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Actium) 해전(BC 32)
1. 악티움 해전의 배경
로마 제1의 권력자가 된 케사르가 기원전 44년 부르투스(Brutus) 일파에 의해 암살되자 로마는 혼란에 휩쌓였다. 원래 케사르의 양자였던 Octavianus(BC 63-AD14)가 케사르의 상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Antonius가 케사르의 재산을 인수해 버리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대립 관계에 서게 되었다. 게다가 원로원과 Cicero는 로마의 공화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단독 권력자 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여 이들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Hirtus와 Pansa 등 2명의 집정관(consul)을 수행하고 안토니우스와 일전을 벌였다. Mutina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2명을 잃었지만, 안토니우스 군대를 격파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자 원로원은 그를 집정관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19살에 집정관이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Lepidus에게 피신하여 골 지방의 총독으로 가 있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격파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북으로 이동시키고 있었고,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이탈리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Bonoia 부근에서 조우하여 화해를 하고 2차 삼두정치를 하기로 하였다.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3인은 삼두정에 반대하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추방하고, 그 수장 역할을 하던 Cicero를 살해하였다.
한편 부르투스를 수장으로 한 케사르 암살자들은 기원전 42년 Philippi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이제 삼두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Sextus Pompeius 밖에 없었다. 기원전 36년 10월 메시나 해협 인근의 Naurochus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심복 부하인 Agrippa가 폼페이우스 함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레피두스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군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세력을 강화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의 전격적인 야간 기습 작전으로 패배하여 군대 지휘권을 빼앗기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실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부를 맡아 통치하였고,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을 맡았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Antioch에서 결혼하였다. 이 즈음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본처인 Fulvia와 안토니우스의 동생 Lucius가 집정관 선출 문제와 三頭治者의 지위 문제를 놓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곧 풀비아가 사망하자 그 일당이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였고,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기 위해 로마로 귀국하여 그의 누이 동생인 미망인 Octavia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3년도 못되어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되돌아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당시 로마법상으로 뚜렷한 잘못이 없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것을 두고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영토를 이집트에 양도하였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이 죽고 나면 이집트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남겼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제 로마 제국의 실권을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에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악티움 해전의 발발
안토니우스는 보병 10만명, 기병 1만 2000명과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함대 200 척을 포함하여 총 800척의 함대를 동원하였다. 이에 대해 옥타비아누스는 보병 8만명, 기병 1만 2000명, 군함 400척을 동원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 코린트만 입구에 위치한 악티움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듬해 봄에 옥타비아누스도 악티움 북부에 진지를 구축했다. 양 진영은 수개월간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지상군 위주의 전투를 구상하였으나, 말라리아와 식량 부족, 본국인 로마에 대적하는 것에 대한 병사들의 거부감 등으로 도방병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소형 함선을 불사른 뒤 남은 함선 170 척과 이집트 함선 60여척만으로 9월 2일 아침에 기동하였다.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8단 노선과 10단 노선으로 이루어졌으나, 옥타비아누스 함선은 소형선 위주였다. 나우로쿠스 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한 적이 있는 아그리파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지휘하고 있었다. 아그리파는 함대를 3개로 나누어 자신이 좌익일 맡고, 우익은 Lurius, 중앙은 Arruntius에게 맡겼다. 안토니우스도 로마 함대를 3개로 나누고 이집트 함대를 예비전대로 사용하였다. 안토니우스 자신은 우익을 맡고, 중앙은 M. Octavius가, 좌익은 Sosius가 각각 지휘하도록 하고, 이집트 함대는 클레오파트라가 맡았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지휘하는 우익으로 하여금 아그리파 측의 좌익을 포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익과 중앙 사이에 생기는 틈을 이집트 함대가 메꾼다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아그리파도 자신이 지휘하는 좌익으로 하여금 안토니우스 측의 우익을 포위하려고 하였다.
3. 악티움 해전의 전개
양 함대는 오전에는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나, 정오경에 안토니우스 진영의 왼쪽에서 북풍이 불자 대치 상태가 깨어졌다. 안토니우스가 북풍을 타고 좌익을 전진시키자, 아그리파는 후퇴하다가 적의 바깥 쪽으로 우회하려고 시도하였다. 안토니우스 측은 투석기를 갖고 돌을 쏟아 부었고, 아그리파는 불이 붙은 목탄과 기름 항아리를 던졌다. 이 해전에서 양 진영은 충각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속력이 너무 느렸고, 아그리파의 함선은 안토니우스 함선의 현측이 두터워 충각전술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안토니우스 함대의 중앙과 좌익 함대가 육지로 향하였다. 개전 시부터 염려하던 내부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애초 약속했던 대로 제2 작전을 개시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후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뒷바람을 맞으며 안토니우스가 격전을 벌이는 곳으로 항진하였다. 아그리파 함선들은 돌진해 들어오는 이집트 함선을 피하여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그러자 안토니우스의 함대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합세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함대를 되돌리려고 시도하였으나, 맞바람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자 침로를 이집트 쪽으로 향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도망치는 휘하 함선들을 추격하다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랐다[해양영화의 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 참조]. 이로써 이집트 함선 100여척과 안토니우스의 함선 40여척이 뒷바람을 맞으며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다.
4. 로마 제정의 시작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지중해 동부 지역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복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잔당을 격파하고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다. 이로써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은 종말을 고했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의 일인 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진지터에 Nicopolis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의 공화당에 안토니우스 함선의 충각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4년마다 아폴로 축제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지중해는 로마의 ‘우리들의 바다’(Mare Nostrum)이 되었다.
로마로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원 명부에 처음으로 등재되는 ‘제1시민’이란 뜻으로 Pinceps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에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비상대권을 원로원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사권과 속주 통치권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하고 케사르처럼 제위를 탐하지 않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Augustus"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린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장의 자격으로 합법적으로 로마를 통치하였으며, 실질적인 의미에서 황제처럼 군림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식이 없어 후처가 데리고 온 Tiberius를 양자로 삼은 뒤 기원후 14년 제위를 물려주고 76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