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하며
박찬란
한국 최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을 일주일 앞둔 평일 아침이다. 남편은 복 지으러 가자며 외출할 것을 제안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을 향해 하늘이 큰 복을 준다고 한다. 복 짓는 일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과 공(功)을 들이는 것이리라!
일 년 중 이맘때의 가을 들녘과 산천은 어디를 가든 세수를 한 듯 청신한 풍경이다. 시선 머무는 곳마다 조상의 음덕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세상 만물이 저마다 넉넉한 풍요를 느끼게 한다. 매년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고향에서는 사촌 형제끼리 만나 얼굴도 볼겸 벌초모임을 가져왔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모두 개인 사정 때문에 올 수 없었기에 부득이 남편과 둘이서 선대 묘소를 벌초하기 위해 고향 산천을 찾았다.
예초기의 시동을 집에서 시험 삼아 한번 해보고 왔건만 벌초를 하기 위해 산소 앞에서 남편은 시동을 걸어본다. 하지만 “엥~ 뚝!” 이러기를 여러 번 벌써 두 시간째 저러고 있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쓰지 않는 기계라서 그런지 기계는 쓸 때마다 잔고장이 생기기 일쑤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남편 머리가 익는다. 나는 남편의 포기할 줄 모르는 성미를 잘 아는지라 군말 없이 지켜보았다.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의 궁리를 하더니 남편이 드디어 시동을 다시 건다. “엥, 탕탕탕…” 드디어 기계가 작동했다. 답답하던 속이 '뻥!' 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15kg이나 나가는 무거운 기계를 어깨에 메고 남편은 잔디를 조심스럽게 깎아 나간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잡초를 호미로 캐낸다. 그러다 한 귀퉁이를 깎은 자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갈퀴로 잔디 무더기를 긁어낸다. 아주 박박 긁어내야 잔디가 잘 자란다. 깎은 잔디를 말끔히 걷어내지 않으면 잔디가 비를 맞으면 썩기 때문이다. 이렇게 깎은 잔디는 내년 봄까지 파랗게 잘 자란다. 시간 날 때마다 자주 가서 잡초를 뽑아주고, 일 년에 서너 번은 찾아가서 관리해야 산소 잔디가 남이 봐도 부러울 정도로 잘 키울 수 있다. 모든 게 정성 아닌가.
그렇게 우리 부부는 벌초 4장을 모두 마쳤다. 벌초를 마치고 다시금 둘러보니 말끔히 정돈된 푸른 밤송이 같은 능(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한 것이 아닌가. 아담하고 매끈한 것이 마치 갓 목욕하고 나온 아이 얼굴처럼 상쾌해 보인다.
명절을 맞기 전에 부모님 산소를 찾아 깨끗이 정리하고 일 년 농사인 오곡백과로 차린 차례상을 가장 먼저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나서 음복을 하는 것은, 백의민족이 효를 지향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정신이다.
집 밖에서 농사를 지을 때나 오늘처럼 벌초할 때 남편을 향한 나의 느낌은 다르다. 평소와 아주 다른 색다른 매력이다. ‘역시 남자는 힘이다.’라는 생각 말이다. 힘이 좋으니 일도 쉽고 빠르게 잘한다. 남편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저력은 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 덕분에 더욱 그러하리라.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남편의 착한 심성을 발견한다. 내세(來世)에 계신 부모님 집 단장이 그렇게 흐뭇한지 남편은 온종일 천상의 나팔꽃 모양이다.
이 남자를 몇 번 만나며서 강한 믿음이 생겼기에 겁 없이 사랑했다. 이곳이 처음에는 낯설고 물 선 타향이었지만 지금은 제2의 고향이 되어 완벽하게 나는 뿌리를 내렸다. 그 결과, 다섯 꽃송이가 활짝 피어 저마다 자신의 열매를 뜨거운 태양 아래 익히고 있다. 모두가 인연과 신의 뜻이 있었기에 내가 이곳에 왔고 사랑을 위해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순간순간 마음의 시계추는 수시로 흔들린다. 아직도 내 수양이 도(道)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초기가 앵! 하고 울리고 지나갈 때 나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밭그늘에 앉아 쉬면서 사색에 든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부모님을 생각한다. 시집와서 십 년 넘게 가까이서 함께 생활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녹색 집 안에 계시기에 생멸의 무상함을 느낀다.
육신의 그릇이 사라졌기에 보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때가 종종 있다. 남편의 모습에서 시아버지의 사상을 만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부모는 지금의 나의 뿌리이지 않겠는가. 그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 존재감은 사실 무의미하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전자는 나뿐 아니라 자식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내 뿌리의 열매가 아니던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 부부도 저런 초록집으로 이사를 하여서 오 남매의 배웅을 받으며 또 다른 불멸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의 소리를 들으며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리라. 지금과 같이, 변함없이-
부모는 나의 뿌리요, 형제는 나의 수족이고 자식은 내가 그토록 바라는 열매이자 미래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 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뿌리없는 나무로 살고자 한다. 금의야행이다. 부가 무엇이며 명예가 어찌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벽이 없는 집이 없듯이 부모없는 자신은 진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자식 모두가 효자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근본은 반드시 알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리라. 부모는 나의 미래이고 자식은 나의 과거모습을 답습하는 것 아닌가.
모든 식물은 태양을 바라보며 살고 있듯이 사람도 사랑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사랑 안에서 생활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온 생애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랑 없는 생은 속이 텅빈 쭉정이 삶과 같다. 그 가운데 부모님 사랑과 은공을 모르고 산다면 그 생이 아무리 길고 화려해도 끝내는 사막에 사는 잡초와 같은 결과를 얻으리라. 이와같이 신이 우리를 지상에 빈 손으로 내 보냈을 때에는 많은 의미를 알게 하는 존재의 뜻이 반드시 있으리라.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인공인 미하일이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하는 의문을 나도 품어본다. 죽음의 천사였던 미하일이 하느님의 분부를 어기고 세상에 떨어져 생의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 숙제 아니던가. 그 가운데 신의 가장 큰뜻은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의 보은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 아니겠는가. 충만하고 진실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그 사랑을 나눌 줄 알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이웃사랑을 통해 봉사의 기쁨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발견할 때 비로소 생의 보람을 느끼는 일일 것이다. 부모는 생의 원천이자 사랑이 충만한 자리다. 또한 나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선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조건이자 아주 정직한 일기일회(一期一會)로 지금 이 시간 자신이 복지은 크기만큼 다가올 미래의 삶의 가치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곧 효를 통해 참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내 삶의 뿌리를 깊고 풍성하게 번영시키는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이다.
첫댓글 조상의 산소관리와 부모님 은혜, 나의 출생과 삶 그리고 마침에 대한 박찬란선생님의
의지와 견해를 소신으로 표현하신 글 올려주셔서 잘 읽고 공감합니다.
이원웅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감사합니다. 제 마음을 잘 갈파하셨네요.
날씨가 많이 무덥습니다. 건강한 여름 나시길 빕니다.