한분 하나님 유일신으로 존재하셔도 좋은데, 왜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일체가 되는 것을 택하셨을까? 그것보다 더 좋은 존재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언제나 가장 좋습니다. 공동체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존재양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맛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공동체를 깨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관계의 단절입니다. 죄는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공동체가 깨어진 결과 인간에게는 소외, 고독, 외로움, 단절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질병과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어지고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곳에 는 언제나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그런데도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 관계를 끊어놓고 사십니까? 신앙이 좋은 사람은 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모르는 채 아무 관계도 없이 모여 있는 3000명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열 명이라도 서로 친밀감을 느끼며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그룹을 원하십니까?
2. <순>은 신앙성장의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순에서는 그저 앉아 구경이나 하는 구경꾼이 없습니다. 오직 참여만이 있습니다. 가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한다. 교육에서 참여, 경험보다 더 좋은 학습방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은, 신앙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 중 일 년에 특별한 경우 한두 번 쓰고 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몇 가정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 갖추어 놓은 가재도구 들 중 상당수가 줄어 들것이며, 또 그것을 구입하는데 드는 막대한 돈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자기 신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가져야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으시고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사만 나누어 주셨다. 왜?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은 서로 섬기고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제 것 제 혼자 쓰는 데서 갖는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는 은사보다는 내게 없는 은사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내 있는 것으로 없는 사람을 섬기고, 그 대신 내게 없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언제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면 서로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한 가족으로 누리는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이제부터 <순>에 참여함으로 새롭게 발견해 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믿음의 권태기가 오는 것은 공동체 없이 혼자서 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환란이나 시험이 와도 두렵거나 떨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순장과 순원들이 나와 함께 싸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늘 패했지만 가족이 함께 나가니 언제나 이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 공동체에 과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공동체를 시작하면 다른 교회로 옮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교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 성도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일 낮 예배에는 소수의 목회자가 인도하는 공식적인 예배에 강조점이 있다. 이때에는 구성원간의 교제는 예배 순서 가운데 상징적으로 나타날 뿐, 직접 대화하거나 식사를 나누거나 할 수가 없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경험으로 끝난다. 그 결과 대부분은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있는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주기 보다는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순>을 선택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순>은 영적 가족이며,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이 자라는데 공기와 같이 절대적인 환경입니다. 결혼을 혼자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한 헌신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왜 순 공동체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가?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지금 누리는 나의 행복을 빼앗길 수도 있고, 방해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공동체에 들어가면 내가 더 많은 유익과 덕을 볼 것이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달라질 것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나는 남들에게 헌신하기를 주저하면서 남은 나에게 헌신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또한 공동체 안에서 나를 너무 노출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게 은밀한 사적인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사실 이전에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헌신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과 상처뿐이었다. 이용만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누구에게든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공동체는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아 주는 곳이다. 내가 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방어하려는 나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나입니까? 아니면 왜곡된 나입니까? 가면과 헛된 것으로 포장된 거짓 자아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껍질을 깨고 알에서 나오는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할지라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제부터의 삶이라도 진정한 해방과 자유,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가면을 쓰고 위장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정한 나 자신과 가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시간의 부족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은 하지만 결국 못하고 마는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미 다른 공동체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가정에 직장에, 학교에, 공동체는 필요한 줄 알고 다 원하지만 결국에는 거기에 들어갈 시간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어디에 가치와 순위를 매기느냐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어떤 일을 2번째로 놓으면 항상 우선순위에는 밀리고 두 번째 시간이 날 때라야 투자하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가정교회를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가정 교회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그렇게 분주한가? 그렇게 분주하게 사는데 일이 대출 끝나 가는가? 아니다, 끝도 없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일거리가 만들어 진다.
왜냐하면 본질이 만들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리 한쪽을 기브스해서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고 하자. 그러면 한번 걷기 위해서는 몸의 모든 지체가 그 한쪽 발의 역할을 대신 감당해 주어야 한다. 두 손은 목발을 짚어주어야 하고 한쪽 다리는 힘을 배로 더 주어야 하고 두 눈은 다른 곳을 볼 수 없다. 온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바쁜가? 그래도 제대로 걷는게 안된다. 그러나 다리가 성했을 때는 어땠는가? 걷는데 여유가 있었다. 각 지체가 자기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다. 교회가 영적 가족으로서의 본질만 가지고 있으면 지금 바쁘게 하는 일은 절반 이상이 줄게 될 것이다. 가족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해결하느라 또 다른 조직을 만들고 인원과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운다면 그래서 영적 가족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적게 일해도 훨씬 더 많이 성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권의 문제이다. 공동체의 성패는 우리가 어디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느냐에 달려있다.
넷째,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온 세상 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만물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도들은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교회가 나의 필요를 얼마나 잘 채워주는 가에 따라 교회를 판단한다. 그래서 그 교회가 더 이상 자신의 필요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떠나버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성도들을 가리켜서 육체에 속한 자라고 말했다. 예수는 영접했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있다. 주재권이 예수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사는 한 그의 삶은 예수 믿기 이전과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과 그 분을 위한 사역이라면 열성으로 달려들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영적훈련 제자훈련의 중심 과목은 이웃사랑이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을 통해서만 자기중심적 사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섬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섬김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깊이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길 때마다 우리는 육체의 교만과 자기중심적 성향에 어퍼컷을 날리는 것이 된다.
천국의 DNA.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강력한 유전자 코드는 섬김이다. 이 DNA가 천국의 가치를 천상에서 지상으로 전이시키고 재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순>에는 천국의 디엔에이가 들어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왜 우리는 공동체로 가야 합니까?
이제 교회 전체의 생명력을 위하여, 전통 교회 안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신약적인 교회, 초대교회의 거룩과 권능을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경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회복해야 만 한다. 가정 교회를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불신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아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한 모든 조건들의 무르익었다. 지금은 우리가 그 기회를 향하여 일어설 때입니다.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룹시다
엡 2:19-22 / 지태일 목사
어떤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가면서 이 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관심을 보이느라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무언가 벽돌을 쌓고 있는 아이를 향해서 "너 뭘 하고 있는 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어린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쉿! 아빠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것의 손을 잡고 교회에 늘 다니긴 했지만은 교회에 갈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 그러고 늘 말썽이었는데 이 만큼의 믿음이 생긴 것 같이 생각이 되어서 대견하게 여기고 한 마디 더 물었습니다. "애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에 아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빠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깨잖아요." 이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때마다 졸거나 잤던 것입니다. 그 아이 곁에는 잠을 자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교회 그러면 조용히 잠을 자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야 되니까 떠들지 말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현재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한 오래 다니었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설득을 하는데 그렇다면 진정 교회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생활 중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입니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교회는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구제기관도 아닙니다. 스트레스 해소하는 오락실도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한 가지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교회입니다. 이 '교회'라는 표현은 '완성' 또는 '완전'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들이나 성도가 모인 곳이 아님니다.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지어져 가는 성전”(22절)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뜻깊은 표현입니다.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완성된 곳이 아닙니다. 지어져 가는 곳입니다.
어느 교회도 건물이 되었던, 성도들이 되었던 완성된 곳은 없고 "다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여전히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공사중'이라는 말은 지어져 가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있고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며 전진해 가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잘 지은 교회라할지라도 아직도 고치고, 수리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제일 크다, 이정도면 됐지", "~어디에서 제일이다"하고 되어진 교회를 자랑할 때 그 교회는 이미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게 큰 무서운 병이 없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정지되고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엡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기에 앞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설명해 나갑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은 "예수는 화평이시다"라고 결정적으로 말하고, 15절에서는 "예수께서 화평을 이루신다"고 말하고, 17절에 가서는 "화평을 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화평한 가운데 주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가고 하나님의 처소로 세워져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중 당시 소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였던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운 후 무려 3년이란 시간을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하던 때를 회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에베소교회야말로 진정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되기를 그렇게 원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이상적인 교회, 이상적인 성도,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 Sunday Christian이 아닌 Everyday Christian이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오늘 여러분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를 하기 위해서, 섬기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 때를 따라 은혜 주셔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은사와 직임도 주셨음을 결코 잊지 맙시다.
엡 2:10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를 만드심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 어떤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까?.
1.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 생명력 있는 교회, 함께 하는 교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 하나가 있는데 바로 엡3:6절입니다.
엡3:6절을 보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6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지 않습니까?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라는 이 말은 교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말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선민 의식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민의식은 필요하나 그러나 그릇된 선민 의식은 과감히 고쳐나가야 하는데 예컨대 나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고, 너희들은 아니야 라는 사고(思考)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런 것들이 금을 긋고, 담을 쌓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의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하고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릇된 선민의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지체가 되는 놀라운 사실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2장의 하반부에서 이미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 11-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外人)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
다른 말로 말하면 뭡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Family), 식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가족같이 서로 도와주고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는 형제애를 말합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한 가족 된 것을 느끼십니까? 그러면 우리 찬양을 한 곡 불러 봅시다.
♬ 형제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중에 임하신 하나님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찬양집 393장)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교제하며 섬기며 일하며 손을 잡고 찬양을 부르면서 한가족 되었음을 확인하면서도 한 가족의 지체 의식을 느끼며 살아가시기를 바람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편견이 뿌리박고 있으면 가족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들이 나에게 있다면 이 시간 그것부터 치료합시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그리스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하나님 기뻐하시는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2.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팀웍(team work)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그 무엇보다도 팀웍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팀웍에 대해 예수님께서 모퉁이 돌(conner stone)이 되셨으므로 그 위에 다음 것이 쌓이고 또 쌓여서 아름답게 교회가 지어져 가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21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여기서 연결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쉬나르몰로구메네”인데 이 말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교회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 팀웍(연결)을 이루어 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팀웍이 일시적이나 단회적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영구적으로 이루어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개인플레이가 오히려 무가치할 때가 많습니다.
전 4:12에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반면 협동과 단결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룰 때 가치있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보십시오. 그들은 도저히 함께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고서는 서로 연합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 개성이 다르고, 성도, 이름도, 환경도 신분도 다르고, 사고력도 다르지만 이렇게 하나가 되어 교회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즉 구심점으로 팀웍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에 모여서 하나 하나 연결되어질 때, 조화되어질 때 우리 교회는 힘이 있는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한다면 이 또한 건강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신앙생활 하는 분들 가운데도 더러는 나그네처럼 흩어진 사람, 의무와 책임감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보에 실었습니다만 요즘 시대는 별의 별 교인들이 다 있잖습니까? “이런 교인들이 되지 맙시다”에 아멘 하시기 바람니다.
1) 송아지 교인
송아지는 주인이 끌고 가려면 잘 따라 주지 않고 힘이 든다. 교인도 그런 부류가 있다. 기도 좀 합시다 하면 그게 맘대로 됩니까?, 십일조 좀 합시다 하면 그게 맘대로 됩니까? 전도 좀 합시다 하면 그게 맘대로 됩니까?
2) 소쿠리 교인
물에 소쿠리를 넣으면 물이 소쿠리에 가득찬 것 같다. 그러나 소쿠리를 들면 물은 다 빠져 버리고 빈 소쿠리뿐이다. 교인들중에도 주일에 교회오면 은혜받은 것 같고 신앙도 좋은 듯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 들으면서 아멘을 연발한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면 불신자나 마찬가지다. 부흥회 때도 마찬가지다. 집회 때는 은혜받은 것 갖고 신앙 좋은 듯 하나 마치고 나면 여전하다.
3) 염소 교인
염소는 물을 싫어한다. 강을 건너기 싫어하고 비만 오면 야단이다. 귀에 물 들어갈까봐 겁을 먹고 울며 야단을 하는 것이다. 교인들 중에도 비만 오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비만 오면 예배 시간에 빠지는 것이다. 우기 때는 교회 잘 나오지 않다가 날씨가 쾌청하면 나온다.
4) 개구리 교인
개구리는 여름이 한 철이다. 여름 벼논에 밤새도록 운다. 시끄럽다. 그러다가 추위가 오면 땅 속에 들어가 버린다. 경칩이 지나야 나온다. 교인들 중에도 시끄러운 교인들이 있다. 나오면 시끄럽다. 그리고 추우면 안 나온다. 날씨가 풀려야 교회 출석을 한다. 이런 교인은 개구리 교인이다.
5) 나팔꽃 교인
나팔꽃은 아침에만 핀다. 해가 떠오를 때 핀다. 해만 지면 시든다. 그와 같이 교인들 중에는 주일 낮 예배만 나오는 교인들이 있다. 새벽 기도회나 금요 철야 기도회, 수요일 밤 예배 등 공식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
6) 꽈배기 교인
꽈배기는 몸을 비틀어 놓은 거다. 교인들 중에도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설교가 30분만 지나고 나면 그 때부터 몸을 꼰다. 뒤틀고 못견딘다.
7) 인력거 교인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옛날에 인력거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택시 역할을 한 때가 있었다. 인력거는 사람이 끌어주어야 간다. 그와 같이 누군가가 끌어 주어야, 심방가야 꼭 교회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인력거 교인이라고 한다.
8) 미꾸라지 교인
물고기 중 제일 미끄러운 물고기다. 손으로 잡으면 쑥쑥 빠진다. 교인이나 제직 중에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운 사람들이 있다. 특별 연보 할 때 쏙 빠진다. 중요한 회의할 때 쏙 빠진다. 교회에 일이 있으면 쑥 빠진다.
9) 두더지 교인
땅 밑을 파고 들어가는데 전문이다. 두더지가 파 놓은 땅 위는 금방 무너진다. 표면적으로 아무렇지 않은데 그 사람이 작용하면 어디든 결국 허물어지고 그 사람이 들어간 곳은 쑥대밭이 되는 것이다. 말썽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10) 가시 교인
가시의 특징은 찌르는 것이다. 가시에 찔리면 피가 난다. 교인 중에는 다른 사람을 콕콕 찌르는 사람이 있다. 남의 약점만 찾고 그런 것으로 콕콕 찌른다. 제직회 할 때 “목사님” 계속 부르고 시끄럽게 한다. 노회나 총회에도 이런 분들이 있다. “회장” 부르며 남의 허물을 캐고 잘못된 점만 찾아내어 문제를 제기한다.
11) 저기압 교인
중에 저기압 교인은 언제나 시무룩하고 침통하다. 저기압이다. 인사를 해도 얼굴은 침침하다. “안녕하세요” “예”,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전혀 없다.
12) 양반 교인
옛날 양반은 언제나 잘난체를 하는 사람들이다. 하인들 시키기를 좋아하지 자신은 일하지 않는다. 제직 중에도 양반 제직은 교회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 시키는데 소질이 있다.
“김집사, 저것도 좀 하라고” “박집사는 무엇하나 같이 좀 하지 않고......”
13) 냄비 교인
냄비는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이는데 사용하는 그릇이다. 그런데 냄비는 무엇이나 빨리 끓인다. 대신 빨리 식는다. 이런 교인은 은혜도 잘 받고 쏟기도 잘 한다. 집회시 은혜받았다고 손뼉치고 할렐루야 아멘을 소리치다가 돌아서면 금방 식는다. 그 외에도
감투 교인 - 감투를 안주면 교회에 안나오는 교인
인력거 교인 - 심방을 가서 끌어내야만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핑계 교인 - 이렇게 저렇게 항상 핑계하며 잘 빠지는 교인
오락 교인 - 친목회, 운동 경기, 야유회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교인
벙어리 교인 - 신자 생활을 오래 해도 기도생활을 전혀 안해서 기도 인도를 못하는 교인
시험 채점관 교인 - 설교 비평과 남의 흠잡기에 우수한 교인
유람선 교인 -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광고 교인 - 사업적으로 무슨 실속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교인
묵상 교인 - 예배를 시작하며는 조는 교인
국회의원 교인 - 한 가정에서 대표로 혼자 나오는 교인
가시 교인 - 교회의 가시 노릇이나 하는 파괴적인 교인
장례위원 교인 - 부모의 장례식 예비를 위해서 나오는 교인
자! 믿음의 거울, 소망의 거울, 사랑의 거울로 점검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사는 작은 예수 교인이 되시기 바람니다.
좀 좋은 교회를 알아본다고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순례하는 유람선 교인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시겠지요. 각종 모임에 나오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어서 무척 편하실는지 모르지만 진정 그러한 분들은 나그네 신앙인으로 아무 것에도 연결된 것이 없는 어쩌면 축복과는 단절 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연결이 되려면, 팀웍을 이루려면 좀 고통스러운 일들이 따르는 법입니다. 힘도 듭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안 드는 것과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상대방을 섬기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사실 힘이 들고 어려운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맞춰 가기가 무척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삶의 비결을 배우고 또한 실천하여야 합니다.
골2:2절에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골2:19절에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엡2:22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22절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 잘 지어가야 합니다. 지어져 가는 성전 즉 교회라는 곳은 완성 또는 완전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곳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도 완성된 곳은 없고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동시에 공사 중이라는 말은 지어져 가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있고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우리 새빛중앙교회는 언제 보아도 앞으로도 계속 여전히 공사중인 교회일 것입니다. 이것도 짓고 저것도 짓고 만들고 세우고 다듬고 일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모두가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고, 문제 덩어리이고, 구원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쁜 습관들을 계속 가지고 있어서 주위를 눈살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얼 말해주는 것입니까? 사람은 나와 너를 막론하고 다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씻음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완벽을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이상이자 욕심임으로 여기십시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는 서로가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말조심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 주고 칭찬하고 자랑하는 믿음의 가족이 됩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야 합니다.
사도행전13:17-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높이시고 광야 40년을 인도해 주시고 하셨지만 원망과 불평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행을 참으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참으시는 하나님, 우리도 참고 기다릴 때 좋은 날이 올줄 믿습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모두 감사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삶을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기보다는 이후의 삶이 더 감사할 조건이 넘치도록 생활을 활성화 시켜야 합니다.
예화) 저 유명한 인도의 정신적, 민족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독실한 예수님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숭배하면서 왜 전형적인 교인이 되지 않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사실 이 말은 좀 핑계도 있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가 교회에 안 나가는 이유 가운데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 안드루스라고 하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하여 그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간디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예배당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그를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그 후로는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생활 중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입니까?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이 교회는 완성된 곳,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그리스도안에서 계속 아름답게 지어져 가는 교회가 될줄 믿습니다. 모퉁이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함께 연결되어 서로 지지하고 사랑하고 격려하며 칭찬과 사랑으로 함께 하는 영적으로 아주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실줄 믿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축복이 주님앞에 서는 그 날까지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 2:19-22 / 박덕기 목사
우리가 예수 믿기 전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엡 2장에서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 ‘썩어질 구습과 죄악 된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살던 사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철저한 노예였던 사람’ ‘죄악 된 육체와 마음의 본능을 따라서 살던 사람’ 그리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지옥의 땔감이라 하여서 개 취급을 받았던 이방인’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외인이었던 사람’ 그 때문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전에 멀리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게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외국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국인은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 거처하는 사람입니다. 그 나라 태생이 아니고, 그 나라에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여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얼마나 멸시를 당합니까? 아니 같은 동족이라도 밀입국한 중국 교포들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는가를 이미 보도를 통해서 잘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외국인! 한 마디로 그 생활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외인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습니까?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십니까? 웬일인지 모르게 교회에 나오면 편안한 마음을 느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외국인이 아니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나라의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택이니 소명이니 중생이니 혹은 칭의나 성화, 또는 은혜니 구속이니 기업이니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신자가 아닌데도 이 모든 말들이 마치 방언처럼 들린다면 곤란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면, 그 나라의 법률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다윗처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외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를 하나의 국가, 하나의 나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새롭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관통하여 흐르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들을 살펴보십시오. 산상 보훈은 또한 천국 시민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가르침은 천국에 관한 것이었고, 백성들이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시민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과 동일한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면 1)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갈 1:4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셨도다.”고 했으며, 골 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2)우리는 하늘나라의 임금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으로 장소적인 개념이 있고, 다른 하나는 어떤 상태적인 천국으로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곳에 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개인이나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하늘나라의 시민권이 가지는 특권들입니다. 미국의 시민권만 갖고 있어도 그 혜택과 특권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시민들로서 우리가 가진 특권들에 비교할 때, 그것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우리는 ‘왕 중 왕이요 만유의 주되신’ 임금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상의 어떤 통치자 중에 어느 누가 그와 비교할 수 있으며, 그토록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영도자가 있습니까? 우리의 수도는 공해로 가득 찬 서울이나 런던이 아니고, 파리나 워싱턴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사요, 하나님의 벗이라 불릴 정도로 구별되었던 사람인 아브라함과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세, 다윗, 엘리야, 예레미야 등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어거스틴, 칼빈, 루터, 낙스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과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영예로운 시민들입니까? 여러분은 이와 같은 하늘나라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더 이상 하늘나라에 대하여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앞서 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4)하늘나라 시민의 안전성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5)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 왕을 대표해야 합니다. 고대에 있어서 로마 시민은 어디를 가든지 특유한 외투를 착용하고,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자신이 로마 시민임에 유의하여, 그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삼가 노력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위대한 성도들과 동일한 하늘나라의 시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가정과 국가와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국가는 법률적인 관계이고, 가정은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가정을 묶는 것은 피 입니다. 그것은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구원함을 받고 지옥에서 구출 받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정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시민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곧 그분의 식구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보다 더 영광스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것보다 더 영예롭고 더 존엄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2)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아들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혈육에 속하셨고, 따라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 놀라우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형님이신 것입니다. 어깨가 좀 으쓱하지 않습니까? 3)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후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이 너무나 기묘하여서, 성경에서조차 그것에 대하여 조금 밖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할 때, 우리의 언어 역시 타락 되어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렇게 상세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형상을 닮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0-22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권속과 가정에서 그들이 거하는 집으로 옮겨갑니다. 어떤 점에서 가정에 대한 표현보다, 집에 대한 묘사가 더 강력한 교훈을 줍니다. 가정의 식구들은 모두 동일하지가 않습니다. 개성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릅니다. 또한 가정은 식구들의 사망 등으로 인해서 파괴되기도 합니다. 가정의 결속은 그 정도로 느슨한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에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요점은 사도가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묘사하고 있는, 바로 그 결속입니다. 가정의 식구들은 서로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툴 수도 있고, 심지어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에서 기둥이나 돌들을 빼어내면 그 건물은 붕괴되고 맙니다.
교회를 하나의 큰 건물에 비유하는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교회는 건축하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건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현시대에 행하시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한 직후에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건물을 세우고 계시며, 그 건물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2)그것은 하나의 생명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여기 ‘되어 가고’라는 말은 ‘자라가고’라는 뜻입니다. 건물이 자랄 수 있습니까?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자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꽃이 피어나고 풀이 자라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자라나고 진전하며 확장되어 나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이것이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건물의 외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오직 그 전이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거룩이 바로 성전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전이며,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언제나 거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결은 성전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요, ‘거룩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건물을 짓는 데는 터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의 터는 반드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워지고 또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사도는 특별히 부름을 받아,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복음의 전도자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은 어떤 특별한 권능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적들을 행하고 교회들을 설립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했고,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 자들입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선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선지자들은 누구에게 배우거나 들은 말을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메시지를 직접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터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복음이 없으며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돌은 무엇입니까? 모퉁이 돌은 건물의 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벽과 저 벽을 연결해주는 아주 요긴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교회의 중요한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가 그처럼 보배롭고 또한 모퉁이 돌도 그토록 귀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배로운 것들로 지어야지,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짓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벽돌로 건축을 할 때에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벽돌로 짓는 식의 건축이 아닙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은 벽돌로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회에서 대량생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꺼번에 어떤 단체나 나라들이 구원받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는 취하고 저는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든 돌들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들은 크기나 모양이 다 같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들 모두 조화를 이루면서 결합되어 있고, 큰 건물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 특별히 돌로 집을 짓는 사람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그것을 다듬고 모양을 내고 맞춥니다. 때로는 잘라내기도 하고, 또는 정으로 쪼아 내기도 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1)그것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되어집니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를 모양 짓고 준비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울툭불툭 나온 옛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그대로는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지고 깎여져야만 합니다. 모가 나고, 옹고집쟁이들! 우리는 모두 어느 의미에서 채석장에서 거칠게 쪼개진 돌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모든 돌들이 모가 나고 삐쭉삐쭉한 상태로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건물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건물 안에 들어오려 한다면, 우리는 그 건물에 맞춰져야 하고, 그 건물에 필요한 형체를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그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할 또 다른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시나니” 만일 설교와 가르침으로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힘 있는 정과 해머를 가지고, 그 모가 난 부분들을 제거시키실 것입니다. 주님은 질병과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수 있고, 실패와 오해와 기타의 방법들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어떠한 사람도 그 건물에 마땅하지 않고, 또한 그 벽에 붙어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분명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에, 왕상 6:7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는 동안에 어떠한 시끄러운 소리도 들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입니까? 로이드 죤스 목사는 그것을 현대적인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생명에 관계되는 진리에 관해서 교회 안에서는 어떠한 토론이나 논박이나 불일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방망이나 망치 소리나 철 연장 소리가 교회 안에서는 하나도 나서는 안 된다. 교리는 맨 처음부터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논쟁이나 쟁론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교리에 관해서 일치를 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것에 대하여 승인을 하고 승복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변론하고 싸우는 결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영원히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송정 중앙교회는 신앙과 교리적으로도 일치될 뿐만 아니라, 상호 이해와 양보와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우리 송정 중앙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교회당을 신축하는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일체의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각자의 주장과 혈기와 고집을 다 죽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땀과 눈물과 기도와 물질을 드려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먼저 짓는 주님의 일에 열심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남은 여력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성도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유년 주일학생들로부터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2000여 성도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같이 하여 함께 이 아름다운 역사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송정 중앙 교회의 일원인데, 우리의 모난 것, 울퉁불퉁한 것, 거칠고, 아름답지 못한 인격들이, 날마다 말씀으로 다듬어지고, 순간마다 성령의 불 칼로 조각되어서, 신축 중에 있는 예배당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 2:19-22 / 이종철 목사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그의 몸된 교회도 영광스럽습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임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움직여 가는 방식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비밀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 비밀의 경륜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고, 갈라졌던 것들을 통일시키고, 허무한 인생을 충만케 하려는 계획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경륜이 교회라는 역사적 실체를 통하여 세상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영광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바로 이 교회의 신비와 영광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18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장 17절에서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는 교회의 영광을 "너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다"라고 말씀함으로 교회의 영광됨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나라의 시민
먼저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 믿기 전의 우리 모습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이방인이었다, 무할례당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들이었고, 세상에 소망이 없던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우리의 과거를 들추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다니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성도간에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고,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것도 너무 많거나 자주 반복되면 좋은 법을 모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시들해졌습니까?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과거를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는지.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믿지 않고 살고 있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분명히 외칩니다. '너희가 전에는 외국인이요 나그네이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너희는 이제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시민이다.' 시민과 외국인의 차이를 아십니까? 외국인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찍힌 사람은 어느 곳을 가나 로마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채찍에 맞고 죽을 뻔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불의한 일을 당하면 로마정부가 나서서 보호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의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이 자기 신분과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시민권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 나라의 시민권입니다. 세상 나라의 시민권은 아무리 국가가 보호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국력이 약하면 제대로 보호해 줄 수도 없고,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보호해 줄 수 없고, 또한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국가가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그의 나라의 시민을 삼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이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시기에 언제 어느 때라도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죽은 이후에라도 우리 영혼을 영원히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 시민권의 위대함입니다.
2. 하나님의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합니다. 시민은 가족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피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또 성도와 성도는 전에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흘린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또 성도와 성도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서로를 형제라, 자매라 부릅니다.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했는데, 이제 우리 몸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런 예화를 들고 싶습니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 가장 바쁜 분은 대통령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시간을 구분해서 중요한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사소한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이런 대통령도 손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손자의 재롱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 하고, 장난감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족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운행하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등 큰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그런 일 다 제쳐두고 여러분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한 사람을 놓고 오랫동안을 참고 씨름하는 것을 볼 때는 참 안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자신의 가족이며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에게 쏟는 시간은 아깝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3.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성전)
바울은 이제 더 심오한 비유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며 우리는 그 건물 하나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입니다. 그 긴밀도는 시민에서 가족으로, 이제는 가족에서 건물로 더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건물에서는 재료 하나만 빠지거나 잘못되어도 전체 건물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건축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의 하나됨과 영광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은 엄격한 형식과 크기,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길이는 어떻게 하고 재료는 무엇을 쓰고, 얼마만큼의 무게로 하라는 등 외형적인 구조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가 흐르면서 형식이 별로 중요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식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마음의 중심이 바쳐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건축가요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이 교회 건축을 하는데 필요한 7가지 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 건축의 요소는 철근, 시멘트, 나무, 흙, 기와, 벽돌이 아니다, 교회 건축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진리다, 아름다움이다, 애정이다, 희생이다, 순종이다, 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이다.
교회는 형식적인 재료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진리에 서 있는가, 서로에게 사랑이 있고, 희생이 있고, 믿음과 꿈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1)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사도 바울은 먼저 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씀합니다. 사도와 선지자의 터는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와 선지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 직책중 하나로 이들이 했던 일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이들의 전도와 가르침을 통해서였습니다.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임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직접 예수를 보았습니까? 아마 그런 분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와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말씀은 교회가 성경의 기초 위에, 사도와선지자가 전해준 복음 위에 세워졌다 라고 풀이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심
터를 다진 다음에는 기둥을 세웁니다. 모퉁이 돌은 코너스톤이라 하여 고대 건축에서 골격이 되는 기둥을 말합니다. 이 골격이 건물의 규모를 결정하고, 건물의 방향을 결정하고, 지붕과 양 옆에서 누리는 하중을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규모는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만큼,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도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의지해야 될 대상도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어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다 담당하고 계시듯 우리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 모든 인생의 짐을 맡겨드리십시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터와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그 속을 채우는 것만 남았습니다. 우리 21절,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터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말씀이요, 기둥은 그리스도요, 이제 그 속을 성도들이 벽돌이 되고, 건축재료가 되어 성전이 지어져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눈에 뜨이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안에서',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단어들입니다. 이는 성도들은 연합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못하고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벽돌과 벽돌을 그대로 마주쳐 놓아서는 온전한 건물을 이루지 못하고 곧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모르타르를 발라야 온전해집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연결시켜주고 접착시키는 모르타르입니다.
성도의 공동체는 그 사이에 항상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바로 인간과 인간이 마주쳐서는 뻑뻑한 소리만 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는 별로 잘하는 것 없이 그렇게 실수하는 사람을 판단합니다.
실수와 이에 대한 판단과 정죄로 점철되어서는 온전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들어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 형제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의롭다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미 의롭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 사람의 조그만 실수를 가지고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눈으로 형제를 대할 때만이 우리 안에서 판단의 마음이 사라지고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분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윤리 기준이 앞서기에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판단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당신 눈에는 안 좋게 보여도 그 형제는 거룩합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룩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 형제도 역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나를 용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이미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신영복 선생)이 서예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이었는데 서예는 조화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쓰다가 잘못되면 서예의 특성상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글자를 통해서 그 실수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획을 쓰다가 좀 뉘어지면 다른 획을 세워서 그 획에 잘못된 것을 고칩니다. 이렇게 잘못된 한 획 한 획이 모여 온전한 한 글자가 됩니다. 글을 쓰다가 한 행이 잘못 되면 다음 행으로 보충하고, 한 연이 잘못되면 다음 연에서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부분 부분이 모두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보다 이렇게 실수와 실수, 거기에 대한 보상과 보충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글은 훨씬 정감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왜요? 사랑에는 실수가 많기 때문에 곧바로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실수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그 실수를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실수하고 보충하고, 실수하고 보충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뒤돌아보면 구비구비 굴곡이 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기에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인생은 없습니다. 실수와 실수가 모여 하나의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술입니다. 하나 하나가 살아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빼면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에 하나하나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평탄한 인생보다 이렇게 실수와 그에 대한 보상과 보충으로 이루어진 인생이 되돌아보면 더 아름답고 농도 짙은 삶을 살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각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완전해져 그의 총합인 교회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어쩌면 세상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지고, 실수 투성이인 인간들의 집합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실수 인생들이 모여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데서 교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 그 사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선 사람이 그것을 보충해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기쁨으로 보충해주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자기의 장점으로 보충해주어 교회는 하나가 되고 단단히 연합되는 것입니다. 건축자에게는 버릴 돌이 없습니다. 작은 돌은 큰 돌과 함께 붙이고, 모난 돌은 부드럽거나 오목한 돌 옆에 나란히 세움으로써 건물벽은 완성되어 갑니다.
4) 지어져가는 공동체
또한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미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지금 지어져 가고 있는 과정중에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21절에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그랬고, 22절에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집 짓는데 한 번 가보십시오. 건축 과정중에 있는 집은 얼마나 너저분하고 볼품없는지 모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인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세상과 별 차이가 없는 도덕적 수준을 가진 사람도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현재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지여져 가는 존재입니다.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신앙적이냐 비신앙적이냐는 한 '점'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고 '선', 즉 과정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는데 이제는 한 끼 정도는 굶어가며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발전입니다. 새치기 백 번하다 지금 오십 번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발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한 번 자기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지금 완벽하다는 데 있지 않고 과거보다는 현재가 낫고, 현재보다는 미래가 낫다는 점에 있습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비록 지금 눈에 보이는 건물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너저분할 지 모르지만, 그 설계도가, 그 목표가 위대하다는 점입니다. 건물은 그 설계도대로 완공될 것입니다. 우리의 설계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충만하심처럼 우리도 충만해지는 것, 그분의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는 것, 그분의 사랑하심처럼 우리도 사랑의 사도가 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위대합니다. 교회는 영광스럽습니다.
5)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심령 속에 임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나라가 궁극적으로 임하는 곳은 바로 성도와 성도들이 모여 있는 바로 이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분명히 21절 '서로 연결하여', 22절 '함께 지어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여기서 너희 안이란 우리 개개인의 심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는 'among you' 곧 너희들 공동체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가 모인 이곳이 하나님 나라며, 주님께서 거하실 처소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시고, 이 사실에 대해서 놀라워해야 합니다. 감히 우리 같은 공동체 위에,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판단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바로 이 공동체 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처소를 마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게 보통 모임이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대함이며 영광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비밀의 경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광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충만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제자는 만들어진다
엡 2:19-22, 4:13-16 / 류영모 목사
얘기 사자가 아빠 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우리 목에 있는 갈퀴는 왜 있는 거예요?" "우린 밀림의 왕자니까 무섭게 보이기 위해서지." "아빠, 우린 날카로운 이빨, 사나운 발톱을 가지고 있어요. 왜 그렇죠?" "우린 밀림의 왕자니까 다른 짐승들을 낚아채고 사냥하기 위해서지. 우린 밀림의 왕자란다." "그런데 아빠 왜 우리는 동물원 안에 갇혀있어요?"
동물원 안에 갇혀있는 아빠 사자, 얘기 사자는 이미 밀림의 왕자는 아니지요. 사람들의 놀이개감,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세상을 정복하는 하늘의 왕자로 디자인해 주셨는데 우리에 갇혀 살아가는 초라하고 못난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시는 분은 아니 계십니까?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목적대로 살아보자. 건강한 삶, 건강한 교회를 이루며 살자고 우리는 함께 몸부림하고 있습니다.
I. 건강하십니까?
옛 어른들은 "건강을 잃고 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맛있는 밥이 있어도 건강을 잃고 나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포근한 침대가 있어도 건강을 잃고 나면 그 자리가 포근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시력을 잃고 나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최고라는 겁니다.
이는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세계의 화두는 "교회의 건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큰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될 필요도 없고 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The Largest Church 가 아니라 The Best Church! 가장 좋은 교회, 가장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잘면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라가 건강해야 나도 잘 살 수 있는 겝니다. 아무리 큰 기업체라 할지라도 나라가 어려워지고 나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신앙생활도 나혼자 잘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건강할 때에 우리는 건강한 삶, 건강한 신앙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건강하십니까?
체온은 정상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따끈해져 있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맥박은 제대로 뛰고 있습니까? 교회생활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까? 소화 기관은 건강하십니까? 제때 음식을 먹고 어지간한 고기같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너끈히 소화할 수 있는, 신앙생활 하다가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신음하고 끙끙 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훌쩍 뛰어 넘는 소화기관의 건강은 유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우리 영혼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생활은 건강하십니까?
건강 잃고 나면 다 잃어버리듯이 교회도 건강을 상실하고 나면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일찍이 키에르 케고르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포도주를 물로 바꾸었다."
이 말을 받아 어떤 신학자는 "현대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 마져 깨버렸다. 깨어진 항아리에 성직자도 찔렸고, 성도들도 찔렸고, 이웃들도 찔렸고, 교회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함으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시대도 사회도 역사도 찔려 피를 흘리고 있다고 혹평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는 어제 오늘의 소리만은 아니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4세와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바티칸 시로 각 국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말했습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교회를 질타하는 얘기겠지요.
요즘 아이들은 옛날 아이들보다 키도 많이 커졌고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체질들 가운데 허약 체질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신도 많이 약해져서 조그만한 어려움이 있으면 감당할 수 없다는 거지요.
II. 교회가 건강해야!
오늘 한국교회가 세계가 놀랄만큼 가장 급성장한 교회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장 급성장했다가 가장 빨리 성장이 멈추어진, 가장 빨리 쇠퇴하는 교회라는 오명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끌어갈 힘이 없습니다. 허약 체질로 교회가 성장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성장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한국교회 나아가 한국역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를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교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교회, 주님께서 마지막 때 보시고 싶어하는 바로 그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깨우고 한 민족을 살리고 세계 열방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꿈입니다. 나아가 이 백성을 통하여 예루살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마지막 때에 마지막 복음의 주자로 살아가는 비전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 것은 아닌가? 성령을 거두신 것은 아닌가?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에스겔 골짜기에 십만 뼈다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 한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성도는 많아졌지만 의인 열 사람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만명쯤 모이는 대형교회 한 두 개 세운다고 역사가 달라지고 우리 시대가 달라지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가치관과 건강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크고 작은 교회들이 함께 건강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십년전에 돌파되어졌던 25%의 벽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천만성도의 벽은 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종교에 망해본 경험을 가진 민족입니다. 이조는 유교에 망했고 삼국은 불교에 망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독교 때문에 망하겠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어느 종교학 교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구원을 말하는 교회부터 구원받아야 하겠다."
교회가 건강하게 서 있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과연 무익한 공동체입니까? 교회는 해로운 공동체가 된 것입니까? 그래서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교회의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허물이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천년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공동체를 구원공동체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두통 있다고 모가지 자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이 씻은 물이 더럽다고 물을 버릴 때 아이와 함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는 건져놓고 더러운 물만 버리는 거지요. 교회가 많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복음도 예수도 함께 버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이야가라 폭포 곁에서 마실 물이 없어 갈증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고 나이야가라 폭포가 마른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문제가 많아 보이는 것은 거기에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연약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연약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흠이 많고 부족이 드러나는 이유는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아직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고 부족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허물많은 우리를 거룩하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에 보혈의 피의 능력이 이곳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아직도 분열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입니다. 왜요?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교회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생활에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너도나도 신앙생활이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상처를 받아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됩니다." "예배가 예배다워지게면 됩니다." 이제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모델을 우리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론 조사라도 해볼까요? 국민투표라도 한번 붙여볼까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물건의 용도와 사용법을 알려면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없을 때는 메뉴얼을 읽어보면 됩니다.
"하나님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건강한 신앙생활입니까?" 인간을 만들고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께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 메뉴얼인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예배
둘째, 우리는 하나님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 셀
셋째, 우리는 공동체안에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살아갑니다. - 사역
넷째, 우리는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갑니다. - 복음전도
다섯째,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 내 생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 번성
오늘 그 마지막 여섯 번째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 구원받았고 살아갑니다. - 제자훈련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장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닮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이 땅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III. 성장을 위한 훈련
우리가 어린 아기를 키울 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힘만 드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도 대단합니다. 아기를 키우면서 가장 큰 즐거움은 날마다 아기들이 자라간다는 사실입니다. 누워 있기만 하던 아기가 어느 날부터 몸을 뒤집고 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 걸음마를 내 디딜 때 심장이 무너질 것 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온 식구들이 박수를 칩니다. 어느 날부터 자기 식구들을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습니다. 엄마 아빠를 시작합니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말을 하고, 흥얼흥얼 노래함으로 온 가정이 웃음바다가 됩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한글을 깨우칩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면서 간판을 척척 읽어냅니다. 엄마 아빠는 우리 가정에 천재가 났다고 너무 신나서 온갖 그림책, 동화책을 사들이기에 바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입을 열었다 하면 손자 자랑에 바쁩니다. 자랑하려면 만원씩 내라고 해도 만원을 내고라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목회자의 즐거움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신앙인이 성장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행복하실까? 교회 찾아나올 때 얼굴을 보면, 처음 악수할 때 얼굴이 기억납니다. 지옥에서 출장 나온 얼굴 같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그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기도할 줄 압니다. 모임에 나와서 봉사를 합니다. 얼마나 목회자가 행복한지 모릅니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한소망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한국교회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푸른 창공을 향하여 솟아오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두 날개 달았다고 가능할까요? 아니요. 노력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부단히 애쓰고 힘쓸 때에 푸른 창공을 향하여 솟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리 새가 하늘을 솟아오르기까지 얼마나 퍼덕거리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수 천, 수 만번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다가 떨어지고 날다가 떨어지면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 아니지요.
독수리가 집을 짓는 방법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아주 이상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제일 먼저 새끼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재료는 가시덤불을 가져다가 놓습니다. 삐쭉삐쭉 찌르는 돌멩이들을 가져다 박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짐승의 깃털이나 새의 깃털을 덮어서 보금자리 둥지를 만듭니다. 어릴 때는 먹이를 갖다 나르지요. 그러나 어느 정도 독수리가 자라면 바깥으로 날 수 있도록 퍼덕거려 줍니다. 그러나 새끼는 나가기 싫어서 날개를 접고 안으로 더 들어갑니다. 어미 독수리가 둥지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면 깃털은 다 날아가고 가시덤불하고 삐쭉삐쭉 찌르는 돌멩이들만 남는 것입니다. 거기서 견딜 수 없던 새끼들이 벼랑에서 떨어집니다. 새끼들이 잘 날지 못해서 땅에 떨어지게 될 것 같으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어미는 쏜살같이 가서 새끼를 잡아채어 안전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하는 사이에 독수리는 하늘을 가르는 하늘의 왕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스스로 훈련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 보금자리를 흔들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을 주고 시험을 줘서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닌지 10년 20년이 되었지만 성장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계속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빨며 영적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요? 성장하기 위해 훈련과정에 몸을 던져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과정에 참여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훈련과정에 헌신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자녀는 태어납니다. 그러나 제자는 만들어집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5년 10년후 당신이 어떤 모습의 크리스챤이 되어 있을 것인지를 나는 예견해 드릴 수 있습니다.
IV. 영적 성장에 대한 오해들
영적 성장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1. 흔히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적 성장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영적 성장은 오토매틱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면, 예배에만 참석하면 믿음이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나와 예배 드리는 사람은 생명줄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성장은 어렵습니다. 모유도 먹어야 되고 이유식도 먹어야 되고 밥과 고기도 먹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도 다져야 합니다. 훈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닌 경력에 따라 성장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했습니다. 영적 성장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이 성장되지 않은채 경력만 쌓여져 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성장은 의지적인 훈련(conscious training)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장하기를 원해야 하며, 성장하려고 결심해야 하며,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 영적 성장에 대한 잘못된 두 번째 오해는 영적 성장은 신비한 것이며 성숙은 선택받은 소수만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영적 성장은 아무나 하나? 나 같은 사람들은 이류 크리스챤으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은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으로 느껴서 아예 시도해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숙이란 오직 소수의 '수퍼 성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루 몇시간씩 기도하고, 몇 시간씩 수련하고, 심지어 세상과 등지지 않으면 아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을때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성장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기대하고 여러분을 도와 주십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행동이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을 반복하면 인격이 형성되고 인격은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항상은 최후와 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최후의 여러분의 모습을 어렵잖게 그려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발전하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성숙하기 위해서, 예수를 닮기 위해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부단히 강단없이 자기를 갈고 닦는 사람이 마지막때에 주님을 닮은 영광스러운 주의 백성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영적 성장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영적 성숙은 신비한 열쇠만 찾으면 즉시 일어나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은 급해서 기다리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음식도 fast food점을 좋아하고 빨리 먹습니다. 그러다가 살이 찌면 일주일 아니 3일 완성다이어트를 찾습니다. 진득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하기 보다는 족집게 과외로 단시일에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가 영적 성장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제목에서도 그리스도의 인격이 하룻밤사이에 생길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즉시 변화시켜 줄 경험이나, 집회, 부흥회, 책, 테입 또는 한가지 진리를 찾는데 평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분명히 밝혀드리는데 수많은 인스턴트 식품이 나왔지만 '인스턴트 영적 성숙'이란 없습니다. 영적 성숙이란 반드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성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자녀는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하루 아침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제자는 여러 훈련 커리큐럼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V. 훈련 과정에 헌신하라
저희 한소망교회가 앞으로 한사람의 불신자를 전도하여 영광스런 셀교회 사역자, G12 사역자로 쓰임 받기까지의 훈련과정을 살펴보십시다.
< 한소망 셀비전 커리큐럼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모두 내가 했던 일들을 동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You can be a leader! -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12제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할렐루야.
미국 동부의 유명한 성공 철학자 지그 지글러(Zig Ziglar)는 인간의 잠재의식이 한 사람의 성공과 성숙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실험을 통해서 입증하였습니다. 지그 지글러의 실험 대상은 벼룩이었습니다. 그는 벼룩을 병에 담아 놓고 뚜껑을 덮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벼룩의 점프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이 세상 그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신장에 비례해서 벼룩만큼 높이 뛰어오르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 만큼 높이 뜁니다. 지그 지글러가 병에 담아 놓은 벼룩도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병안에서 뛰어올랐습니다. 뛰어 오를때마다 병 뚜껑에 머리가 부딪힙니다. 그래서 벼룩이 생각을 하기를 "아, 내 능력은 병 뚜껑까지로구나" 하고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정해버렸습니다. 이쯤 되자, 지그 지글러가 병의 뚜껑을 열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벼룩이 병을 빠져나왔을까요? 이미 자신의 한계를 병 뚜껑으로 한정했던 벼룩은 그 이상의 높이를 생각하지 못했고 결국 병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 벼룩처럼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나 같은 사람이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뭐!' 주일예배만 나오다 저녁예배 한번 나오면 "나 대단하지 않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만들어 놓으신 영광스런 세계가 있습니다. 복된 세계가 있습니다. 밀림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정복하길 원하는 엄청난 세계가 여러분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가족 여러분, 훈련과정에 몸을 담고 헌신하십시요.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왜 훈련을 받아야만 하겠습니까?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영향력 있는 사역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받은 복을 이 땅에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로 4절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악한 자들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못마땅해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 대답하십니까? 5절 말씀입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악인의 성공하는 것 때문에 시험드냐?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을 때가 많은데, 그때는 어떻게 이기겠느냐?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안한 땅인데, 그곳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올 때 어떻게 이기겠느냐? 훈련받지 않고 네가 과연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VI. 예수를 닮기까지
우리가 얼마만큼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실까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님처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이며 존귀한 신분입니까?
우리가 자녀를 얻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나를 꼭 닮은 생명의 신비!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에 기뻐하십니다. 흥분하며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 그리스도와 같은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CEO 징기스칸」이란 책이 있습니다.
800년전에 살았던 한 영웅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가 정복했던 땅이 얼마나 넓으냐 하면 칠백 칠십 칠만 평방 킬로미터! 이것이 얼마나 되느냐?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했던 모든 땅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입니다. 역사상에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시대의 영웅입니다. 징기스칸! 어떻게 150년동안 영향력있는 통치를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인물 됨됨이, 성품 됨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넓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다가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힘없고 젊은 어린나이에 강한 부족을 쳐들어가는 것은 불행하게 보였습니다. 이웃부족들과 힘을 합치고 그들과 화친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명분있는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당히 쳐들어가 아내를 되찾아 왔습니다.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할 것인가? 껄껄 웃더니 "당신 잘못이 아니요" 그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습니다. 이전보다 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조치"라고 지었습니다. 그 말은 "나그네 손님"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성품의 그릇은 얼마나 크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의 그릇은 얼마나 다듬어져 있습니까? 축복의 그릇은 얼마나 큼직하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훈련과정에 몸을 담으시고 큼직하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한번 던져보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지금 꽤 괜찮아 보여도 훈련, 성장, 성숙이 중단되면 "처음되 보이나 나중되고 맙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약해 보여도, 신앙이 어리고 연약해 보여도 앞설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훈련과정에 몸을 던져 보십시요. 성장하고 성숙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십시요. 하나님 나라 가치에 집중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내 삶의 목적을 멋지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패하는 신앙생활해도 괜찮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해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후반전의 생애가 우리앞에 남았습니다. 후반전은 역전하는 멋있게 신앙생활하는 멋있게 역사를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막스 비어의 소설 「행복한 위선자」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얼마나 야비했던지 얼굴 모양에서도 야비함이 가득 흘러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싶은데 그의 얼굴만 보아도 기겁하고 도망갈 것을 생각하고 가면을 씁니다. 로드 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고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프로포즈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년 2년... 5년 6년 지난 사이에 사랑하는 친구가 집에 왔다가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 가면속에서 드러난 로드 헬의 얼굴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해지고자 애쓴 로드 헬을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얼굴 모양까지 진짜 거룩하게 인자하게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는 만들어집니다!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러분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