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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145주(2012.9.5)
노자 도덕경 읽기 (9)
이태호(한국과정사상연구소 연구원)
Ⅰ. 도덕경 14장, 15장 번역
제14장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시지불견명왈이. 청지불문명왈희. 박지부득명왈미. 차삼자불가치힐. 고습이위일. 기상불교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홀황.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집고지도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夷(이) : 멸하다. 없애버림. 무색
希(희) : 드물다, 적다.
微(미) : 적다. 없다.
搏(박) : 잡다, 취하다.
致(치) : 이루다. 이르다. 도달하다.
詰(힐) : 묻다. 따지다. 따져 묻다.
曒(교) : 밝다. 昧(매) : 어둡다.
繩(승) : 줄, 새끼. 노끈, 묶다. 끝없는 모양
狀(상) ; 형상, 모양
惚(홀) : 흐릿하다.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
恍(황) : 형체가 없는 모양, 미묘하여 알 수 없는 모양
執(집) : 잡다, 지키다. 가지다.
御(어) : 다스릴, 거느릴, 헤아리다.
紀(기) : 실마리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이,희,미)는 개별로 따져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섞여서 일자(一;無)가 된다. 그 위(하늘, 陽)는 밝지 않고 그 아래(땅, 陰)는 어둡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어 이름 붙일 수 없다. 만물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만물이 없는 모양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황홀”하다고 한다. 이것은 맞아들이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 가려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옛날의 도(道)를 갖고서 지금의 유(有, 음과 양)를 헤아리면 옛날의 시작(무, 無)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도(道)의 실마리라 한다.
제15장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예언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 엄혜기약용. 환혜약빙지장석. 돈혜기약박. 광혜기약곡. 혼혜기약탁.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동지서생? 보차도자불욕영. 부뷰불영. 고능폐불신성.
豫(예) : 머뭇거리다. 조심하다.
焉(언) : 어찌. 이에. 에 있어서. 곧
涉(섭) : 건널. 거닐다. 미치다. 이르다.
猶(유) : 오히려. 망설이다. 머뭇거리다. 우물쭈물하다.
兮(혜) : 어조사
隣(린) : 이웃
儼(엄) : 의젓하다. 공손하다. 엄숙하다.
容(용) : 용서하다. 조용하다. 누긋하다.(부드럽고 순하다.)
渙(환) : 흩어지다. 풀리다. 어질다.
將(장) : 장수. 장차. 하다. 흘러가다.
敦(돈) : 도탑다.
樸(박) : 통나무. 본디대로. 생긴 그대로.
曠(광) : 밝다. 환하다. 비다. 공허하다.
混(혼) : 섞다. 섞이다. 흐리다.
靜(정) : 고요하다. 깨끗하게 하다. 깨끗하다. 조용하다. 쉬다. 휴식하다.
淨(정) : 맑다. 깨끗하게 하다. 깨끗하다.
蔽(폐) : 덮다. 숨기다. 가리다. 낡다.
옛날의 훌륭한 학자(도를 체득한 사람)는 미묘함에 아득하게 통달하여서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어 그 모습을 그리기 어렵지만, 억지로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조심스럽기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우물쭈물하기 사방의 이웃을 모두 두려워하는 듯하고, 엄숙하기 초대받은 손님처럼 조용하고, 어질기 마치 봄날에 얼음이 녹아 풀리듯 하고, 투박하기 막 베어 낸 통나무 같고, 텅 비기 골짜기 같고, 섞이기 흙탕물과 같다. 어느 누가 능히 흙탕물을 고요히 만들어 서서히 맑게 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안정된 것을 움직여 천천히 생성하게 할 수 있는가? 도를 보전하는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오직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므로 자신을 낡게 할 수 있어 새것을 만들지 않는다.
Ⅱ. 도덕경 14장 · 15장 해설을 위한 예비지식
제40장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약한 것은 도의 작용하는 모습이다. 세상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하늘과 땅 둘을 낳고 하늘과 땅은 충기를 낳아 셋이 되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끌어안으며 충기로 조화를 이룬다. ⋯⋯
제25장
⋯⋯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道 → 無(沖氣 ; 텅빈 기운) → 有(陰 ; 어둠과 아래, 陽 ; 밝음과 위) → 萬物
‣ 자연(自然) → 도(道) → 하늘(天) → 땅(地) → 사람(人)
Ⅲ. 도덕경 14장, 15장 해설
도덕경 14장에서 노자는 도의 모습을 그려 나타내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노자는 첫째, 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을 수 없어 감각기관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모습을 떠올릴 수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하면 도는 이(夷)라서 보이지 않고, 희(希)라서 들리지 않으며, 미(微)라서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사고만으로 가능한 추상명사로도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사랑, 꿈, 이념, 평화, 아름다움 등과 같은 추상명사라도 일정한 한정형식(限定形式)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도는 일정한 한정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노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관심과 따뜻함이 내포되어 있고 무관심과 차가움이 배척되어 있는 것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만약에 이 개념들이 섞여들면 정의(定義)가 되지 않아 이름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잃게 된다.
그런데 섞여 있는 일자인데, 그 위가 밝지 않고 아래는 어둡지 않다고 한다. 위는 하늘이며, 양으로서 밝아야 하는데, 밝지 않다고 하고, 아래는 땅이며 음으로서 어두워야 하는데 어둡지 않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개념이 섞여서(꼬여서) 계속 이어지니 정의가 되지 않아 이름 붙일 수가 없다. 더군다나 맞이하려고 해도 머리가 없고 뒤따르려고 해도 꼬리가 없다는 것은 한정형식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도에 한정형식을 붙인다면 한정형식을 붙일 수 없다는 한정형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노자는 무상지상(無狀之狀) 또는 무물지상(無物之狀)으로 표현했다. 이 이유를 알아야 도의 실마리(道紀)를 잡을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15장은 도를 체득한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노자가 기술하고 있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그 사고의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다.(微妙玄通. 深不可識) 왜냐하면 사고의 깊이가 드러난다는 말은 한정되었다는 것이고, 한정되었다면 이미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를 체득한 사람의 사고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夫唯不可識)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한정짓기 어렵다. 그렇지만, 노자는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해 굳이 그 모습을 말한다면,(故强爲之容)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노자가 제시하는 도를 체득한 사람은 흔히 우리가 연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과는 다르다. 위의 모습에는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막힘이 없는 지혜와 용기를 지닌 군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동안 얼었던 냇가의 얼음 위를 벌벌 떨면서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모습,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혹시 주변의 사람이 달려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 손님이 되어 처음 간 곳에 실수하지 않을까 말없이 조심하고 있는 모습, 긴장이 풀리면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짓는 모습, 당시의 가장 앞선 문화를 누리면서 세련되어 있는 인간과는 거리가 먼 촌사람 같이 투박한 모습, 꽉 차서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이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빈틈 투성이인 헐렁한 모습, 탁한 세상에는 물들지 않고 고고한 세상에 사는 것 같은 인격자가 아니라 흙탕물처럼 세속에 섞여서 표시나지 않게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노자는 당당하고 멋있는 모습의 인격자를 그리지 않고 왜 이런 모자라는 듯한 모습의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렸을까? 이러한 사람은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인위적인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서열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열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할수록 오히려 자연에서 멀어지고 도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세계에 먹이연쇄가 있지만, 자연 속에서 수적으로 자동 조정이 된다. 따라서 자연에는 가치서열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서열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 그러니 이렇게 만들어 놓은 서열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싸우게 되고 급기야 그것이 전쟁을 불러온다. 노자는 전쟁의 씨앗을 정확히 보았다. 그것은 인위적인 가치서열에 따른 평가를 의심하지 않고, 이 평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싸우는 마음이다. 노자는 도와 자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평가가 있다는 자체부터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물며 그 평가를 잘 받는 일을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잘못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거듭 말하고 있다. 15장에 나오는 사람의 모습이 평가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