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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재규 재평가설이 돌고있길래 그거에 반박한 네이버 메데님글을 퍼왔습니다.
사실이 아니다. 77년 재일교포 사업가 간첩사건이 있다.
"다시 3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부장판사 김상환)는 지난 19일 열린 재심공판에서 강우규씨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하조직 일원으로 몰렸던 김추백·김성기·강용규·이근만·이오생씨도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뜬 강우규씨와 그의 동생 용규씨, 김추백씨는 "피고인들은 무죄"라는 주문을 직접 듣진 못했다.
강우규씨 등은 1977년 2월 차례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갔다. 법원이 발부한 영장은 없었다. 수사관들은 강우규씨에게 1969년 일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고 이를 위해 1972년 한국에 잠입했음을 인정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씨가 북한을 찬양했고 간첩활동과 관련해 현금 등을 준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구타는 기본에,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한 사람들은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8473
이에 따르면 직접피해자는 최소한도 12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김형욱 살해의 지시를 김재규가 내렸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신현진은 10월10일, 이만수는 10월11일 각각 귀국했다. 신현진은 3년 반의 연수가 끝나 귀국할 때가 되었지만, 이만수는 2년 계획으로 연수를 떠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상태였다. 신현진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여러 명과 함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귀국신고를 했는데, ‘하늘 같은 부장’ 김재규가 ‘새까만 졸따구’ 신현진에게 “신군, 자네 내 방으로 좀 와!”라고 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부장이 연수생을 아는지” 상당히 놀랐다. 며칠 후인 10월16일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자 중정 직원들 사이에는 신현진과 이만수가 김형욱 사건과 관련있다는 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현진에 따르면 부장에게 김형욱 처리 결과를 보고하자 김재규는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해주었다. 김재규는 신현진에게 근무하고 싶은 곳이나 가족관계, 생활형편 등을 자상하게 묻고 앞으로 장가가면 살 만한 신혼집을 40~50평대 아파트로 알아보고 전화하라고 번호를 따로 적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신현진이 전한 김형욱의 최후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이 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 이어지는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되었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김재규는 해외담당 차장-차장보-담당 국장-프랑스 거점장-파견 요원으로 이어지는 공식라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하고 이상열은 일부 파견 요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핵심과제는 신현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처리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4787.html#csidx7fb316c351633ddbf7f334d05137ace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위의 재일교포 사업가 간첩조작사건 말고도, 1979년 10월 11일 남민전기 제작혐의 등으로 연행된 임인영 등에 대한 고문이 확인된다.
"남민전 사건이 발생하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수의(내복)로 남민전 깃발을 만든 것이 발각되자 사형수 부인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조사과정에서 특히 서도원의 처 배수자, 도예종의 처 신동숙, 하재완의 처 이용교, 전창일의 처 임인영 등이 중앙정보부에서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는 증언과 진술이 있다."
(국가폭력과 가족의 피해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중심으로, 오승용, 2007에서 발췌)
“ 이 간증수기는 ... 결코 거짓일 수 없습니다 ... 1979년 10월 11일, 남민전사건으로 저는 감옥보다 더 무서운 간첩을 취조하는 곳으로 연행되어 갔습니다 ... 며칠이 지나 취조가 끝나고 집에 보내주겠다고 할 무렵 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형수의 옷을 걷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 저는 그 취조과정이 너무도 잔인하고 가혹하여 제 힘으로는 도저히 견달 수 없었습니다 ...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 취조관이 저를 취조하려고 또 불러내갔습니다 ... 취조관은 저에게 옷 사건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 취조관이 며칠을 더 취조해보더니 ... 수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저에게 끝까지 누명을 씌우는 대구 여자와 만나게 하여 판가름을 하라는 상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그 여자가 대구에서 올라와 지금 옆방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 취조관 몇 명이 들어와 저를 취조하는 것입니다.”
- 김수환추기경에 보낸 임인영의 간증수기 1982.경 작성 -
http://www.eminju.kr/bbs/board.php?bo_table=cyber_pilgrimage&wr_id=127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려 1971년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로 가자면,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사건 또한 존재한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재일본 한국인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 사건'은 일본 교토(京都) 출신의 교포 2세들인 서승(徐勝.당시 25세), 준식(俊植.22) 형제가 1971년 3월 서울대 유학 중 간첩활동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사건을 말한다.
서승씨는 68년 4월 서울대어학연구소 입학 후 대학원에서 사회학 전공중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중 무기, 20년 징역으로 차례로 감형됐다 90년 2월 가석방됐다.
준식씨는 서울법대 유학중이던 71년 형 순웅씨 지시로 반국가 지하조직을 구축한 혐의로 구속돼 72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확정판결을 받았으며 78년 형기 만료 후 사상전향 거부로 보안감호 10년 처분을 받은 끝에 88년 5월 석방됐다.
이 사건은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71년 4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발생한 간첩사건은 고문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씨 형제에 대한 고문 중단과 사면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등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증거 부족 상황에서 거짓 자백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사건 조작'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육군보안사령부는 71년 4월 20일 "선거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 온 서승,서준식 형제 등 재일교포 출신 대학생 4명을 포함한 북괴간첩 10명과 이들을 중심으로한 4개망(網)의 간첩 관련자 41명 등 51명을 서울, 부산, 제주 등지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수사 관계자는 그러나 난수표 4조와 육성녹음 테이프, 공작금 350만원 등 공작품 50여점도 압수했다고 밝혔으나 "이들이 북괴간첩 지령에 따라 움직였는지 여부는 아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혀 대대적인 구속수사의 문제점을 내비치기도 했다.
지난 98년 4월 일본 릿쓰메이칸대(立命館) 법학부 교수가 된 서승씨는 사형판결 후 20년형으로 감형됐다 90년 2월 가석방 된 뒤 가진 한 신문과의 회견에서 "북한에 간 적은 있으나 간첩공작 교육을 받지 않았고 국가기밀을 북에 보고한 적도 없고 로동당에도 절대 가입하지 않았다"고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그는 방북 동기에 대해서도 "민족의 참모습을 알고 싶어서였다"며 "난수표가 내 짐속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한 인사에게 받은 크림통속에서 나왔고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서승씨는 보안사 심문과정 중 없는 사실을 자백하라는 강요와 함께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자 "더 이상 고문을 당하다가는 내 뜻과 달리 없는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생 준식씨는 87년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사회안전법 폐지를 요구하며 51일간 단식을 벌여 국내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전세계 인권단체들도 이에 가세하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89025
김재규가 죽었기에 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겠으나, 생전 김재규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10·26 사건 1주일 전에 김녕김씨인 김재규와 동성동본인 당시 상공부 차관보 김동규(金東圭·현재 통일민주당 의원)는 개인 일로 김재규를(그의 공관으로) 찾아갔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내가 공작을 해보니 김영삼씨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김대중씨의 연금을 그날 하루만 풀어준 것이야." 김재규는 그의 집을 나서는 김동규의 등뒤에다가 "누군가가 후세에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말해두는 거야"라고 했다.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670&C_CC=AC
"변호인의 접견 노트에서 죽은 김재규는 말한다.
"나는 5.30 전당대회 직전 김영삼을 만났다. 장충동 나의 공관으로 비밀리에 오게 했다. 나는 '2년마다 하는 전당대회인데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천천히 해보십시오' 그러면서 김영삼의 실정법 위반과 그의 참모들의 비위 사실을 들이대며 어르고 위협했다. 결국 자기를 포함해서 참모들까지 불기소를 보장하라는 얘기까지 나와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걸 들고 곧 청와대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각하는 '총재 되지도 않을 자를 왜 영웅 만들어주느냐'고 역정을 내면서 '정보 좀 더 수집해, 안돼!' 라고 했다. 그래서 물거품이 되었다."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719쪽에서 발췌.)
교통부 장관 시절은 아니지만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김재규의 무능력함을 혹평하는 증언이 있다.
"金泳三과의 면담에서 나타난 金載圭의 면모는 파국을 막으려고 애쓰는 온건론자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업무관계로 이즈음의 金載圭와 접촉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우직하고 예절바른 인간됨은 인정하면서도 능력면에선 혹평을 서슴지 않고 있다. 朴찬현 당시 문교부장관은 『대국을 보는 안목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국관에 기조가 없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바꾸곤 했다. 또 소심한 편이었다. 회의에서 발언을 한 뒤 「내 말이 지나치지 않았는가」「그 장관이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하고 묻곤 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걸로 그러는 것이었다』고 했다.
(중략)
金致烈 당시 법무장관은『車에 비해 金이 온건론 쪽이었다고 하지만 「론」으로 부르기에는 논리나 일관성이 없는 의견이었다. 한 마디로 소신이나 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정보부장으로서의 영향력도 전임자들보다 약했다. 「욱!」하는 성격이 있어 무식한 머슴이 화가나면 큰일을 저지르는 식으로 일을 벌일 사람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鄭在虎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79년 추석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柳赫仁씨가 롯데 호텔로 빨리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崔圭夏총리, 金聖鎭문공부장관, 柳赫仁, 오유방(吳有邦)공화당 대변인, 외무차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궁정동 정보부장 관사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우리는 그곳으로 옮겼고 총리만 공관으로 갔다.
金載圭가 우리를 맞더니 총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접니다. 각하가 국수 주셔서 맛있게 먹고 오는 길입니다. 각하께선 대단히 기분이 좋으십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한국을 경찰국가라고 비난을 했답니다. 이 비난에 대해 미 국무성의 고위관리가, 케네디의원은 마치 자기가 차기 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냉소적인 코멘트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정보를 올렸더니 각하께서는 흥분하셔서 여당 대변인들이 이에 맞춰 케네디 의원을 반격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안작성회의가 시작됐는데 金부장은 바쁜 일이 있다면서 나가버렸다. 그러자 金의 부하 한 사람이 「코멘트를 한 사람은 미 국무성 고위 관리가 아니고 서울 미 대사관의 참사관이며, 그것도 사석에서 한 얘기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일로 추석날에 이런 회의를 소집한 金載圭에게 울화통이 터졌다. 총리에게 문안을 보고하러 가는 김성진(金聖鎭) 장관의 차중에서 「저런 돌대가리가…」하고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총리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평이라고 했으나 총리는 「기왕 金부장이 보고한 사항이니…」라고 해서 짤막한 성명문을 다음날 발표하긴 했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201&C_CC=AP
김재규의 이 '욱하는 성격'에 대한 증언은 중정 차장보 윤일균의 증언 또한 있다.
"김재규는 조금 전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40만 달러를 김한조에게 주면서 영수증을 받았었다. 4만 달러란 김한조가 로비에 쓴 회사 돈을 한국 정부가 이번에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한조는 40만 달러 사용처 때문에 FBI 등에 의해 쫓기는 처지였다. 박 대통령도 '그 내용은 정보부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더욱이 김한조는 정보부장으로부터 사기꾼처럼 의심받는 것 같아 불쾌해졌다.
"김 부장님, 나는 잠시 후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갑니다. 전쟁터로 가는 셈인데 그 얘기는 그만하지요."
김재규가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정보부장을 우습게 알아?"
방 안에서 돌연 활극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윤 차장보가 뛰어들어갔다. 김 부장은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들고 김한조를 겨누고 있었다. 놀란 윤이 김의 손목을 붙잡아 권총을 제압했다. 윤일균 씨의 증언,
"방에 들어가보니 김한조의 안경이 구석에 나뒹굴고 김 정보부장은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눈빛은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 일로 김재규가 성격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발적인 폭발성이라고나 할까..."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682~683쪽에서 발췌)
뉴욕타임즈 아카이브에 따르면 우선 저 기사는 1979년 12월 29일 기사가 아닌 1979년 12월 22일 기사이다. ( http://www.nytimes.com/1979/12/22/archives/oil-cost-jolts-korean-economy-new-price-rise-is-seen-adding-to.html?_r=0 ) 다만 construction wizard에 대한 언급은 사실으로, 기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He lacks, however, the assistance of the army general-turned-construction wizard who pulled South Korea out of its last oil‐induced crisis. Unfortunately, this general is the confessed assassin of Mr. Park — Kim Jae Kyu — who was Construction Minister in 1974.
그러나 그(신현확 총리)는 한국을 지난 석유파동에서 이끌어낸 건설계의 마법사로 변한 전직 장성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1974년 건설부 장성이던 이 장성-김재규-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혐의를 자백했다.
김재규가 비리, 청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남산부장의 위력 때문에 이권을 노린 장사꾼들이 김재규에게 들러붙었고 성격 '단순한' 사나이 김은 '도와주겠노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냄새를 포착하면 김정렴은 막강한 정보부장도 견제했다.
예컨대 제주지역의 관광단지에 수렵장을 개설하려는 H라는 업자가 있었다. H는 도지사 이모(작고)와 김재규를 통해 로비를 마쳤다. 대통령 현지 순시 중에 도지사가 업무추진 보고를 하고 'OK'가 나면 H가 사업을 벌일 참이었다. 박 대통령은 분명히 'OK' 였는데 주무관청인 교통부(당시 최경록 장관)에서 세부 지침을 주지 않았다.
H.가 교통부에 알아보니 비서실에서 김 실장이 빼버린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내용을 알아본 즉 김정렴 실장이 "호텔이나 하고 수렵장은 불가"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듣고 정보부장이 청와대로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김정렴 실장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래도 버틴 비서실장 김정렴은 78년 12월 12일 10대 의원 선거 직후 정보채널의 집중 포격을 받고 밀려나게 된다."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707~708쪽에서 발췌)
동아건설 최원석의 증언 또한 있다.
"그런 일뿐이 아니지만 나는 사회생활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나한테 그렇게 해선 안 되지요. 사실 장충동 그 집을 김재규 부장이 탐을 내서 최회장한테 1억원에 샀습니다. 30억원이 넘는 집을 1억에 가져갔으니까 말이 샀다는 것이지 뺏은 것지요."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page=1&uid=leeho5233&folder=7&page_size=5&viewType=1 (최원석 회장의 비밀(24) 참조)
출처 : http://blog.naver.com/joo99416/220878813036
첫댓글 3줄 요약좀
의인설이란건 다 엑박임. 반박은 글 다 나오는데
아 그래여? 수정좀하겠습니다
쭉 읽었는데 의인 맡는 듯..내용들이 다 억지로 우겨넣고 있어서 반박이 안됨..
어느부분이 억지인거같나요?
욱여넣고
김재규 의인설이 있나요? 열사니 뭐니 하는 건 봤어도 의인설은 처음 보네요.
의사니 열사니하는거에대한 반박글로 읽으셔도되요
@공부해라제발ㅠㅠ 그런건 시국이 시국인지라 하는 장난 아닌가요? 김재규를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STEVENGERRARD 저도 장난인줄 알았는데 아까 김재규재평가글보고 놀래서 이글올린거에요 그글에는 대부분 김재규를 다시평가하자고 하더군요
민영환 같은 사람이죠. 어떻게 죽느냐가 인물의 평가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게하는 사람.
전체적인 이 사람 생에 관해서 평가하는 건 그닥 불필요해 보이긴 하지만 이 사람이 10.26에 한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함. 우발적이었네 어쩌네 하지만 그 이후 이 사람의 일관된 진술에 비추어봐도 그 행동은 충분히 역사적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봄.
링크 찾아가서도 읽어봤는데..김영삼이 김재규는 나쁜사람 같지 않다고도 나오네요..박정희 말에 따라지만..상당히 불만이 많았고 박정희랑도 마찰이 많았던 것도 맞고..사람 평가도 좋은건 사실..
김재규가 박정희나 차지철보단 그래도 타협할줄알고 그당시 한국의 현실을 잘파악한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도 박정희의 수하중 한명이었고 그에게 고문당한사람들도 있는데 이런사람을 좋게 평가할수는없죠
@공부해라제발ㅠㅠ 김재규가 박정희의 독재에 수동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은 설령 김재규 의인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에요. 다만, 김재규로 인해서 그런 폭압 정치가 조금이라도 덜했다면 김재규의 수동적 동조가 어느정도 참작이 된다는 거죠. 독재자에게 부역하면서 전혀 그 폭정과 연관이 없을수는 없는데 그런 부분을 가지고 이 사람도 나쁜 사람이다..라고 결론내린다면 이것도 올바른 판단은 아닐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의 측면으로 보자면 김재규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좋아질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김재규가 행한 좋은 행위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글은
@한글영문숫자 죄없는사람들 고문시킨사람을 좋게 평가할수있을까요? 전 그건정말아니라고 보는데요
@한글영문숫자 크게 의미 없어요. 김재규의 행위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좋아지고 나서 혹여나 과한 의인화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냥 인터넷에 몇몇이 하는 극소수 인터넷 댓글 몇개로 이런 글까지 올릴 필요는 없음.. 우선 급한건 10.26에 대한 재평가죠.. 이런 글은 그 이후 몇단계 이후에나 나올법한 글이네요.
@공부해라제발ㅠㅠ 수동적 동조에 대한 비판은 당연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이 사람의 노력이 있었고 그런 노력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부터 바꿔야 한다는 거죠. 현재 제대로 된 평가도 못받는 사람에게 훨씬 더 나간 의인화에 대한 염려부터 하는건 너무 나간거죠. 현재의 문제부터 바로잡고 그 이후에 만약 이 사람에 대한 지나친 의인화가 된다면 그때 이걸 바로잡아야지.. 지금은 그 사람의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조차도 없고 평가하려는 시도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글은 너무 나간거에요.
@한글영문숫자 박정희 암살도 저는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서 김재규이대해 좋은생각을 가질수가없습니다 애초에 정말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이였으면 중정으로 가고 암살은 다른사람이했다고 조작도 가능했습니다 당시 안가는 중정이 장악했고 차지철이 평소에 막나가는행동때문에 쿠데타일으키는거 아니냐는 일말의 소리도 있긴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재규는 육본으로갑니다 당시 법무장관또한 차지철이 암살한줄알고있었고요 그가 박정희를 조기에 처단해 대학살극이 안일어났다는 점만 좋게평가하면되지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인물입니다
@공부해라제발ㅠㅠ 물론 개인별 평가는 달라질수 있겠지만, 객관적 진술이 있는데 굳이 나쁘게 볼 필요가 있을까요? 그 사건에 대한 진술은 사형당할때까지 일관됐던걸로 알고 그 진술을 부정할 결정적 증거가 없다면 님의 주장은 그냥 자의적이라고 밖에 할수 없지 않을까요? 그 사건 이전을 살펴봐도 그가 박정희 폭정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여러곳에서 찾을수 있고 그 사건 이후 진술도 일관된다면 전 그 진술을 믿어야 한다고 봐요. 님은 그를 평가함에 너무 감정을 대입시키는게 아닐까 싶은데요..
@한글영문숫자 객관적 진술이있다고요? 그 객관적 진술좀 알수있을까요?
@한글영문숫자 그리고 그 사건이후 진술을 보면 그는 박정희만 없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들어설것으로 오판한게 여러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본인은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함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길 바라죠. 이런 그의 판단으로 보건데 위에 언급한 조작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죠..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데 굳이 왜곡해서 바라볼 이유는 없다고 봐요..
@공부해라제발ㅠㅠ 김재규 재판과정에서 한 발언들 살펴보세요. 그걸 뒤집을 다른 객관적 사실이 있나요? 그의 생각을 읽는데 그의 진술보다 더 신빙성 있는게 뭐죠? 지금 우리는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겁니다. 다른 뭐가 그의 발언보다 더 객관적일수 있죠?
@한글영문숫자 그의 재판과정 발언들을 봤습니다 김재규의 항소 보충설명서에 따르면 불순세력들이 배후에있어서 항쟁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순수한 시민들의 유신체제의 대한 반감으로 일어나는걸 느끼고 박정희한테 보고했지만 박정희는 여전희 권력에 집착하고 차지철은 그까지것 탱크로 밀어버리면 되지않나며 오히려 막나가는 행위에 4.19사태를 다시일으킬수없다며 그들을 암살했다한 내용이죠 근데 민주주의에 경각심을느끼고 정말 대한민국의 안위를 걱정해서 암살을 계획했으면 그런 수습을 했을까요? 도대체 왜 그가 중정이아니라 육본에간지 이해가 안되서요 그리고 정말로 민주주의를위해 암살했었다면 김영삼 김대중및 야당인사들과의 접촉도
@공부해라제발ㅠㅠ 있었어야 했습니다 김재규는 신군정이 들어서지않고 곧바로 민주정부가 들어설수있게 할수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냥 박정희와 차지철만죽이면 군정이 무너질거라는 생각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아무도없죠 다른 끄나풀들이 국가를 장악할텐데 실제로도 일어났고요 정말 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원하고 계획했다면 야당과의 접촉과 중정으로가서 사태를 수습했을겁니다 하지만 김재규는 암살이후의 행위는 너무 미숙했으며 결국 몇시간만에 제압당하는 모습을보여줬죠 이점에서도 현대사 학자들도 비판하는 부분이고요
@한글영문숫자 그리고 또하나 암살에 참여했던 김재규의 부하들은 제대로된 목적도 모르고 그냥 위에서 까니깐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부하들 인생상관안하고 끌여들였죠
@한글영문숫자 아직까지도 김재규가 사건현장에 친분만 믿고 참모총장을 부르고 육본에간사실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행위입니다 이건 쉴드가 불가능한 판단이거든요
@공부해라제발ㅠㅠ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김재규는 애초에 권력욕이 없었을 수도 있고 상황판단 미스일수도 있고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죠. 다만, 그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지 못한 잘못을 그에게 물을수는 없죠. 그는 그의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그 이후 역사는 그의 몫은 아닌거죠. 더 나은 결과를 낳지 못한 아쉬움은 있겠으나 그걸 그의 잘못으로 치부할순 없다고 봐요. 암튼 이건 제 생각이니 설령 저와 생각이 다른 분들도 많으리라 봅니다. 저는 어쨋거나 10.26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보기에..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제가 아는 지식도 별로 없어서 뭐라 단정하긴 힘드네요..
@한글영문숫자 애초에 그에 이러한 행위때문에 학자들도 우발적 행위였다고 보는겁니다 당시 전두환이 김재규가 반란을 일으키고 정부를 장악할려했다며 그를 내란죄로 사형시키자할때도 이러한 행위들때문에 계획된게 아니라 우발적 행위였던거 같다고 반박한거고요 하지만 그의 박정희 암살로 대학살극을 막아낸건 인정하는 부분이고요
@인간 티백 반기문(작작좀 우려) 10.26에대한건 지금제가 한글영문숫자님과 토론과정에서 상당히 나왔다 생각하는데 부족하신건가요?
@인간 티백 반기문(작작좀 우려) 개인적으로 나무위키는 전문성이떨어지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상세하게 나와있으니 10.26을 검색해서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밀정에 송강호 느낌이랑 비슷하려나?
찬반은 갈리는 문제인것같긴함
분명한건 김재규가 시도조차 안했으면 우리는아직도 독재정권아래에서 살고있었을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