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입문기 (2편)
<첫 클로스라인의 추억>
이제 운동복과 레슬링슈즈를 지급받았다고 해서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찬바람이 부는 용인 모현면의 체육관 앞에서 선배들을 기다리는 일은 진짜 고역이다.
열쇠를 잠가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제때 청소를 해 놓고 연습준비를 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고층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듯. 초조한 마음을 언제나 함께 가지고
있어야 만 한다.
저 멀리서 리무진!이 여러대 보였다. 자리잡은 레슬링 선배들에게서 요즘
에쿠스 리무진이 대유행중이었다. 리무진을 자차로 운전하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왠지 그들과 잘 어울려 보였다. 홈플러스에서 사온 냉동만두같은 단단한 몸들이
자동차안에서 갈라져 터져 나왔다.
연습생시절엔 눈길도 주지 않던 이들이 조금씩 살갑게 대해준다. 아는 척도 해주고
이름도 불러주지만, 이제 링위에서의 고난도 시작인 것이다.
"남훈아. 링으로 올라와라"
< 링으로 올라와라 >
재벌회장의 경호원을 거쳐 청와대 경호실에도 지원을 했었던 거구의 선배 B가 나를 지목했다.
"야"가 아니라 내 이름을 불렀다? 긴장감이 뒷목을 타고 하체쪽으로 내려왔다.
수컷은 자신보다 강한 수컷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불알부터 쪼그라든다고 한다.
얼마전 TV 다큐채널에서 봤던 내용을 회상하며, 내 팬티속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TV중계에서 볼 때 링은 엄청나게 넓어 보인다. 저런 거구들이 뛰어다니려면 얼마나 링이 클까?
이 의문은 국민학교때 송신국민학교앞 서울우유에서 WWF프로레슬링을 볼 때 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었다.
<바디슬램을 시전중인 필자>
링.
그러나 실제로 올라와보면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링에서 처다본 바깥세계는 너무나 멀리 있어 보였다. 정말로 멀어 보였다.
링위에 올라서자 로프반동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해봐" 라면서 로프반동에 대한 시범을 보였다.
한쪽 끝에서 반대편으로 하나,둘,셋 세발자국을 뛰더니 몸을 틀어 로프에 몸을 기댄다.
다시 세발자국을 뛰니 다시 반동이 된다.
100kg 가 넘는 체구가 쿵쿵쿵 굉음을 내면서 뛸 때 마다 링이 폭풍속의 돛단배처럼 요동쳤다.
그대로 따라하면서 로프에 몸을 기대자 등이 너무 아프다.
로프는 파이프에 쇠를 감고 다시 절연테이프를 감은 것이라 살에 배기면 생각보다 아프다.
아프지만 아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로프 앞에서 몸을 숙이면서 틀란 말이야. 안 그러면 뒤로 넘어갈 수도 있어
로프의 라인을 몸으로 타란 말야. 튕겨 나오는 게 아니라 반동을 몸으로 타는 거야"
선배의 말을 따라 해보니 리듬을 타면서 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로프에 몸을 기댈 때는 반박자 빠르게
로프에서 튕겨져 나올 때는 반박자 빠르게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잘 하네..자 이번엔 정확히 링 중앙을 향해서 달려와봐"
입문한 지 몇 달만에 처음 듣는 잘한다는 소리.
기운을 내서 힘껏 로프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새 익힌 요령으로
반박자 빠르게 로프에서 탈출 링 중앙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퍼~~~~억!"
갑자기 온 몸이 뒤로 쏠리면서 내 다리가 하늘로 들러지는 느낌이 났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천정의 형광등이 내 눈가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94년에 1100cc 모터사이클로 사고가 나서 날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쾅!
링 바닥으로 완전히 너부러지면서 떨어졌다.
역시 ?오토바이 사고인가?
여기는 도로도 아니고, 난 바이크를 타고 있지도 않았는데, 헬멧도 안 썻는데...
아까 로프반동을 하고 있었는데...
머릿속이 혼란한 틈을 가슴팍에서 시작한 통증이 점차 온 몸으로 퍼지더니
머리쪽으로 삐질삐질 올라왔다.
그 통증은 문틈에 낀 발가락 처럼 , 처음엔 송곳처럼 예민하게 시작하더니
점차 미쳐버린 체육선생의 하키스틱찜질처럼 고통의 총량이 점차 무한대를 향해갔다.
씨바..뭐야...
머릿속에서 생각난대로 육두문자를 뱉으려는데 "뭐"라고 할 때에 아까 아침에 먹은
강남역 바이더웨이 샌드위치가 다시 위를 거슬러 입안으로 올라왔다.
상한 계란국 냄새가 났다. 토한것이다.
< 이게 바로 클로스라인이야 >
"이게 바로 클로스라인이야"
아으...아으..
"그러니까 마. 후방낙법을 제대로 해야지. 레슬링이 쑈냐?"
아으으으
"어이 짱깨.이것좀 치워놔"
당시 합숙소에는 몽골인 1명, 그리고 대만인 2명이 연습생으로 있었다.
선배들은 이들을 모두 "짱깨"라고 불렀다.
중국이 그토록 원하던 "하나의 중국"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선배는 링밖으로 나가더니 웨이트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무런 준비가 없던 상태에서 몸으로 맞아본 클로스라인은 진짜 상상이상의 파괴력이었다.
온 몸의 근육과 뼈를 결대로 분리한 다음, 은나노 세탁기로 2시간 돌린 다음 다시 조립한 느낌이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선배의 클로스라인은 正道가 아닌 邪道의 클로스라인이었다.
클로스라인은 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어깨를 상대방의 어깨에 반박자 빠르게 미트시키면서
(마치 자동차나 오토바이에서 반클러치처럼)
팔로 가슴을 둔탁하게 쳐주는 것이다.이 경우 기술을 맞으면서 후방낙법을 크게 치면 마무리.
물론 안프지는 않지만 이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
120kg이 전속력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다시 110 kg 가까운 거구가 튀어나오면서
그 두꺼운 팔로 정확히 가슴만을 가격해서 힘으로 넘어뜨린 것이다.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뛰어가다가 철봉에 걸려서 넘어지듯한.
이처럼 링에서는 나 자신의 기술연습보다는 주로 선배들의 몸풀이 상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도 나에게 샌드위치는 매우 각별하다.
마치 마르셀 푸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들렌"처럼 잃어버린 기억을 소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가슴밑에서 올라오는 억억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클로스라인,바디슬램 처럼 TV에서 볼 때 별 것 아닌 것 같은 기술들이
온 몸을 휘젓는 고통의 칵테일이란 사실은 점차 나를 주눅들게 했다.
< 마셔라! 고통의 칵테일을! 그래야 남자가 된다 >
하지만 도장에서 들리는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쾅! 쾅! 링 바닥을 울리는 시원한 타격음.
값싼 에나멜로 만들어졌지만 신발장위에 고이 올려진 내 레슬링 부츠를 볼 때마다
여기서 뒹굴고 싶다는 생각도 더 간절해졌다.
전두환이 나오는 프로야구 시구 보다도 더 재밌었던 AFKN WWF 프로레슬링.
자신이 원하던 것을 정말로 20대 후반에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버텨야 겠다는 생각이 쭈빗쭈빗 모현면의 체육관을 찢고 올라가
지나가는 아시아나 비행기의 꼬리날개를 스쳤다.
연습이 끝나고 도장 옆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밥을 정량에 맞게 푸고 숫가락과 젓가락을 정갈하게 배치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외부에서 온 높은 손님 때문에 관장과 합석을 하게 됐다.
식사가 끝날 때 까지 별 다른 말이 없던 관장은 공기밥을 하나 더 시키더니 내 앞에 놓아주었다.
"아 저 배부릅니다만.."
" 더 먹어라. 넌.
몸이 허약하잖아....."
".....네..."
고마운 배려(?)에 가슴 속으로 눈물 흘리며, 밥과 함께 깍두기를 입안에 넣었다.
그날따라 쌀알은 더 석석했고, 고춧가루는 더 매웠다.
- 인간어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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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설 잘보고있습니다~ 잘읽고갑니다
아.넵.~
하나의 중국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ㅎ
ㅋㅋㅋㅋ 몸이 허약하잖아.......... 글도 말도 참 재미있게 잘하시네요. 홧~팅 하십시요.
넵 .UFC도 많은 사랑 바랍니다.
이야~ 글이 참 멋져요. 말발이 오지시네요
네..3편도 곧 올라올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