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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침략사 - 명성황후 시해사건
19세기말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이들은 임진왜란 때와 같이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터무니없는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일제가 그들에게 가장 큰 장애로 여기던 위대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강간하고 시해했다. 일제가 저질렀던 악랄함과 잔혹성에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라고 격분하였다. 또 당시 조선 정부의 일본인 내무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 조차도 일본 법제국장관 앞으로 보낸 비밀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라고 서두에 적고 있다. 이 말은 일제가 얼마나 악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조선국모를 살해했는지 일본인조차도 차마 글로 쓰기 어려운 작태가 벌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명성황후 시호
2003년 6월 문화재청은 고종(高宗)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합장 능(陵)인 사적 제207호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소재)의 침전(寢殿·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지은 집)을 해체 작업 중이었다. 문화재청은 작업 도중에 이 곳에서 재해 방지를 기원하기 위해 물 ‘수(水)’자가 새겨진 육각형의 은판(지름 45㎜, 두께 0.8㎜) 3점과 종도리 장여(도리를 받치는 모가 진 나무) 부분에서 세로 0.95m, 가로 12.9m의 붉은 비단에 쓴 명성황후의 공덕을 칭송하는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광무 5년(1901년) 8월 21일자로 된 상량문에는 간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에 대한 국모로서의 덕망과 애국심에 대한 칭찬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혜악보담어빈궁고독 공고만세종사지기[惠渥溥覃於貧窮孤獨 鞏固萬歲宗社之基] :두터운 은혜가 널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만세에 계속될 종묘사직의 기틀을 공고하게 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2년 후 광무 1년(1897년)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명성황후 유해는 원래 청량리 홍릉에 모셔져 있다가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에 따라 1901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移葬)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19년 고종황제 마저 악랄한 일제에 의거 독살되어 승하하자 고종황제와 합장 됐다고 한다.
국모의 자리에 오르다
명성황후는 몰락한 양반 가문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1851년(철종 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의 나이에 양친을 잃고 고향을 떠나 서울의 일가에 몸을 의탁하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불운한 소녀는 15세 되던 1866년 3월 조선 26대 고종의 왕비로 책봉 받아 꽃가마를 타고 궁중에 들게 된다. 고종보다 한 살 위로써 고아나 다름없는 그녀가 국모에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강력한 섭정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대원군은 당시 모든 부패의 온상이 바로 왕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외척이 적은 아내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황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명성황후야말로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춘추좌씨전’ 등 책을 즐겨 읽던 총명하고 지혜로운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부대부인을 공경했으나 정작 지아비인 고종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에게는 이미 궁인 이씨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대원군은 그런 황후를 동정해 황후의 가까운 인척을 관리로 등용하는 등 배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궁인 이씨에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나자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명성황후는 타고난 정치적 재능을 발휘해 고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입지는 강화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20세가 되자 친정(親政)을 권하여 고종이 정치적 입지를 찾아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개방정책을 주도하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안으로는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부패한 양반사회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커져 가고 있었다. 밖으로는 서양세력이 개방을 요구하며 접근해오던 위기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심혈을 기울였으나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대외정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허약한 경제사정과 정치상황을 고려할 때 개방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개방을 철저히 봉쇄하는 쇄국정책을 펼쳐나갔다. (척화비 : 양이침범 비전칙화 주화매국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그러나 황후는 실학파를 가까이 하고 있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 황후는 개방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 간파하고 고종에게 개방정책을 건의하게 된다. 한편 고종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아버지의 경직된 국정 운영에 이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흥선 대원군
유교적 효와 윤리측면에서 보면 평생을 바쳐 자신을 황제에 오르도록 노력한 아버지와 직접 충돌하기에는 도덕적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대원군 처지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천륜에도 유교적 충(忠)의 윤리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원군은 화살을 황후에게 돌려 우회적으로 고종의 독자 노선을 견제하려 했다. 반대로 고종의 욕구를 대신해 대원군과 충돌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즉 흥선대원군과의 대리전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고종의 정치적 방패'라는 황후의 역할은 황후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마리를 던져 준다. 그 수수께끼란 왜 황후는 각종 변혁 운동이 있을 때마다 왕을 제치고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황후를 시해하고자 했던 세력들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보수파 군인과 유생,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당에서도 황후가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이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황후의 개방정책은 곧 조선의 개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유교적 충의 관점에서 볼 때 고종에게 직접 대항하기보다는 황후를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수파나 급진 개혁파가 황후를 공격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새 기구를 창설하면서 주요 요직을 민씨 일족이 독차지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백 60여 명에 이런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고종과 황후가 능력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친족을 가려 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정적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종과 황후가 개방정책을 추진하려면 믿을 만한 왕당파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발탁된 황후 친족들은 왕을 압도하면서 세도 정치를 일삼은 기존 외척 세력과 달리 왕권을 보좌하는 정치적 지지 기반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은 여러 차례 정치적 변란을 겪으면서 황후에 대한 의존도는 날로 높아져 갔다. 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일급 참모'라는 위치를 확고히 다져 갔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 황후의 혜안과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의 일급 참모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행록(行錄)을 보면 고종이 황후를 평하기를 " 황후는 독서량 많고, 지혜가 출중했으며, 고종이 대원군으로부터 권력 이양을 받는데 일조를 하는 등 고종을 찬조했다" 라고 기술하여 정치적 최고의 조언자로 평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 (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고, 영국의 여행가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당시 황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외교관으로서의 황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황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오랜 망명생활을 했던 서재필이 광복 뒤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다. 민황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다.”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훗날 황후가 시해된 후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당시 일본으로써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중략)” 라고 기록했다.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 진언하는 일급참모인 명성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으로 일제를 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 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그녀의 위대함 놀라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속에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앞서 기술했듯이 황후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는 “(당시 일본으로써는) 대표적 인물인 민황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 ...중략...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제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친일세력을 구축하라
을미년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정세는 미니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 다단한 형국이었다. 일제는 메이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들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하여 정한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이에 3류 사무라이들은 역사조작을 통하여 한반도를 무력 강탈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기술했듯이 1876년 강화도조약을 비롯한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모방의 천재답게 서구의 나쁜 식민지정책을 본받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패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노세함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국가 최대 역점사업으로 아시아 진출을 위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의 분산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제의 입장을 지지하여 한반도로부터 한발 빼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일제는 침략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일제는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 강탈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목적과 이익을 대변하는 친일세력 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1894년 10월 25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백작이 주조선 일본공사를 자청하여 부임한다. 그는 일본의 외상.내상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이토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함께 근대일본정계의 거물인 원로(元老)였다 . 일본정계의 거물 실세인 이노우에는 강화도조약 체결 때부터 간여한 자다. 그는 조선에 대한 일체의 전권을 일본정부로부터 부여 받고 부임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조선 강점을 위하여 첫 번째 손을 쓴 것은 조선 군대를 일본화.친일화 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895년 일제의 강제적 건의에 의해 조선 훈련대가 만들어진다. 조선군사를 일제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군사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훈련대에는 일본인 교관들을 투입하여 일제에 의해 조정 받는 제1,2훈련대 각각 1천여 명의 신식군대였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견제와 박영효를 비롯한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혀 식민지화 기도가 차질을 빚자 이노우에는 휴가를 빙자하여 1895년 6월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자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내각회의에서 대조선 300만 엔 기증금 제공을 제의하였다.
1895년 7월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바꾸었다. 또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 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황후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미우라가 부임(서울도착:9. 1)한 후에도 17일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이노우에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입안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도적 위치에 있지도 않았던 행동대 대장 무장 미우라를 배후 조정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종범으로 만들고 그는 9월 21일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여 우 사 냥
뒤에 언급하겠지만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을 살펴보면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한 작전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가 우리의 위대한 국모 명성황후를 여우에 비교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는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Pax Britannica의 시대였으므로 모방의 천재 일제가 같은 섬나라 영국의 ‘푸들(개)’을 자처한 영향력으로 보여진다.
'여우사냥'은 영국이 발생지다. 섬나라 영국은 동물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여우가 있다. 여우에 대한 천적이 없자 농촌에는 여우로 인한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대략 약50만 마리의 여우가 도둑고양이처럼 전국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여우사냥에 대한 역사는 봉건제가 자리 잡은 13~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잉글랜드 국토의 4분의1은 왕의 사냥터였다. 왕실 소유 사냥터가 아닌 지역은 귀족들의 사냥터나 마찬가지였다. 가을에서 겨울까지 농촌에 많은 피해를 주는 여우들은 농장주들과 귀족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냥감이었다. 그리고 여우사냥은 17세기 후반 찰스2세 집권기에 귀족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다.
여우사냥은 격식.예절.복장 등 전통을 중시하며 18세기 기병대 장교 복장을 한 마스터가 지휘한다. 마스터는 20㎝정도의 구리나팔로 지휘하며, 마스터의 초대가 없으면 동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교활한 정도로 영리한 여우를 뒤쫓도록 지구력과 순발력이 뛰어난 수십 마리의 ‘잉글리시 폭스하운드’ 사냥개가 마스터를 따른다. 사냥개들은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지면 여우의 은신처를 뒤진다. 수풀이나 들판일 수도 있다. 사냥개들이 여우를 발견하고 짖기 시작하면 선봉에 선 마스터가 나팔을 울리며 “탤리 호(Tally Ho)!”라 외친다.
마스터는 여우를 몰아 사냥개에 물려 죽게 만든다. 그날 잡은 여우의 꼬리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성사냥꾼에게 기념물로 증정한다고 한다. 가끔은 머리와 발도 기념품이 된다. 몸뚱이는 사냥개에게 던져 준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동물학대라는 비난을 동물애호가들로부터 받아왔다. 토니 플레어(Tony Blair)총리는 1997년 집권하면서부터 여우사냥 금지를 공약했다. 이에 대해 찰스 영국왕세자가 "여우사냥을 금지하면 영국을 떠나겠다”고 응수할 정도로 영국 최고의 야외 스포츠다.
2004년 9월 노동당의 여우사냥 금지법안 제출에 대해 “don´t ban fox hunting"을 외치며 여우사냥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영국 국회의사당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세계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적이 있다. 오늘날 여우사냥은 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거 미국.캐나다.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마침내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등이 황후 시해에 관한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 시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또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제가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복궁내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외국인들이 머물게 했다고 한다. 이 서양관은 궁궐 수비 책임을 맡았던 몇몇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외국인이 없었다면 일본의 만행은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 세력인 훈련대를 해산 시키고자 했다. 마침내 시해사건 하루 전 훈련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우라 공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이틀 앞당겨 시행하게 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등 살기 등등한 낭인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앞세운 일본 군대는 궁궐의 추성문(秋成門:북서문), 춘생문(春生門:북동문)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공격한다.
궁궐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제의 습격을 받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약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총성이 울린 시각으로부터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불과 사십 오분 정도였다고 한다. 수비대가 순식간에 무너진 데에는 앞서 기록했듯이 일본식 훈련은 받고 일제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세력이었다.
궁궐문을 뚫고 들어온 일본군대가 찾은 곳은 건청궁(乾淸宮)이었다. 평소 일본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곧 이어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령합(坤寧閣:玉壺樓)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옥호루다.
웨베르 보고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오늘날까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이 사태는 일본과 무관한 것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2001.11월 KBS는 이를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방송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駐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베르는 이 보고서에서 황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낭인들은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옥호루에서 시해하다
이 보고서는 시해 현장에서 일본 행동대와 맞닥뜨린 사바틴의 중요한 증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내말은 듣지도 않고 황후가 어디 있는지 황후가 누구인지 만 물었다' 즉 시해범들은 황후 찾기에 만 혈안이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칼로 무장한 비열한 사무라이들이 황후를 찾아 왕의 침전에 쳐들어 온 것을 고종이 꾸짖자 이들은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폭행을 하여 주저앉혀 고종의 어의(御衣)를 찢었다. 또 태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특히 고종이 목격한 증언서에는 칼을 들고 왕의 내실에 침입한 비열한 일본인들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였다.
조선왕비 살해(리옹프와이어 1895)
“짐의 눈앞에서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전 조선 군부의 고문 스즈끼,와타나베가 칼을 빼 들고 궁궐로 쳐들어 왔고 조선 군부대신 고문관을 지낸 오카모토와 스즈끼가 황후를 잡으러 나갔다"라고 진술하다 말고 실신했다"라고 보고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왕의 처소에 일본군 침입 사실을 알리러 달려간 이학균 연대장이 "황후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은 "황후는 지금 안전한 장소에 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일제 낭인들이 황후를 잡겠다고 나간 뒤에도 고종은 황후가 무사한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 황후의 처소 옥호루에서는 이미 참담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상궁의 중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인들이 황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중략) 일본군은 궁녀들을 밀치며 황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입을 모아 여기에 황후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왜인들은 (옥호루) 아래로 궁녀들을 집어 던졌다. 이때 황후가 복도로 도망쳤고, 한 왜인이 왕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황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발로 세 번 짓밟았다. 그리고는 칼로 가슴을 내리 찔렀다."
한 상궁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바틴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뜰에 서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0∼12명 가량 되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끌고 와 창문 너머 마당으로 이들을 내던졌다. 창문의 높이는 6피트(1m80cm)쯤 되는 듯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여인들은 아무도 신음 소리나 고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궁내부 대신 이경직)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 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 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군에 비상대기령을 내렸을 정도로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사건 직후 10월9∼10일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과 선박 2척이 연이어 황급히 일본으로 떠났다는 자체 첩보에 의거해 이 배가 시해범들을 실어 날랐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야 말로 일본 정부가 시해사건에 개입한 증거라고 나름으로 결론을 내린 대목도 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앞에서 사바틴이 했던 증언들은 영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에 우송되었다. 1895년 발행되던 성 페테르부르그 신문, 루스코에 슬로보 신문, 모스콥스코에 베도 모스티 신문 등은 시해 현장에서 목격한 사바틴의 증언과 워베르보고서를 인용하여 연일 이 사건에 깊은 연민을 표시하고 일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 이라고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낭인(浪人)이란
19세기 말 메이지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선낭인들을, 그리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조작한 사코와 같은 대륙 낭인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밀정으로 파견한 이들을 낭인이라 치부했다. 일본에서 ‘낭인’이란 일반적으로 깡패나 무뢰한들을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낭인이라 치부한 것은 일제의 처사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즉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열하게 변명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일본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원된 낭인들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다. 시해에 참가한 낭인들은 군인.경찰도 일부 있었지만 양복과 일본 정통복장을 입고 총과 칼로 무장한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으로 자칭 일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지식층들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낭인들 중 주범 이노우에가 입안하고, 무식한 무장 미우라고로는 행동대장이자 시해 사건의 종범이며,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낭인들을 모으고 동원한 총괄 모집책이었다.
이들 낭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
--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함.
--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겐조는 구 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는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했던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어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수집을 한 기관이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우리 민족의 수탈과 민족 정신을 파헤치는 친일언론의 심장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겐조는 구마모토(熊本)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들은 대부분 구마모토 출신들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자로서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함.
-- 시바 시로우(柴四朗)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 역할을 한 자이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며 1898년 중의원에 당선된 뒤 10선 의원을 지냈다.
그 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오사카 세이키치(大崎正吉), 토우카츠아키(藤勝顯), 하기와라(외무성경찰),기구치(菊池謙讓:신문기자),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한성신보 주필.한학자), 이에이리 가키쓰(家入嘉吉), 시부다니(통역관), 야마타(신문기자), 니니와(의약품판매상), 사사키(의사), 무라이(육군대위), 사토(농민), 마쓰무라(교사), 고바야카와 등 총 48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 후 일본에서 대부분 정치 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일본의 치졸한 사건 은폐 작태
을미사변은 분명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최대 장애로 여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사건을 치졸하게 은폐하기 위하여 당시 그들이 작당했던 술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명성황후 시체를 불태워 없애 버림으로써 사건의 근원 자체를 없애버고자 했다.
2. 명성황후와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대원군에게 사건 전말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자 시도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2시경. 일본군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에 침입한다. 대원군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강제로 끌어내 가마에 태워 대원군을 궁궐로 호위해 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대원군을 데려다 놓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웨베르보고서의 뮤텔 주교 증언서에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옥호루에서 시해한 새벽 6시를 전후한 시각 경복궁 강녕전에 대원군을 강제로 호위해 와서 시해사건을 대원군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려고 획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당시 노스차이나 헤럴드지(紙)도 일제의 이러한 의도를 보도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과 무관함을 보도했다.
3. 공사관에 대기하고 있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6시경)했다. 그는 시해 결과를 확인한 뒤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도록 고종을 겁박하고 있었다. 그는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서명하지 아니한 폐서인(廢庶人) ‘조칙’도 내리게 하였다. 이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로 둔갑시킨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위장된 공문을 외부에 보냈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조선정부가 부정하는 내용의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4. 알렌(H.N.Allen. 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그는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관에 쫓아가 웨베르와 동행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면서 칼을 찬 어지러운 복장의 일인들이 광화문을 빠져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 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 참지 못해 고종이 머물던 방에 들어가자 거기에 미우라가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있던 고종이 알렌·웨베르에게 궁궐에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다. 미우라는 고종을 위로하고 나온 이들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꾸며댔다.
5. 웨베르보고서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뒤 각국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위와 일제의 관련 여부를 추궁하자 미우라는 일제와 무관한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뺌을 했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만하다.” 그러자 웨베르는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라고 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제서야 당황하고 다시 알아 봐야 한다며 회의를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6.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비화되자 일제는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축소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은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하여 일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7. 일본 고꾸민신문(國民新聞)은 10월17일부터 이 사건을 다음과 보도하고 일본국민들을 호도했다. “황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 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8일 새벽 2시40분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을 떠났다. 그를 호위하던 훈련대 1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서대문이 아닌 신궁의 정문 광화문에 도착했다. 대원군 일행은 시위대와 궁내부 앞에 배치된 20명의 무리에게서 소총사격을 받았다. 호위병들은 총을 쏜 뒤 곧 도망쳤지만 궁내부 앞에 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대원군에게 덤벼들다가 사살됐다. 그는 황후가 임명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이었다.”, “궁녀들과 황후의 거처에 다가오는 훈련대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궁궐에 맨 처음 나타난 외교관은 일본 전권 위원인 미우라 고로 자작, 러시아 대리공사 M. 웨베르, 그리고 합중국 공사관의 알렌 박사였다. 그들은 곧 왕을 알현했는데 그때 대원군과 함께 있던 국왕은 생기가 없었다. 국왕은 그 사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한국사람들이 이 비극에 참여했으며 그것은 귀족들의 반목이며 인민과는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급관리들이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아 나섰고 내각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8. 미국 대리 공사 알렌(H.N.Allen) 등 외국공사들이 다이(William McEntyre Dye)·사바틴· 현홍택·의녀·궁녀 등으로부터 직접들은 현장의 상황은 일본군. 영사경찰. 공사관원 등의 일본인들이 황후 시해를 자행하였고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마침내 알렌·힐리어(Hilier,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The NewYork Herald의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okerill) 등에 의해 이 사건이 각국에 알려졌다.
히로시마 재판소 전경
9. 사태가 불리해진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군민은 이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비의 ‘중세적’ 정권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호도하였다. 이어 일제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郎)를 주한변리공사(辨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다시 서울에 파견하는 등 비열한 3류 사무라이 전법인 2중 플레이를 하는 파렴치를 보였다.
10. 일제는 일제를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한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하여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였다. 그러나 히로시마재판부는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들을 全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들이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는 모든 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하여 깡패집단과 같이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등 대대적인 환호를 보냈다. 또한 정신 나간 메이지 일왕은 이들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시종 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치하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1.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국제여론은 잠시뿐이었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은 미니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전말은 밝히지 않고 덮여 버렸다. 미.영국 등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 자제를 지시하였다. 다만 상해의 The North China Herald 같은 신문만이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보고를 토대로 “이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1895. 11. 21)” 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12. 일제는 1929년 명성황후 사건을 영원히 지우기 위해 건청궁 일대의 궁궐을 허물어 버리는 파렴치를 범하였다. 그리고 1939년에는 아예 이곳에다 미술관을 지었다. 해방 후 이곳에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明成皇后殉國崇慕碑)’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명성황후 조난지지비(明成皇后遭難之地碑)’로 대체되었다.
13. 일제는 1910년 한반도를 불법 강점한 이후 이 사건을 조선 내부의 '야만적이고 중세적인' 권력 다툼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역사조작'에서 언급했듯이 한반도를 강제 침탈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한 고종황제를 독살로 제거한 후 우리국민들에게 유약한 왕으로,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권력에 집착한 여인. 친족의 이익을 위해 국가적 이익을 희생한 여인. 투기와 변덕으로 얼룩진 여인.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등등의 수많은 부정적 인식들을 대내외에 유포시켜 살인 위에 또 다른 살인을 저질러 왔다. 일제는 지난 100여 년 간 명성황후를 우리에게 이런 존재로 각인시켰다.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로 인식되도록 유포하여 왔다.
관련자 증언
●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시해사건에 대한 히로시마재판의 공소장 : "히라야마 이와히코 등 13명이 왕후 민씨를 살해했다" , "궁녀들이 서로 자신이 왕후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왕후 민비 나이인 44세 가량의 여자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
●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 영사의 보고서
"계속해서 궁녀를 붙잡아 왕비가 있는 곳과 용모의 특징을 묻던 중 '왕비의 관자놀이에는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증언을 얻어 먼저 옥호루에서 살해 했던 용모 복장이 아름다웠던 3구의 시체를 조사한바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어 궁녀를 확인하여 왕후 민비임을 확인했다"
●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진술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로는 맨 살이다....위를 행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 보니 자그마하고 마른 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으며, 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었다...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 영국 영사관 힐리어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 프랑스‘르 땅’誌 기자 빌따알 드 라게리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 번째 경내의 이중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 조선탐험대
러시아 정부는 1885∼96년 육군 대령 카르네프와 중위 미하일로프군인 등 다섯 명을 중심으로 “조선탐험대”를 구성해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이 정부에 제출한 기록들은 1958년 모스크바 동방문학 출판사에서 러시아인들의 동방순례 시리즈로 출간됨으로써 공개됐다. “내가 본 조선, 조선인”(카르네프 외 4인 지음.A.이르계바예브-김정화 옮김)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책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복을 입고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황비가 궁녀들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인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일본인들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지만 그들은 단번에 칼로 그의 손을 베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가련한 황비는 더 이상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일본인들이 뒤쫓아가 그녀를 잡아 바닥에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을 다리로 세 번 짓누른 뒤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마 후 살해된 황비를 가까운 숲으로 데려가서 등유를 끼얹은 뒤 불에 태웠다." 이들은 "결단성 있고 현명한 황비가 좋게 보였을 리 없었을 것"이라며 일본인들의 행위는 "파렴치하고 역사상 유례 없는 사건"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국토 국권을 침해하고 동양평화를 유린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직접적인 배후라 할 수 있는 일본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를 1909.10.26일 하얼빈역에서 처단하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오를 처단한 이유를 최후진술 첫째 항에서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일본이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였다지만, 당시 조선 민중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한 과정을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토오가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에 명분상의 책임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책임자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토오히로부미 처단 이유에 대한 안중근의사 최후진술 15개항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